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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블로그에 있는 박경석장군에대한
이야기입니다
울프독의 War History
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의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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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28. 11:19
이 글은 6.25 전쟁 중 부상을 입고 전쟁포로가 되었던 국군 장교가 당시에 만난 북 사단장의 인간미에 감동 받은 이야기다. 이러한 소재에 오해하시지 않기를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국군 장교는 월남전의 영웅으로 재구 대대 대대장이었으며 육군 준장 출신인 박경석 장군이다. 그리고 이 노병의 경험이 우리 국군이 크게 배울 교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글의 말미에서 밝히겠다.
1 사단 연대장 시절의 박경석 장군
그가 감동한 북한군 사단장은 그의 소대를 격파하고 부상한 박경석 소위를 포로로 붙잡았던 북한군 부대의 사단장이었다.
국군의 박경석 장군이 반감을 가졌어도 크게 가졌어야 했을 적장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주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70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박장군은 필자와의 자주 있었던 대화에서 이 북한군 사단장을 여러 번 언급했었다.
이제는 문필가로 활동하는 박경석 장군의 회고록 '육사 생도 2기생'이라는 책에서 그 비화를 옮겨온다. 또 어린 국군 장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나 지금까지 정체불명이었던 그 북한군 장군의 실체를 이 글에서 밝혀보겠다.
박경석 장군이 포로가 된 경황없던 상황에서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 뒤 계속되던 전투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그 사단장은 6.25 전쟁 중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김일성 직속 빨치산 부대 출신 사단장들 패거리들 중에서 예외적인 사람이었다.
이 기막힌 토픽의 내력을 소개하기 전에 박경석 장군의 이력을 먼저 소개하겠다. 박경석 장군은 한국 나이 18세, 만 나이 17세인 1950년 6월 1일에 4년제의 편제로 새로 개교한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었다. 너무 어린 나이가 문제가 되어 입학이 불허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원자 중의 한 명인 군부 실력자 원용덕 장군의 아들이 박경석 생도와 동갑이라서 특혜를 받은 그와 같이 입학하게 되었다.
50년대 육사생의 분열 모습
그러나 입학을 하고 25일 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6.25 당일 1기 선배인 육사 10기생들과 같이 포천 전선에 투입되었다.
선배인 육사 10기는 그런대로 1년간 교육을 받아서 군인 티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박경석 생도 기는 제식 훈련과 집총 훈련 정도만 겨우 진행되고 있던 상태였다. 출동 직전 영점 사격 3 발을 해본 것이 사격의 전부였다.
맨 왼쪽이 포천 전선을 공격했던 북한군 3사단장 이영호- 최용건 계의 빨치산. 윗줄은 김일성의 직계 류경수[좌-105 전차 여단장]와 동해안 공격의 766부대 오진우[우-오랜 세월 북한의 민족 보위상을 했었다.] 남침 때 두 인간은 물론 이영호까지 무자비한 학살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원체 다급해진 전황으로 육사의 교도대는 물론 생도대도 전원 전선에 투입되었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의 명령이었다고 한다. 잘못되었어도 크게 잘못된 결정으로서 이것은 북한군 침공 후 35살의 경험없던 채병덕 장군이 북 침공 사흘 동안 범한 여러 큰 실수의 한 작은 경우였다.
북한군 3사단의 공격에 맞서 배치된 박경석 생도 동기들은 이 무모한 전투에서 무려 86명이나 전사했다. 현실 감각 없었던 국군 간부의 또 다른 행태로서 육사 교장 이준식 장군은 피를 흘리고 모교로 후퇴한 생도대 부상병들은 이 신성한 육군 사관학교에 저런 패잔병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다 내쫓았다고 하니 아연할 수밖에 없다.
이들 중에 다수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원에 입원했다가
북 105 전차 여단 소속 병사들에게 모두 학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망과 분노에 빠져 수원 남쪽으로 후퇴한 생도대는 모두 돌격해서 옥쇄하자고 결의하고 공격 개시선으로 이동 중에 백선엽 1사단장이 제지하는 바람에 단념하기도 했었다. 생존한 생도들은 모두 부산 동래에 집결해서 종합학교라는 이름으로 급조된 군사학교에서 단기 훈련을 받고 정식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경석 장군의 기는 나중에 육사 생도 2기생으로 불리게 된다. 그의 동기들은 한 명만 빼고 전원 당시 신설 사단인 9사단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사단장은 후에 참모총장이 된 장도영 장군이었다.
1950년 10월 25일 창설된 9사단 [백마부대] 엠브렘
9사단은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온 상황에서 강원도 평창에서 남진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띄고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소속된 3대대장은 평창의 1,077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적 연대 병력의 주력을 격퇴하라는 명에 따라 두 개 중대에게 야간 이동을 명령했다. 밤새 산등성이를 타고 7부 능선까지 올라가서 대기하다가 동이 트는 새벽 6시에 고지를 공격하는 작계[作計]에 따른 것이었다.
