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탁(孫澤) 호텔
요약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 ‘손탁빈관(Sontag賓館)’이라고도 한다.
안토니트 존탁(독일어: Antoniette Sontag, 한국명: 손탁(Sontag, A. 孫澤, 1854∼1925)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 K. 韋貝)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생활하였다.
손탁은 프랑스의 알자스 로렌 출신이지만, 보불전쟁(普佛戰爭: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전쟁. 1860∼1871년) 결과 이곳이 독일령이 되어 독일국적으로 내한, 러시아공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활약하였다.
개항 초기 한국은 대외교섭상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손탁은 영·독·프·러 등 각국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재빨리 습득하였다. 이에 손탁은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대군주(고종) 및 명성황후와 친밀하게 되었다.
주차(駐箚: 외교 대표로서 외국에 주재하는 것)조선총리 원세개(袁世凱)의 대한속방책(對韓屬邦策) 강화를 위한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손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제3세력을 끌어들이는 인아책(引俄策)을 강구했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親露拒淸)정책을 수립, 반청(反淸)운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에서 오른쪽 두번째사람이 손탁이다
그녀의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조선정부는 1895년 서울 정동 29번지 소재 1,184평 대지의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하사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한국 최초의 배일정치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친미파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발족되었다.
명성황후시해에 대한 복수토역(復讐討逆: 복수를 위해 역적을 토벌함.), 친일내각 타도, 경복궁에 갇혀있던 고종 구출 등을 정치적 투쟁목표로 표방하고 정동소재 손탁 사저에 모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손탁 사저는 친러반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 책략이 세워지는 곳)가 되었다. 이처럼 손탁은 국왕구출작전의 막후 인물로 활약하였다.
알렌(Allen, H. N., 安連)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제1차 국왕구출거사(春生門事件, 1895. 11. 28.)를 일으켰지만, 한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웨베르 공사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거사한 제2차 국왕구출사건(俄館播遷, 1896. 2. 11.)은 성공,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에 이어(移御: 임금의 거처를 옮김)함으로써 정동구락부의 정치적 투쟁목표가 달성되었다.
이처럼 손탁은 국왕구출작전을 성사시키면서 시종 정동구락부와 왕실과의 연락업무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정동 손탁 사저를 정동구락부의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제공함에 따라 고종황제는 한국독립을 위한 손탁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1898년 3월 16일 구 한옥을 헐고 양관(방 다섯 개)을 지어서 하사하였다.
이 때 손탁은 실내장식을 서구풍으로 꾸며서 손탁빈관을 경영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서구식 호텔영업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객실 5개의 양관은 호텔영업으로는 너무 협소하였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대외관계가 점차 다변화되고 외국 귀빈들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고 숙박시킬 영빈관이 절대 필요하였다.
더욱이 그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 전용 호텔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에 정부는 1902년 10월, 구 양관을 헐고 2층 양관을 신축, 손탁으로 하여금 영빈관을 경영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었다.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임금의 개인적인 돈)으로 신축했기에 사실상 한국정부 직영 ‘영빈관호텔’이다. 호텔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이용하였고, 아래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주방,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손탁호텔은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 경영의 효시가 되었다.
1909년 손탁이 귀국한 뒤, 1917년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모금한 성금으로(23,060달러) 손탁호텔을 구입,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 년손탁호텔 건물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하였지만, 1975년 소실되어 현재 공터로 남아 있다.
안토니트 존탁
안토니트 존탁(독일어: Antoniette Sontag, 1854년 - 1925년)은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에서 활약한 독일인 통역사이며, 손탁호텔의 지배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어 이름은 손탁(孫澤)이다.
생애
1854년에 프랑스 알자스로렌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고, 당시에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 알자스로렌이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고, 1871년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 제국이 선포되면서, 알자스로렌이 프로이센에 합병되면서 그녀의 국적이 독일로 변경되었다.
이후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의 통역사 자격을 얻었다. 1885년에 주조선 러시아 제국 공사로 카를 베베르가 임명되자 한국어 통역사의 자격으로 조선에 파견되었고, 이때 베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경복궁의 양식 조리사로 임명되어 일하게 된다. 이때 명성황후를 알현하였다.
1896년에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게 되자, 그에게 커피를 진상하였고 이 일로 인해 존탁은 고종의 신임을 얻었고 그와 친분을 쌓게 된다. 이때 커피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1902년에는 고종으로부터 덕수궁 근처에 있는 황실 소유의 부지를 하사받았고, 같은 해에 손탁호텔을 개업하여 그 지배인이 된다. 그러나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로 대한제국 국내의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1909년에 모국인 독일로 돌아갔고, 1925년에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