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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16:1-13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13 / 눅 16:1 [약삭빠른 경리]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부자가 경리 한 사람을 고용하여 자기 회계 사무를 맡겼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이 경리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2) 그래서 주인이 그를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자네가 내 재산을 훔쳐 낸다는 말이 들리는데 어떻게 된건가? 장부를 정리해서 제출하게. 자네를 해고시켜야 하겠네.' 3) 그 경리가 혼자서 생각하였다. `이걸 어쩌지, 내가 여기서 쫓겨나게 됐으니.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하구나. 4) 옳지, 알았다! 이렇게 하면 내가 여기서 떠나도 나를 돌보아 줄 친구들이 많아지겠지!' 5-6)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렀다. 첫번째 사람에게 `당신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소?'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내가 진 빚은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자 경리가 말하였다. `여기 당신이 도장을 찍은 문서가 있소. 이것을 찢어내버리고 그 절반만 빌린 것처럼 다시 쓰시오!' 7) 또 다음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나 빚을 졌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밀 백 섬이오'하고 대답하였다. 경리가 말하였다. `여기 당신의 문서가 있으니 이것을 가져가고 대신에 여든 섬이라고 쓰시오.' 8) 주인은 그 정직하지 못한 경리의 약삭빠른 짓을 보고 감탄하였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거래를 하는 면에서는 신앙이 두터운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다. 9) 그래, 그 더러운 돈으로라도 한번 친구를 얻어 보아라, 돈이 다 떨어지면 그 친구들이 정말 너희를 잘 대접하겠지.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 10) 정말 그럴 성 싶으냐? 너희가 작은 일에 정직하지 못하면 큰 일에도 정직해질 수가 없다. 만일 너희가 사소한 것을 속여 빼앗으면 더 큰 책임을 졌을 때 정직하게 해나가지 못한다. 11) 그리고 만일 너희가 세상 재물을 다루는 데 신용을 얻지 못한다면 하늘의 참된 재물을 믿고 맡길 수 있겠느냐? 12) 또 만일 너희가 남의 돈에 대해서 신실하지 못하면 어떻게 너희가 차지할 몫을 받을 수 있겠느냐? 13) 너희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에게 충성을 하거나 아니면 한 사람은 존중하고 다른 한 사람은 멸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청지기 비유를 통해 재물의 올바른 사용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낭비하는 청지기(1-2) 부자 주인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합니다. 그 소문을 들은 주인은 청지기에게 직무 해고를 통보합니다. 청지기의 헬라어 오이코노모스는 집과 관리하다의 합성어로 한 집의 재산이나 집안의 전체 관리를 위탁받은 고용인입니다. 주인의 것을 낭비한다는 것은 주인의 목적과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헛된 것에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재능, 시간과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맡기신 분깃을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청지기라는 것을 명심하고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맡겨진 것에 대하여 지혜로 행하고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엡 5:16).
불의한 청지기(3-8) 청지기는 직무를 빼앗긴 이후에 살아가야할 길을 모색하다가 할 일을 찾았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자기의 권한으로 빚을 삭감해 줍니다. 삭감해주는 목적은 차후 그들의 보응을 기대하며 자신의 미래에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청지기의 행동을 본 주인은 청지기의 꾀를 칭찬합니다. 옳지 않은 방법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청지기의 지혜는 곧 부자 주인에게 자비를 기대하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또한 빚진 자들에게는 호의를 베푼 것으로 주인의 위상을 높여주는 처사가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곳에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마 6:20). 이웃에게 구제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통로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충성된 청지기(9-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불의의 재물을 사용해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십니다(9). 무엇보다 영혼구원을 위해 사용된 물질은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맡은 것의 크고 작음이나 중요 여부가 아닌 주인의 뜻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고전 4:2). 하나님은 창조주 유일신이십니다. 재물은 맘몬(Mammon)신입니다. 주인으로 모실 섬김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아닌 사용 대상입니다(13).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어야 합니다.
적용: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뜻에 합당한 청지기 직무를 하고 있습니까?
한 소년이 낡은 운동화를 신은 채 축구 시합에 나갔습니다. 발끝이 벌어진 신발을 보고 친구들이 웃었지만, 소년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 신발엔 지난 여름의 땀방울과 눈물, 그리고 아버지의 손길이 스며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합이 끝나고, 소년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날 누군가 말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제일 낡았는데 제일 멋져 보였어.” 가치란 겉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로 결정됩니다.
< 설 교 >
호크마 주석
=====16:1
어떤 부자 - 현장에 관리를 둔 대지주(大地主)이거나 (Jeremias) 혹은 당시 갈릴리에 흔하였던 부재 지주(Grundmann)를 가리킨다고 본다. 아무튼 사람들이 그에게 빚진 정도를 보아 그는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 한편 부자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에는 많은 의견듸이 있다. 알포드(Alford)에 의하면 '그 부자'는 이 세상의 아들을, 메이어(Meyer)는 맘몬(돈의 신)을,올스하우젠(Olshausen)은 마귀를,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로마인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든 간에, 본 비유의 초점은 위기의 때를 맞아 지혜롭게 재물을 융통한 청지기에 맞춰져 있다.
청지기 - 이 말은 맡은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탁을 받은 '고용인'이나 '대리인'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말이다.KJV에는 '간사' 혹은 '급사', '집사'의 뜻인 '스튜어드'(steward)로 번역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조일 수도 있으며(창 39:4-6) 또한 자유인으로서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은 자일 수도 있다.그런데 이 비유에서와 같이 그들은 맡은일의 성격상 재산을 관리하는 동안 부정(不正)을 저지를 가능성이 항상 있었다.한편 이 청지기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도 그의 주인인 '어떤 부자'에 관한 의견과도 같이 다양하다.알포드(Alford)에 의하면 청지기는 모든 제자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한편 바리새인 혹은 가룟 유다 심지어는 본디오 빌라도를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그러나'어떤 부자'와 마찬가지로 이'청지기'또한 개별적으로 특정 사람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다만 예수는 당시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본 비유와 같은 전체적 상황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교훈하고자 하셨을 것으로짐작 된다.
허비한다 - 헬라어 '디아스코르피조'(* )는 돈이나 재물 등을 마구탕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 청지기는 횡령 혹은 부실 경영을 퉁해 주인의 재산을 축내었으리라 보여진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고대 근동사람들은 부기(簿記)나, 규정된 회계 감사등을 몰랐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셈(account), 증서(statements) 등의 용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도 이미 장부(帳簿)등은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2
이 말이 어찜이뇨 - 헬라어 '티 투토'(* )에 대해서는 (1) '이것이 무슨 말인가?', (2) '왜 내가 이것을 듣게 되었는가?'등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단순히 주인이 듣게 된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들은 내용의 일부 혹은 전부를 사실로 여기고 '왜 그러한 잘못을 행했는가'라고 질책하는 말이기 때문에 (2)의 해석이 보다 정확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 '보던 일'의 헬라어는 '로고스'(* )이다. 로고스는'말씀', '이성', '사건' 등의 뜻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계산'(account)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재산 목록과 장부 및 각종 문서를 작성, 보관하는 일까지 책임맡고 있는 관리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셈하다'의 뜻인 '아포디도미'는 단순히 계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산해서) '넘겨주다', (증서를) '양도하다'(render,KJV)는 의미까지도 내포된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 전체는 '네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사무를 청산(淸算)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는 의미가 된다.
=====16:3
땅을 파자니 - '파다'의 원어 '스카프토'(* )는 일반적으로 정신 노동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육체 노동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육체 노동 중에서도 농사짓는 것을 의미한다.
빌어 먹자니 - '에피이테오'(* )는 '위를(위에)'이라는 뜻의 '에피'와 '요청하다'는 뜻의 '아이테오'의 합성어로서 '구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삶의 위기의식을 느낀 칭지기의 독백은 무엇을 해도 절망적이기만한 급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한편 그 청지기는 비록 부정을 저질렀지만 신속한 판단과 빈틈없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즉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파악하고 즉시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결단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결단은 곧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항상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바를 제시해 주고 있다.즉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회피하거나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있고 결단력 있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사실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특징 짓는다면 그것은 결단(決斷)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고된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16:4
직분을 빼앗긴 후에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흥청망청 써 버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주인은 그를 해고하게 되고 그는 난처한 상황에서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자신이 부여받은 힘과 지혜와 재물 등 모든 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능력에 의해 스스로 획득한 것인양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하며 우리 인간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있다(창 1:28-31; 욥 1:21).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낭비라는 삶은 곧 이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교만한 소행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청지기의식(stewardship)을 가지고 겸손한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19:13 ; 마 25:14, 15; 고전 6:20; 벧전 4:10).
=====16:5
빚진 자 - 여기서 주인과 빚진 자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빚진 자들은 아마도 토지수확의 일정량을 소작료로서 지불해야 될 소작인들이거나 또는 채무 증서를 쓰고 곡물을 받은 도매 상인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청지기나 빚진 자들이 이미 전에 서명한 '증서'를 위조(僞造)할 수 있었다고(6, 7절)한다면 아마도 이 빚진 자들은 청지기와만 계약을 맺은 것 같다.
=====16:6
기름 백 말 - 빚을 기록한 증서는 헌금이 아닌 물품으로 적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자의 실제적인 양을 숨기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W.L.Liefeld). 본문에서 빚진 자들의 빚진 수량은 대단히 많았는데 예컨대, 밀 백말은 약 백 에이커(acre)의 땅에서 산출되는 양이라고 한다. 요세푸스(Josphus)에 의하면 '말'의 뜻인 헬라어 '바토스'(* )는 대략 23리터(l)에 해당된다. 따라서 기름 백 말은 약 2,300리터에 달한다. 팔레스틴에서 감람나무 한그루의 평균 수확량은 올리브 열매로 120Kg, 기름으로는 25리터가 된다. 그러므로 기름 백말은 감람나무 약 92그루의 소산에 해당하며, 돈으로 환산하는 경우에는 천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증서를 가지고...쓰라 - '증서'의 뜻인 헬라어 '그람마(* )는 '문서', '글'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 절에서는 '채무 증서'를 가리킨다. 본문의 청지기는 채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임대차 계약서나 채무 증서 또는 약정서롤 보관하고 있었는데 증서를 채무자들로 하여금 자필로 다시 고쳐 쓰게 하거나, 새로 쓰게함으로써 속임수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한편, 율법에 의하면 이자를 받는 행위가 불법으로 되어 있으나(출 22:25; 25:36, 37; 신 15:7, 8; 23:19, 20)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본문의 청지기 또한 주인 몰래 이자를 착복해 오다가 궁지에 몰리자 그 이자부분 만큼 탕감해줌으로써, 빚진 자에게 선심을 쓰는 한편 주인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6:7
밀 백 석 - '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로스'(* , 히브리어 '코르'( )에서온 마른 곡식을 재는 단위)는 약 27,500Kg으로 42 헥타아르 정도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밀 1 코르의 표준가격은 금 25 데나리온이며 은화로는 25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따라서 밀 백 석 은 2,500데나리온에 해당된다.
팔십 - 기름을 백 말 정도 빌린자에게 그 절반인 오십 말로 공재(控除)해 준것에 비해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5분의 1정도인 20석만을 공제해 주었는데 이는 두 물품의 상품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밀이 기롬보다 훨씬 비쌌다. 빚진 자들이 가각 삭감받은 수량 즉 기름 50말, 밀 20석을 돈으로 환산하면 모두 각각 5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오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금액은 1데나리온이 임금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노동자 한 사람이 약 16개월 둥안 일해야 벌수 있는 금액이다.
네 증서를 가지고 - 청지기는 주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채무자들이 직접 자필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은 청지기가 임대차 계약이나 채무자들과의 계약을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각각 절반에서 1/5정도로 부체를 탕감(蕩減)해 주었다. 미루어 짐작컨어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러한 수준에서 빚을 탕감해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빚을 탕감해준데 에는 그 채무자들이 청지기가 쫓겨난 후 그에게 받은 은혜로 인하여 그의 생계(livelihood)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저의가 숨어 있다.
=====16:8
이 세대의미...더 지혜로움이니라 -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지혜롭다는 뜻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처리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욱 지혜롭고, 단결이 잘 되며, 열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때때로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유대(紐帶) 관계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즉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反目) 하며 자신들만이 진리에 선 것처럼 타인을 멸시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하지만 본절의 목적은 불신자들이 지혜롭게 행한 것보다 성도들은 더욱 지혜롭게 행하여야 한다는 데 있지 결코 불신자들의 부정직과 사기술을 칭찬한 데 있지 않다(롬 2:6-8).
=====16:9
불의의 재물 - 혹자는 이 말을 금욕주의적인 쿰란(Qumran)종파의 이원론과 같이,세상에 속한 모든 것 즉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을 악하다고 보는 관점에서 나온 히브리적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부정직하게 얻은 재물'이라기 보다는 '하늘의보화'에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세상의 재물'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친구를 사귀라 - 재물이 선용(善用)되지 못하고 악용될 경우 황금만능 풍조가 만연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재물일지라도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재물을 선용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시친구를 사귄다고 하는 말은 KJV에서는 '스스로 친구가 되게 하는 것'(make to yourselves friends)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친구들'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Danker), 예수께서는 물론, 누가 자신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구제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세상의 재물을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이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가 되라고 하는 말인데 이는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길'(12:33;마 6:20)이 된다. 이 의미를 좀더 확대하면 '친구'는 곧 '하나님'을 의미한다고도 볼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과 불우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2:33; 마 :20;19: 21; 25:31-46).
없어짙 때에 - 세상의 재물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쌓아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부요함이 사라지고 남는 것이 전혀 없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12:21).한편'없어지다'라고 하는 말의 헬라어 '에클레이포'(* )는 일반적으로 부와 세상 재물이 다 소용없게 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후반부의 '영원한 처소'를 단순히 재정적(財政的)인 면에서 안전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도의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해한데 따른 것이다.
영원한 처소로 - 일반적으로 장막의 뜻인 '스케네'(* )는 일시적인 거주지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영원한 것 즉 영구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서의 초월적인 영원한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 전체의 의미는, 재물을 잘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도 하나님이 그를 잊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구원의 방법론으로 제시하신 것은 아니다.
=====16:10
지극히 작은 것..,큰 것 - '지극히 작은'의 뜻인 헬라어 '엘라키스토스'(* )는 '작은'의 뜻인 '미크로스'(* )의 최상급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이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큰', '많은'의 뜻인 폴뤼스(* )는 원급 형용사이다. 이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의 또 다른 표현은 11절에 의하면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 12절에 의하면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 된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세상의 재물은 하늘의 보화 즉 복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선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상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부름으로써 주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가치를 과대 평가하는 것을 경고(警告)하셨다.
충성되고 - 직역하면 '충성된 자가 된다'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충성된 자' 헬라어로 '피스토스'(* )인데 이 말이 어원은 '믿다, 옳게 여기다'의 뜻인 '페이도'(* )이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 즉 불의의 재물에 '충성하는 자'란 재물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돈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주고받고 또 보관하는 등의 경제 생활 영역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사람임을 의미한다.결국 본 주석에서는 비록 청지기의 죄가 간사한 것이긴 하지만 난관을 타개해 나가는 열심과 지혜만큼은 칭찬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 반면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를 죄악된 술수로 규정할 뿐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청지기와 같은 식으로 처신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투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해석에 관해 정확 한 답을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전체적 문맥을 고려하건데 본 주석의 해석이 무난하리라 본다.
돈을 잘 쓰는 사람!
눅 16장 13절 / 김병삼목사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듣기를 원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부자가 되는 것이 축복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으며, 혹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현실적으로 펼쳐져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잘 믿어도 얼마든지 가난해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도 가난해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물질이 복인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요. 아니면, “하나님은 계신 데 물질이 복이 아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돈 너무나 실제적인 문제 아닙니까?
이 중에 혹시 돈을 싫어한다거나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십시오. 사실 돈은 없어도 문제이고 많아도 문제입니다.
돈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면서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래도 설교 제목인데, “돈”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돈! 하니까 확 와 닿는 대요!”라고 합디다.
예수님도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재물을 많이 언급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가복음 10장 25절의 말씀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또한, 예수님께서는 38개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주 사용하셨던 주제가 재물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거지와 나사로,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등.
이제 여러분이 이 강단에서 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편해지지요?
1.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잘 사는 것의 기준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잘사는 사람”이라고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못사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돈 없이 잘살 수 있는 원리를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빌 4:12).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님을,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자족하는 원리가 있음을 말입니다.
2.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8장 36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우리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돈으로 만족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욕심을 내던 것을 얻으면 잠시는 만족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3. 돈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축복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우리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은사”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주시면 감사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원리는 선물은 줄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 돈을 참 잘 쓰네."
두 가지 의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마구잡이로 잘 쓴다는 것과 필요한 적재적소에 잘 쓴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돈이 좋고 나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주변에는 돈을 천박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우아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그 돈으로 우리는 많은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돈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인인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돈이 없을 때와 돈이 많을 때
어느 쪽이 여러분의 마음에 드시나요?
돈이 없을 때도, 돈이 많을 때도 우리에게 동일한 시험이 옵니다. 양쪽 순간에 모두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합니다. "누가 주인인가?"
돈이 없을 때, 우리는 비참함을 느낍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나서도 결국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우리의 가치를 결정할 때가 많지요.
돈에 대한 실망이 대부분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누가 우리에게서 돈을 빼앗아 가는 막대한 손해를 입혔던지, 아니면 내가 기대하는 사람에게서 도움이 오지 않을 때 동일한 섭섭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그 사람 역시 단순히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요 통로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돈 앞에서 우리는 시험을 받는 것이지요.
돈의 많음은 역시 우리에게 큰 시험이 됩니다. 그렇게 의지했던 하나님이, 돈이 많아지는 순간 그렇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분으로 보이기 시작하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돈은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이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결국, 돈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용하거나 즐기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든지, 돈의 지배를 받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중요한 영적인 문제라는 말입니다.
좀 더 명확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돈에 대한 중립적인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크리스천의 경제생활에 관한, 혹은 돈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일관된 시각을 가지는데, “돈의 중립적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디모데 전서 6장 10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리고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다!"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은 것이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돈의 사용의 측면을 보기 전에, 돈이 가진 본질적인 면을 보아야 합니다. 돈이 가진 본래의 위험성을 우리가 간과한다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계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부정적인 접근으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돈으로 야기될 수 있는 악한 영적 능력이 그것입니다.
영적 세력으로서의 돈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성경적인 용어로, “육체의 소욕”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과 19절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17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19절)
그렇습니다.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인 소욕을 구체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돈이 없으므로 정욕의 죄를 짓지 않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의 사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돈을 가지고 즐기고 누리는 모든 것을 끊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인생의 일반적인 쾌락을 절제하고 물질적인 만족을 스스로 부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계에서 “청부론”과 “청빈론”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번 돈으로 얼마든지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청부론입니다. 즉 깨끗한 부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이 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이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쓴 어떤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이 책에서는 바로 여러분이 듣기를 원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돈을 거부함으로 부득불 가난해질 순 있어도, 굳이 가난함을 자랑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크리스천이 부자가 되기를 소망하되 반드시 정직한 십일조와 구제헌금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 돈과 하나님의 돈을 분별할 줄 아는 투명한 크리스천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일 것이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돈을 맡기시기를 원하신다고 말입니다. 누구나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요, 우리가 그렇게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내면을 보면, 우리가 아무리 돈에 중립적인 가치를 둔다 해도 돈을 사랑하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돈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상은 우리가 고고한 것에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항변하지만, 사실 원하는 것은 그 돈 자체인 것을 부인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그리고 “잘” 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목적이 “열심히” “잘”에 있습니까? 아니면 축복에 있습니까?
청부론의 주장을 가만히, 그리고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목적이 올바른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부, 즉 돈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사는 것이 바로 주어질 축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헌금을 드리는 이유도 바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구별(區別)하여 드린다, 성별(聖別)하여 드린다, 모든 것을 드린다는 신앙의 원리가 결국은 부를 정당화하고, 내가 누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지요.
무엇을 느끼시나요? 믿음이 가장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탐욕적인 모습이 아닌가요?
“깨끗한 부자”가 되려는 욕망이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의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술”이라는 말이 많이 쓰임에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과에 의사들이 지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목회자들에게서도 두 교회를 놓고 어떤 교회로 갈까 고민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돈은 중립적인 가치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돈이지 않습니까?
돈을 그냥 물질로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지적한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돈”은 영적인 세력입니다. 결국은 돈을 섬기는 사람이 되든지 하나님 편에서든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깨끗하게 번 돈으로, 내가 육체의 소욕을 즐긴다.' 혹은 '깨끗하게 번 돈은 내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돈을 버는 것이,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우리 속에 욕망으로, 혹은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아닌지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 핵심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 관원의 이야기에서 언급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 18-23절에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청년의 마음속에 가장 큰 관심과 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라”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은 이 청년의 삶에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일견, 이 청년이야말로 “청부론”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부자이지만, 남을 구제하는 사람이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고, 살인과 간음의 죄를 짓지 않는 사람,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 누구도 이 청년이 부를 누리는 데 있어서 무엇이라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깨끗하게, 모범적으로 사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물질을 포기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은 결단의 문제요, 선택의 문제입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라는 예수님의 단언적인 문제입니다.
사실 제 모습을 다 드러내놓고 돈을 쓰는 모습을 다 이야기한다면 여러분은 너무나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설교가 아마 귀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직은 제가 돈을 사용함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 과도한 지출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기도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제가 실수하는 부분에 대하여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실수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부분에 감사합니다. 아직은 제가 돈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용함에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안도감 말입니다. 계속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순간에 돈의 지배를 받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잠언 30장 7-9절에 있는 지혜의 말씀이 와 닿는 순간입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말라는 말씀 말입니다. 열심히 살아 가난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혹시 가난한 이유 때문에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죄를 지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혹시 부자가 되어서 육체적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거룩함”을 인하여 불림을 받은 사람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돈에 대하여 청지기 의식을 갖는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돈을 주관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사는 사람을 "청지기"라고 합니다.
