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ttps://www.youtube.com/watch?v=VatmK4xlMnE&t=9853s
1: 14세기 초의 기사.
이 기마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슬 갑옷으로 덮여 있다. 소매 끝에는 사슬 장갑이 있으며, 필요할 경우 가죽 손바닥의 틈으로 손을 넣을 수 있었다. 갑옷 위에는 문장이 새겨진 천으로 된 겉옷을 입고 있으며, 문장은 말한테 씌운 겉옷이나 기사가 들고 있는 깃발에도 그려져 있다. 이 기사가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에 달린 날개 모양의 장식은 독일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다른 서유럽 지역보다 더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사용되었다.
2. 1300년 경의 보병
이 남자가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는 주전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주전자 모자라고 불렸다.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슬 갑옷을 입었고, 그 위에 외투를 걸쳤다. 오른손에 긴 창을 들었지만, 후세의 스위스 용병이나 독일 용병들처럼 극단적으로 길이가 길지는 않다. 왼쪽 허리에 칼을 찼는데, 전쟁터에서 창을 잃었을 경우에 쓰는 보조용 무기다. 왼손으로 쥔 방패는 화살이나 창 같은 적의 공격을 막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3. 14세기 초, 석궁병
석궁은 12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에서 즐겨 사용되었던 무기이며, 이탈리아의 제노바인들은 석궁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용병 부대였다. 이 석궁병은 비늘 갑옷을 입고 있는데, 금속 뿐만 아니라 뿔이나 가죽으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입은 짧은 소매의 사슬 갑옷 아래로는 누비 속옷 소매가 드러나는데, 이는 적으로부터 받는 타격의 충격을 완화해주었다. 사슬 갑옷 후드 아래에는 누비 투구 모자가 있고, 어쩌면 쇠로 만든 투구도 썼을 것이다. 그의 무기는 뿔로 만든 활이며, 벨트 고리에 끈을 걸고 발을 등자에 넣어 활 시위를 당겼다.
1. 알브레히트 폰 호헨로에, 1325년
이 기사는 가죽 뒷면에 부착된 작은 판으로 된 갑옷을 짧은 겉옷 아래에 입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전투에서 무기와 투구와 방패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것들의 뒤에다가 사슬을 채워 몸에 입은 갑옷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스타일은 당시 독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2. 오토 폰 오를라뮌데, 1340년.
이 바이에른 기사는 14세기 중반에 발전된 형태의 판금 갑옷을 입고 있다. 그의 모습은 가죽이나 캔버스 바탕에 리벳으로 고정된 독특한 금속 띠를 보여주며, 이러한 갑옷 중 일부는 판이 외부에 부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죽에 고정된 금속 띠로 된 독일식 방어구가 그의 팔뚝을 보호하는 용도로 쓰였다.
3. 보병, 14세기 중반
이 전사는 몸에 사슬 갑옷을 걸쳤고, 두 팔뚝과 다리를 철제 보호대로 감쌌다. 그가 가진 방패는 옛날 방식의 둥근 형태이며, 무기로는 무거운 외날 칼날을 가진 검인 팔치온을 들고 있다. 팔치온은 무게 때문에 다른 검들보다 적에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1. 귄터 폰 슈바르츠부르크(1304년~1349년), 1345년.
이 남자는 슈바르츠부르크 가문 출신의 백작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 국왕인 카를 4세에 맞서 자신이 보헤미아 왕국의 정당한 국왕이라고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그가 입은 갑옷은 팔과 다리 부분을 리벳으로 보강했으며, 그를 상징하는 문장인 황금색 사자는 그가 갑옷 위에 걸친 외투와 들고 있는 방패에 그려져 있다. 그가 착용한 투구 끝에 꽂힌 화려한 공작 깃털 장식은 전쟁터보다는 마상창시합(토너먼트) 경기장에 참가하는 기사들이 즐겨 사용했던 것이었다.
2. 보병, 14세기 중반.
이 병사가 입고 있는 앞이 트인 겉옷은 그가 옷 안에 판금 갑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옷 윗부분의 띠는 바깥 쪽으로 착용했다. 두 손등 부위에는 손가락이 들어가는 별도의 공간이 있으며, 작은 판이 덧대어져 있고, 두꺼운 가죽 띠가 손목을 보호한다. 신발 부위는 겹치는 비늘들로 보호를 받는다.
3. 쿠만족 보조병, 14세기 중반
쿠만족은 현재 러시아 남부에 살던 투르크족 계통의 유목민족으로 13세기 중엽 러시아로 쳐들어온 몽골군을 피해 서쪽으로 달아나서 주로 헝가리 지역에 정착을 했는데, 헝가리와 독일의 통치자들한테 용병으로 자주 고용되었다. 이들은 15세기 초까지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날렵한 기마궁수로 활동했으며, 뿔과 힘줄로 만든 합성궁이 주요 무기다.
1. 기사, 1370년.
이 기사는 갑옷 외부에 흉갑을 착용하고 있다. 그의 투구에는 이마에 고정된 초기 형태의 클라프비저가 있다. 벨트는 당시 유행에 따라 엉덩이 아래쪽에 착용하고 있다. 방패에는 홈이 파져 있는데, 이는 적이 찌르는 창을 비켜가게 하기 위함이다.
2. 스위스 기사, 14세기 후반
이 기사가 두 팔에 걸친 장식은 15세기 초에 인기를 얻은 복장이며, 겉옷 위에 흉갑을 입고 그것을 끈으로 묶었다. 그가 머리에 쓴 투구는 밀라노풍의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3. 보헤미아 궁수, 14세기 후반.
이 궁수는 목 부분에 비늘 갑옷을 입었지만, 당시 보헤미아의 문헌들을 보면 판금 갑옷을 입은 궁수들도 언급된다. 카를 4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이렇게 중무장을 한 궁수들도 널리 확산되었다.
1. 기사, 1420년
이 기사는 신성로마제국 동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늘 갑옷으로 만들어진 치마를 입고 있다. 단단한 가죽 보호대가 허벅지를 보호하지만, 발은 보호받지 못한다.
2. 권총 사수, 15세기.
이 남자는 이단으로 여겨진 후스파 신도이거나 독일군의 사수일 수도 있다. 그는 사슬 갑옷 위에 두꺼운 패딩 외투를 입고 있다. 또한 다리 부분에는 판금 갑옷도 착용했다. 그가 들고 있는 무기는 '피스톨라'라고 불리는 총기인데, 여기서 권총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인 피스톨이 유래했다. 그는 지금 방패의 잘린 부분에 피스톨라의 몸체를 대고 눈앞의 기사를 향해 공격을 하는데, 실제로 피스톨라를 다루는 사수들은 그런 식으로 방패의 잘린 부분에 총신을 대고 안정적으로 조준할 수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총기에 들어가는 총탄과 화약은 왼쪽 엉덩이쪽으로 찬 가죽 가방 속에 보관된다.
3. 후스파의 플레일(도리깨와 비슷한 서양의 타격 무기)을 다루는 병사, 1425년.
후스파 병사들은 플레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로 악명이 높았다. 민첩하게 행동하기 위해 이 남자는 일부러 갑옷을 입지 않고, 전투용 마차인 바겐부르크의 뒤에 숨거나 안에 탑승한 상태로 활동한다. 이들의 놀라운 용기는 총기의 대량 사용과 맞물려서 기사들이 입은 갑옷을 무력화시켰다.
1. 기사, 1440년
이 기사가 입은 갑옷은 판금 갑옷의 일종인 카스텐 브루스트인데, 1450년 이후로 유행이 지나갔다. 그가 입은 치마와도 같은 긴 갑옷은 마상 전투가 아니라 도보 전투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2. 포수, 15세기 중반
이 남자는 전투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고 나왔다. 그는 포인트라고 불린 가죽끈으로 밑단에 묶인 양말을 신고 있다. 손가락 보호대가 장착된 이탈리아 검과 정교한 단검이 그가 총기 이외에 사용하는 무기이다. 그가 두 손으로 들고 있는 가죽 풀무는 화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3. 스위스 용병, 15세기 중반
스위스인들은 오스트리아인들과 부르고뉴인들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하여, 유럽 각지에서 용병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 남자는 사슬 갑옷과 챙이 넓은 투구를 착용하고 있다. 그가 두 손으로 든 무기는 스위스인들이 능숙하게 다루었던 할버드이다.
4. 석궁병, 15세기 중반
많은 중세의 병사들처럼 이 남자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갑옷을 입었다. 그가 머리에 쓴 투구는 여러 개의 철제 비늘로 덮여 있다. 그는 다루기 힘든 윈들러스로 활 시위를 당기는 강력한 강철제 석궁을 들고 있다. 또한 그는 목책이나 지붕에 불을 쉽게 지를 수 있도록, 불연성 물질로 감싸진 일종의 소이탄도 가지고 있다.
1. 기사, 1485년.
이 기사는 완전무장을 한 채로 갑옷을 입힌 말에 올라탔다. 그와 말이 착용한 판금 갑옷은 전형적인 하이 고딕 스타일로 홈이 파여져 있으며, 턱과 입을 보호하는 챙이 달린 투구도 머리에 썼다. 안장 뒷부분에는 지지대가 있으며, 앞부분은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 강철로 덮여 있다. 그가 탄 말은 판금 갑옷 덕분에 최대한의 보호를 받으며, 말의 옆구리에 신호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길이가 긴 박차를 착용했다.
2. 기마 석궁병, 15세기 후반
그는 짧은 사슬 갑옷과 이탈리아식 흉갑을 착용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허벅지 길이의 장화를 두 발에 신었고, 장화 위쪽에는 단검이 꽂혀져 있다. 그의 석궁은 짐승의 뿔로 만들어졌으며, 비가 오면 시위가 젖는 것을 막기 위해 가죽으로 덮을 수 있다. 석궁에 장전하는 화살은 단단한 가죽으로 덮인 화살통에 보관했다.
3. 15세기 후반, 플랑드르 용병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안 1세는 오늘날의 벨기에인 플랑드르 지역에서 많은 수의 플랑드르 용병들을 모집했다. 이들은 독일 각 지역의 도시들로부터 급여를 받았다. 이 보병은 사슬 갑옷 위에 리벳으로 고정된 작은 금속판들로 만들어진 브리건딘(옷속에 쇳조각들이 들어간 동양의 두정갑과 비슷한 갑옷) 갑옷을 입고 있다. 그의 배와 팔과 다리는 이탈리아제 판금 갑옷으로 보호되고, 머리에는 이탈리아제 투구를 쓰고 있다. 그의 주무기는 기다란 창이지만, 보조무기로 왼쪽 허리에 기다란 플랑드르제 검도 차고 있다.
1. 기사, 1500년
고딕 갑옷은 15세기 말엽부터 막시밀리안이라고 불리는 보다 둥근 스타일로 바뀌었다. 이 형태는 16세기에 큰 인기를 끌었고 그림에 나타난 사례가 바로 그런 스타일이었다. 다만 이 기사는 두 발로 걸어다니며 싸우는데 편리하도록 일부러 두 다리에 착용하는 보호대를 벗어버렸다. 하지만 16세기 이후로 가면서 총기가 널리 퍼지자,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서 두 다리에는 일부러 갑옷을 입지 않고 상반신에만 갑옷을 입는 풍습도 널리 퍼졌다.
2. 보병, 1500년
이 남자는 신성로마제국 서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병이었다. 그는 가슴과 배 부위는 판금 갑옷을 입었지만,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두 다리 부위에는 아에 갑옷을 입지 않았고, 두 팔은 사슬 갑옷을 입었다. 그가 가진 무기는 폴액스(창과 도끼가 결합한 무기)와 검이다.
3. 화승총병, 1500년
이 병사가 입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은 16세기부터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친 독일인 용병 부대인 란츠크네히트 병사들이 입었던 화려한 옷과 비슷하다. 그가 가진 화승총(아르케부스)은 뱀 모양의 장치에 장착되어서 방아쇠를 손가락으로 당겨 발사된다.
===========================================================
1300~1500년 독일 군대
중세 독일은 신성 로마 황제의 명목상 통제 하에 있는 여러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서방 최초의 독일 황제는 서기 800년에 즉위한 샤를마뉴였다. 그는 서유럽과 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을 통치했지만, 그가 이룩한 광대한 영토는 나중에 전쟁을 벌이는 그의 후손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1300년 경에는 제국이 오히려 중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 위치했다. 프리드리히 1세 황제는 자신의 칭호에 신성이라는 단어를 추가했지만, 그것이 암시하는 통일성은 현실과 달랐다.
