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최종 답변서
광주에 북한군 왔느냐 여부는 순전히 분석력의 함수였다
답변 내용의 구성
1. 5.18 폭동을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증거
2. 광주사람들 중 5.18-21. 폭동에 가담한 사람 없다는 증거
3. 광주단체들이 카빈총상 사망자수를 줄이고 있다는 데 대한 증거
4. 광주교도소를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증거
5. 전남도청 2,000여발의 폭탄을 조립한 집단이 북한군이라는 증거
6. 광수영상분석의 과학성 (정부청사 이미 얼굴인식 시스템 설치 운영)
1. 5.18 폭동을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증거
가. 서문
5.18재판은 2차례 했습니다. 1980-81.에 했고, 1996-97.에 했습니다. 수사기록은 두 시대 공히 대동소이했지만 검찰과 재판부의 해석이 시대에 따라 정반대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두 시대의 검찰 및 재판부는 공히 5.18상황일지에 기록된 내용들을 군사적 측면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관계로 5.18현장의 주역들이 북한군일 수밖에 없다는 의혹 자체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증1의 제 8항 목록은 대법원 판결문(1997.4.17.선고96도3376전원합의체판결문)입니다. 제178-179쪽에는 20개의 판시사항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5.18시위를 북한군이 주도했는가에 대한 항목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증1의 제1항 목록인 5.18관련사건수사결과”(1995.7.18.서울중앙검찰청-국방부검찰부)에도, 제2항 목록인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1985.5. 국가안전기획부)에도 특히 5월 18-21일 사이에 발생했던 광폭적인 폭동을 북한군이 주도했는가에 대한 아무런 의심이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 기록들(검찰기록, 안기부기록, 이하 ‘두 보고서’라 칭함)을 군사전문가이자 통계학자인 피고인이 독해해 본 결과 1980.5.18-21.간 4일 사이의 폭동은 전적으로 북한군이 주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두 보고서를 읽으면 5.18 사태는 두 구간으로 분리됩니다. 5.18부터 5.21까지는 한국군으로서도 상상할 수 없는 세계 최고수준의 공격행위가 있었고, 5.22부터는 계엄군과의 협상방안을 놓고 광주사람들끼리 갑론을박하는 행위들만 있었습니다(증1의 17쪽 ‘가’ 및 44쪽 ‘가’). 공수부대는 5.18-21‘ 기간의 엄청난 공격행위를 감당하지 못해 5.21 오후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했습니다(증1의 71쪽 ’가‘).
5.18-21. 광주에는 광주사람들로 구성된 600명의 신출귀몰하는 학생시위대가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5.17 비상계엄전국확대 선포와 무시무시한 ‘예비검속’을 무릅쓰고 광주시내를 활보할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광주에만 600명이 있었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광주-전남권의 내로라하는 운동권 인물들은 모두 사전구속 되거나 ‘각자도생’하자며 이리 저리 숨어 다녔습니다. 이는 증1의 제6항 내용인 “5.18항쟁증언자료집I' 에 비디오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5.18은 5.18. 오전 9:30경, 돌멩이를 가방에 숨겨간 광주학생(?)들이 감히 전남대학에 주둔하고 있는 제7공수 제33대대(350명)를 찾아가 돌멩이를 던져 공수대 7명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시내로 날아나 차와 파출소를 태워 사람들을 모이게 하면서 미리 준비된 유언비어, 주로 경상도를 공격자로 전라도를 피해자로 대조시키고, 여성들에 잔인한 행위를 하였다는 것들을 내용으로 하는 유언비어들(증1의 29쪽)을 살포하여 전라도 주민들로 하여금 국가를 상대하여 싸우도록 하는 계획된 행동을 보였습니다(증1의 25-29쪽). 이들이 광주 학생들이었다면 이들 200여명은 지금 모두 엄청난 5.18유공자가 돼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5.18유공 최고 반열에 이르러 있는 사람들의 일치된 증언들과 기록을 보면(증1의 6항 목록), 5.18유공자들은 5.18-21. 기간에 모두 꼭꼭 숨어 있었습니다.