자신의 돈이 아니므로 주저하지 않고 돈을 '잘' 씁니다.
자신이 돈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한 돈을 '잘' 씁니다.
이 둘의 의미가 확실하게 와 닿으시나요?
돈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잘' 써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로리에게 확실한 믿음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경험이 쌓여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이 믿음이 있어야 돈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는 사람 중에 돈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유혹'은 의지하기 때문에 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나서 제일 많이 회개한 것이, 제 미래에 대하여 돈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군목으로 있던 시절 저에게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군을 마치면서 유학을 생각했고,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유학 자금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삶의 우선순위는 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놓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던 때, 하나님이 제 인생을 지금까지 인도해 오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인도해 가실 것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하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돈을 쓰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하시리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군목 시절 교회의 헌금은 오로지 병사들을 위문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사역의 기준은 늘 교회에 헌금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니 '돈'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없으면 제가 헌금을 하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딱 한 달 만에 교회 재정이 2배가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때 철저하게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사역의 주인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은혜를 받던 때, 저에게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지금도 잊지 못하는 빨간 프라이드를 타고 전방을 누비며 다니던 때, 두 번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빙판길을 가다 다리를 받고, 전주를 받았던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그 차를 고칠 돈을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를 방문한 교인이 도와줬던 그 돈이 정말 정확하게 차를 고치는 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죠.
요즘 저는 공급받는 것보다 '잘' 쓰는 훈련을,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부목사님과 같이 갔습니다.
20일 정도를 다니다 보면 혼자 쓸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조금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 보니까, 아들 웅기가 생일이라고 선물을 해 주는 겁니다. 그 돈 제가 준 돈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기쁜지, 게다가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제 아들이잖아요. 그래서 살짝 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선물이 얼마짜리니?"
며칠 있다 집사람을 시켜 3배 정도 되는 액수를 다시 주었습니다. 가족에게 선물을 사다 주라고 말입니다.
제가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말입니다.
저는 요즘 목회자들을 만나거나 신학생을 만나면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저를 만나러 오는 사람 중에 저를 큰 교회 목사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는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안내를 받고 저녁을 먹으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학생 목사님이 저에게 밥을 사주겠다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면서 그런 인사 많이 받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서 제가 기쁘게 밥을 삽니다. 그런데 나가면서 밥값을 내려고 카드를 냈더니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냈습니다.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제가 그냥 꼭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 일을 저는 가슴에 새겼습니다. 당장 거기에서 밥값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사님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에 제가 꼭 그 마음을 갚아줄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나왔습니다.
제가 보통 유학생들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돈을 주고 오는데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주는 것보다 큰 것을 생각하고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바로바로 응답이 온다고 기뻐하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돈을 잘 쓰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를 조금 더 다루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을 보세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돈지갑이 어디에 사용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돈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청지기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도덕적 차원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쉬운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욕망을 채우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기에서 ‘원한다!’라는 물음에 대하여는 어쩌면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조금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영적인 차원의 문제는, “영적인 척”을 하면서 해결될 문제인지 모르지만, 이 도덕적인 측면에 와서는 걸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거룩한 욕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위 '돈을 버는 욕망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기 위함이라면….'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 깊이 들여다보면 그 “거룩한 욕망” 속에 어떠한 이유이든 내가 돈을 벌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문제인지 모릅니다.
저는 너무 쉽게 “저는 돈에 대하여는 초연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만,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내 속에 있는 욕망은 이미 충족시켜 놓고” 초연한 모습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카네기 (Dale Carnegi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이겨내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히 욕망에 대한 것을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남들보다 더 가지려는 것,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 남들보다 편하게 살려는 것 등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창 1:27). 그런데 이러한 거룩한 본성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욕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는 “죄 된 욕망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치료되어야 할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꼭 필요한 것들은 아니지요.
어거스틴은 “방치된 욕망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을 거부하지 않으면 필요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욕망을 내버려두면 필요 이상의 물질을 누리는 습관이 생깁니다. 이 습관에 익숙해지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필요한 것만큼”이라는 말은 아무런 통제력을 잃게 됩니다.
이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살 집이 필요합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집을 원하십니까? 여기에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차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차를 타기를 원하십니까? 실제로 갈등하는 부분이 여기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담임목사로 취임하기 전, 호텔에서 결혼 주례를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호텔에 가기 때문에 제 차보다는 당시 담임목사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서 주차장에 대지 못하고 valet parking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나올 때는 역시 편하게 돈을 주고 서비스를 샀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는 바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에게는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저에게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필요이고, 어디까지가 원하는 것인가 말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세월이 흐르면서 필요와 원하는 것 사이의 기준이 점점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이런 정도의 차를 타야겠다.' '이런 정도의 삶을 유지해야겠다.'라는 것들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얼마큼의 돈이 필요한 것이며, 얼마큼의 돈을 원하고 있습니까? 이 차이를 구별하려고 고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돈의 필요에 따라,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성령의 사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솔직하게 돈이 좋습니다. 그러나 돈을 단순히 “돈”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저도 오늘 여러분에게 돈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돈에 대한 고민을 드리려고 합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한 고민 말입니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번다면 반드시 그릇된 길로 가게 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욕망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따라 돈을 추구하는 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을 가지고 충분히 누리며 살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돈이라는 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욕구, 육체적인 욕구를 가장 잘 만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알지만, 끊임없이 경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 속에 끊임없이 성령의 소욕이 필요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간섭하시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이 욕망이 되지 않기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만큼을 아는 사람입니다.
돈이 좋습니다. 그러나 돈을 경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필요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의 복을 구하기보다는 물질의 은사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은 누리는 것이지만, 은사는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분명한 신앙은 자족의 원리를 배우게 합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모든 물질 가운데 자유함으로, 감사함으로, 자족함으로 말입니다.
나 비록 불의할지라도
눅 16장 1~9절 / 이윤재목사(한신교회)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전성기가 지났습니까?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몇 년전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 보았습니다. 젊은이 1000명을 대상으로 인생의 고민을 묻는 가운데 인생의 전성기는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답은 29세였습니다. 29세가 인생의 최전성기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기 계신 분중 아직 29세가 안된 분은 축하합니다. 아직 29세가 안되어 “아, 나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아직 29세가 안됐어” 라고 기뻐하실 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29세가 넘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의 전성기는 끝난 것입니까? 이제 올라갈 일은 없고 내려갈 일만 남은 것입니까? 어떻습니까? 인생의 전성기가 나이로 결정됩니까?
시인 정희성이 쓴 <태백산맥>이라는 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57세가 된 시인이 아내와 함께 어느날 태백산으로 등산을 떠났습니다. 아내는 왜 그렇게 힘든 산을 가느냐고 지금 자기가 일곱이냐고 열아홉이냐고 구시렁댑니다. 한참 힘들게 올라갔는 데 칠십대 노인들이 벤취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이 부부를 보더니 같이 가자고 하면서 올해 나이가 몇이냐고 묻습니다. 시인이 “올해 쉰 일곱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참 조을 때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네” 합니다. 쉰 일곱도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70대 노인들이 볼 때는 아직 좋은 나이입니다. 20대 젊은이가 볼 때 50대는 한물간 아버지 세대겠지만 70대 노인들이 볼때는 아직도 한참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전성기가 나이로 정해지는 것입니까? 어느 때를 지나면 인생이 미끄러지는 때가 있습니까?
제가 이태리 어느 도시 도서관을 갔는 데 그 입구에 라틴어로 뭔가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안내인에게 해석을 부탁했더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인생에 더 빠른 것도 더 늦은 것도 없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그렇습니다. 조금 일찍 된 사람도 있고 조금 늦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나이가 든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있습니다. 제가 염려를 많이 했는 데 때가 되니 짝을 데리고 나타난 것입니다.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결혼을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짝이 나타나는구나”. 인생의 전성기는 나이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나이 많다고 전성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니 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이 젊다고 전성기가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니 더 노력해야 합니다. 누구에나 전성기는 있고 그나마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걸으면서 뜻밖에 인생의 전성기를 맞은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보통은 이 말씀을 성경학자들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말하는 데 저는 이것을 “뜻밖에 전성기를 맞은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농경사회입니다. 농사라는 것이 우리처럼 논에 벼를 심는 농사가 아니고 비탈진 산등성이에 올리브라든가 포도, 밀, 보리 이런 것을 심는 농사입니다. 대부분이 영세하게 살았지만 그중에는 가끔 큰 땅이 있어서 남에게 땅을 임대해주거나 소작을 주어서 그 세를 먹고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주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선조로부터 많은 땅을 물려 받아 자기가 다 지을 수 없어서 직원을 두고 이 일을 했는 데 그 사람이 청지기였습니다. 청지기는 요즘으로 말하면 재산 관리인입니다. 성경 시대에 주인 밑에서 일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품군과 종과 청지기입니다. 품꾼은 요즘으로 말하면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하루 하루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로 포도를 딸 때나 밀, 보리를 수확할 때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사람입니다. 비정규직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규직이 있습니다. 종과 청지기입니다. 다만 종은 자유가 없고 모든 것이 주인에게 예속되었습니다. 대개 돈주고 사왔기 때문에 거의 상품입니다. 심지어 종의 아내도 자녀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런가 하면 청지기는 자유가 있습니다. 주인 밑에 있지만 일정한 자유와 권한이 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하며 재산과 관련된 일을 합니다. 다만 소유권과 처분권은 없습니다. 이런 일은 대행할 수 있으나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정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부정한 짓이란 뻔 합니다. 주인에게 줄 임대료를 중간에서 착복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땅을 빌어 쓰고 주로 현물로 냈기 때문에 밀 100말, 포도주 10 부대, 올리브 5통, 이런 식으로 주인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니까 어느때부터 이것들이 눈에 띄게 줍니다.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았더니 청지기가 중간에서 때어 먹었습니다. 딱 한번 조금만 했다면 주인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많이 하다보니까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주인이 소작농들이 바친 현물과 실제 곳간에 들어온 현물을 일일이 비교해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장부상으로는 밀 100말 바쳤는 데 실제 들어온 것은 50말입니다. 나머지 50이 어디 있는가 조사했더니 청지기가 “인마이 포켓” 했습니다.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맡겼더니 이 나쁜 일을 하다니”. 주인이 이 청지기에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나자 청지기는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청지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인 집에서 편하게 먹고 살았는 데 졸지에 짤리게 되었으니 가족과 함께 어떻게 먹고 삽니까?
여러분이 절대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청지기는 자기의 뼈아픈 실수로 일생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제2의 인생이 없는 것입니까? 그는 어떻게 수렁에서 헤어나와 두 번째 인생에 도전하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가끔 여러분이 원치 않는 침체와 불경기와 실패와 인생의 수렁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놀랍게도 이 청지기는 그런 수렁에서 일어났습니다. 간신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다시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간신히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청지기는 자신의 실수를 알았습니다.
청지기의 회복은 자기가 한 일을 안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절을 보실까요? 눅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가 한 일은 옳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잘한 일은 자기가 옳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도 실수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자형의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날마다 실수하지만 그때마다 실수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계속 실수하고도 한번도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악한입니다. 누구나 1번이 될 수 없으나 2번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1번 보다 오히려 2번을 좋아하십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죄를 고백하면 됩니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하나님은 우리가 한번도 죄짓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자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자백하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한 기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추기경님은 프랑스어도 잘하시고, 영어도 잘하시고, 여러 나라 말을 다 하신다면서요?” 추기경이 말했습니다. “몇 나라 말을 하긴 합니다만, 한 가지 더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데요?” “거짓말입니다. 저는 거짓말도 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가면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지 않은 죄인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의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죄인이 있습니다.
청지기는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주인에게 들어온 임대료를 착복했습니다. 저는 법률전문가가 아니어서 이것이 횡령인지 배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전을 보니까 횡령은 남의 재물을 불법으로 차지하는 것이랍니다. 배임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임무를 소홀히 하고 남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랍니다. 남이 받을 재물을 가로채면 횡령, 그로 인해 손해를 끼치면 배임, 이로 보면 청지기는 배임죄도 저지르고 횡령죄도 저질렀습니다. 소작농들이 주인에게 바치는 밀이나 포도, 올리브등 임대료를 중간에서 자기 것으로 가로챘기 때문에 횡령이요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저버리고 주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주었기 때문에 배임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이야기인 것을 아십니까? 지금 예수님은 어떤 가정에서 일어난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 것을 아시죠?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누구입니까? 청지기입니다. 종이 아니고 품꾼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일정한 자유와 권한을 가진 자유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맡겼습니다. 가정도 맡기고 회사도 맡기고 재능도 사명도 직분도 맡겼습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입니다. 날마다 주인의 은혜로 살고 주인이 공급한 것을 먹고 주인이 인도해서 하루 하루 삽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 살면서 우리는 주인을 속입니다. 주인에게 들어갈 재산을 우리의 것으로 가로챕니다. 심지어 주인이 받아야 할 영광까지 가로챕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닌데도 주인 행사를 하고 주인이 가진 소유권을 탐하고, 주인이 가진 처분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재물을 우리 것이라 우기기도 하고 하나님의 맡기신 자녀도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죄는 우리가 스스로 주인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소유권, 처분권, 용도변경권, 양도권, 다 내 것으로 삼고 주인을 합바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는 주인을 시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인의 자리에 내가 앉는 입니다. 재미있게도 누가복음에 나오는 비유중에는 불의한 사람에 대한 비유가 세 개 나옵니다. 15장에 불의한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입니다. 왜 탕자가 불의합니까? 밖에 나가 허랑방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허랑방탕은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탕자가 불의한 것은 아버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밖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18장에 불의한 재판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부가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데 불의한 재판관은 뇌물만 기다립니다. 나라가 정한 법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하지 않습니다. 재판관은 국민의 주인인 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권리가 보장된 법을 따르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불의합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16장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에게 재산상 손해를 줘서 주인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불의합니다. 결국 불의는 주인을 무시한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무시했습니다. 재판관은 법을 무시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을 무시해습니다. 죄는 나쁜 행동이 아니라 주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은 주인과의 나쁜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회개는 나쁜 짓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죄인임을 인정합니까? 모든 나쁜 행동은 하나님과의 나쁜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겠습니까?
청지기는 주인의 자비에 목숨걸었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알았던 청지기가 했던 다음 행동은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이름으로 빚을 탕감해주기 시작합니다. 5-7절을 보시겠습니까? 눅16:5-7,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여러분은 이 청지기가 한 일을 아시겠습니까?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주인에게 빚은 진 가난한 소작농들을 불러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에게 진 빚은 깍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빚을 탕감받은 소작농들은 이 일이 청지기 혼자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인의 빚을 탕감해 주면 주인의 재산에 손해가 오는 데 청지기가 주인과 상의없이 이 엄청난 일을 했으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청지기가 했던 말이 이것입니다. “당신은 주인에게 얼마 빚졌습니까? 밀 백 말입니까? 0을 떼세요. 10말이라 쓰세요.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주인에게 빚는 것이 얼마입니까? 올리브 100통이라고요? 50통만 내세요. 주인의 뜻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농민들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합니다. 이때 청지기가 말합니다. “제가 했나요? 뭘. 주인이 하라고 해서 한 것 뿐이예요. 주인에게 감사하세요”. 그랬더니 탕감받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말합니다. “아, 우리 주인 최고야. 평소에 좀 엄한 듯 했는데 역시 사랑이 많아. 주인 최고”. 그래서 온 동네에 주인의 칭찬이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소문이 주인의 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이름을 빙자하여 소작농들의 빚을 감해 주었는 데 그것으로 인해 주인에 대한 좋은 평판이 온 동네에 가득하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여러분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 곤란한 일입니다. 이 문제아 청지기 때문에 주인은 엄청난 재산의 손해를 보았는 데 그렇다고 그를 감옥에 보낼 수도 없는 것은 만일 그렇게 하면 빚깍아주는 것이 주인의 자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청지기의 재량에 의해 된 일이라는 것을 농민들이 알았을 때 생각지 않은 반응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반응일까요? 대략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는 주인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주인이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도 인색한 사람이 빚을 깍아줘. 지나가는 소가 웃겠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어”. 또 하나 청지기에 대해서 “그런 나쁜 주인 밑에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니. 도대체 주인은 그 좋은 청지기를 왜 해고한 거야? 청지기 만세”. 그래서 잠시 올라갔던 주인의 평판은 땅에 떨어지고 청지기는 졸지에 핍박받는 의인이 되어 다음 국회위원 선거가 되면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청지기를 감옥에도 안 보내고 해고도 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8절입니다. 눅16:8,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여러분은 청지기가 한 일을 어떻게 봅니까? 어떻게 보면 고도의 생존 전략일 수 있습니다. 해고까지 된 마당에 인심이나 쓰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것이 아니니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청지기에 좋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비록 실수를 많이 하고 살지만 주인은 좋은 분이다. 나는 가끔 죄를 짓고 살지만 주인은 의로운 분이다. 나는 본래 인색하고 욕심많은 존재지만 주인은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이다. 내 비록 실수로 주인 곁을 떠나지만 그것은 주인의 잘못때문이 아니라 내 잘못때문이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주인을 위해 할 일은 주인의 자비와 선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당했지만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마지막으로 주인의 선함과 인자함을 드러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변명하는 데 목숨걸지 않고 주인의 자비에 목숨걸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주인에게 얼마간의 재산상의 손해를 줄 수 있지만 주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재산상의 손해가 아니라 인격적인 명예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청지기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지만 매우 중요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죄와 실수를 피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죄짓기 않게 해서 거룩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고 매일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닮아 좋은 사람 되는 것보다 나같은 죄인을 통해 좋으신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 우리 자신의 성화에 목숨걸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에 목숨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 달라졌다” 보다는 “보라. 나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성화의 목적 삼지 말고 성화의 도구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머물게 하지 말고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위대한 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얻는 것입니다. 얻은 만큼 흘러 갑니다.
청지기에 대한 주인의 평가를 보십시오.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전반부는 주인의 평가고 후반부는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눅16:8,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이나 예수님의 공통적인 평가는 청지기가 지혜로웠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지식은 내가 주인이고 지혜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내가 나를 드러내는 것을 지식이라고 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어떤 공장에서 사장님이 신입사원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앞에 일할 때 어려움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저에게 오십시오. 저에게 오는 것이 여러분의 일입니다”. 신입사원 하나가 기계를 만지다 문제가 생겨 고치려고 끙끙대다 결국 사장에게 왔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묻자 자기가 해보는 데 까지 해보다 안돼서 왔다고 말합니다. 사장이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뭌제가 생길 때 여러분이 할 일은 나에게 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능한 일을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을 하실 것이다.”(You do the possible, then God will do the impossible)”. 지혜는 안되는 일을 내가 하려고 발바둥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목숨겁니까? 우리의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 정말 목숨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목숨거십시오. 성공과 실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성공했어도 하나님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내가 실패했어도 하나님이 성공했다면 그것은 성공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위대하십니다. 성공한 내가 자랑이 아니라 실패한 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실패요 나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 성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나온 신앙고백이 “우리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열등의식이 꽤 많은 사람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겸손같지만 대부분 그것은 제가 자신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문제는 설교한 대로 못산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시는 분보다 설교자들에게 이 문제는 심각합니다. “사랑하라”.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라”. 너는 항상 기도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습니다. “대적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가라”. 대적자가 누군지는 알지만 함께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설교대로 못사는 저를 보면서 가끔 설교를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같은 질문을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리의 제자가 했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 제가 설교한 대로 못살고 있으니 제가 설교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때 웨슬리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살 때까지 설교하십시오”. 좋은 대답이었지만 저에게는 좋은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될 때까지 해도 안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오늘 말씀을 읽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을 선전하기 위해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주인의 자비를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의했지만 그가 목숨걸고 믿은 것은 주인의 자비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자신을 성화시키기 보다 있는 자신의 그대로의 모습에 주인의 선하심을 담아 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의로우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목회자인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성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다. 나는 죄가 없고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용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용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은혜다. 하나님앞에 선 나의 부족함이 문제가 아니라 부족한 내 앞에 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중요하다. 그때부터 담대해 졌습니다. 이번에도 항존직 후보들 중에 나는 부족하다고 사양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게 말씀드렸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도 자신을 통해 주인을 나타냈다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당신의 완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인인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최고 목적은 나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사업, 내 지식, 내 학업, 내 가정, 내 자녀, 내 미래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때 인생의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청지기는 불의한 일을 하고 해고되고 직전에 인생의 전성기기 시작되었습니다.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출4:19-20,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여기에 지팡이가 나옵니다. 그 지팡이는 시내산의 가시나무로 만든 평범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나무를 잡을 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지팡이가 대단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우리의 최고 꿈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약해도, 비록 내가 실수했어도, 비록 내가 좌가 있어도, 나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면 됩니다.
무엇을 준비하는가?
