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서 평론] 우리나라 개인 최다 작품을 발표한 작곡가 박춘석
■ 노래마다 ‘살아 있는 악상’,
‘내 애인은 오로지 작품’
황혼의 엘레지, 아리랑 목동, 삼팔선의 봄, 바닷가에서, 비 나리는 호남선, 섬마을 선생님, 초우, 가슴 아프게, 기러기아빠, 물레방아 도는데, 공항의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등,
1950년대 SP시대에서 LP시대를 거쳐 2000년대 CD시대를 풍미하며 대한민국가요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작곡가 박춘석(1930.5.18 ~ 2010.3.14.).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내 애인은 오로지 작품일 뿐’이라며 평소 ‘노래와 결혼했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그는 지난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대중가요 국내 개인 최다인 2700여곡을 작곡했고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168곡이 등록되어 있다. 활동 기간 40여 년 동안 쉼 없이 창작 활동에 몰두했던 그의 노래를 한 두 곡 쯤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다.
속칭 ‘박춘석 사단’이라 불리던 톱 가수 군단과 함께 ‘이인삼각(二人三脚)’을 이루며 한국가요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 노래마다 살아있는 악상으로 격동의 대한민국, 시대의 감성을 담은 이 노래들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국민들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 박춘석 음악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글 l 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내가 만난 작곡가 박춘석 선생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박춘석, 본명 박의병(朴義秉). 필자가 박춘석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뵌 것은 타계하기 3년 전인 2007년 경이었다.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13년째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이 만남은 박선생의 동생인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박금석씨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그 무렵 필자가 작사, 작곡가들의 단체인 한국가요작가협회보를 통해 쓴 칼럼 ‘작가 탐구-박춘석 편’을 본 뒤였다. 그는 현재 박춘석 선생과 의사소통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살아계실 때 한 번 뵙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해 마련된 자리였다. 장소는 서울 강동구 둔촌동 아파트. 오랜 투병으로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지만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뿔테 선글라스'는 여전했다.
"거동을 못하고 언어장애로 의사 표현을 못한 지 이미 오래되었죠. 이젠 가까운 사람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요. 하지만 평소 예민했던 성격 그대로 자다가도 누가 곁에 오면 금방 깹니다." 동생 박금석(당시 76세)씨의 말이었다. 당시 폐렴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는 박춘석 선생은 인사를 하자마자 덥썩 손을 잡았다. 악력(握力)이 보통이 아니었다. 여전히 손힘이 세다고 하니 금세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지난 40여 년간 집안일을 돌보던 이옥분(당시 80세)씨로부터 ‘박선생은 평소 TV시청을 즐기신다’는 근황을 전해 들었던 기억도 난다. 특히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고 또한 KBS '가요무대'나 '열린 음악회'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데 화면에 남진·이미자·패티김씨가 나오거나 본인이 작곡한 노래가 나올 때면 종종 눈물을 흘리신다고 했다.
이러한 근황은 당시 필자가 연재하고 있던 ‘박성서의 노래 속 Why?(조선일보 2009년 3월 21일자) 칼럼을 통해 사진과 함께 공개하기도 했다. 물론 가족들의 허락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박춘석 선생의 노래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당시 한국가요작가협회보 ‘가요마을’에 썼던 ‘작가탐구-박춘석 편’의 칼럼을 먼저 소개한다. 아래 글은 ‘가요마을 2006년 12월호’에 쓴 칼럼으로 박춘석 선생의 활동기록을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다.
■ 한국가요작가협회보 ‘작가 탐구-작곡가 박춘석 편’전문 -2006년 겨울호
▲ 길옥윤, 엄토미 등 연주인들과 함께 한 박춘석
신동. 1950년대 재즈 피아니스트로 등장해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뿔테 안경’의 변함없는 캐릭터로 화려한 악상과 연주를 선보였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박춘석 선생. 지난 94년 8월, 밤새 작곡에 몰두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현재까지도 투병 중인 선생의 소식은 많은 가요인들을 매우 안타깝게 하고 있다.
