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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황당해 하는 이지율의 옆으로 지나며 지율의 손길이 느껴졌던 어깨에 먼지라도 묻은 것처럼 털어내는 윤시우. 뭐야, 우리 피팅 모델 출신의 이지율을 무시 하는거냐! 하지만 도경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지율은 당찬 여자였다. 윤시우의 손목을 잡고 돌려 세우고는 또 도발적인 멘트를 날려댄다. 이제는 조금 우습다. 하지만 이지율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면 더욱 우스운 꼴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윤시우 저 인간이 얼마나 재수 없는 놈인데.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매력적일걸요.”
“근데, 이지율씨”
지율의 말에 윤 팀장은 포기한 듯, 웃으며 지율의 이름을 불렀다. 윤시우도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뉘앙스의 말을 하려는 듯 보였다. 지금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RTT 식구들을 한 번씩 훑어보더니 도경과 시선이 마주치자 ‘생각을 바꾸겠다’ 는 듯 씨-익 웃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는 도경은 또 불안해졌다.
“RTT에 한 달에 한 번, 그거 있죠? 친절한 RTT가 뭔가.”
도경의 머릿속은 분주해졌다. 내가 윤시우 팀장에게 친절한 RTT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었던 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윤시우 팀장과 그런 이야기를 할 만큼 가까워 지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자, 도경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번에 저 인간이 또 날 어떻게 물 먹이려고!
“얼마나 매력있길래 3년간 한 번을 안 뽑혀?”
“에?”
“누구는 너무 의아하게 여섯 번이나 했던데.”
도경은 그제서야 자신의 머리를 톡 쳤다. ‘이력서’ 너무도 얄밉고 때려주고 싶지만 저 사람은 나의 상사였다. 괜히 팀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이도 젊은게 어떻게 여기 팀장으로 와서 우리를 괴롭히는 건지! 도경은 항상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생각하고 있는 윤팀장을 따라잡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언제나 예상치도 못했던 행동과 말들로 당황한 적이 벌써 몇 번째인가. 도경의 눈에 부르르 떨고 있는 이지율이 보였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난 줄 알고 살아왔을 이지율씨가 불쌍해졌다. 오늘 도대체 얼마나 굴욕 당하는 것인가. 몇 명이 저 한 사람 때문에 민망함을 달고 일을 해야 하는가! 윤팀장은 행여 또 잡을까 싶어 도망치듯 RTT 후문으로 갔다. 윤 팀장이 자리를 비우고 남은 것은 이지율을 향한 수군거림과 붕- 뜬 분위기. 그리고 ‘멍’해 있는 이지율이었다.
“이지율씨, 괜찮어. 뭐. 그. 그니까”
실의에 빠져있는 이지율의 옆에 실장님이 다가갔다. 쭈뼛거리는 것이 도경에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어색한 실장님은 되지도 않는 위로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얼핏 귀엽다고 느껴졌다. 나도 참 많이 너그러워졌지. 이지율은 실장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간에 주름을 깊게 잡았다. 저런. 실장님이 이지율을 좋아하는구나 싶었지만, 진심이었을 줄은 몰랐는데 진심이 느껴질 정도의 어색함을 유지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잘 어울릴 수도 있는데. 미녀와 야수로.
“실장님, 말씀을 하세요.”
“이지율씨는 매력 있어.”
“저도 알거든요?”
이지율은 실장에게 톡 쏘아 붙였다. 독침을 쏘는 듯한 이지율의 말투에 실장님은 간신히 독침을 피해 다시 한번 더 용기를 냈다. 실장님, 힘내세요. 아직 이지율씨가 덜 고파서 그럽니다. 이지율 옆에 윤시우 같은 남자 한 명만 더 있어 봐야, 아~ 비로소 실장님도 사람이구나~ 싶을꺼에요. 그러면 ‘실장님도 감사하게 만나며 살아야겠구나’ 하겠죠.
“굳이 꼭... 저 한사람한테만……”
“실장님, 무슨 소리 하시는거예요?”
