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內面) 의 소리
한 인간이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을 '이념화-理念化' 해서
'자기주장' 으로 굳히는 일은 결코 쉽지않다.
또 아무나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념은 모든 경험에 통제를 부여하는,
순수이성에서 얻어지는 최고의 개념으로서,
플라톤에서는
도덕적 가치로서의 최고선(最高善)을,
칸트에서는
경험을 통일하는 순수이성이 그것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한 인간이 무엇을
최고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하는,
근본이 되는 생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Idelolgie 는
그 뿌리가 인간이 가지는 자기이념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집단의 사상, 행동, 생활방법을
그 근본에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며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의식체계 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우파와 좌파의 대립적 개념이며
'사회주의 이념-이데올로기' 가 붕괴된 것은
현실성의 결정적 결여때문이었다.
그 결여의 핵심은 말 할 것도 없이
'사유재산권' 을 인정하지 않은 점이다.
한번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자기의 생각, 이념, 주장에 따라
개성적으로 사는 사람과
자기 것이 없이 여러가지
쏠림 현상에 따라 흘러다니는
부평초와 같은 사람도 있다.
'생각' 을 체계화 하는 학자에서 부터
땅이 정직과 성실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는 농부에 이르기까지
'자기정립-自己定立' 이
분명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시류(時流) 에 떼밀려 정처없이
흘러다니는 인간군상이 오히려 대부분이다.
사실, 선,후진국의 구분을 경제에
더 비중을 두는 시대이긴 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자기' 를 아는 사람이 더 많은 쪽이
문화적으로 선진국이다.
'개성적-個性的' 인 삶과,
'개인주의-個人主義' 의 구분이
그래서 필수적이다
개성적인 사람은그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법과 질서를 지키지만,
개인주의는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 챙기기 때문에
모두의 약속인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자기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이념' 이 없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자기를 정립(定立) 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것은 아니지만 불가능 한 것도 아니다.
자기발견의
대표적인 방법의 하나가 선(禪) 이다.
본래 선은 불교의 삼문
(三門:열반에 들어가는 세문,
즉 空門, 無相門, 無作門) 의 하나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 의 경지에 몰입하는 것이다.
선종(禪宗), 또는
좌선(坐禪) 의 준말이기도 하다.
근자 템풀스테이(temple stay) 가 크게 유행하는 것도
현대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현상이다.
선(禪) 의 첫번째 조건이 무엇인가.
'조용히 혼자 있는것'이다.
동안거 결제 법문차 길상사에 내려온
법정(法頂)은 이런 말을 했다.
'혼자있게 되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인간의 자기정립은 먼저 자기의
'내면의 소리' 를 듣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서 자기를 알고,
자기의 생각을 정리 할 수 있고,
이념과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가질 수 있다.
보통사람의 경우 그것은
'일상' 안에서 '가치관' 으로 나타난다.
선을 긋는 일에
분명한 사람이 되는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정보의 바다' 에서 살고 있다.
매일 매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르네상스' 와 '산업혁명' 이
사람이 사는 방법과 의미를 바꾸었듯이
'인터넷' 은 가히 혁명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
인터넷 이전의 정보는
특정개인이나 계층의 전유물 이었다.
특히 고급정보가 그랬다.
정보의 독점은 권력을 강화했으며
지금의 북한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러나, 인터넷에 공개된 모든 정보는
1차적인 것이며 익지 않은 날 것이다.
그중 상당수는
'스펨' 이라고 부르는 쓰레기 수준이다.
정보의 바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 정보를 선별하고 정제(精製) 하여
내게 유용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날 것을 익혀 먹을 수 있는 '실력' 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가치관' 이다.
자기정립이 분명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기준' 인 것이다.
인간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신적-영적 존재다.
자기성찰(自己省察) 의 기능이 그것이다.
자기 속에서, 자기에게 하는
그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선(禪) 이라는
방법이 나타난게 바로 그런 이유다.
종교는 달라도
그 신자들은 '기도' 할 때 눈을 감는다.
기도에 '집중' 하기 위해서다.
본다는것, 무엇이 보인다는것은
집중을 훼방하는 대상들이다.
지금의 현란한 상업주의와 천박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감지 못하게 한다.