제국의 서쪽에는 중앙 통제의 부족으로 혼란스러운 영토 분포를 보인 공국과 주들이 있었습니다. 국경은 프랑스 왕과 부르고뉴 공작의 국경과 접했는데, 특히 15세기에는 브라반트와 룩셈부르크와 같은 옛 제국 영토를 점점 더 많이 침범했다. 북쪽으로는 홀슈타인이 발트해 무역의 경쟁 상대이자 남쪽 지방을 침략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덴마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 공국,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이 있었다. 이 국경에서 황제는 항상 국경 너머 슬라브족의 위협에 직면했다. 필연적으로 독일 통치자들은 강력하고 힘센 사람들이었다. 황제들은 이 지역에서 가장 수익성이 있는 확장 기회를 보았고, 그 결과 식민지화에 대한 제국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특히 13세기 프로이센, 리보니아 및 기타 발트해 연안 국가에서 튜턴 기사단에 의한 정복이 활발했다. 한편 슬라브족의 왕국인 보헤미아는 1305년에 토착민 출신 왕을 잃고 독일계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모라비아와 같은 다른 슬라브족들은 신성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다. 남쪽에는 이탈리아가 있었고, 이탈리아 북부 국가들도 독일의 영유권 주장 대상이었다. 황제와 교황의 관계가 순탄한 경우는 드물었고,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간섭은 감소했지만, 신성 로마 황제들은 여전히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300년 경에는 이전에 했던 이탈리아에 대한 관여와 간섭이 독일의 문제를 악화시켰기 때문에 남은 왕실 소유 토지가 거의 없었다. 다른 유럽 군주들과 비교했을 때 신성 로마 황제들은 넓은 영토에 대한 명목상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다소 약한 인물이었다. 그들의 왕자들은 직접 큰 봉토를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왕관에서 나온 자들; 원래 군대를 이끌었던 공작(Herzoge), 다양한 계급의 백작(grafen) 약 100명, 그리고 특정 제국 도시를 소유했던 부르그라프와 같은 강력한 귀족들이 포함되었다.
이 제후(귀족들 중에서 성과 토지, 그리고 군대를 보유한 실력자들)들은 권력을 다투었고, 하급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1300년 경에는 독일에 약 1만 개의 성들이 있었고, 종종 일반 기사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개인적인 이유로 벌이는 사적 전쟁(fehde)이 용인되었고, 이는 공개적인 전쟁(krieg)과 구별되었다.
1378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벤체슬라스(바츨라프 4세)가 보헤미아의 왕이자 독일 왕(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지녔던 호칭 중의 하나, 하지만 정작 벤체슬라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지 못했다)으로 선출·즉위하면서, 중앙 권력이 비효율적으로 변했다. 제후들은 가문 구성원들에게 땅을 나누어 새로운 토지 단위를 만들면서도 작위를 유지하고 불화를 더욱 악화시켰다. 기사들과 도시들은 보호 동맹을 결성했고, 농민 봉기와 보헤미아의 이단 후스파에 대한 십자군 전쟁이 벌어졌다. 15세기 후반에 제후들은 세금 징수권을 확보하고 하급 귀족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화약과 대포에 부를 쏟아부었다. 개인들이 가지고 있던 성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3개의 가문들이 다른 가문들보다 더욱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14~15세기초), 그리고 후대의 강력한 오스트리아 출신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이들 가문과 다른 가문들, 그리고 기사와 도시들의 투쟁은 중세 시대 내내 독일 역사의 특징이 되었다.
조직
봉건제는 서유럽, 특히 강력한 변경 영토가 있는 지역에서처럼 제국에 그렇게 일찍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13세기 동안 봉건 계약에 기반한 군사 징집이 일반화되었다. 주군과 봉신 간의 유대감은 서구에서 흔히 그랬던 것처럼 강하지 않았고, 특정 영주에 대한 충성심도 그다지 장려되지 않았다. 봉건 제도의 병사 소집은 이상적이지 않았고, 소집에 지연을 초래할 수 있었다. 13세기 동안 이러한 소집은 용병 부대로 보완되었고, 다음 세기에 용병 부대의 고용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병사 할당량을 현금으로 대체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전문적인 군대를 편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스템은 효과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황제에게 직접 책임이 있는 귀족들의 이기적인 태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황제는 주로 제국 의회의 호의에 의존했다. 이 의회는 스스로 권력을 장악한 제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무력화된 황제를 명목상의 수장으로 삼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했었다. 14세기가 진행됨에 따라 왕실이 요구하는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위한 로마로의 여행(롬추크 또는 롬파르트)은 많은 영주들이 로마의 왕과 함께 여행하는 계기였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를 통과하는 행렬에는 최대 1만 2천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최대 6개월이 걸렸다. 이 병력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소집되었으며, 1500년 이후에도 알프스 독일 쪽에서 사용할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서는 40일 이전에 통보하는 것이 관례였고, 알프스 너머에서 복무해야 하는 경우에는 410일로 크게 연장되었다.
1309년 8월 15일, 하인리히 7세는 로마로 여행할 뜻을 밝혔고, 다음 해 10월 1일까지 군대가 준비될 것으로 예상했다. 바이에른의 루트비히는 제국 도시들이 관례대로 기병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귀족들이 움직이려는 욕구도 줄어들었다. 145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수행원이 없이 수천 명의 병사들만을 호위대로 삼아 로마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 징집이 전문 병사 고용을 위한 현금 지불로 대체된 후에도 오랫동안 황제를 위한 군대 모집의 기반은 로마 화폐였다. 무기력한 봉건 군대와는 달리, 용병은 더 빨리 모집할 수 있었고 종종 더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가능한 한 최상의 계약을 확보하기 위해 의회와 협상해야 했고, 합의된 지원금이 너무 늦게 실현되어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높은 금리로 빌려야 할 수도 있었다. 행정 비용을 공제한 후, 모집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황제가 필요로 하는 병력의 수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의회는 모든 재산이나 소득의 절반, 또는 1%에 해당하는 세금인 게마이너 페니히(Gemeiner pfennig)를 징수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병력이나 자금 지원은 일반적으로 다음 해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봉건에서 용병으로의 전환은 유럽의 경제적 편향을 반영하는데, 유럽에서는 군대가 봉토보다는 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봉신에 대한 군사 소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토지에 대한 의무, 또는 봉토에 대한 의무로 존속했다. 1401년 로마의 왕 루퍼트는 로마 여행을 위해 봉건적인 창병 징집을 요청했다. 소집된 영주들은 각기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매달 25 플로린을 받았다.
병사들의 수를 세는 방법은 점차 글레벤(Gleven)를 이용하게 되었다. 글레벤이라는 용어는 13세기 초에 처음 등장했고, 당시에는 창을 가리켰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글레이브(Glaive)라고 불렀다. 점차 그 의미는 기사와 전투에서 그를 섬기는 소규모 부대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이 용어는 1310년 경에 3명의 기병을 가리켰을 수도 있는데, 이 시기에 기사들은 서전트라 불리는 하사관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사와 종자의 부분적으로 무장한 하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인 크네히트(Knecht)로 대체되었다.
14세기 동안 글레벤이라는 용어는 특정 수의 병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지만 정확한 구성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무장을 했던 것이 확실한데, 1373년 마이네케 폰 시슈테트는 카를 4세 황제에게 글레벤에 속한 100명의 병사와 함께 고용되었고, 각 글레벤은 기병 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1명은 말을 타고 무장했고 다른 1명은 발사 무기를 지녔고 남은 1명은 시종이었다. 비슷한 구성은 다른 문서에서도 발견되지만 다른 조합도 있었다. 슈바벤에서는 글레벤이 4마리의 말들을 가리켰다. 뉘른베르크에서는 창병 1명과 말 2마리, 스트라스부르에서는 말 5마리,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창병 1명과 궁수 1명, 말 3마리가 동원되었다. 보병 역할을 하는 시종 여러 명과 최대 2명의 하인과 3명의 투석병이 글리벤에 포함될 수 있었으며, 투석병은 전투를 위해 말에서 내렸다. 말을 탄 사람과 보병을 합쳐 최대 10명까지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에서 중무장 기병들은 부르는 호칭들은 Lanze, Spiess, Gleve, Helm 등이었다.
군주 징집병
의회의 변덕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서, 군주들은 자신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군대를 봉토에서 징집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봉건적 의무는 필요에 따라 복무해야 하는 자유민들을 소집할 기회도 제공했다. 이러한 징집병들은 봉건 군대에 대한 제국의 요구가 있을 때도 소집되었다. 30명 중 1명, 10명 중 1명, 때로는 5명 중 1명씩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징집병들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사회적 반항심을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401년, 남부 독일 아펜첼 지역의 주민들은 스위스 동맹군에게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갈 수도원장과 오스트리아 군대에 저항했다. 벤덴베르크-라인에크 백작은 농부의 옷을 입고서 직접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은 영주들을 괴롭히며 성을 파괴했다. 1408년 슈바벤의 백작과 기사들이 브레겐츠 근처에서 그들을 공격했다. 약 40명의 병력을 잃은 후, 아펜첼러 주민들은 포병을 버리고 라인강을 건너 후퇴했다.
반란을 부추길 수 있는 잠재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일반 징집병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1388년 뷔르템베르크 백작은 도시들과의 전쟁 중 봉건 및 용병 부대에 자유민 부대를 추가하여 병력을 늘렸다. 마찬가지로 바이에른 공작과 다른 군주들은 적은 비용으로 추종자들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14세기에 스위스의 힘을 느끼고 15세기에 수프차와 헝가리를 상대로 싸웠던 오스트리아의 공작들이 그러했다. 1421년, 후스파를 상대로 한 전쟁이 시작되자 알브레히트 5세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 거주하는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건장한 남성에게 군대 복무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10개의 가구마다 군대 복무에 적합한 가장 강인한 체력을 가진 사람을 1명씩 선발하고 나머지 9명은 그를 돌보면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모집된 20명 중 3명은 권총, 8명은 석궁 4명은 창, 4명은 플레일(도리깨와 비슷한 무기)를 지녀야 했다. 20명으로 구성된 병사들은 무기와 장비들을 실어나를 수레도 가져야 했다. 징집을 회피하는 사람은 벌금을 내야했고, 그 돈은 공작이나 군대 지휘관들에게 지불되었다.
도시와 도시 연맹
13세기 중앙 권력의 붕괴는 제국 내에서 공동체 군대와 도시 연맹이 형성되는 주요 요인이었다. 공동체 군대의 초기 사례로는 작센의 디트마르셴과 스위스의 군대가 있다. 디트마르셴은 바다와 늪으로 보호되었으며, 적군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해안 뿐이었다. 영주들은 이 험준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거의 간섭하지 않았고, 만약 간섭하더라도 씨족 지도자가 이끄는 농민 공동체 군대가 그들을 물리쳤다. 1227년에는 덴마크 군대가 보른회베드에서 패배했다. 1319년과 1404년에는 디트마르셴이 홀슈타이너의 두 차례에 걸친 제압 시도를 좌절시켰다. 후자의 원정에서 슐레스비히 공작과 홀슈타인 백작은 디트마르셴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기습 공격을 받았다. 숲에서 공격을 받아 말들이 쓰러지고 많은 귀족들이 죽임을 당했다. 1500년 헤밍슈테트 전투에서도 덴마크군은 참패했다.
스위스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주는 1291년 모든 외부 권위를 거부하고 '영원한 동맹'을 결성했다. 척박한 땅에 살던 스위스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용병 활동에 뛰어들어야 했고, 그들은 장창을 주요 무기로 사용하여 그 자체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14세기 동안 그들은 자신들한테 쳐들어오던 오스트리아 군대를 계속해서 물리쳤고, 다음 세기에도 부르고뉴 공국을 상대로도 싸워서 승리했다.