장진호에서 이동하는 미 해병들, 1077 고지 공격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1,077고지라면 서울 북쪽 북한산과 비슷한 높이며 서울 남산보다 다섯 배나 높은 산이다. 이런 산의 고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다는 정보만으로 판단하고 아무런 사전 정찰이나 훈련도 없이 야간 이동과 공격을 명령한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경사지에 무릎 깊이까지 눈으로 뒤덮인 그런 지형이었다. 험한 등산길에 길을 잃은 중대원들은 후래쉬를 여기저기 비추고 침묵해야 할 무선망까지 열어버려서 자기들의 위치를 고지의 북한군에게 스스로 다 노출해버렸다. 국군의 접근을 발견한 고지의 북한군들은 산 중턱까지 내려와서 매복했다가 기습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죽은 북한군과 포로가 된 북한군 포로
무능한 중대장은 북한군의 출현에 놀라서 도망쳐 버리고 대대장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의 혼란한 상황에서 소대는 소대대로 싸워야 했다.
이때의 야간 전투 경험을 살렸는지 그가 재구 대대장으로서 월남에서 베트콩 부락을 공격해서 승리한 작전은 문자 그대로 '치밀' 그대로였다.
맹호부대의 베트콩 부락 야간 기습
파월 훈련시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안고 자폭한 강재구 중대장 - 그의 이름을 딴 재구 대대는 맹호부대 최강의 전공을 기록했다. --......
소대는 잘 싸웠으나 전투 진행 중에 박경석 소위는 접근한 적이 던진 수류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소대는 그대로 후퇴해서 대대에 박경석 소위 전사 보고를 했다. 박경석 소위는 정신을 잃고 아침까지 쓰러져 있다가 전장 정리를 하던 북한군에게 발견되었다.
대개 후퇴한 적이 남겨놓은 중상자는 사살하는데 박소위는 나이도 어리고 잘 생겨서 북한군은 박소위를 여자로 오해하고 상관에게 보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박경석 장군은 지금 80이 넘은 나이에 보아도 잘 생긴 미남이다.)
결국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 소동으로 박소위는 즉결처분 당하는 운명을 피해서 북한군 후방으로 호송되었다.눈을 떠보니 박소위는 어느 동굴같은 곳의 응급 치료소에 누어 있었다.
귀의 고막이 날아가고 허벅지에 큰 파편상을 입었으나 북한군 군의관과 여자 간호 장교가 잘 돌봐주어 완쾌할 수 있었다. 지금도 박장군 다리에는 북한군 군의관이 가정 집에서 쓰던 바느질용 무명실로 꿰맸던 굵은 바늘 자국의 상처가 남아있다.
다부동 방면을 공격하였던 북 13사단 사단장 최용진을 쏘고 미군에 투항했던 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 미군이 그를 포로 수용소로 보내자 그는 분개해서 다시 전향하고 포로 교환 때 북으로 갔다.
박소위가 이 동굴의 가마니 위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어느 날 밖이 수런스럽더니 갑자기 북한군 간부 하나가 들어왔다. 어깨에 왕별 하나를 부착한 북한군 사단장이었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기고문으로,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울프독의 War History
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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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4. 8:00
곧 누군가가 가마니 위에 누워있던 박소위를 보고 한마디 했다.
"사단장 동무시오!"
가마니 위에 누워있던 박소위는 입이 떡 벌어져서 말을 하지 못했다.
"사단장이 국군 포로들을 감금한 긴급 구호소에 들어 오다니!"
북 사단장은 사람 좋게 생긴 인상이었다. 군인이 아니라 집안 삼촌같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사단장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박소위에게 말을 걸었다.
휴전 회담장에 나오는 북의 장군들. 남일, 김상조, 장평산등이다.
"군관 동무, 고생이 많소, 나이가 몇이요?"
적이지만 박소위는 그의 따뜻한 말이 긴장한 가슴에 전기처럼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열일곱 입니다."
"고향은?"
"충남 조치원입니다."
"학교는 나왔나?"
"충남 대전 고등학교 나왔읍니다."
"대전고라.. 좋은 학교 나왔구먼,"
그는 관심을 가진 듯 누가 가져온 의자에 앉아서 질문을 이어갔다.
"군관 동무, 그런데 국방군에는 열일곱 군관도 있소?"
박소위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
6월 25일 아침, 육참총장 채병덕 장군의 잘못된 판단만 아니었으면 박소위는 지금은 안전한 후방에서 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있었을 것이었다.
소위로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어 해방 군관으로 북한군에 편입되고도 탈출하다가 다시 붙잡힌 조창호 소위는 긴 세월 옥고와 강제 노동을 하다가 1994년 탈출하였다. 북에서 얻은 지병으로 2006년 사망하였다.
