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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9일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 2열왕 5,14-17
제2독서 : 2티모 2,8-13
복 음 : 루카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살아 있을 때 해야 할 일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까이에 오는 것을 금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사제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불행들 앞에서 인류 역사는 늘 하느님 혹은 하늘이 준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천형(天刑), 곧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한국의 한하운 시인의 시에 이 천형이라는 말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1920년에 태어나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함경남도 공무원으로 재직했습니다.
그가 나병에 감염된 사실을 안 후에 남긴 시가 있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이 시는 천형, 곧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들 말하는 그 병의 비극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다, 혹은 나병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들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초능력을 가진 분이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이나 나병을 낫게 하였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하느님이 죄에 대한 벌로서 사람들에게 병을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을 주거나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벌주고 저주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읽고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배은망덕하였고,
돌아온 한 사람만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았다고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교훈은 이솝의 우화들 안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치유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당 전례에서 신자들이 성가를 부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 행위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당 안에서 하느님을 흠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베풂을 받은 열 사람이지만,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것을 배우려 나선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에게 와서 감사드리는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감사할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의 의식주를 비롯하여 우리와 가까운 분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결과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통스런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나병환자들과 같이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고 참담한 심경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살아야 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돈이 없어서, 계획했던 일이 실패해서,
좌절과 실망을 안고 실의에 차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없으면, 그런 고통과 좌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주어지지 않은 것만 확대해서 보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도,
우리를 미워하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확대해서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은혜로움을 외면하고, 멀리 있는 냉혹함만 보고, 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바쁩니다.
대책도 세우고 계획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된 열 명의 나환자 중 아홉 명은
자기들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바삐 가야 하였습니다.
각자 원하던 바를 차지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바삐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나병이라는 불행을 벗어났으니, 그들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큰 소리로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 안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던 신앙인의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며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예수님을 만나 그 절망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병과 소외와 절망을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에게 와 엎드려서 그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소외시키지만,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섬기고,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구원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새벽 묵상 글을 쓴 지가 벌써 16년째입니다.
긴 시간을 썼다는 말과 함께 대단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스스로를 대단하다면서 자화자찬 했을 때가 한 10년째 쓰고 있을 때 하고 있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도 변하는 시간 동안
매일 새벽 묵상 글을 썼다는 생각에 스스로 으쓱했던 것이지요. 많이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새벽 묵상 글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서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면서 혹시 면담을 할 수 있냐는 내용이었지요.
이 자매님과 약속 시간을 잡았고, 그 시간에 제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시간이 지나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고, 이 자매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본 이 자매님께서 크게 실망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제가 생각했던 모습과 많이 다르시네요.
너무 젊으세요. 이렇게 젊은 신부님께 제 이야기를 하기가 좀 뭐하네요.”
아마 묵상 글을 10년이나 썼으니 연세 지긋한 신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40대 초반의 젊은 신부가 눈앞에 있으니 당황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젊은 신부가 뭘 알아서 나를 상담할 수 있겠어? 괜히 왔네.’라는 표정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국 상담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만남을 마쳤습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 화도 났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제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경험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것이 맞는 것이었는데,
고작 묵상 글 10년 쓴 것으로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뒤에 저는 계속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코칭, 교수법, 리더십 프로그램 등을 수강하면서 저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을 지낸 지금, 앞서 만났던 그 자매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분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쩌면 정말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니 감사할 일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불만으로 감사함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을 참아내고 노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묵상해 봅니다.
당시에 나병이라는 병은 치유될 수 없는 끔찍한 병이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을 정도로 철저히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치유된 열 사람 중에서 단 한 명만이 돌아와서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큰 은총을 얻었으면서도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우리 역시 그러했던 적이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불평불만이 온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받은 것이 많아도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도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받은 많은 것들을 바라보기보다, 내가 손해 본 조금의 것들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고 있었을까요?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의 나에서 한 단계 더 주님 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곁에서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사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선물까지 얻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순종과 믿음과 감사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민족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사에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병이 나앗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씻으라는 나아만의 전달을 받았을 때
무시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화가 나서 돌아가려 했지만,
‘장군님, 만일 엘리야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틀림없이 장군님은 그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시지요’라는 부하의 말을 듣고서,
마음을 바꿔 엘리야가 시키는 대로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치유를 입은 것은 그가 엘리야의 말에 순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유를 입은 그는 엘리야께로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한 자신의 순종과 믿음을 고백하며, 티모테오에게 권고합니다.
