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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긍정적 평가
2. 부정적 평가
3. 관련서적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당연히 독립운동 경력에 기초한다. 비록 실질적인 기여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지라도[1], 일제강점기 내내 일관되게 비타협적인 반일노선을 견지하였다는 부분만큼은 다수가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승만은 미국 내 한정으로만 독립운동을 했다지만, 이는 한국 독립에 영향을 주는 여론을 미국 내에서 만들었고, 그가 미국 내에서 지지를 쌓아갈 때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에 무지했던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 처리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외에서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서, 노선으로서는 주로 한결 같이 외교독립론을 견지했다. 때문에 지나치게 타협적이거나 줄곧 미주지역에서만 맴돈다는 비판이 있었으며 특히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주로 지적 당하는데, 당시 변호를 거절했던것은 미국의 언론이 매우 안 좋았기때문이다 그당시 약소국이며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를 조선이라는 나라에 사람들이 미국 그것도 자기네 나라 외교관을 살해한것이니 어떤 나라가 여론이 좋겠는가? 외교관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자인데 어디 듣지도 못한 나라가 와서 외교관을 죽였으니 여론이 좋을리가있겠는가? 예를 들면 아프리카 소국이 한국으로와 한국의 외교관을 살해한것이나 마찬가지인거고 한국입장에서는 죽일놈이 되는것이 맞지않은가? 당시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잠정적인 우호 관계이자 동맹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 이승만은 외교독립노선을 주장한 사람이고 이들을 변호했다가는 외교독립이 물거품이 될거라는걸 안 이승만은 변호를 거부한것이다.[2] 독립운동가들의 갈등을 일으킬려고 한것이 아니라는점이다.
그리고 외교 독립노선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주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3] 1941년 '일본 내막기' 라는 예언서책을 저술해 일본에 대해 나이브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알린 것,[4] 항일단파방송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어 방송을 직접 진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해가는 전쟁상황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달하고 희망을 북돋운 것은 확실한 이승만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미국 국무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것과 미국육군전략사무처(O.S.S)의 항일게릴라전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도 이승만의 역할이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독립과정은 이승만이 주장하던 외교노선대로 진행 되어갔으며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승만의 역할은 어느 정도 인정해 줄 수 있다는 이야기. 이승만이 제1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평가가 더 높아졌을 것이다
해방 후 입국하여 미군정 및 한민당과 손잡고[5] 과도민주의원을 거쳐서 UN결의안에 따라서 제헌의회 총선거를 거친 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경력 덕에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의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6][7]
하지만 정읍발언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남한 단독의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고, 마침내 반쪽짜리 단독 정부를 세우고 본인이 초대 대통령이 됐으니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것은 논란이 많은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일성과 소련이 일찍부터 북한 지역에서 국가수립을 위해 움직였기에 결과론적으로 이승만 역시 남한 지역에서의 단독 국가수립을 주장했다고 옹호하는 측도 있다. 그러나 북한지역에서 단독 국가수립을 위해 움직인다고 해서 남한도 똑같이 분리 건국하려는 것이 과연 정의롭고 합당한가로 질문한다면 답을 쉽게 그렇다라고 말하기 힘들다. 김구나 김규식처럼 끝까지 외세에 의한 민족의 분단을 막고 통일한국을 세우기 위해 희생한 중도 성격의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승만은 미국에 의지해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것이다.
설사 김일성과 소련이 적극적으로 공산당 이하 각 위원회 등 국가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하며, 한반도에서의 미소 냉전을 우리민족의 힘으로 물리치기 힘들었다고 쳐도 협상과 반외세 운동을 통해 분단을 최대한 막으려는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김구는 비록 소득이 없었긴 하지만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설득하려는 시도라도 했으나, 이승만은 그런게 없었다. 이승만의 성격과 정치철학을 고려해 소위 '빨갱이'와의 협상이나 반외세운동을 기대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승만이 진정 민족을 생각한 외교독립론자였다면 그 외교술을 이용해 미국과 소련을 달래거나 중재하고 그 사이에서 이득을 취해서 분단을 최대한 막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올바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자신이 일제강점기 시절 청원서를 보낸 것처럼 국제연합에 정식으로 통일한국을 위한 지지를 요청하기라도 해야했다. 그것들마저 다 안되고 김일성이 더 노골적으로 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했을 때 불가피하게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게 과정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같은 두 강대국의 협상이 결렬되자 이승만은 더욱 단독정부 수립을 강조했다. 결국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자, 김일성 역시 눈치 볼 것이 사라져 한달이 채 안되어 북한 지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판을 걸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의 이기심, 정치철학과 언행이 분단의 가속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진 혹자들은 어쨌든 이승만이 남한 반쪽이라도 친미국적인 국가를 세워서 자유민주주의 서방진영에 편입시켰고 따라서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르도록 자유롭고 부강하게 된 기반을 쌓았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통일국가를 지향하지 않고 반대로 단독정부를 선택함으로 인해 전쟁과 분단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상당히 부강하긴 하지만 분단으로 대한민국이 소모하는 피해 역시 글로 다 적기 힘들다. [8]
그리고 이 문제에서는 과정을 보는 것이지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이승만이 위쪽에서 나라 만들어 대장놀이 하려는 김일성처럼 통일국가수립이라는 민족의 염원이자 대의, 최선을 져버렸기에 비판이 가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고 부강하게 만든 것은 피땀 흘린 국민들의 힘과 희생이었지, 이승만이 의도하고 기획한 것이 아니다. 제1공화국 속 이승만의 정치와 부정부패를 보면 과연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자유와 부강을 꿈꾸기나 한건지 의심이 들 지경. 즉 자유민주주의 같은 좋은 이데올로기가 꼭 그것을 선택한 지도자의 도덕성과 비전인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훌륭한 선전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이데올로기가 만든 끔찍한 참상들은 남북 외에도 세계에 널려있다. 긍정적 평가에 정부 수립을 가져왔는데 부정적인 서술이 더 많지만 현 대한민국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이 문제라는것이다
참고로 건국절 논란 항목도 보면 좋다.