공동체 군대로 가장 유명했던 집단은 한자 동맹이었다. 이 동맹은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플랑드르(벨기에)와 무역을 하던 독일 도시들의 느슨한 연합체였고, 주로 상업적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많은 도시들이 가입과 탈퇴를 반복했으며, 1477년 한자 동맹 회의에 38개 도시가 참여했을 때 그 세력이 가장 강성했다. 한자 동맹에 가입한 도시들은 시민들이나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제공했다. 모든 한자 동맹은 고정된 수의 무장한 병력을 제공했으며, 다른 회원 도시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또한 한자 동맹의 방패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이기도 한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들의 주요 적대자는 덴마크의 국왕인 발데마르 4세였다. 1362년 덴마크-독일 전쟁 도중, 독일 함대가 스웨덴 남서부 해안 근처에서 덴마크 함대와 마주쳤을 때, 헬싱보리에서 독일 함선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새로운 함대의 사령관이 임명되어 덴마크와 스웨덴 해안의 많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점령하자, 발데마르 4세는 도망쳤고 1370년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1468년부터 디트마르셰는 한자 동맹 도시인 뤼베크와 동맹을 맺었다.
한자 동맹은 영속성과 느슨한 구조 면에서 이례적이었다. 독일의 도시들이 연합하는 경우는 대개 군주나 주교의 권력 또는 지역을 떠돌던 강도 기사들(주군을 섬기지 않고 강도짓을 일삼으며 생계를 꾸려가던 기사들)의 약탈 같은 특정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상인들에게 전쟁은 무역을 방해하고 도시 민병대를 훈련시키거나 용병에게 돈을 지불해야 함으로 수익성이 없었다. 그러나 행동에 나서야 했을 때, 도시들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강도 기사들에 대한 작전에서 도시 민병대는 100개가 넘는 성을 파괴했다. 이러한 갈등의 대부분은 엄밀히 말해서 지역적인 성격을 지녔다. 실제로 1383년 라인과 슈바벤 지역의 모든 도시들이 채택한 결의안에는 시민들이 해질녘까지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언급되었다.
마을은 일반적으로 병력 분산을 위해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구역은 주요 성문을 기준으로 하여 의회에서 임명한 병참 장교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다른 장교나 나팔수, 망루 경비병의 도움을 받았다. 성벽, 성문, 해자와 같은 방어 시설 건설에는 세금 수입의 상당 부분이 소모되었고, 훈련장과 사격장이 제공되는 경우에는 그 소모되는 세금이 더욱 늘어났다. 퀼른의 시민들은 매년 전쟁을 알리는 경보 소리에 복종하고 항상 갑옷을 준비된 상태로 유지하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모든 도시는 시민들이 무기와 갑옷을 가지고 소집에 참여하기를 기대했으며, 도시 무기고에서는 대포와 마차와 같은 물품을 공급해야 했다.
림부르거 연대기에는 소집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병력 수와 보유해야 할 갑옷의 양이 언급되어 있었다. 1336년에서 1342년 사이에 2천 명의 시민들은 필요할 때 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갑옷을 입고 집결해야 했다. 1393년 메츠와 프랑크푸르트는 대형 대포와 700~800파운드의 포탄을 보유해야 했다. 14세기 후반까지 일부 도시에서는 포병들을 감독하기 위해 별도로 포병 사령관을 고용했다.
도시들은 전투에서 쉽게 식별하고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보유한 군사 부대에 화려한 제복을 입혔다. 14세기 전반기에는 일부 도시에서 여전히 카로치오라고 불리는 수레에 그려진 큰 깃발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 중 하나는 1336년 스트라스부르의 큰 깃발로 금색 바탕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그려져 있었으며, 베르톨트와 대치하는 도시 군대의 행렬에서 뷔헤네크로 행군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길드는 각자의 깃발을 가지고 전투에 참여했다.
1431년 레겐스부르크 사람들의 행군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들은 동쪽의 후스파 군대와 싸우기 위해 원정대장 뒤로 깃발을 든 기병 73명과 석궁병 71명, 그리고 권총 사수 16명이 뒤를 따랐다고 언급된다. 다음으로는 십자가를 실은 마차가 군목(군대를 따라가는 성직자)과 함께 뒤를 따랐고, 그 뒤로는 대장장이, 가죽 세공사, 갑옷 제작자, 창 제작자, 제단사, 요리사, 정육점 주인 등 총 248명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장비를 갖춘 대포 6톤, 포탄 300 파운드와 납탄 200 파운드도 같이 운반했다. 41대의 마차에는 화약과 납, 화살 6천 개, 불화살 300개, 권총 19정, 마구간과 텐트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소가죽, 그리고 6주 분량의 식량으로 쓰일 소 90마리와 곡식, 조리된 고기 900파운드와 라드(돼지기름) 900파운드, 치즈 1200조각, 말린 생선 80마리, 자르지 않은 양초 56파운드, 식초와 올리브유, 후추, 사프란, 생강, 73개의 나무통에 실린 오스트리아산 포도주와 138개의 나무통에 실린 오스트리아산 맥주가 보급 마차에 실려 있었다. 이 작전의 비용은 총 838파운드 3실링이었다.
도시들은 한동안 글레젠 제도를 사용했고, 귀족과 부유한 기술자들이 군대 장비 지원을 도왔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도시들은 도시의 기사들을 매우 믿었다. 사회적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무장 복무를 지시받은 일부 상인들이 새로운 기사가 되었다. 그들은 콘스타플러(konstaflers 중세 중후반기에 북독일 및 발트해 연안 도시들의 부유한 엘리트 시민기병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어 마그데부르크와 취리히 같은 도시에서 말을 타고 군대에 복무했다. 1363년 스트라스부르의 콘스타플러들은 81개의 글레벤(길드)을 제공했다.
민병대는 종종 마을의 시장이 지휘했지만, 점차 전문적인 군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특히 포병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용병으로 고용된 기사가 민병대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처음에는 용병들의 충성심을 믿지 못한 시민들의 우려 때문에 그들이 도시 바깥의 탑이나 교외 지역에만 배치되었지만, 나중에는 도시의 내부 지역에도 배치되었다. 용병을 고용하는데 드는 비용 때문에 그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도 함께 모집하는 관행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1371년 퀼른은 41,584마르크 9실링의 비용을 들여 용병과 잘 무장한 시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오덴키르헨으로 파견했다. 용병의 사용은 이탈리아보다 독일에서 더 공식화된 경우가 많았다. 퀼른은 14세기 중반에 베르크 백작과 1세기 전에 체결했던 조약과 거의 같은 조약을 계속 갱신했다.
스위스 용병들은 스위스와 가까운 지역에서 자주 고용되었다. 1450년, 올름 사람들은 뉘른베르크인, 독일인과 보헤미아인, 그리고 스위스 용병들을 라인 길더 2개에 모집했고, 이후 매달 길더 5개를 지불했다. 그들은 또한 숙식과 약탈품을 자신들의 몫으로 지급받았다. 행군하기 전에 병사들은 주민들을 해치지 않고 서로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용병들의 지도자는 그 맹세를 어긴 병사들을 처벌할 권한이 있었다. 퀼른은 1474년 스위스 용병을 위해 협상을 벌였다. 당시 퀼른의 대장인 빌헬름 헤르터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6~8명의 로트마이스터(Rottmeister 독일어권에서 사용되던 역사적인 직책 및 군사 계급으로, '조(Rotte, 8~12명 규모의 소조)의 지도자. )가 이끄는 400명의 병사를 제안했다. 그가 제공할 15명의 기사들이 받을 비용은 100플로린이었고, 로트마이스터 한 사람씩에 대해 8플로린, 그리고 기병 각각에 대해서는 4플로린이었다. 퀼른은 헤르터에게 200플로린의 비용을 지불하기 거부했고,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반면 메츠는 1490년에 11개 나라 출신의 외국인 용병으로만 구성된 1,500명의 기병과 800명의 보병을 보유했다고 기록되었다.
14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 여러 차례 도시들의 봉기가 이어졌다. 도시의 낮은 계급에 있던 주민들이 귀족들의 폭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외부적으로는 도시들이 한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기사와 귀족 및 주교와도 권력을 두고 다투었다. 1377년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약탈 원정 중이던 로이틀링겐 시민들에게 도시 밖에서 패배했다.
15세기에는 도시와 주교 간의 분쟁이 반복되었다. 1425년 스트라스부르, 마인츠, 아우크스부르크, 밤베르크, 뷔르츠부르크는 모두 교회 세력과 갈등을 겪었다. 퀼른 대주교는 1442년 베스트팔렌의 조스트 시와 5년 간 지속된 대규모 분쟁에 휘말렸다. 조스트 시는 클레베스-마르크 공작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대주교는 수천 명의 작센과 보헤미아 용병을 고용했지만, 그들한테 지급하는 돈이 너무 많아서 결국 용병들을 얼마 못가 해고해 버려서 시민들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13세기에는 서로 간의 보호를 위해 도시 연맹이 결성되었고, 14세기에는 더 강력해지고 널리 퍼졌다. 가장 강력한 도시 연맹은 1376년 올름의 주도 하에 설립된 슈바벤 연맹으로 황제가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도시를 제후들에게 담보로 맡기는 것을 막고, 영주와 기사들에게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1331년과 1347년에 슈바벤 지역의 여러 도시들은 이미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동맹을 결성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창과 석궁으로 무장했고, 용병 부대인 '자유의 병사들'을 모집했다. 화약은 동맹이 결성된 해에 동맹을 공격하기 위해 파견된 제국 기사들과 바이에른 공작의 기사들을 모두 물리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동맹에는 알자스 동맹과 심지어 일부 스위스 도시들도 함께했다.
1381년 라인란트에서는 슈바벤 지역의 36개 도시들과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를 비롯한 여러 왕립 도시들이 참여하는 도시 연맹인 '데어 슈테데 분트'가 결성되었다. 루퍼트 드 나사우와 같은 여러 귀족과 기사들이 이 연맹에 가입했으며, 슈바벤 연맹과 동맹을 맺었다. 라인란트 연맹은 200명의 기병을 고용할 수 있었고, 도시 주민, 기술자, 농민들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었다. 1년 안에 이 라인란트 연맹은 여러 면에서 그들이 맞서 싸우던 기사나 영주들만큼이나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1388년 되핑겐 전투는 도시 세력의 힘에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기사들과 농민 징집병들은 한자 동맹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강력한 도시 군대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대도시 전쟁 이후 라인 동맹과 슈바벤 동맹은 결국 해체되었다. 일부 동맹은 살아남았는데, 1405년에는 슈바벤의 17개 도시와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는 마르바흐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 많은 도시들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자 동맹은 독일의 혼란을 해결하지 못했다. 한자 동맹은 영국과 네덜란드에 의해 많은 무역권을 빼앗겼고, 이 지역의 많은 도시들은 포메라니아 공작, 호엔촐레른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게 굴복하여 독립을 포기하였다. 라인란트 하류의 일부 도시들은 명맥을 유지했고, 남부 독일에서는 몇몇 도시들이 오히려 번영을 누렸다.
1488년, 성 게오르기우스 동맹이라는 기사 조직의 대장이었던 베르덴베르크의 휴고는 새로운 슈바벤 동맹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연맹은 기존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비텔스바흐 가문과 뷔르템베르크의 에버하르트,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귀족, 주교, 기사, 그리고 22개의 도시들이 모두 공통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기사 연맹
도시들이 동맹을 구축하는 동안, 일부 기사들도 제후들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고 도시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비슷한 전략을 따랐다. 1356년의 황금칙서는 제후들을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로 만들었지만, 하급 귀족과 기사들은 여전히 성에서 그들한테 저항했다. 특히 슈바벤과 프랑코니아, 서부와 중부 독일의 분열된 지역에서는 무질서한 무리들이 골칫거리였다. 이곳에서는 강도 기사들이 성이나 요새화된 집에 거주하며 주민이나 상인들을 상대로 약탈을 저질렀다. 헤세의 호른, 왕관, 검, 성 마르틴, 성 게오르크와 같은 이름을 가진 동맹들이 생겨났다. 특히 성 게오르크 동맹은 아펜첼 전쟁(1403~1411년) 동안 동맹을 맺은 슈바벤의 여러 하급 귀족 가문들로 구성되었다. 기사들은 내부 세력이나 외부 세력의 간섭 및 분쟁에 대해 방어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용할 수 있는 도시나 군주와의 계약 가능성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맹이 3년 동안 구성되었으며, 각 기간이 끝난 후에는 대장이 새로 선출되었고 그에 대해 충성 서약도 이루어졌다.
