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짓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을까
오늘 아침 시내 나가던 길에 마주쳤던 견공들의 슬픈 눈이 머리에 서 떠나질 않는다.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가던 개들은 그 좁은 창살 안에 서로 뒤엉켜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나와 잠시 마주친 무연한 생명이지만 그 애처롭던 표정이 지금까지 가슴에 가시처럼 걸려 있다.
이런 마음은 소, 돼지, 닭을 싣고 가는 트럭과 마주 쳤을 때도 마찬가지다.
포로처럼 끌려가던 동물들의 그 선한 눈빛이 오래오래 눈에 밟힌다. 저들이 가는 곳은 어딜까.
만약 도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면 나와 마주했던 그 시간이 그들에게는 생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물들을 사고 파는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종일 마음이 찜찜하다.
이런 입장이라서 동물원을 다녀오면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다.
철창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이 안쓰럽고 찡해서다.
저 좁은 공간에서 저들이 과연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늘 앞서기 때문이다. 동물원의 시설을 아무리 고급스럽게 꾸미고 밀림이나 초원처럼 조성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감금된 생활이나 다름없다.
엄격히 말하면 격리되고 제한된 자유다. 그래서 내 눈에는 동물원의 식구들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중국 여행길에 안내자의 설명에 이끌려 ‘최대 동물원’이라는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하루에 한 차례 사자들에게 먹이를 주는 시간이 있는데 그 모습을 관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장면이었다. 소 한 마리를 사자가 거주하는 공간에 풀어 놓고 먹잇감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소의 취후까지 볼 마음이 없었으므로 이내 자리를 떠나왔다. 그날 내내 내 머릿속에는 공포에 떨던 소의 잔상이 떠나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물원의 이면은 이렇다.
인간에게 보여 줄 동물을 사육하기 위해 또 다른 생명이 희생당하고 있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날마다 동물을 학대하는 이런 모순된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가 그곳이다. 동물들의 자연성을 훼손하는 것은 그 어떤 시설이라 하더라도 반동물적이다. 잡혀 온 동물 입장에서는 완벽한 환경이라고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KBS에서 방영한 동물 다큐를 보면서 이러한 나의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다. 제주도 연안에서 포획되어 수년간 어린이 대공원에서 돌고래 쇼를 하며 사람들의 사랑과 박수를 받았던 그 돌고래를 제주 바다로 돌려보내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였다. 결국 고래는 자신의 고향을 늘 그리워하면서 바다를 잊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 고래들의 사연이 모든 동물들의 공통된 본능일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우리 안에 가두어 인간들의 즐거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명나라 때의 선승 주굉 스님의 명저 『죽창수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금붕어를 기를 때에는 지렁이나 새우 따위를 먹이로 삼고, 학을 기를 때에는 작은 물고기를 먹이로 삼는다.
그런데 학의 먹이는 한 번에 작은 물고기 백 마리가 넘기 일쑤이고, 금붕어의 먹이는 지렁이나 새우가 천 마리도 넘는다. 이렇게 금붕어나 학을 기른답시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도록 살생하는 업을 끝도 없이 짓고 있다. 누에를 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은 옷을 입고 배불리 먹기 위해서라고 하겠지만, 물고기나 학은 그저 보고 즐기기 위한 것일 뿐이다.
슬프다. 이런 짓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을까!”
동물원의 역할이 이와 다르지 않다. 동물들의 사육과 관리에 살생 업의 순환이 반복되고 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개개인이 이런 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성숙한 사회다.
그 나라의 국민소득이 높을수록 동물원의 숫자가 줄어야 마땅할 것이다. 생명주의 실천이 선진사회의 올바른 잣대라고 생각하는 나의 소신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호랑이와 기린을 몰라서 동물원에 가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제는 아이들에게 동물들과 공존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때다. 어떤 표본을 보이기 위해 동물들을 가두고 그 권리를 유린하는 것은 시대적인 착오다. 거듭 말하지만 초원이나 바다를 떠난 동물은 결코 즐겁지 않다.
저 낙타가 선인장을 찾아 지친 여행을 할지라도 그들에겐 사막이 낙원일 것이니 한낱 인간의 구경거리로 살다가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을 테다. 이런 점에서 아프리카의 코끼리를 수입하거나 남미의 곰들을 공수하는 정책은 신중하고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동물 쇼 역시 개인 소득이 높은 나라에서는 사라졌으면 좋겠다. 곰이 재롱부리고
코끼리가 묘기를 연출해도 기특하거나 신기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삶이 몹시 안쓰럽게 느껴진다.
인간들이 던져 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길들여진 동물들일 뿐이다. 초원을 누비며 백수를 호령하던 사자와 호랑이가 쇼 무대에서 과연 행복하다 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는 쇼를 하던 맹수들에게 인간들이 큰 화를 당할지 모른다.
동물들이 인간을 공격할 인과를 무서워할 시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숲이나 강에서 평화롭게 살아야 할 동물들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인간의 우월이나 특권이 아니라 잔인성이며 폭력성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출처 ; 현진 스님 / 산 아래 작은 암자에는 작은 스님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