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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글🧬 스크랩 참군인....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반란자 전두환
빈잔 추천 0 조회 366 13.09.22 14:0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참군인-정병주 특전사령관



 정병주특전사령관(팔짱)이 참모와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에게 보고를 받고있다






정병주사령관 휘하지휘관접견 전두환 1공수여단장과 노태우 9공수여단장이 배석해 있다.



정병주는 12.12당시 휘하의 3공수여단 부하들에게 체포되는 불운을 맞는다.



출 생 지 : 경상북도 영주
종 교 : 천주교
특이사항 : 12.12 당시 특전사령부 사령관

[경력 사항]


1949년 : 육군사관학교 9기
1950년 : 1연대 소대장
1964년 : 6사단 참모장
1967년 : 공수단장
1974년 : 소장 승진, 대통령 경호실 차장
1975년 : 특전사령부 사령관
1979년 : 12.12 사태당시 직속 부하에 의해 총상
1980년 1월 20일 : 육군소장으로 강제예편





특전사령관 정병주 육군소장


백 비



우리 조상들은 죽어서도 불의에 저항했다. 수양대군이 쿠데타로 정권 을 잡자 부제학으로 있던 조상치는 영천으로 낙향, 두문불출하고 종신토록 왕궁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살았다. 죽기전에 다듬지 않은 허술한 돌멩이로 자신의 무덤앞에 세울 비석 하나를 만들어 놓았는데 「노산조 포인 조상치지묘」라 새겨져 있었을 뿐이다.

노산조라 함은 옛 임금의 신하이지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나타냄이고 포인이라고 했음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뜻이니 죽어서까지도 세조 의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의 악정을 간하다가 육 신을 찢기는 고문 끝에 유배길을 떠나던 홍언충은 노숙하면서 자신의 묘 비명을 짓고 있다. 연산조 때에는 유배지에 가면 사약을 내리는 것이 관 례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명천하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 남자의 성은 홍이요 이름은 언충이 며 반평생에 우활하고 옹졸함은 문자의 공이라 서른둘에 생을 마치니 명 은 어찌 그다지도 짧으며 뜻은 어찌나 그다지도 긴고. 옛 고을 무림에 무덤을 정하니 천추만세 후에 누가 이곳을 지날는지 반드시 이무덤을 가 리키며 슬퍼할 이가 있을 것이다」 했다.

퇴계 이황도 묘비명을 써 아들 준에게 주었는데, 전면에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 라고 새겼을 뿐 벼슬도 품작도 신분도 이름도 없이 그저 아호와 본관만을 나타내는 겸허함을 보였던 것이다. 전라도 장성군 황룡 면 아곡리에 가면 명종때 명신 박수량의 무덤에 묘비가 서있는데 앞 뒤 에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백비다.

호조판서까지 역임한 그가 38년의 벼슬살이를 그만 두었을때 집 한채 도 없었을 만큼 청백했다. 그 청백을 죽어서까지도 지키려는 의도라기도 하고 죽을 즈음 세도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인지라 그 불의에 저항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이같은 백비 레지스탕스는 선비정신의 구현으로 관 습이 돼 있었다.

국립묘지에 비석없는 무덤은 없다. 신원 확인이 안되었으면 무명용사 라는 비명의 비석이라도 서있다. 한데, 장군 묘역에 있는 한 무덤에는 누구의 무덤인지도 알 수가 없는 유일하게 비명이 없는 백비 하나가 서 있어 백비전통을 잇고 있다. 지금 법의 저울 위에 올려지고 있는 12·12 군부쿠데타 당시에 장태완 장군과 더불어 신군부측에 저항하다가 부하가 쏜 총탄에 총상을 입고 강제 전역당하여 암울하게 살다 의혹을 남기고 죽은 정병주장군의 묘비인 것이다.

참군인 정신을 구현하다가 불의에 희생당한 원한 사무친 영혼인지라 저항 수단으로서의 백비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비면에서 넘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 백비이기도 하다.


「비문 없는 묘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제1장군묘역 168호 육군 소장 정병주의 묘.


12.12 당시 신군부에 맞서다 직속 부하들에 의해 총상을 입고 강제 전역당했던 정병주 전특전사령관이 묻혀있는곳이다. 정씨는 89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후 이곳에 안치됐다. 그러나 정씨의 묘비는 7년째 백지 상태로 남아 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장군들의 묘비엔 동료 군인들이 헌사한 「추모의 글」이 빽빽이 새겨져 있다.