곧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복음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분을 기억하라고 말하면서 복음에 대한 순명과 믿음의 행동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는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는 말을 이르셨는데,
그들이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사제들에게 가던 동안에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곧 <제1독서>에서 나아만이 엘리야의 말을 순명하여 나병이 나았듯이,
나병환자 열 명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1독서>에서 마찬가지로 외국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혹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자비를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자비를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처럼 말입니다.
결국, 나병을 치유 받았으면서도, 이미 자비를 입었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감사를 드리지도 못함은 자비에 대한 믿음이 약한 탓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자비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탓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나병환자 나아만과 사마리아인과는 달리 자신으로부터 떠나 ‘돌아와’
믿음으로 회개를 하지 않은 까닭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불러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비가 아니라 자비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환자 아홉이 비록 자비를 입고 치유는 받았어도 구원을 받지는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는 구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비를 입고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여전히 아버지의 집 문밖에 서 있을 뿐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치유 받고도 감사하지 못함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고 있느냐 마느냐를 가림 질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줍니다.
그리하여, 감사함이 곧 구원이 됩니다.
이를 우리는 오늘도 <미사경문 감사송>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구원의 도리요 길이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이 감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부른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가운데 삶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오로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남에게 돌리고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운함이 앞섭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또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을 참지 못하고 불평불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법을 무시하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즉각 고쳐 주시지 않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떼를 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으며,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완전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아직 미숙한 신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면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었고 병이 나음 받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고친 분이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평상시 은총을 많이 받은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만이 성숙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나병을 치유 받은 것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이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간구하였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치유되었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갈 수 있었다는 것이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은총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육적인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치유 받은 것을 통해서 치유하시는 분을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1독서를 보면 나병환자인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습니다.
그러자 어린아이 살처럼 새 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나
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거듭 받아달라고 청하였지만 엘리사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엘리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깨끗해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아만도 치유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도 지금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를 비롯하여 치유를 받았던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이 아무리 깨끗해도, 치유를 받았어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몸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깨끗해진 몸으로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나아만이 주님만을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가장 크게 감사할 일입니다.
자, 여러분은 저를 만난 것이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고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중요한 것은 저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하느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옆에 분을 보십시오. 만나서 감사합니까?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갈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분을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예, 그렇다면 옆에 계신 분에게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옆에 있어줘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느님께로 갈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복덩이는 복덩이대로, 골치덩이는 골치덩이대로 하느님만을 갈망하게 해줍니다.
겸손하게 더 간절히 기도하게 합니다. 그러니 골치덩이를 만난 것도 감사하십시오.
치유 받은 나병환자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병이 나은 것을 확인 받기 위해서 사제를 찾아갔습니다.
병이 나아서 감사드리는 것보다 내가 이제는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받는 것이 더 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고 있는지요?
‘화장실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 아홉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은 결코 마땅히 받아야 할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은혜를 당연하다고 생각 말고
받은 은혜를 통해서 감사를 드리고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고 노래하였듯이
매일 매순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5-17)
매사에 감사해야 하겠지만 근원적인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며
셋째는 이 지상의 삶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 천상의 삶이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기쁨중 하나는 돌아갈 고향, 천국본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먼저 감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 안에서 더 큰 감사의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먹으라고 사과를 하나 주었습니다.
아이는 사과를 받으면서 아무 말이 없어서 엄마가 ‘애야 사과를 주었는데도 왜 말이 없느냐?’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엄마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리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아이의 말은 ‘껍질은 왜 안 깎아주는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사과를 받은 것에 감사는 안 하고 껍질을 깎아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철없는 아이라고 말하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사가 없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감사를 하면 마음이 풍성해 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즐거워집니다. ‘감사는 펌프에 마중물과 같다’고 합니다.
펌프를 사용하지 않다가 다시 사용하면 물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 물 한 바가지를 붓고 펌프질을 하면 물이 올라옵니다.
