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처럼. 소처럼...
부처님 시대나 남방불교 국가에서는 코끼리를 성자에 비견한다.
경전에도 코끼리 비유가 적지 않다. 묵묵히 진심을 다해 제 길을 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을 ‘철저하게‘라고 한다.
이 ’철저‘라는 단어는 코끼리가 냇물을 건널 때 냇물 바닥을 딛고 건너는 데서 연유한 말이다.
선사들은 제자들에게 수행도 이런 코끼리의 캐릭터처럼 실천한 것을 권유한다.
그런데 북방불교에서는 선사의 이상형이나 수행자의 모델을 소에 비유한다.
’우행호시‘라고 하는데, 걸음은 서 걸음처럼 신중하게 느릿느릿 걷고, 정신은 호랑이 눈빛처럼 번득인다는 뜻이다.
불교 경전에는 안 나오지만, 필자는 수행자의 모습이나 보통 사람의 삶을 낙타에 그려보고 싶다.
우연히 어느 지인으로부터 낙타가 달린 열쇠고리를 선물 받았다.
가끔 필자는 ’낙타’라는 존재의 캐릭터를 염두에 두어 선물이 반가웠다.
낙타는 3일간 물을 마시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다. 등에 있는 혹은 물주머리가 아니고 지방덩어리인데, 사막을 통과할 때 혹 속의 지방을 분해시켜 필요한 수분을 보급받기 때문이다. 1회에 57L의 물을 마신 뒤에 사막을 건너면서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도 며칠을 견디는 셈이다. 이런 낙타의 캐릭터 때문에 고대로부터 근자에 이르기까지 대상무역에 이용되고, 죽은 뒤에는 식용으로, 털은 옷감으로 사용된다. 낙타의 삶과 죽음은 둘째로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낙타가 며칠간 물을 먹지 않을 만큼의 생체리듬으로 험한 사막을 묵묵히 걷는다는 점이다. 함부로 달리지 않고 쓸데없이 헐떡이지 않으며 제 페이스대로 묵묵히 간다. 그러면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불만하지 않고, 무던히 참아낸다.
이 얼마나 멋진 동물인가? 바로 이런 삶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본다.
‘삶(고난의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널 때, 낙타가 육신의 영양분을 비축했다가 조금씩 활용하며 묵묵히 제 길을 가듯 인간도 정신적 영양분을 비축해 두었다가 힘겨운 일이 닥칠 때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절대 함부로 날뛰거나 자만하지 않고...
조계종 스님들은 법계 풍수가 있다. 5급 (행자에서 사미계 받음)까지이다. 필자는 몇 년 동안 승가고시에 면접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간혹 2급 (법랍 20년)이나 1급 승가고시 면접 때, 이런 스님들을 만난다.
“죄송합니다. 다른 스님들은 ‘프로필’에 사회복지나 학력으로 여러 가지를 기재하는데, 저는 시골 작은 절에 살다보니 ‘수행’란이나 ‘학력’란에 적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스님들에게 손사래를 친다. 출가해서 승복을 입고 승려로서 묵묵히 살아준 것만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스님네들의 삶은 실로 만만치 않은 길이다. 승려의 삶이 얼마나 많이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할 일이 많은가?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 출가자가 급감하고 있다. 큰 원인은 인류 역사의 문화적인 코드가 바뀌어서이다. 수많은 기기매체가 발달하고 온라인화되다 보니, 사람들이 정신을 쏟을 데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 법랍 20년이 넘도록 출가자로 살아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스님들을 볼 때마다 대견스럽다. 마치 낙타가 사막을 걸을 때 비축해 둔 식량과 인욕으로 묵묵히 걸어왔듯이...
이제는 다른 방향, 보통 사람의 삶으로 전환하자. 그대가 인생에서 무엇인가 성취코자 한다면, 낙타를 떠올리자.
길고 긴 시간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가 경거망동하지 않고, 남과 비교해 마음 헐떡이지 않으며, 묵묵히 제 페이스대로 걷는 것처럼, 낙타의 캐릭터를 통해 삶의 이정표를 삼는 것. 이 또한 괜찮지 않은가?
출처 : 정운 스님 / 살다보면 살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