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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후보였던 노태우가 발표한 선언.
6월 항쟁에서 국민은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이때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평화적인 정부이양,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김대중의 사면복권, 국민대통합, 국민 개개인의 인권신장, 프레스카드제도 폐지 및 언론자율성 보장, 지방자치확대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자기 선언이 무시당하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당시 여당인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인정했다. 이어 전두환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 선언이 되었다. 그와 함께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6.29 선언이 발표되자 6월 항쟁은 이한열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에 따른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되었고,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확정,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일단락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직선제는 대한민국 땅에서 돋아나게 되었고, 13대 대선 당선자 노태우 대통령부터는 민주주의 공화정에 입각한, 국민들의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선출되는 식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첫 발걸음을 걷게 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선언 이후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선언이 집권세력이 선뜻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고 6월 항쟁이라고 하는 거국적인 시민항쟁이 분출되었고, 집권세력이 이에 순응해서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고 이밖에 여러가지 민주화 조치들을 선언함으로써 대규모 유혈사태로 번지지 않고,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민심을 수습한 점은 인정받아야할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으로 군사 독재가 다소 종식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으로서 노태우 본인은 그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전두환과는 다르다! 하고 내세울 수 있는 점이기도 하였고 말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문민정권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과도기의 대통령으로서, 비록 노태우가 군사정권과의 연관성이 짙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런 덕분에 민주화가 급격히 역행하는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 내에 김대중과 김영삼(특히 김대중)에 대한 비토 세력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87년 민주화 직후 곧바로 문민정권이 들어섰더라면 태국처럼 기껏 민주화된 나라에서 다시 하나회 등 반란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1] 후임인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역시 노태우 대통령 집권 5년 동안 문민 정치인에 대한 군부의 거부감이 희석되었기에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좀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3당 합당과 공안정국 조성을 하지 않고 군의 정치적 이용을 자제했을 경우, 안정적인 경제상황과 함께 후세의 격찬을 받는 명 대통령으로 국내외의 평가를 받았을 수도있다.
특히 88년 집권 당해년에 치뤄진 총선에서, 야권이 대승을 거두어 여소야대 숙면이 형성되는 정치적 위기가 있었지만, 박정희 → 전두환 양 정권에 걸쳐 생명의 위협까지 겪은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를 여야 영수회담에 참여시키고 의견을 경청함으로써, 대선 후 자칫 불만이 생길 수도 있는 민심을 수습하고, 오히려 온건하고, 통합 행보를 펼치는 '이전과는 다른 정부' 라는 인식이 세간에 널리 퍼지는 전화위복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심지어 오늘날 정의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정당 민중당과도 영수회담을 했다. 당시 민중당은 국회 원내정당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우재 당 상임대표 및 당 간부들과 면담하였다. 현직 대통령이 진보정당 대표와 단독으로 면담을 한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기사
유명한 별명은 물태우. 원래는 재임 시기에 물난리가 많이 일어나 붙은 것이지만 이 표현은 노태우의 우유부단한 리더십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2]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수십년간 지내온 국민들에게 노태우의 리더십은 그야말로 유하다 못해 우유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 이는 여소야대의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노태우 본인 스스로 민주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읽고 이를 거스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본인도 "나를 물태우라 부르는데 좋은 별명이다."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의 지도자론을 인용하면서 "물같은 지도자가 바람직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노태우는 민주자유당 내의 권력구조가 김영삼으로 넘어갈 시점에 자신의 측근 정치인을 동원해 김영삼을 축출하거나 그를 방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무난하게 정치적 권력을 넘겨주었다. 사실 이건 민정계에서 김영삼에 맞설만한 강력한 후계자가 없었던 탓도 컸다. 그러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당내 의석 수에서도 민정계가 민주계를 압도하는 상황이라 민정계에 그럴 듯한 대권 주자가 있었다면, 아니 노태우 자신이 박태준이나 박철언, 이종찬을 적극 밀지는 않더라도 김영삼만은 막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보수표의 분열로 김영삼의 대권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수파나 중도 좌파 쪽에서는 노태우가 어찌되었든 군부 핵심 인물 중 하나였고, 광주민주화운동이나 하나회 관련된 일이 많다보니 인해 싫어하긴 하지만, '대통령 임기 동안의 행보' 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본다. 적어도 민주주의 공화정이 시작된 상황에서 그걸 뒤집지는 않았고, 집권 후 전두환을 유배(?)보내 쌩까는 수준으로 대접하고, 군부 출신이라지만 국민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었던데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는 등의 치적이 있기 때문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자기 자신을 개그 소재로 삼아도 좋다'라고 대국민 담화에서 밝히기도 했다. 단, 재임 기간 동안 또다시 군사정변을 시도하려다 적발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그만큼 군부 내에서 또 다시 군사정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정권차원에서 대세를 거스르지 않았다.
