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신라 최초의 종을 만나러 상원사에 가다
젊은 날에 문화유적 답사팀을 따라서 상원사를 찾아 간 일이 있었다. 최초의 신라 종이고,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종이니 답사지로서는 최고의 명소이다. 그러나 상원사는 오대산의 너무 깊은 골짜기에 있고, 찾아가는 길도 수월하지 않아서 이후로는 찾아간 일이 없었다. 예전에 답사 버스를 타고 찾아갔던 일은 분명한데 세세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 옅은 기억에 의하면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흘렀고, 개울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은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풍광 때문에 가까운 날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이제는 답사 버스가 상원사에 간다고 해도 따라 나설 자신감이 사라지고 없다.
이번 여름의 가족 나들이 장소를 평창으로 정하고, 봉평의 리조트에 자리 잡았다. 아이들을 위한 계획을 짜두었으니 노인네가 할 일이 없다. 월정사와 상원사에 들리고 싶다 하였더니 사위가 운전을 하고, 딸내미가 따라 나서겠다고 하였다. 차를 없애버린 나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였다.
내 머릿 속의 상원사는 월정사에서 2km 거리라는 것이 박혀 있다. 집사람은 안내판을 보니 9.2km라던데, 한다. 안내판을 보았다는데도 내 머릿 속의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차를 타고 가면서 2km 거리는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다. 9.2km가 맞다. 집에돌아와서 옛답사 자료를 보니 10km였다. 그런데 내 머릿 속에 왜 그런 기억이 각인되어 있을까.
중국의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다. 우리의 오대산에도 당연히 문수보살이 머무실 것이다. 열목어가 자란다는 개울물이 너무 시원해보여 풍덩 뛰어들어 목욕이라도 하고 싶다. 목욕말이 나왔으니 좀 더 얘기를 하자면, 세조대왕도 이곳을 지나다가 개울물에 들어가서 목욕했다. 이때 동자가 나타나서 등을 밀어주었다. 세조는 동자에게 등을 맡기면서,‘ 행여 누가 묻거든 상감의 등을 밀어드렸다고는 하지 말라.’ 했다. 이에 등을 밀던 동자가 ‘혹시라도 누가 등 밀어주는 사람을 말하거던 문수동자를 만났다고는 말하지 마세요.’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 전설은 오대산-문수보살-세조-상원사를 연결해주면서, 이 절이 세조의, 조선 초기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암시한다. 조선시대의 가혹한 억불정책에서도 상원사가 살아 남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상원사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상원사에는 봉덕사 종(에밀레 종)보다 더 앞선 시기에 만든 신라 동종이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신라 종은 우리나라에 6개만이 남아 있다. 완벽한 것은 3개로서, 상원사 종, 봉덕사 종, 그리고 충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 종이다. 이 때문에 상원사 동종은 문화유적으로서 가치가 아주 높다. 문화유적 답사탐이 반드시 찾아가는 곳이지만, 내가 젊은 날에는 대구에서는 먼 곳이고, 교통도 불편하여 찾기가 쉽지 않았다.
상원사 종은 신라 종으로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종 중에 제일 먼저 만들었다.(705년) 에밀레 종이라는 봉덕사 종은 725년이다. 오래되었을 뿌아니라 제일 아름다운 종이라고 한다. 비천상, 주악상 등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종의 몸체 아래와 윗부분이 안으로 살짝 좁혀지는 모양이다.
그곳을 지금, 사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주변의 뻬어난 경치도 구경하면서 찾아갔다. 찻길로도 30분이나 걸렸다. 그런데도 내 기억은 2km를 쉬엄쉬엄 걸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모를 일이다. 걷지 않았음이 분명해보인다.
상원사도 여뉘 유명 사찰과 하나 다르지 않다. 예전의 기억으로는 창고 같은 법당과, 종을 보관하는 전각 안을 들창을 통해서 들여다 보았다 싶은데, 지금은 문수전이라는 주불전을 위시하여 온갖 누각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주불전이 ‘문수전’인 것이 특이하기 해도, 문수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가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특이한 전각 배치도 아니다.
종을 보존하는 종각도 새로 지어서 유리 상자 같은 곳에 보존하여 우리는 눈으로만 보도록 하였다. 바로 옆에 모방하여 만든 청동 종이 걸려 있어, 우리 중생도 종을 칠 수가 있었다. ‘비천상’이며, 경주의 에밀레 종과도 닮았다. 내 딸래미는 종각 옆의 의자에 앉아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는 설강 그리고 사위와 함께 문수전의 문수보살을 뵈오러 갔다. 절 마당을 건너는 동안에도 내리쬐는 햇살이 너무 뜨겁다.
상원사를 창건한 스님은 신라 왕자로 출가한 보천과 효명이다. 성덕왕은 705년에 절을 세워 법당을 지어서 ‘진여원’이라 하고, 문수보살에게 올리는 의례를 올렸다. 진여원이 오늘의 상원사의 시원 사찰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거의 없다. 산골의 이름 없는 사찰로 겨우 유지되었으리라 한다.
문수보살의 복장 유물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인 1466년에 문수상을 만들어서 모셨다고 적혀 있다. 부살상이 만들어진 년대가 분명하게 밣혀짐으로 조선 초기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국보 221호로 지정하였다.
조선 초에 사원의 중창과 유지에 조선의 왕실이 많은 재정을 지원하였다. 억불정책을 내건 국가가 할 일이 아닌데도, 왕실에서 버젓이 하는 것을 보면, 나라의 상류층과 민초들의 삶의 방식이 다른 듯이 보인다. 상류충의 특권이 많을수록 민초들의 삶은 더 고달파진다. 절을 다녀보면 대체로 소외된 하층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는데------, 세조가 죽은 그 해에 아들 예종이 세조의 원찰로 삼았다.
내가 신라 종을 이야기하다 보니 오대산 너머에 있는 선림원지가 생각난다. 태풍 매미가 나라를 휩쓸고 지나가던 바로 그 해에 집사람과 승용차를 운전하여 찾아간 길이 있다. 그때는 월정사만 방문하고, 인제에서 오대산을 넘어서 찾아갔다. 길을 아르켜주시던 분이 산길이 너무 험하다면서, 이 길을 운전해서 넘어가면 운전실력이 한 단계 좋아진다고 하던 말도 생각난다. 그때의 기억들이 너무 생생하여 겨우 몇 년 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태풍 매미의 자료를 찾아보니, 2003년 9월 12일이라고 하였다. 어이구야, 그러면 20년 전의 일이네. 앞으로는 찾아갈 날이 없을 것 같다. 옛 그날이 너무 생생하여 선림원지 방문 이야기는 20년 전에 집사람과 찾아갔던 일로 꾸며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