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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2. 사회·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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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외교
5. 경제
6. 개인적 논란
7. 기타 논란
능력을 우선시하는 인사기용 성향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고건 전 총리. 박정희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총 8명의 대통령이 등용한 유능한 인사이다. 서울시장과 같은 여러차례의 행정직을 통해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될 정도로 해당 분야의 상당한 능력자였다. 실제로 고건 총리가 대선 후보로 떠오르기 전까지 파격적이고 모험적인 노무현과 안정적인 고건 양자 간의 관계는 상보적이었다. 여기엔 노무현이 실질적인 권한 행사를 할 수 있게끔 힘을 실어준 탓도 있다. 특히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당시에도 2개월 동안 이라크 파병과 같은 굵직한 이슈를 무리없이 다루며 안정적인 행정을 펼친 부분은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부분.[1]
비슷한 성과로 후임으로 임명된 이해찬 전 총리도 권력 분산의 혜택을 받아 실세 국무총리라는 평가도 생겨날 정도였다. 대부분의 정부에서 총리는 그저 대통령의 수발이나 드는 존재처럼 기능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큰 파격이다. [2]
노무현의 형인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노무현은 2004년 3월 11일 오전, 언론 브리핑에서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남 사장을 질타했고, 당일 오후 남 사장은 한강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노건평은 유죄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위시한 야당은 남상국의 자살이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비롯됐다는 주장을 펴며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사건의 본질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마녀사냥하는 언론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형에 대한 인사청탁에 대해서 관련된 당사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한 부분에 대해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당시 송영길 의원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탄핵반대투쟁에 참가하였다.
2008년 12월 4일,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은 세종증권 매각비리 의혹과 관련, 농협의 인수 청탁과 함께 29억여 원을 받은 혐의로 영장 실질 심사를 거쳐 구속 수감되었다. 노건평은 2008년 세종증권 매각비리에 연루돼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2010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노건평은 2006년 2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회장으로 있던 전기분전반 개발·제조업체 KEP 소유 자금 14억7천여만원을 개인 용도로 쓴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로 기소됐다. 그리고 2016년 4월 28일 10억원대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노건평(74)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노무현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홍기옥 세종캐피탈 사장 사이의 세종증권 매각 사건을 조사하던 중 박연차가 수많은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해온 것이 밝혀진 비리 사건이다. 박연차는 노무현의 둘째 형 노건평과 더불어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관련 뇌물을 건넨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조카사위 연철호씨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5백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연철호가 박연차에게서 받은 500만달러 중 일부로 설립한 투자업체 엘리쉬앤파트너스의 지분을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씨가 소유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강금원 회장은 1999년∼2002년 주주임원에 대한 단기 대여금 형식으로 회사돈 50억원을 빼내서 회계장부상 비용과다 계상 등으로 허위변제 처리하고 같은 기간 법인세 13억5000만원을 포탈한 혐의. 특경가법상 배임 및 특가법상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었다.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와 정무특보를 지낸 이강철은 불법 정치자금 수억원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구속되었다. 2005년 10월 보궐선거에 대구동구 후보로 출마하면서 노모(구속기소)씨를 통해 사업가 조모씨로부터 1억5천여만원을 받고 조씨에게 지역구 인사들을 위한 추석선물 비용 6천여만원을 대신 계산하도록 한 혐의, KTF와 두산중공업, 농협중앙회 모 임원들로부터 불법적인 돈을 수수한 혐의가 발단이 되었다. 결국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강철 전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에게 23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박정규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3년6월에 추징금 9천400만원을 선고받았다.
정삼문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2005년 1월과 2006년 8월 박 전 회장으로부터 업무 관련 청탁과 함께 백화점 상품권 1억원 어치와 현금 3억원을 받고 2004년 11월~2007년 7월 12억5000만원의 대통령 특수활동비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특가법상 뇌물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정 전 비서관에 대해 징역 6년에 추징금 16억4400만원을 선고되었다.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정무비서관을 지낸 서갑원은 2011년 1월 27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가 대한민국 대법원에 의해 확정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이광재는 2008년부터 박연차 게이트 의혹이 제기되어 오다가 이듬해 3월 21일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검찰의 소환조사 후 3월 26일 구속되었다. 구속 중, 민선 강원도지사에 당선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게 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당시 대선캠프에서 쓴 불법 대선자금 비용이 한나라당의 1/10을 넘으면 사퇴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 당시 사용한 불법자금은 113억원으로 1/10 수준을 넘김에 따라 민주노동당은 노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노무현은 이에 대해 2004년 3월 11일 대통령 특별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물론 건국이래 2000년대 초반까지 정치판에는 불법자금 수수가 횡행했으며 야당인 한나라당의 경우 차떼기 사건 등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뇌물 수수 금액을 아득히 뛰어넘는 부패를 보여주면서 큰 망신을 당하기까지 했지만, 노 대통령 본인의 청렴함과는 별개로 대선 후보 시절부터 비리가 있었으며 후술할 친인척 비리까지 생각하면 이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 없으며 이 일로 국민들이 노 대통령 하면 생각하는 청렴한 이미지에 큰 타격이 갔다.
항목 참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지역주의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주류의 그늘에서 벗어나 개혁 정당인 열린우리당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국회에서의 그는 자신의 지지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과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과 같은 기존 정치 세력과의 타협이 부족해 다수당의 횡포로 탄핵 사태에 이르러 정치적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회의원 김경재의 경우에는 그의 정치력 자체를 의심하였다. 2004년 김경재는 노무현을 가리켜 "미국은 노 대통령이 다중인격자처럼 행동해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노대통령은 임시정부 김구주석을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등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지도자"라고 지적하였다.
김근태는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는 것은 노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다 했기 때문”이라면서 “어떻게 현충일에 일본에 가서 ‘김구(金九) 선생은 실패한 정치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기사
노무현의 인사 채택권, 또는 당시 빗대어 불리우던 코드인사, 또는 보은인사로, 흔히 말해 참여정부 속에 그들만의 참여라는 대표적인 표방어이다.
코드인사를 둘러싼 의견 대립은 세 가지이다:
코드인사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찬반
대통령 인사권 행사방식
코드 인사의 효율성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장단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코드인사에 의존할 경우,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호흡을 맞춰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다. 그러나 반면으로, 하나의 코드에 맞출 경우, 편향된 시각이 팽배해지고,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는 것.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필요성이 중요해지는 상황에 그런 인물이 요원해진다는 비판이다. 코드인사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나, 노무현은 지나치게 코드인사를 고집함으로 인해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크게 저해했을 뿐만 아니라, 인사관리 결정에 대한 질문들을 과격하고 의혹을 증폭시킬 수 있는 답변으로 반응해 국민의 신뢰도 악화시켰다. 심지어 인사정책에 가장 큰 수혜자였던 고건 전 총리는 이런 발언을 남겼다:
"정책을 결정해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민들과의 의사소통이 부족했고 협조를 얻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참여정부의 독선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무능, 두가지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인사시스템이 잘 작동됐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와서 시스템 인사가 안되는 것 같다"
'-지지율 급락 원인에 대해, 2006년 12월 27일 <한국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이던 것이 386세대 중심의 비서들을 배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취임 초부터 수없이 많은 구조개편과 재조정으로 유례없던 국정운영 시스템으로 선보였고, 행정부처의 통제라는 비서실 기능을 정책조정이라 바꿔 부르던 게 그것. 정책실장과 수석 임명, 국가안보보좌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를 설치하여 외교-안보-국방과 관련된 분야를 청와대에 보완하였다. 비서실 강화에도 불구하고 각각 업무추진에 불협화음을 일으켰으며, 새로이 설치된 정책실은 불필요한 위원회와 기능확대에도 불구,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와 방향을 선보이는데 실패하였다.더 많은 능력과 권력을 선발된 인사들에게 주어졌는데도,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였다는 의견.
청와대와 총리실은 그 특성 ‘코드’에 부합되는 대거 채워지곤 했다. 특히 노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영남출신 인사들이 중요 요직을 비롯, 상당 부분을 독차지했다는 의견. 자세한 사항은 일요시사 495호 참조.
한편 노무현은 취임 전 행정부 고위직 임명과정에서 인사청문회를 확대⋅개최하여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정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을 국회의 인사청문회 개최후 임명하였다. 그러나 국회 인사청문회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등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동의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형식적인 청문회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례가 존재한다. [4]
정부의 인사시스템 논란은 2006년 초 이기준 교육부총리 인선과정에서 직격탄을 맞았다. 인사검증의 부실논란이 큰 화제가 되었기 때문. 이후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위장전입 사실이 드러나 또다시 논란에 불을 붙혔다. 하지만 정작 정부는 ‘적재적소‘ 원칙보다, 차기 선거를 대비한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며, 낙하산등과 같은 점철된 인사를 단행하였으며, 결국 이철 전 의원과 이해성 전 비서관을 각각 철도공사와 조폐공사 사장에 임명하면서 비난여론이 한층 가열되었다. 이런 야기된 문제들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례로, 비전문가로 판단되어지는 대통령의 측근들과 여권인사들이 내각과 정부 산하 공기업, 유관단체 기관장 등 핵심요직에 임명됨으로써 ‘경영효율성’이 저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결과적으로 국민세금을 불필요한 부분에 추가적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보였다. 집권 3년째를 맞으면서 알려진 숫자만도 1백여명에 이를 정도라고 알려질 정도로 인사시스템의 난맥상에 대한 비판이 주류였다. 청와대도 더 이상 인사와 관련, 정치적 인선이었음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고육책이라며 변명으로 일관했다.
뉴스메이커가 노무현 정부의 인사 전반을 둘러본 결과, 참여정부가 과거에 비해 '낙하산 인사'는 없다'라고 강조를 무색하게 만들만큼 많다고 한다. [5]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기득권 세력등과 같은 내부의 적이 숱한 비난과 여론 조성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릴려고 애썼다는 것.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코드 인사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이 전효숙 전 헌법재판소장 사퇴 사유.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의 절차상 문제도 있었고, 전효숙 전재판관의 임기도중 사퇴가 헌재의 독립성과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또 국회 임명동의절차에 대한 야당의 물리적 방해 또한 그에 못지않은 중대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국민이 전효숙 전재판관에 대한 헌재소장 지명철회를 지지한 것은 코드 인사에 대한 불신 내지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부터 흔히 높으신 분들이 끼리끼리 해먹는데 이골이 난 한국인은 민주화가 진전된 이후 특정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은 용납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경계심은 무척 크다. 노무현과 그의 세력이 말하길, 이는 효율적인 정부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진정으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사를 선별했다한들, 제3자가 보기엔 권력 집중의 전초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비판과 우려를 수용하고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으나, 그에 대한 소통이 많이 부족했을뿐더러, 국가의 수장의 품위와 맞지 않는 과도한 발언들로 인해 비판이 거세진 것이였다. 고대신문 장영수 법학과 교수 칼럼 인용
우선, 코드 인사, 부실한 인사 검증, 낙하산 및 보은인사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부실한 인사 검증이나 낙하산의 정도가 노무현 정권이 다른 정권보다 유독 심했다고 볼 근거는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이헌재 경제부총리 임명 시 위장전입이 논란이 되었으나, 후임 대통령을 비롯하여 이후 수많은 장관 후보들이 위장전입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바람에 국민 눈높이가 많이 낮아졌다.
코드 인사 문제로 논의를 집중해 보자면, 우선 함께 일할 사람들을 가치관이나 성향이 맞는 사람들로 선택하는 것은 어느 정권이든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인사를 임명했다고 하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를 코드인사라고 부르면 잘못한 일처럼 보인다. [6] 나쁜 코드인사와 좋은 코드인사를 구분하기 어려움을 방증하는 동아일보 기사 그렇기 때문에 코드인사라는 비판은 일관성을 갖기가 힘든 측면이 있다. 보수언론들이 정권에 따라 코드 인사 비판의 강도가 다름을 지적하는 미디어오늘 기사
그럼에도 코드 인사가 비판을 받는 경우는
1) 코드 자체가 보편적인 사람들의 코드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경우
2) 지나치게 같은 코드로 구성된 사람들로만 일을 해서 여러 관점과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
3) 코드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들을 적대시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경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1)번의 대한 반론은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생략해도 될 것이다.
2)번의 경우에 대해서, 참여정권이 다른 정권보다 심했는지에 대한 근거는 부족하다. 오히려 노무현은 이후의 보수 정권 대통령들과 비교하여 자기와 다른 코드의 사람들의 의견에 관심을 갖고 경청하려고 한 편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 사례로서 노무현은 특별한 인연도 없었고 코드가 맞는 편이라고도 볼 수 없었던 김우식 전 연세대총장에게 1년 6개월 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대통령을 수행하는 비서실장직을 맡긴 바가 있다. 김 전 총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김 전 총장 자신을 포함해서 자기와 코드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했고 뜻에 맡지 않는 의견이라고 해도 묵살하지 않았다.[7] 국무총리 고건이나 외교부 장관 반기문의 경우도 코드인사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또한 위원회 등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고 참여시키는 경향이 이후 정권보다 더 강했고, 오히려 진보세력은 노무현이 지나치게 보수 인사를 포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교육정책자문위원회 구성 사례 노무현의 보수인사 임용에 대해 비판하는 프레시안 기사
3)번의 경우 노무현 전대통령이 생각이나 가치관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것만 갖고 누군가를 적대시하거나 불이익을 준 사례들은 찾기 어렵다. 생각이 다른 부분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과,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의 인격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불이익을 주려고 하는 것은 서로 구분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코드 인사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게 된 데에는 우선 그 말을 하고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이 노무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노무현과 코드가 달랐던 주류 언론이나 야당, 기득권층 등이 코드인사 프레임을 유용하게 많이 활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이 어떤 사람을 임명하는 경우 그 사람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주장하기보다 코드가 노무현과 비슷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더 쉽다. 그러면 그 임명이 적합한지 여부를 떠나서 코드인사라고 비판하면 뭔가 인사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노무현의 인사정책은 결론적으로, ▲노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수가 2만5000여 명 증가했으며 장·차관직도 20여 개 늘었다. ▲이에 따라 지난 1년간 정부의 인건비 예산이 1조5000억원 늘었다.▲국민의 세금 부담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반면 그 결과물인 정부 행정 효율성은 2005년에 비해 16단계 추락했다(스위스 기관 조사). ▲노 정부 출범 이후 정부 산하기관에 정치인 출신 134명, 관료 출신 148명이 임용됐다.[8]
정부살림의 방대로 인해 세금부담을 국민에게 더욱 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2년 말 공무원수는 56만명의 규모였으나 2004년에는 2만 7000명 정도 증가로, 김대중 정부가 5년간 조정을 통해 줄인 인원의 8배를 2년만에 늘려놓았다. 당연히 인건비는 늘었고, 2005년 세출내역에 따르면 대략 16조에서 2006년엔 18조로, 약 9.2% 증가했다. 공무원 수의 증가는 인건비-사업비 증가를 불러, 결국적으로 국민의 세금증가를 불러일으킨다. 공무원 일자리는 민간에 비해 파생수요 효과가 낮아 경제적으로 고용 감소와 경제 위축을 초래한다. 더구나 정부 구조조정을 중단함으로, 민영화가 중단이 되었다. 출저[9] 국가경영연구원에 따른 민영화 사례의 요인들을 나열했다.