눅 16장 1~9절 / 조영식목사(김포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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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재벌이 후계 경영자를 세우면서 형제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형제의 난으로 재벌의 속사정을 들어다보니 구멍가게 운영보다 더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기업의 후계자 싸움이 연일 뉴스거리가 되는 걸 보면 우리 사회에 물질이 최고라는 맘몬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대기업과 북한과 한국 교회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으로 세습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비유에도 불법으로 일을 처리하다가 해고된 청지기가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청지기가 불법으로 해고되었지만 그 후에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우리의 현재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늘 비유에서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1절). 주인은 청지기에게 집안의 경제적인 일을 맡겼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잘 관리하여 이윤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낭비하여 해고하였습니다(2절).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입니다. 청지기인 우리도 주님이 맡기신 것을 낭비하는 것은 없습니까?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낭비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는 청지기가 해고당했던 원인을 밝히기보다는 해고당한 후에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해고당한 후에 청지기가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지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해고당한 청지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를 진단하였습니다. 청지기는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다”고 합니다(3절). 그는 자존심을 세우거나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잘 나갔던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현재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4절). 우리도 청지기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진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어떤 상태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두 불의한 죄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청지기가 탕감해주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청지기가 자신을 진단한 후에 한 일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탕감해주었습니다(5절). 이 일이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는데 더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을 보면 청지기가 탕감해 주는 부분을 주인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아마도 청지기가 어느 정도의 재량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실제로 청지기들은 주인의 원금은 조절할 수 없지만 이자의 부분에 대해서 조절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청지기는 자신의 문제가 들통 난 것을 알고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서 자신의 재량권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탕감해주었습니다. 우리도 청지기처럼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도 이웃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 탕감의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역까지는 침범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용서할 수 있지만 상대방이 하나님과 계산할 부분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용서한다고 하나님의 용서까지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들에게 이자 부분의 용서를 하더라고 하나님께 원금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원금의 용서를 받더라도 사람에게 이자의 용서까지 받아야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이자를 탕감해줌으로 빚진 자들과 좋은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런 청지기의 행동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빚진 자들을 주인과도 좋은 관계로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자가 불어나다보면 원금 갚는 것이 더 어려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빚진 자들의 이자를 탕감해주면 주인의 원금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탕감을 통하여 자신도 이웃들과 관계를 회복하지만 주인과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자녀들이 이웃들을 용서하면 그들과의 관계도 회복하고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웃들을 용서하고 화목하여 하나님과의 길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막고 있습니까? 부디 우리들이 갈등과 다툼으로 주님과의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목을 통하여 주님과의 길을 여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청지기는 무엇을 준비했습니까?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8절) 옳지 못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로 자신을 영접해줄 수 있는 곳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9절). 주님은 옳지 못한 우리에게도 영접해줄 수 있는 장소를 준비했는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불의한 재물로 세상에서 살다가 언제가 해고를 당하고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를 영접해줄 수 있는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어떻게 영접해 줄 있는 곳을 준비했습니까? 그는 친구들을 사귐으로 준비했습니다(9절). 우리들도 영접해 줄 수 있는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예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인들은 예수님께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구하는 기도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 불의한 청지기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였습니까? 그것도 친구들과 사귐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교회를 새롭게 건축하고 이전한 후에 언제부턴가 교회의 문제가 사라지다보니 기도의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기도하면서 견디다보니 주님과의 만남도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인 슬럼프에서 벗어나 주님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계속 찾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주도 문제 해결이 아니어도 주님을 기쁘게 만나고 싶어서 은성 수도원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한 주간 동안 계속 기도하면서 오늘 비유처럼 주님과 깊은 사귐의 기도로 영적 기쁨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과 문제의 해결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귐의 만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 문제 해결로만 만나면 문제가 없을 때는 기도를 쉬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사귐으로 만나면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그분과의 사랑도 깊어져 갈 수 있습니다(살5:17). 우리들이 친구 되신 예수님과 사귐으로 만나서 사랑도 깊어지고 영접해줄 수 있는 천국도 준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의 현재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여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주님을 찾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들이 이웃들을 용서함으로 관계를 회복하고, 그들을 주님과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또한 우리들이 문제 해결로만 만나는 주님이 아니라 사귐으로 만나서 사랑도 깊어지고 천국도 준비할 수 있게 하소서.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누가복음 16:1-8 / 허창수목사
성경에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본문에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했다’는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중요한 교훈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깊은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부자에게 한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청지기란 묘합니다. 주인에게는 종이지만 다른 종들에게는 주인처럼 행세를 하는 것이 청지기입니다. 주인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가지고 주인의 소유를 관리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주인을 대할 때는 충성을 다 하며 복종적 위치에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시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주어진 권한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주인의 재산을 나름대로 관리하는 상당한 자율적인 권한도 있습니다.
본문에 청지기는 부자로부터 전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였습니다. 주인이 소문을 듣고 청지기를 불러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2)고 명하였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말을 듣고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고민을 하다가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기름 백 말이니이다.’ 그에게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또 다른 사람에게 ‘너는 얼마나 졌느냐?’ ‘밀 백 석이니이다.’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이렇듯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인심을 쓰고 있습니다. 요새로 치면 공문서 위조에 횡령죄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청지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주인을 속여 왔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듣고서도 더 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이렇게 한 것을 알고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을 하였다’(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이 성도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말씀입니다. 불신자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 더 지혜롭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성도들인 나와 여러분에게도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되는 말씀인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주인이 종들을 불러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겨 주인에게 드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의 충성됨을 크게 칭찬하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옳지 않은 청지기가 받은 칭찬은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착하고 진실 된 종이 받은 칭찬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찌 보면 이 청지기는 지극히 못된 사람입니다. ‘옳지 않는 청지기’(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을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는 것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일을 지혜있게 하였기에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종말론적인 교훈입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에게 지혜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한에 대해서 내 것처럼, 내 시간처럼, 내 능력처럼 형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으로부터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말을 듣고부터는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재산이 내 것이라고, 건강이 내 것이라고, 집이 내 집이라고, 권력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종말론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재산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건강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집도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결국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이 맡겨준 재산을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마음대로 낭비를 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깨닫고 보니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 것처럼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옳지 않은 청지기의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인정하고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구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는 말씀은 곧 종말론적 심판입니다. 심판주 앞에 구차하게 변명 따위를 늘어놓지 않았습니다. ‘그 소문이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누구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구차하게 기회를 다시 달라고 애걸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은 잘못했으니 다시 기회를 주시면 성실하게 일 하겠나이다’라고 하며 손발이 달도록 빌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주인이 ‘네가 잘못했으니 청지기 직무를 더 이상 하지 못하리라’는 명을 듣자 ‘예, 알았습니다.’하고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았을 뿐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변명도 없습니다. 주인이 잘못했다고 하는 데 대해서 그대로 인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지혜였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 주인은 종말론적으로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하실 때 우리는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변명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하시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허비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날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미 지난날은 지나갔기 때문에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나아 많은 분이 사업에 실패하고 무엇을 잘못해서 실패를 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시작을 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부산에서 목회를 할 때 부산대학교 사무처장을 하셨던 분이 퇴직을 하고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했습니다. 부도가 나서 숨어 다니는 분을 찾아가서 권면을 하니까 이미 70세가 되신 분이 다시 사업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되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남은 앞날은 장로로서 교회를 잘 섬기기를 바란다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남은 생을 장로로서 교회를 잘 섬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은퇴를 몇 년 늦추어 교회를 잘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청지기는 남아 있는 기회와 시간을 최대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없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고, 없어지는 것에 미련을 품지 않고, 아직 청지기 직분을 빼앗기지 않은 남은 시간을 잘 이용했습니다. 이것이 칭찬 받은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습니다.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하는 말을 들어봅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청춘을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가끔 10년만 젊었다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10년만 더 젊었다면 목회도 좀 더 잘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좀 더 멋지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지난 간 10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앞으로 남은 1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살아온 생을 올바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부터라도 올바르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청지기의 지혜는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준비하였습니다. 종말론적으로 내세에 대한 준비를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그래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긴 후에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 후에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청지기로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청지기 직무를 할 수 없을 때가옵니다. 그러면 그 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청지기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다’라고 했습니다. 힘이 없을 만큼 땅을 파는 노력으로는 내세를 준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력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빌어먹자니 부끄럽다는 말은 손발이 달토록 빌어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우상 앞에 빌기도 하고 나무나 바위를 보고 빌기도 하고 떠오르는 태양이나 달을 보고 절하며 빌기도 하지만 내세를 위한 아무 것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비로소 청지기는 청지기 직분을 빼앗긴 후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을 알았습니다. 청지기 직분을 빼앗겨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오늘의 청지기인 우리가 청지기 직분을 빼앗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죽음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처럼 일을 지혜 있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지기는 생각한 대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들었습니다. 그리고 빚진 자에게 ‘빚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기름 백 말이니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고 하였습니다. 다음 빚진 자에게는 ‘밀 백석이라’고 하였을 때 ‘팔십이라 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본 비유가 주는 핵심입니다. 청지기는 빚진 자들에게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은 ‘내 주인에게 진 빚’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은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청지기인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나아가 빚 진자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진 빚은 무엇이니까? 죄입니다. 빚진 자들은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죄의 빚을 진 것입니다. 빚진 자는 죄인들입니다.
빚진 자에게 빚은 ‘기름 백석’, ‘밀 백말’이라고 했습니다. 기름 백말, 빌 백석이라고 한 것은 100%의 완전 타락한 죄인임을 의미합니다. 의라고는 단 1%도 없는 완전한 죄인입니다. 더 이상 구원 받을 자격조차도 없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로 인하여 구원받을 자격조차도 없는 죄인들을 불러 그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이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많게는 50%, 작게는 20%씩의 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가르쳐서 그를 예수님을 믿도록 하였다면 우리가 그들의 죄를 50%씩 또는 20%씩을 탕감해 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청지기는 빚진 자들에게 100%를 탕감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100%를 탕감해 주었다면 그는 이단의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100%를 탕감하는 일은 오직 재판장 되시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죄인을 불러다가 그를 가르쳐 회개하도록 하는 것은 그의 죄를 어느 정도 탕감해주는 것만큼의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지금까지는 잘못하여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여 주인으로부터 무서운 책망과 경고를 들어야만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오늘 우리는 주인으로부터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옳지 않은 청지기처럼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해서는 시인을 하십시오. 그리고 청지기 직분을 빼앗겼을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 후에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들의 죄의 빚은 탕감해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가르쳐서 그의 죄의 빚을 50%, 20%를 탕감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인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옳지 않은 청지기처럼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는 칭찬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칭찬을 들을 뿐 아니라 청지기 직분을 빼앗긴 후에(죽음) 주님의 영접을 받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의한 청지기
눅 16장 1~13절 / 배영진목사(하늘문교회)
오늘은 불의한 청지기! 이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 스토리 텔링의 천재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 불의한 청지기를 가리켜, 지혜롭다 슬기롭다! 이 사람에게 배우라! 어려운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반어법을 사용하십니다. 반어법이란, 어떤 얘기에서 얼른 예상이 안되는 메시지를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비유가 반어법으로 나오면 딱 한가지 메시지만 취해야 합니다. 반어법 비유에서 많은 걸 얻으려고 하면 반어법의 함정에 빠집니다. 예수님이 쓰신 반어법은 이런 겁니다. 인자가 올 때 도적같이 오리라! 이건 도둑이 와서 훔쳐간다는 데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니고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인자가 언제 올지 모른다. 이거 말씀하시려고 도둑같이 온다 얘기하신 겁니다. 또 반어법은 뱀같이 지혜로우라, 뱀은 성경에 가장 사악한 짐승, 창세기에 하와를 시험하여 넘어뜨린 원수. 요한계시록에도 옛 뱀은 사탄의 상징으로 나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너희가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우라 하셨습니다. 뱀에게도 배울 지혜가 많다 이것입니다. 오늘 불의한 청지기, 이것도 전형적인 반어법입니다. 이거 잘못 이해하면 결론이 이상하게 나버립니다. 도대체 우리도 불의한 청지기같이 불의하게 살라는 말씀인가 이렇게 됩니다.
오늘 이 불의한 청지기는 사실 죄질이 안좋습니다. 청지기는 오늘날로 말하면 매니저입니다. 근데 이 사람은 주인의 재산을 제 것처럼 낭비하고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그 죄로 주인에게 해고가 됩니다. 우리나라 현행법상으로도 이 청지기는 범죄목록이 다양합니다. 회사돈 공금유용, 그리고 배임, 횡령죄까지 해당됩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서 뭘 배우라고 하신 것인가? 절대 본이 되지 못한 청지기, 배울 게 없는 범죄자, 그런데 이 사람에게 딱 한가지 배울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는 아직 현직에 있는 동안, 해고 이후를 대비합니다. 쫒겨난 이후를 대비해요. 본래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합니다. 그런데 그가 현직에 있는 동안에 그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해고 이후를 대비합니다. 사실 그 방법도 불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청지기 지혜를 배우라 하십니다. 이게 반어법인 이유가 뭐냐? 대단히 오해가 될 말씀이예요. 자기 것도 아니고 주인의 것인데, 아직 자기가 그걸 처리할 권한이 남아있는 동안을 활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청지기로 있는 끝날이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해고당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그날 이후를, 아직 해고당하기 전에 대비합니다. 오늘 예수님 비유 말씀이 뭐냐? 세상사람도 이렇게 자신의 끝날 대비한다, 너희가 이걸 보고 배우라 이것입니다.
첫째, 끝날이 있음을 알라.
2절을 봅니다. 한 부잣집의 청지기가 주인의 소환을 받고 해고통보를 받습니다. 갑자기 주인의 방으로 들어오라는 소환통보를 받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이제 그만두라는 해고통보를 받아요. 청지기는 주인의 창고를 맡아 관리하는 책임자, 오늘로 말하면 매니저! 이 사람의 죄가 뭐냐? 주인의 재산을 함부로 유용했어요. 이 소문이 퍼집니다. 밤마다 회사금고에서 현금을 빼다가 여기저기 쓰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돈이 많았나? 저거 공금 갖다 쓰는 거 아닌가? 오늘날로 말하면 법인카드 갖고다니며 유흥비로 쓴 거죠. 이게 주인 귀에 다 들어갔고 주인이 회계사를 고용하여 회사출납 조사를 해보니공금유용, 공급횡령인 거예요. 현행범으로 바로 체포해 재판에 넘길 상황입니다. 그래서 청지기를 불러요. 자네 일을 이런 식이면 일을 그만둘 수 밖에 수 없다. 올 년말까지만 일하고 년말에 해고다! 해고통보를 받습니다. 저는 아마 이 일이 10월 말쯤 일어났고, 12월말로 해직통보를 받은 그 정도 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그때 이 사람이 멘붕이 옵니다. 아 큰일났다. 아 어떡하지? 3절 혼잣말을 합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낯이 부끄럽구나!
근데 저는 이 장면 묵상하다가 이 주인이 참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모로 여유가 있는 주인입니다. 이 주인은 왠만한 일은 일일이 체크안해요. 청지기한테 거의 모든 걸 맡길 정도로 재산도 마음도 좀 넉넉한 주인이었어요. 요셉이 노예일 때, 보디발의 집 가정총무를 했다고 되어있죠. 그게 청지기였어요. 보디발이 요셉에게 집안 모든 일 모든 재산을 다 맡겨버려요. 아무 간섭 안해요.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는 어때요? 주인이 자기를 맡겨준 것을 이용해먹어요. 도를 넘어요. 이거 내가 주인 거 막 쓰고 오버해도 우리 주인은 체크도 안해!
그러다가 오늘 주인에게 불려가 분위기 싸하게 해고통보를 받은 겁니다. 후회가 밀려오면서, 아 좀 잘할 걸! 내가 그동안 오버했네! 이렇게까지 막 살아버렸으니 주인이 그거 그냥 봐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제 문제가 뭐냐? 3절 읽어봅니다. 앞일이 막막한 거예요. 나 이 직장 이거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주인이 봐줄줄 알았는데 아니네! 이게 끝이 있구나 이 생각이 그를 움직입니다. 해고통보를 딱 받고보니, 정신이 번쩍 들어요. 해고날자가 정해진 청지기입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이거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우리에게 깨우쳐주려고 하신 지점이 바로 여깁니다. 너도 끝이 온다. 끝을 알고 살라. 이것을 멋진 말로 종말론적 인생관이라 합니다. 네 삶에 끝날이 온다. 솔로몬이 지은 전도서의 대주제가 이것입니다. 이 세상이 결코 영원하지 않으니! 매사에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다. 천하 범사에 다 기한이 정해졌고 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기억하라. 너는 창조주를 기억하라.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네 인생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땅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나기 전에, 너는 창조주를 기억하라. 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지혜가 뭔가요? 이땅은 영원하지 않다. 시작이 있으면 종말이 있다. 그리고 그 인생 결산이 있다.
이것이 오늘 불의한 청지기가 그날 해고통보받고 놀라면서 깨달은 사실입니다.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어요. 해고가 이제 정해진 겁니다. 해고시한이 임박해요. 이른 바 시한부 청지기입니다. 아무개야 너 오늘이 끝날이다! 그러면 끝입니다. 주인의 청지기 직장생활 더 하지 못합니다. 이 깨달음, 청지기도 끝날이 있구나! 이게 온몸으로 확 밀려온 겁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도 반드시 끝날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그 날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요? 그런데 언제든 갑자기 올 수 있다는 것도 아시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도 시한부 인생입니다. 이 청지기는 해고통보를 받은 거고, 우리는 인생끝날 통보를 받은 겁니다. 방학은 시작날이 있고 끝날이 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다음날이 숙제검사가 있어요. 그런데 방학숙제는 언제 주로 합니까? 와 방학이다! 가방 확 내팽개치고 놀아요. 그런데 한달 내 놀다가 7월 말이 오면 슬슬 불안해집니다. 방학도 끝이 있어요. 그때 한달치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방학숙제가 일기만 있지않아요. 동물채집, 식물채집, 만들기 서너가지가 됩니다.
우리가 금요일 음성파일 묵상한 거 기억하시죠? 부자와 나사로, 충격적입니다. 부자는 이름도 없습니다. 지옥가는 사람은 그 이름도 없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는 한번도 좁은 문으로 들어간 적 없습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날마다 사치하고, 그리고 뭐가 없었는가? 단한번도 자기 문앞의 거지 나사로 살피지 않습니다. 저는 그 부자를 주님이 비유하실 때, 하나님을 믿었네 안믿었네 일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냥 사치가 많고, 절제는 없고, 긍휼도 없었고 나눔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옥갔다 이렇게 얘기하신 것입니다. 그 부자 자기 인생이 끝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생 끝날에 대하여 아무 생각이 없어요. 엄청난 수확 아무하고도 나누지 않고 저장합니다. 저장해놓고 뭐라고 해요? 평안하다. 가득 저장해놨으니 내 남은 인생 문제 없다. 마음이 너무 좋아요. 그날 밤 창조주 하나님이 뭐라고 하셔요?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밤 내가 내 영혼을 거두리라. 인생 끝날을 몰라요. 오늘 주님이 이것 하나 말씀하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그날부터 시한부다. 그래 너희 인생은 시한부다.
둘째, 해고 이후를 대비하라.
4절입니다. 제가 한번 읽겠습니다. 옳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다! 뭡니까? 여러분 이걸 각성이라고 합니다. 머릿속 알람이 빵 울려요, 아 이렇게 해야겠네! 길이 안보였는데 갑자기 길이 보이는 겁니다. 이 사람 불현듯 지혜가 떠올라요. 이게 바로 뱀같이 지혜롭다는 것인가요? 그런데 이 떠오른 생각도 옳지않아요. 뭡니까? 내가 지금 청지기로 있는 동안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다 부르자. 이들 빚을 크게 탕감하는 서류만들고 도장찍어주자! 왜요? 해고 이후를 위해서! 여러분, 예수님이 이 청지기가 쓴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비유제목이 처음부터 불의한 청지기예요. 낭비도 심하고 불법도 심해요. 그런데 주님이 여기서 이 사람에게 배우라고 하신 것이 반어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생각을 했어요. 이 청지기가 사용한 방법이 주인을 해롭게 하고 이것도 불법이고 악한 방법이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이 사람이 지혜롭게 했네! 그래도 해고 이후 자기 앞가름 하나는 확실히 했네! 이 생각이 드는 겁니다.
5절입니다. 이게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는 겁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 하나씩 부릅니다. 아마 이거 엄청 비밀리에 했을 겁니다. 주인에게 이거 들키면 그날 해고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앞날 대비도 치명적인 실패가 되어버립니다. 지금 이 사람 한가지 명확한 목표가 뭡니까? 이집 청지기 해고 이후를 대비하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조용히 불러요. 무슨 일인가 은밀하게 청지기한테 옵니다. 자네 빚이 얼마지? 기름 백말인데요! 서류 이리 가져오게! 기름 50말! 도장 꾹! 자네 빚이 얼마지? 밀 백섬인데요! 서루 가져와봐! 여든 섬! 도장 꾹! 이겁니다. 사람들이 비밀리에 와서 청지기 사무실에 줄을 섭니다. 와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아주 조용하고 은밀히 했을 겁니다. 당신은 얼마 빚졌소? 10억입니다. 7억으로! 당신은 얼마 빚졌소? 5천만원! 그래 2천만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와우 이거 완전 사기예요. 근데 도장은 분명 주인도장입니다. 쌩사기쑈! 근데 이 사람 왜 이렇게 했다구요? 곧 해고되기 때문에! 해고된 이후를 그런 식으로 대비합니다!
