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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시우는 오늘 하루가 피곤하다. 욕실로 들어온 시우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잠을 피해 찬물로 얼굴을 씻는다. 욕조에 피로를 풀어줄 뜨거운 물을 받는다. 밖에서 은채와 시혁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통날 같았으면 웃어 넘길 은채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귓가가 웅웅 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찬 물 속으로 얼굴을 집어 넣는다. 시우의 모공 틈틈 사이로 물방울이 스며들어간다. 더 이상 숨을 참지 못하겠는지 얼굴을 들어 올리는 시우. 젖은 앞머리에서 미처 피하지 못해 무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다시 돌아가려는 듯 톡톡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시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고 있던 남방 단추를 하나 하나 풀었다. 뜨거운 물의 더운 김이 시우의 몸을 감쌌다. 밖에서는 은채의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좋은가보다. 오랜만에 만난 애인과 함께 있는 것이.
“하은채, 조용히 좀 해.”
“왜왜,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지마!”
은채는 얄밉게 눈을 흘긴다. 왜 하필 시우의 방 앞 거실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시혁의 방 앞이기도 했다. 시혁이 일본에 간 후, 시우도 독립해서 나와 있지만 시혁 덕분에 오랜만에 온 본가에서까지 은채를 봐야한다는 사실이 그날따라 답답했다. 피곤함 때문일까. 시혁이 은채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은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한 고양이가 됐다.
“너 집에 가”
시우는 은채의 말을 이어 들어주지 않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단추만 풀어놨던 남방을 벗어 본가에 있을 때 사용했던 침대 위에다 던져 놓는다. 어머니는 일하는 아주머니를 시켜 매일 시우 방을 청소하게 하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다. 깔끔한 시우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시우는 쓸쓸해진 큰 집에 어머니 혼자 계셨을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왔다. 하지만 이제 다행이다. 형이 돌아왔으니. 욕실로 들어서려는데, 은채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 니 집에 있는 거 아니야. 우리 오빠 집에 있는 거야.”
피식- 시우는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앞에 섰다. 은채는 남방을 벗은 시우를 보고 놀라 시혁의 품에 안겼다. 시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고만 있다. 은채는 당장 옷을 입으라고 소리쳤다. 시혁이 시우를 바라보고 윙크했다. 은채는 시우 쪽을 등지고 돌아 앉았다. 이어 은채의 귓가에 들리는 시우의 목소리.
“이 집, 내 명의거든?”
은채의 재수 없다는 소리가 들리고 시혁의 웃음소리 뒤로, 시우의 방 시우의 책상에는 RTT 직원들의 이력서가 널려있다. 그간의 기록을 포함한 자료에 지율과 세련, 그곳에 도경도 활짝 웃으며 찍은 증명사진이 있다.
Restaurant, Tip Top
“와, 이거 봐요. 저번 달 Food에 ‘스파게띠아 분당점’ 실렸었어요.”
아침부터 준희는 분주하다. RTT에서 한 블록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스파게티 전문점 ‘스파게띠아’가 맛집 전문 잡지 Food에 메인으로 실렸기 때문이다. 준희는 자신이 발견한 잡지를 스크랩해와 RTT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이지율은 정말 가까이에 이런 일이 있다며 호들갑 떨었다. 다들 아쉬워했다. 벌써 이번 달 마지막 날이 오늘, 또 다음 달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10% 감봉이 생각났는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RTT에도 한번쯤 잡지 에디터들이 와서 인터뷰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큰 홍보가 될 것이다. 그러면 윤시우 팀장이 대책 없이 던져 놓은 매출 2배의 미션은 거뜬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자자- 친절은 RTT의 생명! 이번 달 친절 RTT 뽑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실장님의 목소리 뒤로, ‘이달의 친절 RTT 이야기’가 나오자 인상이 구겨지는 이지율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실장님은 오늘 하루도 활기차게, 그리고 친절하게 고객을 위한 RTT를 만들자며 5분여간 떠들었고, 이지율씨는 손톱을 확인하더니 어제 바르고 잘 지워지지 않은 매니큐어를 떼어냈다.
