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제승당 이순신 장군 영정
충무공 이순신 장군 초상화. 조총의 탄환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전 이상범 화백의 그림.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품 이순신 將軍의 生活信條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합격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에야 마흔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물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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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를 현충원과 비슷한 곳으로 알고 찾아보니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사당과 기념관이 있는 곳 현충사는 1966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긴 했지만 그 시작은 1706년때다. 이 지역 유생들의 주청에 숙종이 '현충사'라는 이름을 지어 액자를 하사하며 사당을 만들도록 했다
일제치하에서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우리 민족 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의 협력으로 민족성금을 모아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67년 본래의 사당(구본전) 위편에 본전을 준공하였고 이순신 장군 탄신일인 4월 28일을 기념하여 매년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난중일기 1597. 9.15 기록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53세에 정탁의 상소문으로 다시 복직하여 정비한 결과 12척의 배와 군사 120명이 다였다. 이때 임금이 수군을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수군이 꼭 있어야 한다며 강력히 건의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전방급 신물언아사 前方急 愼勿言我死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명언인데요.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아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나라를 지키려는 이순신 제독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가 있습니다.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차수약제 사즉무감
此獸若除 死卽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勿令妄動 靜重如山 "망령되게 움직이지 말고 조용하고 무겁기를 산과 같이 하라" 옥포 앞 바다에서 첫 해전을 앞둔 조선 수군 장수들에게 신중하고 침착하게 전투에 임할 것을 당부하며 이른 말.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이자,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옥포파왜병장, 5월 10일 기록)
이순신 제독의 칼에는 명문이 새겨져있습니다. 아마도 항상 마음에 새기겠다는 이순신 제독의 신념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다음은 이순신 제독의 칼에 새겨져 있는 명구입니다.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강산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라는 뜻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 출생1545 4월 28일~사망1598 11월 19일 1545년4월28일 한성건천동에서태어났어요 1564년(명종22년) 방씨와 결혼하여 아들(회)가태어납니다 1572년(선조5년)28세때 무과시험에 떨어집니다 1576년(선조9년)32세때무과시험에합격해서 함경도동구비보의 군사책임자가됩니다 1579년(선조12년)에훈련원봉사가됩니다 1580년(선조13년)발포수군만호가됩니다 1583년(선조16년)건원보 권관과 훈련원 참군이됩니다 1583년(선조19년)사복시 주부를거쳐 함경도조산보의군사책임자가됩니다 1587년(선조20년)녹둔도둔전관직을 겸하던중파면됩니다 1589년(선조22년)에정읍현감이됩니다 1591년(선조24년)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됩니다 1592년(선조25년3월에거북선을완성하고 4월에임진왜란이일어납니다 그해한산도대첩에서승리합니다 (첫전투는옥포해전) 1593년(선조26년) 삼도수군통제사가됩니다 1597년(선조30년) 원균의모함으로옥에갇혔다가 백의종군의벌을받지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임명됩니다 그해명량해전에서12척의배로왜군 133척의배중에36척을격파시키고 적장을(마다시)전사시킵니다 1598년(선조31년)노량해전에서 왜군의총탄을맞아장렬히전사합니다 1643년(인조21년)충무라는시호를얻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묘.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삼거리(三巨里)에 있음 이순신장군의 업적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은 최초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하여 임진 왜란의 3대첩으로 꼽히는 한산대첩을 비롯하여 장군이 최후에 전사한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해전 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한 때 원균의 모함으로 세 번의 파직과 옥중생활을 겪고 두 번의 백의종군이란 시련 도 있었지만 정유년 일본이 재 침략하자 복위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이 탁월하였으며 특히 해전에서의 전략이 뛰어나 학익진법을 비롯, 많은 전투진법을 개 발하여, 실전에 적용하여 패전없이 승전을 거둡했습니다. 또 기존 전함 판옥선을 변형하여 거북선 을 개발 제조하여 실전에 투입시킴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 등 여러 해전에 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전술 그리고 거북선과 화포 등의 뛰어난 무기를 잘사용했기 때문으로서, 장군은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격퇴함으로서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사람으로 역사에 남겨졌습니다. 주요 해전목록 총 26전 25승1패입니다 1패는 이순신 장군이 없을때 원균이 지휘한 칠전량해전입니다 옥포 해전 1592년(선조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남거제옥포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이룬 23전 23승 신화의 첫 승전이다. 선박대수 조선:91척 (판옥선 29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왜군:44척 (옥포 26척, 합포 5척, 적진포 13척 ) 합포 해전(合浦海戰) 옥포 해전이 벌어진 선조25년 음력 5월 7일당일 오후에 있었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아직 옥포 해전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왜군의 소함대(5척)를 전멸시켰다. 조선:전선91척 왜군:전선5척 적진포 해전(赤珍浦海戰)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이 있은 그 다음날인 선조25년 음력 5월 8일에 발생했다. 전날의 여세를 몰아 조선 수군은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 중이던 왜군 함대를 공격하여 모두 11척을 격침시켰다. 이순신의 1차 출정은 적진포 해전으로 마감하고 다시 본영으로 복귀한다. 