5.21. 이전에는 무시무시한 공격 모드가, 5.22.부터는 협상 모두로 돌변하였습니다. 특히 5.22.에는 시민들이 누군가에 “속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시민스스로 수습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습니다(증1의 48쪽). 5월 21일까지는 낯선 사람들이 폭동을 주도했고, 5.22부터는 광주시민들이 직접 나서자는 여론 하에 지방 유지들로 구성된 시국수습위윈회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증1의 17쪽 ‘가’ 및 44쪽 ‘가’). 사건의 주역집단이 5.22.을 전환점으로 하여 갑자기 바뀐 것입니다. 5.18-21에는 날랜 학생시위대 600명이 계엄군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여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냈지만 5.22.부터는 그 600명이 괄목할만한 집단행동을 하지 않은 반면, 주로 광주유지들로 구성된 수습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광주 유지들은 5.22 오전부터 도청이나 종교건물들에 나타나 “엄청나게 쌓인 무기가 무서우니 무기부터 반납하자”는 주장을 골자로 하는 ‘시민수습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로부터 5.26.까지 시국수습위원회는 세 차례나 형성되었습니다. 서로 싸우다가 헤어지고 싸우다 혜어지고 한 것입니다. 5.22. 시국수습에 나선 광주인들은 주로 10명 미만 유지들이었고, 대학생이라고는 김창길이라는 전남대 3년(21세)생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또 다른 강경파 대학생 김중배는 5.25. 밤에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석명하겠습니다. 당시 재판에서 중형을 받은 이른바 5.18최상급 유공자들은 5.25.에야 비로소 도청에 뿔뿔이 들어가 100 명 정도의 10-20대 개념 없는 학생 및 하급 노동자들과 함께 강경투쟁을 선포했다가 별 활동도 해보지 못하고 점령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뒤에 석명하겠습니다.
나. 1980.5.21.상황 기록한 검찰보고서(증1의 제1항) 9개 줄에 북한군 존재 90% 이상이 보입니다.
1) 1995.7.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증1 제1항 목록) 제92-93쪽에는 아래와 같은 9개 줄의 기록이 있습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위 글에서 56대는 356대의 오타로 보입니다. 증1의 제23쪽에는 200여대로, 증1의 33쪽에는 305대, 증76에는 328대 등 다른 자료들에는 모두 300대 이상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군상황일지, 안기부상황일지, 치안본부 상황일지, 계엄사 등을 종합하여 피고인은 374대로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군대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위 검찰보고서를 읽으면 아무런 이상한 점이나 중요성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1985년의 안기부가 그랬고, 1995년 검찰이 그랬습니다. 그냥 시위대가 20사단 차량 부대를 공격해 10여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 600명이 모여 장갑차 4대와 다수의 차량을 탈취해 시내로 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군대는 물론 게릴라와의 전투경험이 있는 피고인의 눈에는 아래와 같이 읽혔습니다.
2) 위 9개 줄에서 피고인이 읽어낸 내용
“시위대 3백여 명이 08시에 광주공단 입구(톨게이트 부근)에서 20사단 지휘차량부대를 공격했다”는 의미는 이러합니다.
군부대 이동 상황은 극비 중의 극비사항입니다. 이 극비 사항이 이들 300여명의 폭도들에 넘어갔다는 뜻이 이 문장에 들어 있습니다. 10-20대 하층계급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5월 26일 도청, YWCA 등을 지켰던 광주사람들은 10-20대의 개념 없는 하층계급 70-8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300명으로 이동 중인 현역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과 배짱은 일반 시민이나 학생들에는 없는 능력입니다.