이 부분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긍정과 부정이 달라질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작은 정부와 민영화를 지향하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정부의 역할과 공공역할의 확대를 주장한다. 공무원 수 증가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공무원들이 그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고 정부가 효과적으로 운영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정부규모가 클수록, 정부권한이 많을수록 부패규모 역시 커진다. 모든 공무원이 청백리일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처벌의 강도를 높혀도[10] 규모와 부패는 비례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야당, 또는 여야 간에 갈등과 대립이 심각하였다. 물론 집권여당과 야당이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하지 못한 것은 비단 노무현 정부 시기만의 문제점은 아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시기부터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는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적어도 이전 정부인 김대중 정부에서는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적은 의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을 자극하거나 지나치게 공격하는 모습은 자제해왔다. 특히 대통령 개인이 야권 전체를 향해서 날선 공격과 비난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오히려 김대중 정부에서는 구여권층 인사들을 중용하고 또 보수정당의 일원인 자민련을 구슬러서 정국을 이끌어가고자 하였다. 민주주의 정치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대립하는 여러 사안들과 이해관계의 충돌들에 대해서 갈등을 조정하면서 합의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때, 노무현 정부는 사회대통합과 합의의 정치의 측면에서 대단히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정몽헌, 안상영, 박태영, 남상국 등 노무현 정권 때 벌어진 수사로 자살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으며, 노무현의 대결 정치는 탄핵으로 까지 번지며 노무현은 '적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게 하였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가 그 이후의 보수 정부에 비하여 더 대결적이었는가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야당이었던 당시 한나라당이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학법 이슈를 갖고 장외투쟁을 할 때도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에게 길을 틔워주기 위해 여당 원내대표에게 양보를 권고한 사례가 있다. 또한 생각을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스타일이 많은 논란과 갈등을 일으킨 점은 있으나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도 많이 있었다. 특히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는 사안에 대하여 권력이나 여론을 등에 업고 힘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합의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측면에서 이후의 보수정권들과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기득권층과 보수언론들의 격렬한 공격이 갈등을 더 키운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검찰조직의 반발을 일으켰던 검찰 개혁의 예처럼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개혁은 갈등과 대립의 원인이 되며, 갈등의 심화 자체가 실패라고 할 수는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보험 개혁이 공화당과 그 지지자들의 반발을 일으키고 공산주의자니 무슬림이니 하고 비판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오바마 대통령의 결함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러한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노무현 정권은 평검사와의 대화를 추진했던 것처럼 대화와 토론과 타협의 방식을 취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보수언론은 자신들의 이념이나 관점과 어긋나는 부분에 대하여 맹공격을 퍼부었고 대립과 갈등의 리더쉽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3김시대가 이룩해놓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3당 합당에 반대하지 않았으면 여당 소속으로 출마해 의원직 유지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3당 합당에 반대한 후 야당 소속으로 떨어질 것이 뻔한 부산에 여러 번 출마해 줄줄이 낙선했다. 특히, 종로 재보선에서 당선됐지만 다시 부산으로 가는 모습에 '바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니.
하지만 그의 노력은 PK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어느정도 통했다. 16대 대선 때는 15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가 받은 득표율의 2배 정도를 받았으며 ( 경남 27%, 부산 30%, 울산 30%), 18대 대선 땐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문재인 후보가 대구경북에서는 고작 10%대 후반을 받은 데 비하여 부울경에서 무려 36-40%를 받았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노무현이 완전히 지역주의를 없앴다"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아직도 부울경 지역은 보수성향의 우세지역으로 민주 및 진보 세력에겐 여전히 출마시 상당한 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지역주의를 없애겠다고 끊임없이 도전한 노력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 할만 하다. 또한 2000년대와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낙동강 벨트 등의 지역에서 여야의 접전 양상이 생기는 점등은 사실 노무현의 노력에서부터 출발한 것임이 맞다.
하지만 이것이 노무현, 혹은 그의 세력이 자신의 고향인 부울경 지방에서 노력하여 지지를 얻었다는 소리지, 그것이 지역주의를 타파했다 혹은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노무현은 부울경의 지지를 얻은 대신 그만큼 호남에서는 외면을 받았다. 애초에 부울경 지역은 외지 사람 비율이 높아서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율이 어느정도는 나오는 곳이며, 노무현과 친노세력의 핵심인물의 고향이 부울경이란것을 고려하면 이상한 득표율은 아니다. 그리고 정작 노무현 임기내내 치뤄진 총선, 지방선거, 차기 대선에서 지역구도는 깨지지 않았고, 오히려 호남에서도 지지율이 떨어져 2006년 지방선거에서 광주, 전남에서조차 열린우리당이 패배한다. 이 지방선거는 민주당계로써는 역대 최악의 선거결과로 남아있는데,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민주당계(당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는 탈탈 털렸다. 서울시를 예로 들면 시장,구청장은 한나라당이 싹쓸이. 시의원조차도 102:4라는 압도적인 패배를 기록했다. 그가 지역타파를 위해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개혁을 했다고 할만한것이 없다.[11] 20대 총선에서 낙동강벨트의 승리가 노무현덕이라면, 호남참패도 노무현탓이라고 볼 수 있다.
노무현은 대통령 선거 공약을 통해 5대 차별의 해소를 역설한 바 있다. 5대 차별이란 여러 차별 가운데서 하루빨리 고쳐야할 것으로서 성별, 학벌, 장애,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가리킨다.
노무현 취임 이후 참여정부는 이를 12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국민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정책으로 실천하였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외국인 및 이민자에 대한 차별로 확대되었고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도래를 염두해 연령에 대한 차별이 포함되어 2004년 6대 차별 시정[12]으로 구체화되었다. 노무현은 이를 위한 정책개발 기구로서 대통령 자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13]를 설치하고 차별시정기구를 일원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기구는 차별금지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과제정 추진에 큰 역할을 맡았다. 차별금지법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를 중심으로 2006년 6월부터 제정 준비에 들어갔다.
나아가 2007년 6월에는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와 법무부∙노동부 등 관계부처를 아우르는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기획단이 운영되었다. 2007년 7월에는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 업무가 법무부로 이관되었다. 법무부는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한 후, 2007년 10월 2일‘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하였다.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기획단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안을 토대로 조정안을 마련하였다. 여러 법률 조항에 분산되어있는 차별금지 규정을 한데 모아 기본법으로 구성함은 물론 차별 금지와 처벌 및 시정 방법을 체계화하고 불합리한 차별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구제조치를 규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차별 금지 사유의 하나인‘성적 지향’을 둘러싸고 종교계와 학부모단체 등에서 반발이 있었으며, 입법 과정 중 회기가 만료되어 폐기되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2007년 3월 6일 제265회 임시회 본회의에 상정된‘장애인차별금지법 상임위 대안’이 재석의원 197명 중 196명의 찬성(기권 1명)으로 통과됨으로써 제정되었다.
2006년 8월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와 장애인 관련 단체 및 정부부처로 구성된 장애인차별금지법 민관공동기획단의 설치로 본격적인 제정 작업에 들어갔고 2006년 12월 11일 국무조정실과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는 관계부처회의 개최를 통해 정부최종 2개 안이 마련되었다. 제1안은‘시정기구일원화-시정권고안’, 제2안은‘시정기구 일원화-시정권한 이원화안’이었다. 차별금지법 제정 작업이 지체되면서 가장 심한 고용상 차별을 당하고 있는 장애인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별도로 제정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장애인에 대한 개인적∙의학적 모델의 기존 시각을 사회적 모델로 선진화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고 또한 법 제정 과정에서 장애인 관련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와 정부 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협치의 모범적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이외에 차별시정기구 일원화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업무가 조정, 남녀차별 및 구제에 관한 법률폐지 및 남녀차별개선위원회의 남녀차별 시정 업무가 국가인권위원회로 이전, 국가인권위원회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14]
대표적인 인권 사각지대인 군대의 인권개선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초의 사병출신 대통령이였지만 사병 봉급 인상과 군복무 기간 축소와 같은 이전 정권들이 해오던 수준의 개선에 머물러있다가 논산 육군훈련소 인분 사건과 530GP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야 대대적으로 내무부조리 개혁을 시작하였다. 전의경들역시 점차 인원을 줄여 완전 폐지하고 그 공백을 직원 기동대를 부활시켜 대신하게 하는 방안을 만들었을 뿐 구타 가혹행위에 대한 대책은 미흡하였고 이는 여의도 농민 집회와 포스코 시위에서 2명의 농민과 1명의 노동자가 과격한 폭력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 만들어졌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확대개편하여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해당 위원회에선 6.25전쟁 당시의 양민학살이나 전시 민간인 희생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각종 간첩조작 사건 등 그간 금기시됐던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용공조작 사건들을 조사, 정리하여 피해자들을 복권시키고 가능한 경우 뒤늦게나마 보상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군사정권 당시 벌어진 각종 시국사건,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재조사 및 보상 기조는 민주화 이후 주욱 이어져왔었다. 과거사 정리위원회 자체가 김대중 정부 시절 만들어졌던 의문사위를 확대개편한 조직이며,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김대중 정권인 200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사건 당사자인 노태우정부 시절 만들어졌다. 다만 개별 사건들을 다루는 특위가 아니라 과거사 전체를 다루는 거대 위원회를 만들어 전체적인 과거사 정리를 꾀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평가할 만한 업적이기는 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위대한 기록유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가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서조차 형편없이 관리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정부혁신위원회에 기록관리분야를 추가시키며 대통령 기록물 관리를 체계화하고 법으로 정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이전까지의 대통령 기록물은 의도적으로 전임 대통령들이 폐기하거나 숨기며 개인적으로 가져가버리는 경우가 많아 후임 대통령들이 그 자료를 활용하지도 못하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었을 당시의 결정이나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노무현 대통령 때 부터 모든 대통령 기록물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로 특별 관리되어 회의중 남긴 쪽지 하나까지도 대통령 기록관에 보관되도록 되었다.
이전 대통령들과의 기록물 수를 비교해 보자면
이승만 대통령 : 9만 3569건
박정희 대통령 : 6만 9770건
전두환 대통령 : 6만 5618건
노태우 대통령 : 4만 5346건
김영삼 대통령 : 10만 114건
김대중 대통령 : 77만 460건
대통령기록물법 제정 이후
노무현 대통령 : 750만 2724건[15]
이명박 대통령 : 1087만 9864건
750만여 건이라는 타 대통령에 비해 압도적인 기록물 수를 자랑한다. 또한 이러한 기록물들은 대통령 임기 중에는 재야시절 만들었던 '노하우'시스템을 개발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인트라넷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이지원'시스템을 만들어 청와대에 최초로 전자전산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보고서 체계를 정비하여 청와대 내 상호소통이 원활하도록 하였으며 이 경험은 <대통령 보고서>라는 책으로도 펴내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터넷 선거 혁명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고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정부에 있어 '온라인 국민 참여 포털' 구축은 그 어떤 과제보다 큰 의미를 가졌다. 참고
보통 줄여서 나이스(NEIS; N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System)라고 불리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이 김대중정부 후반기인 2002년 말에 구축되었고, 노무현정부 초반기인 2003년 4월부터 본격 시행 되었다. 그러나 도입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학생,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해당 항목에 들어가서 보거나 혹은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느린 속도나 낮은 웹 호환성, 인권 침해 우려, 개인의 신상정보 유출 우려등, 문제점이 꽤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한지 겨우 1년만에 이런 기사가 올라오기도 했다. 교육부의 늦장대응도 한 몫했다고.
1989년 대학등록금 자율화 이후 등록금은 꾸준히 인상되었으나 참여정부 때 폭이 제일 가파랐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공립대 57%, 사립대 35.4%로 자율화 이후 최고치다. 출처 이 시절 국립대를 다닌 사람들은 등록금이 저것 밖에 안 올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국공립대에는 폴리텍 대학, 농수산대학, 사관학교, 카이스트 등이 포함되는데 그것까지 포함시켜서 산출한 결과다. 등록금 인상률이 물가 상승률을 압도적으로 넘어서면서 등록금 문제는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이에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 20대의 지지율을 크게 잃게 되었다.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국립대 등록금을 사립대 수준으로라는 망언은 지금도 그가 출마하는 지역에서 새누리당 계열 인사가 반드시 공격하는 주제다. 다만 이에 대해 참여정부 입장에서 항변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여정부는 4대 개혁 입법에 포함된 사학법 개정을 통해 사학 재단의 방만한 경영을 막고 재정의 투명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개정된 사학법은 한나라당의 촛불집회 및 국정마비에 의해 지연되었고 나중에는 로스쿨 빅딜에 의해 관철되지 못하였다. 재개정된 이후 등록금은 오히려 덜 올랐다는 점에서 등록금 인상과 사학법 개정은 별 관계없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사학 재단들은 이에 대해 재단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말라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고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역시 사학 재단들과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결국 사학법 개정, 아니 이 법이 포함된 4대 개혁 입법은 여당과 야당의 끈질긴 합의 끝에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도 겨우겨우 통과되고, 결국 그다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진통 끝에 참여정부는 사학법 개정 추진력 부족으로 진보 세력에게 비판을 받게 되었다.
진보적인 교육 정책이라 하면 학생 개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살릴 수 있는 교육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참여정부는 자율성과 창의성의 '겉'모습에 집착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공교육 시스템을 붕괴시켜 버렸다. 대표적인 예가 사교육비 폭등이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사교육비가 집권 후 단 2년 만에 두 배로 뛰었고, 학원가가 줄지어 생기기 시작한 정권이다. 참여정부는 자율성과 창의성을 대학 개방화와 특목고, 자사고 따위의 시장화와 고교 특수화(계열화)로 인지하고 있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공교육 붕괴와 사교육 시장의 팽창으로 나타났다. 또한 로스쿨 허용과 잦은 대입 시험 변형을 바꾸면서 국민들의 원성을 자처했다. 대통령 본인과 정부가 말한 공교육 정상화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교육 정책에 대한 뚜렷한 철학과 현실 인식이 부재했던 것이 원인.
그 여파로 현재 사다리 걷어차기의 현상이 나타났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무색한 사회가 되었으며, 사교육에 들인 돈이 곧 아이들의 미래로 연결되는 사회가 되었다. 강남 팔학군 그리고 특목고, 자사고에 상위 계층 아이들이 수능 1등급을 휩쓰는 것이 현실이다. 즉 서민들이 그들을 쫓아가는 건 뱁새가 황새를 쫓는 꼴이 된 것이다. 돈을 쏟는만큼 성적으로 이어지는 건 교육 일선의 선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16] 아래 부동산 폭등도 마찬가지지만, 참여정부는 진보적인 척 겉 모습에 집착하고, 정작 내실있는 진보적 교육 정책에 무관심했으며, 오히려 교육 다양성이라는 진보적 표제를 특성화, 시장화로 전유, 자신들의 정책이 어떤 것으로 나타날지 예측하지 못하는 현실성 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참조 수많은 경고에도 불과하고...
그렇지만 참여정부가 사교육 근절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까지는 아니다. 이를테면 오늘 날의 EBS 강의와 연계 교재도 저소득 계층의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하려는 선의였다. 하지만 ebsi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역시 정부의 당초 의도대로 흐르지 않고 변형 문제집이라는 새로운 사교육 시장을 창출했다. 그리고 나올만한 지문 잘 집어주는 것이 유능한 강사의 한 척도가 되어버렸다.
문서 참고.
노무현 정부 희대의 실책으로 끝나고 단 1회만에 없어졌다. 원론적으론 줄세우기를 방지하는 차원이라곤 하지만, 1등급 밑으로 2,3,4,5등급으로 갈수록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을 놓친 결과였다. 이미 수능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상대평가 시험이자 누가 봐도 그 목적이 명확한 줄세우기용 시험이다. 그것을 간과하고 수능 체제에서 줄세우기 기능만 빼려 했으니 당연히 정책실패로 귀결되는 것이다. 게다가 1등급 인원이 4%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적당히 4%에 턱걸이한 학생이 100점을 받은 학생과 똑같은 성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합리한 것이다. 국영수 중 두 과목을 100점을 받고 한 과목만 매우 아깝게 2등급을 받은 학생들은 세 과목 모두 4%에 턱걸이한 학생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등급으로 비교하면 뒤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로 08학번에는 평소 성적에 걸맞지 않은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인터넷 여론에서도 이 수능 등급제만큼은 좌우 가릴 것없이 모두가 비난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정책적인 면에서 부동산, 외국인 지문날인과 더불어 가장 많은 욕을 먹는 정책.
로스쿨 문서 참조.
사법시험의 대체안으로 로스쿨 설립을 결정했으나 사법고시가 더 낫다는 여론이 이어지고 법조계 내부 갈등을 불러일으킨 정책이다. 로스쿨의 경우 불투명하고 불공정한 입시 과정, 금전적 장벽에 의해 기회의 평등이 제한된다는 측면과, 3년에 불과한 부실한 커리큘럼으로 인해 함량미달의 변호사가 대거 양산될 수 있다는 점이 주요 비판점으로 지적된다. 노무현 본인이 개천드래곤이 되는 계기였던 사법시험은 고졸도 길이 있었다는 점과는 대조적.
2016년 사법시험을 폐지하는 시일이 가까워지자 각종 단체와 계층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폐지가 유예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17] 특히 로스쿨 교수들의 반발이 크다. 로스쿨 도입 전까지는 학생들이 학점과 수업에 관심이 없고 오직 고시에만 목을 매어야 했으나, 로스쿨 도입 이후는 학점이 곧 학생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과 권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고졸 출신의 법조인으로서의 애환을 겪은 만큼 사법 교육의 폐해를 타파하기 위해서 야심차게 추진한 정책이지만, 오히려 폐해를 더 양성시켰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
다만, 위 서술에 관하여 관점을 달리하여 로스쿨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린다는 견해도 있는바,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긍정적 평가는 법학전문대학원/옹호, 부정적 평가는 법학전문대학원/비판 문서 참조.