장씨의 묘가 무비문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 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유족들의 뜻에 따른 것. 그러나 5.18특별법 제정 발표 로 12.12와 5.18의 진실이 밝혀질 날이 다가오자 유족들은 가슴을 설레 며 비문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장남 승환씨(40·한성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다린 보람이 있어 아버 님의 비문을 만들 수 있게 됐다』며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면 아버님도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망인 강남희 여사(64)는 연이은 충격을 받고 고혈압 증세를 보이는등 건강이 좋지 않 은 상태.

강여사는 5.18특별법제정소식에 오래 간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 편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게 됐다』며 『참군인이었던 남편의 행적을 담은 좋은 비문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정씨는 강제 전역당한후 당시의 악몽을 되새기며 우울증세를 보이다 89년3월 실종 1백30여일만에 경기도 고양군 산중턱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승환씨는 『수사결과 아버지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석연치않은 점이 많다』며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도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함께 진압군측에 서서 반란군에 대항하였던 대표적인 지휘관으로서 그는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달리 12.12 당시 이미 특전사를 지휘한지 5년이 넘은 시기여서 누구보다도 부대지휘에 자신이 있었고 전두환 소장의 격리작전에 의해 전두환 소장의 연희동 자택으로 유인되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납치소식을 접하고 원대복귀하여서도 전두환측에 의한 반란의 진압에 자신이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아끼고 보호하던 직속부하인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과 제3공수여단장인 최세창 준장 그리고 제5공수여단장인 장기오 준장 등 수도권에 있는 자신의 지휘하 4개 공수여단중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을 제외하고 모두 전두환 소장측의 반란군에 가담하여 배신을 함으로서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며 방금전에 지휘하며 부대장악을 지시하였던 직속부하인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제15대대 병력에 의해 총상까지 당하며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육사12기,하나회)은 그 여단장 선발과정에서도 정사령관의 도움을 받았으며 1978년 11월 충남 광천지역으로 침투한 3인조 무장공비 소탕작전의 실패(제1공수여단 지역으로 월북 도주)로 박 준장이 예편 직전에 놓였을 때도 정사령관이 그를 구출해 주기도 하는 등 그의 군인으로서의 은인이기도 하였으며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육사12기,하나회)도 자신의 동기생 중 마지막으로 장군진급을 하는데 정사령관이 앞서서 도와 주었으며 정사령관에게 충성맹세까지 한 장성이었고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도 그가 특전사령부에 전입할 때 중령이어서 그후 줄곧 정사령관 밑에서 작전참모로 보직하였으며 대령 진급 및 준장진급 때에 정사령관의 도움을 크게 받았던 그의 심복부하라고도 할 수 있던 자들이었으니 특전사령관으로 5년동안 근속하면서 예하 지휘관과 참모들을 너무도 믿고 사랑한 결과가 배신으로 보답되었으니 그 분함이 얼마나 크고 원한에 사무쳤으리라.
하여튼 자신들의 은인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총기를 사용까지 하여 살상케한 이들의 행태는 법적으로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결국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12.12군사반란의 부당함을 증언하기 위하여 굿굿이 살아오다가 89년초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니 그의 사무친 원한을 푼 역사적인 12.12군사반란의 심판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육군소령



12.12군사반란 당시 군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가 반란군의 흉탄에 산하한 한 젊은 장교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오랑 소령인 것이다.
비록 진압군측의 주요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그 중 한명인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끝까지 반란군으로부터 보호하다가 그들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인 제3공수여단 예하 15대대장인 박종규 중령의 병력에 의하여 살해되니 친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셈이다.
사전에 반란군측의 특전사령부 기습공격 정보를 입수하고서도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다 비명에 간 그이기에 비록 계급은 낮았으나 세인들은 높이 칭송하고 있다.
후에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모두들 배신을 하는 와중에서 유독 그를 목숨을 바침으로서 보좌하려 했던 부하의 잃음을 슬퍼하였다고 하니 이 비극적 사건은 세인들의 맘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 같다.





안치환 -    마른 잎 다시 살아나...

(1987년 대학생 안치환 노래)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빛나는 그 눈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네


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

 

정병주 장군의 푸념 그리고 의문의 죽음


정병주 前공수특전사령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한참 진행되었을때이다...

베레모를 쓴 두 명의 군인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허리에 리볼버 권총을 찬 정병주 소장이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고, 옆에 전두환 준장이 이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아주 멋있다고 느꼈거나 무척 인상적인 사진이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상사와 부하로 만났지만, 부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군을 장악하고 정권을 잡았다. 상사는 이를 막으려다 부하들이 쏜 총에 맞고 체포되어 군을 떠나야만 했다.