“300명이 사단장 1호차를 포함한 14대의 짚차를 탈취한 후 그것을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는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 300명은 그 어려운 기습전을 성공시켰습니다. 정규군을 공격해 이겼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의 정규군이 자기들보다는 약하다는 사실을 먼저 평가한 후 자신감을 가져야만 감행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이들 300명은 비밀 이동계획을 사전에 파악한 후 이동하는 한국군이 자기들보다 취약하다는 사실을 평가한 후, 공격해서 한국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14대의 짚차와 300명을 태울 수 있는 또 다른 차량들까지 운전하여 아세아자동차로 갔습니다. 극비정보 획득능력, 피아 전투력 평가능력, 전투부대 공격능력, 운전능력 모두를 다 갖춘 이 300명은 절대로 광주시민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 300명은 왜 이 어려운 작전을 통해 짚차를 가지고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직행했겠습니까? 이래에 설명드리겠지만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털려면 군용트럭이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 차량들은 군납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있습니다.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정복하려면 망루를 설치하고 기관총 등을 거치한 채,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해야 합니다. 경비병과 싸우려면 총이 있어야 하는데 폭도에는 총이 없습니다.
총 없는 폭도 600여명이 총을 가진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발한 작전이 필요합니다. 짚차 등 14대의 짚차를 구태여 빼앗아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이 거 봐라, 20사단이 다 일망타진됐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는 식의 엄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이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위대 600여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는 말은 경비병력이 순순히 경비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갑차와 군용차를 수백대 단위로 내주었다는 것은 차량키를 꽂아주었다는 뜻입니다. 그 많은 장갑차와 군용차량들을 몰고 시내로 나갔다는 말은 자가운전 시대가 아니었던 광주에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군용트럭을 300여대나 몰 수 있는 많은 운전사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를 믿으라는 것도 엄청난 무리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600명은 부대이동에 대한 극비 정보도 얻을 줄 알고, 매복해 있다가 현역부대를 급습할 줄 도 알고, 짚차를 몰고 다닐 줄도 알고, 장갑자와 트럭도 몰 수 있고, 곧바로 뒤에 석명하겠지만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줄도 알고, 무기고를 단숨에 부술 줄도 알고,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도 알고, 총기사용방법도 교육시킬 줄 아는 실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맥가이버들이 600명 씩이나 광주에 있었다는 것 역시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상이 피고인이 위 9개 줄을 읽는 독해방법이었습니다. 이 9개 줄을 놓고 군-안기부-검찰-법관들이 읽은 방법과 피고인이 읽은 방법이 천지차이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특수군을 보지 못했고, 피고인만 본 것입니다.
다. 무기고 탈취 기록을 위에 합치면 북한군 모습 100%가 보입니다.
북한군은 5.21.짜 상황을 정리한 검찰자료와 안기부자료 모두에 들어 있습니다. 두 개의 문건이 다 비슷한 자료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자료와 안기부 자료는 사실들만 나열해 놓고 이를 이용하여 정보를 가공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이 이 두 자료들로부터 가공해낸 정보는 “600명의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총기와 8톤 트럭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는 것입니다.
이 정보가 없으면 북한군이 안 보이고 이 정보가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는 것입니다. 증1의 77쪽에는 당시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283명에 불과하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동 78-82쪽을 보면 이들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 나이, 직업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구두닦이 껌팔이 자개공, 목공 철공 등 59개 종의 하층직업들에 분산돼 있고 그 80% 정도가 10-20대입니다.
사망한 민간인이 154명입니다, 이들 중 33명이 10대 전후의 아이들입니다(증1의 57쪽). 증1의 59-64쪽에는 나머지 사망자 119명과 신원미상 12명이 있습니다. 이 119명의 직업과 나이를 보아도 다 20대의 무직자와 식당종업원 급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5.18의 주역들이라는 것입니다. 10세 전후의 33명을 제외한 5.18주역들은 사망자와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을 모두 합쳐봐야 불과 414명입니다. 600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업과 이러한 나이에 속하는 광주시민 414명은 600명도 안되고 번개같이 날아다니는 맥가이버들이 아닙니다.
