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북부여는 494년에 고구려에 투항했다고 알고있습니다. 물길 등의 발호 때문으로 다들 추정하죠.
그.러.나...
국강상광▨토지호태성왕(國𦊆上廣▨土地好太聖王)에 이르러 조부가 [태왕의] 은혜를 받들었던 연유로 노객 모두루에게 교를 내리셨고, 교를 내려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로 보냈다.
모두루묘지명에서는 좀 고구려가 부여에 영향력을 행사한 정황이 나옵니다. 바로 광개토대왕이 모두루에게 하사한 북부여수사라는 지방관직이죠.
그러면 왜 부여는 고구려에게 남만주의 지배권을 빼앗기고 명맥만 남은 걸까요? 원흉은..모용선비의 모용외였습니다.
太康 6년(A.D.285; 高句麗 西川王 16)에 이르러 慕容廆(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夫餘]王 依慮(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沃沮(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모용외는 부여를 침공해서 부여왕 의려가 자살하게 만들 정도로 부여의 타격이 컸습니다.
이후에도 또 전연의 침입을 받고 부여는 그로기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 부여의 난처한 상황을 이후 4세기 고구려가 잘 이용했던 거 아닌가 싶습니다.
초기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부여....하지만 동시에 모용외와 전연의 침입을 받아서 완전히 무너져버렸던 겁니다 ㅠㅠㅠ
첫댓글 부여는 가장 큰 우호세력인 한위진 등 중국왕조의 몰락, 남쪽 고구려의 성장, 속국인 읍루의 이탈, 유목 세력의 남하와 성장 등을 사방에서 맞이해야 하는 지정학적으루 매우 불리한 위치라 어쩔 수가 없었을 거 같아요.
부여의 세력이 고조선 때 조선과 비등할 정도로 컸으면 압록강의 맥족과 함경도의 예족까지 장악해서 부여가 고구려를 대신하는 나라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비등은 커녕 중국과 맞다이 뜨던 조선에 비해 권력구조나 모든 부분이 떨어졌을 거 같아요.
조선과 동호가 몰락하고 사방이 비어있는 상황에선 나름 강국행세를 했으나 몰락한 동호가 선비가 되어 나타나고 남쪽에선 조선 대신 고구려가 성장하니 쭈구리가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을 거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