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1989년 가을, 盧泰愚 대통령, 激動의 현장으로 여행하다! 공산권이 무너져 내릴 때, 레이건, 요한 바오로 2세, 브란트, 콜, 대처, 미테랑은 한국 대통령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모든 것은 올림픽에서 시작되었다 1988년 9~10월에 열린 서울올림픽엔 소련과 東歐(동구) 공산권 국가 팀이 모두 참여하였다. 1976년의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22년만에 東西(동서) 진영이 모두 참여한 온전한 올림픽이 열렸다. 스포츠 强國(강국)인 공산국가에선 이 올림픽을 텔레비전으로 중계 방송하였다. 이 나라 국민들은 자유롭고 번영하는 한국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경기운영도 최고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신세로 거지국가처럼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라가 자신들보다도 잘 살고 있는 데 대한 충격은 공산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되었다. 때는 마침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일으킨 개혁 개방의 바람이 공산권을 휩쓸고 있던 시절이었다. 소련이 북한의 반대를 무시하고 서울올림픽에 참여하기로 한 것도 변화하는 공산권의 분위기를 상징하였다. 소련은 선수단을 서울로 보낼 때 걱정을 많이 했다. 한국 사람들이 소련 팀에 적대적으로 나오면 어쩌나? 소련 선수단이 올림픽 기간중 관중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는 것을 보고는 修交(수교)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韓蘇(한소) 수교에 관계하였던 당시의 소련 외교관은, "수교의 가장 강력한 공로자는 한국 국민들이었다"고 말했다. 1979년에 朴鐘圭씨(당시 대한체육회장)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서울올림픽 유치를 건의하였을 때 “올림픽을 계기로 삼아 남북대결에서 결정적 優位(우위)에 서고, 올림픽을 활용하여 공산권과 수교한다”는 취지를 강조하였다. 朴世直(박세직) 올림픽 조직위원장은 李御寧(이어령)씨가 제안한 ‘벽을 넘어서’를 서울 올림픽 개막식의 주제로 정하였다. 영어로는 ‘벽을 부수면서’(Breaking down the wall)이라고 했다. 1989년 11월 동서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벽을 넘어서’를 소재로 한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가 울려 퍼졌다. 6ˑ29 선언-서울올림픽-북방정책 서울올림픽 유치, 준비, 개최를 통하여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정부는 자연스럽게 禁斷(금단)의 공산국가 지도층과 접촉할 수 있었고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공산국가들은 스포츠를 重視(중시)하므로 스포츠 담당 장관들은 정부의 실력자들이었다. 서울올림픽이 북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人脈(인맥)의 인프라를 깔아준 것이다. 서울올림픽은 민주화의 보증자 역할도 하였다. 전두환 정부와 민주화 세력은 ‘서울올림픽을 실패하게 하여선 안 된다’는 대명제에 無言(무언)의 합의를 한 상태였다. 정부는 그렇기 때문에 계엄령을 펴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할 순 없었고, 민주화 세력도 극한투쟁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균형점에서 1987년 盧泰愚의 6ˑ29 선언이 나와 타협적이고 평화적인 한국식 민주화 과정을 밟게 되었다. 북한정권만은 1983년의 아웅산 테러, 1987년의 KAL기 폭파사건 등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서울 올림픽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그때마다 自充手(자충수)를 두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갔다. 아웅산 테러와 KAL기 폭파사건 때는 범인들이 붙들려 한국 안기부의 자작극으로 몰아가려던 김정일의 음모가 들통 나버렸다. 북한정권은 내부 무마용으로 1989년 평양 청년 축전을 개최하는 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행사준비에 50억 달러를 투자, 경제에 멍이 들게 하였다. 한국이 가장 아름답게 빛났던 서울올림픽에 모였던 국민들의 단합된 마음은 그 직후 시작된 5공 청문회로 다시 흩어졌으나 올림픽의 성공을 딛고 가동하기 시작한 盧泰愚 정부의 북방정책은 1989년부터 결실을 보게 된다. 盧泰愚 대통령은 올림픽과는 숙명적으로 연결된 이였다. 그는 군복을 벗자말자 정무장관으로서 바데바덴 국제올림픽 총회에서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작전을 국내에서 총괄 지휘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체육부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대통령으로서 올림픽 개막을 선언했으며 북방정책의 騎手(기수)가 되었다. 盧泰愚 대통령은 소련, 중국, 동구공산권 국가들을 상대로 북방정책을 펼 때 한국이 6ˑ29 선언을 계기로 민주화를 시작하였다는 점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한국은 그때부터 ‘올림픽을 성공시킨 민주주의 국가’라는 브랜드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1987년의 6.29 민주화 선언, 1988년의 서울올림픽, 1989년의 북방정책 始動은 東歐공산권 붕괴 사태와 만나게 된다. 1989년 2월1일 헝가리의 줄라 호른 외무담당 국무장관이 서울에 와서 兩國(양국)의 상주 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시키기는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國交(국교) 수립에 이르렀다. 이 헝가리는 서울올림픽 참가를 가장 먼저 결정한 공산국가이기도 하였다. 헝가리는 운명적인 1989년 여름엔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개방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이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베를린 장벽 붕괴, 동독 정권 붕괴, 독일통일로 이어지는 대사변을 일으킨다. 盧泰愚의 東歐 혁명현장 紀行 1989년 6월엔 폴란드의 공산정권이 下院(하원)의석의 35%, 새로 만든 上院(상원)의석 100석 전부를 선거에 붙였다. 이 선거에서 下院의석의 35% 전부와 上院의 99석을 자유노조 후보가 차지했다. 공산당 후보는 한 사람도 당선되지 않았다. 자유노조 운동 지도자 바웬사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바웬사는 공산당 세력과 정부를 구성하기를 거부했다. 의회는 할 수 없이 자유노조 정부를 승인했다. 선거에 의해서 폴란드의 공산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선거 직전 폴란드 공산당 당수와 전화하면서 “선거 결과를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역사가들은 소련이 東歐의 자유화 大勢(대세)에 대한 武力(무력)저지를 포기할 것임을 선언한 이 전화가 “사실상 東西냉전을 끝낸 것이다”고 말했다. 그 뒤 반년 사이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공산당 정권이 붕괴되고 11월엔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민주화-올림픽-북방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동구공산권 붕괴가 있었다. 한반도의 運勢(운세)가 세계사의 大勢와 결합된 것이다. 이 大勢를 만드는 데 한국인들이 서울올림픽을 통하여 한 몫을 했다는 점은 영원히 자랑할 만하다. 세계사의 전환점이 된 1989년 가을의 東歐 대혁명, 그 현장으로 盧泰愚 당시 대통령이 頂上(정상)회담 여행을 한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盧 대통령은 그해 11월9일에 있었던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16일 동안 서독을 비롯하여 헝가리, 영국, 프랑스 등지를 방문, 頂上회담을 가졌다. 盧 대통령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의 進路(진로)를 놓고 고심하던 대처 영국 수상, 콜 서독 수상,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등을 만나 나눈 생생한 대화록을 최근 입수하였다. 한국의 대통령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 한복판에서 그 역사를 만들던 주인공들과 나눈 대화를 20년 뒤에 읽어보니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에 담긴 인간의 숨결과 감정까지 느낄 수 있었다. 독자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년 전 東歐 혁명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브란트의 방문 盧泰愚 대통령은 유럽 巡訪을 앞두고 찾아온 두 손님을 맞았는데 이들이야말로 東歐 공산권 붕괴의 단초를 연 인물이었다. 1989년 10월8일 오전 요한 바오로 2세는 聖體(성체)대회 참석차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청와대를 찾아왔다. 폴란드 출신인 교황은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여 소련을 코너로 몰았다. 두 사람은 폴란드가 공산세계의 안전핀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안전핀을 뽑아버리면 東歐가 수류탄처럼 폭발하고 그 파편으로 소련도 날아갈 것으로 보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盧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한국에서도 동구에서와 같은 변화가 이룩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폴란드·헝가리 등 동구권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특히 경제파탄 때문입니다. 저의 母國 폴란드에서는 솔리대리티라는 강력한 자유노조의 압력이 작용했습니다. 