1985년 안기부는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이라는 보고서를 냈습니다(증1의 제2 목록). 이 책의 제55-71쪽에는 5.21. 낮 12시부터 털린 무기고 이름과 털린 무기 수량들이 박스 단위로 나열돼 있습니다. 그냥 읽자면 매우 지루합니다. 안기부 분석관은 증1의 제23쪽 5~14줄에 걸쳐 아래와 같이 두루뭉술하게 정리했습니다. 폭도들이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차량들을 몰고 전남 여러 곳을 다니면서 무기고를 털었다는 무미건조한 내용입니다.
“(난동자들은) 방위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공장을 탈취, 군용 및 일반버스 등 200여대를 탈취, 이를 몰고 장성, 화순, 등지를 휩쓸면서 시위선동 및 무기탈취, 난동자들은 화순광업소 및 광주 소재 한국화약보급소에서 폭약, 뇌관, 도화선을 탈취한데 이어 광주 담양 나주 등 경찰서 파출소 및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무기, 탄약을 탈취하고. 시내 곳곳에서 총격전 및 방화.”
그러면 1995. 검찰은 무기고 탈취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살피겠습니다.
1995.7.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100~102쪽(증1의 13~15쪽)에 이에 대한 검찰의 시각이 정리돼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두루뭉술 그 자체이며 “여러 지역에서 다수의 무기가 피탈되었다”는 위 안기부 식 나열 그 자체입니다.
“한편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승주, 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확보, 무장하였는데, 13:00경, 광산 하남 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칼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백여정. 실탄 2상자를 확보하였고, 13:35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여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하였고, 14:00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칼빈 20여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 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카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빈 5백여정, M1소총 2백여정, 실탄 4만 6천여발을 탈취하였고, 15:35경, 화순광업소에서 칼빈 1,108정, 실탄 1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칼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천여발을 탈취하였고,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화약고, 한국화약, 강진성전파출소, 등을 급숩하여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심여발을 탈취하였다”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사용교육을 실시하였고, 15:00경, 광주공원에서 무기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짚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하였으며, 17:00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사용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조를 편성하여 정찰, 도청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시내 요소에 비치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우는 무장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음”
이상과 같이 1985년의 안기부도 1995년의 민-군 합동검찰의 수사관들도 다 같이 원천자료만 나열했던 것입니다. 두 시대의 수사관들이 다 같이 “맥가이버 능력으로 훈련된 600명의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무기를 탈취했다”는 산뜻한 정보를 가공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탈취당한 무기고들을 나열한 것으로부터는 북한군에 대한 희미한 실루엣조차 얻을 수 없지만, “맥가이버 능력으로 훈련된 600명의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무기를 탈취했다”는 정보로부터는 북한군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광주사람들 중 5.18-21. 폭동에 가담한 사람 없다는 증거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5.18항장주역”들로 알려진 김창길, 김종배,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의 증언일 것입니다. 이들의 증언은 2002.12. 전남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한 "5.18항쟁증언자료집I"(증1의 98-184쪽)에 수록돼 있습니다.
김창길(온건파 학생)의 증언 발췌
* 5월 22 아침에 도청에 들어가 시민수습위원회 만들어 계엄군과 협상하기 시작했다(증1의 103쪽 가)
* 생면부지의 장인홍씨가 나에게 물었다. 자네 누구냐? 저는 전남대 3학년 김창길입니다. 그러자 장인홍씨는 ‘그럼 잘됐다. 지금 계엄사와 협상하러 가는데 학생 대표 1명이 필요하다. 자네가 같이 가자. (증1의 108쪽 가, 나)
* 학생수습위원회에 학생은 서너명 뿐이고 나머지는 일반인들이었다(증1의 109쪽 가)
* 시민군 조직은 도청에서 관리하는 조직이 아니라 자생적 조직이었다. 이런 조직이 무기를 회수하러 다녔다(증1의 110쪽 가)
* 시민수습위원회 사람들은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했다가 딱 시간 되면 퇴근했다(증1의 111쪽 가)
* 윤상원(주: 이른바 5.18의 영웅,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과 정상용 등은 5.24. 오후에 도청에 처음 들어왔다(증1의 112쪽 가)
* 시민수습위원회의 헤게모니가 조비오 김성룡 신부들로 완전히 넘어 간 시점이 5.24.저녁이고, ‘항쟁지도부’가 생긴 시점은 5.26. 아침이었다(증1의 113-14, 나)
강경파 학생 김종배(1심 사형) 증언 발췌
* 윤상원, 정상용, 김종배 셋이서 이전의 수습위원회를 엎어버리고 25일 저녁에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증1의 114-115쪽 가)
* 수습위원회에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었다. 온건파는 무기를 반납하자는 파이고 강경파는 끝까지 싸우자는 사람들이었다. 25일 밤 강경파가 온건파를 몰아내고 ‘투쟁위원회’ 만들었다(증1의 116쪽 나).