구속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권의 정권의 2배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사 [18] 노동자들이 크게 다치고 심지어 죽는 일도 있었다. 노무현은 한 때 노동자들과 손 잡고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이었다! 곧 노동 변호사 출신이 노동자를 탄압했으니,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세 명의 노동자-농민이 길거리에서 경찰 곤봉과 방패로 구타당해 죽었다. 그것도 두 차례에 걸쳐서.[19]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유감을 표했지만,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참여정부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른 정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항변하지만 진보진영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노동 탄압 관련기사1 노동 탄압 관련기사2
참고로 위에 서술된 구속 당한 노동자들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조원들이었다. 참조 각 정부마다 노동계에서 다뤄지는 이슈가 다른데, 참여정부의 경우엔 사용자측의 고용 형태가 교묘하게 변하는 시점이어서 이슈가 되었다. 예로 노동의 사각 지대에 있었던 특수고용 노동자(화물연대)와 하도급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각종 서비스업 등(골프장 캐디와 대형 마트 노동자)이 생겨나면서 이들의 처우가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참여정부 시절 이들 노동자에 대한 기본권이 종종 무시되고 탄압 당했으며, 손배소가압류라는 악법을 활용해 많은 노동자들을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 카트와 웹툰 송곳이 이 시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공무원 노조와의 마찰로 유엔 산하 국제노동기구에서 경고를 받았다. 참조
당시 진압현장에서 집회와 파업과 시위와 관련해 불법적인 탄압이 자행되었으며, 심지어 테이저건을 사용하기도 했다. 참조 공권력이란 언제든 인명을 손상 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경찰의 진압 장비들은 특별한 요건을 충족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20]
참여정부는 여성업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성인지적인 면에서 여성정책의 방침을 '차별시정'과 '고용 촉진 기반 구축'을 통해 남녀 고용평등의 실현과 사회복지시스템을 통한 보육지원으로 요약했다.[21]
위 각주에 나열된 정책이 실행된다는 상황을 반영하면, 가족을 보살피는 노동을 위한 공적 지원과 확대를 기대해볼 수는 있었으나, 여성이 놓여있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더욱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진단되어지지 못했다. 당시 참여정부로 인해 여성에게 주어진 문제는 노동시장 참여를 위한 기회를 보장받는 것보다 더욱 큰 사항인 이중 노동의 딜레마, 즉 여성인력의 전략적 활용이라는 자본적 요구가 새로운 시련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의 여성의 취업시장 진출은 가족 구성원을 보살피는 1차적인 책임을 전제하에 두고 시작됐다. 따라서 여성은 정규직보다는 임시직, 파트타임 등의 비공식부문을 차지했고 이는 당시 70%대를 육박했다. 간단히 말해서, 여성을 흡수하는 일자리는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의 활동을 보조, 레저나 유흥 수요, 1차, 2차 산업을 충족시키기 위한 하인 노동이 다수로 이루어졌다. 예시로 상품 판매, 학습 방문교사등의 특수 고용직은 여성으로, 숙달된 능력을 요하지 않는 낮은 임금이 할당된다. 그너머 법적으로 노동자성조차 증명 받지 못함에 따라, 근로기준법상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함은 물론이고 임금체불, 업무상 재해와 각종 부당노동행위, 인권유린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낮은 임금과 열악한 조건을 감내하는 여성들은 가족 내에서 지위 또한 문제가 되었다. 한 명이 주로 돈을 벌고 가사를 부수적으로 하고, 또 한 명은 그와 반대 상황이라면, 대체로 좀더 안정적이고 다소나마 높은 임금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생계의 원천으로 삼는 선택을 하게된다. 이렇듯 1차적인 책임으로 인한 노동시장에서 부차적인 입지는 서로사 서로의 원인으로 악순환을 야기하면 여성의 빈곤화를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또한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 현상은 한편으로는 출산과 양육을 둘러싸고 가계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급등했음을, 다른 한 편으로는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출산-양육'과 '생계보조자로서 노동시장에 참여'라는 이중적인 역할이 여성 스스로가 감내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음을 드러내 보인다. 하위항목 2.1 활용실태와 문제점 참조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여성정책은 대체로 성별 노동분업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두기보다는 재생산의 1차적 책임자이자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초점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차별 시정을 통한 남녀고용 평등의 실현'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 목표는 고용 기회에 있어서 평등을 약속할 뿐, 금융화-서비스화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노동 자체를 변경시키지는 않는다. '휴직 제도'와 '서비스의 종류 확대'를 골자로 하는 출산 및 보육의 사회적 지원 체계 역시, 이에 대한 여성의 1차적인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양성평등정책이, 가족 내에서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부차적인 지위를 전제로 하고 있는 한, 개인과 가족의 생존전략은 현재의 성별 노동분업 구조를 재생한 하게 되며, 이 속에서 여성들이 부딪치고 있는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하다. 현재 자본주의의 생산과 재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공격 없이 단순히 성차별을 문제삼는 것은 노동시장 진출에 있어서, 그리고 재생산 노동을 분담하는 방식에 있어서 여성들이 자신의 선택과 기호를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강화시킬 뿐이었다.
위는 사회진보연대 칼럼에서 문장들을 인용함.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정경유착을 깨고 보수언론의 권력을 줄이려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결점있는 지도자였다. (그의 사망은) 한국 대통령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LA타임스
"노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재벌과 정치의 유착을 끊고 남북평화 체제 구축과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공적을 남겼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노무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국가정보원, 국군기무사령부의 장 과의 독대를 일체 거부하였으며, 이는 현재 대한민국 정부 가운데 유일무이한 노무현 정부의 업적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퇴임 후 '낙향'의 길을 선택한 점도 후한 점수를 받는다.
직접 농사일을 거들고,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동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피우는 노 전 대통령의 소탈한 모습에서는 '권위의 상징' 대신 '인간 노무현'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였다는 평가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을 두고 네티즌들은 '노간지'라는 애칭으로 화답했다. [22]
이 외에도 군 장병들의 불필요한 삽질성 준비를 방지하기 위해 군 부대 시찰을 자제하기도 하였고 간혹 병사가 무한한(?) 단계를 뛰어넘고 직속상관 최정점인 국군통수권자에게 장난섞이고 친근하게 대하더라도[23] 결코 혼내지 않고 일일이 다 받아준 것도 인간 노무현으로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사항.
노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많은 국민들은 노무현의 친서민적 이미지를 대통령의 거의 전부로 평가했으며, 이후에 노무현 정신, 노무현 시대정신과 같은 단어가 나오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대통령 관련 설문조사에서 1위 또는 2위를 하는 데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2#3#4#5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표적 수사로 노 대통령이 투신했다는 분석이 나오자 MB 정부에 대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탈권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로 고려때부터 내려온 가부장제[24]와의 이별을 고한 정책.
호주제에 관련된 논란은 1950년부터 꾸준히 있어 왔지만, 권위주의 통치 시스템이 만연하던 군부는 물론이거니와 민주 정부들도 접근하길 꺼려하는 장기 미제 상태였다. 호주제가 가족의 주인인 호주(남자)에게 구성원을 종속시켜 개인의 자율성을 탄압하고, 남녀 차별을 당연시하는 위헌적이고 반민주적인 제도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는 이미 이루어진 상황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전근대 권위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계층의 표심을 잃을까봐 다들 쉬쉬해왔던 것. 하지만...
12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양성평등을 내세운 참여정부는 호주제 폐지에 박차를 가했다. 인수위 시절부터 호주제 폐지 의지를 노골적으로 피력하던 참여정부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25]을 임명, 두 차례에 걸쳐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고 헌법재판소애서 위헌 판결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기득권의 동향에 좌우되지 않는 노무현의 소신과 추진력이 업적으로 승화된 것이다.
단순히 노무현이 권위적이지 않다는것과, 귄위주의를 타파했다는건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노무현이 보여준 탈권위적 일화들은 기껏해야 노무현이 권위적이지 않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지, 그것을 갖고 마치 권위주의를 타파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건 상당히 과장된 것이다.
거기다 대통령이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게 반드시 좋은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권위적이라는것 자체가 무조건 나쁜것만은 아니다. 대통령은 엄연히 행정부를 지휘, 통제하는 자리인 만큼 어느정도의 권위는 필수다. 노무현은 친숙한 말을 많이 사용하였고, 이전 대통령들과 다른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줄곧 막말 논란으로 번졌으며,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수장인데 너무 격을 낮춰 행동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비판도 쏟아져 나왔다. 뒤에 보면 자세히 나오는 내용이긴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권위적이지 않은 행동은 너무 도가 지나친 경우도 많다.
노무현을 오히려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청와대 기자실 폐쇄처럼 노무현도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몇몇언론인들은 노무현을 독재정부에 비유할 정도였다.기사 그의 보수적인 경제정책과 그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등, 권위적인 정책도 많았다. 노무현이 탈권위적이라는것은 보고싶은 것만 본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자기 체면 구겼다는 이유로 수백명의 밥줄을 끊어버리는 사람이 권위주의적이지 않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26]
비판하는 측은 당시 대추리는 보상조차 마무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서 군 시설이라고 볼 수 없었기에 민간인 재산에 마음대로 철조망 치고 군병력을 투입한 셈이라고 비판한다 기사 당시상황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최소한 계엄령이나 위수령을 선포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비교하려는 경우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러한 절차마저 거치지 않고 그냥 군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대추리는 대부분의 지역주민이 보상을 받고 이주했으며, 공식적으로 법원의 행정집행 허가를 받고 법원의 집달관을 동행한 상태에서 영장을 집행하여 철거 작업을 완료하고 군사지역으로 확정된 상태이기 때문에 애초에 광역시도단위 혹은 전국과 같은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계엄령이나 위수령을 선포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과거의 계엄령 및 위수령은 군대 투입 자체가 잘못됐다기 보다는 군사 쿠데타나 친위 쿠데타 수단으로 활용됐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라 성격이 다르다.
대부분의(면적기준으로) 부재지주들이 보상을 받았을뿐, 자영농과 소작농들은 보상거부가 다수였다. 게다가 그 당시 보상을 받은 면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70%대에 불과했다. 70%대면 대부분 아니냐고? 당시 법적으로 재개발/재건축 실시요건이 찬성80% 이상이었다.
비판하는 측에서 당시 시위진압에 군인을 투입한 증거라고 제시하는 사진인데, 시위 진압하는 군인이라고 보기에는 방석모, 방석복, 진압 방패와 같은 진압 장비도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 다만 진압봉만 있을뿐... 원래 무장병력을 투입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방석모같은 시위진압장비는 챙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군에는 그런 시위진압장비도 없다.[27] 아래 부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국방부가 이미 마을 주민들로부터 매입하여[28]
원래 무장병력을 투입하려고 했다가 빠꾸먹어서 저런거지, 말그대로 5.18이 재현될뻔했다. 게다가 저 진압봉은 미리 가져다 놓은 것이다. 절대 우발적인게 아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84296 대집행 당일 대추리 분교에 농성중인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진압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순전히 진압작전을 위해 투입되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
5월 5일 첫번째 사진과 같은 상황에서 진압봉만 가지고 진압하다가 피해가 발생하자 국방부는 5월8일부터 경찰로부터 진압방패를 빌려서 시위진압 장비를 지참하고 경계를 설 것이라고 밝혔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1734.html
엄연히 군 부지로 확정된 상황이라면 법적으로 여기 허가없이 들어온 민간인을 퇴거시키고, 이 과정에서 불응한 이들은 무력을 사용해 쫓아내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군부대 부지 밖으로 쫓아낸 이후엔 군인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 경찰에 맡겨야 한다.
군 당국이 군인을 공세적으로 시위진압에 투입했다기 보다는, 시위대가 군 부지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마주친 군인들이 막았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시위대는 반대쪽 철조망을 절단기로 잘라내며 평택 K-6 미군기지(캠프 험프리스) 진입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 저지선이 뚫렸으며, 철조망 안으로 들어온 시위대가 군인들과 마주쳐서 충돌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국방부는 경찰 저지선이 뚫리면서 군과 시위대가 직접 접촉한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경찰 병력 일부를 철조망 내부에도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정부가 일부 구속자를 석방한 것을 두고 공권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거나, 군 당국이 군 부지에 배치된 공병들에게 "시위대에 맞대응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면서 비판했다.#
공중조기경보기 도입사업, K2 전차 개발, 사병 월급인상 등을 실현했다. 그에 따라 참여정부 때는 국방예산이 해마다 평균 8.8%[29] 증가했고, 각종 무기와 장비를 도입하기 위한 전력 증강 예산인 방위력 개선비의 평균 증가율이 무려 11.7%에 달했다. 참고로 해군 항공대도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이명박 정부때 무산되었고,기사[30] 잠수함사령부 또한 무산되었다.[31][32]
게다가 국방부의 문민화를 나름 높이는 성과를 냈었던 점은 당시 장성수를 줄이는 계획에 있어서 국방부내 문민관료들에게 호평을 받은바 있다. 또한 군의 전문성을 유지하고자 완전한 전문성은 아니더라도 후술할 전문하사(유급지원병) 제도를 도입하는데 역할을 했으며 출산율을 고려한 병력개편의 시초를 확립하는 역할도 했다.
전문하사라는 이름의 유급지원병 도입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군의 하부구조를 탄탄하게 했다. 기존에는 병 입대자는 무조건 병장만 되면 제대했으나 전문하사 제도로 인해 하사까지 올라가는 병사가 생기고 이로 인해 군복무를 좀 더 하는 사병이 생겨서 군 하부구조가 소폭으로나마 탄탄해졌다.
또한 노무현이 창설한 전문하사 제도는 앞으로 부사관 전문인력 양성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이는 노무현이 이룬 업적 중 상당히 큰 이득을 얻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군대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들어오는 부사관보다 병생활을 경험한 이후 부사관으로 이어서 복무하는 부사관의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군대가 정예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이 도입한 전문하사 제도는 현재까지도 군대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출산율이 저하되어도 직업적으로 복무하는 사병이 생김으로서 병역자원확보에 대한 어려움을 덜어줬다.
병력은 병부터 복무해보고 부사관을 지원할 수 있게 되어 군 복무에 맞는 인원 위주로 군대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병력 중 일부가 하사까지 복무하는 조건으로 군복무를 조금이라도 오래하게 되어 군대가 더욱 졍예해졌다.
정부 각 부처에 중구난방으로 방치되어 있던 '국가 재해-관리 정책'을 국가 안전관리 계획으로 통합하고 각 부처별로 분산되어 있던 '사고대책본부'들을 정리해 중앙안전대책본부로 지휘 체계 일원화 확정하여 재난 사태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2003년 아시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사스 발생시에 고건총리 지휘하에 감염자가 단 3명에 그치면서 효율적인 방역체계를 보여주었고 실제로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사스 예방 모범국이란 평가를 받았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또한 2004년과 2006년, 두번의 조류독감 당시에도 비교적 큰 피해가 일어나지 않게 신속하게 행동했다.
이는 메르스 사태 당시 컨트롤 타워의 부재, 신속하지 않은 환자 격리 등으로 무능하게 대처했던 박근혜 정부와 크게 대조된다. 물론 박근혜 정부는 역대 최악의 정부이므로 노무현 정부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실례지만.
외교정책때와 마찬가지로 전시작전통제권 문제에서 미국과의 갈등을 첨예하게 빚었다. 특히 막말파문까지 겹친데다가 기존의 북한에 대한 옹호적인 정치행보는 독자적인 작전계획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을 빚을정도로 굉장히 부정적인 역향을 끼치는데 특히 공헌을 했다. 전시작전통제권을 전환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는 점은 국방에 독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주적개념 삭제를 두고도 안보관 문제를 초래하여 군과 청와대의 갈등을 불러왔었다.관련기사, 관련기사2, 관련기사3, 관련기사4
또한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문제를 두고도 국내 보수진영과의 갈등이 컸던데다가 미국과도 갈등이 컸다. 대표적으로 작계5029에 대한 문제를 두고 전시작전통제권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동맹인 미국과 첨예한 대립을 한 것은 국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당시에 개념계획으로 합의를 봤으나 실질적으로 이 계획에 대한 이행을 두고 한국과 미국의 행정부들은 각각 첨예한 대립을 할 수 밖에 없었다.관련기사, 관련기사2, 관련기사3, 관련기사3 이는 나중에 노무현 행정부의 메뉴얼 계획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에 대해서 논란도 컸다.[33]
당시 한국통[34]이었던 빅터 차, 마이클 그린, 성김 셋 모두 노무현정권의 유화책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특히 동북아균형자론에 대해서는 "양다리 걸치기"라고 말하며 노무현 퇴임기에는 "이제 새로운 한미동맹이 정립되어야 할때"라며 그동안의 한미관계가 삐걱거렸다는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참여정부 최악의 실책 중 하나
다른 내용들은 정책적 비판이라든가, 전/후임 대통령에 대한 비판 등등도 많겠지만 이 외국인 지문날인 정책은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진영에서조차 논리적으로 옹호할 방법이 없어진, 노무현 정부의 명백한 실책이다.