본명은 의병(義秉), 춘석(春石)은 아명. 1930년 5월 8일, 해방 전 조선고무(朝鮮고무工業株式會社)를 운영하던 부친 박영근(朴永根)과 모친 최진주(崔鎭珠)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서울 의주로1가, 즉 서소문에서 태어났다. 부유하고 다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음악적으로 매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신동’으로 불과 4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현재 선생의 둔촌동 집 근처에서 12년 째 돌보고 있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동생 박금석씨는 “어릴 때부터 형은 유성기에서 한번 들은 노래를 곧바로 화음을 붙여 다시 풍금으로 연주해내는 천재였다."고 회고한다.
■ 빡빡머리를 털모자로 가린 채 고등학교 때부터 연주활동 시작
봉래소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누구의 특별한 지도 없이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스스로 독파했던 이 ‘범상치 않은 귀재’가 피아니스트로 처음 무대에 선 것은 48년,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다. 처음 김영순(베니김), 최치정(길옥윤)씨가 찾아와 명동의 나이트클럽인 ‘황금클럽’ 무대에 함께 설 것을 제의해 와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 계기. ‘빡빡머리’에 ‘털모자’를 쓴 채 클럽 연주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 1년간 다니다 중퇴한 뒤 다시 이듬해인 50년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 졸업했다.
본격적으로 악단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 것은 9.28 서울수복 직후부터. 당시 12인조 악단을 직접 결성해 충무로 2가 ‘은성살롱’에 전속밴드로 들어간 뒤 이름도 ‘은성(Silver star)경음악단’으로 명명했다. 이후 미군 상대 클럽인 ‘금천대회관’ 등의 무대에도 섰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악단을 재정비, 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으로 들어간다. 아울러 이 시기에 ‘박단마 그랜드쇼’와 콤비를 이뤄 백일희, 곽순옥, 이해연, 후라이보이와 함께 시공관에서 ‘코리아 판타지’라는 공연을 올려 호평을 받기도 했다.
■ ‘황혼의 엘레지’를 시작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 선보여
▲ 작곡가 이봉조씨와
주로 샹송과 팝 등 외국가요 편곡이 레퍼토리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 무렵, 주위의 권유로 창작한 첫 작품이 바로 ‘황혼의 엘레지’. 이로부터 10년 후 가수 최양숙의 목소리로 대중들에게 히트하는 이 ‘황혼의 엘레지’는 처음 유니버샬을 통해 백일희의 목소리로 먼저 취입(유니버샬/PL 17) 되었다.
아울러 그는 55년, 본격적으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되기 전까지 ‘황혼의 엘레지’를 비롯해 ‘서커스 걸(백설희, 유니버샬/PL 28)’ ‘샌프란시스코 블루스(백일희)’ 등을 취입, 음반으로 발표하는데 이 때 작사가 명으로 쓴 예명이 ’백호(白湖)’. 이 필명은 동생 박금석씨가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다.
KBS 경음악단장으로 활동한 지 1년 뒤인 1955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되면서 전속 기념으로 내놓은 첫 음반이 박단마의 ‘아리랑 목동’. 이어 56년 발표한 ‘비 내리는 호남선(손로원 작사, 손인호 노래)’을 히트를 계기로 스물여섯 살의 이 젊은 신예는 비로소 음악성을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어 ‘다정도 병이런가(반야월 작사, 남인수 노래)’, ‘나폴리 맘보(고명기 작사, 현인 노래)’, ‘아주까리 주막집(백호 작사, 안다성 노래)’, ‘불국사 길손(반야월 박사, 최갑석 노래)’ 등 창작곡을 비롯해 ‘로즈 마리’ ‘인디언 러브 콜’ ‘사브리나’ 같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곡을 백일희, 현인 등과 콤비를 이뤄 발표했다.