기사 연맹은 전투 병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제후를 가입시킬 수 있었다. 지기스문트 황제(1410~1437년)는 제후들에 맞서 제국 도시들과 동맹을 맺기를 원했고, 프리드리히 3세 황제(1440~1493년)도 연맹이 슈바벤에서 계속 유지되기를 원했다.
이 기사단들은 곧 군사적 독립을 얻어냈다. 기사들은 라인 지역의 붉은 소매, 왕관, 별, 늑대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화려한 제복이나 휘장을 착용했는데 그것들은 황금 장식이 들어가서 은 장식을 사용하는 종자들과 구분되었다. 14세기 중반, 한 동맹으로 인해 뷔르템베르크의 에버하르트는 무역이 위협받는 여러 슈바벤 지역의 마을들과 동맹을 맺었다. 1380년 '으르렁거리는 사자 기사단(방패에 사겨진 문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은 약탈 도중에 사로잡힌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를 포위했다. 1397년에는 폴란드를 돕고 튜턴 기사단과 맞서 싸우기 위해 서부 프로이센 지역에서 '도마뱀 동맹'이 결성되었다. 스텔마이저라는 동맹은 거의 모든 제후의 성을 점령했다.
브란덴부르크는 1415년에 변경백과 싸웠다. 그러나 15세기 동안, 그들의 부가 늘어남에 따라 제후들이 권력을 다시 주장했고, 점차 기사 연맹의 수는 줄어들었다.
후스파
보헤미아(현재 체코)를 지배하던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로마제국에 흡수되었고, 많은 독일인들이 정착한 이후로 체코의 분리주의 정신이 존재해 왔다. 15세기 초, 보헤미아의 종교 개혁가인 얀 후스는 교황이 이단으로 여긴 급진적인 사상을 퍼뜨리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후스에게 평의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안전 통행권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를 체포하고 나서 화형에 처해 죽였다. 이에 대한 보헤미아의 반응은 격렬한 분노였다. 독일인들을 몰아내고 후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한 반란은 튜턴 기사단에 맞서 폴란드를 위해 싸웠던 뛰어난 용병인 얀 지슈카가 이끌었다.
지슈카는 체코의 지형이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고, 아울러 체코인들의 대다수가 오랫동안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농민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체코인들이 두터운 갑옷을 입고 달리는 말 위에서 창을 찌르는 독일 기사들에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이 맞서 싸우러 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또한 체코 귀족들 역시 수가 적고 가난한데다 반란에 냉담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슈카는 동유럽에서 용병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군대에 바겐부르크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바겐부르크는 서부 영화에 나오는 포위된 마차 행렬과 비슷했다. 마차는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었고, 적군의 기병들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다른 마차들과 묶어서 임시 방어벽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바겐부르크 전술은 이미 러시아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를 굴라이 고로드(이동하는 요새란 뜻)라고 부르며, 유목민족인 타타르족을 물리치는데 효과적으로 써먹었다. 마차에는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뚫린 수많은 나무 방패들이 실려 있었는데, 러시아인들은 마차들을 서로 둥글게 묶어서 일종의 방벽을 쌓은 다음, 마차 위에 설치한 나무 방패들 안에 몸을 숨기고 미리 뚫어놓은 총구멍으로 총을 쏘며 타타르족의 기마궁수들을 물리쳤다. 이러한 전투 방식인 훗날 러시아인들이 폴란드 기병들을 상대할 때에도 똑같이 사용했다.
이밖에도 14세기에 이미 리투아니아인들이 튜턴 기사단과 맞서 싸울 때에도 바겐부르크는 사용되었고, 영국의 국왕인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자신의 진영을 프랑스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마차를 사용했으며, 보헤미아의 한 장군은 경사로를 지키기 위해 수레 뒤에 석궁병을 배치했다고 기록했다.
지슈카는 자신에 대한 십자군 전쟁의 위협에 직면하여 농장에서 사용하던 마차와 수레들을 징발했고, 방어태세일 때 마차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기둥과 사슬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마차는 4마리의 말들이 끌었고, 여자와 아이들은 짐을 가지고 군대를 따라갈 수 있었다. 진지를 형성하기 위해 마차들은 사각형이나 원형으로 모였고 말들은 마구를 풀고 중앙으로 모였다. 또한 측면의 보호를 위해서 경첩이 달린 판자나 울타리를 설치해고, 마차 위에는 총구멍이 달린 나무 판자를 추가했다. 그밖에도 도끼, 삽, 곡괭이, 갈고리가 달린 창 등이 마차에 실려있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사람들이 손에 들고서 그것들로 마차 방벽 안으로 쳐들어오는 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지슈카가 정한 규칙에 의하면 각 마차에는 운전수 2명, 권총 사수 2명, 석궁병 6명, 플레일을 다루는 병사 14명, 미늘창병 4명, 그리고 방패병 2명이 있어야 했다. 장창을 든 병사들은 마차 사이의 간격을 지키는 데 동원되었고, 미늘창이나 부리에 달린 갈고리를 사용하여 기사들을 말에서 끌어내렸다. 무거운 나무 곤봉에는 스파이크가 박혀 있었고, 탈곡용 플레일에는 못이 박혀 있거나 짧은 사슬로 연결된 납을 추가하여 개조되었다. 플레일은 특히 후스파 병사들이 자주 사용했다.
마차 안에는 돌을 던지는 투석병, 활을 쏘는 석궁병 등이 탑승했지만 후스파가 전술적으로 크게 발전시킨 무기는 총이었다. 마차는 총탄의 재장전을 위한 보호막이 되었고, 이는 무거운 총기였던 피스툴라에 더없이 유용했다. 피스툴라는 크기 때문에 총을 한 번 쏘고 나면 반동이 심했지만, 마차 위에서는 반동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지슈카는 대포도 바겐부르크에 추가했다. 많은 대포가 마차에 고정적으로 장치되었고, 후프니처라고 불리는 곡사포가 가장 널리 사용된 대포였다.
현대의 추정에 따르면, 6천 명의 병력이 야포 36문, 중포 10문, 피스툴라 360정을 보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서구 역사에서 대규모 방어 진지에서 대포가 사용된 최초의 사례였으며, 그 효과는 주목할 만 했다. 대포와 총기가 일으키는 엄청난 소음은 그 자체로 공포스러웠고, 섬광과 짙은 연기와 결합되어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1421년에서 1427년 사이, 지슈카는 가능한 한 많은 피스툴라를 추가하여 군대를 무장시켰다. 보헤미아의 여러 도시에서 체코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면서 지슈카는 대포와 피스툴라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현대의 잘못 알려진 인식과는 달리 지슈카는 결코 기병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기병 전력을 확보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처음에 후스파 군인들은 마차를 끄는 말에 올라탔지만, 이는 비효율적이었다. 마차를 끄는 말들은 전쟁용 군마에 비해 성능이 뒤떨어졌고, 종종 고된 노동으로 지쳐 있었으며, 부상을 입을 경우 마차를 끄는데 필요한 말들이 부족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 이유로 지슈카는 헝가리 경기병대의 말들을 빼앗아 사용했고, 특히 독일인 기사들을 물리치고 나서 그들이 탔던 말들을 확보하여 사람들을 기병으로 훈련시켰다.
일반적으로 바겐부르크를 공격하다 적들이 지치면, 그때 가서 바겐부르크 진지 안에 안전하게 숨겨두었던 말들에 병사들이 올라타고 진지의 문을 열고 나와 적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지슈카와 그가 죽은 이후에 후스파를 이끈 프로코프가 싸워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다.
===================================================================
한자동맹의 군대
게르만 민족 대이동기부터 13세기 중반 한자 동맹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시기, 그리고 그 이후 9~10세기경 문헌 자료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기간은 여전히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중세 시대에 독일어권 민족들이 오늘날의 독일 북동부 지역으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슬라브어권 주민들은 흡수되었다. 정복이 완전히 자리 잡은 이후에는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엘베강 서쪽 지역에서는 8세기 말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색슨족이 정복당하고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업 및 행정 중심지로서의 도시들이 건설되었는데, 그중 최소 두 곳은 훗날 한자 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엘베강과 발트해 사이 지역의 슬라브족 인구가 ‘희박’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7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이곳에 번성했던 문화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엘베강이 명확한 언어적 경계선이었던 것도 아니다. 엘베강 하류 북쪽 지역에는 색슨족과 프리시아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이웃으로는 문화적으로는 연관되어 있으나 10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이교도였던 덴마크인들이 살고 있었다. 서기 804년, 기독교도 황제였던 샤를마뉴가 기존의 색슨족 주민들을 추방한 후에 엘베강 하류 바로 북쪽의 땅을 이교도 슬라브족인 오보드리트족한테 넘겨주었다. 그 이후로 엘베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던 오보드리트족과 그 연합 부족들은 다른 슬라브 부족들을 차례로 병합해 나갔다.
‘벤드족(Wends)’이라 통칭되는 이 슬라브 부족들 중 일부는 10세기 동안 기독교도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일시적인 타협은 서기 983년 슬라브족의 봉기로 무너졌지만, 당시 벤드족 슬라브인들 사이에는 이미 기독교도가 존재했으며, 특히 귀족층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한편, 발트해 남서부 지역의 주요 집단들 사이에는 군사 전통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남쪽의 독일은 당시 서유럽의 중장갑 기병 전통권에 속해 있었고, 북쪽의 덴마크에서는 여전히 보병이 전쟁의 주축을 이루었으며, 동쪽의 슬라브 지역에서는 경기병 전통이 우세했다.
당시 발트해에서의 해전은 주로 연안 습격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슬라브계 벤드족은 바이킹의 선박과 유사한 배를 사용하여 이러한 습격에 매우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벤드족의 연안 습격은 1147년 이른바 '벤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더 광범위하게 전개된 '북방 십자군 전쟁'(십자군 전쟁의 정의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198년~1290년경)의 전초가 되었다.
당시 작센인들은 이미 슬라브족 영토를 향한 동방 팽창 정책을 재개한 상태였다. 한편, 오보드리트족의 기독교도 지도자(크네스)였던 하인리히(재위 1093~1127년)는 작센인과 덴마크인 용병들을 고용했으며, 발트해 연안 항구인 '구 뤼베크(old Lübeck)'를 확장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발트해 십자군 전쟁은 극도로 잔혹한 군사 작전, 강제 개종, 그리고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학살을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쟁 초기 단계는 후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잔혹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측의 주요 인물로는 작센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1129~1195년)가 있는데, 그는 젊은 시절 벤드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고, 1150년대와 1160년대에는 엘베강 동쪽의 슬라브족을 상대로 다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연대기 작가 헬몰트는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 젊은이가 지금까지 슬라브 지역에서 벌인 모든 전투에서 기독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오직 돈 이야기뿐이었다. 슬라브인들은 여전히 신이 아닌 자신들의 악마(슬라브족들이 전통적으로 숭배하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있다."
그러나 결국 헬몰트조차도 하인리히의 정책—주교구를 설립하고 기독교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는 한편, 기독교로 개종한 슬라브인들에게는 그들의 전통적인 권리와 관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정책—이 결과적으로 협력과 동화를 이끌어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12세기 도시들의 중요성
중세 시대 독일의 지역주의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강했으며, 북부 저지대 지역은 작센어와 프리슬란트어라는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제국 중앙 정부는 지방 체계와 법적 틀을 통합하고, 단일 언어(중세 고지 독일어)를 공식 언어로 도입하려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사실 독일이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12세기에 12개였던 방언은 15세기 말에 이르러 18개로 늘어났다. 한편, 당시 도시들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한자 동맹의 핵심 거점이었던 뤼베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통적으로 ‘새로운’ 뤼베크는 1143년 샤움부르크-홀슈타인의 아돌프 2세 백작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는 트라베 강 하류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슬라브족의 ‘리우비체(구 뤼베크)’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당 부지에는 이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북쪽 끝에는 슬라브족의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다.
1158년, 뤼베크는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1156년부터는 바이에른 공작도 겸임)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그의 영토 확장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이 도시는 발트 십자군 전쟁 당시 병참 기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1180년에는 제국 직할령으로 편입되었고, 곧 상인들이 주축이 된 20인 평의회가 도시를 다스리게 되었다.
1226년 ‘제국 자유 도시’로 승격된 뤼베크는 1937년 히틀러에 의해 711년간 이어져 온 자치권이 폐지될 때까지 독자적인 정치적 실체로 남았다. (본래 제국 자유 도시는 지역 봉건 영주가 아닌 황제에게 직접 종속되는 도시를 의미했다.)