"무자비 하구먼! 어린 소년에게 군관 계급장을 달아주고 전장으로 내몰았으니 말야!" 북 사단장은 혀끝을 차며 탄식을 했다.
박소위는 그 말에 대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말문을 열었다.
"저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생입니다. 우리나라 첫 4년제 정규 생도로 금년 6월 1일 입교했습니다. 사실은 4년 후에 소위 계급장을 달아야 되는데 25일 포천 전선에 투입이 되어 이렇게 급작스럽게 임관하고 소대장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북 사단장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4년제 육군 사관학교라.. 그랬다면 후방으로 철수해서 계속 교육을 받고 있어야지!"
박소위는 동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적 사단장에게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군이 낙동강까지 밀려 궁지에 몰렸는데 후방에서 공부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원해서 단기 교육을 받고 소위가 되었습니다."
박소위의 결연한 대답에 북 사단장은 감탄한 듯 무릎을 탁치며 맞다는 표시의 미소를 지었다.
"동무, 안됐구먼! 이제 박소위도 해방 군관이 되었으니 인민군에 현지 임관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도록 하게."
박소위는 그가 말하는 것에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북 사단장의 말은 남조선 군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인민군에 군관으로 입대해서 남한 국군을 향해서 총구를 돌리라는 말이었다. 박소위에게는 말도 되지 않은 소리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침묵을 지켰다.
북 사단장은 박소위의 완강한 의지를 확인한듯했다. 그는 군의관에게 말했다.
"치료를 잘해 빨리 낫게 하시오!"
사단장은 일어서면서 박소위의 상처를 일일이 살핀 다음에 양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게! 박 소위!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만도 고마워해야지!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군."
그는 인자하게 말을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뒤에다 대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박경석 장군은 그의 저서 '육사 생도 2기생'에서 북 사단장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는 정도의 간단한 기술을 하고 글을 맺었다.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국군 장병
그러나 박경석 장군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그 첫 만남 뒤에 사단장과 얽힌 일화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북 사단장은 박소위를 구금하지 않고 사단 사령부 내에 마음대로 돌아 다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주 불러서 산책도 하고 식사도 하며 북한군의 편입을 권유했었다는 것이다.
박소위는 대화를 할수록 북 사단장이 상당히 높은 인격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부하들에게도 당시 국군 사단장처럼 권위적으로 군림하지 않고 친동생 대하듯 자상하게 대했었다. 포로들을 철창 안에 몰아넣고 학대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한 때 북에서 추진되어 오던 식량 공급이 끊긴 일이 있었다. 덕분에 포로들은 물론 북한군도 모두 이틀간이나 굶은 일이 있었다. 박소위가 보니 북 사단장도 같이 굶고 있었다. 다 굶어도 사단장쯤은 식사를 해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북 사단장은 식량이 도착해서 전 부대원에게 식량이 다 급식될 때까지 엄격하게 자기 통제를 하며 같이 굶었다.
달포나 그렇게 지난 어느 날 그간 자주 박소위의 불러 식사를 하며 인민군 편입을 권유하던 사단장은 의외의 말을 했다.
"집에 가고 싶으면 할 수 없네. 그냥 떠나게나!"
이때는 1951년 2월로서 북 사단장의 사단이 북으로 복귀할 즈음이었던 것 같다. 박소위는 믿기 힘든 이 명령을 마다할 수가 없었다.그는 정 많았던 북 사단장에게 마음 속으로 우러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북 사단 사령부를 떠났다.
그러나 북 사단장의 온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단장 부관이 따라 나오며 등짐을 질 수 있는 쌀 자루를 주었다. 국군 전선에 도착하려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데 굶지말라는 북 사단장의 배려였다.
초급 장교 시절 박경석 장군
박소위는 남으로 걸어오다가 동기생인 박준승 소위를 만나 남으로 걸었다. 도중에 북한군 내무서원을 만나 감금되었으나 이번에는
진짜로 탈출했다.
계속 남행하던 중 뜻 밖에도 미군 사병을 만났다. 미 해병대인 그는 낙오되어 지리가 서툰 산간 지역에서 헤매고 있었다. 박소위는 그를 합류시켜 계속 남행하다가 바로 박소위를 석방한 북한군 사단을 토벌하기 위해 북상하던 미 해병대와 조우했다. 미 해병대는 박소위를 잠시 포로 수용소에 감금했다가 국군에 인계하였다.
후퇴하는 북한군을 추격해서 화천까지 북진한 미 해병대.
