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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꼭 하실 것 같아요.”
시우는 도경의 말에도 대꾸가 없다. 그 덕에 도경의 속만 타고 있었다. 아 왜, 사람 똥줄 타게 아무 말도 없는 거야! 진짜 날 해고라도 하겠다는 심보야? 도경은 거래처에 도착할 때까지 시우의 눈치를 봐야 했다. 시우는 단지 목이 아파 대꾸를 하지 않았다. 시우의 말에 잔뜩 겁먹어 제 눈치만 보는 도경을 보니, 처음에는 목이 아파서라는 이유였지만 점점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경이 시우의 눈치만 보는 새, 거래처에 도착했다. 시우는 시동을 끄고 문을 열면서 말했다.
“다음 달 미션은 매출 5배 하고, 실패하면 직원 한명 내 보내기 해볼까.”
도경은 시우의 말에 질겁하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마음이 앞섰던 걸까. 자신을 보호해 주는 안전벨트가 가로 막고 있었다. 악마, 그 직원이 바로 나라 이거지? 그럴 수 없어. 도경은 이어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와 시우의 뒤를 따랐다.
“아, 팀장님. 진짜 저 잘라버리실거에요? 네?”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거래처 사장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우는 도경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인사를 나눈다. 언젠가 한번 본 적이 있나? 그럴리는 없었다. 시우는 RTT에서 거래처 장소를 몰라 도경을 태우고 왔다. 그런데, ‘안녕하셨냐’니. ‘안녕하세요’ 아닌가? 이제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나.
“우리 시우, 많이 컸네.”
도경은 사장님의 말에 서로 알고 있었던 사이임을 짐작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도경으로써는 잠잘 때 이외에 감히 상상도 못하는 행동으로 시우와의 친밀감을 드러냈다. 거래처 사장이 도경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우와 눈이 마주쳤지만, 도경은 밝게 웃어보였다. 해고 당하지 않으려고.
“도경씨도 왔어? 분당점에 도경씨를 보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온다면서?”
“에이- 사장님은 무슨.”
“그러니까요. 사장님이 잘 못 아신 것 같은데”
저 주둥아리를!!! 도경은 코를 찡긋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시우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눈썹을 한껏 위로 올렸다. 저 건방진 눈썹과 막말 제조기 주둥아리를 언젠가 불살라버릴것이라 다짐한다. 사장님은 쉐프님의 전화로 들었다면서, 매상에 지장 있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 하지만 두려울 것 없었다.
“어쩌다가 다 깨버렸어! 돈이 어마어마할텐디”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도경은 시우가 조급해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돈과 관련된 문제라서 예민하겠군. 그도 그럴 것이, RTT는 요리도 예술이라며 맛도 맛이지만 데코레이션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주방에 데코레이션을 손봐주는 전문 쉐프도 입사시켰다. 그래서 RTT에서 요리를 담을 그릇이나 접시는 아주 중요했다. 그런데 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재희가 크게 사고를 친 것이다. 재희씨, 앞으로 약 3달 간 접시값 물어주느라 월급 못 받겠네요. 슬프지만 힘내세요. 전 억울하게 12만 8천원의 누명을 썼잖아요. 차라리 접시라도 깨면 스트레스 해소라도 될텐데 말입니다.
“직원 실수요. 런치 전엔 가지고 가야되는데”
“글씨, 그기 연락 받고 바로 공장에 연락하기는 했는디, 디너까지는 안되나?”
런치 까지 접시가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시우는 급격히 기운이 떨어지는 듯 했다. 자신이 RTT에 런치 준비하라며 당당하게 말하고 나왔는데, 그럴 만도 했다. 그러게 머리보다 입이 먼저 나가면 안된다니까요.
“대신, 디너까지는 꼭 올 수 있는거죠?”
“그럼, 우리가 ‘윤식품’ 할 때부터 거래했는디. 되고 말고!”
“그럼 전, 지점에 전화 하고 오겠습니다.”