철저한 외교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는 내내 일관되게 외교독립론을 견지하였다. 국제정세를 읽는 눈 만큼은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에 독보적이었는데, 1941년에 이미 "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저술하여 일본의 미국침략을 예고하기도 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작전통제권을 넘긴 것을 좋게 평가하면 미국으로 하여금 이 전쟁에 개입하고 책임을 지우게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외교적 책략에 미국이 넘어가버려 미국은 한국이라는 늪에 넣은 발을 당장에 뺄 수 없게 된 것. 한반도 분쟁에 있어서 북한의 군사행동을 장기간 저지할 수 있는 명분과 더불어 한국전쟁 때 발생할 수 있는 미국의 태도전환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했다.
독도 문제에 있어서 일본을 상대로 초강경책을 펼쳤다. 이승만 라인도 이런 정책의 일환이었다. 아무리 당시 일본이 패전국이였다지만 두 나라간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배짱으로 밀어붙인 외교정책이라 말할 수 있다.
외교전을 펼칠 때 강경책을 매우 선호했다. 미국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강한 요구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저대로 못 피해가게끔 도박수까지 던지며 밀어붙였다. 이때 모든 사안을 본인이 철저하게 본인이 주도하여 일선 외교관들은 이승만의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만 수행했다. 이런 강수가 잘 먹혀들어간 대표적인 사례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한국을 배제한 채 휴전협상 마무리 짓고 발 빼려는 미국을 제대로 붙들어 매놓았다. 반대로 부정적으로 작용한 사례는 한국전쟁 이전 한국군 전력 증강이다. 한국군을 6만 정도의 경비대 수준으로 제한하려는 미군에게서 원조를 최대한 받아내고 10만으로 병력을 증강시키려 했는데 군비 원조를 요구 했다 거절당하면 더 큰 요구를 하는 식으로 밀어붙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독도를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할 수 있는 원인 중 하나. 이 역시도 이승만의 인정받는 업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해방이후 가장 중요한 현안이자,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농지개혁을 추진하였다. 중도우파 성향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해서 대지주계층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유상몰수/유상분배 형식의 농지개혁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정책으로 남한의 고양된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시행되었으나, 남미나 제3세계 국가들이 토착 지주 계층의 반발로 산업화나 경제 개발 정책이 실패한 점[9][10]을 생각하면 좋게 평가할 수도 있겠다. 한국전쟁과 함께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에서 봉건적인 지주-소작관계를 무너뜨리고, 지주계급을 몰락시키면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판을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단, 농지개혁법 시행에는 한국민주당을 무력화(다만 한국민주당은 친일지주들의 모임이자,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지주세력이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하고 독자적 국정운영을 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으며, 농지개혁법 실행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당했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빈농층 강매와 신흥지주계급의 부상 등 시행 당시의 문제도 있었기에 과대 평가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농지개혁법은 6.25 전쟁으로 도중에 중단되었다가 1961년에 가서야 재시행되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 직후 농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1948년 당시 80%에 이르던 문맹률을 1959년에는 22.1%까지 낮춤으로써, 대한민국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의무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미국과 같은 선진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게되었고 그 결과로 이승만 정권 퇴진운동에 나서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을 축출한 것이 의무교육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 할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사회는 북한 사회와 좁힐 수 없는 격차를 벌이며 크게 앞서 나가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실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사실 이승만정부때 나온 계획으로 1959년에 발표되었으며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한국경제재건계획이 건의되기도 했으며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3개년계획안(1960∼1962)이 정부가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의 시초가 되었고 이후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 계획을 토대로 삼아 만든것이 바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다.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의 경제를 살리기위해 경제개발에 힘을썼다 그예로 충주 비료공장, 한국유리공업, 문경시멘트공장 등을 설립하고 PL-480(한미잉여농산물원조협정)으로 식량 자급률 78%였던 한국의 식량문제를 단숨에 해결하였고 이른바 3백산업으로 불리는 신흥산업을 번성시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1955년에는 영암선을 개통하여 석탄을 서울로 직송하여 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바꾸었다.
1950년대 말부터 원자력법을 공포하여 원자력 개발체제를 갖도록 지시하였다 출처=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0429&cid=46625&categoryId=46625
또한 기업, 산업체의 기술자를 해외로 연수보내어 기술력을 배워오도록 했고 해외 유학 장려, 대학교 시설들을 세웠으며 이렇게 유학 보내진 인재들이 이승만 하야후 박정희 시절때 빛을보아 경제개발을 이끌게 된다
넷째, 이승만 정권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사회경제적 배경이 전무하였는 데다, 이승만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의 의식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와 유지에 더 몰두하여, 정치체제는 권위주의화의 길을 밟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분단상황의 논리로 인하여 실제로는 반공 이념으로 대체되거나 변질되었다. (중략) 다섯째, 정권 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정권은 본질적으로 이승만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였다.