2003년 강금실 법무부장관은 1년 이상 장기체류하는 외국인의 지문날인하는 제도에 비판적인 입장이었으며, 법무부가 이를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하여 국회에서 통과됐다. 외국인 지문날인은 기존의 1년 이상 체류에서 수사상 또는 국가안전을 위해 필요한 경우로 제한되게 되었다.
그러나 정권이 두 번 바뀌고 나서는 이것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한 상황이다. 지문날인 폐지로 인해 외국인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아니지만, 인권신장 이외의 효과가 없다는 여론이 많으며 2009년 장기체류 외국인에 대한 지문날인이 부활되었다. 단 현재도 단기체류 목적으로 입국한 외국인에 대한 지문날인은 실시되지 않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알려진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이 외국인 지문날인 폐지는 수능 등급제와 더불어 노무현 정권의 실책 쌍두마차로 평가될 정도로 여론이 매우 좋지 않다.[35] 만약 다시 지문날인 폐지를 지지하겠다는 대통령이 나오면 최소한 인터넷 사이트와 기독교 계열[36]에서 앞장서서 반대할 가능성이 높아 다시 이 주제를 꺼낼 대통령이 나올 가능성도 거의 없다.[37][38]
현재 노무현 정부와 연관이 있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39], 정의당 등도 현재는 외국인 지문날인 폐지 이야기는 섣불리 꺼내지를 못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곳들에서도 더이상 이야기가 없고 심지어 범진보적으로 지문날인 폐지 이야기를 못 꺼내는 것을 보면 참여정부 최악의 실책으로 제도권에서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NLL 대화록 논란/해석논란 및 북방한계선 관련 나무위키 문서 참조
2007년 노무현 대통령전까지 단 한번도 대한민국에서는 북한 측과 NLL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나 노무현 정부때 처음으로 북한 측과 논의가 시작되었다. 2006년 4차 남북장성급회담에서 북한이 NLL 논의를 제의했다. 국군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에 명시되어 있는 불가침조항을 북한이 우선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노무현은 2006년 6월16일 계룡대 특강에서“현재 남북한 간 신뢰의 장애요소이자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는 NLL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적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며 NLL 협상론을 제기했다. 이후 2007년 7월19일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이재정 통일부장관에게“군사문제인 북방한계선에 대해 다른 부처가 앞서가는 발언을 하지 마라 달라”라고 요구했고, 이를 청와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청와대 측에서 후임자를 물색하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재정 통일부장관, 홍익표 통일부장관 정책보좌관, 서주석 청와대 안보수석비서관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등 참여정부 외교안보 인사들 역시 정상회담 직전까지 NLL은 영토선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북한과 협상할 수 있다는 여론을 조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국방부 역시도 입장을 선회하여 NLL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이것은 역대 정부의 NLL정책과는 달라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추진된 것이 공동어로수역설정이다. 물론 공동어로수역안은 역대 정부마다 논의는 있었던 사안이다. 그런데 문제는 등거리가 아니라 등면적으로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이전에 제시되었던 공동어로수역 방안은 등거리를 기준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NLL기준으로 남측이 조금 더 같은 면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설정하고, 북측이 같은 면적으로 남측 해안에 내려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너무 북한 영토와 가까워진다는 점에서 북측이 거절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NLL선 기준으로 같은 거리의 면적을 공동어로수역으로 설정을 검토한다, 그러나 등면적 공동수역이 설정될 경우, 북측 선박이 우리나라 인천 주변까지 내려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40]
이러한 논의가 오고 가고 있던 중에 공동어로수역 설정이 곧 "NLL 폐기 내지 NLL 무력화 아니냐"하는 논란이 2007년 당시부터 고조되었다. 2007년 10월 24일 서울 시청앞에서 열린 UN 창설 62주년 기념 '대한민국 사수 10.24 국민대회'에서 "실질 효력이 있는 NLL을 부정하는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해 NLL 재설정 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큰 만큼 대통령은 문제 발언을 취소하고 국민 앞에 사과함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나왔다.[41]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역시도 10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전국위원회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며 NLL은 1953년 정전협정을 맺고 휴전선과 똑같이 남과 북이 서로 나눠서 실효적 지배를 해오며 사실상 남과 북의 경계선으로 인정해 온 것인데, 이 문제를 노 대통령이 자꾸 얘기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다. 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지극히 의심스럽다”고 비판[42]했다[43]
당시 노무현 정부와 북한 정권 비공개적으로 논의가 되고 있는 남북공동어로수역은, 7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 높으신 분들이 남북회담 중 남북공동어로수역의 범위에 대해서 비공개적으로 토론을 진행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측 장교가 프로젝터로 통해 이 결과를 회담 중 공개하려고 하자 남측 장교가 이를 몸으로 막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출처
그리고 이 무렵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청와대와 NLL 관련 갈등이 고조되자 해군에 NLL 침묵령을 내리기도 했고, “내 이름을 걸고 NLL을 지키겠다”고 보도가 나오자 국방부가 아닌 청와대에서 이를 정정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한나라당은 아예 11월8일자로 “노 정권은 국방부장관의 NLL관(觀)을 사수하라!!”는 성명서를 내 김장수 장관을 지원하기도 했다. 회담 직전까지 김장수 장관은“NLL은 반드시 사수한다”는 입장을 언론에 공개한 반면, 청와대는 입장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
당시 김장수 장관의 태도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명박 정부에 의해 10.4선언이 부정된 이후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비판하며, 10.4선언 핵심 중 하나인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와 관련해“당시 (김장수)국방부장관이 회담에 임하는 태도가 대단히 경직됐다고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청와대와 김장수 장관의 NLL 관련 입장이 크게 달랐음을 암시하는 것이다.출처
물론 남북공동어로수역 문제는 정권 막바지에 논의되었던 사안이었고 이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야당의 반발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헌법상으로 영토선이든 아니든지 간에 실질적으로 우리의 북방한계선으로 인식하고 지배하고 있는 구역에 대한 논의를 국민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북한과 논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영토, 안보와 관련한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야당과의 논의와 대화, 그리고 국민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에 대한 사실을 알리고 공론화를 거쳐가는 과정이 필요로 했던 부분인데, 국민적 소통이나 논의 없이 북한과 은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논란의 불씨를 지피기 쉬운 측면도 없지 않았다.
다만 이런 비판에 대해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 정책이고 북한에 국민의 동의를 얻지 않은 무언가를 약속한 바는 없었다는 변호를 할 수 있다. 북한과 협상을 시작하기 전부터 공론화를 했었어야 하느냐, 어느 정도 협상이 진행된 이후에 국민 동의를 얻는 절차를 밟아야 했는가 하는 판단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2013년 갤럽 여론조사(출처)에 따르면 NLL 대화록 내용으로 볼 때 노무현이 남한의 대통령으로서 할 만한 말을 했다고 하는 의견이 48%로 일방적으로 북한을 편들었다고 하는 24%의 의견을 넘어선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NLL과 관련해서 추진한 정책에 대한 국민 평가가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만 이 여론 조사 역시 국민 여론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여론조사 결과는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인용된 여론조사는 NLL 대화록 공개 파문 직후에 조사된 내용으로 노무현 정부가 해당 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와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NLL 대화록 자체에 대한 의견을 묻고 있어 NLL 협상 및 공동어로수역 추진에 관한 여론 지표로서 적당한지도 의문이다. 2013년 이후 남북관계가 더 악화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부정적 평가가 더 높아졌을 수 있다. 어떤 관점에서든 여론조사결과 만으로는 정책에 대한 평가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 이슈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나무위키 문서들(본 항목 상단의 링크 참조)에서 좀 더 다양한 관점과 정보들을 참조할 수 있다.
2016년 한강 어귀와 NLL내 중국 어선의 조업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자, 박근혜 정부는 해경 기동전단을 구성 불법 조업중인 중국 어선을 나포하는 등 단속을 벌였다. 중국 어선의 남한내 수산자원을 갈취함이 문제가 되자 새누리당 김성태의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협의한 남북공동어로수역을 협상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공동어로수역은 NLL 무력화 의도가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한편, 국회 정보위원회 현안 보고 국정원은 북한이 3000만 달러에 자국내 어업권을 중국에 팔았다고 보고하였다. # 이들 중국 어선은 북한 내 조업을 하다가 남한으로 월경하여 조업을 하고 기동전단과 같은 해경 단속선이 뜨면 북한으로 도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서해5도 어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대전략 아래 이루어져서 최소한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북아균형자론"와 같은 자기 나름의 전략을 구상하였고 중국이 급부상하는 국제정치적 환경 변화를 읽어내고 대전략으로 승화했다고 외교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그 내용은 박근혜 대통령의 균형외교에도 승계되었다. 역내 국가 모두와 선린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자협력을 주도하는 연성 균형자(soft balancer)였다.
대선 과정에서 당시 한국의 젊은 층에 팽배했던 반미 감정에 편승해 "반미" 내지 "미국에 할 말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구축하였고 이에 대해 미국과 보수진영에서 많이 우려했다. 그러나 당선 후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미 FTA 체결과 이라크 전쟁 파병 등을 결정해 이념보다 국익을 우선했다는 평가를 받았고,[44] 용산기지 평택 이전,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 등 중요한 한-미 현안들을 과감히 해결해 미국 외교가의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미국의 미군의 한국 내 주둔기간을 연기함으로써 한국의 안보를 보장해주었고, 쌍방은 한미 20년이래 처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미국과 "전면적인 동반자관계"를 구축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미국에 "할 말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북에 대해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 6자회담을 통한 협상타결 방안을 도출했고,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로 6자회담이 파국의 위기에 몰리자 정상회담의 의전 관행을 깨면서까지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압박해 사태의 반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2006년 10월 북의 핵실험 직후 대북 제재방안을 논의하러 방한했던 당시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미국 책임론으로 응수해 부시 행정부의 정책 전환을 유도하기도 했다. 즉, 일본도 미국과 다른 입장에 서서 어느정도 자기 주장을 내보인 점도 있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는 대일 문제에서 다시 충분히 나타났다. 보통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외교라 하면 독도 문제 등을 두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던 연설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전에서는 철저히 실리에 따라 움직였다.[45] 2003년 6월 6일 노 대통령은 방일 첫날에 천황 부부와 만찬을 가졌다. 그 날은 한국의 현충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노 대통령의 행보는 국내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또한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시 역사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일본 국회에서 통과한 "유사법안"에 대해 별다른 평가를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노 대통령은 한국의 생사존망과 관계된 문제는 북핵 문제이며, 일본과의 대화시 역사문제를 거의 언급치 않고, 의견대립을 잠시 보이지 않은 목적은 일본이 한국이 추구하는 평화적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지지할 것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국회에 말했다.[46]
또한 노무현 대통령부터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의 비중이 키워 중국과의 관계도 신경써서, 중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중국 한 신문은 중국내 한국전문가의 말을 빌어 "사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중국과 한국의 입장은 기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가장 일치함을 보인다"고 평가하면서 양국의 공동보조를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노 대통령이 한반도에 전쟁이 다시 발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 일본과 정치 교류를 하는 것은 사실상 이해할 수 있다면서 "이는 한국의 국가이익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위, 경제력 및 미ㆍ중ㆍ일의 역사적 관계와 현실에 부합된다"고 평가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미관계가 최악의 파탄관계였다는 사실이다.기사기사2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미국의 전문가들은 역대 최악의 한미관계였다고 표현할정도로 강한 어구를 사용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명박 정부가 방미를 했을때 이제는 한국을 믿을수 있으니 정보를 주겠다.라는 이야기까지 들을 정도였다.기사
미국에게는 거친 언행을 쏟아내면서 자주니 뭐니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북한이나 중국을 상대로는 자주니 뭐니 하면서 거친 언행은 고사하고 할말도 못하는 수준의 외교를 했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비교될수 밖에 없었다. 당시 대표적인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크게 도마위에 올라왔을때에도 노무현 정부의 대응은 미국에게 자주를 이야기하면서 목소리 내겠다는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였고 햇볕정책을 두고 미국과 일본등의 전통적인 우방국들과의 대립은 한국의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문제도 낳았다.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맥아더 동상 존폐문제때에도 반미주의 정치선전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는 오해마저 미국에게 받을정도로 자주라는 구호의 핑계를 대며 미국과의 거리를 두는 정치행보는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미국내 정치권과 인식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미국에게 할말은 하겠다'라는 태도 역시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미 감정과 국내 진보 진영 특유의 반미 감정을 실제 외교에적용하는, 지지자들 기준에서나 할말 하는것이지만 외교적 이득은 거의 없는 포퓰리즘적 정책이 아니냐는 비판 역시 존재하며, 이로 인해 한미 양국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원래부터 안그래도 외교계에서는 온갖 정치적 수사와 미사여구가 만연하게 쓰이는 곳인데, 이러한 태도는 충분히 외교적 결례로 비추어질 수 있었으며, 특히 미국같은 강대국, 더욱이 2000년대 초반 당시 단극체제에 가까운 국제 정세를 구축하고 있는 나라에게 있어서 이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외교적으로 손실을 가져왔다는 평도 많다. 전임자 김대중대통령만 해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신중하고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당장 당시 미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평가를 보면 이러한 측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서도 콘돌리자 라이스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 둘다 그다지 우호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으나, 전임자 김대중대통령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태도의 노정객','여러 면에서 존경받는 인물' 등 긍정적인 평도 있는 반면 노무현대통령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는 평가를 내린 점, 당시 한미 관계의 어려움 등을 언급한 점을 볼 때 '할 말은 하겠다'라는 태도가 한미관계나 당시 외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 점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다.
비단 콘돌리자 라이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도 노무현에 대해 반미적(anti-American)이고 정신나간(crazy) 인물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게다가 로버트 게이츠 본인은 부시-오바마 행정부에 걸쳐서 등용된 비교적 온건한 인물로 평가되는데도 저런 평가를 내린거다(...).더군다나 게이츠의 회고록에는 노 전 대통령이 게이츠 장관에게 직접 "아시아의 최대 안보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지적 했다는 내용도 언급되는데 심각한 외교적 결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한 발언이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1159397g 외국의 장관,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의 장관을 만나 해당 국가, 그것도 가장 가까운 동맹국에 대해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비난을 하는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이러한 외교적 결례를 "미국에게 할 말은 한다"는 식으로 포장하는 것이야말로 왜곡,미화에 지나지 않는다. 역으로 생각하면, 미국의 대통령이 한국 주요 정부 인사를 만난 자리에서 "아시아의 최대 안보위협은 남한"이라는 식으로 비난을 했으면 당장 반미,좌파 성향의 사람들이 외교적 결례라고 말하며 들고 일어났을게 뻔한 일이다.
게다가 북한 문제에서는 앞서 서술한대로 미국과 극단적인 대립에 치우치는 상황이었고 6자 회담에서 미국의 제재안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하는등 오히려 한국을 돕고 북한의 핵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우방국들의 입장과 정면으로 반대를 한 이미지를 주었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고 앞서 서술된 것처럼 한국이 북한에게 미국의 비공식 정보와 의견을 넘겨주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오기까지했다. 당시 북한에 대해서는 마치 편집증에 가까운 옹호를 하려고 했던 외교행보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우방국들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남남갈등이라는 이념갈등으로까지 번질 정도였다. 실제로 1차 북핵실험이었던 2006년 당시에도 어떻게든 북한을 보호하고자하는 모습의 행보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참여정부가 가장 큰 실책은 북한에 대한 외교 남북관계 문제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집착하여 북한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국은 당시에 북한때문에 PSI에 참여도 못했을뿐만 아니라[47]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기권을 하는등의 추태마저 보였다. 맹목적인 북한의 옹호와 북한에 대한 지원은 국내외에서 전혀 동의받지 못하는 수준의 외교를 펼친 것으로 이미 나온 결과로 증명되었다. 안보협력에서 한국이 미국을 등지려고 하는 이미지 우방국들을 등지려고 하는 이미지 때문에 한국의 국제정치적 입지는 낮아졌던게 현실이다. 우방국들중에 한국의 입장에 지지를 하는 모습보다는 외면이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려고 했던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중국에 대한 외교역량을 키운 면이 있지만 미국의 편승에서 벗어나려는 외교행보가 역량을 키웠다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오히려 한국의 외교적 역량과 가치를 중국으로 하여금 얕보게 하는 수준으로 가는 위험한 행보라늗 것. 외교역량이라는 것은 기존의 전통주의 정치-안보협력국가들을 상대로 알량한 자존심 내세우며 관계를 막장으로 만들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의 외교적 역량은 다소 하락했다. 미국과도 협조가 잘 안되고 있고 일본과도 협조가 안 되는 데다가 그렇다고 자신있게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하던 중국과도 이렇다 할 결과들이 없었다. 유럽만 하더라도 한국과 딱히 협력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없는 등 한국의 외교적 역량이 강화되었다라고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 없었다.