시우는 터벅터벅 조용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도경은 처음 입사하던 날, 운 좋게 지금은 해외에 계시는 지점장님을 따라서 이 곳에 견학을 왔었다. 면접을 보러 RTT에 갔을 때, 사실 도경은 탈락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붙어 보려고 지점장님이 때마침 차를 향해 오길래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탔다. 지점장님은 도경의 모습에 열정이 느껴진다며 자신은 거래처, 그러니까 이 곳에 가는 길이라고 했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사장님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러 가지 예쁜 접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 손으로 만든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접시들이었다.
“도경씨는 어떻게 남자친구랑 생겼어? 처음 신입 때 왔을 때, 애인 있었잖아.”
“사장님은, 그 자식 이야기는 하지도 마세요.”
사장님, 그 자식은 기억하기 싫은 존재가 되어버렸답니다. 망할 자식. 분명 저를 버린 죄를 어딘가에서 톡톡히 받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길가다가 벼락 맞아 쓰러져도 찍 소리도 못 할 녀석입니다. 그 놈이.
“우리 시우가 분당점에서 잘 할 수 있도록 도경씨가 많이 도와줘”
역시나 사장님과 시우의 관계는 굉장히 친밀해 보였다. ‘우리 시우’라. 도경은 사장님의 말을 곱씹다가 많이 도와달라는 말에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자신은 실직 위기에 놓여 있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저희 팀장님을 잘 아세요?”
“저 자식 불알도 내가 다 만져 브렀제.”
“아..아예”
허...사장님은 내가 참 사내 같고 좋으신가보다. 정말 서슴없으시네. 태연한 척 했지만, 전혀 태연하지 않았다. 도경은 시우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기억에 담기지 않은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갔을 때, 어릴 적 사진이라도 몰래 훔쳐보고 올 걸. 그러고 보니, 시우의 집에는 사진이 없었다. 다 큰 사람의…… 도경은 자꾸 떠오르는 상상들 때문에 얼굴에 붉은 꽃이 폈다. 화알짝.
“어렸을 적부터 봐 온 삼촌이제. 시우 아버지가 나랑 성님아우 했은께.”
Restaurant, Tip Top
밤은 깊었다. 시혁은 진솔의 팔목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진솔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시혁의 손을 뿌리쳤다. 시혁은 더 확실해졌다. 진솔의 눈빛에 심장이 터질 듯 해졌다. 정말 이 여자를 원하고 있는게 맞구나. 진솔의 행동 하나하나에,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심장이 이 여자가 확실하다며 말하고 있었다. 시혁을 지나치는 진솔을 다시 잡아 무작정 자신의 입술을 진솔에게 가져다 댔다.
“봐요. 괜히 이러는 거 같진 않죠?”
진솔은 자신도 모르게 시혁의 입술이 다가 오자 힘이 풀렸다. 입술이 살짝 닿았을 뿐인데 심장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뻔뻔하게 기습키스를 해 놓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하는 시혁을 보니 진솔도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였어요?”
Bar에서 나온 후, 진솔은 시혁을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다. 서로를 너무나 원하고 있었던 듯, 입술을 탐했다. 부드러운 진솔의 입술에 시혁은 물리지 않는 사탕을 베어 물 듯 진솔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시혁은 은채를 잊었고 진솔은 지난 날을 잊었다.
“글쎄.”
“………”
침대 너머로 둘이서 바라보는 야경에, 마셨던 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술보다 서로를 더 취하게 하는 연인과 다름없었다. 시혁은 창문을 향해 있는 진솔을 돌려 제 품에 넣었다. 맨 살이 진솔의 볼에 느껴지자 시혁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진솔은 더 자세하게 들으려는 듯 시혁의 품에 파고들었다. 시혁은 진솔을 힘주어 안았다.
“니가 내 심장에 스며들었어,”
Restaurant, Tip Top
“사장님, 그릇 도착 할 동안 오랜만에 바둑이나 둘까요?”