훗날 한자 동맹으로 결집하게 되는 독일 도시들은 이미 상당한 군사적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어, 브레멘은 이미 1032년에 석조 성벽을 갖추고 있었다. 더 남쪽에 위치한 쾰른은 1114년에 하인리히 5세 황제의 위세에 맞서기까지 했다. 당시 쾰른 시민들은 자신들의 깃발 아래 용맹한 청년들을 대거 소집했고, 강력한 궁수 부대와 함께 라인강을 건넜다. 그들은 전투 대형을 갖추고 굳건한 마음으로 황제의 공격을 기다렸다. 황제의 군대에는 웬만한 무기로는 뚫리지 않는 단단한 철제 갑옷(미늘 갑옷? 사슬 갑옷?)을 입은 부대가 있었다. 그런데 날씨가 매우 더워지자 그들이 잠시 숨을 돌리려고 갑옷을 벗었는데, 그 즉시 화살 세례를 받았고 6명을 제외한 전원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12세기 라인란트 지역의 도시들은 북부 도시들보다 더 강력했던 반면, 뤼베크는 여전히 슬라브족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다. 1147년 6월 26일, 오보드리트족의 니클로트가 뤼베크를 공격하자 작센의 하인리히는 반격을 결심했다. 하지만 오보드리트족이 먼저 움직였다.
당시 뤼베크에는 에텔로라는 이름의 존경받는 사제가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남쪽으로 향하는 바케니츠 강 위의 다리 근처에 있었다. 마침 그는 멀리 떨어진 강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아주 긴 도랑을 파두었는데, 다리를 점령하려고 서둘러 달려오던 슬라브족 매복병들은 이 도랑에 가로막혀 건널 곳을 찾느라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사제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소리를 질렀고, 겁에 질린 사제는 필사적으로 전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슬라브족 부대는 이미 다리 중간쯤에 이르러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이때 신의 뜻을 받은 사제가 재빨리 사슬을 이용해 다리를 들어 올렸고, 덕분에 계획되었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들 상업 도시 중 다수의 행정과 방어에 있어 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독일 교회 위계의 고위 성직자들은 통치자, 총독, 군사 지휘관들과 같은 귀족 계층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15세기까지 이어진 독일 교회의 특징이었다.
물론 이 시기 발트해 남부 연안에서 십자군 활동을 벌이며 세력을 확장하던 기독교 세력이 독일인들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덴마크는 홀슈타인에서 에스토니아에 이르는(오늘날 스웨덴의 일부 지역까지 포함하는) 발트해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1201년, 십자군 함대가 뤼베크 항구를 떠난 직후 뤼베크는 덴마크 국왕의 수중에 떨어졌다. 덴마크의 관점에서 볼 때, 뤼베크를 장악함으로써 경쟁자인 홀슈타인 백작의 군사적 자산을 제거한 셈이었다.
하지만 북방 십자군 전쟁에서 뤼베크가 지닌 중요성을 이해하던 이들에게는 이 상황이 다르게 비춰졌을 것이다.
이후 덴마크의 세력 확장은 계속되었고,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는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경쟁자들과 맞설 때 그를 지원한 대가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벤드족 거주 지역, 포메라니아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황제로부터 인정받았다. 실제로 한동안 발트해는 마치 '덴마크의 호수'가 될 것처럼 보였다.
12세기의 뤼베크는 발트해 십자군 원정대들의 주요 출발지로서 번영을 누렸지만, 이곳 시민들은 수 세기 전부터 존재해 온 다른 장거리 무역망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초기 중세 시대까지 라인란트와 영국 사이의 고대 해상 무역이 계속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12세기 중반, 쾰른 출신의 상인들은 런던으로 갑옷을 수출하기도 했다. 브레멘 역시 한자 동맹의 전신이자 구성원으로서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부상했다. 당시 상인들은 강도나 해적의 위협 때문에 육로와 해로를 이동할 때 무리를 지어 다녔다. 이들은 황제의 칙령에 의해 무기 휴대를 허용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는 본래 군사 귀족 계층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었는데, 이러한 상인 집단은 스스로를 충분히 방어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중세 엘리트층의 귀족적 문화가 사회적 하층민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흔히 가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13세기 전반 무렵 독일에서는 다른 가치관들이 전면에 부상하고 있었다. 이는 ‘데어 슈트리커(Der Striker, ‘뜨개질하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시인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작품 속 성직자 출신의 반(反)영웅이자 장난꾸러기인 ‘파페 아미스(Pfaffe Amis, ‘아미스 신부’)’는 당시의 문화적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그는 귀족 계급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궁정 연애(Courtly Love) 문화를 조롱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프리드리히 폰 준넨부르크와 마르너의 잠언(The Sayings of Friedrich of Sunnenburg and the Marner)’은 사회적·정치적 폐단을 공격하고 있는데, 여기에 담긴 언어는 새로운 도시 상인 엘리트 계층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자 동맹의 발전
북방십자군 전쟁과 덴마크 지배에 대한 두려움은 한자 동맹의 출현을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13세기에는 비교적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한 영토를 가진 슬라브족 통치자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1217년에는 슬라브족이었지만 상당 부분 독일화된 메클렌부르크의 통치자들이, 그리고 1219년에는 뤼겐의 슬라브족 통치자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으며, 이러한 참여는 기독교 유럽 내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1219년에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가 이교도 에스토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지만, 그의 성공은 에스토니아 신성국의 통치권을 놓고 덴마크와 독일 성직자들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동부 발트해에서 십자군 간의 충돌이 임박하자, 발데마르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명목상 뤼베크의 영주였던 그는 독일 자원병들이 리보니아의 십자군에 합류하기 위해 뤼베크를 통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항구를 봉쇄했다. 많은 십자군들은 기독교 왕이 십자군 증원군을 방해하는 것에 경악했다. 뤼베크는 십자군에게 중요한 출발지였기 때문에 교황의 보호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교황 호노리우스는 발데마르에게 뤼베크 항구를 다시 열라고 명령했지만, 불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편, 독일 내에서 제국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상업 도시, 지역 귀족, 그리고 성직자들은 자율성을 강화하고 지역 연합체를 설립할 수 있었다. 뤼베크는 함부르크와 처음으로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두 도시 모두 덴마크의 제국 건설을 경계했다.
그러나 몇 년 안에 발트해에서 덴마크의 세력이 붕괴되었고, 1223년 발데마르와 그의 장남은 슈베린 백작 하인리히에게 사로잡혔다. 하인리히는 발데마르에게 홀슈타인에서의 정복을 포기하고 제국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했고, 발데마르가 투옥되기 이전에 잠시 덴마크에게 점령당했던 대부분의 독일 영토에서는 곧바로 발데마르한테 등을 돌렸다.
석방된 발데마르는 곧바로 군대를 소집하여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이어진 전투는 결국 1227년 보른회베드에서 덴마크군의 패배로 끝났고, 덴마크는 남부 발트해 정복지에서 뤼겐 섬만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인 정착민들이 거주하는 도시들의 건설은 독일 문화의 확산과 함께 진행되었다. 뤼베크는 1226년에 도시 지위를 획득했다. 동쪽에 위치한, 본래 슬라브족 거주지였던 슈트랄준트는 1234년 뤼겐 공작으로부터 상업 특권을 부여받았고, 매우 빠르게 무역 중심지로 성장하여 뤼베크가 이 새로운 경쟁자를 억누르려 했을 정도였다. 슈트랄준트와 그 초기 후원자였던 뤼겐 공 사이에는 갈등도 발생했다.
뤼베크와 달리 슈트랄준트는 영주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만큼 강력하지 못했고, 결국 본래 슬라브족 지역이었으나 점차 독일화되어 가던 포메라니아 공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훗날 한자 동맹에 합류한 또 다른 도시로는 토룬이 있는데, 튜턴 기사단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14세기에 프로이센 내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한자 도시가 되었다. 단치히(그단스크)는 이미 10세기 후반에 중요한 정착지였으며, 1301년에는 잠시 덴마크 왕족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1308년에는 브란덴부르크에 점령되었다. 그 후 튜턴 기사단이 도착하여 곧 통제권을 장악하고 독일인들의 정착을 장려했다.
‘초기 한자 동맹(proto-Hanse)’의 형성
이 시기는 도시 연합이 등장하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으며, 1241년 뤼베크와 함부르크는 해상 및 육상 무역로를 공동으로 보호하기로 합의하면서 최초의 공식적인 동맹을 맺었다. 특히 엘베 강과 트라베 강 사이의 무법 지대에서 이러한 협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246년에는 오스나브뤼크가 이 동맹에 합류하면서, 자신들을 통치하던 주교로부터 더 큰 자치권을 획득했다. 하르츠 산맥 구리 채굴의 중심지였던 고슬라어는 1267~1268년경 이 초기 한자 동맹에 가입했으나, 1340년이 되어서야 제국 자유 도시가 되었다. 거대한 소금 채굴 산업의 중심지였던 뤼네부르크 또한 1360년에 합류했다.
이 초기 한자 동맹이 당시 독일 도시들 사이에 존재했던 유일한 연합체는 아니었지만,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형태였다. 1281년 직후, 런던에서 활동하던 세 개의 경쟁적인 독일 상인 집단이 하나의 ‘독일 한자(German Hanse)’로 통합되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여러 특권을 얻었는데, 그중에는 훗날 런던의 유명한 ‘길드홀(Guildhall)’이 된 건물을 소유할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독일 상인들은 매년 40실링을 지불하고, 도시 내 경비 임무를 분담했으며, 요새화된 ‘비숍스게이트(Bishopsgate)’를 관리했다. 반면, 발트해 무역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 때문에 도시들 간의 합의는 훨씬 어려웠다.
1249년에는 뤼베크와 슈트랄준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1259년이 되어서야 뤼베크, 비스마르, 로스토크가 해적으로부터 선박을 공동으로 보호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은 1264년에 더욱 강화되어, 공동 대응에 대한 약속이 확대되었고 주변 영주들과 전쟁이 벌어질 경우 서로를 지원해야 할 의무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발트해 연안의 다른 도시들이 합류하면서, 사실상 ‘한자 동맹’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가 갖추어졌다.
분명 이 시기 한자 도시의 상인들 사이에는 동료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14세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종종 ‘독일 로마 제국의 공동 상인들(the common merchants of the Roman Empire of Germany)’이라 칭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다지 의식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한자 동맹 도시들은 공통된 깃발을 사용하지는 않았더라도 공통된 문장(紋章) 정체성을 채택했다. 그 결과, 사실상 모든 한자 동맹 해안 도시의 문장에는 빨간색과 흰색이 사용되게 되었다.
초기 군사 협력
초기 한자 동맹의 구성원들은 필연적으로 산적이나 해적과의 싸움 외에도 다양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충돌은 기존의 상업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1282년 브뤼헤와의 충돌처럼 이러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투보다는 무역 금수 조치를 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2년 후, 노르웨이의 무역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한자 동맹군의 첫 번째 실질적인 군사 작전은 해군력의 지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주로 경제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덴마크의 지위 회복 노력은 1316년 슈트랄준트 외곽에서 덴마크와 다른 제후들의 동맹이 한자 동맹군에게 패배하면서 또 다른 좌절을 겪었습니다.
14년 후, 발데마르 4세 아테르다흐(‘새로운 새벽’)가 덴마크 왕위에 올라 스칸디나비아 지배를 다시 시도했습니다. 홀슈타인 백작과의 전투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발데마르 4세는 1361년 전략적 요충지인 고틀란드 섬을 장악했지만, 이는 스웨덴과 독일 한자 동맹을 촉발시켰고, 곧이어 노르웨이도 합류했습니다.
덴마크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전쟁 개시 시점을 합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한자 동맹의 해상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스웨덴과 노르웨이 동맹은 육상 작전을 위한 병력 집결에 더디게 움직였습니다.
게다가 의견 차이로 인해 당초 목표였던 코펜하겐은 현재 스웨덴 영토인 스카네 지방의 덴마크 점령지 헬싱보리 요새로 변경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참패로 끝났습니다. 한자 함대는 대부분의 함선을 잃었고, 발데마르 4세 아테르타크 국왕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국력을 얻었습니다.