사실 이 문제는 현재 박근혜 정부도 답습하는 문제로 노무현 정부때 대중국외교의 문제점중 하나는 북한을 어떻게 중국을 통해서 무언가 끌어내거나 주도해보겠다는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그런 한국을 이용해서 한반도의 분단을 지속 고착화할뿐만 아니라 한국의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중립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장기전략이다. 노무현 정부의 외교는 그런 중국의 대전략에 그냥 편승해준 외교행보였을뿐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북아균형론이라는 외교전략이었다. 당시 이 동북아균형론자라는 전략론을 내세우면서 이러한 중국의 대전략에 편승하는 것이 더 심화가 되었는데 이는 한국은 군사력과 같은 물리력에 의한 경성 균형자(hard balancer)가 될 수는 없는 문제점과 기존의 긍정 평가에서 나오는 다자협력을 주도하는 연성 균형자(soft balancer) 역시 기본적으로 한국의 국가적 역량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한국의 한계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외교전략은 결국 실패할수 밖에 없었던 문제였고 실제로 동북아균형론자는 한국이 제3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으로 비추어져서 중국에게는 호평을 받았지만 다른 국가들에게는 오히려 불신과 부정적 이미지를 초래했고 제대로 균형론과 다자협력을 이끌어낸적도 없다.,# 당장의 전통주의적인 외교관계도 엉망으로 만드는 국가가 무슨 다자 협력체계를 구축할수 있겠는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고립주의 형국에 빠져버렸던게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동북아균형론자의 현실이었다.
즉 외교로서의 역할은 실리도 얻지 못한채 정작 한국의 다자협력보다는 고립을 초래하면서 오히려 한국이 배제되는 형국만을 낳았던 외교의 결과들만이 있을뿐이었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대선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자 중심과 진보진영의 경제지형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취임 후부터는 급격한 우클릭으로 신자유주의적, 친 재벌적으로 변화하였다. 왼쪽 깜빡이 키더니 우회전 했다란 말이 진보세력들과 야권지지자들의 불만을 요약하는 말이다.
이는 이헌재, 김진표 등 다소 보수적인 경제관료들이 요직에 있었던 탓도 있고, 무엇보다 참여정부 자체의 미약한 정치적 기반으로 인해 정치적 추진력을 재벌에게서 찾으려 했던 시도도 크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 5년의 경제적 멘토는 '삼성경제연구소'가 되었고, 근본적인 재벌개혁과 경제구조 개선에는 미진해 양극화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거나 도리어 악화되었다.
다만 순환출자 구조 개선을 시도하고 출자총액제 제한제도를 도입해 재벌의 과도한 팽창과 왜곡된 지배구조를 어느 정도 억제하려는 시도는 했으며, 종부세 설립 등 진보적 성향의 정책도 사용했다.
참여정부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300인 이상 기업부터 주 5일제를 확대 시행해 개인의 삶의 질 확대와 경제적 효과에 기여하였다.
김대중정부 시절부터 성장 해 온 IT산업에 대한 효율적 지원으로 IT기업들의 성장이 경제 성장에 기여하기도 했다. 특히나 노무현 정부때는 IT산업이 가장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기도 하며, 당시 한국이 IT산업 경쟁력 세계 3위를 기록하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2003년 7.23배였던 소득 5분위 배율(상위 20%소득을 하위 20%소득으로 나눈 값)은 해마다 늘어 지난해 7.64배까지 벌어졌고,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는 2003년 0.341에서 지난해 0.351로 소득 불평등도가 커졌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상승하며 소득불평등이 악화되었고, 참여정부보다 성장을 강조헀던 MB정부 시절에는 오히려 지니계수가 정체되며 소득불평등 악화가 둔화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양극화 원인에 대해서 의견이 조금 갈리기는 하다. 왜냐하면 양극화가 세계화와 외환위기의 여파의 산물이라는 지적이 바로그것이다. 하지만 이를 해소할 참여정부의 정책이 별로 없었다는 비판이 있으며, 관료들이 주도한 정책은 양극화를 더 심화시켰다. 유종일 한국개발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경제학)는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에 ‘국민소득 2만불론’이라는 성장우선주의 담론을 내걸었고, 집권하지마자 법인세 인하라는 반개혁적 조처를 취했다는 비판을 했다.
기사1
기사2
위 기사들에 따르면, 노무현정권 5년간 농가부채는 50.5%, 어가부채는 97.6%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당시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의 말에 따르면 가구당 농가부채는 2002년 말 1989만8000원에서 2007년말 현재 2994만6000원으로 50.5% 늘어났다.[48] 반면 가구당 농가소득은 같은 기간동안 2470만원에서 3196만7천원으로 30.6% 늘어나는 데 그쳤다고 한다.
어가 부채도 상황이 별반 다를게 없었다.
가구당 어가부채 역시도 해당기간 동안 1749만4000원에서 3440만7000원으로 96.7%나 증가했으며[49] 그러나 어가소득은 같은 기간 2181만6000원에서 3066만8000원으로 40.6% 늘어나는데 그쳤다.
유기준 의원은 이를 두고 "참여정부 5년간 소득 증가보다 부채 증가가 크다는 것은 참여정부의 '농어가부채 대책이 실패'했다는 반증"[50]이라고 말했다.
참여정부 당시, 환율 방어에 사용한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 누적 적자액이 2004년 말 13조 2천억 원으로 급증했고, 2005년 말에는 무려 4조 6천억이 늘어난 17조 8천억으로 불어났다. 기사 1 기사 2
세계경제포럼(WEB)에서 밝히길, 2005년 19위였던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이 이듬해 2006년에 5계단 추락, 24위에 그쳤다고 한다.
또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2007년 29위였던 국가경쟁력이 2008년에는 2단계 떨어진 31위가 되었으며[51] 정부 부문의 효율성이 떨어진 것이 주요원인이었다고 한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동처우 개선이나 노동운동 탄압에있어 보수 정권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진압은 더욱 강경할 때도 있었다.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시절에는 법인세 인하에 부정적인 발언들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마자 입장을 바꿔 법인세를 인하했다. 해당 기사가 올라온 날짜가 3월 4일이니, 대통령이 되고 고작 1주일 정도만에 자신의 말을 어긴것이다.
노무현정부는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비정규직 보호법과, 산업연수생제도를 대체하여 본격적으로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오게된 고용허가제를 실시하였다. 취지는 좋았지만, 부작용이 노동자들에게만 집중될것을 우려한 당시 노동계는 반대했지만, 노무현은 그것을 무릅쓰고 시행하게 된다. 한미 FTA를 본격적으로 추진한것도 이 시기다. 결국 비정규직 보호법은 비정규직을 줄이기는 커녕, 2년이 지나면 정규직이 되지못하게 짤리게 만들거나 2년도 안되는 단기계약이 증가하는등, 비정규직 해고법이라며 반대하던 노동계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한미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익 당사자들, 특히 가장 피해를 볼 것이라고 예측된 농민들과 조율 그리고 대화와 타협의 자세는 없었고, 답을 정한 상태에서 반대자들에 대한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참조 각계의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 홍보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 빈축을 샀다. 참조 더구나 국민들에게 객관적인 시각을 전재해야할 정부가 한미 FTA에 대한 각종 수치 조작 하며 장미빛 환상을 심어주려 했지만 곧 들통나고 말았다.참조 이미 대미 수출품 중 주효 수출품들 대다수가 한미 FTA 이전부터 무관세로 미국에 수출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장률이나 일자리 유발은 미미한 수준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데 참여정부는 억지로 불확실한 것들까지 더해서 한미 FTA를 장미빛 전망인양 포장해 홍보한 것이다.
여담으로 이때 한미 FTA와 연계해 스크린쿼터 축소가 문제되어 영화계 종사자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참조 참여정부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몇몇 노사모 일당들이 국내 영화계를 깡패 영화나 만드는 철밥통이라고 하며, 디워(...)를 헐리우드 영화와 맞짱뜨는 영화라며 지지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참조
이외에도 진보진영과 대립하는 사안들이 꽤나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새만금을 비롯 갯벌을 매립하는 서해개발사업들과 골프장 난립 같은 전형적인 농촌, 자연 파괴 정책들, 참조 참조, 대기업의 중소기업업종 진출을 허용한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 폐지, 대부업의 살인적인 이자율을 인정해서 많은 서민들을 자살하게 한 대부업법과 미국식 금융 시스템을 이식하려한 자본시장통합법, 참조 그리고 각종 민영화 기조와 삼성공화국 등이다. 아래 동영상과 함께 참조 진보 진영에서의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평가는 정치에선 자유주의적인 진보적 개혁을 '일부(ex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등..)'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지만, 경제만큼은 보수 정권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정권으로 취급한다.
강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시도한 노무현 정부는 국가기반시설을 포함해 다방면의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의료 민영화였다.
노무현 정부의 의료민영화 기조는 크게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의료시장 개방'과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 집단의 보건의료계 영향력 강화' 측면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는 참여정부가 보건의료 문제를 공공성보다는 경제적 산업 측면에서 강하게 접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와 재정경제부 간의 충돌을 빚으면서까지 영리병원 추진을 강행했으며, 또한 의료정책기조는 삼성경제연구소, 삼성생명, 삼성의료원 등에 다소 휘둘려 2005년 이후부터의 정책은 급격하게 친기업적이고 민간의료 중심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52]
심지어 당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주장한 의료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의료정책은 영리병원, 의료서비스 관광상품화, 국내 병원의 해외 진출 등 무려 7개가 겹치고 있는 데다가 민간보험사의 공보험 통계 활용을 위한 국무총리실 산하 규제개혁기획단에 삼성생명 직원이 들어가 있기까지 했다. 2005년 9월부터는 민간 생명보험사의 실손 의료보험의 판매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정책기조 속에서 공공적 의료보험의 역할이 축소되고 사보험의 영향력이 꾸준히 강화되기 시작했다. 아예 보건복지부와 재경부가 보완적 관계를 통해 민간보험이 공보험(건강보험)과 더불어 국민 의료보장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도록 역할 분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발언했을 정도.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비급여 수가 부분을 기존처럼 건보공단의 독점권이 아닌 민간보험사가 병원과 독자적으로 결정하도록 정책을 추진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또한 보건정책 기조로 영리의료법인 확대, 원격의료, 법인약국, 의료기관 인수합병 허용 등의 논란이 되는 정책들을 꾸준히 강행했으며, 2006년 3월 발표된 제 2차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심의안건에서도 추진 과제로서 영리 의료법인, 민간 의료보험, 건강보험수가제도는 의료서비스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제도 개선 과제로 논의돼야 한다는 데에 정부 내 이견이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2년 12월 외국인 전용 영리볍원 건립 허용을 시작으로 2005년 1월에는 외국 병원의 내국인 진료 허용->2006년 2월 외국병원의 영리볍원화와 내국인 진료 허용, 2006년 7월 외국병원의 국내병원 합작투자 허용 등이 차례로 추진되고 있었다.
이러한 의료민영화의 결정적 추진은 일부 진보진영에서 노무현 정부를 '껍데기만 진보인 정부'소리를 듣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임기 첫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10년 이내에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달성하겠다고 공약하였고 퇴임 당시에 이미 2만달러를 돌파시켰다. 공약을 지켰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7% 성장 공약은 물론 5% 성장 목표또한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반면 다른 선진국들이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진입할 때의 평균 성장률이 3.2%였던 것에 비해 2003 ~ 2006 한국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4.3%로서 참여정부 당시 성장이 평균이상이었음을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53] [54]물론 이역시 박정희 정부의 고성장이 박정희 때문만은 아니듯 전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공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한편, 참여정부 경제정책중 부의 분배에 관해선 실패했다는 평가하는 경향이 크다 # 또한 노무현 정부 5년간 연평균 대미 달러 환율은 22.0%가 하락하였다는 점을 고려할때, 노무현 정부 기간의 달러 환산 1인당 국민소득 증가는 22.0%가 환율 하락 요인이었다는 점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국민실질총소득의 연평균 증가율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2002년 말의 국민실질총소득(GNI)는 971조 6870억원, 2007년 말의 그것은 1154조 2460억원으로 CAGR을 계산하면 노무현 5년간 물가, 환율변동을 배제한 국민실질총소득의 연평균 증가율은 약 3.5%에 불과하였다.