그에 따라 공산당은 원탁 정치협상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고, 그 결정에 따라 완전한 것은 못되지만, 처음으로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자유노조가 절대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헝가리도 비슷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고, 최근 동독에서도 체제 자체에는 변화가 없지만, 국민 간에는 큰 동요가 일고 있습니다. 동구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기초가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이룩될 수 있는데, 쿠바나 북한 같은 나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동구권에서도 루마니아, 체코와 동독은 아직도 개혁을 거부하고 있는데, 앞으로 공산세계 개혁이 어떻게 될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런데 지난번 訪韓(방한) 때 각하의 전임자께서 저쪽에 있는 지도를 가지고 서울과 휴전선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무력 위협은 계속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레이건 대통령처럼 反共(반공)의식이 체질화된 이였다. 盧 대통령은 1989년 10월25일 낮 12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빌리 브란트 서독 전 총리를 접견, 청와대에서 점심을 함께 하면서 환담했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시사저널’의 초청으로 방한한 터였다. 1970년대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교류 시대를 열었던 브란트 전 총리는 “독일의 통일과 유럽의 통합이 매우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브란트는 “지난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었는데 그곳은 벌써 꽤 추운 날씨였다”고 했다. 그는 韓蘇(한소) 수교를 추진하던 盧 대통령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고르바초프와 만나기 하루 전에 그의 보좌관인 야코브레브를 만난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내가 한국에 가는 줄 알고 있었고, 한국 사정에 정통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새로이 시작된 韓蘇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평양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평양은 크렘린이 너무 급속하고 너무 우호적으로 남한과 접근하고 있다고 불평을 한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고르바초프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만, 야코브레브는 한국과 경제 등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韓蘇 두 나라의 공동이익에 기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고르바초프와는 그의 집권 이래 네 번째 만났습니다만, 그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의 개혁정책이 성공할지는 의문이 있습니다. 私的(사적)인 대담을 하는 도중에 그는 ‘폭약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기분이다. 누구라도 성냥 하나만 던지면 폭발이 일어날 것 같다’고 실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식량문제가 걱정이라고도 했습니다.” 헝가리의 민주화를 허용한 고르바초프 이 자리에서 브란트는 독일의 통일을 상당히 장기적으로 전망하였다. “지금은 동구권이라 하지만 우리가 학생 때는 바로 그들 나라를 중부 구라파라 불렀었지요. 제가 보기에 소련에서 예상치 못한 큰 폭발이 없는 한, 동구권 자체에는 큰 위험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독일의 통일은 꼭 한 나라(One State)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역사상 독일이 단일국가였던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국가연합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브란트는 “떠나기 전에 집사람한테 ‘멀리 여행하고 오겠다’고 했더니, ‘한국은 먼 나라가 아니예요. 올림픽이 한국을 우리 안방에 가져다 놓았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서울올림픽은 세계 모든 나라에 한국을 알렸고, 그 결과 여러 가지 정치·외교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듣기 좋은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고, 全세계를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확실한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이날 대화를 통하여 베를린 장벽이 보름 뒤에 무너지고, 독일이 1년 뒤에 통일될 것임을 상상도 하지 못했음을 증거로 남겼다. 역사는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서운 속도를 내는 법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일곱 달 전인 1989년 4월에 실시된 서독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절반가량이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일하려는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었다. 1989년의 동구 민주화 혁명에 뇌관 역할을 한 것은 한국과 맨 먼저 수교한 헝가리였다. 헝가리는 1956년의 민중봉기로 공산당 정권 타도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소련군의 침공으로 좌절되었던 나라이다. 실패한 봉기 뒤, 헝가리 공산당, 즉 사회노동당의 당수인 카다르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면서도 시장개방 정책을 폈다. 鄧小平(등소평) 이전에 이미 헝가리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운영했다. 헝가리의 생활수준은 공산권에서 항상 최고였다. 헝가리 민중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수만 명을 죽인 데 대하여 죄책감을 느꼈던 소련도 헝가리의 이런 자유화를 허용했다. 한국-헝가리 수교를 주도했던 회른 국무장관(나중에 총리)과 미클로스 네메트 총리는 東歐(동구) 민주화 혁명의 뇌관을 터뜨린 인물이다. 자유노조가 주도한 폴란드의 민주화와는 달리 헝가리의 민주화는 공산당 내 개혁파에 의해서 자체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1988년 5월 서기장 카다르를 몰아낸 헝가리 공산당의 개혁파는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과도기적 정부를 구성했다. 공산국가로선 처음으로 한국과 수교를 결단한 그룹도 이들이었다. 네메트 총리는 소련으로부터 민주화 개혁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1989년 3월 모스크바로 간 네메트는 고르바초프에게 민주화의 계획을 설명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소련군이 8만 명 주둔하고 있습니다. 소련은 1956년에도 개입한 적이 있습니다. 자유선거가 언제 치러질지는 모르나 그 선거에서 공산당이 져서 정권을 넘겨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소련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고르바초프는 “나는 헝가리가 복수정당제를 채택하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내가 책임 질 일이 아니고 귀하가 할 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결정적인 말을 덧붙였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權座(권좌)에서 쫓겨나지 않고 이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다면 헝가리의 민주화를 진압하라는 명령이나 지시는 없을 것입니다.” 誤報로 무너진 베를린 장벽 네메트는 고르바초프로부터 무력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셈이다. 공산당의 개혁파들은 자유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그 시작은 사소했다. 헝가리계(系) 루마니아 사람들이 차우셰스쿠의 壓政(압정)을 피해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헝가리는 이들을 루마니아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東獨(동독)사람들이 헝가리 정부의 이 조치를 유심히 관찰했다. 헝가리는 동서독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헝가리에 들어온 東獨(동독)사람들이 체류기간을 어기고 계속 머물기 시작했다. 이해 여름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철조망 국경선을 개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9월 말까지 4만 명 이상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갔다. 동독인들의 대탈출 사태가 유럽 全域(전역)에서 벌어졌다. 동독사람들이 외국 공관으로 들어가 西獨行(서독행)을 요구하면 서독이 이들을 다 받아주었다. 이제 불똥은 東獨(동독) 내로 튀었다.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의 시위는 동독 공산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네커 정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호네커 정권은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이에 자신을 얻은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10월9일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진 대시위가 전환점이었다. 