국군에 돌아온 박소위는 그때 일본군의 영향으로 포로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군 행정에 불이익을 받을 수는 없었다. 북한군 사단장의 배려로 풀려났다고 하면 김창룡의 CIC에 붙들려가서 가혹한 취조를 당하고 군을 떠나거나 최악의 경우 군 형무소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박소위는 북한군 사단장의 이야기는 숨기고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고 얼버무렸다. 탈출 도중 내무서 감금을 뚫고 탈출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무렵의 상황으로서 박경석 소위의 판단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박경석 장군은 원대에 복귀한 뒤에도 계속 전장을 달리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하면서 전공을 쌓아갔다. 그는 6.25 전쟁이 끝날 때 동기생중에서 제일 많은 무공 훈장을 받은 중대장급의 베테란 간부가 되어 있었다.
이런 무훈과 무공 훈장은 12년 뒤인 1965년 맹호 사단을 파월하면서 박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최고의 군 인재를 모아 최강의 사단을 만들 때 그가 재구 대대 대대장으로 선발되게 하는 밑천이 되었다. 파월된 재구 대대는 세계가 보도하는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다.
1965년 파월된 재구 대대-대단한 전과를 거둔 대대였다.
박경석 장군은 이렇게 회고 했었다. 군생활의 초기 아직 십대였던 그의 주변에 인생의 스승이며 군 지휘관의 지표로 삼을만한 상관들이 거의 없었다. 부하들의 복지에 신경 쓰거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군 지휘관을 보기 힘들었고 오히려 지나치게 권위적이어서 사병들을 경시하거나 노골적으로 부패했거나 또는 여자 문제가 난잡한 지휘관들이 많았었다. 일본군 사병 출신으로 한국군의 장교가 된 사람들이 이런 일본군의 하층 저질 문화를 도입했던 것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아직 젊었던 박장군은 일선에서 부하들을 어떻게 통솔할 것인가 고민해야 하는 큰 고비마다 밖에는 노출을 하지 않고 가슴 속에만 감춰 두었던 북 사단장의 인간미있는 통솔을 떠올리며 귀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적군의 장교에게 까지 감동을 준 북한군 사단장은 누구일까?
그의 소개를 다음 편에서 해보겠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기고문으로,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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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11. 8:10
박경석 소위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해주고 놓아준 북한군 사단장의 정체는 누구였을까?
박소위는 국군에 귀대하자 바로 소대장직으로 원복해서 계속 전투를 이어갔다. 소대장 보임이 끝나자 부산 동래의 육군 종합 학교 구대장 요원으로 전출되어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 자기가 싸웠던 북한군의 사단장의 정체는 물론, 그가 지휘하던 북 사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가면서 박경석 장군이 입수한 정보는 1951년 1월 중순경 평창에 나타났던 적 부대는 북한군 4사단이라는 부정확한 것이었다. 북한군 4 사단은 북한군 최정예 사단으로서 의정부-미아리 축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최초로 점령했던 사단이었으며 오산에서 미 스미스 기동 부대를 격파했고 대전을 점령했었던 사단이었다.
과장되게 그린 1950년 7월,북한군 4사단의 대전 점령 작전.
그러나 낙동강 전선의 경남 창녕 영산에서 낙동강을 도강했다가 미 해병 1여단에게 제대로 걸려 부대 궤멸의 대 피해를 입고 소수만 살아남아 강 건너로 쫓겨갔다. 장비를 완전히 다 잃고 전상자도 많았던 정예 4사단은 9.28 수복 후 겨우 편제만 유지한채로 북으로 도망쳤다. 그 후 서해안 경비의 임무가 주어지고 다시는 전선에 나타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국군의 공식 전사가 1951년 국군 후방 깊숙이 침투했었던 북한 사단의 작전에 대한 전쟁사를 아주 허술하게 기록하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그 정체를 알기가 더욱 어려웠다.
박경석 소대와 전투를 했던 사단은 북한군 10사단이었다. 이 사단은 후에 인민 무력 부장을 했으며 현재 북한 실세인 최용해의 아버지인 최현이 지휘하던 북한군 5군단 소속이었다.
북한군 5군단장 최현. 김일성보다 다섯 살 많은 고참으로 한국 전쟁 무렵에도 김일성에게 "일성아!" "야 !자!" 하는 처지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김일성에게 꼬리를 내리고 아첨을 했다. 덕분에 은행 강도 출신으로 일자 무식이었지만 북한 인민 무력 부장을 지냈다.
사단장은 32살의 전문섭 소장이다. 이 자는 한국에 한 때 김문섭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17세 박경석 소위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자가 바로 이 자다. 1919년에 태어나서 1998년에 사망했고 북한군 대장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1930년대 만주 남부에서 소위 유격대라는 것의 패거리 두목 김일성은 잘 생긴 외모와 유창한 언변으로 남만주 시골 일대에 일종의 아이돌 가수같은 신비한 인기를 뿌렸었다. 직업도 없고 교육도 없어 앞날이 어두웠던 만주 산골 거주 동포들의 빈곤 가정들의 10대들 상당수가 그 실체를 모르고 김일성 부대에 모여들었다. 요새말로 말하면 이들은 김일성 키즈들이었다.