왜 하필 그 지루하고 신선 노름 같은 바둑이냐. 도경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바둑이라는 게임에 지루함을 잘 알고 있었다. 홀로 심심하신 아버지에게 인터넷 바둑을 알려드렸더니 아주 날을 새시기로 해서 인터넷을 끊어 버렸다. 요즘도 자꾸 인터넷 달 생각 없냐며 전단지를 주워 모으신다. 아- 바둑. 그 때, 사장님의 애완견인 바둑이가 달려 나왔다. 언제 봐도 넌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바둑아. 이런 나라도 이렇게 반겨줘서 고맙다. 이놈의 개야. 실례는 화장실에서 하렴. 내 신발 옆에다 아슬아슬하게 하지 말고!!!!!!
“좋제, 이길 수 있겄어?”
“그건 잘 모르겠지만, 해 봐야죠! 내기해요.”
“허허- 이 놈 봐라. 그래 무엇을 걸 것이여?”
사장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던 시우는 바둑이와 놀고 있는 도경을 발견했다. 도경은 반가움에 자신의 향을 기어이 묻히려는 바둑이를 피해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와- 오늘 별게 긴장하게 만드는군. 시우는 도경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저렇게 뛰다가 개똥을 밟을 것이다. 그리고 시우의 예언대로 도경은 한참을 뛰다가 뭔가 물컹하는 물체를 밟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둑이는 자신의 향이 도경에게 듬뿍 나는 것을 확인하고 더욱 친근감을 드러냈다. 이놈의 개. 저리 안가?!
“요즘 청소하고 그런 사람 필요하지 않으세요?”
“애 엄마가 하니께, 힘들지만 어떡혀. 사람 쓰면 인건비가 얼만디.”
시우는 잘 됐다는 듯, 사장을 보고 씽긋 웃으며 말했다. 도경은 신발에 묻은 바둑이의 흔적을 지워내려 노력했다. 이건 뭐, 이별한 애인과의 추억 지우기보다 힘드니. 모래알도 이렇게 깊이 들어가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도경은 지금 사장과 시우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도 모르게 자신을 바라보는 팀장을 보고 활짝 웃었다. 제발 노여움을 푸시길.
“그럼 제가 이도경씨를 걸죠.”
“오메 우리 도경씨 같이 일 잘하는 사람이면 나는 큰 걸 해줘브러야것고만”
“뭘 거실래요?”
“나는 그럼 그릇 값을 걸겄다. 내기 판에 판돈을 놓고 둬야제. 도경씨- 이리로 와봐.”
건너편에서 도경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아직 나에게 바둑이의 냄새가 날텐데. 도경은 대충 물로 신발 밑바닥을 부비고 시우와 사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시우는 벌써부터 인상을 찌푸린다. 별로 안 나거든요! 세련이의 향수비누처럼 좋은 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곧 없어질 향입니다. 힘들겠지만 신상 향수라고 생각해주세요. ‘바둑이 향’.
“전- 바둑 잘 모르는데.”
“누가 도경씨보고 하래?”
“제 직원이 좀 부족하죠?”
니 친구들은 태어날 때부터 바둑하고, 양궁하고, 말 타고 그랬냐? 안 배울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는거지. 도경은 시우를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 시우는 도경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바둑알을 놓는다. 이어 사장도 도경을 앉혀두고 바둑알을 놓기 두어번.
“저도 바둑알로 할 줄 아는 게 있거든요!”
“뭐. 알까기?”
저 자식이 날 얼마나 쉽게 봤으면, 알까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힘 조절만 할 수 있다면 누구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알까기를 자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그 것은 미묘한 신경전과 시간 제한이 있어야만 진정한 시합이 되는, 엄청난 양의 뇌 운동의 그 것.
“………… 오목!”