아까보다 한층 더 앙칼진 목소리가 RTT를 가득 메웠다. 이지율의 목소리에 실장님은 놀랐는지 딸꾹질을 한 차례 하더니 그제서야 모든 시선이 실장님을 향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민망한 듯, 사방을 훑어보더니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세련과 도경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 섰다.
“자, 다들 디너 준비 안 할꺼야? 빨리 빨리 하자구!”
쳇, 우리가 동네북인가. 세련은 획- 돌며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지나치는 세련을 잡고 아직 비누향이 난다며 귀띔했고, 세련은 주방으로 향하던 몸을 다시금 화장실로 옮겼다. 그냥 거기서 살지 그러냐. 세련은 향수고 향수비누고 싼 것이 비싼 척 하려고 꼭 이렇게 향이 오래간다며 민망함을 달랬다. 세련아, 이해해. 애써 그렇게 태연한 척 하지 않아도 돼. 디너가 시작되고 다들 누가 미스터리 쇼퍼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친절에 신경을 썼다. 이지율도 윤시우팀장의 말 때문인지 더욱 더 친절하게 서비스 했다. 나름 한가한 디너를 마치고 카운터 준희씨가 팀장님에게 대신 말하기로 했다. 주방에서는 홀에서 더 자주 마주치니 주방팀보다는 홀팀이 더 친해졌을거라 했다. 주방팀이 더 친할 수도 있는데- 라며 세련이 툴툴거렸다. 세련이와 나는 12만 8천원 사건 때문에 제외됐고, 실장님이 말하면 파티 하려다가도 망한다며 제외 시켰다. 이지율은 자신이 다시 한번 나서겠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12만 8천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윤시우 팀장이 가장 호의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카운터 최준희씨가 당첨됐다. 준희씨가 윤팀장에게 파티 사실을 알릴 때 쯤, 주방팀에서 만든 케익을 들고 나오는 것이 계획이었다. 깜짝파티 하기에는 오후에 이지율씨와의 사건이 너무도 커서 계획을 바꾼 것이었다. 주방팀은 ‘여튼 도움이 안된다’며 지율씨를 몰아세웠고, 도경은 그 틈을 타서 동기랍시고 하은채에게 당해서 우울해 있을 이지율을 위로했다. 준희는 당당하게 하루 정산 결재서류를 보고 있는 시우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뭡니까?”
고맙게도 다가간 준희의 얼굴을 힐끔 보고 말을 이어가는 윤시우 팀장을 바라보며 숨어있던 사람들은 역시 준희를 선택한 것이 현명했다며 맞장구쳤다. 이지율은 입을 삐죽이면서, 자신이 느낀 윤시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고 질투했다. 도경과 세련도 이지율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쉽게 맞장구 쳐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윤 팀장 저 자식은 카멜레온 같아서 언제 바뀔지 모른단 말이야. 그리고 준희씨한테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RTT 모든 식구들이 봐서 잘 알지 않은가?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한 식구 됐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요.”
“뭘요.”
“잠깐 파티를 준비했는데”
준희가 말을 흐리며 시선을 주방 쪽을 향했다. 준희의 싸인에 쉐프님이 특별히 신경써서 마든 2단 케익에 불이 붙여졌다. 먹기에 너무 아까운 데코레이션이 인상 깊은 케익이였다. 윤시우, 이게 사람 사는 정이라는 거다! 사람들은 비록 너의 재수 없음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만, 너도 깨달아가길 바란다. 우리 이렇게 RTT 3년간 함께 했다구! 도경은 마음속으로 윤시우의 뒷통수를 휘어잡고 고개를 몇 차례 숙이게 했다. 도경의 바람대로 됐으면 좋았을 텐데, 윤시우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목격한 도경은 앞으로 닥쳐올 쓰나미 같은 후폭풍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 모른 척 하시지”
역시나, 도경이 목격한 것은 현실이었다. 꿈이었으면, 차라리 실컷 때려라도 볼텐데. 준희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그간의 윤시우만을 떠올렸던 건지, 적지않게 당황해보였다. 준희씨, 처음엔 다 그래요. 저도 아주 깜빡 속았답니다. 저 사람은요. 사람의 얼굴보다 뒷통수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윤시우 팀장이 잡고 있던 결재 서류에 싸인을 하고 카운터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때, 이지율이 불을 껐다. RTT는 어둠 속에서 쉐프님과 RTT 식구들의 정성이 담긴 케익 위의 촛불에 의존해야 했다. 케익은 슬슬 윤시우 팀장의 가까이에 다가갔고, 준희씨에게 전달 됐다. 윤시우의 얼굴을 더욱 잘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놀랬을거다’며 소근댔고, 세련은 오만상 썼을 걸, 이라며 도경에게 말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인상 쓴 모습이 아닌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무표정은 정색이 아니었다. 그냥 몇 안되는 표정 중 한가지 일 뿐.