김일성은 정권을 잡고 연안파, 갑산파, 소련파들을 차례로 모두 숙청해버리고 빨치산 출신들만 권력의 주변에 남겨놓았다. 결국에는 빨치산 중에서도 부대 계열이 다른 항일연군 제2로군 최용건의 직계 부하들[김광협, 이영호 , 최용진]들도 다 내쳐버렸고 자기 계열의 부하들만으로 북한 정권의 권력 구조를 구성했다. 팔다리 다 짤린 최용건은 죽을 때까지 김일성 욕을 했지만 김일성은 나이가 훨씬 많은 이 대선배를 숙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김일성의 연락병 출신으로 19년간이나 인민 무력 부장을 했던 오진우. 최현과 같이 김정일 승계를 옹호해주고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중에서 김일성 키즈들은 끝까지 김일성과 김정일의 곁에 남아서 두 부자에게 충성한 골수 분자가 되었다. 10대 입산 무리들 중의 제일 신임했던 김일성 연락병 출신이고 인민 무력부장 오진우가 1917년생, 호위 총국장 리을설이 1921년생, 노농적위대 사령관 오백룡이 1913년생이니까 전문섭은 그 무렵 김일성 부대에 합류했던 젊은 세대의 한 패이기도 하다.
김일성 키즈중에 제일 나이 어린 것이 1928년 생으로 김정일 시대 총정치 국장을 했었고 미국에 가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던 조명록이다. 그는 열살 남짓의 나이에 김일성 부대에 들어왔다.김일성 키즈들은 아주 오래오래 김씨 왕조 권좌에 붙어있었다.
클린턴이 기껏 미국에 초대해주니 백악관에 군복을 입고 나타났던 조명록. 한국에도 왔었다.
전문섭은 말년에 오진우, 리을설이나 오백룡등과 같이 김일성이나 김정일 주변에서 활동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우리한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북한 전사에서는 이른바 명장,즉 군사적 능력이 높았던 지휘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문섭은 6.25 전쟁 개시 춘천 전선에서 최초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춘천 방면에서 국군 6사단 7연대를 공격했다가 패퇴당했던 북한군 2사단의 참모장이었다.
대좌였전 그는 사단장 소련계 이청송 소장에게 군사적 조언을 했었으나 우유부단한 이청송은 옥산포 전투에서 패전했었고 여러 번 실기해서 춘천 점령을 사흘이나 지연시켰다.. 직후 이청송은 경질되었으나 전문섭은 연대장을 거쳐 북 10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뒤에 붕괴되어서 압록강으로 도주했었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기사회생했다. 압록강 남쪽에서 중공군의 여러 번의 매복 기습에 당한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중공군과 북한군 기세등등하게 추격해왔다.
1950년 11월말 군단의 후위를 맡아서 분전하다가 평남 개천 군우리에서 중공군 매복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은 미 2사단의 전쟁 포로들
1950년 12월 중순경 후퇴하던 유엔군과 국군이 과거 38선 부근에 정지해서 느슨한 방어선을 쳤을 때 군단장 최현은 10사단장 전문섭에게 국군 방어선을 뚫고 남하하여 국군 배후를 교란하는 사단 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이 명령은 아마도 남진하던 중공군에게 질 수 없다는 김일성의 오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박경석 장군은 수기에서 평창에서 자기 부대와 맞붙은 북한군이 연대 병력이라고 했지만 실병력은 휠씬 못 미치는 규모였다고 회고했는데 정확히 본 것이다.
그 무렵 낙동강 전선에서 붕괴되어 북으로 도망친 북한군은 병력을 대폭 잃어 사단은 여단 규모로, 여단은 대대 규모로 축소되어 있었다. 전문섭이 10 사단 병력을 남쪽으로 침투시켰다고 하지만 실제 병력은 단지 4,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문섭은 1950년 12월 22일, 양구 방면에서 침투를 개시해서 국군 방어선을 똟고 주로 산을 타고 남하하여 며칠 후 200km 남쪽인 평창에 도달해서 여기에 일부 부대가 남고[아마 10 사단 사령부인듯] 다른 부대들은 더 남쪽, 남한 깊숙이 침투해왔다.
전문섭의 북 10사단 행적 - 양구 쪽으로 침투해서 평창에서 사단 본부가 머물렀고 다른 주력들은 거기서 더 남쪽 문경과 안동선까지 남하 침투했었다.
이들 남하 10사단 병력들은 지서를 습격하고 도로나 통신 시설물들을 파괴하고 소위 반동들을 학살하면서 남하했는데 그 일선 부대가 동쪽의 문경과 서쪽의 안동선까지 도달했었다. 침투 북한군의 활동으로 안동에서부터 그 북쪽 국군 3군단에 이어진 보급로가 차단되기도 하였었다.