김대중 정부, 김영상 정부 시절 연평균 실질국민소득 증가율이 모두 7%씩[55]이었고, 1998년의 급격한 하락과 이에 따른 반등 요인이 큰 1999년의 급격한 상승을 제외하면 이전 정부인 국민의정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56]였다. 물론 고도 성장 시기와 노무현 정부의 시기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연평균 3.5%의 실질소득 증가율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장 전 정권이었던 김대중 정권때에 비교해도 반토막이다. 단 5년사이에 고성장시대에서 저성장시대로 바꼈다고 주장하면 스스로도 이상하지 않나. 심지어 노무현정권때는 골디락스 경제라고 불리던 세계경제 호황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참여정부는, 첫째, 부동산시장의 투명성 및 조세 형평성 제고, 둘째, 주택공급의 지속적인 확대, 셋째, 투기수요 억제와 개발이익 환수, 넷 째, 서민 주거복지 확충 이상 4원칙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고 한다.[57] 2008년 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참여정부가 부동시장의 투명성과 조세 형평성에 대한 개선, 서민 주거복지 분야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58]
규제 완화, 양도세 완화, 분양가 상한제 폐지 등 참여정부에 반하는 방향을 주장한 한양대교수 이창부가 참여정부는 "효울성보다는 형평성을 선택하였다"고 평하였듯[59] 특히 부동산 시장의 투명성과 조세 형평성 관해서는 호평이 많다. 이 중 실거래가 신고제 및 등기부 기재 도입은 관행처럼 내려오던 이중 계약서 관행을 근절시켰다는 점에서 금융실명제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60] 실제로, 토지의 공공성 광화를 주장한 현 부동산연구원장 당시 국토연구원 토지주택연구실장 채미옥은 참여정부 당시를 지역균형 개발이나 투기억제 정책을 시행한 양극화 해소 정책기로 규정하며 "시장투명화 정책을 위한 실거래가 신고제도와 등기제도 도입은 참여정부 주요한 공적 중 하나였다"고 평하였다.[61]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서 임기 초 시장주도형 공급관리 정책을 사용하지 못하고 3.30 대책 전까지 공공주도형 공급관리 정책으로 일관했다는 점과 수요관리또한 8.31 대책 당시 취득세와 등록세 등 거래세 인하한 것 외에 공공주도형 수요관리로 일관한 점에 한계가 있다고 평가한 세종대 교수 겸 한국도시연구소 소장 변창흠 또한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제, 실거래가의 등기부 기재, 과표현실화, 부동산 종합정보망 구축 등은 부동산 시장의 투명성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며 이를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중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부분이라 한 바 있다.[62]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비판한 당시 주택산업연구원장 고철은 참여정부 당시를 두고 이전 정부에서 경기부양을 위해 부당산 시장 규제를 완화하였고 저금리로 인하여 세계적인 주택가격 상승이 있었음에도 전국적으로 집값이 상승하던 과거와 달리 전국의 집값이 차별적으로 상승하였다고 회고하며 “참여정부는 집값이 오르면 서민이 피해를 본다는 전제 아래 부동산 가격 급등의 원인을 투기로 상정하고 개발이익 분배논리에 따라 과거에 시행되지 못했던 부동산 정책을 펼치는 등 투기억제를 위한 공공의 시장개입을 확대하였다"고 평하였다.[63]
그러나 “투기적 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주택가격 상승방지 정책은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한 무주택서민의 아노미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평한 전주대학교 교수 만규식 이 “여전히 저소득층을 위한 국민임대주택 공급이 부족하며 모든 정책이 수도권에 집중되어있고 지방과 무관하다”고 비판한 것처럼 부정적인 평가또한 공존한다.[64]
한편, 시장 시스템 작동을 위한 거래 활성화 조치를 역설한 스피드뱅크 연구소장 박원갑은참여정부의 일관된 정책 기조와 집값 안정화를 인정하면서도 주택정책이 실패한 까닭에 대해서는 “공급 확대보다는 수요 억제 위주 정책으로 일관한 것, 과도한 세금 규제, 정책에 대한 불신”을 지적하였다.[65]
부동산 가격 안정화에 대해서는 참여정부 출범 이전부터 진행된 소비자 경기전망지수 하락 등 2분기 연속 내수 위축 및 소비자물가의 급등, IMF 여파에 의한 기업의 신규투자 저조 및 제조업경기실사지수와 종합주가지수의 연이은 하락, 사스, 미-이라크전쟁 발발과 대북관계 악화와 같은 대외적 악재 중첩, 저금리와 세계적인 부동산 붐 등에 의해 2002년부터 부동산 시장이 과열될 조짐이 나타났고 필연적으로 오를수밖에 없었다는 것[66]에 대해 선제적 조치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으나 2005년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별로 커지지 않았으며 2007년 1.11 대책과 1.31 대책으로써 부동산 시장이 안정세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주기적 주택가격 불안과 높은 가격 수준을 비판하면서도 참여정부의 주택정책에 대해서는 “서민 및 중산층의 주거안정과 주거복지 증진, 부동산 시장의 투명성 제고 및 선진화, 투기 억제 및 실수요 중심의 공급을 통한 시장 안정화, 주택 공급 확대를 통한 시장수급 균형 도모, 수도권 중심의 연 30만호 규모의 안정적 공급 기반을 확보한 성과가 있다”고 평한 전 국토교통부 주택토지실 실장 당시 주택정책관 도태호는 주택시장이 2007년 이후 안정세로 전환되어 앞으로 전반적인 안전세가 계속될 전망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67]
가구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 PIR과 아파트 가격에 대한 시계열그래프 | 집값 상승폭에 관한 시계열 그래프 |
보이는 바와 같이 물가 인상을 고려했을 때 부동산시장은 90년대 내내 마이너스 성장을하였고 10을 넘나들던 PIR은 급락하여 3~4대에서 머물고 있었다.[68]이는 김대중 정부에서 경기부양을 목표로 부동산 시장 규제를 완화한 것, 경기 위축에 따른 부동산 시장에 대한 자금 유입 특히 은행의 적극적인 부동산 시장 진출, 외적인 부동산 붐과 내적인 재개발 붐에 맞물려 필연적인 부동산 인상을 야기하였다. 이에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저축률 30%에 이르는 국가에서 관치금융과 같은 독재 후유증으로 인해 금융시장이 적절한 자산 증식 기회를 제공할 수 없기에 주기적으로 부동산 시장 특히 신규 아파트 시장으로 잉여 자금이 몰린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아는 금융위기 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부동산 붐을 피해갔고 한국에서의 부동산 시장 상승 역시 세계적인 추세에 비해서 물가 인상을 고려한 실제 인상폭은 실로 미미한 것이었다. 참여정부에만 한하여서도 그렇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이 안정국면에 돌입한 2007년 이전의 통계를 보더라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영국, 이탈리아, 핀란드 등의 부동산 가격은 약 25% 상승하였고, 스웨덴, 노르웨이, 아일랜드는 약 35%, 미국은 약 40%, 프랑스, 스페인, 홍콩은 약 50%올랐다. 반면 2005년 부동산 시장 불안정을 포함한 2003년 말부터 2006년 말까지 3년간의 한국 부동산 시장 가격 인상폭은 13.8%에 그쳐 한국보다 저성장한 선진국들에 비해서도 당시의 부동산 시장 인상 수준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69] 이는 2003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노무현의 전 재임기간으로 확대해 비교해 봐도 2013년 3월 가격을 100으로 놓았을 때, 전국의 주택 매매 가격은 2003년 3월 71.8에서 2008년 2월 88.2로 불과 24.19% 상승에 그쳤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다만, 서울 내 한강 이남 지역의 증가세는 꽤 컸는데 동지수로 67.2에서 100.9로 5년간 51.32%로 상승하였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강남투기를 원천봉쇄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5년간의 한강이남 집값 인상폭이 3년간의 홍콩 전역의 집값 상승 수준에 맞먹는 수준이었으니 강남 투기꾼 입장에선 실로 홍콩간 기분이었을 것이기는 하다.[* 아파트에 한정해서는 인상폭이 5년간 전국이 33.77%, 서울이 56.58%, 강남이 66.95%에 달했는데, 김대중 정권부터 신규 아파트 분양가격 규제 철폐 조치의 까닭이 크다는 점은 고려해야 겠으나 강남 3구의 아파트값 상승률은 강남구 79.88%, 서초구 79.40%, 송파구 82.83%에 달한다. 알고보니 강남구민들의 산타클로스 #
공공택지가 많이 확보되면서 앞으로 공공주택을 싼 값에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틀이 갖춰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노정부 5년 동안 공급된 택지는 총 2억 682만㎡로 김대중 정부 5년의 1억2615만㎡에 비해 64% 증가했다. 주택건설에 소요되는 2~3년 기간의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은데다 주택을 구입할 현금이 많이 풀려 집값이 폭등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는 안정적인 주택정책이 가능하다는 관측 이다. 노무현은 12대 국정 과제 중 하나로 국민임대주택 50만호 및 수도권 5년 간 150만 호 건설을 내세운 바 있다. 이후 참여정부는 10.29 대책에서 4개 신도시를 통해 19만호를 추가하고, 장기임대주택 150만 호 공급을 추진, 8.31 대책 1주년 회의에서는 장기공공임대주택을 11만호 신규 비축하여 2017년까지 총 260만 호 장기임대주택을 공급하도록 하는 등 임기 초부터 지속적인 공급확대를 실시해 왔다. 이는 이명박 정부 5년 간의 주택공급보다 수십만 많은 규모이다.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정책과 관련하여 첨언하자면 고성수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에 따르면 "부동산시장은 일반재화와는 달리 경제학에서 볼 때 단기적으로 공급의 변화가 없는 움직임이 느린 시장이다", "공급의 확대를 통한 가격의 안정화를 정책 목표로 정한 경우에도 한정된 대통령 임기 중에는 그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현재 부동산시장의 침체는 많은 부분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억제 정책 효과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 반시장적인 정책을 포함하여 주택 가격 하락을 위해 지속적으로 전 방위적으로 다양한 대책을 쏟아 부었던 노무현 정부의 정책효과가 임기 중에는 큰 성과가 없었으나 다음 정권에 이르러 빛을 발하고 있다는 얘기다."라고 세금 감면 등 각종 규제 완화 조치가 주요 내용이었던 2008년 이후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18번의 부동산 정책과 3번의 세제조치가 주택 안정과 관련 없다 평한 바 있다. #
결국 노무현이 시작한 정책이 2~3년 시차를 두고 성과를 보이기 시작해 결국에는 임기 내에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 시킨 것이다. 국민임대주택 건설, 다가구매입임대 실시, 비축용 장기임대주택 건설, 임차가구 지원 등 맞춤형 주거복지정책에 대한 평가도 좋다.
또한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보고서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결과적으로 성공한 집값 안정화. 2007년 특히 재건축 시장과 중대형 시장의 안정세가 뚜렷해졌다.
2. 실거래가와 시세간의 격차를 최소화.
3. 부동산의 공공재로서의 특성을 강조.
4. 기득권층의 개발이익 독점을 해소. 종부세 등으로 소득계층간 형평성을 제고.
5. 저소득층, 무주택자 문제 해결에 주력.
이러한 긍정적 평가를 종합하면, 과정에서의 부작용은 존재하였으나 결과론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에 대한 평가가 있다. 박정희 당시의 경제성장은 과정에서의 부작용은 존재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한 어쨌든 경제는 성장하고 부동산은 커질수 밖에 없음에도 박정희는 세계적 추세에 비해 고성장을, 노무현은 세계적 추세에 비해 안정화를 해냈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이에 관해 김병준 전 정책실장은 "부동산도 오르긴 올랐는데 당시 유동성이 워낙 크다 보니까 우리가 힘들었습니다. 사실 순서로 따지면 OECD 중요한 국가들 중 25~26개 국가를 비교해보면 우리가 적게 오른 국가로써 3번째 4번째쯤 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지탄을 많이 받고 욕을 많이 먹었죠. 어쨌든 저희들이 책임져야 될 부분입니다. "고 한바있다.#
한편 전 한국은행 총재 박승은의 2007년 여름 한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성공했나"라는 질문에 "일단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봐야 한다."고 답하며 특히 참여정부의 종부세에 대하여 "종부세 도입은 노무현 정부가 잘했다. 땅부자에 대한 응징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다만 현재 종부세는 변칙이다. 재산세율을 높이는 것으로 전국민에게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역대 정권이 하려도 못한 것을 노무현 정부가 잘했다고 평가하고 싶다."고긍정적인 평가를 덧붙였다.
머니투데이가 24개 국내외 증권사 및 자산운용사를 비롯해 증권 유관기관, 증권업계 출입기자 등 총 2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증시를 움직이는 파워 10인에 있어서 노무현은 남다른 부동산 정책과 주식 사랑으로 시중 여유자금을 증시로 끌어오는데 결정적 할을 했다는 평으로 5위에 이름을 올리며 7명의 전문가로부터 "부동산시장의 안정을 강하게 드라이브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했다. http://m.mt.co.kr/renew/view.html?no=2007061316113378985&ca=enter&dt=, #
반면 집권과 동시에 투기꾼들을 잡겠다며 집값과의 전쟁을 선포한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에 대한 전반적인 과세 및 증세를 통한 조세개혁, 규제 정책 합리화를 추진[70] 함에도 불구하고 투기꾼들을 근절하지 못했고 미미하게나마 부동산 가격이 올랐으므로 실패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일례로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 정몽준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평한 바 있다.
이외에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보고서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실수요자 구매력 위축.
2. 공시가격 6억 이하의 다운계약서 성행.
3. 부동산 안정정책과 정부의 공급 확대 정채간의 모순.
4. 빈번한 후속대책.
5. 소득계층간 대립 및 갈등 구조 형성.
6. 실무의견 반영 미흡
부정적인 평가를 종합하면 지나치에 공공측면에만 정책 역량을 집중했고 시장논리에 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끌여들였으며 정책 신뢰도를 크게 제고하지 못해 부작용이 컸다는 평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특히 수도권의 집값의 경우 48.26% 폭등할 정도였다 '강남불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국민이 공공연한 투기 열풍에 휘말렸고 강남 집값은 일주일에 수천만원씩 매매 가격이 오르는 현상도 벌어졌다고 한다. 집 없는 서민들의 부담만 늘어난 셈. 이러한 부동산 폭등은 참여정부의 국정 지지도 하락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
양도세 중과 정책의 경우 부동산 투기 수요를 근본적으로 차단하지 못한다는 것이 경제학계의 중론이고, 필연적으로 조세전가를 일으켜 도리어 부동산 가격 폭등을 유래할 수도 있다고 한다. 참여정부 부동산 대책의 한계점은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자신이 공약한 분양가 상한제 등을 시장 논리 운운하며 거부한 것.
뉴타운과 기업특구등 개발 법안들을 통과 시켜 강북과 지방에 개발지들을 무분별하게 지정한 것
김진표와 이헌재등 경제 관료 출신(모피아)들을 대거 경제 중추에 활용한 것
참여정부는 대통령 자신이 공약한 분양원가 공개를 반 시장논리와 사회주의 운운하며 집권 후반기까지 거부했으며, 10배 남는 장사, 10배 밑지는 장사 참조[71]영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뉴타운 건설법과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 각종 지방 사업들을 벌여 공급 과잉을 초래했고, # 모피아 출신들이 내는 정책마다 꾸준히 구멍을 뚫어 주상복합아파트등을 규제에서 제외시키는 등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 당시 투기꾼들은 정부의 규제안이 곧 투기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라고 여겼을 정도. 이와 같은 모순적인 행보에 의해서 갈팡질팡 우왕좌왕으로 비춰졌고, 당신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수렴했다. 거기다 대통령은 임기 중 공공연히 부촌의 고유명사를 거론하며 규제를 거론했으니, 이는 해당 지역을 펌프해주는 격이었다. 집권 후반기에 와서야 종합적인 대책과 논란이 있던 정책들 정립한 것이고 그 이후엔 가격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부동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대표적 부동산 규제에는 DTI, LTV 제한 정책이는 2008년부터 닥친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에서 한국 부동산 시장이 붕괴하지 않게 일조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는 미국처럼 대출채권의 증권화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고 부동산 부채를 각 가계가 직접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있다.
또한 집값이 오를때마다 정부에서 나서서 집값을 잡겠다고 하는것도 하나의 화근이 되었다. 집값이 조정당하면 집주인들 당사자들의 집값이 떨어질것을 우려해서 집주인들이 집값을 높게 책정했기 때문이다. 즉 올리고서 조정당하면 크게 손해를 입지 않을것이라는 계산에서 이렇게 된것이다. 결국 정부는 집값을 잡지 못하였고 이렇게 올라간 집값을 떨어지지 않았다. 현재2016년에 들어와서는 떨어지는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이것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논리상 떨어진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급측에서 요구하는 가격은 부담스러운건 사실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단순히 부동산 폭등을 막지 못했다는 것으로 비판을 듣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분명 있으며 무엇보다 단기간에 이루어진 투기 열풍을 참여정부가 임기 내에 제지할 방법은 거의 전무했다.
규제정책의 성과는 오히려 퇴임 후인 2008년부터 나타나 부동산 가격이 다소 진정되는 효과가 있었으며, 이후 이명박 정부부터는 오히려 다시 규제를 풀어 주고 투기를 조장하는 정책으로 선회함으로써 가계부채 폭증과 같은 문제는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참여정부가 아니었어도 이 시기의 부동산 폭등이 일어나지 않았은 거란 보장은 없다. KBS에서 취재하여 제작하려다가 저지되었고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2016년 1월 29일에 방영한 대한민국 훈장 수여의 실태 보도내용에 의하면 이때 실패하였다고 인정한 8.31 부동산 대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훈장을 수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노무현 정부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려 하는 입장에서도 비판을 해야 하는 사안이다.
이렇게 올라간 집값을 잡을려고 추후 이명박정부에서는 재개발을 추진했지만 이역시도 투기꾼들을 불러오는 효과때문에 결국에는 재계발한 지역의 땅값이 오르게되는 현상을 맞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짒값이 오르게 되는 현상을 맞이했다. 곧, 빛을 지더라도 부동산을 사면 부동산의 가격이 올라감에 따라 빛을 값음과 동시에 많은 돈을 잡을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구매하는 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결국 이런 투기꾼들에 의해 집값이 올라가게 됐고 박근혜정부에 들어서서 일단 수요와 공급의 차이에 의해 집값이 떨어지고 금융권의 문턱이 높아짐과 동시에 금리하락을 맞이하게 되자 이런 투기꾼들역시 현재 빛을 값을 능력이 저하되어 전세로 내놓은 집을 월세로 바꾸는 현상으로 몰리고 있다. 금리가 떨어저서 전세에 대한 메리트는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대출을 받기 힘들어 짐에 따라 대출받아 다른 부동산에 투자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됐고 오히려 사놓은 부동산의 가격이 떨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서 월세로 돌아서게 된것이다. 결국에는 집없는 서민들이 타격을 입은 셈이다.