“약속 있습니다.”
매정하게 차갑고 너무나 사무적인 말투로 RTT 식구들을 실망시키는 윤시우. 너란 놈은 정도 없다는 말이야? 뭐 몇 분이나 니 시간을 잡아 먹는다고, 아니 그리고 똑같은 24시간 단 몇 분도 같은 회사 직원들과 함께 있기 싫다는거야 뭐야! 도경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오후의 이지율처럼 호되게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저 자식과 대응하려면 수련이 필요해! 라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여기저기서 실망감의 오로라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아, 저... 그래도 팀장님, RTT식구들이 준비한건데 촛불이라도 불고”
준희는 RTT 식구들이 실망할까봐 용기내서 한마디 더 던졌다. 이미 실망의 눈초리가 어둠을 타고 윤시우에게 향해있음을 알지만, 준희의 행동은 또 한번 RTT 식구들에게 희망이 된 듯 3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 촛불에 의존해 보이는 윤시우의 표정이 일그러짐을 어둠 속에서 함께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긋이 준희를 응시하던 윤시우가 드디어 입을 뗐다.
“한가하세요?”
“예?”
“저한테 바쁜 시간 쪼개서 써 줄 만큼 시간이 남아 도시냐구요.”
“그..그건 아니지만”
준희는 말까지 더듬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엇다. 도경은 문득 준희를 따라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바로 이성을 찾고 이 비슷한 장면을 생각해냈다. 아, 그래서 윤시우 팀장이 어제 저녁 나의 말더듬과 바보 같은 웃음을 따라했던 것이군. 내 모습이 바로 저런 모습과 흡사했다라고 생각하니 따라하고 싶던 마음은 밀물에 5 만개의 촛불이 한꺼번에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럼 나 좋아합니까?”
“네에?”
세상에나. 이제 싸가지와 건방을 넘어서서 자뻑까지. 혀를 내두를 캐릭터구나, 윤시우 너. 준희도 정말 깜짝 놀란 듯, 놀라 물었고 그 바람에 촛불이 흔들렸다. 이지율에게 불을 켜는 것이 좋겠다고 귀뜸을 했지만, 여기서 불을 켜게 되면 준희씨고 우르르 몰려있는 우리들도 민망하게 될거라며 세련이 극구 말렸다. 세련아, 이제 민망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구나. 기쁘다 친구야.
“저한테 그런 호의 베풀 생각마시고 고객들 만족도에나 신경 쓰세요.”
“.....팀장님..”
“왜 이렇게 단번에 못 알아 듣는 직원이 많아? 이래서 어떻게 주문을 받아, 보청기 하나씩 해줘요?”
아쉽게나마 팀장님을 불러보는 준희에게 매정한 말을 톡톡 쏘아 붙이는 시우. 준희씨, 이제 됐어요. 그만 해도 괜찮아요. 이제 RTT 식구들도 윤시우를 잘 알았을거에요. 우리 향수비누 세련이도, 3년 동안 친절사원 무기록 지율씨도, 애써 만든 케익 똥이 될 판인 쉐프님도, 그리고 잠시나마 호감을 갖을 뻔 했던 저 또한.