전날,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는 약 8000명의 병력과 민병대 및 정규 경찰병력을 배치해 이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진압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동독주재 소련 대사 바체슬라브 코체마소프는 동독 공산당 간부 크렌츠가 전화를 걸어와 “호네커 서기장이 군 지휘관들에게 라이프치히로 내려가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지시했다”고 알려오자 “군대 투입은 절대 안 되고 강제진압에 반대한다”고 말하고는 동독 주둔 소련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라이프치히 사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호네커 서기장에 반기를 든 동독 공산당 간부들은 라이프치히 시위 진압을 포기했다. 곧 크렌츠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 간부들이 黨內(당내) 쿠데타를 일으켜 호네커 서기장을 축출했다. 이들은 호네커 추방에 대하여 소련 고르바초프의 사전 양해를 얻었다. 에곤 크렌츠 서기장의 동독 공산당은 민주화 시위를 달래기 위하여 여행자유화법안을 만들었다. 동서독 국경선 어디에서든 여행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1월9일 귄터 샤보우스키라는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이 국내외 기자들에게 뉴스 브리핑을 해주고 있는 가운데 이 여행자유화 법안의 내용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서기장 크렌츠는 그날 다른 일로 바빴다. 이 법안 메모엔 구체적인 여행자유화 규칙은 전국의 공안당국에 통보한 이후인 11월10일에 발표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前後(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샤보우스키는 이 메모를 무시하고 텔레비전 카메라를 향해서 “여행자유화 조치가 이 순간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된다. 여행신청을 하면 즉각적으로 허가될 것이다”고 발표하고 퇴근해 버렸다. 이 발표에 흥분한 동베를린 시민들이 西(서)베를린으로 건너가려고 장벽을 지키는 국경초소로 몰려갔다. 초소 경비병들은 아무런 사전 지침을 받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몰려드는 시민들에게 발포할 수도 없었다. 경비초소 지휘관은 베를린 장벽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 웃기는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크렌츠 서기장은 誤報로 빚어진 이 사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통제불능이 된 사태가 마치 자신들이 미리 결정해서 내린 자유화 조치의 결과인 것처럼 선전했다. 동독주재 소련대사는 “여행자유화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 더구나 베를린은 미국·소련·영국·프랑스가 공동관리하고 있는 곳인데 왜 멋대로 개방하느냐”고 항의했으나 군중들은 베를린 장벽을 부수고 있었다. 역사가 정권을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콜 총리의 결심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 서독에 도착한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1일이 지난 때였다. 서독의 국가지도부는 이 급변 사태에 대처하느라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세계사가 요동치는 폭풍의 한복판으로 한국 대통령이 들어간 것이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던 11월9일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방문중이었다. 그는 중대 사태의 발생을 보고받자 다음 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콜 수상은 군중 앞에 섰지만 말을 아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주창한 ‘민족자결권’을 강조했다. 콜은 자결권을, 독일 사람들이 통일문제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지닌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대처 영국수상,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면서도 급격한 독일통일이 국제사회의 안정을 파괴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특히 독일 통일 이야기가 소련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소련의 반응도 우려였다. 부시 대통령만이 긍정적이었다. 콜은 통일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통일의 의지를 함축한 ‘민족자결권’을 강조했다. 동독인들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권리가 부여된다면 그들은 통일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1월16일 콜 수상은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동독 공산정권에 중요한 제의를 했다. 동독이 자유선거, 언론자유, 시장의 자유화와 같은 개혁을 한다면 동독에 대하여 전례 없는 규모의 경제지원을 할 것이란 약속이었다. 즉 자유선거와 경제지원을 서로 연계시킨 것이다. 11월17일 콜의 제안에 대해서 동독의 새 총리 모드로우가 절묘한 대안을 제시했다. 모드로우는 새 정부가 시행할, 교육, 환경 등을 포함한 정치개혁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 主權(주권)국가로서의 동독에 정통성을 부여할 것이며, 서독과의 재통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협정 공동체 관계에 기초한 평화공존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통일을 거부한 발언이었다. 11월18일 파리에선 미테랑이 긴급히 주최한 유럽 공동체 정상회담이 열렸다. 대처 영국 수상은 여기서도 독일통일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독일통일은 고르바초프를 약화시킬 것이고 영토분쟁이란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콜 수상은 통일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관련국들을 안심시키려는 발언들을 많이 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열흘이 지나자 국제정치역학관계가 작동하면서 독일의 조기 통일은 어렵고, 당장은 통일이란 말조차 회담의 主題(주제)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여기서 콜 수상이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소련이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독일통일을 한사코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란 정보도 입수되었다. 콜은 ‘독일통일 ’이란 주제를 국제사회에서 살려나갈 결심을 한 것이다. 외교담당 보좌관인 텔식이 ‘독일통일을 위한 10개 요점‘을 정리했다. 콜은 이를 11월28일 국회연설을 통해서 공개함으로써 베를린 장벽 붕괴를 계기로 독일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동독에 대한 경제지원의 강화를 약속한 콜은 “단, 공산당의 권력독점을 보장하는 일당독재 체제를 바꾸고 자유선거를 허용하며, 중앙경제통제기능을 폐기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는 또 “동독에서 자유선거를 한 다음 동서독 사이에 국가연합제적 성격의 구조를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연방국가로 통합한다.”는 里程標(이정표)를 제시하였다. 콜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동독의 자유화를 논리적 근거로 내세우면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고 소련의 저항을 무디게 하고 프랑스와 영국을 안심시키면서 1년 내에 독일통일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다. 콜이 말한 東獨 혁명의 원인 이런 격변의 현장으로 출발한 盧泰愚 대통령 일행은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하는 北極(북극)항로를 거쳤다. 요사이 한국에서 유럽에 갈 때 유라시아 대륙을 종단하는 항로를 탈 수 있게 된 것은 북방정책 덕분이다. 盧 대통령은 1989년 11월20일 서독 수도 본에 도착하였는데 그 사흘 전부터 체코의 프라하에선 수십만 명이 反共(반공)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의 침공으로 깨어진 지 21년만의 사태였다. 체코 공산당은 강제진압을 주저하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盧 대통령을 맞은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서독 대통령은 “독일로서는 가장 의미 있는 시점에 방문해주셨다”고 인사를 하였다. 盧 대통령은 “한국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직접 보고 듣고 싶었다”고 했다. 이날 대화는 자연히 통일문제로 집약되었다. 바이체크 대통령은 신중하였다. “독일의 통일문제는 독일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유럽의 여러 관련된 나라가 모여 함께 해결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의 협력이 동독의 사태발전에 도움이 되며, 특히 소련의 협조가 매우 긴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 독일국민은, 베를린 시민도 그렇지만, 모두가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兩獨(양독) 문제를 해결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은, 다음날 오전, 헬무트 콜 총리를 執務(집무)청사로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때 콜 총리는 베를린 장벽이란 대사건과 流動(유동)하는 공산권의 정세를 기회로 잡아 독일통일을 추진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두 分斷(분단)국가 대통령은 오찬을 포함하여 세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정상회담에는 독일통일의 전략가였던 텔식 수상실 對外(대외)정책보좌관, 한국 쪽에선 신정섭 駐獨(주독) 대사와 김태경 테크노벤처 사장(통역)이 배석했다. 