물을 올라오게 하기 위해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마중물을 부으므로 물이 계속 올라오는 것처럼 감사를 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이 계속 많아집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섭섭하게 여겨질 때가 언제입니까?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할 때입니다.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수고한 것은 알아주지 못하고 해 준 것이 없다면서 불평할 때 부모님들은 속상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것을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말이라도 하면 부모님은 행복을 느낍니다.
하느님께서도 감사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더해주십니다. 담을 그릇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간절히 원하던 은총을 받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얼굴을 바꾸지 말고
늘 감사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남에게 베푼 것은 모래 위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겨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것은 잊고, 베푼 것에 대한 위안과 보상을 기대하고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 그리고 부모 형제 친척, 자녀를 통하여,
또한 이웃에게 받은 많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느 신부님이 말을 팔려고 내어 놓았다.
... 말을 사러 온 사람이 사고 싶어 하자, 신부님이 말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쓰는 말을 써야 알아듣습니다.
'가 !' 하려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해야 하고
'서 !' 하려면 '알렐루야!' 해야 합니다."
말을 사러온 사람이 말했다.
"거 참 희한한 일이군요, 평생 말 장사를 해 왔지만
이런 말은 처음 보는 군요, 한번 타 봐도 좋겠지요?."
허락을 받은 말 장사가 말에 올라탄 후,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니 가기 시작 했다,
다시 한 번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니 더 빨리 달리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나 기절초풍, 대경실색'
"알렐루야, 알렐루야!"고함을 치니 아슬아슬 하게 멈춰 섰다.
이마에 땀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했더니
말이...ㅎㅎㅎ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금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 ‘핸드폰’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핸드폰을 가졌던 것은 지금부터 21년 전입니다.
국산은 없었고, 모토롤라 제품을 샀습니다.
‘삐삐’를 가지고 다니다가, 동창들이 핸드폰을 마련하자고 해서 큰마음 먹고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끝 번호는 축일로 정했습니다. 저의 핸드폰 끝 번호는 0929입니다.
핸드폰은 컸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억나는 핸드폰 선전이 있습니다.
‘걸리니까 걸리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애니콜입니다.
자장면 시키신 분,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잠시 꺼 주셔도 좋습니다.’
21년 시간이 흐르면서 핸드폰의 기능은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카메라 기능, 교통카드 기능, 음악을 듣는 기능, 내비게이션 기능, 신용카드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연결된 핸드폰은 각종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유용한 애플리케이션은 생활에 편리함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핸드폰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에 있던 본당에서 설립 2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작은 공소였던 성당은 20년이 지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초대 신부님은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였습니다.
저는 식당과 주차장, 손님들이 지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하였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넓은 마당을 마련하였습니다.
다음 신부님들은 신앙의 꽃을 피우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과학과 기술만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과 사회만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 우리의 감성, 우리의 신앙도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그러한 삶을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그러한 삶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들 마음의 밭에 뿌려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세상의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마치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살고자 하지만 유혹 앞에 흔들리는 사람은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삶이 변하고, 이웃에게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좋은 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앙인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전의 3단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빨간 불에는 서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만으로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교무금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는 신앙인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는 당연히 잘 지키고, 무리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할 경우에는 중간에 잠시 쉬고, 차량 정비를 자주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을 하면 인생도 푸른 신호등처럼 늘 맑고 푸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 본당의 단체에 가입을 해서 봉사하는 분,
각종 피정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 소공동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급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운전, 몸이 아픈 이웃을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는 운전,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태워 드리는 운전, 고장 난 차를 보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단순히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운전이 곧 선교이고, 운전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의 삶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 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삶을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굳이 받지 않아도 될 고통 피해가는 법
전삼용 요셉 신부
‘더 임파서블’이란 영화는 사상자 30만 명을 기록한 인류 최대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한 가족의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이 가족은 휴가차 태국에 머물게 됩니다.
사춘기의 아이는 뭐가 불만인지 모르지만 부모에게 짜증만 냅니다. 그냥 보통 가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쓰나미 속에서 서로 죽은 줄 알고 서로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온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다치기도 했고 물에 대한 트라우마도 생겼지만 이젠 이전과는 다른 가족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가족이 된 것입니다.