“이번 달엔 Food지에 우리 RTT가 실리도록 해 봅시다! 화이팅!”
실장님의 파이팅 구령을 끝으로 아침 조회는 끝이 났다. 그나저나 세련은 오늘 당당해 보인다. 말을 들어보니 향수비누를 모두 버렸다고 한다. 도경은 ‘아직도 나는데……’라고 말했다가 하루 종일 화장실에서 손만 씻고 있을 세련을 생각해서 말하지 않기로 한다. 실장님의 말이 끝나고 런치 준비에 한창인 RTT의 모습은 활기가 넘쳤다. “팀장님은 안오신데요?” 이지율의 말에 실장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런치 전에 오신답니다!’라고 짧게 말했다. 이지율은 툴툴대며 왜 저러냐고 도경에게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냐. 다른 사람들은 다 알겠는데 왜 너만 모르니. 위생상 깨끗하게 하기 위해 삶아진 포크와 나이프를 정리하고 있을 때 도경은 실장님과 눈이 마주쳤고, 실장은 도경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도경도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생각을 고쳤다. 이지율씨도 알지만 모르고 싶을 것이다. 자연스레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진다.
“앗!”
산더미 같은 포크와 나이프 위에 빨간 피가 투두둑 떨어진다. 도경과 세련이 수다 중에 칼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이프와 포크 안에 들어가 있던 과도에 도경의 손이 베인 것이다. 도경은 설마 실장님을 욕해서 벌 받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실장님이 일부러 과도를 넣어 두었을 리 없어. 주방팀은 ‘왜 그 것이 들어갔을까’라며, 핏방울이 진 도경의 손을 안절부절 못하며 미안해 했다. 도경은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도경은 피를 봤으니 오늘 하루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RTT의 런치가 시작 되었다.
Restaurant, Tip Top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이 이어 들어왔고 홀 팀 사람들은 들어오는 손님을 자신이 맡은 테이블로 인도했다. 1층 RTT에 벌써 반절 정도의 손님이 찼다. 홀 팀은 비워진 물 잔에 물을 채우거나 손님 호출에 즉각 반응하여 오늘도 최상의 서비스를 대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에 몰두했다. 도경의 첫 손님은 여자 두 명의 커리어우먼이었다. 1층에 마음에 드는 자리가 없다며 2층으로 올라갈 것을 요구했고, 도경은 머뭇거리며 2층으로 손님들을 안내했다. 2층 한 켠에 직원들의 휴게실과 실장, 팀장실이 있었다. 그래서 2층에는 이벤트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잘 열지 않았다. 도경은 손님에게 차근차근히 설명해, 다시 1층에서 식사를 하실 것을 권하자 불편한 표정을 짓는 손님 때문에 2층을 열어야만 했던 것이다.
“여기, Alpha M이랑 카프레즈, 갈릭 스테이크 미디엄으로 줘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도경은 1층 주방팀에게 주문 내용을 전달하고, 스프와 빵을 준비해 2층으로 향했다. 공기가 답답하다는 손님의 말에 창문을 열려고 창가에 다가갔다. 상쾌하고 맑기만 하구만. 참 까다로운 손님일세. 2층에서 보이는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도경은 저 사람들 중 반절만 RTT에서 식사 해도 월 매출에 보너스까지 받을 수 있을꺼라는 허황된 생각에 잠겼다. 돌아서려는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들어오는 윤시우의 모습이 보인다. 괘씸한 자식. 어제 그렇게 RTT식구들을 민망하게 했다라! 이번엔 니가 민망 할거다! 내일을 생각하고 그런 만행을 저질렀어야지! 대낮에 보는 사람은 어둠 속의 사람들보다 힘들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윤시우 팀장에게 주먹질을 하다가 윤시우와 눈이 마주친 도경.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활짝 펴 손바닥을 세차게 흔들었다. 윤시우 팀장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들었다 올린다. 저놈의 눈썹은 2층에서도 보이니, 도경은 언젠가 친해지면 꼭 눈썹을 솎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윤시우는 RTT 안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다시 자신의 차로 향한다. 도경은 이때다 싶어 몸을 도렸고, 때마침 음식이 완성됐다는 진동을 받아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행여 1층에서 윤시우를 만날까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와인은 2층에도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Alpha M를 찾아 손님의 테이블에 놓았다. 몇 초 뒤, 손님의 호출이 내려가려던 도경의 발목을 잡았다.