巨軀(거구)의 콜 총리는 兩國(양국)관계보다는 세계정세에 대한 의견교환을 즐겼다. 盧 대통령은, “동구권의 변화와 최근 동독의 급변 정세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으며, 동독의 사태가 헝가리와 폴란드의 개혁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요?”라고 물었다. 콜 총리는 아주 정리가 잘 된 답변을 했다. 頂上(정상)회담 대화록에서 인용한다. “동독의 급변을 유도한 데는 몇 가지 여건이 작용했는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1983년 NATO는 핵무기 감축과 퍼싱 미사일의 域內(역내) 배치를 결정했는데, 그 당시 고르바초프는 집권하고 있지 않았으나, 소련은 NATO 諸國(제국)과 핵무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소련과 그 주변 동구 위성국에서는 새로운 정치풍토, 즉 자유주의 경향이 싹트고, 공산주의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교육수준이 높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이 벌어야 한다는 에어할트의 이론이 마르크스 이론에 이긴 것입니다. 셋째, 西歐(서구) 자유주의 제국은 유럽의 통합이 최종 정치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바르샤바 가맹국은 헝가리와 폴란드를 압력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어 이런 인식이 결국은 폴란드와 헝가리를 개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 동독이 급변한 것은, 상당히 오랜 기간 西獨(서독)과 접촉을 계속해 왔으며, 그 접촉을 통해 동독인은 ‘왜 우리는 서독보다 못 살고 있나’ 하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토로이카를 주창하게 됨에 따라, 모든 발전은 폭력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思潮(사조)가 팽배하고, 매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유선거, 노조결성, 경제개혁 등을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동독에서 처음에는 이러한 경향에 집권층이 별 개의치 않았으나, 동독인이 점차 이탈하기 시작해 금년 들어 약 27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이주했으며, 지난 20일간에는 동독 인구 1700만 명의 절반가량인 800만 명이 국경개방 기회를 이용해 西獨으로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향후 동독이 더욱 개방정책을 펼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동독인과 서독인이 서로 섞여서 모두 하나의 독일인이 되는 날이 올 것으로 희망하고 있습니다. 너무 빠른 동독의 변화는 동·서독을 둘러싼 양 주변국들에게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서독은 너무 강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서독 인구는 6200만 명이며, 동독은 약 1700만 명입니다.” 민족자결 원칙 강조 盧 대통령은, “불과 얼마 전 북한의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해 중국과 북한은 자유의 물결을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으며, 중국에는 천안문 사건 이후 개방정책이 주춤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對한국 정책에 있어 경제교류는 계속하고 있으나, 정치관계는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콜 총리는 “나는 2년 전 중국을 방문해 등소평과 만나 한국에 대해 개방을 종용하고 적극적 접근을 촉구한 바 있습니다. 등소평과 친분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김일성을 개인적으로 아시는지요?”라고 물었다. “개인적으로는 모르나, 만나자는 제의는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북한이 개방되면 김일성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개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북한이 개방을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심어 주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후 콜 총리는 한국상황에 대한 질문을 잇달아 했다. 그는 “휴전선이 어느 정도 개방되어 있는지요? 북한사람이 남한에 여행할 수 있는지요?”, “남북한의 경제는 어떤지요?”, “북한은 남침을 할 것인가요?”, “남북간에 군사충돌이 있게 되면 미군은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요?”, “이산가족 상호간 접촉은 전혀 없는지요?”, “만약 각하께서 일반 국민이시고, 북한에 이산가족을 두고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 “북한 지도층에 개혁기도가 있는지요?”라고 물었고 나는 상식적 답변을 했다. 동독과는 너무나 다른 북한의 폐쇄성에 대해서 콜 총리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盧 대통령은, “북한은 김일성에 대한 광신으로 가득 차 있고 그는 마치 이란의 호메이니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오찬 연설에서 콜 수상은 의미 있는 말을 하였다. “우리 두 민족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은 동일한 정치적 운명을 통하여 결속되어 있습니다. 兩國이 자유로운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恒時的(항시적)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콜 총리는 독일통일에 반대하는 프랑스, 영국, 소련을 설득하고 세계여론에 호소하는 논리적 근거를 ‘민족자결의 원칙’에 두고 있었다. 독일의 통일문제는 독일인이 결정해야 한다는 이 주장이 갖는 도덕적 설득력과 콜 수상의 對 주변국 외교, 미국 부시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優柔不斷(우유부단)한 대응이 합쳐져서 1년 만에 독일통일이 이뤄진다. 콜 총리는 盧泰愚 대통령이 후보 시절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헤르만 헤세의 詩를 암송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독일인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였다”면서 거듭 건배를 제의하였다. 두 분단국가 대통령은 공동 발표문에서도 “냉전구조가 더 이상 민족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정상회담 뉴스를 전한 조선일보 1면엔 金玄浩 특파원의 프라하 르포 기사가 실렸다. ‘프라하, 민주화 함성-플래카드 물결’이란 제목과 함께 ‘電車경적-시민들 열쇠고리 흔들어 弔鐘시위’ ‘일부 배우들 파업 劇場 문닫아...경찰은 방관’이란 설명이 붙은 기사였다. 기사는 ‘저명한 反체제지도자이자 극작가’인 하벨의 주도하에 시민포럼 창립총회가 있었고 反체제 단체들은 현 체코 지도층의 퇴진 조건에 대한 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헝가리 개혁 지도자의 서울올림픽 칭찬 盧泰愚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은 兩國(양국)에 다 의미가 깊었다. 盧 대통령은 東歐국가를 처음으로 방문하는 셈이고 헝가리로선 10월의 민주화 조치 이후 맞는 최초의 자유진영 지도자였다. 헝가리는 서울올림픽 참가를 처음 결단한 공산국가였고 처음으로 수교한 東歐국가였으므로 盧泰愚 대통령도 들떠 있었다. 헝가리 정부는 노 대통령 일행이 도착한 부다페스트 페리헤지 제1 공항에 붉은 카펫을 깔았다. 노 대통령은, 11월22일 오후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국회의사당의 문가치 홀에서 마티아스 쉬로스 대통령 권한대행과 頂上(정상)회담을 가졌다. 대통령은 홀에 걸려 있는 ‘마자르의 정복’이란 그림을 好評(호평)하였다. 쉬로시 대행은 “마자르族(족)의 지도자 아라파트왕이 처음으로 이곳에 와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우는 장면이다”라고 설명하였다. 盧 대통령은 “아시아에 源流(원류)를 둔 마자르족이 아름다운 다뉴브강을 낀 경관 좋은 이 지역에 나라를 세운 것은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고 和答(화답)하였다. 쉬로스 대통령권한대행은 헝가리가 추진하고 있는 정치적·경제적 개혁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가 한국에 원하는 것은 원조가 아니고 경제적 동반자 관계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헝가리 공산당은 그 한달 전 黨名(당명)을 헝가리 사회당으로 바꾸고 사회민주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정당 설립의 자유와 자유선거의 실시를 선언하면서 國名(국명)도 헝가리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바꿨다. 이런 민주화로 정당이 여럿 생기기 시작했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群小(군소) 정당이 난립하고 있었다. 자유진영에서 올림픽을 치른 대통령이 왔다고 해서인지 그 정당의 대표자들이 전부 盧 대통령 면담을 신청해 왔다. 운동권 학생대표까지 만나기를 원했다. 盧 대통령은, 야당 총재이거나 대통령 후보인 비중 있는 인사들을 불러서 국회의사당 회의실과 영빈관에서 연속적으로 개별 면담했다. 헝가리 민주화의 지도자였던 임레 포즈가이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사회당(전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였다. 포즈가이는 1980년대 헝가리 공산당 내의 개혁파 지도자로서 복수정당제 등 민주화 개혁을 이끈 ‘헝가리의 고르바초프’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번에 독일을 방문해서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도 보았는데, 이러한 동구권 개혁을 주도한 귀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인사했다. 