한자 동맹은 다른 제후 동맹국 및 이웃 국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자 동맹 내부에도 분열이 있었지만, 독일의 상업 도시들은 특히 1363년 발데마르 4세가 자신의 딸을 노르웨이의 하콘 6세와 결혼시킨 이후 덴마크 제국의 부활을 크게 우려했다.
그 결과, 그들의 대표들은 결국 '쾰른 연맹'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1367년 성 마르티누스의 날, 네덜란드에서 핀란드에 이르는 여러 상업 도시의 대표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들이 일반 상인들에게 저질러 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부당한 행위와 피해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며 서로 돕기로 맹세한다." 이는 사실상 한자 동맹이 본격적으로 탄생한 순간이었다.
연맹의 조직 및 기반 시설
한자 동맹에 속한 도시들은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뤼베크가 이끄는 서부 발트해 구역, 쾰른이 이끄는 라인란트 구역, 브라운슈바이크가 이끄는 작센 구역, 그리고 단치히가 이끄는 동부 발트해 구역이 그것이다.
각 도시의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전반적인 정책과 전략을 논의했는데, '한제타크(Hansetags)'라고 불린 이 회의들은 주로 뤼베크에서 개최되었다. 뤼베크는 사실상 한자 동맹의 '수도' 역할을 했다. 또한 뤼베크는 무역, 특히 해상 무역 분야에서 북독일의 압도적인 중심 도시였다.
하지만 뤼베크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가 동맹 전체를 통치하거나 완전히 장악했던 것은 아니다. 한자 동맹은 각 도시가 저마다의 상업적·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때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는—도시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로 남았다.
실제로 동맹 내부에서는 의견 충돌이 잦았고, 노골적인 불복종이나 상당한 내부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 동맹의 규약은 동맹의 황금기였던 중세 후기 내내 유효하게 작동했다.
한자 동맹의 운영에서 해상 관련 문제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선주들은 동맹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 중 하나였다. 당시 선박 소유권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떤 배는 소유주가 64명에 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선주들은 거의 모든 계층에서 배출되었기에, 해안 도시의 주민 전체가 대규모 선단을 유지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는 곧 수 세기 동안 한자 동맹이 여러 개의 영방국가들로 분열되어 있던 신성로마제국에 매우 효과적인 해군력을 제공했음을 의미한다. 중세 시대에는 대규모 상선단을 군사적 목적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많은 수의 선원이 필요했다. 다행히 북독일 지역에는 거대한 어선단이 있었고, 이곳의 선원들을 군사적 목적에 필요한 인력으로 충원할 수 있었다.
이들의 어업은 연안을 따라 이루어지는 장거리 조업 형태였으며, 잡은 물고기를 보존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소금이 필요했다. 한자 동맹 도시인 뤼네부르크(Lüneburg)는 암염 채굴을 통해 번영을 누렸을지 모르나, 그곳의 광대한 광산에서 생산되는 소금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프랑스 남서부 비스케이(Biscay) 연안에서 생산된 바다 소금을 북독일의 항구들로 대량 수입해야만 했다.
이처럼 광범위하고 활발한 해상 무역이 이루어졌던 상황을 고려하면, 최소 13세기 초부터 초기 형태의 등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해안과 주요 항구 사이의 항로에는 부표가 설치되었고, 경험 많은 도선사들이 까다로운 해역을 지나는 선박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447년, 한자 동맹은 공인된 도선사의 이용을 의무화했다. 이는 단순히 선박의 즉각적인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항로가 난파선으로 인해 막히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요새화 작업에도 그에 못지않은 비중이 두어졌는데, 독일 북부 지역에서는 주로 벽돌을 사용해 요새를 구축했다. 이는 발트해 남부 연안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벽돌 고딕(Backsteingotik)' 양식의 유명한 대성당이나 공공건물들과 같은 전통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방어를 위해 상당한 노력과 비용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자 동맹은 독자적인 상비군이나 해군을 보유하지 않았다. 군사력은 각 도시가 개별적으로 책임지는 형태였다. 사실 한자 동맹은 경쟁자들을 상대할 때 언제나 외교와 동맹, 그리고 경제적 압박을 활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한자 동맹의 확고한 신념은 1447년 뤼베크 시장이었던 힌리히 카스토르프(Hinrich Castorp)의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협상합시다!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다시 명예롭게 전쟁을 멈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전 (약 1250년~약 1425년)
13세기 무렵, 독일 제국의 동부 변경 지역에는 봉건적 군사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으나, 그 결속력은 독일 내 다른 지역보다 느슨했다. 그 결과, 봉건적 동원 체계는 이미 용병들에 의해 보완되고 있었다.
중세 독일 전쟁에 관한 또 다른 특징은 기록물 중 상당수가 도시민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인데, 이들은 프랑스나 영국의 연대기 작가들에 비해 귀족 신분이 아닌 병사들에게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도시들은 상당한 규모의 육군 및 해군 병력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특히 덴마크에 맞선 북독일의 투쟁 과정에서 한자 동맹에 속한 도시들이 대규모 병력을 지원했다.
유럽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북독일에서도 도시의 전투 병력은 흔히 도시 구역이나 길드 조직을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길드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부유한 상인들의 조직부터, 비교적 소박한 장인들의 조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한자 동맹 도시들에서 성공한 상인들은 지배 엘리트층(혹은 도시 귀족층)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재산이 적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으며, 지배 엘리트층은 바로 이러한 상인들 중에서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였다.
한편, 14세기 말 무렵에는 상업 도시 남성 인구의 절반 이상이 장인(기술자)들로 구성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뤼베크(Lübeck)의 경우 장인들이 남성 인구의 43%를 차지했다. 이들 아래에는 '기술'이 없거나, 재산이 없거나, 혹은 노령자, 병자, 고아와 같은 계층이 존재했다.
도시들은 주로 도시 귀족층에서 선출된 의회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이 의회는 과거 봉건 영주들이 담당했던 역할, 즉 여전히 자신들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주변 제후국들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임무 등을 대신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잦은 충돌이 발생했고 때로는 유혈 사태로 번지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도시가 주변 농촌 지역까지 자신들의 통제권을 확대하게 되었다.
초기 독일 사회에는 '무기법(Waffenrecht)'이라 불리는 규정이 존재했는데, 이는 농민들이 창, 검, 갑옷, 말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활과 칼만을 소지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이는 기사 계급 엘리트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용병들과 영지 내 징집병들이 쇠뇌(석궁)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 실효성을 잃고 말았다.
무기 소지에 대한 제한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상인들이 이동 중에 무기를 소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1370년 '슈트랄준트 평화 조약(Peace of Stralsund)'의 한 조항은 이러한 타협점을 잘 보여준다. 이 조항에 따르면, 상인은 자신의 배와 숙소 사이를 이동할 때만 무기를 소지할 수 있었으며, 그 외의 장소에서 무기를 소지한 채 발견될 경우 벌금을 물어야 했다. 단, 해상에 있을 때는 자유롭게 무장할 수 있었다.
초기 독일의 도시 민병대는 시장(市長)의 지휘 아래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13세기에 벌어진 발트 십자군 전쟁 당시, 이들 중 상당수가 원정길에 올랐다. 1246년 프로이센에서 튜턴 기사단과 함께 싸운 이들 중 일부는 '뤼베크의 젊은이들(juvenes Lubicenses)'이라 불렸다. 사실 뤼베크는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는데, 교황은 십자군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이를 지원하기만 하면 면죄부를 부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민병대 조직
뤼베크만이 효율적인 군사 행정 체계를 갖춘 도시는 아니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여러 구역(quarter)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구역은 대개 외벽에 난 문 하나를 끼고 있었다. 성벽 내부의 각 교구는 지역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시의회가 임명한 '구역 책임자(viertelmeister)'의 지휘를 받았다. 이 책임자는 보통 다른 장교들의 보좌를 받았으며, 나팔수와 구역 내 감시탑을 지키는 경비병도 그 휘하에 두었다. 성벽을 비롯해 민병대원들이 훈련을 하거나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는 연병장과 사격장은 모두 지역 세금으로 유지되었다.
13세기부터 독일 도시 민병대의 주축은 근접 전투를 위해 무장하고 훈련받은 기병 및 보병, 그리고 별도의 부대를 이룬 쇠뇌병들이었다. 사실 쇠뇌는 한자 동맹 도시 군대의 특징적인 무기였다. 시민들은 소집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응할 수 있도록 군장비를 각자 집에 보관했다. 기병으로 복무할 만큼 부유한 시민들은 중세 독일 봉건 군대나 용병대에서 볼 수 있는 '글레벤(gleven, 창병 단위)' 체계에 따라 조직되었다. 14세기 후반에도 더 잘 무장한 시민들이 여전히 현역 병사로서 전투에 참여했으며, 당시 많은 도시에서는 '포술 책임자(büchsenmeister)'를 고용하기도 했다.
도시 민병대 부대들은 각 도시를 상징하는 색깔의 복장을 하고 고유한 깃발을 앞세워 행군했다. 많은 독일 도시가 이탈리아의 '카로초(carroccio, 전투용 깃발 수레)'와 유사한 깃발 수레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도시 군대는 분명 효율적인 군수 지원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이 놀라운 체계가 항상 완벽하게 작동했던 것은 아니다. 정치적 긴장은 계속되었고, 때로는 외부 안보와 내부 안정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도시 내부의 반대 세력을 무장 해제하면 중요한 병력을 잃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계속 무기를 소지하게 두면 안보상의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14세기 쾰른과 같은 일부 한자 동맹 도시들은 민병대에서 전투력이 뛰어난 인원들을 제외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영방 제후들의 군대
인근 영방 제후들 가운데 홀슈타인 백작은 원수(marshal)와 치안관(constable)의 보좌를 받았다. 13~14세기 홀슈타인의 영지 징집군은 도시 시민들(일부 한자 동맹 도시의 시민들을 포함)과 농촌 민병대로 구성되었다.
홀슈타인 군대의 편제는 다른 지역들과 유사했는데, 약 2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바니렌(banieren)' 또는 '콘로텐(conroten)' 단위로 나뉘어 있었다. 라틴어 용어인 '투르마(turma)' 역시 기병 부대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며, 보병 부대를 가리키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기사들의 수는 수백 명 정도였는데, 흔히 400명이라는 수치가 언급된다. 다만 이들은 종자(squire)나 '방패 소년(shield boys)'과 같은 하인들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보통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말을 돌보는 역할을 했다.
민병대의 규모는 훨씬 더 컸다. 농촌 지역에서 징집령이 내려지면, 사람들은 각 지역의 본당 교회에 모였다. 그곳에서 본당 신부로부터 영적인 격려를 받은 뒤, 농촌 민병대원들은 백작이 지정한 집결지로 향했다. 15세기 초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는 가구를 기준으로 징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1421년에는 10가구당 1명의 병력을 차출하도록 요구받았다.
하지만 농촌 민병대의 전투 효율성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해안가에 거주하던 프리시아인들은 뛰어난 전투력과 해군력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이들의 고향은 다소 고립된 지리적 특성 덕분에 완전히 봉건화되지 않았다. 외부인들에게는 사실상 자유민으로 여겨졌던 프리시아인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직접적인 충성을 바쳤으며, 특히 13세기 전반기에는 십자군 원정에서도 환영받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프리시아인들 중 기병은 거의 없었고, 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짧은 창이나 던지는 투창은 다소 구식으로 보였다.
디트마르셴(Dithmarschen) 지역의 농촌 징집군 역시 보병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긴 자루가 달린 도끼를 선호하거나 주 무기로 사용했다. 법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었으나 군사적으로는 엘리트였던 ‘미니스테리알(ministeriales)’—본래는 농노와 같은 법적 지위를 지녔던 ‘기사’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발견되지만, 특히 중세 독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지방의 성에 거주했으나, 일부는 봉건 영주들에 의해 도시로 파견되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도시 주민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3세기 쾰른에서는 도시 미니스테리알들이 군사력의 핵심으로서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발트해 연안 북부 독일 도시들에서의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훨씬 적다.
용병
한자 동맹 도시들이 부상하던 시기에 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했던 존재는 용병이었다. 일부 도시는 지역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우스졸드너(Aüssoldner, 일종의 상시 고용 용병)’를 고용했다. 기병을 포함한 이들 부대는 평시에는 급료의 절반만을 받았다. 북독일의 자치 제후들은 일반적으로 용병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는데, 튜턴 기사단은 예외적인 사례였다.