김수명(1991), 이승만 정권의 흥망과 그 정치사적 의미. 한국정치학회보, 25(1), 103-132.[11]
북의 김일성 남의 이승만
모두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라의 평화통일은 기대 못 한다
제국의 앞잡이여!
붉은 사냥개여!
민족을 기만하고
나라를 망치려는
너의 배짱은 그 무엇이냐북성남만(北成南晩)[12]
1946년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들이 도량하여 민족의 장래는 어두워만 갔다.… 마침내는 4·19의 반독재 학생혁명을 유발하고 말았다.
- 박정희
역사학계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13]
TK의 주적[14]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을 하고 독립에 기여했지만, 독단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여러 번 야기하였으며, 중국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주류와는 1920년대부터 동떨어져 있었고 주로 "안전한" 미주에서 활동하면서 스스로 독립운동의 주도자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리하여 대통령을 참칭한 일이라든지,[15] 독립운동과 정치노선을 둘러싼 갈등[16] 과정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17] 자신의 권력기반인 친일파의 청산을 방해하여 지금까지도 문제시된다.[18][19]
이승만 대통령의 독선적인 모습은 해방 이후에 보여준 권력욕과 독재정치로 더욱 심화된다. 민주국가를 천명해놓고선 스스로 1948년을 제외한 모든 선거[20]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저버렸으며, 서북청년회 등 정치깡패를 이용해 국민을 억압하였다. 신생국가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잘못된 전통을 만들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기 어렵다.[21] 전쟁대비 미흡과 미군철수, 국방력이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북진통일을 고수한 점, 한국 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 및 도주,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제주 4.3 사건 등과 같은 양민학살,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진보당 사건, 3.15 부정선거, 국회 프락치사건 등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한 독재 행위, 그로 인한 4.19 혁명 등으로 부정적 평가가 지금까지도 높다. 한 문단 안에 다 몰아넣으니 과오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개별 항목이 존재할 정도로 묵직묵직한 것들뿐이다.
또한 북한의 김일성을 적대하였으나, 김일성처럼 군인, 관변단체, 학생을 동원해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추진했다.[22][23] 남산공원을 이승만의 호 우남을 따서 우남공원으로 명명했으며, 공원 가운데에 자신의 동상[24]을 세웠고 생일에는 탄신제가 거행되었다. 측근들의 부정부패까지도 김일성 정권까지 유사하였으며,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김일성은 권력유지에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독재자 권력 유지에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이승만이 계속 주장한 북진통일론이 중국과 소련에게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 때문에 대한민국 군대를 10만 명으로 제한을 두기도 했다.
일부 극우단체에서는 이승만이 초대 건국대통령이었단 점에서 재평가를 하고 국부로 모셔야 된다고 주장하나, 앞서 언급한 실정과 대한민국 헌법에 4.19 혁명정신이 명시됐단 점에서 4.19 혁명의 원인제공자를 국부로 삼는 건 현행 헌법의 조항과 모순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승만 집권기에도 경상북도와 제주도 같은 지역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인식이 극히 나빴다. 왜냐하면 경상도, 특히 경북은 일제강점기와 제2공화국 때까지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는 대구광역시가 있어 매우 유명했다. 한반도 내에서 엄청난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를 배출해냈고, 이승만 독재에 항상 반대하며 민주당 등지의 야권의 표밭, 지지 지역이 바로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였다. 오히려 이 시절은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가 보수 성향이 짙어졌고,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을 거치며 두 지역은 정치 성향이 뒤바뀌게 된다. 어찌되었든 대구는 이승만과 자유당이 깡패를 동원하거나 여러 공작을 피려고 할 정도로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배우 권해효가 나레이션을 담당한 백년전쟁 - 두 얼굴의 이승만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이승만의 과오를 샅샅이 들춰가며 이승만을 까고 있다.
독립운동 당시에는 이승만과 김구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나 정권을 잡은 후 이승만은 역사에서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김구를 지워버리려고 시도하였다.[25] 먼저 김구의 백범일지를 금서로 지정하고, 학계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업적, 외교독립론을 강조하라고 지시하였다.[26] 심지어는 일각에서는 안두희 소위가 단지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였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기 다른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적으로 돌렸다. 또한 항일운동이 자신에게 해가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나오면 그 강도가 현저하게 약해졌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이는 모든 운동의 방향성에 있어서 자신을 중심에 두려고 하였고 자신 위주로 모든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작은 유학 시기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더럼 스티븐스 저격사건 변호를 거절하고 오히려 비판한 것이었고, 우성 박용만과의 하와이에서의 대립,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의 대립과 위임통치 청원 문제 등 꾸준히 이어졌다. 또한 상술했듯 도산 안창호 선생과 대립 후 '이승만 친위대'라 불릴만한 정치깡패조직인 동지회로 미주 한인 사회에 많은 분열을 조장하였다. 이승만이 소속된 조직은 단 두 가지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의 철저한 사조직으로 변하거나, 혹은 와해되거나. 후자의 예외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승만으로 촉발된 국민대표회의 사건으로 인해서 실질적으로 독립단체의 대표성을 상실하고 처참한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첫째, 하와이의 동포들이 공동 결의로서 임시정부에 직접 납입하려고 한 인구세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유용하고, 정부에서 임명한 세금 징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징세위원을 불법으로 처벌하였다.