사장과 시우가 크게 웃었다. 도경은 깜짝 놀랐다. 윤시우가 웃었다. 활짝 웃어봤자, 슬쩍 비웃는 듯한 어색한 미소가 다였던 시우가. 그렇게 크게, 그리고 그렇게 즐겁게 웃었던 기억이 없었다. 내가 지금, 윤시우를 웃긴거야? 도경도 왠지 기분이 좋아 함께 웃고 싶었지만, 뭔가 웃으면 얼떨결에 웃음을 제조한 것 이 들킬까, 뒷발로 쥐 잡았다고 할까봐 끝까지 웃음을 참았다. 더 웃겨야 한다. 더 웃겨서 기분을 좋게 한 다음에 감봉 10%도 무효로 만들고 정말 잘라버릴지도 모르는 시우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돌려야 했다.
“제가 바둑은 못 해도 오목은 팀장님 이길걸요?”
너무 많은 것을 바랐던 것일까. 아님 의욕만 앞섰던 것일까. 시우는 도경의 마음을 훔쳐보는 듯, 웃음을 멈췄다. 시우는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승부욕에 이미 사장님과의 바둑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장님도 자신이 하는 바둑보다 젊은 사람들의 놀이에 더욱 관심있는 듯 했다.
“그럼, 내 대신에 도경씨가 윤팀장이랑 오목 해보는 것이 어뗘?”
“제……가요?”
도경은 어안이 벙벙했다. 시우는 뭔가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아 당황했다. 그릇 값이면 엄청난 내기였다. 그 것을 도경에게 맡겨버리시다니. 바둑이라면 자신 있었다. 오목도 자신 있었지만 지금의 도경을 보면 졌어도 이겼다고 우길 것 같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기 마련이었다. 지금 시우는 자신이 고양이가 된 것을 알게 됐다.
“아, 사장님. 그럼……”
“아이- 내 대신인께, 니가 이기믄 될 것 아니여?”
사장은 시우에게 눈을 찡긋 했다. 내기를 했다는 것을 도경이 알게 된다면 부담스러워서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시우는 꼭 이겨야 했다. 그러나 도경도 마찬가지였다. 도경은 내기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우를 이겨서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설마, 오목에서 이겨서 자신을 잘라버린다면? 도경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1인 시위라도 할 생각이다. 바둑판에 바둑으로 놓인 바둑알들이 집으로 들어갔고,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 되었다.
“먼저 두세요”
윤시우, 보이냐? 이게 고수의 여유라는 거야. 도경은 웃으며 시우에게 처음을 양보했다. 시우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앞뒤 가릴 수 없었다. 단지, 시우의 손에 달려있는 그릇이 더 중요했다. 사장은 거래처에 찾아 온 가족이 자기(瓷器)체험을 돕기 위해 자리에서 나섰다. 정정당당하게 하라며, 믿겠다고 나선 터라 시우도 도경도 긴장했다. 옆에 있던 바둑이도 긴장 한 듯, 숨죽여 그들을 바라봤다.
“안 봐줘”
“제가요, 팀장님 바둑 배우실 때 오목으로 저희 동네 평정 했었거든요”
누가 봐주랬나. 도경은 시우가 긴장하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아챘다. 자존심은 있어서 먼저 바둑알을 놓으면서도 끝까지 입이 살았다. 팀장님, 그러다 지기라도 하시면 참으로 원통하시겠어요? 키킥! 도경은 문득 이 오목에 내기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기면. 소원 들어주기 해요.”
“이기면 안 될텐데”
이기면 안 될 이유가 뭐냐! 무조건 이겨서 시우가 RTT에 있을 동안은 절대 자르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건 양보할 일도, 자존심의 싸움도 아니었다. 도경의 생계가 달린 문제였다. 토끼 같은 조카 둘이 집에서 도경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시우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도경이 이기면 그릇 값이 날아가는 것이고, 도경이 지면 그릇 값을 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하자니까요”
도경은 벌써 세 개의 바둑알이 놓인 것을 확인하고 시우가 방어하지 않으면 이 내기는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우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시우는 알았다며 도경의 예상처럼 다른 곳에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도경은 드디어 시우를 잡았다며 웃으며 바둑알을 네 개로 만들어 버렸다.