“이거 Alpha M맞아요?”
두 여자 손님은 기분나쁜 표정으로 도경을 의심하며 와인 병을 둘러본다. 도경은 활짝 웃어 원하시는 Alpha M 맞습니다, 라고 설명한 후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여쭙고 싶다며 정중하게 되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도경이 보는 앞에서 와인잔을 세게 내려 놓으며 입맛을 버렸다며 입안을 물로 행궈 버린다. 시선은 도경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도경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느꼈다. 하지만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위안 삼아 친절한 RTT 6회에 빛나는 미소를 공기가 탁하다던 2층에 흩뿌려주었다.
“맛이 전에 제가 먹던 거랑 다른 거 같은데”
아, 이 아줌마들아. 맞다고! 내가 가방끈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짧지만 RTT 3년차에다가 Alpha M은 다른 손님들도 많이 찾는 거라서 내가 다 기억을 하고 있거든!!!!! 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맛이 전에 먹던 거랑 다른 걸 내가 당신하고 같이 살아 본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다른지 당신 혓바닥이 느끼는 감촉에 대해 500자 이내로 서술한다면 나 또한 바꿔줄 의향이 있겠다! 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매너를 좀 지키라구! 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경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정의를 참기로 한다.
“그러세요? 다른 와인을 추천해 드릴까요?”
와인을 의심을 하는 맞은편 여자는 다시 한 번 잔에 담긴 와인을 입에 넣었다가 다시 먹어도 그 맛이 아닌지 와인 잔이 부러지게 테이블에 놨다. 저기요, 손님. 그러다가 당신 옷에 떨어지거든요. 손님과 너무나 가깝게 자리 잡은 와인 잔을 손으로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도경의 머리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천천히 시선을 옮기며 ‘이런데 일하는 네가 뭘 알아?’라는 듯한 무시의 눈빛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도경은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여자의 앞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와인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짜 파는거 아니야? 흠, 아뇨, 와인은 됐구…… 어머!”
여자는 툴툴거리며 결국에 입을 닦으려 화장지를 꺼내던 중 도경과 손이 부딪치면서 도경의 손에 있던 와인이 여자의 옷에 쏟아지고 말았다. 붉은 와인이 하필이면 새하얀 옷에 떨어져버리는 것인지 도경은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오늘 하루 붉은색으로 얼룩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침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이고, 점심에는 손님의 새하얀 옷에 붉은 와인을 쏟아버리고 말았다. 도경은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차라리 손을 뻗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도경은 쓸데없는 오지랖이였다며 자책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제 부주의입니다.”
“악! 야! 이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알아?”
“죄송합니다. 세탁비 드릴께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 야! 너 일부러 그랬지?”
이제, 말이 짧아지셨구나. 손님아. 도경은 허리 숙여 용서를 빌었지만, 분을 삭히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럴 리가 있냐며 실수였다고 용서해달라고 거듭 말하는 도경의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밑에서 소리를 듣고 올라온 세련이 손님의 옷을 닦아주며 같이 용서를 빌었다. 도경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세련과 도경의 진심어린 사과에도 손님은 분이 풀리지 않는 지 앞자리에 앉은 일행의 와인잔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도경의 얼굴에 와인을 뿌릴 것같은 뉘앙스였다.