한반도의 중앙을 뚫고 침투한 이 게릴라 부대의 출현에 UN군 사령부는 매우 놀랐다. 전문섭의 사단이 여기저기 점으로 흩어져 설치고 다니는 바람에 그 추정 병력은 실병력보다 훨씬 더 많아 보였다.
미군은 1950년 7월, 호남 지방으로 우회해서 남해안에서 유엔군의 서쪽 측면을 찌른 방호산의 북한군 6사단을 양동 작전을 하는 연대 병력으로 과소 평가했던 덕분에 하동 전투와 마산 부근 진동 전투에서 큰 피해를 당한바 있어서 이번에는 단단히 대비했다.
전문섭 부대 토벌을 하며 북상했던 미 해병대는 화천과 펀치볼에서 전투를 하다가 서부 전선으로 이동했었다. 1951년 9월 펀치볼 부근의 미해병대가 군화를 벗고 계곡 물을 건너고 있다.
국군 9사단과 5사단을 투입하고 여기에 장진호에서 탈출해 나와 마산에 와서 재편성과 휴식을 하던 정예 미 해병 1사단을 북한 게릴라 부대의 토벌에 투입하였다. 여기에 일부 유엔군 벨기에 대대와 캐나다 대대들과 6,000명의 전투 경찰 부대까지 합세했으니 무려 6만5천명의 병력이 이 잡동사니 같은 무장을 한 소수의 부대 소탕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10사단 부대들은 주로 이 지역의 험한 산으로 도주하거나 이동했기 때문에 미 해병들은 소탕에 애를 먹어서 이들을 공수 보병[Airborne foot soldier]이라는 별명을 붙어주었다.
그러나 북한군 10단의 한 연대가 문경에서 미군에 10군단에 배속되어 북진했다가 돌아온 국군의 유엔 특별 공격대를 야간 기습했다가 대패한 이후 더 이상 큰 대규모 정규전을 도발하지는 않았었다.
1951년 1월 13일 새벽부터 이틀간 문경 동로 국민학교 부근에서 있었던 국군 특별 공격대와 북한군 10사단의 혈전 - 결국 북한군은 패퇴했다.
북한군 10사단은 그 뒤 소규모로서 유격전만 하다가 침투 개시 두 달 만인 2월 23 일에 철수 명령을 받고 한달 간 축차적으로 북으로 철수해갔다.
침투할 때 4,000명이던 북한군 10사단 중에 살아 돌아 온 북한군은 단지 1,0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전문섭 지휘하던 10사단의 활약은 지금도 북한의 전사에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다.
비록 사단 병력의 4분지3을 잃고 돌아왔으나 북한군 10사단은 무려 6만 5천명의 UN군 병력을 후방에 묶어 놓고 남한의 후방을 휘저어대서 그들이 입었던 피해의 몇 배나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박경석 소위의 부대가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때가 1951년 1월 15일이니까 그 때는 북한군 10사단 부대가 기세 좋게 남하할 때였을 것이다.
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 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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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18. 13:03
전문섭의 북한군 10사단이 남한으로 침투해서 들쑤시고 다니자 영향력 있던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 중령은 국군에게 왜 보복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이에 국군은 훈련소에서 3주만 훈련 받은 훈병들을 차출해서 647명의 특공대를 편성해서 북파했다. 이 엉성한 부대는 훗날 주원 부대 사령관 채명신 중령이 지휘했다.
백골병단이라는 부대 별칭을 가진 이 북파 특공대는1951년 2월 초에 북파되어 두 달간 동부 전선의 북한군 후방 30-50km 지역을 휘저으며 북한군들에 큰 피해를 주고 귀환하였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도 못한 부대였지만 남파 공비 사령관 길원팔을 잡아 죽이고 북한군 부대 여러 개를 기습해서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었다. 가혹한 유격 전투 상황에 대원 절반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어가면서 말이다.
백골병단 출정식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는 정일권 총장
채명신 장군은 백골병단의 북파 작전등에서 경험을 쌓아 국군 최고의 게릴라 전 전문가가 되었고 그런 평가는 나중에 주월 한국군 부
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데 한 토대가 되었다.
을지 무공 훈장을 박경석 중령에게 수여하는 채명신 장군- 오른쪽은 중대장 이재택 대위
채명신 장군이나 박경석 장군은 결국 북한군 10사단이라는 직간접의 매개체를 공동으로 두고 월남에서 사령관과 대대장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인연을 맺게 된다.
채명신 사령관이 대민사업을 강조했던 지휘 방침을 추진했지만 박경석 재구 대대장은 어느 주월 한국군 부대도 하지 시도하지 않았던 극빈 월남인 가정이나 배트콩 가족을 위한 재구촌을 세워 대민 사업을 더 강화했었다. 자기 경험에서 대민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경석 장군은 어린 나이에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서 포로 경험등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역전의 용사다. 동족을 침략한 잔인한 김일성 일당에 대해서도 강한 적개심을 가진 투철한 반공 인사이기도 하다.