1990년 한소 수교를 앞두고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함께 |
1992년 한중 수교 장면.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
그 당시 중국과 소련 측은 북한의 주장인 '한반도에 코리아는 우리밖에 없다! 남쪽은 괴뢰국이다.' 를 무시하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한국과의 수교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당시 정부는 중국, 소련과 시대적 흐름에 맞춰 자주, 진취적으로 외교를 펼쳐 재임기간 동안 남한과 미수교 상태에 있었던 공산권 국가였던 소련, 중국, 몽골, 베트남,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비롯해 남한과의 수교를 거부한 채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던 알제리, 말리, 앙골라,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과 국교관계를 수립하며 북한에 대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등 북한을 압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북한과의 관계도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체결, 유엔 동시가입 등의 내세울만한 치적이 있다. 다만 북한을 지지하는 몇몇 제2, 3세계 국가들(쿠바, 시리아 등)과는 수교를 맺지 못했다는 한계점도 있었다. 북한도 이 즈음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소련과는 불곰사업을 진행하면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며 교류가 이루어졌다.[3]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을 실질적으로 설계, 실행한 김종휘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그의 역할은 미국 닉슨 행정부의 헨리 키신저나 이후 김대중 정부의 임동원, 노무현 정부의 이종석 등에 비견될 수 있었다
노태우가 전임과 후임 때문에 너무 존재감이 없고, 군사반란과 독재정권에 가담했던 자라는 전적 때문에 잘 알려지진 못했지만, 북방 외교와 남북관계 관련해서는 대한민국이 수십년 간 이어진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결국 우위를 점하고 승리했다는 걸 세계에 보여준 공이 크다.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강력한 반공을 표방했던 대한민국이기에 공산권과 오랫동안 적성국으로 지냈는데도 결국 국교 정상화를 맺었으니. 실제로 이 북방 외교 때문에 김일성이 펑펑 울었다느니, 조선노동당이 중국과 소련에게 배신감을 갖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멘붕 했느니 여러 설이 많을 정도였다. 특히, 국제 정세가 아무리 호의적이라도 이를 적극 활용해 성과로 이끌어 내는가 여부는 결국 정부라는 조직과 그 리더인 대통령의 역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노태우가 단지 시절을 잘 만나 치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이 부분만큼은 적극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물 흐를 때 노젓는 것도 능력.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의 끝자락에서 재임기에 경제성장이 예전보다 침체되었다는 인식이 있었으나,[4] 노태우 재임기는 30여년 간의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고루 분배되고 중산층이 넓게 형성되는 효과도 있었다. 연평균 7~8% 성장을 유지하면서도 분배도 좋아서, 덕분에 지니계수도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낮은 편이고 1997년 외환 위기 전까지는 소득분배가 선진국 수준이었다.
http://cfile10.uf.tistory.com/image/1770283C4D054C922439F0
빈부격차를 측정할 때 쓰이는 지니계수는 낮을 수록 빈부격차가 낮다. 노태우 정부(1988~1993) 재임기간에 대한민국의 지니계수는 가장 낮았고, 이밖에 다른 계산방법인 10분위 배율, 5분위 배율도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상대적 빈곤율도 가장 낮았다.
또한 연평균 최저임금 증가율은 17%로 87년 개헌 이후 들어선 5년 단임제 역대 정부 가운데 최대 수치이다.