“너도 니 옷에 똑같이 묻어봐”
촤아악- 소리와 함께 도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도경의 머릿 속에는 처음 RTT에서 실수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나가는 손님의 앞에서 넘어져 스프를 담고 있던 그릇이 깨지고 스프가 손님의 바지에 처참하게 튀었던 도경 인생 최악의 날. 그 날, 스프가 뭍은 바지를 입은 아저씨는 괜찮다며 오히려 도경을 위로 했었다. 도경은 그날 온 몸의 수분을 다 빼는 듯이 울었다.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가 창피해서. 자신으로 하여금 RTT가 부끄러운 음식점이 됐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오히려 자신을 위로했던 마음 따뜻한 아저씨의 고마움 때문에. 하지만 도경 앞의 손님은 그 때의 그 아저씨가 아니었다. 이어 이제 이꼴로 어떻게 서빙을 하지. 옷은 어디서 갈아 입지. 등의 생각이 차례로 생각났다. 그러다 도경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생각을 해도 너무 많이 한 것 같은데, 와인이 자신에게 떨어져야할, 그래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져야 할 순간에 감은 눈 위로 다시 검은 그림자가 앞을 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5초 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티..팀장님!”
Restaurant, Tip Top
[미스터리 쇼퍼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평소 알고 지내던 언니와 함께 분당에 있는 한 음식점을 찾았다. 언니는 직업상 일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하라고 당부했다. 나 역시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중략………… 지점장이 해외 출장 중인 곳에서 지점장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Tip Top 식구들. 나는 그 곳에서 직원을 가족처럼 아끼는 윤시우 팀장과 윤시우 팀장의 사랑을 받고 있는 RTT(사람들은 이 곳을 이렇게 불렀다) 식구들을 만났다.…………중략…………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태연함을 잃지 않았던 직원 이도경씨. 그녀는 고객이 뽑은 친절한 RTT에 여섯 번이나 선정 될 만큼 아름다운 미소와 배려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도경씨를 대신해 몸을 날린 윤시우 팀장은 드라마처럼 …………중략………… ‘직원을 아끼고 사랑해야만 손님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는 윤시우 팀장의 말을 듣고, 이 곳에 오는 모든 손님들이 얼마나 행복할지 생각해 봤다. 오늘 저녁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Restaurant, Tip Top에서 함께 하는 것이 어떨까?]
세련과 도경은 준희씨가 스크랩해서 예쁘게 액자에 들어가 있는 기사를 훑어보고 있다. 세련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박장대소 하기 시작했다. 도경은 한참을 기사의 한 부분에 머물러 있었다.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에디터님이 뭔가 실수하셨나. 인터뷰를 잘못 하셨나. [‘직원을 아끼고 사랑해야만 손님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는 윤시우 팀장의 말] 이라는 부분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개뿔.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 쉐프님이 만들어 놓은 케익에 불도 안 끄고 가셨군.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 직원에게 12만 8천원의 사기를 치셨군. 저놈의 건방진 세치 혀. 언젠가 꼭 뽑아버릴 날이 오길 바랄 뿐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세련이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내가 느낀 검은 그림자의 형체가 앞에 서 있었다. 윤시우 팀장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등을 진 채로. 1층에 있던 사람들도 이 상황을 모두 지켜봤다. 윤시우 팀장에게 쏟아지는 박수 갈채. 하지만 정작 도경은 직접 고마움도 제대로 표현 못하고 허겁지겁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역시나 까탈스러웠던 손님들은 미스터리 쇼퍼와 잡지 에디터로 밝혀졌다. 준희씨는 이번 달 Food지를 RTT벽에 스크랩 해놓았다.
“역시, 우리 이도경씨야.”
“하하- 운이 좋았죠.”