“어머, 이겨버렸네?”
도경은 마음 놓고 시우의 앞에서 깔깔 거리며 웃었다. 시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도경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남자가 그 깟 일로 그렇게 인상을 쓸 필요야 없지 않은가? 좀 전에도 느꼈지만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다. 도경은 조금 더 포괄적이고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소원을 떠올리느라 급급했다. 시우는 깔깔거리며 웃는 도경의 머리통을 콕 박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 여자가 정말 RTT를 말아먹을 작정인가. 그도 그렇지만 자신을 이기고 저렇게 좋아하는 도경이 얄미웠다. 시우는 바둑판을 엎으려 손을 뻗었을 때, 사장님이 들어 왔다.
“도경씨가 이겼고만?”
“네, 사장님! 제가 이겼습니다. 하핫”
도경은 신이 나서 바둑이를 안고 방방 뛰었다. 무슨 소원을 들어야 RTT에서 시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우를 등에 엎고 편하게 생활 할 수 있을까. 이건 실장님의 약점을 잡았을 때보다 더욱 기쁜 일이었다. 이런 날, 소주와 삼겹살이 최곤데! 사장은 도경의 기쁨을 함께 해주면서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봤다.
“어쩔 수 없구만, 시우야 내기는 내기잖여?”
“그렇죠. 이겼어도 드릴려고 했어요”
시우는 이가 갈리는 것을 참아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릇 값을 뺀다면 RTT 매상은 어떻게 올린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신입인 재희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액수였다. 도경은 뭐가 그리 신난지 싱글벙글이였다. 시우는 도경의 모습을 보고 좋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참기로 한다. 또 욱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상사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나 좋을까? 상사를 이긴 부하직원의 통쾌함. 그러다 정말 큰 코 다칠텐데. 시우에게 도경의 소원 따위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설사 도경이 ‘일자리를 빼앗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잘라버릴 수 있었다.
“뭘 드려요?”
“응? 아니여아니여. 도경씨. 우리 이번에 시민들 상대로 체험 하는 거 있는디, 하고 갈래?”
“아, 아까 왔던 그 가족들도 자기 체험 하신거에요?”
“응, 도심에서 흙 만지는 거 쉬운 것이 아니니께. 도경씨는 특별히 하게 해줄께이!”
도경은 신이 났다. 내기에서도 이기고, 어떤 소원을 말하던 지금 도경에게는 행복한 고민이 될 것이다. 시우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소원 들어주기로 약속 했으니 무르진 않을 것이다. 도경은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방방 뛰었다. 그래서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되는 개그 욕심도 부려본다.
“자기 체험. 자기자기~ 할때 그 자기?”
도경은 아무거나 막 던져도 빵빵 터질 줄 알았던 것이다. 사장님은 어색하게 웃어 주었지만 개그에 냉정한, 아니 모든 것에 냉정하고 쌀쌀맞기 그지 없는 시우는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도경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웃자고 한 소리라며 사장님의 팔을 이끌었다. 뒤에서 시우가 레이져로 뒷통수를 찌르는 듯 한 느낌을 받았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공장에서 그릇이 도착할 때까지 할 일이 없었는데, 잘 됐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어머, 이렇게 만들어서 시골 공장에 보내면 구워서 오는거에요?”
거래처 한 쪽에 자리 잡은 창고에서는 좀 전에 들어온 가족이 열심히 흙을 빚어 내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흙을 만지는 것이 좋은지,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며 놀았다. 화목한 분위기를 보자 도경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문득 언젠가 TV에서 했던 ‘얼마나 줄수 있는데여?’의 송애교님의 대사가 떠오르며 송애교님의 어릴 적 문군영이 좋아하던 예쁜 컵을 생각해 냈다.