여러 해가 지나 정병주 장군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정병주 장군과 부하들의 엇갈린 운명과 비극에 대한 회한이 잘 드러나 있다. 짧은 글이지만 몇 번이고 곱씹어 보면 너무나 구슬퍼 울음이 나올 정도다. 두 번째 글은 12.12쿠데타 당시 그의 주변상황과 이후 의문의 자살에 관한 내용이다.


 

 

1. 장군의 푸념

정병주 공수특전사령관 밑에서 전두환 준장은 여단장을 지냈다. 정병주는 노태우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도 부하로 거느린 공수인맥의 대부였다. 그러나 그는 12.12때 부하들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총격을 받았다. 강제예편당한 뒤 그는 말했다.

 
 
 
 


"하루 세끼 밥 먹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땅이 있으니 걷고, 그리고는 잠자고 …
제가 걷기를 무척 좋아해요.

울화가 치밀 때는 술병을 들고
구파발 서오릉 주변을
온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곤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 북쪽의 검문소 앞을 지날 때는
노태우 씨가 저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고 …"


(87년 11월 기자 회견에서)

 
 



2. “쿠데타저지 필사의 몸부림 / 야산서 숨진 채 발견 타살의혹”

역사는 악인에 대한 단죄와 함께 의인에 대한 평가를 제공한다. 긴박했던 79년 12월12일 밤 또 한사람의 의인이 신군부의 쿠테타를 저지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된다. 바로 공수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이다. 더욱이 정사령관은 12.12이후 강제예편당하고 10년의 세월을 회한 속에 보내다가 지난 89년 3월4일 목맨 시체로 발견돼 아직껏 타살여부가 의문에 쌓여있다.

정사령관도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마찬가지로 10일 오후 전두환의 초청을 받고 연희동 요정에 불려나와 술을 마시고 있다가 급거 귀대한다. 그는 육본핵심세력 빼돌리기를 위해 사전에 마련되었던 연희동 그 술자리를 뒤숭숭한 세상,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전두환 보안사령 관을 만나 세상이야기 좀 듣자고 참석했었다고 후일 술회했다.

그러나 정승화 참모총장의 연행소식에 후다닥 귀대한 그는 예하 전 여단에 여단장 정위치 및 부대 출동대기 지시를 내린다. 이 때가 오후 8시쯤 정사령관은 이어 전화로 사태파악에 나선 결과, 수경사 30경비단에 거사주모세력들이 모여 있는 걸 확인했고 그들로부터 이쪽으로 오라는 회유를 받기도 했다. 정사령관은 또 예하 3공수 여단의 최세창 여단장으로부터 직접 설득을 당하기도 한다. 최는 정사령관이 요정에서 돌아온 시각 자신도 30경비단에서 돌아와 정승화 총장의 연행사실과 그 불가피성을 보고하면서 정사령관에게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가담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최는 특히 정사령관의 여단장 시절 작전과장으로 재직, 직속 사령관으로 모셔온 사이인 만큼 두사람의 이날 밤 대화는 군인으로서의 사명과 소신이 엇갈리는 비장한 것이었다. 정사령관은 이때 이미 예하병력중 박희도의 1여단, 최세창의 3여단, 장기오의 5여단이 신군부와 손잡은 것을 알고 윤흥기 준장의 9여단을 출동시킨다. 정승화 총장이 연행되고 없는 상황에서 선임 지휘관인 윤 성민 참모차장으로부터 1개 여단을 착출해 수경사에 배속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가 13일 새벽 1시30분. 쿠테타를 저지해보려는 마지막 몸부림인 셈이다.

그러나 9공수 출동명령을 내린 30분후의 정사령관은 몇 시간 전 헤어진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보낸 특공대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 최준장 이 보낸 38명의 특공대는 박종규라는 대령이 지휘했는데 특전사 2층의 정사령관 집무실을 포위하고 M16을 난사했다. 특공대는 잠긴 문을 부수고 쇄도하면서 정사령관의 부관 김오랑 소령을 향해 M16을 난사해 사살했다. 정사령관도 권총을 쏘며 저항했으나 왼팔에 총을 맞고 체포되고 만 것이다. 이때 정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출동 중이던 9공수는 3-4차례 대기명령을 받고 이후 회군명령을 받고 만다.