그 상황을 너무나 대견하게 잘 견뎌 냈다는 RTT식구들의 격려를 받으며 그렇게 시간이 훌쩍 훌쩍 지났다. 윤시우 팀장은 Food지에 소개 되고 잡지사 인터뷰며 신문사 인터뷰 등 각종 인터뷰 때문에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RTT에 들렀으며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윤시우 팀장의 마지막 인터뷰 스케줄이 끝나고 드디어 해외에 계시는 지점장님으로부터 회식하라며 ‘회식비’가 주어졌다. 모두가 윤시우 팀장과 함께 하려고 기다려왔던 것이다. 게다가 윤 팀장도 군말 없이 회식에 따라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 날이 바로 오늘. 다들 퇴근 후, 회식 때 입을 예쁜 옷을 준비 했을 것이 분명했다.
“자자, 팀장님은 집에 들렀다가 오신다니까 우리도 오늘 디너 8시에 정리하고 일어서지.”
“오예! 오늘 그럼 어디로 가요?”
“지율씨가 좋아하는 DAY 로 가지.”
“역시, 실장님! 최고!”
도경은 진정으로 실장님과 이지율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거듭 했다. 여우 같은 아내와 여우 말이면 꿈뻑 죽는 곰 같은 남편. 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저 두 사람 무슨 일을 낼 것이 분명하다. 실장님, 파이팅! 감사의 마음을 전할 기회가 생긴 도경도, 오랜 만에 신나게 놀고 싶은 RTT 식구들도 즐거운 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Restaurant, Tip Top
“오빠, 내가 얼마나 오늘을 꿈 꿔 왔는 줄 알아?”
시혁의 손에 깍지를 끼며 옆에 착- 달라 붙어 있는 은채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시혁은 은채의 손을 빼 반대편 손으로 잡고 은채를 옆으로 당겨 허리를 감았다. 은채는 고개를 시혁의 어깨에 기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는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걷은 길은 어느 새로운 길이라도 두렵지 않았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오빠도 많이 외로웠겠다. 일본에서.”
시혁의 말에 은채는 괜시리 마음 한 켠이 찡해 왔다. 어쩌면 기다리는 자신보다 그 곳에 혼자 있을 시혁이 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은채의 투정에도 항상 웃음으로 답해주는 은채의 마음을 더 잘 알것만 같은 이 남자를 은채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혁은 은채의 말에 심장이 콕- 아파 오는것을 느꼈다. 왜 이러지. 시혁은 그 이유를 바로 생각해 냈다. 아. 본의 아니게 은채를 속이고 있구나. 시혁은 조만간 털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혁 본인을 생각해 주는 은채가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은채의 많이 외로웠겠다라는 말은 모든 것을 이해해준다는 뜻이 아닌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시혁은 감추고 있는 사실이 불편했다. 이해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바라보며 긴 시간을 혼자 외롭게, 연락도 뜸 한 애인을 기다리다 지쳤을 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 지체하면 한켠에 두었던 그녀를 향한 마음이 더욱 커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그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숨긴다면 언젠가 만날 거라는 기대감을 남겨 두는 것과 같았다. 은채와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나-”
일본에서 만난 그녀와의 감정은 사랑은 아니었다. 뭐랄까. 감싸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얇은 유리와 같은 여자였다. 그렇다고 은채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술친구 정도의 여자였다. 어느 날,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곧 내일 볼 것 처럼 이야기 하던 그녀가 아직도 시혁의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다. 차라리 ‘안녕!’ 이라는 말로 끝맺음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그녀의 소식이 궁금하지는 않았을텐데. 이름이라도 알고, 사는 곳이라도 알면 찾아 가 자신이라도 끝맺음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만나는 동안 서로의 이름과 나이 등의 개인적인 것들은 꺼내지 않았다. 그녀를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묘한 기운이었다. 어쩌면 시혁은 일본에서 항상 그 시각이 되면 이름 모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무슨 대답이 그래, 당연히 외로웠겠지. 나두 없구, 시우두 없구.”