* 25일 밤, 박남선이 총으로 위협해서 온건파 김창길 등을 추방했다(증1의 119쪽 가)
* 기동타격대는 실내장식업을 하는 이재호가 조직하고 윤석루(19세 구두공, 1심 무기형)가 대장을 했다. 윤석루는 대장이긴 해도 어리고 뭘 몰랐다(증1의 121쪽 가)
* 21일 저녁에 총이 나왔다. 22일 총기를 반납하자는 수습방안들이 나왔다(증1의 123쪽 가).
* 박남선은 도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증1의 125쪽 가)
* 투쟁위원회에 모인 정상용 들 몇 몇 사람들은 다 끼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교련반대, 긴급조치위반, 민청학련 빈민운동 문화운동 등을 했던 사람들이었다(증1의 127쪽 가)
정상용(1심 무기형) 증언의 발췌
* 항쟁지도부는 급조된 조직이다. 나는 외무위원장을 맡았다. 그 이전에는 시민학생수습대책위가 있었는데 총기를 반납하자 해서 이를 거부하고 만든 조직이다(증1의 128쪽 가), 그날이 25일이다(증1의 128쪽 나)
* 시민학생수습대책위의 기본 골격은 무기반납이었다(증1의 130쪽 가).
* 23일부터는 무기반납쪽으로 선회했다(증1의 131쪽 가)
* 항쟁지도부의 활동기간은 5월 25일 오후부터 27일 새벽이었다(증1의 131쪽 나)
* 26일 우리가 재무장을 하기로 결의하고 발표하고 조직을 짜려는 순간 진압 당했다(증1의 132-133쪽 가)
* 5월 19일부터 윤상원 등 투사회보 사람들이 녹두서점(윤상원이 점원으로 있는 서점)에 모여 작업도 하고 전략회의도 했다. 21일 총격전이 나자 모두 흩어져 각자 도생했다. 이날 수시로 위험하다는 판단이 나오면 보성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숨어 다녔다. 본격적인 재집결은 22일부터였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YWCA를 계속활용했다(증1의 136쪽 가).
* 김종배와 허규정은 조선대 학생일 뿐 운동권은 아니었다(증1의 137쪽 가)
허규정(1심 무기형) 증언의 발췌
* 나는 처음 박관현이 전남대 총학생회장인줄도 몰랐다(증1의 143쪽 가)
* 투쟁위에서는 누가 나서서 주도하는 사람도 없었고 리더도 없었다(증1의 145쪽 가)
*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이 도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다 확인했다. 우리가 도청에 들어간다고 하자 높은 사람들로 보이는 관료들이 ‘계엄군이 들어오니 나가라’고 명령했다(증1의 148쪽 가, 나)
* 25일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맨날 회의만 하고 대안은 못 내고,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증1의 151쪽 가 나)
*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고등학교학생들과 나이 어린 사람들이었다. 광주의 운동권들은 계엄 겸거령이 내려져 모두 잡혀갔다, 그래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운동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증1의 154쪽 가)
박남선(1심 사형) 증언의 발췌
* 시위에서는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등 가장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이 제일 앞장 섰다. 소위 운동권들은 다 도망갔다가 5.23-25경에 도청에 들어왔고 지식인들은 수습위원회나 만들어 가지고 얼굴 세우는 일만 했다(증163의 가)
* 도청 내에 남아 있는 인력은 100명 정도였다(증1의 172쪽 가)
3. 광주단체들이 카빈총상 사망자수를 줄이고 있다는 데 대한 증거
5.18 총상 사망자는 117명, 그 중 75%에 해당하는 85명이 카빈소총 등 시민들이 소지한 무기고 총들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이 당시 육군본부(계엄사령부)의 통계입니다(증1의 73쪽 가). 이러한 통계는 1985.5. 안전기획부가 작성한 보고서 즉 증1의 57-65쪽 자료를 정리하면 도출됩니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조직적으로 쏘았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그런데 1995년 검찰이 발표한 통계는 정 반대입니다. 카빈총상이 26명, M16총상이 96명, 계 132명이 총상사망자라는 것입니다(증1의 90쪽). 이에 더해 최근에는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의 기록들이 몰래 조작되고 있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카빈총상 수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망원인에 대한 1980년 기록을 1995년에 변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날조일 것입니다.