둘째, 대통령에 위임 발행한 외국공채의 수입도 거의 전부 유용하고 심지어는 수지보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셋째, 본래의 임무인 외교와 선전에 관해서도 하등의 볼 만한 성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편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ㅡ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 폐지를 의결하면서 거론한 부정, 비리 사항
민문연 “이승만, 독립운동자금 횡령”.. 감춰진 행적 공개
“1915년 국민회 분열, 이승만 ‘자산 사유화’가 씨앗”
임정 대통령 시기 이승만이 대통령 직함을 자의적으로 행사하고 그 직위에 집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주관하던 구미위원회는 밑에 파리통신부를 두고 외교업무를 직접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동포의 인구세와 애국금까지 독점하는 등 임시정부 업무를 전횡하여, 대통령의 독주라는 비난을 받았다. 1924년 상해 임정 개혁파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려 하자 임정으로 보내던 소규모의 독립운동자금마저 끊어버렸으며, 결국 구미위원회는 이승만이 탄핵된 뒤 1928년 해체되었다. 또한, 이승만의 조직은 안창호의 국민회를 테러하여 자금을 탈취하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자기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켰다. 안창호, 박용만 그리고 김규식을 미군 정보당국과 민>간 첩보기구에 급진적인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
ㅡ<박용만 평전>
"FBI보고에는 또 1931년의 문서를 인용하여 이승만이 박용만을 '간통자, 착취자' 그리고 나중에 ‘일본 밀정’으로 중상모략한 일이 있다."
ㅡ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1989, 89쪽
이승만이 독립운동가 시절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모함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24년 가을, 안창호는 미국 입국을 위해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에게 입국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서재필에게 알려 스펜서(Spencer) 상원의원을 통하여 미 국무성에 교섭한 즉,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한인지도자가 안창호를 공산당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자를 줄 수 없다.’라는 회답을 받았다.
1923년 1월의 일본 정보문서 또한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라고 선전하였기에 안창호의 미국에서의 신용은 추락하였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27] 이승만을 옹호하는 유영익조차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그는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고 했다.[28]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ㅡ이승만, 하와이 법정 증언에서
이승만은 미주에서의 박용만과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한 것은 비판받을 만한 행보다. 후에 조직을 빼앗긴 박용만측에서 하와이에 정박해 있는 일본 순양함 이즈모 폭파 논의가 일어난 것을 두고 법정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 폭로하였다. 다만 이때의 미국은 친일 국가였으므로 미국령 하와이에서 일본 군함이 한국인들의 손에 침몰했다면 미국과 일본의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박용만 이승만 할 것 없이 다함께 망했어요가 될 확률이 대단히 높기는 했다. 이승만의 밀고는 <신한민보>와 <(국민회)공고서>,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정부수립 이후 친일 민족반역자 청산을 방해했으며, 특히 군부와 경찰에서 두드러졌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고 해체된 것도 이승만이 친일 민족반역자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경찰은 조사위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당시 글읽은 사람은 모두 친일 민족반역을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단지 물 타기에 불과하며,[29] 특히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던 악질 친일파 민족반역자 인 노덕술이나 김창룡과 같은 자들을 측근으로 두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한 것은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큰 악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30] 비록 무장독립전쟁은 아니더라도 흔들림 없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반일(反日)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은 해방 후 친일파 청산에는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당시 중국이 공산화 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등 급격한 외부변화도 있었지만, 오랜기간 미국에만 있다가 조선에 돌아온 그로서는 타 정치인보다 현실적 지지세력이 미미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친일파와 협력한 본인의 권력욕이 주요 이유였다고 평가받는다.