“응, 가족들이 많이 오제. 도경씨도 예쁘게 만들어서 집에서 써.”
“사장님, 이걸로 돈 많이 버셨구나?”
도경은 팔을 걷어 사장님이 건네주는 흙덩이를 받아 들고 조물거렸다. 정말 좋은 아이템이었다. 요즘 같이 웰빙 웰빙, 자연 친화를 외치는 도시민들에게 향수를 자극하는, 그리고 어린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추억을 조금이나마 나눠줄 수 있는 좋은 체험이었다. 평일이라서 찾아 오는 사람이 뜸 했지만,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며 사장님이 은근히 자랑을 했다. 도경의 머릿속은 이미 무엇을 만들 것인가? 라는 질문이 둥둥 떠다녔다. 정말 뭘 만들지?
“그려, 돈 많이 벌어서 한턱 쏘려고 했는데 이겨브렀어. 도경씨가!”
“네?”
“아니여, 시우야. 너도 와서 만들어 봐”
사장님은 시우의 팔을 이끌어 도경의 앞에 앉혔다. 도경은 벌써 흙을 만지며 반죽하기 시작했다. 시우는 도경의 앞에 있다는 것이 자꾸 오목의 일이 떠올라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해맑게 웃으며 흙을 만지는 도경이 예뻐 보일리는 없었다. 뭘 알고 웃는 건가. 이렇게 중대한 사안에.
“전 됐어요.”
“에이- 팀장님, 그깟 오목, 졌다고 이렇게 소심하게 그러실거에요?”
도경은 시우의 시큰둥한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시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도경은 시우를 놀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도경은 시우를 보며 자신이 만들어야 할 것을 결정했다. 도경은 흙을 만지며 토라져 있다고 생각한 시우에게 선물을 하기로 한다. 내가 고등학교 미술 ‘올 수’의 실력으로 좀 만들어 드릴 테니 그만 화 푸세요!
“그깟 오목?”
시우는 기가 막혔다. ‘그깟 오목’이라니. 이도경씨 제정신이야? 그릇 값이 얼만데, 지금 그 걸 공짜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사장님이 얼마나 짠돌인데, 그래서 일부러 내가 직접 온 건데! 시우는 시우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도경이 눈치 없이 망쳐놓은 것이다.
“그럼, 뭐. 알까기라도 다시 할까요? 저, 알까기 동네 평정……”
도경은 이미 만들기로 한 것을 열심히 만들었다. 한 달 쯤 있다가 RTT로 보내준다는 사장님의 말에 ‘그 정도면 조금 더 친해져 있겠지?’ 라는 생각과 자신의 선물을 받고 오늘을 기억할 시우의 표정을 상상하면서 즐거워했다. 흙이 주는 촉감과 흙 고유의 냄새. 난 전생에 흙을 빚어 예쁜 도자기를 만드는 공예가였을꺼야. 이렇게 흙만 만져도 두근거리는 걸. 도경은 설레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것이 흙의 느낌이든, 앞에 앉아 도경을 바라보며 흙을 만지고 있는 시우 때문이든. 도경은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볼 때에 도경과 시우도 이 같은 느낌일 것이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애인 사이, 혹은 신혼 부부라고 오해 받아도 행복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일을 후회 하게 될 거야. 이도경씨”
“팀장님, 뭐 만드실거에요?”
아무리 시우가 협박 같지 않은 협박을 해도 도경은 이제 마음까지 편해짐을 느꼈다. 여차하면 소원이랍시고 위기를 탈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도경의 관심사는 오로지 흙이었다. 원래 승자는 여유로운 법이다. 됐다며 손사래 치던 시우가 만지는 흙은 가늘고 흰 시우의 손가락과 한 몸이 된 듯 다져지고 있었다. 시우는 다져지는 흙을 만지며 무엇을 만들지 정했는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분 나쁜 웃음에 도경의 불안함이 가중될 쯤 시우가 입을 열었다.
“이도경씨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