시혁은 은채의 말에 눈웃음으로 대답했다. 시혁은 은채를 데리고 근처 Bar 로 들어갔다. 은채와 조용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다보면 숨겨왔던 이야기도 꺼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은채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이러다 저 눈에서 눈물이 가득차 올라 숨길 수 없게 되어 떨어뜨리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앞섰다. 시혁은 은채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기다려 준 여자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시혁은 일본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만약, 너에게 한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해. 넌 뭘 할거야?”
“나? 난. 여행을 떠날꺼야. 좋은 것, 멋진 곳, 내 눈에 다 담고, 그러고 갈꺼야.”
자신이 눈을 바라보며 우울한 듯 말하는 은채를 보고 시혁이 웃는다. 은채의 손을 꼬옥- 잡은 시혁. 은채는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지냐며, 무슨 일 있냐고 물었고 시혁은 누군가 자신에게도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 떠올라 물어 본 것이라고 답했다. 시혁 역시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의 답에 은채처럼 여행이라고 답했다. 질문을 했던 그녀에게 다시 시혁이 물어봤을 때, 시혁은 순간 돌에 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 동안 자신과 연이 닿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만나서 고마웠다고, 덕분에 정말 즐거웠던 인생이라고 말 할 수 있었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떠나 보낼 준비를 할 수 있게. 무책임 하게 훌쩍 떠나버릴 수는 없다고. 그런 여자였다.
“그 질문,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시혁은 낯익은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혁은 어쩌면 그 목소리를 애타게 찾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목소리가 이끄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였다.
Restaurant, Tip Top
♩♬♪잔인하안!♩♪여자라아아!♪나를♪욕♪하♪지♩는♪마♪아♩쏴아-♬
커다란 룸 안에 스무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도경은 생각했다. 수학 여행에 몰래 빠져나온 저녁 노래방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었는데, 새삼 세상은 좋아지고 있구나. 아직 대한민국이 발전 가능성이 있는 나라구나 싶었다. 오늘 MC를 맡은 재간둥이 재희가 우아하고 품격있기가 최고급 절정에 다다른다는 ‘붕’아카데미에서 수련 받고 온 노래를 선보였다. 역시 고급스럽다. 최고다. 전혀 싼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엘레강스한 매력이 있다.
“자자! 우리 RTT의 꼭 미남이 되어야 할 그 분! 김영신 실장님!!!, 한마디 하시죠!”
“자자, 우리 사랑하는 RTT 가족 여러분!”
MC의 소개에 흘러내린 바지춤을 잡아 올리며 무대 가운데로 가는 실장님. 꼭 미남이 제발, 됐으면 좋겠을 실장님은 오랜만의 회식에 이미 약주 한잔 하시고 마을 어귀를 떠돌아 다니는 사람 같아 보였다. 마이크를 잡는 실장님의 눈이 풀어진 것을 확인하고 모두들 집중하지 않았다.
“제가 뭐랬습니까. Food지에 저희 RTT 분당점이 실릴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뻥치시네. 언제. 아니 나 잘 때 우리 집에 와서 귓속말 하고 갔나? 도경은 듣지도 못했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부탁했다. 순진한 사람들은 실장님의 호언장담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갈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실장님은 참 군더더기가 없는 대신에 뻥으로 옷을 지어 입으셨나. 자꾸 자신을 과장하려 하신다. 실장님, 그런 남자 별로 안 좋아 하거든요. 이지율씨도 여잔데, 설마 그런 남자를 좋아하겠어요?
“무튼! 이렇게 우리 RTT가……”
또 시작 됐다. 5분 연설. 회식날도 어김없이 듣게 되는 저 5분 연설. 하지만 도경은 마음을 너그럽게 쓰기로 한다. 만약 실장님의 5분 연설이 없다면, 아주 조금은 허전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위안한다. 실장님은 30살이 초,중학교때 나왔던 인기절정의 노래 김원준의 ‘쑈오’를 열창했다. 쑈오- 끝은 없는 거야. 정말 끝이 없어보이는 이지율에 대한 실장님의 무한 사랑. 실장님에 이어 다음 예약곡은 엄정화의 ‘초대’. 반주가 흘러나가자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실장님이 던져놓은 마이크와 가수 없는 무대, 그리고 음악 반주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 때, 내 앞을 비집고 지나쳐가는 묘령의 한 여인.