위 내용의 핵심적인 사건. 항목 참조.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라고 강력한 북진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31] 한국전쟁으로 연합군 소모가 극심화된 상태인 1954년에 미국의회 연설에서는 미국이 소련에 대해 선제 핵전쟁을 개시할 것을 주장할 정도였다. 기사 물론, 미국은 핵전쟁 발발시 상호파멸 상태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방의 최고책임자로서 북한의 남침 준비를 파악하고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은 책임이 있다. 전쟁 발발이전 산발적인 국지전 양상이 이어져가고 있던 와중에 전병력의 1/3을 휴가를 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전쟁발발 이후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뺏긴 것은 장비/인력부족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당시 감시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건 최전방에서 북괴군과 직접적으로 교전을 벌이고 정탐했던 일선 부대장의 보고밖에 없었다. 다만 당시 계속된 비상근무태세로 국군의 피로도가 가중된 상태였고 국가산업이 농업에 편중되어있었기에 휴가를 보내는것이 불가피한 면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한편, 이승만은 평소 미국에 대하여 군사지원과 경제지원을 요청하였지만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애치슨의 담화인 애치슨 라인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방위라인에 끼지도 못하였다. 물론 이것은 미국이 한국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약간의 원조를 통해서 한국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 의회에 주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1949년에 10월 6일에 군사방위원조 법안의 302조를 통해서 한국등에 2,660만 달러가량의 원조를 계획했었고 1950년 1월에는 26일에는 '한미 상호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되었다.[32] 당시 미국은 북한이 남침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북한이 본격적으로 소련에게 무기를 구입하기 이전에는 북한의 전력이 남한을 압도할다고 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또한 미국은 전차같은 장비를 제공하지 않았을 뿐 57mm M1 대전차포같이 방어전에 사용할 무기는 어느 정도 제공하고 있었다. 실제로 전쟁 초기에 제 6사단은 57mm 대전차포를 이용하여 기갑장비에 어느정도 타격을 주면서 선전하기도 했다.[33] 6사단은 전쟁발발 직후인 6.25일부터 6.28일까지 907발의 57mm 포탄을 소모하였다. 즉, 전쟁 이전에 이미 해당 대전차포를 수령한 상태였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던 북괴는 소련제 T-34 전차를 굴렸는데 이 전차를 상대하기에는 국군이 보유한 대전차화기의 위력이 상당히 부족하다는것이 드러났다.[34] 다만 57mm 대전차포의 원본인 6파운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름대로 잘 써먹었던 물건이고 어지간한 중형전차는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었던 물건이다.[35] 당시에도 미국은 한국 지형에서는 전차의 사용이 제한적일것이고 57mm 대전차포 정도면 한국 지형에서 사용될 전차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것이라고 판단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오판이었다. 덕분에 초기에는 한국군이고 미군이고 할것 없이 북한군의 T-34 따위에 고전해야 했다.
미국의 제대로 된 지원이 있었다면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드립이 사실화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36] 미국의 입장에선 강력한 북진의사를 내보이는 상황에서 전차같은 무기를 제공했다가 선제공격이라도 한다면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될 상황이었기에 회의적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북한의 선공보다 남한이 선제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공공연하게 강력한 북진의사를 내비친것이 이런 상황을 만든것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이 부분에서 이승만의 책임은 명백하다.
문제는 전쟁이 난 다음.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와 책임감을 저버리고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는 페이크 방송을 하면서 한강대교를 폭파하는 등, 무능력하며 일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압도적인 적 앞에서 피난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안전이나 통제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한강대교를 폭파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 사실 한강교에는 다리를 통제하던 헌병대가 있었으나 인파에 흽쓸렸고 그렇게 도강시도하던 사람들이 폭파에 희말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지키고 있다며 사기를 치고 몰래 도망간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실드가 안 된다. 임진왜란때의 선조의 피난과 더불어 21세기 현대에 와서까지 국민들이 전쟁이 나면 정부가 무책임하게 도망갈 것이라는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을 심게 된 것에 이 사건이 너무나 많은 영향을 미쳤다. 참고로 이것 때문에 한 장교가 빡쳐서 권총을 뽑아들고 "이승만 개새끼 죽여버린다"며 길길이 날뛰었는데 그 장교가 다름아닌 박정희 소령이였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그 박정희 맞다.
그나마 아무것도 안한것 아니라서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주미 한국대사인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이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으며 미국의 상·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하였고, 이후 UN과 국제사회에 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6월 27일) 그리고 장면은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방송을 통해서 국내에 알렸다. 그러니까 미주에서의 실질적인 일은 장면이 하기는 했지만 이승만이 아무것도 안한건 아니다.
방송 자체야 질서 유지를 위한 고육지책의 면이 강하다고 어찌저찌 실드를 친다고 하더라도 서울 사수가 불가능한 것을 판단하고 잽싸게 달아났으면 그 지경은 안 일어났다.(...) 이러니 국회의원, 정부 고위인사의 대피와 군부대와 물자의 퇴각, 기밀문서와 정부 재산의 확보 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대통령만 겨우 빼낸 상태에서 허겁지겁 이루어졌다.[37] 대책 없던 정부 덕분에 대가는 서울 시민들과 피난민들이 피로 치러야 했다. 이것 때문에 인민군의 남하는 1주일이나 오히려 한강 이북에서 퇴각하지 못한 국군이 전체 병력의 절반이 넘었다. 그 때문에 상당한 병력과 장비가 모두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오히려 아군의 퇴로를 차단한 결과 낙동강전선까지 인민군은 큰 전투 없이 진격하게된다. 그 후 500여명의 인명이 사망한 책임은 명령자가 아니라 폭파실무자인 최창식 대령이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이승만이 실제 폭파명령을 내렸는 지와 관계없이, 대통령이자 국군 통수권자로서 당연히 책임은 그에게 돌아간다. 그냥 시킨 대로 행동하기만 했을 뿐인 최창식 대령만 억울하게 죽었다. 다행히 1.4후퇴 때엔 후퇴 전에 피난 경고를 했다.
1950년 9월 다시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이승만의 일부 참모들이 서울사수방송 문제도 있고해서 인공치하에서 고초를 겪은 서울시민들에게 사과를 하는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를 했으나 이승만은 '내가 당나라 덕종처럼 덕이 없어서 그랬소 라고 사과하란말이냐'라고 짜증을 내며 거부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방송을 믿고 서울에 남게되었던 서울시민들중에서 인민군 부역자들을 색출해서 처형하기도 했다. 이때도 정말로 인민군 부역자들만 골라서 색출했는지, 부역자로 보기 애매하거나 무고한 시민들도 붙잡아다 처형시켰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6.25 이전에는 좌익분자들을 처단한답시고 서북청년회등의 반공 유격대정치깡패들의 잔혹행위를 수수방관, 이들이 벌인 양민학살 사건들은 이승만에게 도의적 책임이 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공권력(군대, 경찰)에 의한 양민학살 및 부패에 따른 비상식적인 비극[38]도 이승만의 책임이다.