재구촌 건립후 월남 군수 록대위가 빈딘 성장의 감사장을 박경석 중령에게 전달하고 있다.왼쪽은 촌장
이런 강직한 분이 나와 대화를 나눌 때 북한군 10사단장 전문섭의 인간미있는 포용력에 대해서 자주 언급을 했었다. 나는 아래 전문섭의 사진을 보여드리며 혹시 기억이 나는지 물어보았다. 80대의 박경석 장군이 70년 전의 인물을 기억하기는 사실 무리였다,
박장군은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북한군 사단장 전문섭이 사람 좋은 인상이었고 또 대화 할 때 자주 미소를 지어서 상대방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인간미의 특성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 속의 전문섭이 바로 그런 인상을 주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이 맞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북한군 10사단장 전문섭의 후년 모습
전문섭은 어리고 똑똑하게 생긴 박경석 소위가 마음에 들어 꼭 전향시켜서 북한군 군관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따뜻한 대접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소위 남조선군의 엘리트 장교가 인정에 감동해서 평생 그의 인간미를 가슴에 품게 만들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 사례를 소개하는 배경이 있다. 적의 마음을 잡아 우리 편으로 만든다는 기술, 즉 중국 고전에서 심정[心征]이라는 표현하는 고난도의 포용 기술에 대해서 우리 군도 좀 더 진지하게 들여다 볼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희망이 있어서이다.
인간적인 대우로서 적의 마음을 얻어 아군으로 만드는 포용의 사례는 삼국지나 수호지에도 자주 나오는 주제다. 사로 잡혀 꽁꽁 묶여 끌려온 적장을 이쪽의 장수가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좌우를 꾸짖어 물리친 다음 손수 결박을 풀어서 상좌에 모시는 외교술로서 적장을 감화시켜 아군으로 만드는 장면들이 바로 그것이다.
맹자가 이런 포용의 기술을 정치에 도입한 왕도정치를 주장했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인 모택동은 적을 아군으로 만드는 포용의 기술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서 적인 장개석 군을 격파하는 한 주요 기술로 활용하였다. 이 모택동의 포용 기술이 어찌나 크게 위력을 발휘했는지 서구[西歐]에서는 모택동의 포용 기술을 뇌를 완전 세탁해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는 뜻으로 세뇌[洗腦]라고 불렸다.
모택동의 세뇌 전술 전략에 당했던 장개석은 타이완으로 천도 후에 모택동군이 포로로 잡았다가 석방한 휘하 장군들의 타이완 귀국을 금지했었다. 모택동이 그들에게 전파력 강한 바이러스를 심어 일종의 정치적 좀비로 만들었다고 오해하고 겁을 먹었던 것이다.
북한 벽동 포로 수용소에서 중공군에게 세뇌 교육을 받고 있는 미군 포로들.이 세뇌 교육에 넘어간 21명의 미군들과 1명의 영국군이 중국으로 갔다. 이 포로 수용소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중공군은 한국전에 참전해서도 이 원칙을 지켜 포로들을 학살하는 것을 비교적 자제했었다. 동족인 국군 포로들이나 유엔군 포로들 학살을 밥 먹듯 해대던 북한군과 대조가 된다.
말이 나온 김에 더 자세한 사례를 들어보겠다.
만주에서 공산당 간판을 걸고 비적 노릇을 하던 김일성도 일본군이 구사했던 심정, 즉 포용 기술에 당해서 소련으로 도망친 경우이기도 하다. 1939년 만주의 일본군은 중일전쟁이 격화되어가자 후방의 후환거리를 없앤다는 목표로 노조에[野副 昌德] 소장을 사령관으로 한 노조에 작전을 발령하였다.
김일성 토벌의 총지휘를 한 노조에 쇼도쿠 소장
군경 7만명과 전투기까지 동원한 대 토벌전에 만주의 항일연군 사령관 양정우가 사살되고 김일성 부대를 비롯한 부대들은 가혹한 추격에 쫓기다가 섬멸되거나 소련으로 도망쳤다.
이 노조에 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던 특수 부대가 나카지마 다마지로[長島 玉次郞]헌병 상사가 지휘하던 나카지마 공작반이다. 그는 항일연군에 침투해서 잡은 포로는 인정과 예우로서 처우해서 대부분을 모두 전향시켰다. 그의 공작은 특히 항일연군 수장 양정우의 형제같았던 정빈을 전향시켜 결국 양정우를 죽게 만들었다.
김일성의 유격대-- 후열 중앙이 김일성이라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조선인 공비 두목 중에서도 박득범은 전향하여 모든 정보을 다 불고 만주국 경찰 경위로 변신하였다.오성륜이라는 거물도 전향시켜 만주 경찰 고문으로 할용하였다. 김일성의 전처 김혜순도 체포되었는데 나카지마가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가족과 지내며 지극 정성으로 대하자 김혜순도 전향해서 김일성에 관한 정보를 다 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결혼하였다.