포즈가이 후보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국과의 수교는 헝가리 공화국 국민의 희망과 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헝가리 국민은 올림픽 이전부터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발전에 경탄해 왔는데, 아름다운 서울올림픽과 따뜻한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헝가리 국민에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경험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번에 한국 기업인들을 데리고 오셔서 그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게 해주신 것은 매우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포즈가이는 또 “헝가리를 시발로 하여 기타 동구권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시고자 하는 각하의 노력을 잘 알고 있으며, 금년 여름에 유고 지도자들에게도 한국과의 수교를 권고한 바 있고, 곧 소련을 방문할 계획인데 소련 지도층에도 그 점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저뿐만 아니라 헝가리 국민들의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각하의 헝가리 방문은 역사적 사건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유럽 방문기간중 유고는 한국과 수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민주주의는 많이 참는 것” 盧 대통령은, 11월23일 아침에는 미클로스 네메트 총리를 만났다. 네메트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가져온 바로 그 사람이었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그는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헝가리와 한국이 수교한다는 사실에 대해 동구권에서는 놀라운 일로 보고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측 외무장관이 헝가리를 방문해 협의를 하고 난 후 여러 가지 일들이 발전적으로 전개되어 당초 우리의 수교 결정이 결국은 올바른 것이었음이 정당화되었습니다. 兩國(양국)은 경제·문화·외교 정책 및 사회분야에서의 상호 조화 있는 협력을 추진할 것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들에겐 6·29선언과 대통령 선거 경험 등을 이야기하면서 “민주주의를 하려면 많이 참아야 합니다”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노 대통령은 그들이 공산주의·사회주의를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투도 거칠고 극렬한 주장을 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데 놀랐다고 한다. 오랫동안 유럽 문명을 호흡하면서 중부 유럽의 强者(강자) 노릇을 했던 관록과 전통이 이들의 교양으로 體現(체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盧 대통령은 국영방송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국회의사당에서 ‘화해와 새 시대를 함께 여는 동반자 관계’란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는 “한국과 헝가리의 수교는 북방정책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으며, 우리는 중국 소련 및 동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도 교류협력 증진에 나설 것이다”고 했다. 11월 24일자 한국 신문들은 이 역사적 연설을 옆으로 미루고 백담사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국회로 불러내 신문하는 문제에 대한 與野(여야) 공방전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독일통일에 반대한 ‘철의 여인’ 1989년 11월9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하여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가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였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엄청난 파괴력을 맛보았던 영국으로선 통일된 독일의 등장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11월10일 콜 총리가 대처에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는 “자유를 향한 위대한 날이었다”고 축하해주었지만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의논해보라”고 충고하였다. 대처는 11월13일 연설에서 “동독에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민주화이다. 민주화를 한번 시작하면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면서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時機尙早(시기상조)라는 암시를 하였다. 며칠 뒤 대처는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대처는 “우리가 지금 사태를 악용하여 소련의 안보를 약화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 독일통일은 현시점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11월24일 대처는 미국으로 날아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났다. 대처는 독일통일을 지지하기로 이미 결심한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려 하였다. 그는, 최우선적인 과제가 東歐(동구)에서 민주화 흐름을 굳히는 것이라면서, 독일의 문제는 ‘민족자결의 원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대처는 예언적인 말을 하였다. “독일 통일은 고르바초프의 실각을 의미한다.” 대처는 부시 대통령이 동독의 민주화에 주력해야지 섣불리 통일문제를 다루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말을 딱 부러지게 하는 대처를 面前(면전)에서 반박하지 않았으나 대처는 “우리의 토론에선 진전이 없었다”고 평가하였다(회고록). 盧泰愚 대통령은 헝가리에 이어 스위스를 3박4일간 비공식 방문하였다. 그 순간, 체코 프라하에선 공산당 정권이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을 포기하고,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無血(무혈) 혁명이 마무리 단계로 치닫고 있었다. 盧 대통령은 11월 24일 저녁 로잔의 보 리바주 호텔에서 수행 기자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한 기자가 “서울 소식은 어떻게 아시는지?”라고 묻자 대통령은 “신문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보고싶지도 않고...”라고 했다. 다른 기자가 “외국에서 국내정치를 바라보시면서 느낀 점은?”이라고 묻자 이렇게 답하였다. “국내가 시끄럽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해서 부끄럽기도 했는데, 외국 사람들은 우리 생각과는 다르더군요. 대통령이 골치가 아프고 與小野大(여소야대)로 국회가 시끄러운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통령이 참으면서 끌고 가는 것이 훌륭하다고 평가해주니 참 착잡합니다.” 전두환의 꿈을 기억했던 대처 盧泰愚(노태우) 대통령 일행이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것은 11월27일 오전이었다. 1다음날 오후,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집무실에서 마가렛 대처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날 저녁 만찬에서도 ‘철의 여인’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기자들은 정상회담장은 물론이고 官邸(관저)의 현관을 넘어서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회담 내용은 金宗輝(김종휘) 외교안보 보좌관이 기자들에게 설명하였다. 동유럽 사태로 해서 頂上(정상)회담은 兩國(양국)문제보다는 세계정세를 논하는 자리가 되었다. 대처는 1984년 12월 당시 촉망 받는 소련 정치국 위원이던 고르바초프 부부를 런던으로 초청해 장시간 토론한 경험이 있다. 대처는 고르바초프가 비록 정책에 관해선 소련의 공식 입장만 되풀이하지만 인간됨은 과거의 소련 지도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고르바초프는 솔직하고 知的(지적)이며 열등감이 없고 순수했다. 대처는 고르바초프를 만난 인상에 대해서 기자들에게 “그와는 거래를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논평했다. 냉전을 종식시키고 공산주의의 그림자를 유럽에서 제거하는 데 협력했던 1980년대의 巨人(거인)들은 상호간에 인간적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대처와 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레이건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바웬사 사이의 인간적 관계는 매우 친밀했다. 유혈(流血)과 학살의 공산제국을 피를 거의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종식시킨 것은 이런 ‘소수의 좋은 사람들(A Few Good Men)’의 공동작품이었다. 강인하면서도 여성스러움을 간직한 대처 총리는 “우선 최근 한국의 민주화에 대하여 축하드립니다. 각하 전임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최대의 꿈은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최초의 한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 했는데, 그것에는 성공하였군요”라고 인사했다. 대처는 “우리는 요즈음 매우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동구 공산권의 격변을 표현했다.