4절 보면, 그의 생각이 명확합니다. 내가 이 남은 시간에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해주고 선심써서 그들을 친구로 만들면, 그들이 나 해고되었을 때, 나에게 잘해주겠지! 대단한 묘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신기한 것은 8절입니다. 주인이 이 사실을 다 알게 됐어요. 주인이 이 청지기에게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저는 주인이 그 청지기에게 한 말도 반어법이라고 봅니다. 이게 칭찬할 일인가? 야 이놈 봐라! 진짜 놀라운 놈! 네가 내 재산으로 네 앞날 이렇게 대비하셨어요? 야 무섭고 대단한 놈이구만! 이겁니다. 이 주인 대단히 너그러운 사람 맞습니다. 주인이 엄청 여유있고, 엄청 마음도 넓었다 이것입니다. 분명 불법이고 주인재산 갖고 장난친 것이 맞지만, 이 청지기가 자기 앞가름을 그렇게 한 걸 봐줍니다. 참 대단한 주인이 아닐 수 없어요. 8절에 보면 너 참 슬기롭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8절에 주님이 이 비유를 끝내시고는 여기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것을 보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뭐가 슬기롭다는 걸까요? 불법? 배임 횡령? 그거 잘했다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단 한가지!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 앞날을 대비했다. 그는 해고 이후를 대비했어! 세상사람들도 이렇게 자기 앞날 대비한다, 그런데 빛의 자녀인 너희는 대비하냐? 너희는 지금 뭘 대비하고 있냐? 그래서 9절 말씀이 나옵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로 충실하게 일했다. 불법까지 써가며 자기 앞날 대비하는 일에 충실한 거 아니냐? 그래 너희도 이 사람을 보고 뭐 배우는 게 없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런데 주님이 청지기 얘기에서 우리에게로 넘어오실 때 잘 보면 한가지 차원이 달라지는 단어가 있습니다.
9절 잘 읽어보세요. 너희도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왜요? 그렇게 우리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그 친구를 우리가 어디서 만나요?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일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천국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불의한 청지기 얘기, 그 사람 해고 이후 얘기가 결국 우리 인생 얘기예요. 인생해고가 끝난 이후를 말씀하려는 것이었어요.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 재산갖고 불법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너희도 현재 갖고 있는 세상재물이 있냐? 그가 갖고 친구를 사귀라. 11절 너희도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라, 세상재물? 그거 인생 끝나면 소용없다. 그러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주님이 진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것이 뭘까요? 너희 인생도 시한부 청지기와 같다! 이것입니다. 너희 인생, 너희 재물, 너희 재능, 너희 자녀, 이거 지금 다 청지기로 있는 거다! 이 시간에 그것도 충실하게 활용하지 못하면, 이 세상 청지기 끝난 이후에 하나님이 하늘청지기 더 큰 걸로 맡겨주시겠느냐?
이 얘기 하시다가 19절부터 보면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얘기로 들어가십니다. 그 부자를 보라. 잔뜩 쌓아두고 저를 위해서만 쓰고, 나사로는 살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살이 끝났다. 그럼 그 부자 지옥밖에 더 가겠느냐? 거기서 너무 뜨거워 나사로 물심부름 시켜달라 했다. 지옥가면 어떤 요청도 거절됐다. 그 부자는 살았을 때에 그 재물이 하나님의 것인지도 모르고, 그 인생 해고날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무 것도 대비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지옥간 것이다! 얘기가 청지기에서 부자로 갑니다.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이 부자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13절 재물과 하나님 섬기는 이야기가 결론입니다. 13절을 다같이 읽어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재물 가지고, 인생 끝날 이후를 대비하라 이것입니다.
오늘 불의한 청지기 얘기는 반어법입니다. 이 청지기의 불의를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가지 메시지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네 인생 끝날이 온다! 시한부다. 그 이후를 대비하라! 그런데 지금 있는 것으로, 지금 있는 시간, 지금 있는 물질, 그거 하나님이 네게 맡겨주신 것이다.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라. 네 인생 끝나고 그 이후를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주님이 나에게 자기 목숨을 나눠주신 얘기입니다. 참 복음을 받은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내것을 나눠야 합니다. 우리 인생 끝날 옵니다. 갑자기 올 수도 있습니다. 그날 이후 어떻게 되느냐? 이땅에서 살면서 청지기 노릇 잘 한 것 그 근거를 갖고 주님이 하늘에서 청지기로 맡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충실하게 처리했는가? 이것을 기준으로 하십니다. 여러분 그날 주님이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네게 관리하라고 맡겨준 물질 어디다 쌓았느냐? 우리 인생 아직 해고되기 전입니다. 인생 끝날이 오기 전에, 해고 전에 해고 이후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삶을 극대화시키라
눅 16장 1~12절 / 황성주목사
오늘 누가복음 16장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가, 낮은 가치를 포기하고 나의 삶의 있어서 높은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대로 허비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한 기준입니다. 저도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고 있는가, 자신이 없어요. 1절에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들렸어요, 그래서 2절에서 갑자기 해고를 당했어요. 3절에 보면 절망감이 찾아왔어요, 할 일이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4절에 보면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어요. 이 사람에게 내가 은혜를 베풀게 되면 이 사람들이 내가 쫓겨났을 때에 나를 돌보아 줄 것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5절에 주인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한명 한명을 불러서 빚을 감해주었어요. 문서위조를 했어요. 그런데 8절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몇 년 동안 성경을 보아도 이해를 못했지만 어떤 분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깨달게 되었어요.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욱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더 잘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한 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영악하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누리면서 활용하면서 굉장히 영향력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돈을 벌게 해 주면 내가 부자가 됩니다. 아주 쉽습니다. 내가 모시고 있는 주인을 부자로 만들어 주면 나는 자연히 부자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성공하게 만들어 주면 자연히 성공하게 되어있어요. 횡령을 했는데, 직권남용을 했는데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싸인을 위조했는데 왜 칭찬을 받았을까요? 다른 때는 주인이 돌아오면 모든 마을사람들은 채무자이기 때문에 다 반응이 싸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주인이 오자마자 주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합니다. 주인이 종을 부르자 종이 사실대로 다 말했습니다. 주인이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기는 한 번도 돈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어요. 물질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로 친구로 만들어 버렸어요. 가치가 낮은 비인격을 가지고 인격을 샀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샀어요, 이렇게 물질을 가지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 이런 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어요, 놀라운 세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극대화 시킬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키우셨어요, 1만 명 목회를 안 하시고 12명을 키웠습니다. 70명을 훈련시키셨어요, 120 문도를 남기셨어요, 하나님의 사람을 남겨서 세상을 바꿔놓았어요, 대단히 효율적인 분입니다.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을 추구한 분입니다.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 세우기입니다. 다른 사람을 리더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되기는 어렵지만 다른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쉽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능력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그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저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고 맡기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극대화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자신을 철저하게 대속물로 주심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모든 영역을 다 변화시켰어요, 3년의 짧은 시간 동안 극대화된 인생을 사셨어요. 우리에게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여러분에게는 3년은 더 남았어요, 최소한 예수님보다는 3년 동안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기도해야 합니다.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만 구하지 말고, 나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 짧은 인생, 얼마 안 남은 인생 극대화된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나의 작은 가치를 가지고 나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과 얼마 안 남은 모든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 시키는,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기도해야 합니다. 폴 마이어라고 하는 크리스챤 비지니스맨이 27세에 백만장자가 되었어요, 이 사람은 90%를 기부하고 10%를 자기가 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나를 시험하라 하는 유일한 말씀이 바로 십일조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말씀대로 십일조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상황이 악화될수록 2배를 냈습니다. 이렇게 했더니 말할 수 없는 물질을 쏟아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미 가지고 있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쏟아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을 축복하겠습니까? 여러분 시시한 인생을 살면 안돼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어요, 특별한 존재로 부르셨어요, 그냥 부르시지 않으셨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을 투자해서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기가 막힌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남은 인생을 나의 마지막을 극대화된 인생으로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큰 일을 낼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까지 깜짝 놀랄 일들을 하고 가실 분들입니다. 이왕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시한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것을 드리는 모두가 되십시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투자했기에 우리는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인생의 쓸 데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인생이 됩시다. 가치 이동을 하십시오. 낮은 가치를 포기하십시오. 최고의 가치를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붙잡으십시오. 마지막 시대에 대추수와 대변혁, 하나님께서 주시는 킹덤드림, 18억5천만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꿈과 비전, 최고의 것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이 드려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칭찬받는 청지기
눅 16장 1~13절 / 김홍도목사
엊그제 차 안에서 극동방송을 듣노라니까 어느 여신도가 본문 말씀을 가지고 질문을 하는데, “어떻게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제멋대로 탕감해준 사람을 잘했다고 칭찬을 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가지고 다시 한번 설교할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비유는 비유 자체의 도덕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그 비유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가령,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도적같이 오신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도적이란 말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아무도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자기 오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에서 가장 핵심적인 교훈은 청지기가 그 직분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을 미리 알고 빼앗긴 후의 미래를 대비해서 써두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의 재물도,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자식도, 명예도, 다 없어질 날이 오는데 그 날이 오기 전에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늘나라를 위하여 지혜롭게 써두는 자도 지혜로운 사람이요, 안개와 같은 이 세상에 보화를 쌓아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예수님이 강조하신 말씀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언제 죽을 런지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서 죽을 때 안고가거나 지고 갈 수도 없는 재물인데 미래를 위해 선하게 사용할 줄 모르고 죽을 때까지 붙들고 있다가 죽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도 대부분 그렇게 사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1. 인간은 모두 청지기입니다
“청지기”(steward)란 말은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자”란 뜻입니다. 헬라어로 “짐”(ocko)이란 말과 “관리하다”(vouos)란 말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인데 경제(economy)란 말이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짐”이란 말이 있듯이 재물이 많을수록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가져야 할 첫째 마음의 자세는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이 따로 있고 나는 그 분의 것을 맡아 관리할 뿐이라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벌었다고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므로 주인을 기쁘게 하고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 써야지 내가 소유주인 양 내 멋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내가 청지기로서 내가 맡아 두는 동안 주인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바르게 사용하면 그것은 영원히 내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 아닙니다. 언제 주인이 거두어 가실지도 모르고 언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실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7절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이 영원히 내 것이 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기도 하고 선한 사업에 투자해야 할 때 투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하게 바로 쓰는 것을 보면 주인이 더 큰 것을 맡기실 터인데 바로 쓰지 못하고 움켜쥐려고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큰 것을 맡겨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2. 빼앗길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재물도, 건강도, 생명도, 다 거두어 가시는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장 2절에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주인이 명령을 내린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다 버리고 주님 앞에 서서 일생 행한 일을 셈하고 심판 받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히 세상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재물을 소유할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Ⅱ는 이상한 종을 두고 있었는데 아침마다 인사할 때 “대왕이여,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member that you must die)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죽어 하나님 앞에 가야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바른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having”, 가지는 것보다 “being” 즉 존재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물질의 속박에서 떠나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하신 것도, 독자 이삭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도, 창조주가 되시고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훈련이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편안히 잘 살게 될 때 우상숭배에 빠지고 애굽의 종이 되어갈 때 바로 왕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어서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내모신 것도 세상 것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광야는 자유의 상징(symbol of liberation)이었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은 집이나 토지도 없고 도시도 돈을 저축하는 은행도 없는 곳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곳입니다. 소유할 것도 없고 소유에는 관심도 없는 곳입니다.
천막은 쉽게 세울 수 있고 쉽게 헐 수 있는 텐트입니다. 어느 곳에 고정된 삶(fixed life)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리저리 다니며 목축업을 하는 유목민인데 이것 역시 한 곳에 집착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착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기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심령이 바로 이런 자유의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주인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용감히 투자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
주인에게서 청지기 직분을 사표 내라고 하는 명령을 들은 이 청지기는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사표를 낸 다음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아직 청지기로 있는 동안에 인심을 써두려고 작정했습니다. 기름 100말 빚진 자에게는 50말로 탕감해주고, 밀 백 석 빚진 자에게는 80석으로 탕감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자기를 영접해주리라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했다는 것은 죽은 후에 영원한 세계를 위해서 재물을 투자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일이며 하나님께 칭찬 받을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 청지기는 과거를 고칠 수는 없지만 미래를 준비할 줄은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는 재물을 가져갈 수는 없지만 미리 보내둘 수는 있다는 말대로 미래의 영원한 천국을 위해 기왕에 없어질 물질을 투자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세상에만 재물을 쌓아두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곡식을 다 쌓아둘 곳이 없으니까 곡간을 다시 짓고 곡식을 쌓아두며 말하기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세상에만 쌓아두고 죽음을 준비할 줄 모르는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0-2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세상에만 재물을 쌓아 두는 자를 어리석은 바보라고 말씀하셨고, 이 청지기와 같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영원한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는 사람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20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써 둔 물질은 도적맞는 법도 없고 부도나는 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돈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지혜롭게 투자할 줄을 모르고 자기 육신을 위해 세상에만 쌓다가 죽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물질을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면 돈이 좋은 종이 될 것이고 우리의 자원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지 않으면 우리가 돈의 종이 될 것이며 돈은 무서운 주인이 될 것입니다. Henry Fielding은 말하기를 “돈을 당신의 신으로 말들라. 그러면 그것이 마귀와 같이 너를 괴롭히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돈이란 전 세계 어디나 갈 수 있는 패스포트와 같은 것이며 천국만 제외하고, 행복만 제외하고, 무엇이나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4.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
예수님은 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 이유는 돈이란 중성(neutral)이 아니라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돈을 성별시킬 수가 있으며 선을 위해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돈은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딤전3:3․8, 딛1:7․11, 벧전5:2).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재물을 불의의 재물(the mammon of unrighteousness)이라고 했습니다. 이 불의의 재물도 주님의 친구를 만드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주님의 원수가 된 인간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주님의 친구로 만들면 이다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우리를 반갑게 영접해 줄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셨고, 4절에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영혼구원을 위해 투자해두면 언젠가는 천국에서 우리를 환영할 것이며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돈을 더럽히라
눅 16장 1~13절 / 채규현목사
여러분, 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돈이야 많을수록 좋죠. 결국 그 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물질은 결국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사히 알고 쓰는 것이 또한 우리에게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만나가 이 세상에 임할 때처럼 많이 받은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받은 자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법칙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고 에덴동산의 법칙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그것 말고 또 하나의 법칙이 우리에게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은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고 재물을 주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사는 인간의 자세가 바뀌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그 모든 재물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재물 자체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재물 자체를 바라보고 그 재물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인간의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수많은 문제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소위 우리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보면 청지기가 허랑방탕하게 주인의 것을 쓰다가 주인이 그만두라고 하죠?
내일이면 그만 둘 그 청지기가 오늘 저녁에 주인이 그에게 맡긴 물건을 가지고, 청지기를 그만 둔 그 다음 일을 준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옳지 않은 청지기”라는 말이 8절에 나오고, 또 9절에는 “불의의 재물”이라는 말이 나오고, 마지막 13절 끝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여기서 “재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는 그냥 재물이라고만 나왔지만 원래 원어에 보면 “맘몬(Mamm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맘몬이라는 것이 재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 재물이 상징하는 신입니다, 맘몬신. 원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물질을 축복으로 주셨는데, 오히려 인간은 그 주신 물질을 신적 존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내 모든 인생의 문제를 풀어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재물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면보다, 신약성경에 보면 재물 자체가 일종의 파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그냥 파워가 아니라 영적인 권세, 영적인 파워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재물을 돌려서 맘몬이라고 해 봅시다)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맘몬은 신이라니까요. 물질이라 이름하는 신입니다. 영적 파워를 가졌어요. 영적 파워를 가진 것을 어떻게 아느냐면, 모든 인간이 재물을 신성시합니다. 이 문제만은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맡기기 힘들고, 다른 그 어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나의 재물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친구 관계도 버릴 수 있고, 가족 관계도 버릴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버릴 수 있고, 이것 때문에 이 세상의 옳고 그름도 다 버릴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존재, 영적 파워를 가진 것이 바로 재물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돈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이 물질이 모든 인간관계를 결정짓습니다. 그러니까 이 물질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고파는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비즈니스(business)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비즈니스에서는 애초부터 상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주고 물질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사고파는 관계는 물질을 가지고 다른 물질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사려고 하고, 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물질로서 지배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지배당하게 됩니다. 그것을 사고팔게 되니까요. 여기에 비해서 하나님의 법칙은 사고파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관계가 사고팔아서 거기에 매여 있는 관계가 아니고, 서로 서로 은혜로 주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 이 세상천지 만물을 주시고 에덴동산을 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진정한 천국은 서로 그냥 주고받는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데,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탄이 이 세상 권세를 잡을 때 물질(맘몬)이 신이 됩니다. 그 물질을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천국의 관계들이 전부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 사고 팔 수 있는 관계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건강하고 건전한 인간관계들이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물질 때문에 사람이 매이게 되고, 물질 때문에 권세를 흔들게 되고, 그리고 그 물질을 갖기 위해서 모든 관계가 파괴가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대부(God Fathe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오직 물질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삶, 그리고 그 삶의 결말을 이 영화가 잘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은데, 1편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혀 마피아와 관계가 없던 막내아들이 어찌하다가 결국은 마피아 두목(God Father)이 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자기 매형도 죽이고, 나중에는 자기 형도 죽이게 되는데, 그 문제 때문에 아내가 막 추궁할 때 그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I loved him.” 자기는 그 형을 사랑했다는 거예요. “But It was a strict business.” 그런데 이것은 철저히 사업상의 문제로 죽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돈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명한 일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그 물질 때문에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실제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바로 그와 비슷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얼마나 많은 가정에서 유산 때문에 형제자매들이 싸우게 됩니까? 유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영원히 안 볼 사람처럼 갈라섭니까? 얼마 전에 재미있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의 그 이후의 삶, 그것을 추적한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한결같이 가정파탄 났어요. 자살한 사람도 있고, 그리고 그 돈을 제대로 간수하고 있는 사람들도 없어요. 오히려 많은 돈이 인간관계를 깨트리는 역할을 합니다. 물질은 사탄의 도구이고 그 자체가 사탄과 같은 신적존재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떠날 때 어느덧 사탄이 주인 노릇을 하고 그 사탄의 대표되는 물질(돈, 맘몬)이 인간의 주인 노릇하고, 그리고 그 맘몬을 신성시하고 맘몬에게 매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든 인관 관계들이 끊어질 수밖에 없고, 가장 극단적으로는 그 돈 때문에 상대편을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서로 원수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때문에 사람을 배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돈 때문에 부모 자식 관계도 갈라집니다. 제가 아는 어느 가정도, 그 아들이 마마보이에요. 끝없이 부모에게만 의존해서 살려고 하는데 어느 날 부모가 더 이상 돈을 못 주겠다고 끊었어요. 그러자 그 길로 부모를 몇 년씩 찾아오지도 않고 의를 단절하고 살아요.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람이 돈을 숭배하고 사는 한 모든 인간관계도 그렇게 전락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돈으로 인간관계가 결정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가장 거룩한 것을 타락시킵니다. 은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고파는 관계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거저 주어야 할 때에 그것을 사고팝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데 그것을 사고팔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자기의 선한 행동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사려고 합니다.
죄는 언제나 값을 치러줍니다. 그러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라는 존재가, 인간이 죄에게 순종하게 되면 값을 치러주는데 그 주는 값이 사망이라는 값을 준다는 말이에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이라” 거저 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법칙 속에는 언제나 관계가 사고파는 관계에요. 하나님이 법칙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 거저 주고 거저 받는 것입니다. 이게 거룩한 관계에요. 이 거룩한 관계를 항상 사고파는 관계로 만듭니다. “내가 이것을 주었으니까 저 사람이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겠지.” 상대편의 행동을 조종하기 위해서 뭔가를 상대편에게 준다면 그것은 사고파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심지어는 가정에도 들어오고 교회에도 들어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돈으로 상대편을 조종할라치면 그것은 사고파는 관계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조종하려고 하면요.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물질을 상대편에게 주고 나서, 상대편이 뭔가 내 뜻대로 하기를 원한다면 그게 바로 사고파는 관계이고, 타락한 관계이고, 거기에는 진정한 은혜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로 그러한 사고파는 관계로 모든 인간관계가 규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런 면이 이 세상은 그렇다 치고, 믿는 사람의 심령 속까지 들어오고 교회까지 그것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성전 청소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에 하나님 앞에 은혜로 나와야 할 사람들이 거기서 사고 팔 때 그것을 청소하십니다. 심지어는 구약의 율법에도 그러한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적어도 물질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물질이 개입된다면 진정한 정의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이 돈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을 타락시키고 없애는 사탄의 도구이며 그 자체가 사탄적, 신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맘몬이란 게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사람이 변화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성공한 사람들-성공해서 돈이 많아진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4 A”(A로 시작하는 4가지 특성)가 있다고 합니다. 제일 첫 번째는 “Arrogance(거만함)”-가 세상 사람들은 돈이 많아지면 그 돈이 그 사람을 점점 거만하게 만들어요. 뉴욕의 유명한 호텔 갑부로 레오나 헬렘즈(Leona Helmsley)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주 부유한 호텔 부자와 결혼해서 부자가 되서 그것을 상속받은 여자인데, 세금문제 때문에 조사를 받을 때 그 여자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Only little people pay taxes.” 세금이라는 것은 소시민들, 서민들이나 내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내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서 온 세상의 지탄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격이 달라지는 거예요. 자기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스스로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돈의 영적 파워입니다.