원색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온갖 광고는 말 할 것도 없고,
어느곳으로 눈을 돌려도
'공백-여백' 이 없는 타락한 벽만이
우리로 하여금 눈을 감지 못하게 한다.
눈을 감는 행위는
'사바세계' 에 대한 차단이다.
다른 차원으로 가는 첫 단계인 것이다.
그게 누구든,
눈을 감을 수 있다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다음이 온갖 '소음' 이다.
소음은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가장 중요한 '창의력' 을 마비시킨다.
인간의 귀가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미쳐버린다고 한다.
그 엄청난 소리를 듣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그래서 놀라운 섭리다.
인간이 살았던 본향은 '조용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도 '조용한 것'이 원칙이다.
지금 우리들이 듣고 있는 소음은
너무나 여러가지여서 그 종류를 알 수도 없다.
장말 잠들기 전에는
어느 한 순간도 조용할 때가 없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계속해서
소음에 노출된 생활이 중독성습관이 되어
'조용한 것' 을 잊어가고 있는 현상이다.
조용하지 않으면
내면의 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禪의 일차적인 요구가
'정적-절대적 조용함' 이다.
사찰이나 수도원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절로 나온다.
'소리-소음' 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것이 일차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조용하면 '불안'해 한다.
그게 어느 곳이건 사람들은 시청도 하지 않으면서
텔레비젼을 켜 놓는다.
무슨 소리든, 소리가 들려야
안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두가 중환자들이다.
조용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좌불안석' 은
그 자체가 중독성이 강한 마취제인 것이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중독자 들이다.
수준미달의
텔리비젼 프로그램들이 인간의 인간성을
파괴한 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 프로그램들을 선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것-자기기준' 이 없기 때문이다.
텔레비젼이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모든 것에 종속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정말 내면의 소리를 듣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 바보상자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텔리비젼을 끄니 생활이 달라진다'는 말이
그 뜻이다.
자기것-자기주장-가치관이
분명한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에도 그렇게 함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의 의지로
'선별, 선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소리' 를 듣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혼자일 때 강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혼자가 아니고는 '자기' 와 대면 할 수 없다.
자기와 대면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 속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혼자 있으면 정직해 진다.
속여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위선이 없어지니 진실만 남는다.
가장 적라라 한, 본래 모습의
자기를 볼 수 있다.
혼자일 때, 비로서
인간은 탈을 벗고 화장을 지운다.
그래서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고
가장 진솔한 얘기를 할 수 있다.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이 차단 된다면
그게 누구든 '자기' 와 만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혼자일 때 비로서
주변의 의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다른 차원에 접근 해 봐야 여러가지
'차이'를 인정하고 깨닫는 수준에 갈 수 있다.
그게 '인간적 성숙' 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국악인인 황병기 교수는,
작품 하나를 작곡하는데 2년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숙성시킨다' 고 표현한다.
숙성이 무엇인가. 익히는 것이다.
날 것을 익히는데
2년이 걸린다는 얘기다.
2년동안 '생각' 하는것이다.
2년동안 '사색' 하는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색'을 방해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영상매체' 가 대표적이다.
그것은 찰라적이고 자극적이고
선동적이고 즉흥적이다.
인간의 가장 고상하고 고유한 기능인
사고력-思考力 을 앗아가고 있다.
'생각-사색' 하지 않는
인간을 '인격적존재' 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우리사회가
경박하고 천박하고 살벌한 것이
'생각-사색' 이 없기 때문이다.
깊이가 없으니 '접시문화' 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살기 어려워 진다.
사회자체가 발전-성숙해 질 수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나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쉽게 말해 이게 철학-哲學 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들은 없다.
왜냐하면
'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면의 소리' 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대답,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어야 '인격적존재' 다.
현실에서, 일상에서
'나' 를 규정해 주는게 그 대답이기 때문이다.
등뜨시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내면의 소리' 를 듣지 못한다.
'귀' 가 없기 때문이다.
일년 365일을
바쁘게 사는게 전부는 아니다.
때론, 잰 걸음을 멈추고 혼자가 되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리고 깊은 곳으로 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의미있는 삶' 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다.
또 한 세월이 지나가기 전에
'자기' 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항상
남들을 따라 살 수 만은 없는 일이다.
by/yoro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