게다가 1989년 갤럽조사에서는 전체 국민의 75%가 중산층이라고 응답했고, 1992년에는 76.3%이 중산층으로 조사되어서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출처
이 때문에 중도진보적 정치학자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강의에서 "역대 정부에서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노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노대통령은 놀랍게도 노태우이다.[5] 노태우는 케인지언 경제학자인 조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등 개혁적 인사들을 중용하고, 저 유명한 토지 공개념을 시행하려 애쓰기도 하였다. 또한 최저임금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도 노태우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에서 처음으로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었지만 근로자에게만 적용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를 확대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한다. 미국에서는 역대 정부마다 의료보험제도 도입과 확대과정에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가중되었던 것을 미루어보면 한국에서는 논란과 저항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게 의료보험제도는 우리 생활로 깊이 들어간다.
노태우 정부는 케인즈주의자인 조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경제부총리로 기용했다. 노태우 정부시절에서 청와대 경제팀을 이끈 박승, 문희갑, 김종인, 이진설 네 사람은 개혁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종합토지세, 택지소유상한제·토지초과세,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등 토지 공개념 3법을 도입하여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자 했다. 이 법안은 90년대 중후반에 차례로 헌재로부터 위헌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민주화 이후 가장 급진적인 부동산, 토지 정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150평 이상의 집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까지 제정하려 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까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재벌과 대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 처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직접적 재벌규제 꼽힌다. 이 일로 재벌과 대기업은 소유하고 있던 비업무용 토지 4천여만평을 처분하게 된다.
노태우 정부는 토지과다보유세부과와 8.10부동산투기억제종합대책을 발표하였고, 주택보급 확대와 주택가격 안정을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하여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를 기획, 건설하였다. 〈공시지가제도〉(1989)를 도입하였고, 노후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처음으로 승인. 일련의 정책으로 부동산 폭등을 억제하고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시킨다.
비교적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기용했다. 역대 정부마다 인사문제 등으로 논란과 비판이 많았지만 노태우 정부에서는 비교적 그러한 비판이 별로 없었다. 국민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정부이지만 대통령 본인과 정권의 구성원들이 여전히 군사정권의 일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폭 넓게 인사들을 등용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강영훈 국무총리를 들 수 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출신인 강영훈 국무총리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서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3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북협력 증진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총리로 평가받기도 했다.[6]
그리고 국방대학교 교수 출신으로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으로 임명된 김종휘 수석이 있다. 김종휘 수석은 노태우에게 최초로 직선제 개현을 수용하라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노태우 정부 5년 임기 내내 청와대에서 근무하면서 북방외교 및 남북대화를 주도하였다.
아울러 한국의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긴 조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의 장관으로 임명했고, 이후에도 한국은행 총재로 기용했다. 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육사 교관 시절 육사 생도였던 노태우를 가르쳤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박승, 문희갑, 김종인, 이진설 경제수석은 모두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다. 80년대 중반 고도 경제성정 및 세계적인 거품경제의 여파로 부동산 시장이 폭등하여 사회적인 논란이 되고 있었다. 1987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부동산 시장 안정시키겠다는 공약을 제시하고 당선하였다. 노태우는 당선하자마자 금융을 전공한 한국은행과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이었던 박승을 경제수석으로 임명했다. 노태우는 주택 200만호 건설을 지시했고, 박승 전 경제수석은 일산에 신도시 부지를 선정하고, 이후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기용되어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였다. 문희갑 경제수석 역시도 분당 건설을 주도하였고 토지공개념 3개 법안[7]을 도입하였다. 문희갑은 여야 정치권, 보수단체로부터 ‘빨갱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6공의 운명을 걸고 토지공개념제도 도입을 실현하겠다”며 밀어붙였다. 그리고 금융실명제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반대가 거세어 실패하고 말았다.