결국 사탄이 주는 게 뭐예요? “나는 신이다.” 라는 거예요. 내가 신이라는 면이,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면이 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면들이 생기니까 점점 진짜로 자기가 신인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영적 능력을 돈이 가졌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Adventure(모험)”-모험을 합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서민들이 즐기는 것에서는 만족을 느낄 수 없어요. 더 큰 모험을 원하고, 이것을 통해서 만족을 느끼길 원합니다. 그러니까 서민들은 그저 돈 내고 놀이동산 가면 돼요. 그런데 돈이 점점 많아지면 자기가 즐기는 놀이동산을 만듭니다. 마이클 잭슨 집에 서울공원 같은 놀이동산 만드는 것 아세요?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 혼자 타고 있는 거예요. 그게 소위 세상의 부자들이 하는 일이예요. 자기만의 장난감을 가지고 있어요. 누구나 다 어려서부터(서민들까지도) 각자 자기의 장난감들이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좀 더 비싼 장난감, 돈이 없는 사람들은 좀 싼 장난감이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의 장난감은 큽니다. 언젠가 보니까 핀란드의 갑부가(그쪽은 북쪽이라 춥지 않습니까?) 바하마에 섬 하나를 사서 그 섬을 완전히 개조하여 자기의 Dream-Land(꿈의 섬)를 만들고 있어요. 엄청난 돈을 투입해서요. 그리고는 자기는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혼자 놀거예요? 그리고 또 돈 많은 사람들은 몇 백억씩 내서 우주여행 하고 그러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못하는 것을 했다고 해서 그만큼 자기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겉으로의 그것을 가지고요. 세 번째는 “Aloneness(고독함)”-성공한 세상 부자들의 특징이 고독함이라는 거예요. 대표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와 명예를 한 몸에 누리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마지막에 죽을 때의 장면은 비참해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돈 뜯어 먹으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가족들도 옆에 없고, 수많은 여자들이 주변에 있는데 가족이 없어요. 진짜 사랑하는 가족이 없어요. 쓸쓸하게 죽어갔습니다. 비참하게, 약물중독이 되어서요. 지금은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빌 게이츠(William H. Gates)가 제일 부자이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라는 사람이 세계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휴즈 항공사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마지막 죽을 때에는요 점점 결벽증이 심해져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무균실에서, 간호원만 들락거리는 그 곳 침대에서 혼자 외로이 죽어갔습니다. 돈이 그에게 한 일이 뭐냐면, 최고의 무균실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무균실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혼자 죽어갔습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외로울 가능성이 많고, 더 거만할 가능성이 많고, 더 세상 사람들이 즐기지 않는 어떤 모험에 심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A는 “Adulteration(간음함)”-만약에 트럼프(Trump)라는 사람이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 그렇게 아내를 여러 명씩 바꾸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그렇게 한결같이 가정이 다 깨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모든 결과를 다 보여줘도 하나같이 사람들은 그래도 복권에 당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안 그럴 것 같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뭡니까? 바보만 당첨된 걸까요?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돈이 많아질 때 그 돈의 영적 파워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 중에 부자가 많지 않은 겁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예수님 믿기 힘들고, 그러니 예수님 믿는 사람 중에 부유한 사람들은 제대로 하나님을 믿을 때 사막의 보석처럼 귀한 사람들입니다.
더 영적 파워가 커질 때 그것을 누르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평민들보다 돈이 많을수록 더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같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더 큰 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그 돈의 영적 파워를 누를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이 점점 많아지면 이 “4 A”로 대표되는 면이 마음속에서 들끓기 시작해요. 세상에서 죄 짓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힘이 없는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 아닙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착하게 보여요. 그러나 그 사람에게 힘이 주어질 때 과연 끝까지 착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의문스럽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죄인 된 마음이 다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이란 무엇이냐, 그것을 마음껏 내 속의 모든 죄적인 마음을 펼칠 수 있는 영적 세력입니다. 그래서 돈이 많아질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돈이 여러분을 주장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교만하게 하고, 여러분에게 그저 세상의 여러 가지 것을 탐닉하게 하고, 결국은 외롭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이런 쪽으로 가게 합니다. 그게 맘몬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 돈을 갖는 사람이 신으로 인정할 때만 드디어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해요. 돈을 신으로 알고 섬기는 사람에게만, 그 사람에게 영적 파워를 낼 수 있다니까요. 돈을 신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그 돈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서의 물질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일단 돈을 신성시하기 시작하면 돈 때문에 ‘다른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내 돈 문제만은 건들 수 없다.’는 그런 마음자세를 가진다면 이미 돈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신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러한 면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마침내 고독하게 만들고 가장 비참하게 만들고 그 사람을 파멸시키는 도구가 돈입니다. 그게 재물입니다. 그래서 여기 제일 마지막 대목에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자리에 맘몬이 서게 되는 것이거든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느냐, 아니면 맘몬(돈)을 섬기느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둘 중에 누구를 섬기는 것 같습니까? 그 다음에 여기에 “불의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9절에 보니까 “불의의 재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똑같은 말이 8절에 보면 “옳지 않은 청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둘 다 똑같은 단어에요. “불의의 청지기, 불의의 재물” 그렇습니다. 여기서 불의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의미도 물론 성경에서도 나오지만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의미 말고, ‘불완전하다’는 의미의 불의함이 있습니다. 성경의 선악의 개념이 ‘완전하다, 불완전하다’의 개념으로서의 선악이 나옵니다. “당신의 계획이 선하다.” 이것은 당신의 계획이 좋다는 이야기예요. “두 계획 중에 이 계획이 선하고, 이 계획은 악하다.”
이때 악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것이 아니고 완전치 못하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좋다 나쁘다의 개념이 성경에 그렇게 나오는데, 여기도 바로 ‘불완전하다’는 개념으로 쓰인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것은 “Servant of inequity” 입니다. 불의의 재물은 “Mammon of inequity” 라고 하는 것인데, 그 불의하다는 말이 불완전하다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재물도 불완전해요. 청지기도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하다는 의미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내놓아야 되는 그런 직책이 청지기란 말입니다. 재물도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가져갈 수는 없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러한 청지기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잠시 잠깐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언젠가는 다 하나님 앞에 반납하고 빈손으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불의의 청지기입니다. 완전치 못한 것을 잠시 잠깐 잡고 있는 청지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치 못한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것을 완전한 것으로 신성시하면 진정한 의미의 재물의 의미를 잃게 되고 오히려 더욱 이 세상의 파멸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요, 이 세상에 살 때 그 맘몬의 법칙대로, 사고파는 관계로서 살지 말고 오히려 거저 주고 거저 받는 은혜의 법칙 속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도 은혜요,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서로 모든 관계를 갖게 될 때 서로 은혜를 주고 은혜를 받는 관계여야지, 서로 모든 관계를 마치 물질로서 사고파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에 대한 자세가 바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돈보다 인간관계를 더 우선시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 관계를 끊어먹지 말고, 오히려 관계를 위해서 차라리 돈을 버리라 이겁니다. 형제와 유산 때문에 다투지 말고 양보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형제와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겁니다. 가난한 집이 왜 더 우애가 있는 것 같습니까? 그것은 중간에 맘몬이라는 신이 끼지 않으니까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 가지고 형제들 관계가 갈라지는 가정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심지어는요, 교회에서도 제가 봤던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를 지어놓고 교회 안에서 싸움이 났어요. 싸움이 끊이지 않아요. 끊이지 않은 이유는 그 예배당 때문에 그랬어요. 예배당이 없어서 빌려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싸움이 나도 차라리 그냥 서로 두 개를 만들면 돼요. 그렇게 서로 감정이 상할 일이 없는데, 예배당을 지어놓고 나니까 그것을 서로 차지하려고 몇 년씩 재판하고 그러니까 그 다음에 그 사람들에게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영혼은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사람에 대한 미워함이 생기고, 돈이 뭐길래요? 불의한 것인데, 어차피 없어질 것인데, 그 돈에 연연하다가 문제가 생기고 관계가 끊어지면서 내 마음에 천국이 다 없어지는 겁니다. 사탄이 바라는 게 바로 그거예요.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천국을 빼앗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천국을 빼앗는 가장 큰 도구가 뭐냐면 바로 돈이에요. 돈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천국을 빼앗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그 돈을 과감하게 걷어차고 사람을 잡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천국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물질로 그냥 손해 보는 게 낳아요. 개인적인 관계에서는요. 좀 더 적극적으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돈을 더럽히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더럽히라는 이야기는 뭐냐면, 세상법칙에서는 돈을 가장 신성시 여깁니다. 신성시 하는 것을 돌처럼 여기면 더럽히는 거죠. 어떻게 돌처럼 여깁니까? 거저 주어요.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돈을 가지고 거저 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세상 사람들은 자선 사업할 때에도 거기서 뭔가를 얻습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얻을 수 있고, 자긍심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뭔가를 사고파는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칙 안에서는 거저 주는 것입니다. 돈을 은혜의 법칙 속에 가둬두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법칙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신성시하는 이 세상은 바로 그 거저 주는 법만은 아주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요? 절대로 거저 줄 수 없으니까요. “진짜냐? 확실하냐? 증거 대봐라.” 거저 줄려면 증거를 다 요구합니다. 세상 법칙으로는 거저 주는 게 더 힘들어요. 그런데 그 법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그 생각은 뭐냐면, 사람은 절대로 그냥 줄 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귀한 걸 그냥 주다니…. 그 밑의 진정한 동기를 기어이 밝히고야 말겠다. 숨은 의도를 밝혀내겠다.’ 이런 게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 안에서는 거저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저 줄 때 보면, 내가 거저 주기 시작하면요 그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천국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연보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께 뭔가 바라고 드리는 마음(물론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드리는 것 말고), 항상 하나님과 거래하듯이 드리는 것 있습니다.
여기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에도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린다는 것은 이미 그 다음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거저 주는 것을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서로 거저 주는 것을 연습해 보십시오. 그런데 거저 주는 것을 연습하다 보면 그 마음속에 어느덧 나도 모르게 찾아오는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연습한 것이 바로 그 거저 주기 연습입니다. 선교지역에서 일하고 온 사람들이 갔다 오면 다 변해요. 왜요? 가서 거저 주면서 내가 천국을 경험하고 온 것입니다. 또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가정들, 도움이 필요한 구호기관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 등 모든 것들이 거저 주기 연습입니다. 특히 갚을 길이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주는 것을 하다보면 오히려 그 속에서 내가 기뻐지고 내 마음속에 천국이 오는 것을 그 다음에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궁극적인 목표가 물질을 주어서 주시는 축복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은혜의 법칙이 내 삶 속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내 마음속에 있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입니다. 거저 주기요. 사고팔기에는 은혜가 없어요. 거저 주기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거저 주기에는 천국이 있고, 거저 주는 삶 속에 하나님이 나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 함께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계명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도 결국은 거저 주기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결국 그거예요. 거저 주기에요. 하나님도 우리에게 거저 주시고, 우리도 하나님께 거저 드리고, 우리끼리도 거저 주고,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냥 준다는 것이 반드시 따라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랑하면서 거저 주는 것이 같이 따라 있지 않으면 그 안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거저 주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 경험하기”입니다. 그런데 이 경험되는 진정한 사랑은 내가 거저 주기 전에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사랑은요 반드시 거기에 사고팔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자칫 잘못하면 사고팔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한 번 살펴서 그냥 주는 것을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냥 주는 것을 연습할 때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사고파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보다 더 우리가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게 갚을 수 없는 사람, 분명히 갚을 수 없는 그 사람에게 우리가 줄 때 거저 주기가 제대로 연습이 됩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바로 그러한 일에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주일학교에서도 우리 자녀들을, 우리 어린 심령들에게 사랑을 쏟아 붓고, 여전도회나 남전도회에서는 각 교회나 선교지나 또 어려운 곳을 돕는 데에서도 열심히 동참해 보시고, 그러다 보면 그 마음속에 내가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감격스러운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주는 데 내가 더 기뻐지는 그 은혜가 있을 때 드디어 하나님의 천국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더욱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바로 이런 거저 주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그저 내 놓으면서, 그게 더럽히는 거예요. 신성하게 여기는 돈을 더럽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싫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그 천국이 우리의 심령 속에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눅 16장 1~13절 / 오창우목사
할렐루야 !
오늘 말씀 가운데 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돈 있어도 영접 받지만, 돈 없어도 영접 받는 길. 병 들고 힘 없어도 대접 받을 수 있는 길을 내가 안다. 우리가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돈 있어야 대접받고 잘 생겨야 인정받고, 지식있어야 되는 것 같지만, 그럴 수 있을 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연예인들이 술 마시고, 이것저것 하면서 폐인이 되곤 합니다. 무엇입니까? 정상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인기를 먹으며 살다 보니 인기가 사라지면 걷잡을 수 없이 폐인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오늘 성경은 ‘가진 것을 빼앗기고 난 후에 저들이 나를 영접하리라.’ 가진 것이 없어도 저들이 나를 영접할 수 있는 길을 내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호주 시드니 한인교회에 다니는 한 여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호주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일상용어가 영어입니다. 가끔 한국말을 쓸 때가 있는데, 부부싸움 할 때입니다. 화가 나면 영어가 잘 안나오니까, 한국말을 썼습니다. 다른 말은 다 알아듣는데, 한국 말을 못 알아들어서 이 남편이 “야, 이 녀석아.”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묻자, 당황해서 그것은 한국 속어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호주 남편이 기분이 좋아서 ‘싸우는 데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는데, 마침 남편이 그날 쉬는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오셨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나가서 서투른 한국말로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끌어안으며 “야, 이 녀석아”라고 했답니다.
속이는 것은 당장은 모면할 수 있어도 언젠가 들통이 나서 낭패를 볼 때가 있습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눅16장은 난해하다고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봅니다. 주인의 것을 낭비하는 청지기가 있었는데 해고 당했습니다. 그랬더니, 맹랑하게도 청지기는 해고 당한 분풀이를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기름 백말 빚진 자는 오십말로 50% 탕감해 주고, 밀 백석 빚진 자는 팔십석으로 20%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탕감해 준 액수는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500데나리온 이상 된다고 합니다. 거의 노동자 2 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굉장히 큰 돈입니다. 왜 그랬는가 했더니, 가난한 자들의 것이 아니고, 부한 사업가들이었기 때문에 도와주면 나중에 도움을 받기 때문에 했다라는 것입니다. 잘했습니까? 잘못했습니까?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가 이렇게 행동한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지혜있다라고 합니다.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설명하시기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리고 충성하라 작은 일에 충성하고, 남의 것에 충성하라, 이 충성이라고 하는 말은 ‘피스토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 속에는 진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이렇게 진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진실’을 찾아 보았습니다. ‘진실’은 거짓이 없고 참되고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진실이 무슨 진실입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청지기가 정직하냐, 부정직하냐의 진실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한 것이 합법적인가? 불법적인가 하는 진실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윤리적이냐, 비윤리적이냐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여기의 진실은 관대함입니다. 너그러움입니다. 청지기의 불의함에도 칭찬을 한 것은 그가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여하를 떠나서 어려운 사람의 것을 도와 주었다는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불의한 청지기라기보다 오히려 주인입니다. 이 주인의 관대함입니다. 이 주인의 관대함을 청지기가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맡기면 인색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한다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너그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든 것입니다.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주인은 속상해서 그를 해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관대하게 한다는 것을 듣고 칭찬했습니다. 이전 장인 눅15장을 보면 잃은 양 , 잃은 탕자, 잃은 동전의 비유가 나오고 이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부분이 나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너그러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아래절을 보면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께 미움 받는 것이니라’ ,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해서 돈이 있어도 너그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돈이 있으면 봉사 많이 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돈이 많으면 봉사 많이 하게 될 것 같습니까? 인색하고 남을 도와줄 줄 모르고, 네 팔자가 그런 것이라 하며 돌보지 않습니다. 지식이 있습니다. 그래도 너그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판하고 정죄하고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대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대로 하지 않습니다.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권력이 있으면 그 권력 갖고 약하고 힘든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너그러움이 없이 그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 바리새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자신위해 사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사용했고, 그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어도, 병든 자를 고쳤어도,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였어도, 임금으로 모시겠다고 할 때에도 도망을 가 버리셨습니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불의한 청지기는 예수님을 많이 닮고 있습니다. 헬라원서에 보게 되면,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리가 들린지라’ , ‘들렸다’고 하는 것은 ‘비난했다, 참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난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과 교제하시면서 언제나 그들을 용서하시고, 저들이 진 죄의 빚을 탕감해 주시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책망해야 하는데, 다시는 가서 죄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청지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오히려 칭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이런 찬송이 생각납니다.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진실하게 하소서
주여 기도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기도하게 하소서
주여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 원하네
주여 나를 사랑하게 하소서
진실해야 합니다. 거짓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실의 의미는 옳고 그름의 의미가 아닙니다. 너그러움입니다. 관대함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작은 일에 진실하라고 합니다. 10-11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나폴레옹이 전쟁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밤이 깊었습니다. 한 처소에 보초가 졸고 있습니다. 얼마나 곤히 졸았는지 옆의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깨어나질 않습니다. 나폴레옹은 야단을 쳐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보초 대신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곤히 잠을 잤던지 새벽녘 해가 떠오를 때 잠에서 깨었습니다. 으스름한 새벽빛에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나폴레옹 이었습니다. 바들바들 떨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보초의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떠나갔답니다. 그 사병은 일생동안 나폴레옹을 위해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자를 무시해서 안 됩니다. 남의 부족하고 약한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기 쉬운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 것을 너그럽게 받아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작은 일에 진실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느새 큰 것이 좋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파트도 커야 하고, 가전제품도 커야 합니다. 어떤 냉장고는 들어가 살아도 좋을 만큼 큰 것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교회도 커야 인정받습니다.
10년 전 이야기입니다. 한 상공회의소의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독일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이 사람에게 한국에서 잘 팔릴만한 세탁기를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중산층의 경제적 능력을 생각해서 비교적 저렴하고 튼튼한 작은 세탁기를 추천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결국 한국인 동료의 권유에 따라 에이지 회사의 최고급 세탁기를 들여오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웬만한 집에서도 쓸 수 없는 최고급품입니다. 어떻게 되었을 것같습니까? 없어서 못 팔았답니다. 이 후 한국에서의 판매전략은 단 하나, 크고 비싼 것이었습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세계 명품이란 명품은 어떤 것이냐를 가리지 않고 한국에 오게 되면 잘 팔린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저는 큰 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격에 맞지 않으니까, 검소하게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슬픈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큰 것을 자꾸 찾는 것, 우리의 정체성을 거기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장로님이 기도도 하셨습니다마는 일제 35년, 6.25 동란, 그 시절을 겪었습니다. 양반과 상놈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 사이에 갑자기 돈이 많아지고, 돈만 많으면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뽐내고 싶고 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거기서 찾으려 합니다. 그것 하나 갖고 자기의 신분이 상승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집이나 옷, 자신의 물건을 갖고 자기가 세계에서 최고가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속은 다 비었으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졌다고 우리의 신분이 상승한 것처럼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없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호텔에 가서도, 티코가 가면 문 안 열어주고, 그랜저가 가면 문을 안 열어 줍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말입니다. 외모지상주의,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어떻게 다 이쁠수 있습니까? 어떻게 다 배울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죄많은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를 두 팔 벌려 환영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맺돌을 목에 걸고 죽으라고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작은 것에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까? 너무나도 슬픈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너무나 살기 힘듭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장애인들이 고속철도를 한번 타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속철도에 장애인들이 탈만한 자리가 없습니다. 새로 잘 지은 고속철도 역사에, 까만 스프레이를 갖고 장애인도 고속철을 타고 싶다라고 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갖고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속상한 것은 한국에는 큰 소리 치지 않으면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힘 있는 자, 부자의 소리만 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 사회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누가 해야 합니까? 우리들이 해야 합니다. 식당에서 큰 소리 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담배꽁초 좀 안 버리면 좋겠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보면 꽁초를 뚝 버립니다. 경로석에 앉은 젊은이들도 나쁘지만 중년여인들도 나쁩니다. 매사에 하나님 믿는 것도 열심히, 설교도 가능하면 외우려고 합니다. 식당에 가서 봉사 좀 하십시오. 설거지 안하니까 밥도 남기는 것입니다. 봉사를 안하니까 밥투정하는 것입니다.
가서 일해야 합니다. 작은 것, 하찮은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대접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희생하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지지난주 미국 개혁교회 총회장, 총무, 선교 책임자 세분과 저와 다른 목사님 두 분, 여섯명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개혁교회 총회장, 총무는 갈랑 선교사의 선교비를 들고 왔습니다. 한 천만원 정도 갖고 와서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질문을 합니다. 한국교회는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우리 교회 엘림도 있지만, 6.25 동란때 도와 주신 이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중동 이슬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도 고맙지요. 우리가 어려울 때 그곳에 가서 오일달러를 벌어와서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으니, 감사하지요.” 조선족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조선족들도 참 귀하지요. 일제 식민지 시절 어려울 때, 그곳에 가서 독립운동 했던 이들의 후손이 아닙니까? “도와 주어야지요. 우리 교단에서 다른 교단과 달리 외국인들을 돕는 쉼터를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더불어 미국 타코마 지역 샤론의 집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이 하는 말이 ‘원더풀’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 관심을 갖는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너무나 기쁜 마음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작은 일에 진실하고 작은 것에 충성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사람들도 칭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남의 것에 충성하고 남의 것에 진실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작은 것에 진실하라고 하는 것은 가진 자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면 남의 것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받은 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캐스퍼라고 하는 스위스의 작은 시계 공장 사장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계가 잘 안 팔려 부도위기와 더불어 경제적 어려움으로 끼니를 거르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점잖은 신사가 와서 시계를 사갔습니다. 옆에 있던 아들도 신이 나서 이젠 되는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이 시계를 산 후 하는 말이 “며칠 전, 옆의 집에서 시계를 샀는데 그 시계가 가지 않습니다.” 캐스퍼가 옆집의 그 시계를 고쳐 주고는 손님에게 판매한 시계를 다시 달라고 했습니다. 옆에서 보던 아들이 화를 냈습니다. 아들에게 말하기를 “받아서 복된 돈이 있고, 복되지 못한 돈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손님이 이틀 후 다시 찾아왔습니다. “나는 무역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시계를 사다가 팔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당신의 것을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자그만치 2년치를 계약했습니다. 내 것과 남의 것,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까? 남의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빌려온 도끼가 물 속에 빠집니다. 어떻게 합니까? 엘리사가 건져서 갖다 줍니다. 빌린 것은 당연히 갖다 주어야 하고, 갚아야 합니다. 한국 국민이 1인당 300만원 정도의 빚을 지고 산다고 합니다. 나는 빚을 안지고 사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공적자금을 안 갚아서 그렇답니다. 내 물건과 빌려온 물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내 것과 남의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내 기분과 남의 기분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내 명예와 남의 명예를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성경은 남의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쓰면 안 됩니다. 잘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마음대로 씁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릴 줄 아는 사람, 그것이 진실입니다. 교회의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돌아가면서 인색한 것 같아도 빨리 꺼야 합니다. 집에서도 아껴야 합니다.