다만 14세기 홀슈타인 지역에서는 유급 병력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3세기 말 무렵, 홀슈타인 출신 기사들이 뤼베크를 위해 복무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나, 이들이 평화를 해치는 행위로 악명을 떨치면서 결국 상시 고용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대신 14세기 중반부터는 홀슈타인 기사들이 뤼베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용병으로 고용되었는데, 이들은 쇠뇌병을 포함해 4~10명으로 구성된 ‘글레벤(gleven, 소규모 전투 단위)’ 형태로 활동했다. 기록에 따르면 같은 가문 출신들이 함께 복무하는 경우가 흔했는데, 이 때문에 참혹한 패배를 겪을 경우 해당 기사 가문 전체가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14세기 중반, 뤼베크에서 활동하던 용병 기사들은 소규모 집단 단위로 입대하여 우두머리를 통해 급료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뤼베크와 같은 도시들과 용병 기사들 간의 계약에는, 이들이 예전에 자신이 섬겼던 봉건 영주를 상대로는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이 낮은 용병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이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지만, 귀족 계급으로 승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자 동맹 도시들의 용병 보병은 주로 하노버, 베스트팔렌, 튀링겐, 작센 지역에서 모집되었다.
14세기 말 무렵에는 용병 쇠뇌병들이 지역 민병대 소속 쇠뇌병들을 대체하게 되었고,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한자 동맹 도시들이 평시에도 수비 임무를 맡길 용병을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시 의회는 용병 대장에게 병력을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증서를 전달하고, 집결할 날짜와 장소(주로 항구)를 지정했다. 모집된 이들에게는 집결지까지 이동하는 비용이 선지급되었으며, 계약이 종료되어 해산할 때도 귀향 비용이 제공되었다.
한자 동맹 도시에서 정기적으로 급료를 받는 ‘도시 고용인(city servants)’들은 군대라기보다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급여는 제각각이었으나, 1360년 슈트랄준트(Stralsund)에서는 말을 탄 ‘도시 고용인’이 연간 15마르크를 받았다. 평시에도 1379년 쾰른(Cologne)의 시 재정 지출 중 80퍼센트 이상이 군사비였으며, 1437년 로스토크(Rostock)의 경우 그 비율은 76퍼센트에서 80퍼센트 사이였다. 본격적인 해상 또는 육상 작전은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었는데, 한자 동맹의 원정 비용은 각 도시에서 징수한 세금과 교역에 부과된 관세로 충당되었다.
석궁
군사 장비는 당연히 큰 비용이 드는 항목이었으며, 갑옷은 정교해질수록 더 비싸졌다. 예를 들어, 13세기 중반 독일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코트 오브 플레이트(coat-of-plates, 판금 갑옷의 초기 형태)'는 원거리 사격 공격을 막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민병대에게 요구되는 장비 수준은 도시마다 달랐지만, 요구 사항이 높아짐에 따라 비용 또한 증가했다.
발트해 지역의 전쟁에서 석궁이 수행한 핵심적인 역할은 12세기 후반 이후 독일인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발트해 남부 및 동부 연안의 이교도 민족들을 상대로 상당한 우위를 점하게 해주었다.
당시 북독일에서 사용된 석궁의 활대(bowstave)는 대부분 복합 구조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중동 이슬람권의 석궁과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이었다. 다만, 휴대용 활(궁)의 복합 구조와는 상당히 달랐으며, 특히 복합 석궁의 활대에 고래 뼈를 사용하는 것은 북유럽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
14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는 석궁 파편들과 거의 온전한 형태의 석궁들이 북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뤼베크(Lübeck)에서 발견된 한 석궁에는 볼트(석궁용 화살)가 놓이는 홈이 사슴 뿔로 보강되어 있다. 한자 동맹 도시였던 쾰른(Cologne)에서 발견된 비슷한 시기(1400년경)의 석궁 또한 복합 구조의 활대를 갖추고 있었다.
휴대할 수 없는 대형 '성벽용 석궁(wall crossbows)'은 틀이나 수레에 장착하여 야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14세기 독일에서 사용된 다양한 석궁은 그 명칭과 강력한 활을 당기는(장전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는 1307년과 1308년에 '발리스타 스테게레파스(balistas stegerepas, 등자형 석궁)' 10정과 '발리스타 도르살레스(balistas dorsales, '등 석궁'이라는 뜻)' 10정을 구입했다. 후자의 경우, '크로크(croc)'나 갈고리를 사용하여 장전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독일어에서 이 갈고리를 뜻하는 단어가 '뤼크(rück, '등'을 의미함)'라는 말로 변형되어 불렸을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14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염소 발(goat’s-foot)' 형태의 초기 장전용 레버를 사용하여 장전했을 수도 있다.
쇠뇌용 화살(볼트)에는 촉을 끼우는 방식에 따라 슴베가 있는 형태와 소켓 형태가 있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갑옷을 관통할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14세기에는 상당한 기술적 발전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암마인(Frankfurt-am-Main) 시는 다수의 쇠뇌를 현대화하고 그 화살의 길이를 줄이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짧은 화살은 강철 촉을 갖추고 있어 근거리에서라면 사실상 어떤 갑옷이든 뚫을 수 있었다.
또한 칼마르(Kalmar)에서 발견된 난파된 코게(kogge, 중세 북유럽의 상선) 유물 중에는 나선형 깃이 달린 쇠뇌 화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깃은 비행 중 화살을 회전하게 만들어 상당한 정확도를 제공했는데, 이는 총기에 강선(rifling)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다른 무기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전통적인 라이벌인 장궁병과 달리, 숙련된 쇠뇌병은 발사 속도나 화살의 무게보다는 사격의 위력과 정확도에 의존했다.
군사 역사학계에서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쇠뇌의 낮은 발사 속도'라는 평가가 실제로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일반적인 궁수와 달리, 쇠뇌병은 보통 보조 인원 한 명과 함께 팀을 이루어 활동했는데, 이 보조자는 쇠뇌의 시위를 당기거나 화살을 장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팀을 이루면 혼자서 쇠뇌를 다룰 때보다 훨씬 빠른 '발사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사수는 시위를 당기는 고된 작업에서 벗어나, 쇠뇌의 가장 큰 장점인 정확도를 높이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한자 동맹 소속 도시들을 포함한 중세 북부 및 서부 독일 지역에서는, 화살촉을 화살대에 부착하는 공정을 '스티켄(sticken)'이라 불렀고, 이 작업을 수행하는 장인을 '필스티커(pilsticker)'라고 일컬었다. 이들은 화살촉뿐만 아니라 깃이 달린 화살대 자체도 제작했다. 군사 원정 시에는 엄청난 양의 화살을 통에 담아 운반했는데, 당시 군대나 함대의 탄약 보유량은 화살 개수가 아닌 통 단위로 계산되었다. 북부 독일과 덴마크 지역에서는 통 하나에 800개의 화살이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했다.
전장에서 노획하거나 회수한 군사 장비의 재판매는 남유럽과 마찬가지로 북유럽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로 보인다. 위기 상황이 닥치면 떠돌이 상인들이 장터에서 이러한 물품을 활발히 거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한자 동맹에 속한 부유한 도시들을 비롯한 독일 각지의 도시들은 무기 장인들, 특히 쇠뇌(석궁)를 제작하거나 수리하는 장인들이 성벽 안쪽에 정착하도록 장려했다.
예를 들어, 14~15세기 뤼베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는 쇠뇌 제작자 조합(길드)이 존재했으며, 이 조합은 장인(마스터), 숙련공(저니맨), 도제(견습생)로 이루어진 위계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합에는 원자재의 품질을 규제하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고, 완성된 쇠뇌에는 제작자를 식별할 수 있도록 표식을 남겨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또한, 쇠뇌 제작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기에 장인들은 종교적 축일에도 작업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허가를 받기도 했다.
장인들은 다른 장인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빼오는 행위가 금지되었으며, 조합 내부의 기강은 조합이나 도시에 납부해야 하는 벌금 등의 처벌을 통해 유지되었다. 또 다른 제재 수단으로는 위반자에게 교회에서 사용할 양초용 밀랍을 공급하도록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장인 조합의 기반에 중요한 종교적 요소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독일 도시들에는 매년 일정 수량의 무기를 제작하는 임무를 맡은, 도시 소속의 전임 쇠뇌 제작자가 따로 있기도 했다. 고용 조건은 도시마다 달랐는데, 한자 동맹 도시인 함부르크를 예로 들 수 있다.
함부르크에서는 14세기 초부터 도시 소속의 쇠뇌 제작자(라틴어로 '발리스타리우스(balistarius)'나 '발리스티펙스(balistifex)', 독일어로 '아름보르스트마케레(armborstmakere)'라 불림)가 매년 4정의 무기를 제작해야 했으며, 그 이상의 무기를 만들 경우에는 추가 보수를 받았다.
기타 무기
한자 동맹 회원 도시들이 동원한 보병(민병대원이나 용병) 중에는 쇠뇌병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 한자 동맹 도시들은 북독일 지역에서 잘 훈련되고 결속력 있는 보병 부대가 등장하고 발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도로 도시화된 라인란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14세기 중반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이른바 '민중 용병제(Volkssöldnertum)'가 나타난 때였다. 이 시기에는 도보로 싸우는 평민들의 전투 효율성이 높아지면서 기사의 우위가 약화되었다.
보병 무기 사용에 관해서는 기병 무기에 비해 당대의 기록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무기와 갑옷, 그리고 회화 자료들을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손과 머리를 보호하는 데 각별히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긴 자루가 달린 무기(장병기) 중 일부는 보병 개개인에게 뛰어난 숙련도를 요구했으며, 보병 부대 차원에서는 고도의 규율과 결속력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장병기의 주된 목적은 말 위에 탄 적을 공격하여 갑옷을 부수거나 뚫는 것이었으며, 자루가 더 짧은 무기들은 도보로 싸우는 적을 상대할 때 더 유용했다.
고고학자들은 전진할 때, 정적인 방어 자세를 취할 때, 혹은 야전 방어 시설 뒤에서 싸울 때 각각 다른 전투 동작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러한 동작 중 일부는 적함에 올라타는 전술이 주를 이루었던 해전에서도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보병이 익혀야 할 또 다른 기술로는 단검, 도끼, 짧은 창을 다루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독일 제국 내 여러 지역에서 방패나 작은 원형 방패(버클러)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러한 무기들은 주로 더 근접하고 기동성이 요구되는 전투를 위한 것이었으며, 아마도 해전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상전
한자 동맹은 함대를 운용하기 위해 많은 수의 선원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특히 어촌 공동체 출신의 인력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때때로 무장 선원이나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으며, 이들은 사실상 약탈자나 해적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자 동맹의 해운 활동은 선원과 선주들의 관리 기구인 '선박 평의회(Schiffsrat)'가 감독하는, 더욱 체계적이고 엄격한 규칙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자 동맹의 해사법은 11월 11일부터 2월 2일 사이의 겨울철 항해를 금지했는데, 이는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들에서 시행되던 기존 규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발트해 연안의 항구들은 수심이 얕고 토사가 자주 쌓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각 항구를 이용하는 선박의 최대 크기를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한자 동맹의 해사법은 선박 건조와 관련하여 매우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했다. 또한 난파선과 화물의 소유권(난파선 인양권), 과적 문제, 화물 투하, 그리고 해적 대응 방식에 관한 엄격한 규칙들도 존재했다.
개별 도시 차원에서 제정된 규정도 있었는데, 1440년 함부르크가 자국 선박에 탑재해야 할 군사 장비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 그 예이다. 선상 규율 역시 함부르크의 '해군 당국(Admiralty)' 관리들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다른 한자 동맹 도시들 또한 각자의 규칙을 갖추고 있었다. 아주 작은 선박을 제외한 모든 배는 해적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야 했다. 이는 곧 평시 선박을 전시용으로 개조하는 과정이 비교적 수월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규정들을 철저히 준수하는 태도는 한자 동맹의 해상 작전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자 동맹은 선박의 수를 늘리고 건조 품질을 높이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항구 도시를 자처하는 모든 한자 동맹 도시에는 일찍부터 선박 건조 산업과 그와 관련된 여러 업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흔적은 오늘날 과거 한자 동맹 도시였던 곳들의 거리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닻을 만들던 '앙커슈미데가세(Ankerschmiedegasse)', 밧줄을 만들던 '레프슐레거슈트라세(Reepschlägerstrasse)'나 '레퍼반(Reeperbahn)', 선착장을 뜻하는 '라스타디(Lastadie)', 그리고 수리를 위해 배를 육지로 끌어 올리던 '브라크방크(Brakbank)'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선박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뤼베크의 기록에 따르면, 바지선 '가브리엘(Gabriel)'호는 1471년에 건조되어 1482년에 퇴역했고, 발린저(ballinger)급 선박인 '카트리나(Katrina)'호는 8년간 운항한 뒤 교체되어야 했다.