계엄사 기록(증1의 73쪽 나)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계엄군 당국에서는 이러한 사인을 의사 변호사 군수기관 시민대표들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에 의거 소상히 규명하여 유족들로 하여금 확인토록 공시함으로써 136명의 유족들은. . 사실을 인정하고 인수해갔으나 26명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공원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록들이 15년 이후에 대량 뒤바뀌었다는 사실은 승복력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4. 광주교도소를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증거
전 국정원장 남재준은 대선후보 시절인 2017.4.17. “5·18 당시 대한민국 사법부가 판결을 내린 일부 사상범까지 수감된 교도소를 총을 들고 습격하는 것이 과연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5.1기념재단이사인 김양래와 5.18 성역화에 앞장 선 광주시장 윤장현은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공격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재준 대통령후보를 허위사실 적시혐의로 고소하겠다고 천명하였습니다. 이어서 5.18기념재단 이사이자 고소인인 김양래와 광주시장 등은 “교도소를 공격했으면 시체들이 있어야 하는데 시체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상의 내용은 증1의 176쪽에 상세히 기사화돼 있습니다.
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제2장 제2항 ‘가’ “광주교도소의 방어 부분과 관련한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의 점에 대하여”에는 광주교도소가 무장한 시위대로부터 전후 5차례에 걸쳐 공격을 받았고, 2.5톤 군용트럭에 LMG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정문방향으로 공격하던 시위대 중 서종덕, 이명진, 이용충(주: 고소인 김진순의 자)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고, 광주교도소는 간첩을 포함한 재소자 2,700명이 수용된 주요한 국가보안시설 이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습니다. 아울러 계엄군이 교도소를 향해 공격해 오는 시위대를 사살한 것은 정당한 행위이기 때문에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습니다(증1의 183쪽 가)
대법원은 광주교도소가 5회 공격당했다 하고, 광주시장 및 광주5.18단체는 광주시민은 교도소를 공격한바 없다 합니다. 그렇다면 교도소는 광주시민 모르게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5. 전남도청 2,000여발 폭탄을 조립한 집단이 북한군이라는 증거
1996.10.10. 광주일보사 특별취재반의 ‘실록 5.18광주항쟁사’ 제79회는 “도청 폭탄뇌관제거”에 관한 기사입니다(증1의 187-191쪽). 이 기사는 전남도청에 8톤 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증1의 189쪽 가) 전남도청 지하실에 조립돼 있었고, 이 사실을 양흥법, 김영복, 문영동 등(증1의 189쪽 나)이 광주시의 안전을 위해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준장에 가서 밀고했고(증1의 190쪽 가), 전교사는 1명의 문관을 보내 5월 25-26일 밀고자들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해체했다(증1의 190쪽 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광주일보의 이 기사에 적혀있는 문영동, 양흥범, 김영복은 다이너마이트가 폭탄으로 조립돼 있었다는 사실과 문관 1명이 2일 동안에 걸쳐 해체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입니다. 광주일보 특별취재팀 여러 명도 이에 대한 증인입니다. 전남일보가 거명한 계엄군측 인물은 김기석(증1의 191쪽 가), 윤성민(증1의 191쪽 나)그리고 배승일(증1의 185쪽)입니다. 거명된 증인만 해도 6명입니다. 배승일은 자기가 해체한 다이너마이트 폭탄이 2,000발이라고 했습니다(증1의 185쪽 가). 배승일은 광주시를 지켜냈다는 공로로 보국훈장 동백장을 받았다가 노무현에 의해 그 훈장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리고 소송을 걸어 2007년에 다시 찾았습니다(증1의 185쪽 기사). 2,000여발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해체한 사실은 6명 이상의 증인들로부터 확인돼 있는데 이를 조립한 사람이 일체 없습니다. 폭탄을 지킨 위 광주사람들은 광주사람들 중에서는 조립된 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폭탄을 조립한 공로로 5.18유공자가 되었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조립은 북한군이 한 것이 될 것입니다.