링컨에게는 스탠톤이라고 하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링컨을 비교하는지 링컨은 고릴라라고 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될려고 할때에 아프리카에서 고릴라를 사다 놓으면 되지, 링컨을 세워놓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이럴 정도로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스탠톤을 비서실장에 앉혔습니다. 링컨이 죽었습니다. 스탠톤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계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배했던 사람이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스탠톤도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냥 끝까지 더 받으려 합니다. 가진 자만 책임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자도 책임이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더 해 주어야, 얼마나 더 사랑해야 만족하겠습니까?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사람이 대접 받는 것입니다. 사랑해 주어도 사랑을 모릅니다. 늘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삼상25장에 보면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나옵니다. 아비가일은 나중에 다윗의 부인이 됩니다. 그런데, 나발은 부자였지만 몸이 빳빳하게 굳어서 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이 쫓겨다닐 때에 나발의 양들을 지켜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윗이 부하를 시켜 추수때가 되었으니 먹을 것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나발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군대를 이끌고 간다고 하자, 잔칫상에서 먹다 말고 빳빳히 굳어 죽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 후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받은 자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인 줄 믿습니다. 가진 자는 작은 자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난 한 자와 없는 자는 받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원망불평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만 생각해도 감사할 터인데, 왜 불평하며 살아갑니까? 작은 것에 진실하고, 남의 것에 충성된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려 합니다. 누가 저에게 묻습니다. 정원 100명인 잠수함에 99명이 탔는데 이 배가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깔깔 웃으며 대답하기를 잠수함은 원래 물에 들어갑니다.
코카콜라는 입술을 붙이지 말고 대답해 보십시오. 또 웃으며 대답하기를 코카콜라는 어떻게 발음해도 입술이 붙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똑똑한 것 같아도 속이려는 사람은 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속임을 당하지 않는 것이 중하지만 그렇게 살 생각을 하지 말고, 좋은 사람을 만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속임 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진실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일에 진실하고, 남의 것에 진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에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복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무엇을 지키려는가
눅 16장 1~13절 / 김경호목사
오늘 본문은 매우 난해한 비유입니다. 청지기가 재산을 낭비한다는 고발이 들어 왔습니다. 이에 주인이 청지기를 해고시키려하자 청지기가 생각했습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는 꾀를 냅니다. 빚진 사람들을 불러 채무증서를 고쳐 쓰게 했습니다. 기름 백 말 빚진 사람은 쉰 말로 밀 백 섬 빚진 사람은 여든 섬으로 고쳐 주어 자신이 해고당한 이후에 이 사람들에게 신세질 것을 계산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라면서... 그리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야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라고 충고합니다. 그 다음은 또 청지기의 잘못을 힐난하고 비꼬는 말씀들이 나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생각의 갈래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첫번째 생각
합리적 해석을 가하는 것입니다 .
갖가지 방법을 써서 불합리성을 해소하고 합리성을 갖춘 설명이 되게 해서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부재지주들이 소작인들에게 앞으로 받을 소작료를 미리 얹어서 계약서를 쓰게 했는데 이 청지기는 자신이 받을 몫을 제외하고 그냥 원금만 쓰게 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이자받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이자 없이 고쳐 쓰게 했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청지기를 칭찬했다는데 맞추어 청지기를 옹호하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구태여 본문이 잘 맞지 않는 것을 합리적 해석과 합리성이라는 틀 안에 구겨 넣으려는 시도에 대해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의 현실의 구조는 꼭 합리적이고 이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이 앞뒤가 맞지 않는 비유 쪽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늘 수미상응하고 자명한 논리로 세상이 전개되기를 원합니다. 나쁜 놈으로 분류된 놈은 항상 나쁜 길을 가야하고 좋은 놈으로 주목받는 사람은 항상 좋은 역할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의 이성이 길들여져 온 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화려한 가치의 변신은 불의하고 의롭고, 좋고 나쁘고의 일체의 가치 판단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 괴팍한 본문은 순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견디지 못하게 비틀어 놓습니다. 비틀어 진 것을 틀어진 대로 받아들이면 안되나? 왜 매사에 의와 불의를 꼭 가려내야 하는가? 우리의 일상사에 의롭다고 생각한 사람이 우리를 크게 실망시키기도 하고 불의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의외로 좋은 사람임을 나중에야 느끼게 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부터 의와 불의를 심판하고 판단하는 것을 중지 할 수는 없는가?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을 골라서 할 수 있으면 됐지 다른 사람을 내 인식의 틀 안에 분류해서 구겨 넣고 정리해야 속이 풀리는 그 독법을 이젠 중지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을 이 본문에서 읽어봅니다.
두 번째 생각
우리는 대개 눈에 보이는 재물, 건물, 일의 결과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그가 해고당할 위험에서야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재물이나, 눈에 보이는 업적을 남기는 일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을 함께 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일, 어떤 조직이냐, 그 일의 결과와 업적, 규모, 크기를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하며 치중합니까? 그러나 어쩌면 그런 것은 하나도 소용없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한다고 했을 때 그 행사가 펼쳐보이는 화려한 규모나 가시적인 성과보다도 그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서로가 힘을 모으고 힘을 얻게 되었느냐, 얼마나 깊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큰 일을 벌였으나 그 과정에서 마음이 엇갈려 서로 불화하고 갈라서게 되었다면 안하느니만 못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바로 사람을 얻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했다고 칭찬받고 아울러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충고합니다.
세 번째 생각
역사적 배경을 살펴봅시다.
여기에 세 층위가 나옵니다. 부재지주-청지기-소작농의 관계인데 예수님의 다른 비유에도 이런 층위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지주는 거대한 재산가입니다. 기름 백 말을 소출하려면 올리브나무 160그루 이상이 있어야 하고 밀 백 섬 정도를 소출하려면 우리 단위로 300 마지기 이상의 밭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드러난 사람 이외에도 많은 소작농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전담 청지기까지 있으니 이 주인의 재산은 엄청날 것입니다. 아마 이 재산은 그 당시 식민지의 소유자인 로마로부터 빌린 돈일 것입니다. 소작료는 50%이상의 살인적인 것이었고 앞서 본바와 같이 선 이자로 채무계약 증서를 매년 다시 쓰게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불의한 관리인이 슬기롭다고 칭찬받는 가치의 전도가 나타나는데 복음서가 슬기롭다는 것은 주인의 편에 있던 사람이 소작농에 편으로 섰다는 것입니다. 8절에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는 말은 이상합니다. 여기서 주인은 퀴리오스 즉 주님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청지기가 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슬기롭다고 칭찬을 하십니다.
만약 이런 청지기의 행위-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니 오늘 우리의 보편적 윤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청지기는 사문서 위조, 사기, 횡령등 그 죄몫이 엄청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칭찬 받는다면 아마 그 시대 제국의 체제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일 것입니다. 이런 혁명적인 생각이 이어진다면 그 이후에 나타난 봉건체제와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까지도 설 수 있는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급격한 혁명성, 가치의 전도는 본문에 연이어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이어집니다. 부자와 그 집 앞에 살면서 그 집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던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면은 바뀌어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고 부자도 죽어 땅에 묻혔는데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보니 그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너는 살아있을 때 온갖 고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으니 그는 지금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혁명적인 전도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여기서 부자가 특별히 나쁜 일을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나사로는 연명했고 그가 그 집 주변에 머무르며 연명하고 살 수 있도록 부자는 관용한 듯 보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청소 차원에서도 막았을 터인데... 거지 나사로도 특별히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렸기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유없이 그냥 부자이기에, 그냥 가난한 사람이기에 그 입장이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16장의 두 비유 중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아마 부자들을 겨냥해서 주는 비유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비유일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가 있는 것도 못써서 불붙는 지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자기가 가진 것이 없는데도 칭찬받는 역할을 해냅니다.
두 비유 모두 놀라운 과격성과 급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혁명적인 예수님의 비유를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후대에 가해졌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손질할 필요가 있어 청지기 앞에 '불의한'이란 수식어를 은근히 넣어 가치 평가하고 내용을 온건하게 고쳤습니다. 학자들은 순수한 비유로 1-7절까지로 생각합니다. 8절 이하는 이러한 혼돈과 헷갈림의 흔적들을 보여줍니다.
8절 후반부에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아들보다 더 슬기롭다"고 해서 이 비유의 평가와는 달리 청지기를 이 세상의 아들로 격하시키고, 빛의 아들과 대조시킵니다. 9절의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그래도 본 비유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만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 "가장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너희에게 내주겠느냐?"(10-12절)은 완전히 본래의 비유의 의도와는 다른 지주의 입장에서 후에 자기 것을 관리하고 지켜야하는 자 편에서 정반대의 뜻이 첨부 개작된 것입니다. 교회가 그들 편에 서게된 불행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흔적입니다. 그 외에 13절은 또 다른 엉뚱한 주제가 첨가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급격한 예수님의 혁명적 말씀에 물타기를 해온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 우리들은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에 물타기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
눅 16장 1~13절 / 이종윤목사
한 부자집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습니다.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보던 일을 셈하라고 했습니다. 퇴출당할 것을 안 청지기는 채무자들을 불러 기름 100말을 50으로, 밀 100석을 80으로 위조증서를 쓰게 합니다. 주인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다’하여 칭찬합니다. 그리고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사기꾼이 칭찬 받는 이 비유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종종 죄 때문에 동물보다 어리석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철새들은 겨울이 오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추위를 피하려고 땅을 파고 땅속으로 기어드는 동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중에는 다가올 미래 - 죽음, 심판 - 를 준비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엉뚱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u시대, ‘ubiquitous’ 유비쿼터스 시대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무소부재(Omnipresence)라는 뜻의 신학용어입니다.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 지식이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여기에는 중심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가상공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에게 위기가 오듯이 이 세대의 아들들에게도 위기가 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 ‘유비쿼터스’(ubiquitous)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 세대의 아들들을 통해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I. 분명한 생각을 하라.(Clear thinking)
여기서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는 예수님이 아니고 그 청지기의 주인입니다. 그가 미래를 준비한 것을 칭찬한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 여기서 지혜(Φρονἰμως, 프로니모스)는 wise가 아니고 ‘shrewd’(약삭빠른), ‘prudent’(타산적인)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세대의 아들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훨씬 재치 있고 약삭빠르게 처신합니다. 그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오늘 죽음, 심판, 구원, 하늘나라와 같은 궁극적 문제를 멍청하게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질병이 우리에게 있다면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II. 미래 사항을 재치 있게 준비하라 (Prepare the future)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3) 청지기는 어차피 쫓겨나면 막노동은 힘이 들고 빌어먹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빚진 자들을 불러 탕감해 주고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보험회사 상품(생명보험, 화재, 건강, 교육, 여행, 도난 등을 위한 보험)은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나 미래를 대비한 것입니다.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밤 네 생명을 부르시면 너를 위해 쌓아 놓은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고 물으십니다. 오늘 말씀은 은퇴 후 삶을 준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III. 불의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알라 (Know how to use money)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9절) 주인의 뜻대로 사용치 못하는 재물은 불의합니다. 주님은 그 재물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 중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 된 그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이들을 도운이가 양입니다. 그가 구원의 백성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The use of Money'라는 자신의 설교에서 다음 세 가지 - ① 할 수 있는 대로 벌어라(Gain all you can) ② 할 수 있는 대로 저축하라(Save all you can) ③ 할 수 있는 대로 주어라(Give all you can) - 를 이야기 합니다.
IV. 지극히 적은 것에 충성하라(A Person must prove faithful in little things)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마 25:21) 땅의 일을 적다고 무시하지 말고 하나님 주신 큰 사명으로 알고 행하십시오. ‘불의한 재물에 충성 못하는 이에게 누가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1-12절) 물질을 바르게 쓸 줄 모르는 이에게 영적 보화를 맡기겠습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오.
맺는 말
1.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 중 더 중히 여기는 것, 더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까? 지금 나에게 하나님은 어느 자리에 계십니까?
2. 불의한 청지기는 재빨리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청지기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을 지체하지 않고 행동화 했습니다.
3. 이 세대의 아들인 불의한 청지기에게도 주인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반드시 계산할 날이 옵니다. 그날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가 참 지혜 있는 빛의 아들입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
석원태목사 / -하나님과 사람과 재물- 누가복음 16:1-13 -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온통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자주 TV에서 나오는 동물의 세계나 식물의 세계, 조류들의 세계 그리고 바다 속에 있는 어류들의 세계를 보고 감탄에 잠길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광활한 저 우주세계의 장면들 앞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기능면에 있어서 동식물세계나 또 다른 피조세계가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보다 월등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적 본능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철새들은 자기 생존을 위하여 겨울이 다가오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다람쥐들은 겨울을 위해 식량을 비축합니다. 어떤 동물들은 아예 겨울잠을 자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미련한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얼마나 영악(모질고 악함)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보게 됩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불의한 사람이 남의 재물을 가지고 자기를 위하여 선심을 쓴 일을 칭찬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신자들이 하나님의 재물을 가지고 남들을 도와주는 것을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교회) 운동의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Ⅰ. 주께서 들려주신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내용을 봅니다(눅 16:1-8a).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이 청지기는 저 아브라함의 재산을 관리했던 엘리에셀이나(창 15:2), 애굽의 보디발 장관 집의 살림을 살았던 요셉과 같은 경우입니다(창 39:6). 이 청지기들은 노예와는 구별되는 재산 관리인이었습니다. 당시 근동 아시아 등지의 부자들은 자주 집을 청지기에게 맡기고 멀리 외지로 다니다가 돌아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 불의한 청지기들은 주인의 재산관리를 잘 못하거나 착복하는 일들이 흔하였습니다. 본문의 부자 주인의 경우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횡령죄를 지었습니다(눅 16:1).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그를 불러 청지기직을 파면시켜 버렸습니다. 빨리 사무정리를 하고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눅 16:2). 이런 경우 그 청지기를 향한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주인에게로부터 해고를 받은 청지기는 참으로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주인의 재산관리 장부를 허위조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3절과 4절 중에 말하기를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급히 연락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장부를 허위로 조작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자에게는 오십이라고 증서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팔십이라고 쓰도록 하였습니다(눅 16:6-7).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문서를 위조하여 주인에게 진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사실상 모두가 공범자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이 해고를 당하고 난 이후에 그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고 도움을 받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준비에서였습니다(눅 16:4). 그가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선심을 쓰면 후일에 그들이 자기를 대접하며 원조해 줄 것을 내다보고 행한 타산적 행동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주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주인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자기의 장래를 위하여 지혜 있게 행한 일을 칭찬하였다고 하였습니다(눅 16:8a). 물론 그 주인은 자기 청지기의 불의한 생각이나 행동 그 자체를 정당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비록 그가 불의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행한 그 용의주도함과 현명함 자체를 높이 평가하였다는 말입니다.
Ⅱ.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한 주님의 교훈입니다(눅 16:8b-13).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6:8b).
여기 ‘이 세대의 아들들’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불신자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빛의 아들들’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요 8:12, 엡 5:8, 살전 5:5). 불신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고 장래를 대비하는 면에 있어서 우리 신자들보다 훨씬 지혜롭다고 한 것입니다. 저들은 이 세상의 신, 곧 사탄의 영을 받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불신자들이 용의주도한 저들의 처세로 칭찬을 받았다면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게 살아서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우선 불의한 청지기의 처세를 통한 교훈입니다.
비록 그가 불의한 청지기였으며 그의 처세까지도 불의하였으나, 그가 만난 위기 앞에서 취한 처세술을 통하여 우리도 선한 일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 그것은 바로 그가 만난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해고를 당한다고 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직감하고, 직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하며 자신이 만난 문제를 분명히 파악했다는 사실입니다(눅 16:3). 이런 일은 여러 다른 경우들에서 우리 신자들이 만나는 문제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러 종류의 위기가 닥쳐올 때, 자신들이 만나는 문제들에 대한 바른 현실인식을 하는 것은 신자들이 취할 지혜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세에 있어 사리가 어두운 자는 모든 일에 뒤떨어집니다.
2) 뿐만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였습니다.
그는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눅 16:4a)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직 주인의 사무정리를 할 동안에,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선심을 쓰려고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남의 것을 가지고 선심을 써서 인심을 얻고, 자기의 전정(前程)을 예비하려고 했습니다(눅 16:4). 신자들은 남의 것이 아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선행을 다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1,000배의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이 되겠습니다.
3) 마침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감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개인적으로 모두 불러 차용증서를 위조하면서까지 저들의 빚을 탕감하여 주고 말았습니다(눅 16:5-7). 저들은 서로가 공범죄를 지었습니다. 저들은 서로가 과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에 바른 인식을 하고 약속된 미래를 준비하는 신자들에게야 어찌 지체없이 과감하게 결단하는 행동이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교훈입니다.
2. 우리를 향한 영적 교훈입니다.
본문 16장 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응용하여 우리를 교훈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1)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였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재물 자체가 불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한 사람들에게 불의하게 악용 당하고 있는 이 세상 물질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선용하여 이웃을 구제하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재물을 이용하여 구령(救靈) 운동에 선용하라는 말입니다. 전도비로, 선교비로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설 때 주님 앞에서 상급과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더 확실하게 밝혀 놓은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했던 오른편에 있던 양들에게 임금되신 주님께서 주신 의인들에 대한 보상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들은 주린 형제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형제에게 마실 물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으며,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하였습니다(마 25:35-36).
그 때에 임금되신 주님께서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사실상 재물로 주님을 섬긴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5:40).
2) 재물로 친구를 사귈 때 믿음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6장 10절과 11절에 재물과 관계되어 ‘충성’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피스토스(pistov")입니다. 곧 신실한(faithful), 정직한(honest) 등의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입니다.
이 세상 재물은 천국의 것들에 비교하면 ① 지극히 작은 것이고(눅 16:10), ② 또 불의한 것이고(눅 16:11), ③ 더욱이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눅 16:12), 곧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천국의 것은 ① 큰 것이고(눅 16:10), ② 참된 것이고(눅 16:11), ③ 또 너희의 것(눅 16:12), 곧 영원한 우리의 소유라고 하였습니다.
문제의 초점은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는 데는 신실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고, 또 불의하게 악용되는 재물을 가지고, 더욱이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신실하게 친구를 사귀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친구를 사귀는 데 재물을 선용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현재보다 1,000배나 더 크고, 참되고, 영원한 천국의 것이 주어진다고 하였습니다.
3) 두 주인, 곧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눅 16:13)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인(oikevth")은 주인의 소유의 일부인 노예를 가리킵니다. 하인(노예)에게는 한 주인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재물은 인생의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받았고, 또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히 이 사실을 구분지었습니다. 만물(재물)은 다 너희(인생)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3:21-23).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① 하나님의 창조질서, 통치질서, 축복질서를 파괴하는 죄가 됩니다. ② 또한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하게 여기는 죄가 됩니다. ③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간된 고유한 축복의 권세를 파괴당하는 저주가 됩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축복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창 1:28). 그것은 마침내 인간이 유물주의, 배금숭배로 전락하는 저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과 함께 망하는 저주입니다(행 8:20, 딤전 6:9-10).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주인으로 섬길 일이 못 된다고 한 것입니다. 재물은 마땅히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존의 수단으로 그리고 친구를 사귀는 전도와 선교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국의 풀맨 차량의 제조자이고 풀맨 도시를 소유한 풀맨(Pullman)이라고 하는 큰 부자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한 달러를 소유하던 그때보다 행복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나는 많은 돈으로 말미암아 근심이 생겨 밥도 맛있게 못 먹고, 잠마저도 평안히 잘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돈으로 오는 많은 근심에 찔려 아파하던 사람처럼 느껴집니다(딤전 6:9-10).
미국의 큰 플라스틱 회사 사장으로 이름난 부자 스텐리 템 씨는 날로 번창하고 바빠만 가는 회사 일로 인해 옛날처럼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지 못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큰 회사는 네 번째 도산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 속에는 물에 빠져가던 베드로가 주님을 찾아 구원을 받던 일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시간 그는 급히 변호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우리 플라스틱 회사의 사장은 하나님이시며, 매 수익금의 51%는 사장님의 것입니다.’라고 한 서약입니다.
그 후 그는 매일 2시간씩 회사 일을 사장이신 하나님과 상의(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그 회사는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수익금의 51%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교회에 드려졌습니다. 그 결과 연간 200만 달러 이상의 순이익금을 내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빛의 아들된 우리는 예수님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의 아들로서 살면서 만나는 온갖 경우의 현실적 문제를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가지고 미래를 계획하는 기회를 삼고, 서슴지 않는 결단적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불의한 사람에게 악용 당하는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친구의 영혼을 인도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믿음(충성)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과 재물을 동등한 자리에 놓고 섬기는 종이 되거나, 아니면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위에 올려놓는 배금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재물을 하나님 섬기는 도구(수단)로 선용해야 합니다. 오늘의 재물을, 현재보다 1,000배나 나은 내일의 축복을 향유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삶의 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지혜 있는 청지기
눅 16장 1~13절 / 김홍도목사
지난 10월 19일부터 23일까지 "세계기독교실업인대회"가 조선호텔에서 있었습니다. 그 때 "The New Star"라고 하는 월간지 기자들이 제게 찾아와 세계기독교실업인대회에 대해서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저의 의견을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 으로 말했습니다.