김일성 부대는 약 300명 정도 되었고 약 30명이 여성대원들이었다. 이중에 제일 예쁜 여자가 김혜순이었는데 당연히 김일성의 처가 되었다. 김혜순을 잃고 김일성은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조금 흐르자 지순용이라는 대원과 연애중이던 김정숙을 가로채서 마누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탈북한 북한의 언론인에게 직접 들었었다.
왼 쪽이 김일성, 중앙이 최현, 오른 쪽이 안길. 이 사진은 후에 김일성을 중앙으로 배치된 사진으로 변조되었다.
나카지마 공작반의 사례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북한에서는 상당히 연구가 되었었다. 나카지마는 나중에 대위로 특진했다. 전후 소련에 끌려가서 고생하다가 일본에 돌아오자 동해의 사도 섬에서 농사를 짓다가 작고했다. 노조에 작전에서 발휘한 그의 수법은 국군 심리전 성과는 남한에서도 깊이 연구되어야 할 주제다.
이런 포용의 기술로 적을 감화시키던 기술이 6.25 전쟁 중에 국군은 잘 활용하지를 못했었다. 원체 전황이 나빴었고 북한군의 잔학 행위가 많았었기 때문에 그런 포용의 기술이 적용될만한 여유가 없었다.
포용의 기술이 적극적으로 구사된 것은 전투 경찰에서였다. 경찰은 공비 토벌 후반기에 공비들이 자수하거나 체포되고 살인등의 전과가 없다면 그들을 감화시켜서 전향시키는 전법을 적극 구사했었다. 이들 전향한 공비들은 경찰로 받아들여져 임용된 후 공비 토벌전에 다시 투입되었는데 전과도 올렸을뿐더러 이 중에 능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경찰서장까지 진급한 사람도 있었다.
귀순자들로 편성한 위장 복장의 사찰유격대
사실 포용을 바탕으로 한 대민 사업은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전유물인 심리전으로서 큰 전과를 거두었었고 이라크 파견 자이툰 부대의 활동에서도 성과가 있어 미군이 그 교범을 빌려가서 참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싶다. 이제 북한이나 중국이 공세적으로 가하던 세뇌 공작을 방어적인 입장에서 대하던 우리 국군은 공세적으로 이 세뇌 공작을 연구하거나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군의 일선 부대 지휘관들에게 이런 포로 취급에 대한 제네바 협정의 단순한 교육 이상을 넘어 적극 포용과 전향의 기술에 대한 교육의 조심스런 접근이 있었으면 한다.
한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박경석 장군의 수기에서 남한으로 뚫고 들어왔던 10사단 사단장 전문섭이 평창 이북의 한 산촌 전체를 사단 사령부로 삼아 남으로 내려 보낸 부대들을 원격 지휘했다는 전쟁사적인 사실이 알려졌다. 놀란 것은 박경석 소위가 포로가 되어있는 동안 그는 전사 처리가 되어버렸었다. 그러나 박 소위는 계속되는 전투로 그 행정 기록을 정정할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바쁜 세월을 보낸 뒤에 1950년대에 국방부가 서울 동작동에 국군 묘지를 개설했을 때 그 묘소중의 하나가 박경석 소위의 것이었다.
박경석 장군의 묘소
유해도 없는 그 시절 무엇을 매장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엉망이었던 혼란기 군 행정의 단면을 보여주는 한 표본이기도 했다. 박경석 장군은 그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으나 그 묘소를 없애지를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다. 가끔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자기의 허묘[虛墓]를 찾아가 술 한잔을 마시며 마음을 달랜 뒤에 온다고 한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기고문으로,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실에 기초한 감동적인 글이네요
북의 인민군은 관병일치 상하일치의 고상한
장병관으로 무장되여 있지요
장령으로 부터 전사에 이르기 까지
친형제처럼 관계가 형성되여 있어서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병사들은 지휘관을 친형처럼 믿고 존경하고 따르지요
한국군이나 자본주의 나라 군대들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고상한 미풍이지요
사상의지적으로 통일단결된 군대들이므로
실제 전투에서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하는것은
당연지사이지요
남한사회가 부패한 이유는 친일 세력과 미국의 식민지 정책으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북이라고 모순은 없겠지만 왜넘에 항거한 독립투사가 집권한 나라와 왜넘 밑에서 굴종하던 자들이 집권한 나라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고 지금 보아도 북의 자주성과 미국에 대해 한치도 굴복없이 목소리를 내고 대항하는 모습
에서 한민족의 통일주체는 어느쪽이 되여야하는지 고민해 본적이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4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
다음 이야기도 꼭 좀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용 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