He despaired of saving anything and inquired possibility President and Cabinet moving to Japan as “government in exile.” I made no commitment.
그( 신성모 국방장관)는 아무것도 할수없다는 것에 절망해있었고, 대통령과 내각의 일본으로 이동 즉 망명정부의 가능성을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7일 무치오 주한미국대사의 보고서 중
무치오 당시 주한미국대사의 1950년 6월 27일 아침에 쓴 보고서로 대한민국 국방장관의 방문과 정부의 동향에 대한 내용이었다. 무치오 대사는 27일 아침 7시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의 방문을 받았다. (신성모)그는 현재 이승만은 새벽 3시 진해를 향해 이동하였고 정부 주요인사도 아침 7시로 이동중이다. 동시에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국방부 장관이 전쟁중에 미국대사한테 망명정부 수립을 타진했고, 주한 미 대사가 전쟁중에 본국에 보고할 정도면 분명 망명정부 수립에 대한 의사타진은 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의 망명정부 타진이란 것이 당시 신성모 장관의 뜻인지, 이승만 대통령 본인의 뜻인지 확실히 밝혀지지가 않았다. 미국 외교문서의 내용에선 당시 이승만의 몽진을 추진했던 신성모 장관의 의중만을 담고 있다. 이 당시 이승만은 몽진중 대구에 이르러 다시 회차를 하였고 그날 저녁 대전에서 녹음한 서울 사수 방송을 하려고 있었다.
일부 언론에선 이승만의 처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을 참고로 삼아 변호한 사례도 있다. 이승만은 항시 권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무쵸 대사가 일본으로의 망명을 주선하였으나 권총을 뽑아들어 나는 한반도를 벗어날 뜻이 없다고 강경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다만, 권총을 뽑아들고 강경하게 말한것은 망명정부 의사타진을 한 6월이 아니라, 8월이기 때문에 유엔군 참전등으로 상황이 많이 바뀐 뒤여서 일부러 강경하게 태도를 표시했을 가능성도 높다.
다만 KBS는 단독 보도라고 했지만 이미 일본의 산케이 신문에서 1996년 4월14일에 보도한 바 있으며 그 다음날 조선일보(1996.04.15/사회/37면)에서 인용 보도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도 교도통신 등을 인용해 보도하였다.
거기에 한국방송의 보도는 오보로써 관계자의 처벌로 끝났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고의로 한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치졸한 대응을 보였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인 독재자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항목 참조.
본인의 임기를 무제한으로 하려고 했던 사건.
항목 참조.
이승만의 하야와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선.
항목 참조.
이 항목에는 이승만 정부당시의 학살사건사고들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명령하진 않았지만 정부 최고위직으로써 도의적 책임이 있다.
6.25 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에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피난길에 오른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 희생자는 최대 800여명으로 추산되며, 폭파 명령의 배후는 지금까지도 불분명하다. 그 배후로는 이승만 임명한 채병덕 총참모장, 신성모 국방장관, 장경근 차관이 거론되고 있다.
항목 참조.
이승만 대통령은 수십만에 달하는 민간인 학살사건의 최종 책임자이자 주도자였다.
보도연맹 학살사건 중에서 가장 끔찍한 학살 사건.
대한민국 육군이 700여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집단 학살한 사건. 이승만 대통령의 친위대인 CIC(육군 특무대)는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야당 국회의원 신중목을 협박하였으나, 결국 사건이 드러나 관련자들이 전원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11사단장 최덕신은 직위 해제, 연대장 오익경은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은 징역 10년, 실제 학살을 집행한 소위 이종대는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무죄, 게릴라로 위장한 군 병력을 동원해 국회의 조사를 방해한 김종원은 징역 3년의 판결을 내렸으며 모두 저지른 죄에 비해 가볍기 그지없는 판결임에도, 판결 얼마 후 관련자들은 전부 특사로 풀려나 현역에 복귀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군이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 함양군에 사는 주민들을 "무장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학살한 사건이다. # 이 과정에서 일곱 마을이 초토화되고 가현(123명), 방곡(210명), 점촌(62명), 서주리(310명)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 총 희생자 수는 705명에 달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주동 세력이 일으킨 일로, 당연하지만 제대로 된 이유도 근거도 있을 턱이 없고, 설령 있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였다. #2
보도연맹과 거창양민 학살사건과 또 다른 사건으로,대한민국 국군 제2사단 70여명이 경상북도 문경리의 마을에 불을 지르고 학살'해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 여성 44명, 남성 83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다. 이후 6.25 전쟁이 끝나고 문경 양민 학살 사건을 이승만 정부는 무장공비가 선량한 양민들을 죽였다고 조작하였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2008년, 참여정부가 진행한 과거사 청산 막바지 과정에서 그 진상이 밝혀지고 이후에도 속속 보도가 나오고 있다.[39][40]
1.4 후퇴가 벌어질 당시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중심이 되어 212 ~ 500명의 강화 주민을 조선인민군의 협조자로 결론,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41][42] 유족 측에서는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양민의 숫자를 400여명으로,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은 212명으로 집계하고 있는 상황. 진실화해위에서는 430여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했다.]