이런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지방 - 수도권 - 서울간, 서울 안에서도 강남 - 기타지역간의 차별의식이 본격적으로 배태되기 시작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91년도 이래 부동산 가격이 안정세에 접어든 것을 보고 정부가 부동산 개혁에 소홀히 한 탓이 크다. 관치경제 이래 내려온 부동산 시장의 효율성, 투명성, 합리성 등의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려고 하니 폭주할 수 밖에 없는 것. 또 부동산 가격 인상 자체의 원인은 참여정부의 실책이라기 보다는 세계 경제 상황 그리고 전 정부에서 IMF를 타개하는 일환으로 부동산 시장을 과열시키고 규제를 풀어버린 것으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또 그걸 여과없이 표현하다보니 임기 중 유난히 언행에 대한 시시비비가 잦았던 대통령이기도 하다. 언행 문제가 터질 때마다 대통령 본인과 지지자들의 변은 항상 '전문은 그렇지 않은데 문제가 될법한 발언만 뚝 잘라놓고 내보낸 언론이 문제다'라는 투였는데, 대통령 본인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 중론.[72]
이를테면 문제의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발언의 경우, 2003년 518기념식때 518묘역 입구에서 벌어진 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5.18 행사추진위 간부들의 사과 및 시위학생 선처를 부탁하는 자리였다. 당연히 분위기는 무거웠고 격없이 장난식으로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노사모라는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 생길만큼 국민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 중 하나였는데 취임한지 3개월도 안 돼서 굳이 그런 식의 워딩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을 뽑아준 지지자들에 대한 사실상의 능멸이라고도 할 수 있다.[73]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 (집단행동 등)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박하자면, 지지자들을 능멸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으며, 책임감 없이 힘들다는 투로 한 발언은 아니였다. 이 발언도 언론이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부분만 쏙 잘라 악의적으로 보도 했으며 이는 분명 부당하다. 한총련의 5·18 시위를 비롯한 각종 집단행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책임 있는 태도를 아쉬워하는 심경의 일단을 피력한 말이었다. 이 발언은 그러나 언론에 반복적으로 다뤄지면서 “못해먹겠다”는 구절만 남았다. “국민 협박하는 대통령” “대통령 입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비속어” “취임 몇 달이 지났다고 벌써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소리가 나오나” “스스로 임기 중 사퇴 가능성을 내비치며 레임덕을 자초” 등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이 외에도 다른 과격한 발언이 있다면, "그 놈의 헌법"[74] 발언이나, "남북 대화만 잘 되면 깽판 쳐도 좋다."[75] 발언등으로 두고두고 까이게 되었다. 기자실 통폐합에 앞서 대못질 해버리겠다고 한 것이라든지, 뇌물을 받은 형을 옹호하기 위해 남상국 사장에게 '촌부[76][77]에게 고개 숙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거나.[78]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군사정권 시절 이미 판결이 확정된 불리한 상황에서의 인권변호인 일을 했기에 거칠게 말하거나 비꼬면서 논리를 반박하는 태도가 몸에 익어 그게 잘 버려지지 않은 것 같다. 대통령으로서는 그러면 안되는데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며 자서전에서 반성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 외에도 호남 의원들과는 정치를 못 해먹겠다고 한 적 역시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보면 이 날 당시 전남 나주시에서 열린 '광주 전남 주요 인사 오찬 간담회'에서 “‘무조건 호남 뭉치자, 뭉치자’ 하는 갑갑한 호남 출신 국회의원들과는 정치 못해 먹겠다”라는 발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무현 입장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일단 뭉치고 보자는 말만 하니 그걸 보고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다 해도 정치를 같이 못 해먹겠다라는 식의 표현이 적절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것 외에도 2006년 12월 21일 1시간 가량 연설을 했던 민주평통 자문회의 연설에서는[79] 얼차려를 받는 것을 '뺑뺑이를 돌린다'고 표현을 한다거나, "옛날에 국방장관들이 나와서 떠들어쌌는데"[80]라고 한다거나, "미국 응딩이 뒤에서 숨어서 형님 빽만 믿겠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했다.[81] 특히 응딩이의 경우에는,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한 국가의 원수나 되는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미국 응딩이라는 저질스러운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몰상식한 행동이었다고 봐야 한다. 노무현이 자살을 하고 나서부터는 저 모습을 보고 노무현이 인간적이라고 미화를 하는 이들이 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노무현은 엄연히 한 나라의 원수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인간적인 것과 저질스러운 발언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실제로 교과서에서도 노무현의 이러한 발언을 가지고 권위주의를 타파했다는 식으로 말도 안되게 포장을 해 놓은 경우가 있는데, 엄연히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이런 행동 때문에 만들 필요가 없는 적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또한,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 방문 중 일본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志位 和夫) 위원장을 만나 회담을 가졌을 때,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라고 발언했다.(#) 원래 이 문구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달성 측면에서 볼 때 공산당 역시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이 되어야 한다."라는 의도였으나, 대한민국의 특징성 때문에 공산주의를 북한, 주적으로 인식하는 국민에게는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2004년 MBC 시사매거진 2580 500회 특집 대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을 탄압하는 법으로 많이 쓰여 왔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권 탄압이 있었고, 그래서 이것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다"라고 발언했는데, 그로 인해 안그래도 팽팽하게 맞서던 찬반론자들이 상당수 존재하던 상황에서 이러한 발언을 하여 상당한 논쟁을 불러왔다.
김구를 '실패한 지도자' 라고 표현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각계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특별히 김구를 비난하는 의도는 없었던 걸로 보이지만, 일본에서 '일본국민과의 대화'(TBS, 도쿄방송) 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온 발언인데, 일본 여자 방청객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라는 질문에, 노무현은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 라고 발언했다. 해석에 따라 김구를 더이상 존경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몰아가기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문제는 국내도 제3국도 아닌 일본에서, 그것도 현충일에 해당 발언을 했다는 점이다. 그냥 링컨이라고만 했으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82]
일본에서 자행한 논란의 발언이 몇가지 있었는데, 2004년 7월 한일 정상회담 당시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라며 부르는 호칭인 다케시마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다케시마라고 말한 것을 통역사가 독도라고 바꿔 말했다. 독도문제에 대해서 한국정부의 입장은 재론의 여지가 없이 한국땅이다 라고 말했지만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독도의 제대로된 명칭도 아닌 분쟁 당사자가 주장하는 다케시마라고 부른 것은 옳다고 볼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사 중 사망하였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죄에 대한 수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지만, 임기 중 친인척이 박연차에게 금품을 받은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이 적절한 처신이었는가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박연차에게 15억을 사저신축비로 빌렸으며[83] 차용증에 명시된 기일에 채무를 변제하지 않았다. 정치인이 사업가에게 돈을 빌리고 변제하지 않는 것이 뇌물죄로 유죄 판결을 받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타당한 일인가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권양숙 여사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에 박연차에게 100만달러+3억원을 요구하였고 이를 정상문을 통해 받았다. 수사 과정에서 차용증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차용증이 있더라도 대통령 임기 중에 사업가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빌리는 일이 타당한가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노정연은 권양숙 여사가 건넨 13억원을 불법적인 환치기를 통해 송금하였으며, 이에 대해 노정연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권양숙 여사는 입건 유예되었다. 노정연은 13억원은 어머니가 보내준 돈이라고 밝혔으며, 권양숙 여사는 이 13억원의 출처에 대해 "(노 전 대통령) 재임 때 청와대를 방문한 지인들과 퇴임 이후 봉하마을 사저로 찾아 온 지인들이 준 돈을 모아서 보관해 오던 것”, "‘지인’에 대해서는 “인간적 정리상 구체적 신원을 밝힐 수 없다” 라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개된 재산 규모를 감안할 때 13억원은 상당한 규모[84] 이기 때문에, 재임 중 지인에게 돈을 받았고 그게 누구인지 공개할 수 없다는 태도에 대해 어이없어하는 시각이 있다.
노무현이 자살을 택한것에 대해서는 개개인마다 견해가 매우 달라서 지속적인 논쟁거리로 비화되었다. 변호하는 견해와 부정하는 견해로 나뉘어져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진정으로 부패한 자는 부패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는 개혁운동가였다. 범죄자들은 범죄를 가지고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ㅡ런던 <더 타임스> 논평 中
정치보복이 담긴 표적수사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견해가 있다. 자살이 근본적으로는 올바르지 않지만, 표적 수사로 인한 개인의 억울함과 주변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고, 근본적으로는 표적 수사와 정치 보복이 문제라는 견해이다. [85]
안희정은 노무현이 죽음을 택한 원인은 이명박 정부와 검찰의 정치 보복, 표적 수사가 원인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한편으로는 언론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다.
일반적으로 자살이 부정적이기는 해도, '극한 상황에 몰린 상황에서 무조건 버티라고 말하는것은 의지드립과 상충될 수 있으며, 만일 그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사람들이 다시 돌아보고 노무현을 안타까워 했을 리도 없고, 주변인들도 계속해서 조리돌림과 망신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라는 견해이다.
실제의 유무죄와 관계없이 수사와 이후 처벌 과정에서 노무현 개인, 가족과 그와 연관된 여러 인물들의 평판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내세웠던 여러 가치들 또한 모욕당하고 힘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다. '친노폐족'이라는 말이 있었듯이 노무현과 그가 상징하던 가치를 지지했던 측근들과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의 선택은 미래가 사라진 듯한 개인의 고통, 가족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공적인 가치까지 염두에 둔 복합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의 속마음을 다 알기는 어려우나, 비리를 저지르고 부끄러워 자살했다는 식의 평가가 일부분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친인척과 측근 비리가 노무현의 자살에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좋게 볼 수 없다는 평이 있다. 가장이 측근도 아니고 혈육을 나눈 가족들까지 비리에 연루되어있다는 사실을 임기 내내, 그리고 퇴임 이후에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상당히 큰 오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고 의문점이 든다.[86] 심리적인 요인을 계산한 한 블로거가 자의적인 결론을 내린 자살의 동기는 노무현의 딜레마로서, 어떠한 선택지도 결국 자기 자신의 도덕적 파멸을 불러온다라는 것. 이를 인지해 헌법적 가치에 불협조적인 행동을 저지른 가해자들이 절차를 통해 처벌 받아야 하는 상황을 자살로 인해 모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게 아닌가라고 의견.
도덕과 청렴함을 중요시하는 정치인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될 경우, 자신은 법적으로 무죄를 증명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가족을 팔아야 하는 과정은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가족을 기꺼히 팔고자 할까요? 그렇다고 자신이 평생동안 지켜온 신념을 배반하고, 자신의 명예를 버릴 수 있을까요?
-블로그에서 발췌-
특히 노무현은 최고 통치권자라는, 국민을 대표했었던 인물로서, 이런 사례를 남겨 대한민국의 대외적 이미지 실추를 불러왔다는 비판도 피하기 힘들다는 견해도 있다. 세계 역사에서 국가 수장이 자살한 경우는 많지 않으며, 퇴임한 대통령중 불법혐의로 인해 자살한 인물은 더욱 희귀하다.[87] 참여정부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문재인의 증언에 따르면, 노무현은 아내 권양숙이 박연차 게이트에 직접적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으며#, 가까운 측근들의 말을 빌려보면, 사망 전날 밤에 고성과 욕설, 심지어 집기까지 던지는 등 아내와 말다툼이 거칠었다고 증언한다.# 자살과 그 의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국민이 실망한 것은 청렴과 도덕성을 누누히 국민들 앞에서 강조하고 주장했으며 당당한 어투로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대통령 임기 당시의 공약과 개인의 모토가 해당 비리사태로 인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는 진실을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이다. 수사를 통해 본인을 제외한 측근과 친척들이 비리에 연루되었음에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과 그 일에 격한 반응을 보였다는 건, 국민 입장에선 개인의 무능력함과 무책임함이 드러난 일이다. 또한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이었음을 감안하면, 더한 질책은 당연한 것. 다시 언급하자면, 대통령이 수사 과정에서의 압박감과 가족과 개인의 신념를 지켜야 한다는 등의 복합적 심증이 작용함에 따라 자진 투신을 행한 것과 이런 불필요한 상황을 만든 1차적 책임자인 인물을 좋게 볼 수는 없다는 관점이다.
모든 요소들을 제외하더라도, 그리고 수사의 진행 과정에서의 옳고 그름의 문제와 진영 논리를 초월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건 대단히 무책임한 행동이다. 그 자신의 선택엔 비단 개인 뿐 아니라 그를 따르고 사랑했던 이들의 몫까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자살이라는 선택을 정당화시켜주진 못한다는 것.
또한, 이 영상[88]의 3분 20초 즈음에서 노무현 본인이 분명 자신의 입으로 "어려울 때 견디는 정치인이라야 진짜 정치인입니다."라는 발언을 한다. 하지만 노무현 본인은 검찰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자신의 말을 결과적으로 지키지 않았다. 비록 저 말이 대통령 퇴임 후에 한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노무현 본인이 어려울 때 시련을 견디지 않고 목숨을 끊음으로서, 언행불일치를 보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외에도 이유를 불문하고 자살이라는 선택을 한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무현의 자살은 자칫 자살이 대단히 낭만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낳고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수도를 충청남도 연기군 일대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고[89],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에 따라 '수도이전'을 헌법개정에 준하는 절차(국민투표)를 거치지 않고 일반법령으로 옮기는 것은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한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가 우리나라의 헌법 이념에 없는 불문헌법, 즉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를 들어 국회에서 통과된법안을 위헌결정한 것은법실증주의에 의거하여 성문헌법만을 인정해오던 기존의 입장을 번복한 행위이며, 행정부와 입법부의권한에 지나치게 관여한,정치적인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관습헌법의 인정은 악습, 폐습과 같은 사라져야 할 특권적 질서를 옹호하는 논리로 전개될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수많은 헌법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결정이다.[90]
위헌결정에 따라 행정수도 이전법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으로 변경되었고, 그 결과 충남 연기, 조치원 일대가 세종시로 변경되어 행정복합도시로 건설 진행 중에 있다. 다만 원안과는 달리 입법부와 청와대가 옮기지 못하고, 중앙부처 중 9개 부처만 옮기기로 결정되면서 행정업무 자체의 효율 악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현재 대 국회 보고등의 문제와 서울의 각 부서간 업무협의 등의문제로 계속해서 출장을 가야하는 세종시 공무원들의 피로로 인한 업무효율저하는 현재 세종시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추진 당시에도 이미 많은 우려를 샀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효율적인 개선방안을 찾지 못한 것은 분명히 비판받을만한 일이다. 그리고 행정도시 토지 수용시 풀린 보상금을 노린 부동산 투기등을 불러왔다는 점은 행정도시를 반대하는 쪽에서 많이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서울집중화로 이루어진 서울공화국현상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이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없다는 점은 대부분의 학자나 실무자들도 동의하는 점이다. 참여정부는 이의 해결을 위해 행정수도를 포함한 주요 공기업을 지방으로 이전시키는 행복도시 정책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행정신도시를 포함한 행복도시 프로젝트가 정착이 되어 수도권 집중을완화시킬 수 있을지, 별 효과없는 또 하나의 건축, 토목사업으로 그칠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 파병은 한미 FTA와 함께 소위 자신의 지지세력들의 지지를 잃은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국민의 정부 말기와 참여정부 중기는 한국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반미여론이 거세던 때였고,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역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도 그걸 이용했다. 우선 파병 그 자체에 대한 찬반의 근거는 각각 다음과 같다.
보수 세력과 일부 중도 개혁 세력을 주축으로 한 찬성 측의 근거는 한미동맹 체제 강화, 세계 패권을 주도하는 초강대국이자 우방인 미국의 파병 제안을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주를 이뤘고, 이에 각을 세운 진보적 노선의 반대 측의 근거는 정치이념주의에 입각한 반미주의와 함께 더러운 침략 전쟁에 힘을 보태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명분론[91]과 무고한 한국군의 희생 등을 들었다.
국내 외 반전 여론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국회가 파병안을 통과시킨 지 한달여 만에 673명의 비전투병(서희 부대 100명, 제마 부대 573명)을 파병했다. 이라크 치안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던 미국은 다시 한국에게 2차 파병을 요구하였고, 한층 강화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긴 고민없이 파병을 결정, 자이툰 부대의 파병을 결정했다. 다만 이 당시엔 치안 악화 문제로 파병지를 고심하던 탓에 늦어졌다.
그러나 이 파병 문제에서 그나마 괜찮게 평가받는 점은, 파병지 현지 주민들의 민심을 잃지 않는데 노력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자이툰 부대에는 특전사로 구성된 2개 대대와 특공대에서 차출한 1개 대대, 해병대에서 차출한 1개중대, 장갑차중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이툰 부대는 전투병력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투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또한 자이툰 부대 장병 도시 재건과 현지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적극적으로 나서 침략을 도운 국가라는 인상을 남기지 않는데 크게 기여했다.[92] 다만 2차 파병이 결정되자마자 벌어진 김선일 피랍 사태에서 우왕좌왕하며 테러범들에게 협상 내내 끌려다니던 모습은 비판받았다.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보단 나으...려나?
한편 미국의 부시 행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NATO의 협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계속 밍기적밍기적 거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소극적인 이미지를 보였던 탓에 한국의 대규모 파병이 결정났지만 미국은 시큰둥했다. 더욱이 파병 출정식은 좌파성향의 극렬반대시위 문제로 대내-대외 이미지 (특히 미국)에 부정적인 문제가 더 컸다.[93] 게다가 한국군의 임무가 제대로 치안유지 작전수행을 미군 및 NATO군과 협력하는 적극적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에 파병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기도 했다. (앞 문단과 함께 읽고 해석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기에 이라크 내에서의 한국의 이미지가 그렇게 나쁘지 않게 되었지만 미국에게는 다소의 신뢰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파병을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참전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이 현지무장세력에 의한 피해를 전혀 입지 않는 쾌거로 나타났다. 만약 당시 적극적으로 친미를 하는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미국이 요구했던대로 모술에 파견하여 한국군 사상자가 수백명대는 넘었을 수도 있다. 모술은 사담 후세인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으며 수니파의 비율이 매우 높아서 2017년 현재 IS의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단순히 한미관계만 고려해서 적극적으로 파병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헌정 이래 가장 언론과 대립이 심했던 대통령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조선일보와는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엄청난 악연에 시달려 대통령 된 이후에도 내내 긴장과 대립 관계를 유지했다. 참고로 타이틀인 언론과의 전쟁은 당시 노무현 상임고문이 언론사에 대한 세금조사도 불사하는 언론과의 싸움도 불사해야한다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원래 언론사도 민간 기업체이니 예외없이 세무조사를 받아야 한다.