"크리스챤 비지니스 맨(Christian business man)들은 말하자면 예수 믿는 사업가들이요 예수 믿는 재산가들인데 그들에게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청지기 의식의 철저한 자각'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지기란 말은 "주인의 소유를 맡아 쓰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번 재물이지만 내 것이라 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이라는 철두철미한 의식을 가지고 그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왕성했던 소련이 공산국가가 된 것은 크리 스챤들이 청지기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재물을 자기만 위해 쌓아두고 바로 사용하지 못한 죄값이기 때문 입니다.
오늘날도 사탄이즘(마귀의 사상)인 콤뮤니즘(communisn, 공산주의)을 이기고 막아내는 길은 기독교의 청지기 사상(stewardship)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청지기 사상을 철 저히 가져야겠지만 특별히 기독교 실업인들은 많은 달란트를 하나님께로부터 분배받았으니 그들의 사 명이 참으로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 철저한 사상을 가지고 내게 분배된 재산을 선교사업을 위해 쓰지 않으면 이 세계가 공산화 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고 따라서 국가의 안보도 유지할 수가 없 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개인 신앙을 위해서도 청지기의 사명을 다해야 끊임없이 축복을 받을 수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에 더러운 것이 모인다는 말대로 선한 사업을 위해 물질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신앙도 인격도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고 맙 니다. 부요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보다 마귀의 유혹이 더 많고 범죄의 기회가 더 많은 법입니다. 재물이 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영원히 내 것이 못됩니다. 내게 들어온 재물을 주를 위해서, 이웃을 위 해서 선한 사업을 위해서 써야만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난해한 성경말씀 중에 한 곳입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는데 이 청지기 가 주인의 소유를 바로 쓰지 않고 허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다가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누가 16:2). 이렇게 사표를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청지기는 이 말을 듣고 "내 직분을 빼앗기게 됐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하 면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청지기는 한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청지기 직분을 빼앗 길 날이 멀지 않았으니 청지기로 있을 동안에 인심이나 써두자.
그러면 그 사람들이 내가 이 청지기를 그만 둘 때 나를 봐 주고 영접해 줄 것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전부 불러다가 기름 100말 빚진 자는 50말로 탕감해 주고 밀 100석 빚진 자는 80석으로 탕감해 주면서 인심을 써두고 미래를 위해 예비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 가 지혜 있게 하는 것을 보고 칭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대체 주인의 재물을 잘못 사용 한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했으니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대단히 해석이 곤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알 것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그 자체를 다 도덕적인 기준에서만 생각하면 그 뜻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우리는 모두 청지기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온 세상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란 말씀 드린대로 "주인의 소유를 맡아 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제 마음대로 자기만 위해서 쓸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8:13에 보면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 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하였고 17, 18절에 보면 "또 두 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 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번 돈이라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벌게 해 주셨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셨다고 하는 청지기 사상을 우리는 철저하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것이지 내 소유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 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대로 쓸 수가 있습니다. 이 청지기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아니하면 우리는 모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청지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재물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이 또 재물이 없어도 있는 것 같이 생각 하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실 마음에 불안과 공포, 근심과 걱정을 물리치고 평안을 누리며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또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재물뿐 아니라 우리의 건강도,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루 아침 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지 내 것이 아닙 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27:3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도 자기가 낳고 싶다고 마음대로 낳고 죽이고 싶다고 마음 대로 죽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루 아침에라도 다 빼앗아 가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빼앗길 날이 온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우리도 청지기 직분을 빼앗길 날이 반드시 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의 재물도 건강도 생명도 홀연히 우리를 떠나갈 때가 옵니다. 우리의 명예와 권세도 자식도 남편도 언젠가는 다 떠나야 하고 이별해야 되는 때가 오고야 맙니다. 혹시 잃지 않고 오래 지탱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죽음의 커튼이 서서히 닫혀지는 날에는 우리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고 아무도 데리고 갈 수 없고 홀로 벗은 몸으로 가야만 하는 것 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Ⅱ세는 이상한 종을 하나 두었는데 그 종은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필립 Ⅱ세 대왕 앞에 와서 말하기를 "왕이여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Remember that you must die!)" 하고 똑같은 말을 매일 아침 했다고 합니다. 대단히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이 우리를 떠나든지 우리가 재물을 떠나든지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허비하거나 내 것이라고 나만 위해서 쓰거나 내 뜻대로 쓰지 말고 주인의 뜻대로 써야 할 것입니다.
저의 형님 친구분 중에 의사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는 총각 시절에 집사까지 했던 사람인데 의사가 되어 병원을 개업한 후로는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그래 형님이 찾아가 권면을 하니까 "가만히 있어 , 내가 빌딩 하나만 짓고 나면 나갈께"하고 말했습니다. 정말 밤낮 열심히 돈을 벌더니 빌딩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래서 찾아 갔더니 "아, 이제 내가 자가용만 사면 자가용 타고 교회 나갈께" 그리고 얼마쯤 있다가 자가용을 샀는데도 또 안 나오더랍니다. " 왜, 자가용 샀는데 안 나오나?" 그랬더니 "아냐, 내 이제 조금만 더 돈을 벌고 나가겠네" 하며 교회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발소에 갔다 나오는 모습을 보니까 얼굴이 핼쑥하고 심상치 않은 얼굴을 하고 있더랍니다. 그래 물어 보았더니 요새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돼서 그렇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몇달 후 전화가 오기를 그가 위암에 걸려서 지금 시간을 다투고 있으니 빨리 와 달라고 하는 것이 었습니다. 갔더니 그제서야 울면서 회개하더랍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그는 회개하고 예수 믿고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그 큰 빌딩도, 아름다운 처자식도, 그 귀한 박사학위도, 그 많은 병원시설, 왕진가방, 저금통장도 고스란히 놓고 떠나 갔습니다.
우리의 건강, 재물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맡아 있는 동안 이것을 지혜롭게 쓰는 자가 축복을 오래 지속하는 것이요 현세뿐 아니라 내세까지도 하나님 앞에 상받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3. 예비하는 지혜를 가지라>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장 강조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이 청지기가 직분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을 깨닫고 이것을 위해서 예비한 것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주인께 빚진 자를 다 불러다가 탕감해 준 이 옳지 않은 청지기에게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했다"고 하는 것은 제멋대로 인심쓰고 잘못 사용한 것을 잘 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청지기로 있을 동안 미래를 위해 예비했다는 것을 지혜롭게 본 것입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이 청지기 사무를 끝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내 주인의 소유를 맡아 가지 고 있을 때 미래를 위해 죽음 후의 영원한 세상을 위해 써 두는 자가 지혜롭다고 하는 것을 이 성경 말씀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손안에 들어 왔을 때 하나님 을 위해 선한 사업을 위해 써 두는 그것이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영원히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쓰는 것이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중대한 교훈은 청 지기로 있을 동안 네 마음으로 쓸 수 있을 때 빼앗긴 후를 위해 써 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직 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영접하리라" 한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께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한 말씀은 이 세상 재물이란 다 불의한 재물인데 이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영원한 친구 예수 그리스도를 사귀며 써 두면 후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영접한다는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6:17-19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누가복음 12:33에 보면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 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6:10에 있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하는 말씀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지극히 적은 금전 하나를 바로 쓰지 못하면 지극히 크고 영원하고 신령한 은혜를 어떻게 바로 쓰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11절에 보면 "너 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면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 희에게 주겠느냐" 했는데 여기에서 "남의 것"이라는 말은 모든 재물을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것이 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강조한 말씀이며 "내 것"이라는 말은 영적이며 영원한 것인데 이것은 현세나 내세에나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 같이……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섬길 수 없다(누가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한 말씀은 재물 밖 에 없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재물은 내 것도 아닌데 그것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면서도 믿지 않고 실천하지 않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등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등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많지도 못 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는 것은 내세만 위해 유익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느 은행에 맡겨두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은 훗날 나와 내 자녀에게도 후히 갚아 주시 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9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 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영원히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잠시 내게 맡겨 주신 것을 철저히 깨닫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미래를 위해 내세 를 위해 써 둡시다. 이것이 지혜 있는 청지기의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 지혜 있는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예비하는 지혜
눅 16장 1~13절 / 김홍도목사
어떤 재산이 많은 부잣집에 한 청지기가 있었는데 그가 얼마나 불의하고 주인의 재산을 마구 허비했던지 하루는 그것을 안 주인이 그 청지기직을 그만 두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청지기는 큰일났습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떡자니 부끄럽고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근심과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의 재산을 빌려다 쓴 빚장이들을 모두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 모든 빚을 자기의 마음대로 탕감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기뻐하며 이 청지기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청지기가 불의하게 일을 처리했는데도 주인은 오히려 지혜롭다고 칭찬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이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또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 주는 옳지 못한 일을 했는데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했으니 성경 말씀을 어멓게 읽고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성경을 반드시 어떤 도덕적 견지에서만 읽으려고 하면 도무지 해석과 이해가 안 될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읽은 말씀도 영적인 교훈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청지기가 지혜있게 일을 하였으므로"라고 기록되었고, 또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디 지혜롭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청지기 직분을 빼앗긴 후의 일을 예비할 줄 아는 지혜를 이 청지기에게서 배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청지기인 것을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맡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있는 재물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내가 맡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도, 생명도, 혹은 자식이나 어떤 지위나 권세도 다 하나님의 것을 내가 맡아 가지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는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청지기 의식 속에 사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면 모든 것이 다 내것인 줄로 아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또 언제인가는 청지기 직분을 빼앗기는 날이 온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에게 그만 두라고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언제인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청지기 사명을 거두어 가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지혜롭게 살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도 거두어 가시는 날이 있고, 재물도, 건강도, 그 외에 어떠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빼앗아 거두시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 2세는 이상한 신하 한 사람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침마다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대왕의 침실 앞에서 "대왕이여!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emember, that you must die!)라고 한 마디 말만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청지기는 쓸 데 없이 허비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이나 재물을 매일같이 허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점점 늙어가고, 때로는 병들고, 쇠약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건강하게 살고 있는 동안 허비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실 수 있는 일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하게 될 때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눈앞의 것만 위해 일하지 말고 내가 죽은 다음의 일, 내세의 일, 그 날을 위해서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자가 참으로 지혜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제일 현명하고 지혜로운 줄 압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말할 수 없이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청지기 사명을 사표내라고 하시기 전에,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에 좀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영원한 가치있는 것을 위하여 나의 생명도 건강도 물질도 쓸 줄 아는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예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비를 잘 하는 사람은 지혜롭다고 칭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 가운데 등잔에 기름을 예비한 다섯 처녀를 슬기롭다고 했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가리켜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도 보면 곡식을 많이 거두어 들이고 쌓을 곳이 없어 걱정하는 부자를 향하여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내가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즉 내세를 위해서, 영생을 위해서 예비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7년 동안 풍년이 올 때에 곡식을 많이 예비하여 두었다가 7년 동안의 흉년을 잘 지내면서 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노아도 믿음의 지혜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알고 방주를 예비하고 그 방주에 곡식을 l년 17일동안 배에서 먹을 수 있도록 예비했다가 구원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예비하는 지혜를 가지고 환난날에 구원받고, 죽음을 통과하여 영생복락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후서 2장 17절의 말씀과 같이 캄캄하고 어두움이 예비된 곳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예비해야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은 그 누구도 알지를 못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외국에 가면서 내가 언제 돌아올런지 모르니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종들은 주인의 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재산을 허비하면서 지나갔습니다. 그 중에 지혜로운 종은 주인의 말대로 준비하고 있다가 주인이 돌아올 때에 문을 열고 반가이 맞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도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랑인 예수님께서 분명히 머지않아 곧 오실터인데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다가 주님 오시는 날에 반가이 맞이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이야기에 어떤 돈 많은 주인이 오랫동안 종들을 거느리고 살다가 그 종들에게 마지막으로 짚을 가지고 가느다란 새끼줄을 많이 꼬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게으른 종들은 짜증을 내면서 되는대로 울퉁불퉁하게 꼬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종들은 끝까지 순종하면서 시키는대로 예쁘고 가느다란 새끼줄을 꼬았습니다. 얼마후 주인은 금고에서 엽전으로 된 돈자루를 쏟아 놓고서 각자가 꼬은 새끼줄에 마음껏 꿰어 갖도록 하고 절대로 다른 방법으로는 못 갖게 했습니다. 그 때에 지혜로운 종들은 자기들이 꼬은 새끼줄에 마음껏 꿰어 가졌지만 어리석게 순종하지 않던 종들은 땅을 치면서 통곡하고 후회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보면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고 또 언제 오시든지 내게 무슨 상관이냐 하면서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무리 오래 믿었다고 하더라도 주님 오시는 그날에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오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할렐루야! 주여 오시옵소서"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고 했고, 베드로후서 3장 8절 이하에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하므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우리 주님은 불원해서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들에게는 상 주시려고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예비하는 신앙 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천국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천국을 예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보면, 한 부자가 있어 그는 자색옷을 입고 날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며 연락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지옥에 와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집 대문에서 걸식하던 거지 나사로는 옛날의 그 모습은 다 어디 가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운 것을 부자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가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부자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조금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주소서!"하고 애원하였으나 아브라함은 오히려 꾸짖었습니다. 이 부자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내세를 생각지 못하고 자기가 지금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을 산 것 같았으나 실상은 어리석은 생애였고, 거지 나사로는 가장 바보같고 비참 하고 천대를 받았으나 내세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게 살았기 때문에 이런 상급을 받는 것을 그는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 열두 진주문 들어가서 황금 보석 꾸민 집에서 영원히 왕노릇하며 행복하게 사는 그 날이 올 것을 믿고 세상에서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오더라도 참고 천국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환난의 날이 임할 것을 기억하여 예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약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오고 흉년이 들었을 때에 사르밧 땅에 살던 과부는 자기도 먹일 것이 없고 자식도 먹일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먼저 대접했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 그 흉년이 다 하기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여 무난히 흉년을 지나게 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기근의 날, 어떠한 환난의 날이 임하더라도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기근과 환난의 날에도 보호하시고 걱정없이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무서운 환난의 날이 언제 우리에게 임할런지 모르는데 그 날을 위해서 우리 성도들은 하늘에 보화를 많이 쌓아 두면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금세와 내세에 큰 축복과 상급을 내려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의 날이 두려워 내가 돈을 벌고 모아 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향하여 책망을 하면서 마치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환난의 날을 대비하여 하늘에 보화를 많이 쌓아 두었다가 환난과 기근의 날에 염려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상급으로 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기도로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개인적으로 보나 가정적으로 보나 또는 민족적으로 보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위기 의식 속에서 그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오직 기도로 예비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기도로써 예비해야 됩니다. 매일같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하겠고, 죽음을 위해서도, 그 외에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어떤 문제를 위해서든지 간절한 기도로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에 40일씩이나 금식하며 기도로 예비하셨고, 제자를 택하실 때에는 철야 기도를 하셨고,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먼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로 예비하셨던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기도로 예비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 행동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예비하는 자가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자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재주나 수단과 방법은 보시지 않아도 어린 아이와 같이 매달려 기도하는 자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기도로 예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예비하는 지혜를 가지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갈 때에 승리하시고, 뿐만 아니라 내세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축복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눅 16장 1~13절 / 송영태목사
어떤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에게 들려오는 소문이 그 청지기가 주인의 재물과 돈을 제 마음대로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더 이상 일을 맡길 수 없으니 보던 일을 셈하라고 하여 “해고”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제 청지기직에서 쫓겨날 이 사람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었고, 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자 청지기에게 지혜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부자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다 불러다가 빚을 탕감해 주는 문서를 다시 작성합니다.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절반으로 잘라 기름 오십말이라 쓰게 하고 밀 백석을 빚진 사람에게는 밀 80석이라 쓰게 하여 자신의 앞날을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옳지 않은 자가 그래도 끝에 가서는 일을 지혜롭게 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교훈을 주셨습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말씀하셨고, 그리고 11절에 다시 말씀하시길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인생관과 물질관을 가지고 다가올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 안에 담겨있는 진리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모든 인간들에게는 마지막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는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자이십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세상과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일시적으로 맡아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소유주가 아니라 관리자요, 청지기 인생이며, 종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잘 관리하고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할 책임과 의무만 있는 것이 청지기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주인의 것을 이 청지기가 제 마음대로 허비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불러 책임을 묻습니다. 2절에 보면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보세요!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성을 다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 주인의 시간과 자연과 건강 등을 허비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사실입니다.
신우회원여러분!
“네 보던 일을 셈하라” 너의 인생을 이제 그만 정리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살아온 삶의 역사를 심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너에게 맡겨 주었던 축복들을 이제는 거두어들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에게 주었던 생명도 이제는 거두어 갈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요, 너에게 주었던 인생의 날도 더 이상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요, 너에게 맡겨 주었던 가정이나 일터도 이제는 더 이상 너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인생의 종말을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는 날, 너는 네 인생의 날을 이 땅에서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호흡이 멈추어지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맥박이 멈춰지는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삶의 날을 하루도 더 연장할 수 없는 날이 언제 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장소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하늘에서 삶이 중단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이제 그만 “네 보던 일을 셈하라 네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라는 주님이 명령 앞에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상에서, 어떤 사람은 길바닥에서, 어떤 사람은 집안에서 떠나기도 합니다.
“네 인생을 계속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누구나가 다 한번은 이 말씀 앞에 불러 가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 능력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보세요, 평생 숨쉬는 공기를 제 손으로 만들어 호흡하는 자가 누구며, 물 한방울이라도 제 능력으로 만들어 마시고 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한숨 쉬지 마십시오. 건방 떨지 마십시오. 햇빛을 제 손바닥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는 사람이 누구며, 인생의 날을 길게도 하고 짧게도 하며 조정하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내가 여기에 태어나기 전에도 세상은 있었고, 내가 떠나간 후에도 여전히 저 하늘과 바다와 만물과 교회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목사님께서 아들에게 보낸 짤막한 글을 모은 책에 보니까. “대통령에게 화살을 쏘지 마라.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다가도 그로부터 초청을 받으면 가장 행복해할 사람이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평생을 제 아무리 땀 흘리며 애쓰고 수고하여 모아 놓은 재산과 집이라고 하여도 세상 떠나가는 날 그 순간부터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내가 살던 곳에 들어와 하나님의 정하신 기간을 살다가 그 사람도 그렇게 떠날 것입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이 말씀 속에 있는 주님의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마지막을 말입니다.
둘째, 세상 떠나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3-4절)
여러분! 세상 떠난 다음의 세계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땅을 판다고 되겠습니까? 빌어먹은들 해결이 나겠습니까? 사람이 다음의 세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종교라는 땅을 판다고 되겠습니까? 지식의 땅을 판다고 되겠습니까? 깡통을 손에 들고 추우나 더우나 남의 집 대문간에 엎드려 빌어먹는 거지처럼 한푼 두푼 구걸하여 모은 재산이 인생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렇습니다. 마지막 세상을 다 살고 난 다음 인생의 계산서에는 부끄러움만 쓰여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마지막 날 인생의 통지표 기록을 보았을 때 50점은 그만두고라도 20∼30점짜리 인생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뜻을 위하여 쓰여지지 않는 역사는 불의한 역사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날들과 지혜를 가지고 예수님을 사귀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재물과 재능을 가지고 예수님을 친구로 사귀는데 아낌없이 투자해야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재물이란 무엇입니까? 재물 자체는 의도, 불의도 아닙니다. 단지 소유자에 따라 불의한 것도 될 수 있고 의로운 것도 될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소유하면 불의한 것이고, 의로운 자가 소유하면 의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불의한 자들이기에 우리의 소유는 불의한 재물인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별로 없지만 가지고 있는 재물은 마지막 날 다 내어놓아야 할 불의한 재물인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내 직장문을 닫고, 사업장도 무너지고, 토지소산도 폐허가 될 것입니다. 내 지식도 소용이 없고 명예도 날아가고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노아만이 심판 받을 물질과 몸을 방주짓는데 사용하여 구원에 참여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거 분명 아셔야합니다. 마지막 날 이 지상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취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구원받은 나의 영혼뿐임을 알아야합니다.
인간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알아야할 일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친구로 사귀고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과 시간과 몸과 마음을 주님을 위해서 쓰는 것뿐입니다. 이것만이 의의 것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귀하게 보시고 칭찬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우회원여러분! 예수 잘 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사용하십시오. 몸을 바쳐야 예수를 친구로 더 가까이 사귈 수 있다면 몸을 다 드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를 잘 믿는데 돈과 재물이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돈과 재물을 쓰셔야합니다.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이요, 눍어가다 죽을 몸이며, 남의 것이 되고 말 재물인 것을, 예수님을 더 잘 믿고 더 잘 섬기는데 쓴다면 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냐는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라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하고 값있게 들으셔야 합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셋째, 영광스러운 미래는 충성된 오늘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절)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재물은 작은 것이요, 잠깐 있다가 없어져 버릴 유한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란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이 불의 심판으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듯이 인간에게 주어진 물질과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요, 불의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침 안개 같고 날리는 낙엽 같은 세상의 물질과 시간과 몸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영원한 천국의 유업을 주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마포구청 신우회원여러분!