문희갑 경제수석의 뒤를 이은 사람이 김종인 경제수석이었다. 김종인은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손자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으면서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하면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는데 기여했다. 1987년 개헌 당시에는 헌법 119조 2항, 일명 경제민주화 조항을 삽입한 인물이었다. 김종인은 노태우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경제교사 역할을 했고 "집권하면 청와대에 같이 갈테니 차기 정권의 경제정책의 큰 그림을 구상하고 칼을 갈고 있으라"고 당부받았다고 한다.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기용되었다가 경제수석이 되었다. 김종인 경제수석은 김종인은 전임 박승, 문희갑과 달리 부동산 가격 퐁등의 원인을 기업들의 무분별한 부동산 투기로 보았다. 그래서 공급량 조절을 위하여 재벌들의 비업무용 부동산을 강제 매각시키는 5.8 조치를 단행하여 부동산 가격 안정에 성공한다. 부동산시장 안정의 성공이기도 했지만, 이는 역사상 가장 강도높은 재벌 규제로 손꼽힌다. 김종인 경제수석은 재벌을 견제하였고 이 때문에 전경련으로부터 가장 껄끄러운 인사로 꼽혔다. 또한 북방외교에도 관여하여 적성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를 맺으면서 경제협력, 통상협상에 관여하였다.
이밖에도 현홍주 미국대사는 북방외교와 남북대화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게끔 조정하고 미국과 소통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미국 역시도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와 남북대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고, 고립된 북한이 미국에게 대화를 요구할 때도 미국은 한국을 통해서 대화하라고 나올만큼 자주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기용된 김학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는 석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노태우에게 , "권위주의 청산",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고 하는 캐치프레이즈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홍성철, 정해창 대통령 비서실장, 이병기 청와대 의전수석 등은 조용한 보좌로 노태우 정부의 숨은 공신으로 꼽혔다.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내서 남북대화를 주도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도 노태우 정부 시절 통일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러한 참모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였고, 또 대통령 본인의 의견을 내세우기보다는 참모들이 회의를 통해서 국정현안들을 결정하게끔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상술하였다시피 물태우, 유약한 리더십, 소극적 리더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적절한 리더십이었다는 평가 또한 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마약사범, 조폭 수가 줄어들었다. 밀수품 거래와 범죄가 많았던 연안 인근 항만도시들의 치안도 개선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후술할 청명계획이 들통나 들끓는 여론을 타개하기 위한 쇼가 아니였냐는 목소리도 있었고, 경찰이 혹사당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치적에만 집중하여 범죄자들을 잡아들여서 크게 선전한뒤 나중에 재판에서 죄를 입증하기 어려워 무죄로 방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인해 반쪽 대회가 된 것과 비교하여 서울 올림픽은 사상 최다의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인원(8,465명)을 자랑했다. 88올림픽은 공산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주었고, 이것이 공산 국가 와해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된 북방정책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올림픽으로 인해 분명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확 달라졌고, 이것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단, 추진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 부정적 평가를 참조할 것.
인천공항과 경부고속철도(KTX)를 건설을 시작하였다. 1989년에 정부는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2대 국책사업으로 지정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차량 및 제반 시스템은 국제입찰 끝에 프랑스의 TGV 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92년 6월 30일, 최초 계획이 발의되었다.
평시작전권 환수 조치를 단행하였다. 국제수지와 국가재정에서 흑자 기조를 유지하였다.
일단 정치군인 출신이고, 12.12 군사반란의 반란수괴로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연루돼 있다. 국민들의 들끓는 민주화 열망이 분출한 6월 항쟁을 생각하면 절대 대통령이 못 될 인물이지만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인한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도 여소야대 정국에 리더쉽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물태우라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말이 물태우지, 노태우는 전두환과 오랜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다. 더군다나 이때도 노동운동가와 학생운동가는 탄압을 받았다. 노태우 정부부터 탄압하는 사례가 줄었지, 군부는 아직도 영향력이 대단했다.
1995년 10월 5일, 노태우는 신라호텔에서 열린 경북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문화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망언으로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노태우씨,광주사태는 중국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 망언 이로 인하여 노태우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그 당시에 비자금 사건도 터지면서 전두환과 더불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노태우는 또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자신이 그런 얘기를 했었는가"라며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는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늘어놓아 당시 전두환과 더불어 국민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광주 피해자들에게 참으로 미안
노태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일이며 실수라고 자신의 잘못을 거듭 시인했다. 사과 안 한 전임자에 비하면 그나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니 매우 낫다는 평가가 있지만, 이전의 행보나 차후 출간된 회고록을 보면 12.12 군사반란, 5.17 내란, 5.18 학살에 대해 반성하는 기미는 커녕 왜곡으로 정당화를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 이후엔 권력을 국가개혁이나 발전과제 추진에 이용하기보다 그저 권력유지에 급급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오히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오홍근 테러사건, 민간인 사찰을 저질러서, 다시 공안정국을 일으켰다. 노태우 정부는 또다른 철권통치일 정도로 국민탄압이 여전하였다.