사실 노무현이 가진 언론에 대한 저항감은 꽤 뿌리 깊은데, 그 시작은 한창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던 당시 부터였다. 청문회 스타로 알려진 직후에는 조선일보가 유일하게 당시 노무현 의원을 대권주자로 까지 언급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여당과 대립각이 심해지자 조선일보는 정치인 노무현을 소개하는 우종창 기자의 기사에서 그의 취미생활인 요트 운전을 언급[94] 했고 부산 요트클럽회장이라는 팩트에 맞지 않은 정보를 기사에 실었으며 전체적으로 그 기사자체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라는 추측 루머 서술로서 정확성을 가진 기사가 아니었다. 이에 노무현은 언론과 척지면 좋을게 없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95] 조선일보에 소송을 걸었고 1심에서 승소했다. 어찌됐건 유구하게 이어질 언론과의 전쟁사에서 그 첫번째 전투는 승리로 장식한 셈이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정치 인생 내내 언론과의 전쟁에 시달리게 된다. 사실 이런 추측성 기사에는 벌을 해야 한다. 물론 증거가 있고 공공의 이익이 있다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특히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는 조선일보를 두고 수구세력 대공세의 선봉, 독재권력과의 야합과 특혜를 통해 쌓아올린 기득권 세력이라 강력히 성토했는데, 여기서부터 보수언론과는 개혁될 때 까지 포기할 수 없는 대립구도가 형성되었으며 이때 손석희 교수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강한 횡포에 대해 '노무현 죽이기'라며 방송을 내보낸 적이 있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언론개혁을 외치는 노무현에 대한 조선일보 등의 '노무현 죽이기'시도는 있었으며 꽤나 원색적으로 진행되었기에 맨 아래의 관련 서적과 더불어 이렇게 당시에도 타 방송에서 다룰 정도였다. 영상에서의 내용은 조선일보가 비판은 커녕 아예 전혀 다뤄주지조차 않는 보복에 대해서 다루었다. 지명도가 중요한 정치인이나 연예인은 안티팬보다 무서운 것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잊혀지는 것이다.
이에따라 유독 참여정부 당시에는 오보가 많았고 대통령 시절에는 1년 차에만 무려 247건의 언론 중재 신청을 했는데, 이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전정권을 통틀어 이루어진 언론 중재요청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다.[96] 한편 임기 말에는 기자실을 통폐합해 공무원과 기자들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 이를 미국식 브리핑으로 대체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실과 담당자 간의 유착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하였으나, 앞서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담합하는 구조에 대해 지시하라."라는 거친 발언을 한 것이 알려져 악감정을 사기도 했다. 당시 언론에서 문제삼은 부분은 청와대가 주장하던것처럼 기자실폐쇄가 아니었다. 공무원들에 대한 언론접촉금지령이 문제였고, 이는 노무현이 스스로 주장하던 발로 뛰어서 취재하라는 명분이 기만적이었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말할것도 없이 국민의 알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처사이다.[97][98]
물론 보수 언론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단점인 거친 언행을 문제 삼아 사사건건 기사화시켰고 후보시절에는 그를 태운 차량이 딱찌를 떼 벌금을 물었다는 것까지 크게 보도했다. 대통령 시절에는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노무현은 내로라하는 보수 논객들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개중엔 노무현은 정신병자라는 도를 지나친 원색적인 인격모독까지 포함되어 있었다.[99] 심지어 조선일보 등은 바다이야기 사건에 연루된 청와대 전 행정권이 영부인 권양숙의 20촌이라는 점을 문제삼는 병크를 비롯이 때문에 한동안 인터넷에서는 유명인사와 먼 촌수관계인 사람들의 '가까운 친척' 드립이 흥했다 무리수를 동원해가며 노무현을 깎아내리는데 총력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조중동 등의 언론은 노골적인 기자실 통폐합과 관련해서는 '노무현 언론 탄압 백서'를 발간한 뒤, 국제 언론인 협회(IPI)에 기자실 통페합을 철회해달라는 요구가 담긴 서한을 보냈으며 IPI는 노무현 정부에게 취재봉쇄 철회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다. 사망 직전에는 피아제 시계와 같은 자극적인 소재 얘기와[100] '겉으로는 착한척 하면서 뒤가 이렇게나 구렸다.' 식의 칼럼을 통해 노무현을 공격했고, 방송은 아예 대놓고 노무현이 서울로 조사받으러 가는 차량에 헬리캠을 붙여 생중계하기도 했다. 전두환, 노태우 외 전직대통령들이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는 편이다. 우선 언론에 대해서는, 국민 대다수 모두 그 병폐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펜을 쥔 채로 필요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는데다 각종 기득권과 결탁한 부정이 만연하며 정치인들과의 사적만남을 통해 '말 잘들으면 잘 써주고 안 들으면 조진다.'식의 폭력적인 실력행사까지 일삼아 온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처럼 한쪽 성향의 언론이 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보수언론의 권력은 가히 무소불위라 해도 무방했다. 때문에 노무현처럼 주류에 반발하는 흐름을 견지한 정치인은 필연적으로 부딫힐 수 밖에 없었고 노무현이 언론에 가진 피해의식도 일견 이해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또한 다소 과격하긴 해도 언론을 향해 시도한 노무현의 견제 시도는 지지자들의 표현처럼 언론개혁으로 평가받을 여지도 온존한다.
하지만 듣기 싫은 소리 하는 언론을 틀어막는 것이 과연 개혁적인 것인가에 대한 희의 역시 든다. 보수 정권에서의 진보 언론탄압은 반민주적인 파쇼적 행태로 규정하면서 진보 정권에서의 보수 언론을 탄압하는 것은 개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중잣대의 전형이다. 경박한 언행을 사사건건 보도한 부분에 대해서는 노무현 본인과 지지자들은 항상 짜깁기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 언행이 천박했던 것 또한 맞지 않는가? 같은 개혁세력의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점잖고 신사적인 언행을 견지해 언행에 관한 시시비비는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꼭 반박해야 할 일이 생기면 가능한 정제된 언어로 특유의 논리력과 언변으로 상대를 완벽하게 데꿀멍시켰다. 즉, 진보 개혁세력이라 하여 피해의식과 투쟁심리를 기본으로 깐 상태에서 막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좋은 예시를 바로 전임 대통령이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과격한 대립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정책실행에 있어서의 실책적인 부분이다. 또한 노무현은 최초로 공무원을 댓글부대로 동원한 바가 있기도 하다.기사 국정홍보처에서 내려보낸 공문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해가며 정권 차원에서 언론과의 전쟁을 위해 공무원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문제의 여지는 남아있다.
보수 언론을 무조건 악의 축으로 몰아간 태도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치인생 내내 소위 조중동을 친일-독재-수구의 이미지로 엮어 공세를 펼쳤는데, 사실 그 세 신문사가 각각 일제와 독재정권에 협력한 흑역사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반대로 해당주체들과 싸웠던 신문들이기도 하다.[101] 시대에 따라 가변성을 띄어온 주체에 부정적인 단편을 끄집어내 그 것을 곧 정체성으로 귀결시킨 시도는 해당 언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까운 일. 노무현 스스로가 언론과의 관계를 틀어지게 한 장본인이기도 한 것이다.[102]
정리하자면 노무현이 언론을 향해 쏟아낸 일련의 견제 시도는 지도자에게도 예외없는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능과 언론의 발호에 제동을 걸어보려는 개혁의지가 복잡하게 결부되어 일어난 일들이다. 즉 힘겨루기이기도 하면서 정의의 문제였다. 이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하지 않고 진영논리에 휩쓸려 '언론을 짓밟으려 한 빅브라더식 통치'나 '언론의 핍박에 저항한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순교'로 규정하는 것은 전자 후자 모두에 문제가 있으며, 민주 사회에서 중요한 견제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언론이 그 기능을 잘 수행하면서 그 힘에 취해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개인 스스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지,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비판세력을 어떻게 다뤄야할 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관련 서적으로 <노무현 죽이기>, <노무현 살리기>와 <야만의 언론>,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등이 있으며 <슬기로운 해법>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
보수 언론과는 완전히 척을 졌었지만 진보신문과도 항상 관계가 원만했던건 아니었다. 기자실 통폐합 때 진보신문인 한겨례과 경향신문이 크게 반발했으며, 오마이 뉴스와 미디어오늘도 이에 동참했고, 심지어 구 독재정권과 결부시키는 묘사도 나타났다. 참조,참조,"노무현 시대는 자유민주주의 위기 상황".
또한 이들 신문은 비리수사와 관련하여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사설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참조,참조,참조 심지어 한겨레21의 경우 사망 직전까지의 내용과 사망 후 내용이 같은 주간지 맞나?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판이하게 다르다. 1000호 특집 특대호에서 알 수 있다.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던 대북 유화기조는 이후에도 이어받아 재개되었으며, 이전의 정책을 한층 강화시키며 여러 발전적인 성과와 민간적인 교류도 지속, 향상되었다. 지난 정권에서는 연평해전으로 막판에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지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정작 참여정부에서는 다른 정부들에 비해 도발 횟수가 확연히 줄어드는 효과를 보았다. 자세한 도발 일람은 북한의 대남 도발사 참조. 한편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며 10.4 남북 공동 선언을 올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의 한계점인 불투명한 원조금 지출 내역 및 핵무기 개발 원조 등까지 답습하였고 대북 안보관 또한 지적받기도 했다. 남북정상회담도 임기 막판의 갑작스러운 진행으로 임기 후반의 지지율을 겨냥한 포퓰리즘성 정치행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다만 직전의 김대중 정권이 북한에 유화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것과 달리 노무현 정권의 경우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2006년 북핵 사태 당시의 청와대 발표 전문 게다가 노무현 본인이 직접 "더 이상 과거처럼 북한이 어떤 일을 해도 포용하는 것은 어렵다."라는 발언까지 했으나, 2007년의 남북정상회담 때는 북한 방명록에 인민 주권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등의 돌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103] 사실 이러한 발언과 별개로 행동과 핵심적인 대북정책은 김대중 행정부의 햇볕정책의 맹목적인 대북감싸기 행보를 지속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김대중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햇볕정책이라는 대북유화정책 자체가 사실상의 평화구걸 혹은 조공이라는 원색적 비난이 사실이게끔 하는 정책행보는 가장 큰 문제였다.
2016년 2월 13일 SBS에서 보도한 북한에게 받을 차관이 총 3조 원[104]이라고 밝혔다. 이는 건축(1998~2006년), 쌀(2002~2007년), 의류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매년 상환을 독촉하는 문서를 보냈지만 무시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은 금액의 0.1%에 해당하는 아연을 갚았다. 당시 애초에 차관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묶는다는 전형적인 독일의 동방정책 개념을 북한이라는 존재가 전혀 동독과 다르다는 현실적 근거와 사실을 부정한채 포퓰리즘적인 대북유화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고 그 결과는 결국 노무현 행정부와 그것을 제언한 전문가들이 완벽하게 틀렸다는 사실을 보여줬던 셈이다. 당장의 개성공단 문제조차도 리스크가 위험하다는 경고들을 하나같이 무시하고 북한 지역에 생산설비를 지어줌으로서 지속되던 리스크를 결국 2016년 박근혜 행정부 때 개성공단 폐쇄와 갈등이라는 조치상황에서 리스크를 크게 터뜨리는 작용도 하였다.
2016년 2월 19일 MBC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황교안 국무총리가 여야 국회의원에게 받은 질문의 답변 중 북한이 개성공단의 수익금을 미사일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냐는 질문에 개성공단의 수익금을 미사일 개발에 쓴 사실을 참여정부 때도 알고 있었지만 묵인해 온 것이라고 답변했다.
노무현 사후 유출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서 NLL과 관련하여 북한에 대한 저자세 외교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대화록 논란을 주도했던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은 훗날 포기 발언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황우석 사건에서의 태도가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2005년 11월 2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PD수첩이 황당한 취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협박과 위협도 한다고 한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PD수첩의 줄기세포에 진위에 대한 취재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했으며, 이후 줄기세포가 가짜로 판명된 후에도 "자, 이걸로 정리를 하자."라는 말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비판이 있다. #1 이후 2006년 12월 28일에는 황우석 사건을 통해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같은 해 1월에 물러난 박기영 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으로 발탁되었는데, "박 전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을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라고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2
노무현은 60년 김해 진영중학교 2학년 재학중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 김지태가 설립한 부일장학회 시험에 합격해 1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상고에 입학해서도 동문회장인 김지태가 교내에 만든 '백양장학회'에서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78년에는 김지태가 설립한 삼화그룹 고문 변호사로 일했으며 자신의 자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 과정을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나는 장학금만 바라보고 부산상고에 입학해 김지태 선생의 후배가 되었다"면서 "나의 오늘은 그 분(김지태)이 디딤돌을 놓아준 셈"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 또한 1984년엔 김지태 회장의 유족들이 부탁한 117억원 짜리 상속세 소송을 맡아 전액을 취소 시키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바 있으며 그는 착수금 2000만원, 승소 사례금 4000만원을 포함 총 6000만원을 김지태 유족으로 부터 받았다고 한다. # 정수장학회의 논란이 한창이던 2012년 10월 22일, 이정현 새누리당 공보단장은 노무현과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원래 명칭)의 원소유자인 김지태와의 이와 같은 인연을 들어 논란을 촉발 시켰다. 이정현은 "김지태씨는 친일 부정축재 의혹이 있는데, 민주당이 언제부터 그런 의혹이 있는 사람들의 대변자가 됐냐"라고 말했다. # 그러나 이 발언을 두고 같은날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이정현의 발언을 비판하며 "민주당이 '왜 강압과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재산을 강탈하고 그 위에서 온갖 혜택을 누렸냐'고 묻자 느닷없이 새누리당 이 단장이 '너도 한패냐'고 윽박지르고 나섰다"라고 말했다. #
2006년 11월 한일정상회담 당시, 노무현은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부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전격 제의했다고 한다. 노무현의 이 같은 언급은 동해라는 이름을 원하는 한국과 일본해라는 이름을 원하는 두 나라간의 분쟁을 없애기 위해 아예 '평화의 바다'로 표기하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발상이 나오게 된 계기는, 2007년 1월 8일 세계일보의 보도와 이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노무현은 2006년 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에게 동해 명칭 등을 둘러싼 양국 간 갈등의 해결책으로 “양국 간 발전적 관계를 생각한다면 동해나 일본해보다 ‘평화의 바다’ 같은 새로운 명칭이 좋을 것 같다’는 발언을 했다.”고 정부 고위 소식통이 밝혔다.
2. 그러나 노무현의 이러한 명칭 변경 제의에 대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를 즉석에서 거부했다고 일본의 `지지통신’이 8일 보도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일 두 나라 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분쟁을 줄이기 위해 노무현은 동해를 아예 평화의 바다라고 부르자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이러한 의도와 달리 해당 발언이 알려지면서 정치권은 물론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발언의 진의와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크게 확산되었다. 실제로, 평화의 바다 제안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가 전체 응답자의 66.5%, 곧 거의 3분의 2에 달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이 당시 일부 한국 언론에서는 노무현이 "1990년대 초부터 진행해 온 독도에 관한 명칭 변경 노력을 독자적으로 철회하거나,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일본에 양보하려는 것이 아닌가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한국의 최대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논평을 통해 "노 대통령의 발언은 역사적으로 동해 표기가 옳다는 정부의 일관된 입장을 훼손할 수 있다"면서, 동해의 상징성과 "독도 문제에 대한 국민의 생각을 무시한 무책임한 행동"[105] 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사이버 민간외교사절단인 '반크' 등 시민단체들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동해' 이름 되찾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동해 표기를 사실상 포기한 것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경솔하고 부적절한 발언" 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파문이 확산되어 나가자 사태에 대한 해명을 하기 위해 한국 외교통상부는 브리핑을 통해 동해의 단독 표기가 바람직하다는 정부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추가기사1
추가기사2
추가기사3
첫댓글 노통 좋아하지만 재임시절 시민사회,노조 등한시하면서 경제정책 우클릭한거는 진짜 실책이었죠. 그것 때문에 지지층 엄청 떨어졌고, 심지어 유시민도 노통이 노사문제에 소극적이었다는거 인정할 정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