‘백일희’라는 이름은 당시 인기 팝가수 ‘페기리’에서 딴 이름으로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의 동생이기도 하다. 백일희의 본명은 이해주. 백일희의 소개로 알게 된 또 한 명의 가수가 패티김. 당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패티김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까지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첫 독집음반을 통해 번안곡 ‘틸(사랑의 맹세)’, ‘파드레’를 발표한 데 이어 이번엔 패티김의 소개로 함께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여성듀엣 김치켓을 만나 역시 번안곡인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발표한다.
■ ‘진리의 밤’을 시작으로 100여 편의 영화음악 작업
▲ ‘1950년대 박춘석 사단’이라 불리던 가수들과의 공연 가는 도중에 한 장면. 손인호, 안다성, 이해연, 최갑석 등의 모습
이때부터 ‘박춘석 악단’을 이끌고 주로 박단마, 백일희 등 당대의 팝 싱어들과 호흡을 맞추던 그는 창작 스타일을 1백80도 전환,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으로 까지 창작 범위를 넓힌다. 영화음악 첫 작품은 ‘진리의 밤(1957년, 김한일 감독)’. 아울러 1959년, 김석민 원작의 연극 ‘삼팔선의 봄(노래 황해, 이후 최갑석 취입)’을 비롯해 연극 무대음악으로까지 영역을 확대, 다양한 음악적 장르를 선보인다.
이후 영화 ‘사랑이 가기 전에(1959년, 정창화 감독-이하 연도, 감독)’, ’비극은 없다(1959, 홍성기)‘ ’고바우(1959, 조정호)‘, ‘슬픔은 강물처럼(1960, 전창화)’, ‘딸(1960, 김화랑)’, ‘슬픔은 없다(1960, 김묵)’, ‘어딘지 가고 싶어(1962, 유두연)’, ‘임자 없는 나룻배(1962, 엄심호)’등을 비롯해 뇌졸중으로 쓰러진 1994년까지 1백여 편의 영화음악에 몰두했다.
또한 영화 ‘유랑극장(1963년, 강범구 감독)’주제가인 ‘바닷가에서(안다성)’ ‘사랑이 메아리칠 때(안다성)’를 비롯해 ‘남과 북(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곽순옥), ‘고향하늘은 멀어도(금호동),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박재란)’ 등을 발표하며 오아시스 전속 기간 동안 히트 작곡가로 부상하며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는다.
■ 한때 빅히트의 3대 공식으로 불리던
‘박춘석 + 이미자 + 지구’
1964년, 지구로 전속을 옮기며 스스로 ‘제2의 전환기’를 맞아 작풍도 본격 트로트로 급선회한다. 비로소 이미자씨와의 콤비시대가 개막된 것.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한 번 준 마음인데’ ‘아네모네’ ‘떠나도 마음만은’ ‘삼백리 한려수도’ ‘낭주골 처녀’ ‘타국에서’ ‘노래는 나의 인생’ 등이 이미자씨와 콤비를 이뤄 발표한 곡들이다. 이를테면 이미자씨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별칭의 왕관을 씌워준 장본인으로 본인의 히트넘버 4분의 1을 이미자씨가 불렀고 이미자 히트넘버 3분의 1 또한 그가 만든 노래인 셈이다.
당시 빅 히트 3대 공식이었던 이 ‘지구+박춘석+이미자’라는 진용을 이뤘던 시기에 그는 ‘가슴 아프게(남진 노래)’를 비롯해 ‘초우(패티김)’, ‘타인들(문주란)’, ‘호반에서 만난 사람(최양숙)’, ‘방앗간집 둘째딸(쟈니브라더스)‘, ‘마포종점(은방울자매)’, ‘별은 멀어도(정훈희)’,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등을 잇달아 발표, 히트 메이커로 부상함과 동시에 영화음악작업도 계속 병행했다.