이승만은 학살문제에 잘못이 크다. 서북청년단을 한국군과 경찰에 공급한 게 이승만이다. 그는 학살을 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원인은 당연히 그의 책임이다.
보고에 의하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전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은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당 경위 1명, 2백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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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사령부, 「G-2 일일보고서」, 1948. 12. 6., 4․3은 말한다 제4권, 123쪽에서 재인용
서북청년단 개개인이 직접 군대에 지원해서 들어간 게 아니라 그 집단을 군대에 보냈다. 서북청년단은 당시에도 정치깡패였다.
다음은 서청 경찰관 출신 박형요 씨의 증언이다.[43]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서청 문봉제 단장은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욕만 생각한 것이지요. 이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 대통령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가시리에서는 며칠 전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대부분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학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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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亨堯(83. 表善面 加時里, 西靑출신 경찰관)의 증언., 4․3은 말한다 제4권, 124쪽에서 재인용
제주도에 간 서북청년단들은 송요찬이 특별중대로 만들었는데 장교나 헌병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얻었다.
난 1948년 7월 계몽연극단 20명과 함께 제주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연극을 보러오지 않아 흐지부지될 때에 송요찬 연대장이 우리를 무장시켜 특별중대를 만들었습니다. 1개 중대는 4개 소대 80여 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중대장은 대위 계급장을 달았지만 우린 없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9연대 헌병과 장교들을 집합시킨 가운데 특별중대에 대해서는 타치하지 말라. 만약 손대면 너희들 죽도록 터질 줄 알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지요. 우리는 한림, 월정, 성산 등지를 순회하며 주둔했습니다.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가 주둔하자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특별중대원 88명은 그대로 2연대 11중대 소속이 됐습니다. 총살집행을 할 때는 “희망자 나오라”고 해서 갔는데, 한번은 한림면 귀덕리에서 총살이 있을 때 내가 일부러 빗나가게 쏘아 한 사람을 살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들 신분도 모르고 그냥 남의 말 듣고 하는 건데, 그렇다고 쏘지 않으면 내가 의심을 받으니까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지요.
노윤복(78세, 남제주군 성산읍 성산리, 당시 서청 특별중대원, 2002. 3. 28 채록) 증언.,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0쪽
이승만 정부에서 서청 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몬 것도 문제였다. 역시 서청출신 경찰관으로 ‘2백명 부대’에 이어 제주에 왔던 박형요는 “일선 지서로 배치될 때, 홍순봉 경찰국장이 연설하기를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식량이나 월급을 보낼 수 없다. 가서 마을에서 얻어먹으며 진압하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일선 지서마다 경찰후원회가 조직돼 이들을 뒷바라지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민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1쪽
이 상황에서 서북청년단은 제주도 총무국장조차 때려죽였으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11월 9일, 서북청년 단원들이 제주도 총무국장인 김두현을 타살했다.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서청 단원들은, 김두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이며 자기들은 단지 그를 조사하려 했을 뿐이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A-1).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87, November 13, 1948.,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총무국장 살해사건 때 경찰이 범인을 잡아 구금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홍순봉 경찰청장도 김재능 서청 단장에게 양보했어요. 범인들을 9연대원으로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습니다. 살인범들이 처벌 받기는커녕 군인이 된 것입니다.
金浩謙(서울시 은평구 역촌1동,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앞의 책 ④, 163쪽).,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제주 4.3사건의 폭동차체는 미군정 시절에 일어났는데 정작 대량학살은 이승만정권 때 일어난 것만해도 이승만의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 거기다 제주도는 원래는 육지보다 좌우익 대립이 덜한 곳이다. 당장 대구 10.1 사건만 이야기해도 그렇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도화선이 된 좌익계의 투쟁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연인원 110만 명(300만 명이 참가했다는 주장도 있음)이 참가하는 8‧15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朝鮮通信社, 朝鮮年鑑-1948年版, 1947, 258쪽)…그런데 전국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있있던 이 사건에 인민위원회 세력이 강했던 제주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다. 중앙 일간지에는 이 무렵 제주도에서 10‧1 대구사건의 여파로 10월 9일 소동이 일어나 전남 본토에서 미군부대가 파견되었다고 일제히 보도하고 있으나, 그것은 와전된 것이었다. 이는 제주도 미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1947년 신년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작년을 회고컨대) 육지 각 지방에 소요사건이 발발해서 여러분의 동포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내에 한하여서는 여러분이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如斯)한 불행한 소요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濟州新報, 1947년 1월 1일.)고 밝히고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78쪽
1948년 1월에 쓴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23, January 23, 1948.,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146쪽에서 재인용
또한 1949년 6월 7일 경찰특공대는 이덕구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무장대 측 보고서를 입수[44]하여 제주경찰청에 보관을 하였는데, 여기서도 마지막으로 정비된 인원이 501명(각급 지도부 35명, 통신대 34명, 유격대 120명, 특무대 31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3.15 의거와 더불어 4.19 혁명 내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전국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
이승만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측근 문제가 많았으며, 인재 보는 능력은 확실히 부족했다.