이때에는 아직 거북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91척 왜군:13척 사천 해전 1592년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사천에서 왜수군 12척을 전멸시킨 해전으로, 이순신은 여기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투입했다. 조선:26척 왜군:13척 당포 해전(唐浦海戰) 1592년(선조25년) 음력 6월 2일(양력 7월 13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지금의 경상남도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조선:90척 왜군:21척 당항포 해전(唐項浦海戰) 1592년음력 6월 5일(양력 7월 13일)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당항포에서 왜군을 격파한 해전. 유인작전으로 먼 바다로 끌어내어 싸웠다. 26척 격침 병력2720명전사시킴 조선;56척 왜군:26척 율포해전 1592년 음력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가 거제도 율포만에서 부산으로 향하려던 왜군 함대 (대선 5척, 소선 2척)를 발견하여, 대선 2척과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은 해전이다. 조선:2척 왜군:7척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25) 음력 7월 8일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1592년(선조25년) 7월 10일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왜군을 격멸한 해전이다. 조선:56척 왜군:42척 부산포 해전(釜山浦 海戰) 1592년9월 1일, 부산포에 정박한 왜군 함대를 기습하여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고, 왜군은 100여 척의 함선을 잃었다. 이 전투 후 왜군은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 작전에 나서지 않았다. 조선:170척 왜군:470척(병력 7만명) 조선:6명전사 25명부상 왜군:128척격침 3800명 전사 제2차 당항포 해전 1594년음력 3월 4일임진왜란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이순신이 당항포지역 인근의 왜군들을 몰아내기 위해 부하 어영담을 사령관으로 삼아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이 연합하여 출전한 6차 연합함대 출전이자 이순신의 12번째 해전이다. 조선:124척 왜군:31척(31척전멸)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30년 ) 음력 7월 15일칠천도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조선:169척(조선군 157척격파 (이순신 장군 감옥 원균지휘)조선군 대패 왜군:850척 어란포 해전 (1597년음력 8월 27일)은 이순신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후 치른 첫번째 전투였다. 칠천량 해전패전 후 남은 13척의 판옥선을 수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던 중, 8월에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자신을 노출시켜 왜군을 유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어란포 해전 후 본진을 진도의 벽파진으로 옮겼다. 조선:13척 왜군:8척 벽파진 해전 (1597년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6일)은 어란포 해전에 뒤이어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 이 전투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2번째 해전이다 .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벽파진(전라남도진도군고군면)에서 적선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왜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의 복귀도 확인한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나중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하나 첩보는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이 전투 역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해협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조선:13척 왜군:13척 명량 해전(鳴梁海戰)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때 조선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수군 133척을 쳐부순 해전이다. 조선:13척 왜군:333척 (병력22,000명) 전과 아군피해:전선피해없음 전사 2명 부상3명 왜군피해:31척격침 91척대파 병력 12,000명 전사 노량해전(露梁海戰) 임진왜란당시 1598년(선조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이며,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조선:전선 170척, 병력 1700명 명나라:전선 128척병력 2600명 총병력 전선 298척, 병력 4300명 왜군:512척 병력 55,000명 피해:
조선:이순신 외 장수 4명 전사, 10명 전사, 300명 부상
이순신장군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남 .
(※ 모친 초계(草溪) 변씨의 꿈에 시부 (媤父)가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한 이조 (異兆)가 있어 그대로 명명)
병정놀이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서도 적용함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수비하는 반은 나무 뒤에 진 을 치고, 그 나머지 반은 저 아래쪽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면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야 뒤에 개울이 있어 뒤로 절대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배수의 진'이라는 거야.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옛부터 많은 승리를 거둔 작전이다" | | 문무를 두루 갖춤. 순신은
글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로부터 부모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활쏘기,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 나감. |
말위에서 떨어짐 -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시험장에서 활쏘기,칼쓰기,창쓰기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시험인 말타기를 할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멋지게 달려가던 말이 발을 헛디뎌 이순신을 내동댕이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그 껍질로 다리를 감아 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 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함)
이 충무공 (1545 - 1598)
- 휘(諱)는 순신(舜臣) ,자는 여해(汝諧) , 본은 덕수(德水)
충무는 1643년(인조 21년)
공이 순국후 내린 공의 시호(諡號)임.
증직 과 추증 - 선조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증직(贈職) -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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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