1991년 4월 26일에는 명지대 학생이던 강경대 열사가 시위 도중 서울시경 제4기동대 소속 백골단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시위 탄압도 여전하였고, 이로 인해 운동권에서 잇따른 분신이 일어나면서 사회는 분신정국으로 접어들게 됐다. 이후에도 성균관대 김귀정, 서울대학교 학생 한국원이 각각 경찰의 구타와 발포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1992년 1월 17일에는 일본 미야자와 수상 방한 국회연설 저지 여의도 의사당 앞 규탄시위를 벌이던 태평양전쟁 유족회 소속 주기성 노인이 전경의 발길질에 쓰러져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외국의 수상이 방한하는데 그걸 저지한다는 시위를 벌인 것도 전혀 잘하는 건 아니지만..
군사정권 시절의 언론통제도 여전하여, 1990년 4월에는 소위 KBS 사태가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보안사가 제 버릇 개 못주고 또다시 쿠데타를 벌이려 계획했다가 들통난 사건. 청명계획 항목 참조.
노태우는 3당 야합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하도 김영삼이 비판을 받아서 모르지만, 이쪽도 주동자다.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가 표면적으로 민주화되고,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잇단 방북, 평민당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이 일어나는 등 4.19 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자 그 타개책으로 인위적 정계개편을 시도했다.
물론 김영삼은 이때 노태우를 비롯한 군사정권의 핵심인물들을 낚아 뒤통수를 때렸고, 이는 YS의 엄청난 초창기 인기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3당 야합은 대한민국 지역감정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며, 2017년 시점까지 그 병폐가 여과없이 드러난다. 노태우도 주동자라서 무조건 책임을 질 신세다. 이것 때문에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회를 200석 이상 차지한 여당이 태어났다. 참고로 국회의원 200석은 단독으로 헌법을 바꿀 수 있는 규모다. 그런데도 업적이나 추진 과제가 불분명했고, 되레 당파 싸움에만 목을 맸다.
노태우는 전두환처럼 국고 비자금 횡령으로 악명높다. 공식 추산된 횡령 액수는 2,628억 내외다. (#, #, #)
또한, 수서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제5공화국처럼 정권이 부패했다. 수서 사건은 강남구 수서동 수서지구 택지분양 과정에서 일어났으며, 수서지구 택지를 한보그룹에 특별분양하는 과정에서 정, 재, 관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면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다.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됐지만 관련 피고인 9명 중 6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나 단순 독직사건으로 축소된 채 마무리돼 대표적인 의혹사건으로 남았다.
그의 아들인 노재헌이 전두환의 아들인 전재국과 함께 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했다는 의혹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수사단계에 있다. 물론 이것은 재임 기간, 재임 이전에 발생한 일도 아니고, 퇴임한지 20년도 더 된 시점에서 터졌다. 그런데다가 노태우 본인은 와병한지 오래된 신세다.
전두환 밑에서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노골적인 선거개입을 여러차례 시도했고, 이것이 언론통제 완화와 진보성향 한겨레신문 창간과 맞물려 여러 차례 신문 지면에 보도되어 구설수에 종종 오르기도 했다.
특히 제14대 총선과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연이어 치뤄진 1992년이 피크였는데, 총선을 불과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 이지문 육군 중위의 양심선언을 통해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고 노골적으로 민자당을 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틀 뒤 총선에서는 서울 노원 을 선거구 재검표 결과 민주당(1991년)임채정 후보의 100표가 민자당 김용채 후보의 표로 바꿔치기당한 사실이 밝혀지며 당선자가 김용채 후보에서 임채정 후보로 바뀌는 선거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대선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명언을 남긴 초원복집 사건까지 터졌다.
1988년 올림픽 개최 당시 미관을 위해 거지, 부랑자, 장애인을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심판의 편파 판정, 선수의 약물 복용 사실이 발각되는 등 온갖 문제가 있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