“먼저 퇴근합니다.”
윤시우 팀장이 매몰차게 떠난 RTT는 다시 불이 들어왔다. ‘멍’해있는 RTT 식구들은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짧은 시간에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한 순간에 바보 만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가 ‘이러다가 정말 10% 감봉 하는 것 아니야?’ 라고 말했고 ‘그냥 말 뿐일 거라는 파’와 ‘오늘 보고도 모르냐는 파’로 나뉘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 저녁 10시 가까운 시간에. 아~ 새로온 윤팀장님 덕분에 직원 단합이 끝내주게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Restaurant, Tip Top
사람의 왕래가 뜸해진 공항. 밤 비행기가 한 시간 정도 지연이 돼서, 10시에 도착한 시혁은 피곤한 듯 보였다. 은채는 시혁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안겨 벌써 오랫동안 시혁의 발을 묶고 있었다. 시혁 역시 그런 은채가 사랑스러운지 한참을 안아주었다. 누구나 시우와 형제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닮은 외모에 비슷한 체격. 아니, 어쩌면 시우보다 더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을 시혁은 한국에서 없었던 콧수염이 자라 있었다. 은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애인인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 죽을 뻔했어.”
“잘 있었어?”
“잘 지낸 사람 같아? 나 봐, 앞으로 계속 나만 보고 있어.”
꼬박 6개월을 보지 못했다. 사진 공부를 하러 일본에 간 후, 원래가 연락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시혁은 간간히 연락이 오는 것 이외에는 사진 공부에 몰두했다. 여러 가지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시혁은 못 하는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더 배우고 싶은 공부가 없을 때 까지 죽어라 공부만 하다가 나중에 부모님이 힘들어지면, 그리고 자신을 원하면 자신이 배운 공부로 부모님에게 효도할 거라고 말하던 시혁. 은채는 시혁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았지만 이 남자가 하는 공부는 뭐든 적극적으로 같은 편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시혁이 떠나는 날 은채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은채는 처음엔 혼자서도 잘 있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나중에는 시혁이 아니면 비슷한 시우라도 보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덕분에 시우가 귀찮아졌다.
“윤시혁씨?”
시혁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시우가 서 있었다. 환하게 웃어 보이는 시우. 은채는 시우에게 빼앗기기 싫은 듯 시혁의 팔짱을 껸다. 시혁은 은채의 어깨를 도닥여주고, 시우에게 달려갔다. 형제의 재회. 어느 누구보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 형제다. 뜨거운(?) 포옹을 하는 형제 뒤로 은채가 새침하게 다가온다.
“야 임마.”
“잘 다녀왔어?”
“그래, 다녀왔다.”
겸연쩍게 웃어 보이는 시우, 시우는 마냥 시혁이 반갑기만 하다. 시혁도 못 본 새 더 의젓해진 시우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시혁은 두 어번 힘주어 시우의 어깨를 도닥였다. 시우에게는 시혁의 그 행동이 무언의 사랑이라고 느껴졌다. 너를 믿고 있다. 대견하구나. 보고 싶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형제만의 암호와도 같았다. 시우도 시혁을 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짜식. 가자, 어머니 기다리시겠다.”
“먼저 가- 형”
“넌?”
“누구 좀 만나고”
먼저 가라는 시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듯 확고한 의지를 내비치는 그를 보고 시혁은 생각했다. 시우가 만난다는 사람이 누구일까, 은채 역시 궁금해졌다. 시우는 사람 만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부턴가 시우는 익숙한 거리에 있는 익숙한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들만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시혁이 일본으로 떠난 후에는 은채도 잘 만나주지 않아 섭섭하던 터였다. 못 본 새, 애인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일본에 있을 때 알려 줬을텐데- 시혁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살짝 떠보기로 한다.
“애인?” “그럴 리가!”