막강 전투력을 자랑하는 수도경비사령부와 최정예 병력을 지휘하는 공수특전사령부등 육본의 양대 세력이 신군부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모두 무력화되고 만다. 피를 흘린 채 지프에 실려 보안사 서울분실로 끌려갔던 정사령관은 과다출혈로 이내 병원에 옮겨져 2차례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져 80년 3월 퇴원한다. 이미 80년 1월 20일자로 예편된 신분이었다.

그랬던 그가 89년 3월 4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 송추유원지 부근 야산 참나무가지에 주황색 나일론 끈으로 목맨 채 시체로 발견됐다. 이 동네 장마루상회 주인 최현구씨(당시 33세)가 발견해 신고된 정 씨의 사체는 높이 2m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얼굴만 새까맣게 부패되어 있었으며 주변엔 소주병 3개와 1회용 컵 등이 있었다.

정씨의 손목에 있던 반자동 세이코시계는 19일.수요일.11시45분으로 멈춰있어 이대로라면 정씨 사망시각은 4개월 보름전인 88년 10월 19일로 추정되었다. 유류품은 현금 4만원 등 특별한 것은 없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체발견 즉시 정씨의 사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어 부검이 실시됐다. 3월6일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윤형모 검사의 지휘로 국과수 법의학 과장 서재관 박사가 집도한 부검에서는 목 오른쪽에 색흔(졸린 자국)이 있고 사반이 하지와 하부장기에 몰려있는데다 외상이나 외부충격 흔적이 없어 일단 의사에 의한 자살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또 얼굴 부패상태와 하체수포상태, 겨울철 날씨 등을 고려할 때 3-4개월 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이미 88년 10월 16일께 명동성당을 다녀온 뒤 집에서 쉬다가 밤 8시께 집을 나간 상태였다. 남겨진 정황대로라면 12.12이후 계속 우울한 생활을 해오던 정씨가 당뇨 등 신병의 악화. 빚보증을 잘못해 녹번동 자택이 근저당(6억10만 원)된데 대한 고민 등을 이유로 가출해 경기도 야산에서 소주를 마시고 자살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유족들은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며 검은 세력에 의해 타살된 후 자살로 위장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첫째, 그는 83년 영세를 받은 후(세례명 요아킴) 독실한 천주교 신자생활을 해 온 만큼 자살을 죄악시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어길 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당뇨로 고생하고 있긴 했으나 산책을 하고 대중탕을 애용하는 등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온 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컸다는 점이다.

셋째, 평소 사소한 일도 기록을 남기는 성품으로 보아 유서 한 장 없이 자살할 사람이 아니란 점이다. 또 빚보증문제도 집이 근저당만 설정되었을 뿐 직접 생활에 변화가 온 건 아니란 점도 들고 있다.

이같은 의문은 특히 95년 개혁조치와 함께 세인들의 재평가를 받은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이 TV에 출연, 정씨의 사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같은 군인으로서 정씨는 결코 자살할 인간이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또다시 관심을 불러 모았다. 쿠데타의 와중에서 육본수뇌부 전체가 그러했듯 정사령관도 효과적 진압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진압군 출동명령을 내린 행동은 아수라장이던 12.12의 와중에서 그나마 군의 사명을 다한 충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정씨는 강제예편후 특히 부관 김오랑 소령의 죽음과 그 충격으로 시 력까지 잃은 미망인에 대해 가슴 아파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쿠데타 세력들이 과거 군선배에게 던져주는 관직이나 공사사장직 따위를 일절 거절하고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장성은 군복을 벗은 후에도 명예를 중시해야 하는데 취직을 하면 그 순간 명예를 더럽히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씨는 특히 12.12에 대한 단죄를 상상하기 어렵던 87년 11월 기자 회견에서 12.12는 하극상이라고 단정하고 지휘책임을 다 못한 책임에 대해 뼈를 깎는 반성을 해왔다고 말했다.


 

 



후 기




김오랑 소령의 아들은 정병주 사령관의 아들이 키웠다고 한다..




흐르는 음악은 안치환의 마른잎 다시 살아나 입니다....
정병주 특전사 사령관은 아드님에게 이땅에 민주화와 남북통일에 전념하라고
했다는군요...... 또한 명동성당에서 아드님과 며느님이 세례를 받을때 성당 밖에서
소낙비를 맞으면서 이땅에 군정종식과 민주화, 남북통일, 미군철수를 빌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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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9.23 18:42

    첫댓글 좋아요 좋아요, 빈잔님, 이런글 자주 올려 주세요,

  • 작성자 13.09.23 20:24

    ^^:

  • 작성자 13.09.27 16:09

    이글에 대한 본오동무쇠, 시냇물님의 의견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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