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였다. “동구의 민주화, 개방·개혁의 바람이 히말라야 산맥에 걸려서 아직 東北亞(동북아)까지 불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작년 올림픽을 통해 이념·인종·지역 등 모든 장벽을 넘어 인류화합과 평화에 기여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최루탄도 없는지 꼭 사람을 쏴죽여야 하는지...” 대처 총리는 “참, 서울올림픽은 너무나 훌륭했습니다”라고 축하해 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부다페스트를 방문하셨다니 반갑습니다. 헝가리는 경제속박을 벗어버린 최초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약간 전진해서는 주위를 둘러보고, 기다렸다가 다시 전진하는 식으로 개혁해 왔습니다. 1984년에 가 보았더니 식량사정도 좋고, 시장에 물건도 풍부했습니다. 폴란드는 다릅니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되어 있습니다. 폴란드의 개혁은 주로 자유노조가 주도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노조가 아니고, 반공정치 세력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폭정에 항거해 왔고, 이제는 집권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체제를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지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소련도 마찬가지이지만, 관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속수무책입니다. 우리는 폴란드와 헝가리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복수정당 제도를 채택해 공산체제로부터 자유체제로 옮겨온 최초의 정부들인데, 그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매우 긴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특별원조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소련도 경제개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경제 질서 하에서 책임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르바초프는 자본주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인도적인 사회주의(Socialism with human face)를 지향한다고 하는데, 물론 인도주의는 좋지만 사회주의는 인류복지를 절대로 보장 못하는 제도입니다. 중국이 제일 경직되어 있는 듯한데요?”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화를 거울삼아 중국을 변호해 갔다. “중국이 우리 이웃나라이므로 그에 대하여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중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소련이 정치·경제 양면의 개혁을 동시에 추진한 데 반하여 중국은 경제개혁부터 먼저 추진하고, 정치변혁은 뒤로 미루어 왔습니다. 경제개방에 따라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폭발해서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고, 그 후 중국의 개혁은 멈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역사와 국민성으로 보아 후퇴는 없을 것이며, 결국은 경제·정치의 개방과 개혁의 방향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부시 대통령께도 말한 바 있지만, 서방측은 중국에 대해 인권이나 민주화 등으로 지나치게 몰아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원하지 않았던 반작용이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서서히 사태를 보아가면서 그들을 유도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을 잘 알고 있는 부시 대통령도 동감이었습니다.” 대처 총리는 그래도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중국이 대체로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실망이 컸습니다. 등소평은 문화혁명 때 고생을 많이 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해 왔고, 조자양과는 홍콩 반환교섭 일로 자주 만났는데, 교섭결과도 대체로 만족스럽고, 1997년 반환까지 잘 될 줄 알았는데, 등소평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고, 조자양도 퍽 합리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그런 무자비한 짓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외국 귀빈이 와 있어서 나라 체면도 있었다지만, 그 사람들은 최루탄도 없는지, 꼭 총을 쏘아 사람을 죽여야만 되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국이 더 이상 후퇴하지 않고, 조자양 같은 사람이 복귀되었으면 합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좀더 자유스러운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홍콩문제도 안심이 되니까요.” “노조 보스들을 잡아야 노조문제 해결” 대처 총리는 “중국 지도자들은 김일성을 싫어하지만, 그와 등을 질 수 없는 모양입니다. 김일성은 참으로 나쁜 사람(Terrible Man)이고, 북한은 참으로 나쁜 나라(Terrible Country)입니다. 미국 TV를 보니까 김일성이 국민을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 사람은 계속 남한을 전복하려고 한다지요?”라고 질문했다. 대처 총리는 이어서 “TV나 라디오로 남한소식을 알게 되면 동독과 같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소련사람들도 우리 BBC 해외방송 보도를 듣고 있는데... 북한이 벽을 쌓아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시킬 수 있는가요?”라고 물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들은 외부와 거의 100% 차단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법으로 외국방송 청취가 금지되어 있고, 일반 TV와 라디오는 채널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파방해도 하고 있지요. 위반자는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폐쇄되어 있는가 하면… 얼마 전에 그들의 방송은 ‘남한은 올림픽관계로 외채를 져서 파산지경에 있으니,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선전을 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라고 설명해주었다. 대처 총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 대통령은, “총리께서는 노사분규를 과감히 처리해 산업평화를 이루는 데 성공하셨는데,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노사관계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일반 노조원들은 순진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합니다. 문제는 노조 지도층인데, 그들이 모든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노조지도자(Union Boss)가 파업을 하려면 노조원 전체의 비밀투표에 의한 동의를 받아야 되도록 법을 고쳤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그에 가담하지 않았고, 간혹 파업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한 피해가 있으면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는 노조 지도층의 독재적 권위를 분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업장 출입방해 등 부분 파업에 대하여도 규제합니다. 영국에서는 자동차 업체에서 노사분규가 제일 심했었는데, 한 업체에 다수의 노조가 있어서 서로 경쟁적으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새로 생기는 공장에는 하나의 노조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원지주제를 실시해서 자기 회사뿐 아니라, 다른 회사의 것이라도 다만 몇 개의 주식이라도 소유하게 되면 노동자 스스로가 소자본가가 되므로 생각이 변하게 됩니다.” 만찬 자리에서도 대처 총리는 북한을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고 표현하는 등 못마땅해 하였다. “동유럽은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분단된 현실에서 동독이 겪고 있는 변화는 한국인들에게는 남의 일 같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 서울을 방문해 비무장지대에서 한국의 분단현실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이를 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소설에서나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비현실적인 나라이고, 김일성은 아주 이상한(Very Strange) 지도자입니다. 방한(訪韓) 도중 판문점을 찾았을 때, 북측 군인들이 동료들이 있는 데서는 근엄한 표정을 짓다가 동료들이 안 보니까 나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그들도 표리부동한 것입니다. 한국의 발전을 위해 그토록 많은 일을 한 지도자(전두환 전 대통령)가 현재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가슴 아픕니다. 닉슨 대통령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지 않고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했더라면 미국과 국제발전에 더 이로웠을 것입니다.” 