오늘 내게 주신 삶과 생명을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허락하여 주신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여 청지기로서의 삶을 충성되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늘의 영원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이 땅에 살고 있는 지금, 오늘 내게 주신 직분과 사명,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위한 실존으로 존재할 때, 하나님께서 영생을 복으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몸과 물질이 하나님을 섬기고 인간을 섬기는 기회와 능력으로 쓰여져야 하늘에서의 상이 크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의로움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지만 하늘에서의 상급은 “충성”으로써 결정하실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충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종이 주인을 위해 최대의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충성과 의는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날도 재물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양심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재물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데 귀하게 쓰여져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재물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에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기에, 모두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관리하도록 허락 받은 청지기로서의 인생일 뿐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불의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것을 허비하는 생을 살고 있기에, 주인께서 더 이상 청지기의 사무를 맡기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반드시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할 때가 오고야 맙니다. 이때 주신 말씀이 9절의 말씀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내게 주어진 생명, 몸, 지혜, 건강, 물질, 시간, 재능,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이중에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친구로 사귀는데 써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청지기 인생임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주인의 것을 허비하는 불의한 자가 아니라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감격을 가지고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시는 지혜로운 인생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지혜
눅 16장 1~13절 / 류영모목사
I. 종말 의식
시골마을들을 찾아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꾸미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는 스튜디오까지 올라와 퀴즈대회를 즐겼습니다. 진행자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깁니까?"라고 물었지요. 어떤 팀은 호랑이, 어떤 팀은 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호랑이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을 못합니다. 사자라고 대답한 팀에게 왜 사자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물었더니 할머니 한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사자가 무섭지요. 호랑이든 사람이든 다 잡아 가는 건 저승 사자예유." 스튜디오 안은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이 시간이라도 부르시면 힘쎈 권력도, 건강했던 몸도, 쌓아둔 재물도 다 소용없습니다. 모든 인생에겐 끝이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인생관이 다른 것은 종말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발점을 가진 인생은 반드시 종착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젠가 끝이 있음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마지막이 있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살았으나 죽을 날이 있고, 건강하나 병들 날이 있고, 성공해도 넘어질 날이 있고,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내려올 날이 있습니다. 문제는 시작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듯이 끝나는 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역사나 인생이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윤회니 전생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관, 시간 개념은 직선적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해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로 끝이 납니다. 창조로 시작해서 종말로 막을 내립니다.
종말의식은 모든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어 놓습니다. 아니 삶의 기준 자체를 바꾸어 줍니다. 옛날에 좋았던 것들이 종말의 안경을 쓰고 보면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큰집이나 높은 지위도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왜 진지합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늘 종말론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영원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천국뿐입니다. 이 땅은 장망성입니다. 장래 망할 성이지요.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주님께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종말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삶이 무기력해졌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메시지가 교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졌습니다. 마치 이 세상이 영원히 살 장소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천국 갈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신자처럼 삽니다. 불신자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불신자처럼 이 땅에 미련을 두고 삽니다. 때문에 성도들이 약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변화시킨 믿음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세상이 아닌 천국을 소망했고 늘 종말론적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교회를 말할 때마다 초대교회를 말합니다.
1세기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 생명력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로마를 복음화했고 세계를 살려냈습니다. 도대체 그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바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 - 종말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눈을 뜨며 "주여 오늘 오십니까?"라고 물었고 밤에 커텐을 닫으며 "이 밤에 오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늘 "마라나타" - "주께서 곧 다시 오십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마지막에 대한 긴박감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오고 고난이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종말이라는 희망의 빛에서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기에 늘 희망으로 넘쳐났습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보면 진지한 영적부흥과 도덕적인 각성이 일어난 시기는 한결같이 종말론적인 믿음운동이 일어나던 때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여 생의 목적이 이 땅에서 잘 되는데 있고 모든 관심이 이 세상일에 집중되어 있다면 당신은 불신자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식을 잃고 나면 방향키를 잃은 한척 배와 같아집니다. 종말의식을 잃고 나면 세상을 살릴 영적 능력도 잃고 맙니다.
II.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우라
오늘 본문을 읽는 안경은 바로 종말론입니다. 본문을 흔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난해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윤리라는 안경을 끼고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종말론적인 지혜로 풀어야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윤리적인 어떤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또 청지기의 잘못된 행위자체를 칭찬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의 주제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입니다. 「지혜있는 자가 되라」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지혜를 배우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때때로 동물에게서도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마10:1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악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뱀에게서도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분문 : 초점과 핵심을 놓치면 큰 오해를 가져 올 수도 있는 비유입니다.
옛날에는 부자들이 자기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청지기를 두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고용된 종이면서 수하에 또 다른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주인의 재산과 일꾼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집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토록 신임을 하고 일을 맡긴 청지기의 경리에 부정이 있다는 고발을 받았습니다. 사정을 물을 때 청지기가 아무런 변명이나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의 부정을 시인한 것 같습니다.
아마 어떤 모양으로든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네 보던 일을 셈하라" 결산을 명령하고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해고를 통고합니다. 이때 청지기의 독백 형식으로 자신의 남은 생애를 걱정하며 본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심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눅16:3-7)
이건 분명히 공무서 위조요, 횡령죄입니다. 이 청지기의 행위는 불의한 짓이요 용서 받을 수 없는 또 다른 사기 행각입니다.
그런데 이 사기꾼 같은 청지기를 주인이 칭찬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이 청지기의 지혜로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본문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리를 맡은 것들 중에서 나누어 줄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늘어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이 교육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나누어 줄수록 내게 넘칩니다.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사랑이란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사랑을 내 가슴에 혼자 움켜 쥐고 있으면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나 이것을 나누어 주면 더욱 사랑이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본문이 말하는 초점은 청지기의 위조행위나 사기극을 배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의한 행동을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종말을 준비한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핵심은 8절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는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무리 보아도 불신자들이 더 지혜롭습니다. 불신자들은 직장에서 물러날 것을 미리 준비하고 적금을 붓습니다. 나중에 살 집을 사기 위해 지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생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준비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보험이 발달합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썩어질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 보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 봐라 이 세상에 소위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어떻게 지혜롭게 준비하는가! 영원한 가치가 없는 이 땅의 것을 위해서도 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희들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느냐? 불의한 청지기는 비록 옳지않는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했지만 그 미래를 준비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저 불의한 청지기에게서 너희는 지혜를 배우라. 신앙인은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니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III. 주인은 따로 있다
여기 불의한 청지기가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했을 때 어떤 지혜를 배우란 말입니까?
첫째, 인생 모두에겐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신 분, 그리고 정확히 회계 감사를 하실 그분, 상을 주시기도 하고 나를 파면하시기도 하는 주인이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 위기가 오기전까지 청지기는 주인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두려워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몸져 누워보면 내 몸이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사형선고를 받고 나면 시간과 생명이 내 것 아님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아시지요?
맘껏 쌓아놓고 내 영혼아 먹고 마시자고 외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좋은 재능 받았으면 하나님이 주신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한 마리 강아지도 주인을 알고 삽니다. 하물며 사람이 제 주인을 모른데서야 말이 됩니까? 시간과 계절의 오고감 속에 시간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새롭게 의식하십시다.
해마다 찾아오는 가을 - 추수감사절이 되면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실 이 청지기는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동안 주인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주인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야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계산을 하자고 할 때 비로소 '나에게도 주인이 있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요, 너의 이야기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 고백대로 하루하루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큰 잘못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디도서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부정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내 관념 속에, 내 이론 속에, 내가 기도할 때만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언어로 "주여"라는 말을 하지만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날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실천적 무신론자!
오늘 주신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청지기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나마 자기에게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사실조차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우라는 겁니다. "네게도 주인이 따로 있다." 믿습니까?
IV. 나는 청지기일뿐
이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워야 할,
두 번째 지혜는 뒤늦게 나마 내가 누구인가?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청지기였구나!
흥청망청 낭비할 때는 자신이 주인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으로부터 최후 통첩을 받고 보니 자신이 청지기임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입니다. 청지기는 관리권이 있을 뿐 소유권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 다 주인의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권과 함께 주인의 회수권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인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것을 회수할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회수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보면 "우리의 몸도 우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을 바로 관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몸은 우리 몸이기전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역대상 29장 12절에서는 "부와 귀와 권세와 능력이 다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산도 주의 것이요 수입이 얼마든 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사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높이는데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써야 합니다.
청지기는 많이 받았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청지기는 적게 받았다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청지기의 지혜를 배우십시다. 낭비하고 산 지난날을 돌이켜 회개하십시다. 주인은 그가 비록 악한 청지기 일찌라도 청지기로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그것이 귀하다고 칭찬하십니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재주로, 노력으로 번 것이기 때문에 돈만은 자기 멋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닐 수 있는 몸도 내가 준 것이다.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과 가치관을 보려면,
그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늘 더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와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 셋을 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말로 키소, 코소, 카소라고 합니다. ① 키소란 돈 주머니란 뜻으로 그가 돈을 어디에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② 코소란 술잔이란 뜻인데 그가 인생의 재미를 어디서 찾는가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③ 카소란 노여움, 열정을 말합니다. 뭘할 때 신이나고 어떤 일을 보고 분노 하느냐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키소, 코소, 카소는 무엇입니까?
하바드 대학 총장을 지낸 트루엇박사는 텍사스주에서 석유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부유한 가정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 이 주인이 박사에게 자기 자랑을 합니다. "저는 25년 전에 빈손으로 이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고생과 노력으로 지금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저 동쪽에 있는 석유공장도 제 것이고, 서쪽에 있는 유전도 제 것입니다. 남쪽에 있는 집도 제 것이고, 북쪽에 있는 빌딩도 제 것입니다." 하고 주위를 삥 둘러보며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트루엇 박사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동서남북 모두다 회장님 것들인데,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 하늘나라를 위해 물질을 쌓고 사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이 당신의 재미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선을 더 행하지 못해서 억울하고 세상에 메여 살다보니 교회사역 더 열심히 못해서 안타깝습니까?
저 하늘에 당신은 무엇을 쌓아 놓았습니까? 이 땅에서 복을 받아 부유하게 살던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빈손든 거지처럼 살아야 한다면 책망받아 마땅한 사람이지요. 당신은 청지기 일뿐인 것을.
V. 종말이 있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로부터 배워야 할 세 번째 지혜가 있습니다.
청지기는 셈해야 하는 시간 - 종말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 청지기는 자신의 시간에 끝이 있음을 알고 오늘의 기회를 선용했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데 투자했습니다.
여러분 내겐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겐 남은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어렵다고 한탄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우리에게도 남은 시간이 있고 남은 재능이 있고 남은 물질이 있습니다.
없는 중에도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모르는 중에도 아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잃은 것을 탄식합니다. 어리석은 일이지요. 과거에 잃은 것만 생각하는 인생은 언제나 적자 인생입니다. 그러나 남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인생을 선용하는 사람은 흑자 인생이 됩니다.
끝을 기억하고 사십시다.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바로 쓰지 못했을 때 거기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 2절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언젠가는 한번은 나도 이 말씀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청지기는 지금까지 낭비하는 인생을 살았으나 마지막 기회를 잘 이용해서 칭찬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갑니다. 세상도 갑니다. 언젠가 나도 가고 너도 갑니다. 마지막을 알아야 합니다.
100년전에 살았던 알프레드 노벨을 아시지요. 그는 다이나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에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한 몸에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집안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노벨이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레도 노벨의 「노벨상」이 시작된 유래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VI.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주인이 있습니다. 그 분 앞에 나는 청지기 일뿐입니다. 그 분 앞에서 내가 받은 시간과 물질과 은사들을 셈해야 하는 종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은 퍽 재미있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성경에서 불의의 재물이라는 말을 할 때 이 말의 일차적인 뜻은 "불의가 개입된 돈" 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의 재물은 불의가 개입되기 쉽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살인도 하고 거짓말도 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돈과 불의는 너무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 한번 하지 않고 돈벌게 되던가요? 직원들에게 날마다 칭찬만 들으면서 돈을 벌게 되던가요?
불의의 재물이라는 두 번째 뜻은 "곧 없어질 재물"이라는 뜻입니다. 재물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붙잡아 놓으려해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는 것이 재물입니다. 그러므로 가지고 갈 수 없는 재물을 손에 움켜잡고 죽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남겨둔 재물은 불의한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이라는 세 번째 의미는 "남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것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남을 위해 다 쓰고 가야 합니다. 다 안 쓰면 결국 남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겨진 재물은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잘 사용한 재물만이 하늘에 영원하고 참된 것으로 쌓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먹은 것만 내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늘에 쌓은 것만 내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본문에서 '친구를 사귄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친구를 만든다는 말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전도를 위해서 돈을 쓰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물질을 써야만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물질은 가장 값지게 쓰여진 물질임에 틀림없습니다.
14절 이하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친구들 만들라는 말의 뜻은 분명해집니다.
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는데 물질을 사용하라.
② 전도하기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라. ③ 인물을 기르는데 너의 물질을 사용하라!
주님은 "불의의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면 그 물질이 다 없어졌을 때 당신은 영원한 처소로 영접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이 사용한 그 시간이 -
당신이 사용한 그 물질이 - 영원한 처소에서 당신을 기다리게 하란 말입니다.
당신이 투자한 그 자원들이 영원한 처소에서 당신을 영접하고 환영하게 하란 말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가치를 두고 영원한 세계를 위해 투자하며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1년동안 품었던 내 인생의 최고의 고객 VIP - 그들을 추수하기로 결단하는 날입니다. 11월 30일부터 4일간 그들을 추수하기 위해 시간과 몸과 관심과 물질을 쓰기로 결단하십시요.
또한 다음 주일 추수감사 주일을 준비하며 은혜로운 감사주일을 보내기 위해 준비하는 주일입니다. 한해동안 베풀어주신 은총을 물질로 드리는 주일이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물질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감사하며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만 드리면 되지. No!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마음만큼 드리는게 헌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친구에게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는 반면 나머지 한 친구에게는 그다지 애정을 쏟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왕으로부터 궁전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겁을 먹은 그는 혼자 가기가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그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를 찾아가 함께 왕에게 가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미안하지만 자네와 함께 갈 수가 없다네." 깨끗이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는 그 다음으로 사랑했던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는 "궁문까지만 동반해 주겠네. 하지만 그 이상은 갈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그는 자신이 가장 무관심하게 대했던 친구를 찾아가 모든 사정을 말했습니다. "물론 자네와 함께 가겠네. 그곳에 가면 반드시 나의 도움이 필요할 걸세." 그 친구는 왕궁까지 함께 동반했을 뿐만 아니라 왕 앞에서 그를 대변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왕은 하나님이며, 세 친구를 가진 이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장 사랑한 첫 번째 친구는 재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소환을 받을 때 그 재물 친구는 결코 여러분과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다음으로 사랑했던 친구는 이 세상의 친구요, 배우자요, 자녀들입니다. 그 친구는 여러분이 죽을 때 무덤까지는 함께 갈 수가 있으나 그 이상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 친구는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까지 여러분과 동행하며 무서운 심판의 형벌로부터 여러분을 구해 줄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당신의 친구는 영원한 처소까지 당신과 동행해 줄 것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위해 산 것만이 영원히 당신과 동행해 줄 것입니다.
사랑의 진실
눅 16장 1~13절 / 김흥규목사
⑴ 불의한 청지기
예수님의 비유들(PARABLES) 중에는 이해하기 힘든 비유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 18: 1-8)나 '뻔뻔스러운 친구의 비유'(눅 11: 5-8) 등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비유보다 훨씬 더 난해한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the parable of the dishonest steward)입니다. 왜 이해하기가 어렵단 말입니까? 비유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아마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대지주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관례가 흔히 그랬듯이 이 지주는 자기가 재산을 직접 관리하지 않고 청지기에 맡긴 '부재 지주'(absentee landowner)였습니다. 주인이 현장에 없는 가운데 청지기가 재산을 도맡아 관리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청지기가 문제가 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 NRSV는 '허비했다'는 말을 한글 그대로 'SQUANDERING,' 즉 '낭비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허비했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말이 '횡령했다'--'EMBEZZLED'--는 뜻이라면 청지기는 법적으로 죄를 지은 범법자가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이 말이 '재산 관리를 잘못했다'라고 해석을 할 경우에는 경영 능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뜻할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이에 대하여 정확하지 않은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청지기는 능력이 모자란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관리 능력이 부족해서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것 같지는 않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주인의 재산을 고의적으로 횡령했다는 쪽이 옳은 해석이 될 것입니다.
청지기의 불성실함을 발견한 주인은 화가 나서 청지기를 해고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협박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고를 해버렸습니다. 이제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청지기는 난감해졌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이렇게 탄식합니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청지기는 그래도 재산 관리를 하는 일이었기에 천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평생 돈만 만지고 살아온 먹물이 막노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거지처럼 구걸해서 먹고살려니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청지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한 가지 기가 막힌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우리 4-7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왕 해고될 바에는 장래에 대한 대책을 세워두자는 묘안을 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차례로 불렀습니다. 먼저 기름 백 말을 빚진 사람에게 50 말을 탕감해주었습니다. 50%나 되는 빚을 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밀 100 석을 빚진 사람에게는 20 석을 탕감해서 80 석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빚진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업을 하기 위하여 자금을 빌린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기름 백 말이나 밀 백석은 가난한 사람들이 빌릴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큰 사업을 하는 사람들만이 만질 수 있는 거액이었습니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청지기가 탕감해 준 두 사람의 경우 둘 다 거의 500 데나리온의 돈을 탕감받은 것에 맞먹는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에 해당된다고 할 때 거의 2년치 임금에 해당되는 큰 돈을 각각 두 사람에게 변제해준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청지기는 왜 이렇게 했습니까? 빚진 자들이 불쌍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들은 결코 가난해서 빚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큰 사업을 하기 위하여 자금을 빌린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어봤자 나중에 자기에게 돌아올 이득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대 사업가들의 빚을 대폭 탕감해 줌으로서 장차 이들로부터 개인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해고당한 이후에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선심을 썼다는 말씀입니다!
⑵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주인
오늘 비유 말씀의 핵심은 주인의 반응에 있습니다. 사실 청지기는 누가 보더라도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사기성이 있었습니다. 주인의 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주인의 재산을 축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이 사람은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의 반응은 전혀 뜻밖입니다. 사실 오늘 제 설교 말씀의 본론은 바로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주인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에 대하여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분, 본문 8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 다같이 읽어봅시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꾸짖거나 법에 호소해서 중형에 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예상 밖으로 두둔했습니다. 일을 지혜롭게 처리했다면서 극구 칭찬하기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처럼 체면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통을 구기는 일은 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고대 중동 지방의 관습으로 볼 때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문제를 놓고 굉장히 고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위신과 체면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청지기는 이미 주인의 재산을 제멋대로 처분해버렸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주인이 법과 정의의 잣대로만 일을 처리한다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데리고 있었던 청지기를 사기죄로 걸어 법정에 넘겨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중벌을 받게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가족들의 생계까지도 위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 준 사람들 역시 법정에 세워야 할 것입니다. 물론 청지기는 해고당한 뒤에도 자신이 주인의 재산 관리를 맡은 청지기라고 하면서 빚진 자들을 속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청지기가 빚을 탕감하면서 공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빚진 사람들 역시 공모 여부를 추궁받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리하여 줄줄이 심문을 받을 것은 물론이고 빚을 탕감받기 위하여 새로 작성한 빚문서는 무효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청지기와 빚진 사람들 전원을 법망(法網)에 걸어 넣을 경우 주인의 권위와 체면은 훼손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는 당연히 법에 호소해서 응당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는 이와 같이 사정이 좀 달랐던 것입니다.
주인이 엄청난 액수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소문은 아마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들은 주인에 대하여 아주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 역시 주인이 관대한 사람이라며 칭송하고 존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청지기와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을 전부 다 법의 심판을 받게 해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릴 경우 잃어버린 돈은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인의 체면은 구겨지고 말 것입니다. 주인을 존경하던 채무자들과 세상 사람들이 주인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수전노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게 이상했어." 뒤에서 주인을 욕하게 될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이 쌓아 올린 위신이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보다 돈을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사실 주인은 재산이 엄청나게 많은 대지주였기 때문에 청지기 때문에 손해본 재산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리해서 마치 자기가 시켜서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 것처럼 청지기를 칭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이 청지기와 빚을 탕감받은 채무자들을 법에 회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친 것은 세 가지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로,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이 주인의 너그러움을 극구 칭송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청지기가 이웃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청지기는 일자리를 잃고 막막해질 경우 자기의 도움으로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주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비록 불의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세 가지를 동시에 성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만들었습니다. 둘째로, 이웃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우정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 곤고한 날에 자기 자신이 구원받을 길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청지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자기 사랑이라는 세 가지 사랑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⑶ 사랑의 진실
여러분,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읽으실 때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의 진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정직했느냐? 부정직했느냐? 이것이 진실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한 일이 합법적이었느냐? 아니면 불법적이었냐? 이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윤리적이었는지 비윤리적이었는지도 이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입니까? 주인의 관대함입니다. 청지기의 불의에도 눈을 감고 오히려 슬기로움을 칭찬하는 주인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청지기가 아닙니다. 주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 비유의 제목을 '관대한 주인의 비유'라고 붙여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이 비유 말씀을 읽을 때 '청지기의 윤리성'이라는 시각에만 붙들려 있으면 이 비유의 진실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실 때 초점은 청지기의 부정직성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의 관대함과 용서였습니다. 이것은 이 비유 말씀이 기록된 눅 16장의 바로 앞 장, 즉 눅 15장에 저 유명한 세 가지 잃은 것을 되찾은 비유--'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동전의 비유,'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모두 끝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99 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잃어버린 동전 한 닢을 찾듯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듯이, 비윤리적이고 사기성이 있는 청지기까지도 버리지 않으시고 품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눅 15-16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함께 읽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본문 말씀의 진실은 주인의 용서와 자비입니다. 청지기의 부정직함이 아닙니다. 청지기가 불의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사실이 초점이 아닙니다. 청지기의 잘못을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그 과오를 덮어주고 칭찬하는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이 초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청지기의 부정직과 사기성을 칭찬하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는 예수님을 많이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교제하시면서 언제나 용서하셨습니다. 저들이 진 죄의 빚을 탕감해주시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청지기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불의하게 보이는 예수님의 행동을 오히려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빚을 탕감해준 청지기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 여기에 일치점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며 본문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