시혁은 괜한 실망감이 밀려왔다. 역시, 이 아이에게 다시 사랑은 힘든 것인가. 시우에게는 숨과도 같았던 아이가 떠나고 한참을 힘들어 했던 동생이었다. 시혁은 그런 시우의 어깨가 괜히 더 움츠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시우는 애써 밝게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은채가 다시 시혁의 팔짱을 꼈다.
“빨리 와, 집에서 맥주나 하자”
시우가 떠나고 시혁은 짐을 은채의 차에 실었다. 시혁은 일본에서의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꿈과 같았던 일본에서의 생활, 그 곳에서 만난 한 여인. 은채는 알고 있을까? 그녀가 없던 빈자리를 채워 주었던 그녀의 존재. 소나기처럼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진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시혁은 트렁크의 문을 닫으며 그녀에 대한 기억도 저 편에 묻어두기로 한다. 은채가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피곤할테니 운전은 자기가 한다며 운전석으로 가는 뒷모습을 와락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나만의 그녀가 있지 않은가.
“은채야, 찐-한 뽀뽀 한번 하자!”
Restaurant, Tip Top
시우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분위기가 좋은 바(Rar)였다. 지하에 있는 바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보이는 한 여자가 시우를 보고 잔을 들어 보인다. 시우는 그 여자의 옆으로 가 앉았다. 지적인 옷차림이 대기업 커리어우먼쯤 되어 보이는 여자는 의외로 섹시한 매력이 있었다. 여자는 시우 쪽으로 다리를 바꿔 꼬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시우는 바텐더가 건내 주는 잔을 홀짝였다.
“분당점으로 갔다며”
“네. ……잘, 다녀오셨어요?”
“보이는 것과 같이.”
두 남녀는 서로의 일을 알리지 않으려는 듯, 겉치레 인사식의 질문만 오갔다. 또 한참의 침묵이 둘 사이를 연결했다. 시우는 감정이 복잡한 듯, 쓴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번에도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니가 먼저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어.”
“저도 살아야죠.”
시우의 말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 이윽고 고개를 떨구는 그녀.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시우가 오기 전에 마신 술이 너무 많았는지, 힘겨워 보인다. 오늘따라 더욱 못 견디겠다. 그런 날 시우가 만나자고 해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시우에게 그런 모습을 들킬까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대했다. 그녀가 불현듯 생각난 듯, 시우에게 묻는다.
“아직도 삶에 재미가 없니?”
“삶을 재미로 살던 때는 지났죠.”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은 시우의 말에 이번에는 여자가 술을 털어 넣는다. 복잡하고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문득 여자는 먼저 세상을 떠난 그녀의 동생이 생각났다.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살고 싶어 하던 여자의 동생은 모질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느 날인가,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날. 그녀의 동생은 그녀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울다 지치면 자고, 다시 일어나면 또 다시 술을 마시고, 그러다 또 울고. 그 생활을 반복하던 그녀의 동생이 어느 순간 모진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유도 모르는 동생의 행동에 답답한 것은 그녀였다. 제대로 고민한번 들어주지 못하고, 따뜻한 말도 제대로 못 해주고, 부모를 대신 해 뜨거운 위로를 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녀도 괴로움에 술이 아니면 잠에 들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조만간 Tip Top 에 한번 들러 주세요.”
이 아이는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나를 찾아 왔을까. 내색하지는 않아도 어려운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시우가 먼저 나를 보자고 했을 때부터 의아했다. 하지만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궁금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 아이가 얼마나 온전하게 버텨냈을지. 다행히도 시우는 좀 나아보였다.
“나,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 섞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 섞는 거 안 좋아 하실 것 같아서 부탁 하는 거에요.”
시우는 항상 그랬듯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 멀어져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보며 여자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을 실실댔다. 부탁이라는 것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시우에게서 부탁을 받았다라.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그녀가 한참 후에 마지막 잔을 털어내고 일어났다. 잠깐 비틀거리는 그녀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 또 헛웃음을 토해낸다.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시우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부탁하는거였군.”
첫댓글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