노 대통령은, “그 문제는 금년 말 이내로 잘 해결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미테랑 대통령의 걱정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은 런던에 체류중이던 11월30일 오전 부시 미국 대통령과 일종의 전화 회담을 하였다. 부시는 수일 내로 지중해 몰타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할 계획이었다. 盧 대통령은 “이번 유럽 방문을 통하여 급변하는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고 했다. 부시는 “한국사람들이 유럽사태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회담할 때 그런 점에서 유의하려 한다”고 했다. 盧 대통령은 “북한이 개방노선으로 나올 수 있도록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말을 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하였다. 盧 대통령은 이날 오후 영국을 떠나 파리의 오를리 공항에 도착하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공항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오후 6시30분에서 7시20분까지, 그리고 오후 8시30분에서 11시20분까지 엘리제궁의 집무실과 대연회실에서 정상회담과 만찬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미테랑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의 독일 상황에 대하여 관심과 걱정을 보였다.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미테랑: “세계는 현재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헝가리·폴란드·체코·불가리아 그리고 최근에는 동독·소련까지 모두 급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구축되었던 체제가 국민들의 자연적인 의지의 발산 하나로 일거에 붕괴되고 있습니다. 독일문제는 심사숙고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두 개의 국가로 있는 동일 민족의 독일이 합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兩獨 국민은 과거의 국제적인 협약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통일의 방향을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독일 통일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나라는 역시 소련인데, 이는 독일통일이 戰後(전후) 유럽에 설정된 국경선의 변경을 초래하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로 보입니다. 하여간 독일통일에 관해서는 신중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또한 독일 통일문제가 현재 급진전되고 있는 유럽통합에 영향을 미쳐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내주 중 있을 EC(유럽공동체) 회담에서 이 문제가 심도 있게 협의될 것입니다. 만약 독일 통일이 EC 통합보다 먼저 이루어지면 유럽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줄 것입니다. 또 EC 통합이 빠르면 독일 통일문제도 양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나, 그래도 EC 통합이 先行(선행)되는 것이 유럽 전체로 보아 불안요소가 적다고 봅니다. 독일통일에 대하여 소련이 불안한 심정으로 이를 주시한다면 이 또한 유럽 전체의 불안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볼 때는 독일 통일문제는 별도로 관망하되, 우선 EC 통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봅니다. 동구권에 대한 서구의 경제적 지원도 구체화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질서를 붕괴시키고, 동·서 냉전으로 인한 긴장을 해소시킨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제도적 보장이 될 것입니다.” “東歐문제가 西歐질서 해치지 않아야” 노태우: “각하의 설명에 감명을 받았으며,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본인은 그간 유럽을 순방하면서, 각국 지도자들로부터 동구문제에 관한 견해를 성취했는데, 모두 독일 통일이 현기존 EC 질서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바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동·서구의 새로운 판도가 신질서와 기존 질서와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어제 미국 부시 대통령과 전화로 의견교환을 가졌습니다. 각하께서는 현재 EC 의장직을 맡고 계신 바, 앞으로 형성되어야 할 이상적인 질서에 관해 어떠한 高見(고견)을 갖고 계신지요?” 미테랑: “동독 국민의 강렬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있습니다. 우선 경제면에서 볼 때도 동독과 서독은 그 격차가 어마어마합니다. 또한 국경선 문제와 관련한 소련의 신경질적인 우려 표명도 문제의 하나입니다. 독일 통일의 기본 골격은 아무래도 민족연방 형태가 바람직하며, 또한 이에 대해서는 戰後(전후) 관계 4국인 프랑스·소련·미국·영국과 충분히 협의해 이들 4국으로 하여금 독일문제에 대하여 새롭게 합의된 입장을 정립토록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각국은 또한 동독이 경제부흥을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독일 통일문제를 위시한 東歐문제 모두가 현 西歐질서를 해치지 않는 방향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선 EC 통합 운동이 먼저 결실을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봅니다.” 미테랑 대통령은 “한반도의 장래 전망은 어떠한지요?”라고 물었다. 노 대통령은 한반도 정세를 설명한 뒤 ”각하께서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바, 그 기회에 소련으로 하여금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폐쇄적인 체제를 개방, 我國(아국)의 평화통일 노력에 부응할 수 있도록 아국의 희망을 전달해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시원스럽게 승락했다. “고르바초프와는 자주 만날 기회가 있으니 꼭 전하도록 할 것입니다. 북한은 항상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 한국과 양독(兩獨)간의 사정은 다르나, 한국도 장차 兩獨(양독) 국민과 같이 국민의 의지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통일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키신저, “부시와 콜이 한 팀이 되어야” 미테랑 대통령은 대처 총리만큼은 분명하게 독일통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盧 대통령을 만나던 날 서독의 겐셔 외무장관이 파리로 와서 미테랑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미테랑은 “나는 독일의 통일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독일은 유럽통합의 과정을 계속할 것입니까?” 겐셔는 “물론입니다. 통합은 가속화될 것입니다”라고 안심시켰다. 미테랑은 독일통일을 반대하는 대신에 자신이 추구해온 유럽통합을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독일문제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렇게 되니 독일통일을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는 영국뿐이었다. 문제는 소련의 태도였다. 그 소련의 태도를 검증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몰타 회담이었다. 이 회담에 임하는 부시 대통령의 태도는 확고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나흘 뒤 헨리 키선저 전 국무장관은 부시 대통령과 저녁을 함께 하였다. 독일계 유태인 출신인 키신저는 “독일 통일은 불가피해졌다”고 말하였다. 그는 “독일사람들에게 만약 미국이 통일을 방해하는 것처럼 비쳐지면 나중에 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다”고 했다. 키신저는 또 “미국이 두 개의 독일정책을 쓰면 고르바초프는 콜과 손잡고 미국에 대항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독일통일을 막을 방법이 없으므로 우리가 통일과정을 늦추는 정책을 쓴다면 동서독 국민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은 서독 총리와 사실상 한 팀으로 결합되어 통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11월21일 외국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統獨(통독)에 반대하는 프랑스와 영국 사람들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부시는 이렇게 답하였다. “그 문제는 독일 사람들이 해결할 사안입니다. 이 문제를 독일 사람들이 결정하도록 합시다.” 12월 초의 몰타 회담은 독일통일 문제에 대하여 美蘇의 頂上(정상)이 의견을 교환하는 첫 자리가 되었다. 부시는 고르바초프에게 독일 사람들이 변화의 속도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자고 했다. 고르바초프는 “두 개의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産物(산물)이며 역사적 결정이다. 역사가 유럽과 두 개 독일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인위적으로 그 과정을 촉진시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독일문제를 가지고 고르바초프를 압박하지 않았다. 미국 대표단은 고르바초프가 독일통일을 반기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독일통일을 추진하여도 美蘇(미소)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그런 인상을 준 것은 치명적 실수였다는 비판이 나중에 소련측에서 일어났다. 