재난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현실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 삶이었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차를 몰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짜증아 날라치면 하정우 주연의 ‘터널’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게라도 천천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지금의 것들을 빼앗겨보아야만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가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전에 이스라엘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좀처럼 그 느낌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훨씬 비옥하고 살기 좋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노력하면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광야와 다를 바 없는 땅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먹을 것, 마실 것 없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떠돌던 때를 생각한다면
가나안 땅은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주님은 엄청난 옥토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집을 약속하셨습니다.
큰 집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각자 집을 짓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가 지붕도 없는 길거리에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약속이 그리 크게 기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감사했습니다.
간신히 광야에서 천막을 얼기설기 지어서 이슬만 피하며 산 것이 사십 년이었습니다.
튼튼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맹수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얼마나 기쁜 약속이었는지 모릅니다.
또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약속하신 것은
이제 그들의 손으로 농사를 지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이라면 그 농사를 지어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크게 감사할 일이 아니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만나만 먹고 살았던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농사지어 거둔 곡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소출을 낼 때 그 소출을 바로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주님께 감사의 제물로 바치고 먹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바로 그런 의미로 남겨놓으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감사의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
너희가 이렇게 너희 하느님에게 예물을 가져오기 전에는 빵도 볶은 곡식도 풋이삭도 먹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레위 23,9.14)
그리고 첫 소출을 주님께 봉헌하는 감사제를 “영원한 규칙”으로 세우심으로써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감사의 크기와 관계의 깊이는 비례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이고 친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당신께 감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감사하기에 이미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의 제물로 우리에게 바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감사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점차 자신들이 누리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다른 민족들이 더 자신들보다 큰 부를 누리는 것을 보고는 하느님을 원망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소출을 바치는 것이 적어지고 그렇게 성전은 가난해졌습니다.
성전의 사제와 레위지파 사람들도 이젠 스스로의 배를 채우기 위해
농사를 지으러 나가 성전의 감사의 제사가 사라지고 변질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님께서는 바빌론을 보내시어 감사가 사라져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버렸습니다.
그들을 다시 이전의 나그네 생활로 되돌리시어 지금까지 그들이 누리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이전의 생활을 그리워하였고 돌아와서는 다시 충실하게 제물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이내 사라지고 또 주님은 그들을 이방인들 손에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조: 유기성 목사 유투브 설교 ‘감사는 구원받을 자가 누릴 복입니다’ 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나병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병에 걸렸었습니다.
바로 지옥에 갈 영혼의 나병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새 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을 때의 그 감동은 잊을 수가 없고 생명까지도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교무금도 너무 많이 내는 것 같고 헌금을 봉헌하면서도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때 어떠한 마음이 들까요?
당신은 생명을 주시고 계신데 당신이 주신 돈의 아주 일부를 바치면서도
아까워하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실까요?
다시 이전의 고통의 상태로 돌려보내어 지금의 이 구원받은 삶이
참으로 감사해야 할 삶임을 깨우쳐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고통이 감사를 다시 되찾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90%나 되는 것입니다.
왜 자신들을 그런 병에 걸리게 했었느냐고 원망까지 합니다.
또는 이젠 그동안 아파서 못 누렸던 것을 더 누리기 위한 생각만 갖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고통을 굳이 받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고통이 없더라도 당연히 바쳐야 하는 감사를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 일기를 쓰는 것도 좋고 끝기도를 바치면서
속으로라도 감사한 일들을 돌아보며 찬미를 드려도 됩니다.
물론 더 완전하게 만들고 싶은 이들에게는 고통을 주시며 단련을 계속 하시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매일 어떤 상황이든지 감사할 줄 아는 이에게는 굳이 고통을 더 주실 필요를 느끼지 못하십니다.
주님도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가르치시기 위한 수단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큰 고통을 피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구원받은 첫 날 느꼈던 그 감사를 매일 똑같이 느끼려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느끼기 위해 조금씩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도 좋습니다.
단식이나 양팔기도 등을 하면서 그런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을 더욱 찬미할 수 있습니다.
불만족으로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행복을 다시 회복시키는 방법은 감사를 되찾는 길 뿐입니다.
오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으십니까?
그러면 내일도 감사한 일만 일어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