6. 광수영상분석의 과학성 (정부청사 얼굴인식 시스템 이미 설치 운영)
검찰이나 재판부 쪽에서는 오래된 두 장의 사진을 놓고 두 사진이 일치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과학적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듯합니다. 그런데 증1의 192쪽 보도(1917.4.5.)를 보면 세종-서울-과천-대전 정부청사에 얼굴인식 시스템이 기동되고 있고 이는 99.9%의 정확도를 갖는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지문 대신 얼굴지문을 이용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직원들을 출입시키고 있다하며, 헤어스타일이 바뀌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증1의 193-197쪽에는 “얼굴이 신분증”이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얼굴의 특징을 비교하고. 얼굴의 중요 포인트들을 선으로 연결하여 기하학적 그래픽을 작성하고, 이 그래픽이 두 개의 사진 사이에 일치하는 지를 판단하는 소프트웨어가 정부기관에는 물론 민간분야에도 널리 상용화되고 있다 합니다. 피고인이 공개한 ‘광수’들의 얼굴 분석도 정확히 이 기사내용과 일치합니다. 얼굴의 중요한 특징을 비교하고 기하학적 도면을 그려 이 도면이 두 사진 사이에 일치하는지를 비교한 기법이었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의 영상분석 기법은 매우 앞선 기술인 것입니다.
대개 첨단기술은 미국의 정보부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며 이런 기술은 몇 십 년 동안 기밀로 보호해오다가 어느 시점에 민간분야로 넘쳐흐르게(spill over) 됩니다. 광수를 분석한 500만야전군(피고인 운영) 회원인 노숙자담요는 미국 정부부에서 영상분석을 했던 사람이며 광수 478명이라는 수자는 그 혼자 분석한 것이 아니라 팀이 동원돼 분석한 것이며, 이런 분석은 500만야전군에 참여한 수많은 정보 매니어들이 첩보를 캐내 노숙자담요에 토스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증1의 198-200쪽에는 세계 각국의 공항에도 얼굴인식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고, 곧 우리나라 공항에도 도입될 것(증1의 199쪽 가)이라는 2011년 기사입니다.
증거자료
1.“5.18관련사건수사결과”(1995.7.18.서울중앙검찰청-국방부검찰부) 1-21
2.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1985.5. 국가안전기획부) 22-64
3. “계엄사-10.26사태와 국난극복”(1982.3.15. 육군본부) 65-82
4. “광주의 분노”(1985.5.16, 조선노동당출판사) 83-88
5. “5.18사건수사기록”(월간조선 2005년 1월호 별책부록) 89-97
6. “5.18항쟁 증언자료집I”(2002.12. 전남대학교 출판부) 98-175
7. 광주일보(2017.4.17) “광주시민 교도소 공격 안 했다” 176-177
8. 대법원 판결문(1997.4.17.선고96도3376전원합의체판결문) 178-184
9. 전남도청 다이너마이트 폭탄 해체한 사람들 185-191
10. “정부청사 얼굴인식 시스템 정착, 99.9% 정확성 보도” 192-200
2017.6.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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