“납니다! 이 노래.”
주량이 세지 않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항상 이미지 관리를 하며 자체 술 거부 프로그램을 작동 시켰던 이지율. 이번 회식에는 왠일인지 아주 거하게 술이 앞머리 눈썹 위까지 가득 차 보였다. 새빨갛게 물든 볼에, 실장님보다 더 풀린 눈. 그리고 언제 망언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저 주둥아리. 그리고 도경의 불안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불안은 왜 어김없이 단 한번도 어긋나지 않는 것일까.
“나 오늘, 아나. 내가 진짜 오늘을 기다렸다. 윤시우, 당신!!!!!!!!”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누군가가 이지율이 예약해 놓은 곡을 취소하는 상황까지 이르러 지율의 목소리가 룸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회식 자리에 와서 회식 하러 온 사람들 안주 날라주는 종업원처럼 섞이지 못했던 윤시우의 눈이 번뜩였다. 시우는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 윤시우 팀장과 도경의 사이에 앉아 있었던 실장님과 이지율이 밖으로 나가자 빈 공간에 사람들은 도경을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윤시우 팀장의 옆자리에 앉은 도경은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을 꺼내려던 시점에 이지율이 윤 팀장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를 꽤액- 지르고 있지 않은가. 덕분에 시우의 시선은 오로지 이지율만을 향했다. 참 가지가지로 주목받고 싶은가보네.
“야, 내가 말이다. 딸꾹.”
주변에서 이지율을 말리려는 우려의 목소리가 웅성거렸다. 이런 식이였다가는 감봉 10%가 아니라 윤 팀장 성격에 50%를 뚝 떼어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조치에도 할 말이 없다.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 감봉에도 함께 일을 할 수 있는게 좋으니까. 게다가 정말 50%를 떼어가도 좋을 만큼 이지율이 사고를 치고 있지 않은가. 걸어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못말리는 이지율을 무대에서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직원들. 그리고 직원들 사이로, ‘그냥 두세요.’ 라고 말하는 쿨 한 윤 팀장. 너도 듣다 보면 그렇게 계속 쿨 할 수는 없을 거야. 윤 팀장은 ‘회식자리인데 어때요, 다들 불만 있으면 여기서 털어버려요’의 뉘앙스를 풍기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도경은 알고 있다. 저 웃음 뒤에 숨겨진 쌍칼을 휘두르고 있을 윤시우를.
“야, 그래 좀 놔! 야 윤시우, 너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 내가 내가, 어디 가서 내가 진짜 안 빠지는데, 내가 말이야 딸꾹.”
이지율씨의 막말은 계속 되어갔다. 도경은 실장님에게 막말을 던지고 뛰쳐나갔던 가까운 과거가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다시는 상사에게 건방지게 입을 나불대는 사태는 없어야 겠다고. 이지율은 자신이 얼마나 예쁜데 자신을 밀어낼 수 있냐며, 세상 너 혼자 살거냐는 둥 어차피 넌 나에게 대쉬하게 된다는 둥의 혀 꼬부라진 소리를 이었다. 그리고 술을 자제했던 윤시우 팀장도 사람인지 타는 속을 술로 달래는 듯 보였다. 거 봐라. 내가 뭐랬니. 모든 사람들은 이지율을 말리려, 그리고 이지율이 떠드는 말을 들으려 이지율에게 집중 했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은 도경 혼자 뿐이었는지 도경의 시선은 힐끔거리며 시우를 훔쳐내고 있었다. 훔쳐 보는 정성에 감격이라도 한 듯 도경에게만 들리는 윤시우의 혼잣말.
“정말, 잘라버려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