저녁거리에 깔린 어둠을 밟고 두 어깨에 세상 시름을 다 짊어진 듯한 남자가 두 눈 밑에 움푹 팬 고달픔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쑥인 채 들어왔다.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 사이 구석진 자리 하나를 택해 낙엽(落葉) 떨어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할머니 여기 소주 한 병만 주세요!” “니가 꺼내 처먹으면 되지 나이들은 노인네 꼭 시켜먹고 싶나?“ “아닙니다! 제가 꺼내 먹을게요!“ 주섬주섬 일어나 냉장고 안에서 소주(燒酒) 한 병을 꺼 내와서는 국밥 국물을 탁자 끝에 밀쳐놓고 연거푸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있었다.
그 때 남자에게 봄소식 같은 벨이 울렸다. “우리 예쁜 공주님 아직 안 잤어? 아빤 회사지. 아빠가 없으면 이 회사가 안 돌아가서 늦게까지 일하는 거야“ “오늘이 아빠 생일(生日)이라구?”
남자는 잠시 어렴풋한 기억(記憶)을 더듬어 보더니 자신의 생일이 오늘인 걸 안다 “혜진이가 아빠 줄려고 편지(片紙)도 썼다구...? 그래 읽어봐라“
남자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에 한 방울 두 방울 감춰뒀던 눈물을 술잔에 채워 가더니 결국에 넘치고 만다! “우리 혜진이 학원비가 세 달이나 밀렸다구? 걱정하지마 아빠가 금방 해줄게” “직원들이랑 회사 근처 식당(食堂)에 밥 먹으로 왔어.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중요(重要)한 서류라 늦었어. 문단속 잘하고 먼저 자” 전화를 끊은 남자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남은 술잔을 비워 나갔다.
그러다가 핸드폰 액정에 비친 아내와 딸의 사진에 어느새 가슴 저 밑바닥 끝에 감춰뒀던 눈물이 사나이도 모른 체 흘러 내렸다.
그 때 남자 앞으로 고기가 수북이 담긴 접시 하나가 놓이고 있었다. “할머니 저 이것 시키지 않았는데요!“
“니 완전 연기대상감이데이. 산전수전 다 겪은 이 할망구 눈에 눈물도 맺히게 하고.“ “죄송해요 할머니..” “이건 남자 연기대상 한테 주는 이 할매표 상이라고 생각하고 묵어라“
연기(演技)도 잘 묵어야 하는 거라며 농담 같은 진담(眞談)을 던져 놓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님들이 “자 제가 따라주는 생일 축하주 한 잔 받으세요! 다른 테이블에 나이 지긋한 노신사 한 분은 “할매요 저 손님 술값은 제가 내겠심더“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그냥 공짜로 주는 거 아닙니다. 내일(來日)부터 더 열심히 뛰어 다니라고 내드리는 겁니다!“
실직(失職)을 하고 아내와 딸 몰래 대리운전을 하고 있었던 남자는 그 일마저 허탕 치는 날이 많아 허기진 마음을 달래려 들어온 국밥집에서 이런 후한 대접을 받는 게 가슴이 벅찼다.
그래서 또 다른 눈물을 술잔에 떨어뜨렸던 것이다. “남자가 그리 찔찔 짜서 어찌 이 험한 세상을 살아 가겠노!“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사람이 동물(動物)보다 나은 게 뭔지 아나?” “•••“ “웃을 줄 아는 기다. 이왕 사는 거 남 눈치 보면서 주눅 들지 말고 웃으래이“ 지금껏 지내온 세월(歲月)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조그만 위안(慰安)에도 저렇게 눈물 흘리나 싶어서였는지 애처로운 듯 할머니는 사나이를 바라 봤다.
“내도 한잔 부 봐라“ 술잔이 오고 가며 이런 저런 남자의 넋두리를 받아주더니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군지 아나? 다시 시작하길 두려워하는 사람이데이” “맞심더" "할매 말씀이 정답이라 예“
옆 좌석 손님들도 할머니 말씀에 응원을 보냈다.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 “포기(抛棄) 안 하면 아직 실패(失敗)한 게 아이다 알겠제?“ “네 할머니.“ 할머니는 잠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지 말라는 듯 사나이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이 할매가 선물(膳物)하나 주꾸마“ "......." 할머니의 말에 가게 안 손님들이 귀를 세웠다. 할머니가 말을 시작(始作)했다. “대리운전 해가꼬 얼마 버는지 모르겠지만 좋은데 취직할 때까지 우리 국밥집 주방(酒房)에서 일하면 어떻겠노“
“와우.....” “욕쟁이 할매 최고” 가게안의 손님들이 떠나갈 듯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할머니는 햇살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좌절(挫折)은 반드시 희망(希望)이란 친구(親舊)를 데리고 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