국방부장관이라는 신성모는 이 인물이 할 줄 아는 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어서 세간에서는 이 사람을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 불렀다. 결국 이승만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6.25 전쟁 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잘라버렸다.
내무부장관 최인규 역시 변변찮은 위인으로 할 줄 아는 게 이승만에게 아양을 떠는 것밖에 없어서 세간에서는 지당장관(至當長官)이라 불렀다.[45] 이 양반은 4.19 혁명 때 미국의 매카너기 대사가 전달한 미국의 외교문서도 일부러 은닉하고 대통령에게 안 보여줘 사태를 더 심각하게 키웠다. 결국 대사가 직접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실을 설명하고 나서야 이승만은 모든 걸 알았다. 결국 혁명재판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승만의 양아들이라는 이강석 역시 만만찮게 썩었다. 아버지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다른 서울대 학생들의 반발로 인해 중퇴, 결국 정부에 반발을 할 수 없는 학교인 육군사관학교에 또다시 아버지 빽으로 진학한 후 장교로 임관한다. 이후에도 어찌나 이승만의 빽을 믿고 전횡을 일삼았는지 가짜 이강석 사건이 벌어질 정도였다.
최악은 뭐니 뭐니 해도 곽영주로 이 인물은 아예 애초부터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일당과 한 패거리였으며 평소의 행실도 영 좋지 않았고 특히 4.19 혁명에서 민간인에게 발포를 명령한 주범이다. 정치깡패가 아닌 나머지 구 자유당 인사들에게는 상당히 관대했던 박정희가 곽영주의 사형을 집행한 걸 보면 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고령[46][47]때문에 판단력에 상당한 문제점을 보였고 가족[48]와 측근들이 대통령직을 수행했음이 미 대사관의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사실 측근 부분은 단순히 주변 사람뿐만 아니라 이승만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이런 사람을 측근으로 둔 게 이승만이다. 그러게 사람 좀 잘 가려 뽑지...[49] 그나마 이승만의 인사 중에서 성공적이었던 게 조봉암 내무장관 내정을 비롯한 초기 내각과 한국전쟁 당시의 군부 정도인데, 일단 군부는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니 능력 없으면 바로 바로 자르거나 좌천시키는 구조라 이게 가능했던 거고, 전후에는 파벌이 갈려 온갖 막장 행각을 벌이곤 했다.
아래 책들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대중서적들이며, 이외에도 이승만을 다룬 책과 연구논문들은 무수히 많다.
이승만의 전생애를 알고 싶다면 다소 방대한 분량이지만 정병준 교수가 출판한 <우남 이승만 연구>가 일독할만한다.[50]출판사 '역사비평사'에서 한국학연구총서의 일환으로 2005년 출간한 이 책은 개화기,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제1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이승만의 전생애에 걸친 행적을 중립적인 관점에서 매우 자세하게 담고 있다. 서적정보
▲이승만 깨기:이승만에 씌어진 7가지 누명
서적정보
저자는 남정욱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 류석춘[51] 연세대 교수.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라이트 논객들이 2015년 11월 출판하였다. 한강철교폭파와 같은 민감한 주제도 포함하고 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 젊은 세대를 위한 바른 역사서
서적정보
뉴라이트 성향의 도서를 주로 출판하는 <기파랑>에서 2015년 4월 나왔다. 참고로 저자 안병훈은 2015년 8월에는 '혁명아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도 출판하였다.
▲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서적정보
저자는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2012년 9월 출판.
이승만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력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이다.
그 외 한국현대사를 서술하는 책에서는 이승만 개인은 아니더라도 정권은 숫하게 까이고 있다.
실제 전공분야의 학자들이 쓴 책이다.
▲ 유영익의 저서들
유영익, [국내도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ㅣ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3 (학술서적)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 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학술서적)
유영익은 이승만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닭살스런 표현을 쓴 것으로 까임을 당한다. 다만 다른 뉴라이트 학자에 비하면 최소한 독재나 학살을 부정하는 역사왜곡까지는 안 한다. 남정욱이나 조우석 같은 인간에 비하면 양반인 편.
▲ 정병준의 저서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학술서적)
정병준의 책은 이승만 연구에 필수적인 책으로 평가받는다. 이승만 연구에 대표적인 학자중 하나인데 미군문서에 근거한 실증의 진수를 보여준다. 서중석이든 유영익이든 미군문서에 대한 방대함에는 정병준에 못 미칠정도다. 정병준의 사관을 고찰하면 국방부측의 연구는 굉장히 존중하며 양영조 같은 국방군사편찬위원회 측 역사학자와 교류하고 도움받을만큼 교류의 폭이 넓다. 브루스 커밍스의 역사학적 업적엔 호평하지만 '선제공격이 누구인지 상관없다'든가 국방부 연구를 부정하는 시각은 절대 반대하며 오히려 3공화국 시절 국방부의 연구가 (북한에 비하면) 객관적이라 호평하기도한다.
▲ 서중석의 저서들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학술서적)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교양서)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학자면서 이승만을 가장 강도높게 비판하는 역사학자이다. 정병준과 다르게 서중석은 뉴라이트 측근에게 굉장히 경계를 받는편이다.[52] 그러나 대표적인 현대사학자답게 이승만 정권의 범죄나 학살에선 실증을 중요시한다.
첫댓글 이 사람이 초대 대통령이라는게 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