몰타 회담에 배석하였던 소련의 세르게이 아크로메예프 장군은, 고르바초프가 독일통일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미국측이 통일정책의 추진과정에서 소련으로부터 결정적 반대에 부딪치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만든 것은 그의 실각을 부르게 되는 운명적인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부시는 몰타에서 벨기에의 브루셀로 직행하여 NATO 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브루셀에 도착하자마자 부시는 콜 총리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독일문제에 대하여 고르바초프의 태도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겁주지 않을 만한 계획을 세워서 밀고나가야 한다.” 미국은 통일된 독일이 NATO 가맹국으로 계속 남아 있고, 따라서 핵무장을 포기하며, 독일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킨다는 목표를 처음부터 분명히 하고는 소련, 영국, 프랑스를 설득해간다. 미래가 아직도 불투명할 때 부시-콜이 한 팀처럼 되어 밀어붙이니 준비가 안 된 소련은 따라오고 통일을 반대하던 영국은 無力化(무력화)되고 프랑스는 설득 당하였다. 동독주민들이 선거를 통하여 서독에 흡수되는 통일안을 선택한 것도 결정적이었다. 그리하여 베를린 장벽 붕괴 1년 만에 독일의 통일이 총 한 방 안 쏘고 이뤄졌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독일통일을 막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통일에 동의해주는 代價(대가)를 충분히 받아내지 못하였다고 하여 보수파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대처가 예언하였던 대로 독일통일은 고르바초프의 무덤이 되었다. 1991년 8월 보수파의 실패한 쿠데타 시도는 소련 연방의 해체와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왔고, 탱크 위에 올라가 쿠데타 군에 저항하였던 옐친을 새 지도자로 등장시켰다. 레이건의 여유 독일의 운명은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을 방문하던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노태우 대통령은 귀국길의 비행기 안에서 달포 전에 만났던 레이건과의 대화가 생각났다고 한다. 盧泰愚 대통령은 유럽 방문에 나서기 직전 미국에 가서 부시 대통령과 회담한 뒤 1989년 10월19일엔 레이건 전 대통령의 사무실을 예방했었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공언하였던 레이건 대통령은 8년간 대결과 대화를 통한 對蘇(대소) 강경정책으로 공산권이 무너질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놓고 퇴임, 1989년에 전개되는 역사의 대격변을 즐기면서 감상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각하께서 재직 8년간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미국을 재건하신 업적이 이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부시 대통령과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레이건은 “나는 8년간 정부가 국민의 생활에 관여 못 하도록(Get government out of the people’s way)하는 데 주력했을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盧 대통령은, “재직 8년간 힘을 바탕으로 한 일관된 외교정책으로써, 우리나라뿐 아니라 자유세계 전체에 힘을 주고 발전의 바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올림픽도 그렇게 성공적으로 치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즈음 소련, 동구권과 중공까지 변화하고 있는데, 그것도 스스로의 필요도 있었겠지만, 각하의 그러한 확고한 외교정책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레이건은 “요즈음 공산권 내에서는 그 체제 가지고는 잘 살 수 없다는 인식이 漸增(점증)하고 있고, 동시에 全 세계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한국이지요. 다만 한국이 분단되어 북한 공산체제가 지속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한국을 위해 희생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미국에 대해 이제부터는 응분의 보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더니 레이건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함께 싸우고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는 동맹국이자 우방입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는 또 “미국에서도 전에 대학생들이 反정부 운동을 심하게 한 적이 있는데, 혹시 한국의 경우에는 비무장지대로 북한의 첩자들이 침투해 와서 민주화를 구실로 학생들을 선동하는 사례는 없는가요?”라고 물었다. 평생을 反共투쟁으로 일관해 온 사람의 본능적 반응이었다. 그는 덧붙였다. “미국기를 훼손한다든지 하는 것은 극소수의 불순분자임을 미국 사람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한 가지 첨언하고자 하는데, 과거에는 대서양이 경제통상 등 면에서 세계의 중심이었는데, 현재와 미래는 태평양에 있습니다. 한국, 일본, 미국의 서부, 일부 중남미 국가들이 바로 그러한 나라들입니다.” “북방정책으로 민족의 活路를 열겠다” 盧泰愚 대통령은 12월4일 새벽 특별기가 미국의 시애틀 공항을 이륙하자 기자들을 불러 20분간 간담회를 가졌다. 질문은 거의가 그를 기다리는 5공 청산 문제였다.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해야 했다. 마지막에 그는 북방정책의 앞날을 전망하였다. “북방정책의 출발은 올림픽이었어요. 올림픽 때 서울에 와 본 공산국가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20~30년만에 이런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이야말로 모델 케이스다 해서, 결국 오늘의 헝가리, 폴란드, 유고 등과 이 같은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 경제가 지금 노사분규, 환율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많아요. 이와 관련하여 무슨 돌파구가 없겠는가 하고 생각해보면 바로 북방정책이 그 돌파구가 될 수 있으리라고 느껴져요. 잘하면 북방정책을 통하여 우리 경제에 새로운 活力(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나 생각 됩니다.” 북방정책을 한국경제의 돌파구로 설정한 盧 대통령의 대전략은 근사하게 성공하였다. 1989년의 동구권 국가 수교, 1990년의 韓蘇 수교, 1991년의 유엔 남북한 동시 가입, 그리고 1992년의 韓中수교. 한국인의 활동공간이 북한만 뺀 지구 전체로 넓어졌다. 특히 韓中 수교는 한국경제의 돌파구이자 생명줄이 되었다. 韓中 수교 17년만에 韓中 무역액은 韓美, 韓日 무역액을 합친 것만큼 많아졌다. 국내적으론 민주화의 소용돌이, 국제적으론 공산권 붕괴라는 二重(이중)의 전환기를 맞아 盧泰愚 대통령이 國家(국가)대전략으로 추진한 북방정책의 혜택을 모든 한국인들이 보고 있지만 盧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는 매우 인색하다. 퇴임 후에 터진 비자금 사건 때문이다. 그는 또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처럼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세력을 육성하지 못하였다. 1989년의 격변기에 盧 대통령이 상대하였던 지도자들의 운명도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콜 독일 총리는 16년간 재직한 뒤 1998년에 물러났고 2002년에 政界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이전부터 기독교민주당의 비자금 사건에 휘말렸고 그 가운데서 부인이 身病(신병)을 비관, 자살하였다. 레이건 대통령도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가 죽었고, 착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독일통일 과정에서 양보를 많이 한 여파로 실각하였으며, 대처 총리는 독일통일 직후 보수당내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다. 미테랑은 퇴임한 지 1년 만에 암으로 죽었다. 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도 病床(병상)에 있는 날들이 많다. 그에 대한 평가는 當代(당대)에선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레이건, 콜, 고르바초프, 대처, 미테랑이 모두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인물의 수준과 함께 국민들의 수준도 반영한다. 李承晩(이승만)과 金庾信(김유신) 같은 대인물의 위대성을 알아보는 국민들이 많아져야 나라도 위대해질 수 있다. 민주화의 실천, 서울올림픽, 북방정책, 주택 200만 호 건설, 영종도 공항-KTX 건설, 서해안 개발시대 개막 등 盧泰愚(노태우) 정부가 남긴 업적들이 최종적으로 그를 변호하게 될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조국은 연말까지 全斗煥(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을 둘러싸고 시끄럽다가 12월31일 전 대통령의 국회증언이 있었다. 이날 그를 향하여 명패를 던진 이가 盧武鉉(노무현) 의원이었다.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이 행동 하나로 그는 정치적으로 매장되었겠지만 12년 뒤 유권자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1989년 12월31일의 全斗煥 증언으로 과거문제를 역사의 章(장)으로 넘기는 데 합의하였던 金泳三(김영삼)씨는 대통령이 되어 궁지에 몰리자 소급입법으로 12ˑ12 사건, 5ˑ18 사건을 다시 수사하여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고 김대중 정권의 탄생에 카펫을 깔아주었다. 비자금 사건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집어넣고 있던 바로 그때 金泳三(김영삼) 정부가 일으킨 사건이 안기부 예산(혹은 안기부 예산으로 위장한 정치자금)을 선거자금으로 轉用(전용)하였다는 이른바 安風(안풍) 스캔들이었다. http://www.chogabj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