‘마포 사는 황부자(1965, 이봉래 감독)’, ‘남과 북(1965, 김기덕)’, ‘초연(1966, 정진우)’, ‘밤하늘의 부르스(1966, 노필)’, ‘초우(1966, 정진우)’, ‘가슴 아프게(1967, 박상호)’, ‘섬마을 선생(1967, 김기덕)’, ‘그리움은 가슴마다(1967, 장일호)’, ‘엘레지의 여왕(1967, 한형모)’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1984, 정진우)’ 등이 그 것으로 그의 히트곡은 곧바로 영화로, 또 주제가는 곧바로 히트곡으로 자리했다.
■ ‘어떤 가수도 박춘석과 손잡으면 성공한다’는 등식까지 회자돼
‘어떤 가수도 박춘석씨에게 픽업되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등식까지 화제가 되었던 1966년 무렵, 그는 연주활동을 중단한 채 작곡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한 직후인 67년 3월, 시민회관 대강당 무대에서 ‘박춘석 가요창작 999곡 째 발표’라는 이색적인 타이틀의 공연을 펼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자신의 노래 모두의 전주와 간주는 물론 편곡 또한 스스로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70년대 들어서면서 ‘박춘석 창작가요 2천곡 기념공연’ 무대를 국도극장에서 막을 올림과 동시에 ‘박춘석 사단’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이어 ‘박춘석 작곡사무실’을 열어 이현, 이영일 등 신인을 발굴함과 동시에 ‘물레방아 도는데’의 나훈아, ‘공항시리즈’의 문주란, ‘연포아가씨’의 하춘화 등 정상급의 가수들과 손잡고 히트 행진을 계속했다.
■ 미소라 히바리에게 외국인 최초로 신곡을 써준 작곡가
국내 히트 작곡가로의 명성은 일본으로까지 이어져 78년 12월, 일본 콜롬비아 측의 의뢰로 일본의 최고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에게 ‘風酒場(かぜさかば)’를 취입시켜, 외국인 최초로 그에게 신곡을 써준 작곡가로 자리매김 된다.
현재 ‘美空 ひばり전집 CD’에 수록되어 있는 이 노래를 기점으로 그의 음악성은 더욱 인정받아 이로부터 11년 뒤인 89년, 미소라 히바리가 세상을 타계했을 때에는 ‘초청하객 인사 1백인 명단’에 그가 포함되었을 정도로 일본 측으로부터도 그의 음악성과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1980년대 초반, 작곡가 길옥윤, 송재리씨 등과 함께 ‘(주)태양음향’을 공동으로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88년 거성레코드사로 독립,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을 직접 음반으로 제작을 시도했다.
1987년 한국 음악 저작권협회 회장을 거쳐 95년 문화훈장 옥관장을 서훈 받은 그는 지난 94년 8월, 밤새워 곡을 쓰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이러한 와병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극구 거부해왔었다.
얼마 전 폐렴으로 큰 위기를 넘긴 이후 현재는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고 있지만 이젠 가까운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평생 음악적 동지이자 피아니스트인 동생 박금석씨가 현재 그의 손발을 대신하고 있다.
‘오로지 음악과 결혼했다’며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한국 가요의 지평을 넓힌 작곡자이자 탁월한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 그가 남긴 살아있는 화성들은 여전히 만인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 이상이 우리나라 작사가 작곡가들의 단체인 한국가요작가협회보 ‘가요마을’에 썼던 ‘작가 탐구 - 박춘석 편’의 전문이다. 지난 2006년 겨울호에 쓴 칼럼이다.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첫댓글 저는 공연에 가서 박춘석씨를 본적이 있는데
왜 결혼을 안했는지 그게 제일궁금했어요.돈도 말이 벌고 유명해 많은 여성들이 따른것으로 아는데...
제가 좋아하는 패티김 노래도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