한자 동맹은 해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어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을 다른 지역에서 이미 검증된 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이곤 했다. 중세 말기까지 북유럽에는 항해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자 동맹의 선원들은 14세기부터 '제부흐(Seebuch)'를 사용했다. 이 문헌에는 러시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의 조수, 항로, 항구, 등대 위치, 그리고 그 밖의 중요한 해안 지표물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선박 유형
한자 동맹 선박들의 평균 항해 속도는 순풍이 불 때 4.5~6.3노트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실제 항해 시간은 상당히 길었는데, 예를 들어 바다 상태가 보통일 때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뤼베크까지 항해하는 데는 보통 6일이 걸렸다. 당시에는 속도보다 안전성, 신뢰성, 그리고 화물 적재 능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12세기 이후 바이킹식 선박 설계 전통이 쇠퇴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코게(kogge)와 그 뒤를 이은 홀크(holk)는 한자 동맹의 가장 중요한 선박이 되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면 이 선박들은 최대 3개의 돛대를 갖춘 폭이 넓고 무거운 배가 되었으며, 선미와 선수에는 성곽과 같은 구조물이 설치되었다.
코게의 기원은 로마 시대 이전이나 중세 초기, 대륙 켈트족의 선박 설계 방식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적은 수의 커다란 판자로 만들어진 이 배들은 외해를 건너 무거운 화물을 운송하기 위한 용도였기에, 신속한 기습을 위주로 했던 중세 초기 해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튼튼한 선박들은 프랑스 대서양 연안 지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명맥을 이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13세기 초, 일부 코게에는 선미 키(stern rudder)가 장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선체가 높고 규모가 큰 배를 건조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게다가 코게는 비슷한 규모의 바이킹 선박보다 목재가 적게 들면서도 더 쉽고 빠르게 건조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설계 구조 덕분에 선박의 크기와 적재 용량을 늘리기 쉬웠으며, 이는 중세 해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바이킹 선박만큼 기동성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코게는 거대한 크기와 견고함 덕분에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고 더 큰 타격도 견뎌낼 수 있었다.
초기 코게의 승무원 수는 18~25명 정도였고 승객은 5~20명가량이었으나, 해적이나 전쟁으로 인한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인원수도 늘어났다. 중세 후기의 홀크는 승무원 수가 100명에 달하기도 했다. 고위 선원들과 승객들은 선미에 거주했고, 일반 선원들과 견습 선원들은 선미루 지붕 위나 돛대 앞쪽에 머물렀다. 간단한 형태의 전투용 플랫폼이라도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지만, 13세기 후반 한자 동맹의 코게선에 설치된 전투용 구조물들은 개방형 형태를 오래 유지하지는 않았다.
1329년 슈트랄준트의 인장에서 처음으로 폐쇄형 플랫폼이 확인된다. 반세기 후, 브레멘 인근 베저 강에서 발견된 코게선의 선미루 좌우 양쪽에는 좁지만 폐쇄된 형태의 선실이 설치되었다. 선미 우현에는 화장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는데, 변기 좌석은 사용자가 머리를 선미루 갑판 위로 내밀 수 있을 만큼 높게 설치되었다(아마도 선장은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동안에도 배에 대한 지휘권을 유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충분히 발달한 코게선은 선상에 대형 윈들러스(권양기)를 갖추어 화물 하역 능력이 뛰어났으며, 이는 군대와 그 장비, 특히 공성 무기와 같은 무거운 물자를 수송할 때 매우 유용했다. 또한 갑판이 완전히 덮여 있었기에 상업용 화물이든 군수 물자든 젖지 않게 운반할 수 있었다.
홀크선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지만, 코게선과 비슷한 기원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배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좁은 바다에서 특정 유형의 선박으로 처음 등장했다. 실물로 확인된 홀크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림 자료를 통해 몇 가지 특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홀크선은 '역방향 클링커(reversed clinker)' 공법으로 제작된 선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는 중세 북유럽의 다른 선박들과 달리, 판재가 아래쪽이 아닌 위쪽으로 겹쳐지는 방식이었다.
한자 동맹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발트해 연안의 상인들이 기존에 사용하던 코게선을 버리고 다른 지역에서 이미 널리 쓰이던 홀크선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은 1400년경이 되어서였다. 홀크선은 추가적인 발전 가능성이 컸고, 규모가 더 컸기 때문에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하기에도 적합했다. 그러나 홀크선이 코게선을 대체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획기적인 기술적 진보가 나타나면서 홀크선은 밀려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지중해에서 유래한 카르벨(carvel) 공법이었다. 이 공법을 사용하면 판재가 서로 맞닿아 평평하게 이어지며, '피터 오브 라 로셸(Peter of La Rochelle)'호와 같은 프랑스의 3마스트 선박에서 볼 수 있듯이 매끄러운 선체가 완성되었다. 1462년 단치히에서 선장에게 버려진 뒤 한자 동맹 측 소유주들에게 넘어간 이 배는 ‘페터 폰 단치히(Peter von Danzig)’ 또는 간단히 ‘다스 그로세 크라벨(Das Grosse Kraweel, ‘거대한 카라벨’이라는 뜻)’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1470년에는 영국과의 전쟁을 위해 무장되었다. 그 이후 이러한 크라벨(카라벨) 설계 방식은 열렬히 채택되었다.
집결과 지휘
한자 동맹의 무역을 원활하게 했던 조직력과 규율은 동맹의 해군력 또한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 결과, 한자 동맹은 합의된 시간과 장소에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집결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전략적 우위를 점하며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 동맹의 해군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으며, 동맹만큼의 대규모 함대나 조직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적을 상대할 때에만 실질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심지어 해적 문제조차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는데, 이는 특히 14세기 북독일 해안 도시들에게 여전히 주요한 골칫거리로 남아 있었다.
한자 동맹 선박의 지휘 체계는 매우 단순했다. 지휘를 맡은 선장은 대개 해당 선박의 소유주이거나 공동 소유주였는데, 14세기 무장 선박의 경우 이들을 보통 '스키퍼(schiffer 또는 schipper)'라고 불렀다. 이들은 함대 전체를 지휘할 수도 있었으며, 상업 도시 내에서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해외에서 부를 쌓으려 했던 이들도 있었는데, 포메라니아 출신으로 영국 항구 도시 헐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헨리 베일리(Henry Bailly)가 그 예이다. 또 다른 직책으로는 '제츠스키퍼(setzschiffer)' 또는 '시프스퓌러(schiffsführer, 선박 책임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스키퍼가 자리를 비웠을 때 지휘를 대신 맡았지만, 어디까지나 급여를 받는 고용인 신분이었으며 선박의 소유 지분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함대 지휘관은 상당한 경험을 갖춘 사람 중에서 임명되는 일시적인 직책이었다. 이 시기 한자 동맹의 해군 작전에서는 전술과 전략을 아우르는 본격적인 해전술이 발전했으며, 따라서 지휘 능력을 갖춘 인물들은 한자 동맹 도시들로부터 매우 환영받았다. 호송 함대 지휘관이나 전투 함대 선장은 대개 시 의원들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시 의원들은 선박 임대, 인원 배치, 함대 편성 등에 관한 결정도 내렸다. 해상에서 '제독'은 선원, 병사, 용병, 민간인뿐만 아니라 함대의 모든 행동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이들 고위 인물 중 다수는 평시에는 상인이었으나, 그들이 거둔 성과는 상당했다. 예를 들어, 1368년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덴마크군을 격파한 뤼베크 출신의 브루노 폰 바렌도르프(Bruno von Warendorp)는 자신의 고향인 뤼베크에서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지몬 폰 우트레흐트(Simon von Utrecht)는 한자 동맹의 해군 지휘관 중에서도 더욱 유명한 인물이다. 플랑드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함부르크로 이주하여 1400년에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듬해, 지몬은 해적 집단인 '비탈리엔브뤼더(Vitalienbrüder)'의 가장 유명한 우두머리인 클라우스 슈퇴르테베커(Klaus Störtebeker)를 생포하며 명성을 얻었다. 함부르크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지몬 폰 우트레흐트는 해군 작전에 계속 참여했는데, 특히 1428년에는 덴마크를 상대로 작전을 수행했다. 1432~1433년에는 프리슬란트 출신 해적들과 맞서는 한자 동맹 함대를 지휘하여, 세발두스부르크에 있던 해적 거점을 파괴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엠덴을 점령했다.
14세기 후반부터는 군사적 목적으로 징발되어 개조된 한자 동맹 선박들 내의 계급 체계가 더욱 정형화되었다. 이는 함대에 승선한 '펜라인(fähnlein)'이라 불리는 군사 조직에도 적용되었다. 펜라인의 지휘관은 보통 기함에 탑승했으며, 함대 사령관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가졌으나 해군 인력이 아닌 육상 전투 병력을 총괄했다.
함대 부사령관은 대개 다른 배에 탑승했고, 용병을 관리하는 '프로포스(profoss, 군사 경찰관)'와 펜라인 내 부대를 책임지는 '펠트바이벨(feldweibel, 하사관급 지휘관)'은 세 번째로 중요한 배에 배치되었다.
각 배에 탑승한 병력은 '로텐(rotten)'이라 불리는 10명 내외의 소규모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로텐 바이벨(rotten weibeln)' 혹은 하사관(corporal)들이 이들을 지휘했다. 또 다른 중요한 직책으로는 '푸리에(fourier)'가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부대 단위 지휘관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함에 탑승한 해군 지휘부는 보통 함장과 그 부관인 부함장(lieutenant)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의사소통에 필수적인 북 연주자나 피리 연주자들인 '슈필로이테(spielleute)'의 보좌를 받았다.
한편, 도시 당국이 군사적 목적으로 선박을 징발할 때는 선박뿐만 아니라 그 선원들까지 함께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자 동맹은 소속 선박의 선원을 반드시 동맹 도시의 시민으로만 구성해야 한다고 요구한 적은 없었으나, 외국인 선원을 고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편, 한자 동맹은 선장과 선원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양측의 의무와 권리에 관한 상세한 규칙을 마련해 두었다.
선원과 병사들
선원들은 주로 어부, 일용 노동자, 농촌 출신의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안녕과 생계는 상인이나 도시 당국의 손에 달려 있었지만, 임금은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상업 활동에 참여할 기회도 주어졌다. 운이 따른다면 이러한 상업 활동을 통해 가족의 경제적 형편을 상당히 개선할 수도 있었다.
임금은 선상에서의 기술과 직무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다. 예를 들어, 선박 목수나 포수, 그리고 다른 선원들을 지휘할 권한이 있는 상급 선원들은 높은 급여를 받았다. 하지만 일반 선원들 또한 한자 동맹 도시들의 번영과 안전에 필수적인 존재로 인정받았기에 나름의 존중을 받았다.
선박과 선단을 방어하는 해상 병력은 해당 도시들, 주로 도시 민병대에서 충원되었다. 이론적으로는 신체가 건강한 모든 시민이 도시의 성벽뿐만 아니라 선박을 방어하기 위해 동원될 수 있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 함부르크, 로스토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는 해상 용병을 고용해야 했으며, 한자 동맹은 자사 선박에 '프라이 크네흐테(freie Knechte, 자유 계약 병사)'나 용병으로 구성된 해상 보병을 배치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들 중 일부는 한자 동맹의 모든 회원 도시가 합의에 따라 제공한 병력에서 차출되었으며, 동맹이 마련한 자금으로 급여를 받았다.
해전
여러 면에서 이러한 군사 체계는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중세의 해전은 극도로 무자비하고 잔혹한 경향이 있었다. 해적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은 거의 항상 죽음을 의미했는데, 이는 해적들이 포로를 잡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객과 상인을 포함한 배에 탄 모든 이들이 배를 지키기 위해 싸웠는데, 이는 강력한 결의를 보여줌으로써 해적들을 물러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해적들 역시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적들로부터 어떠한 자비도 기대할 수 없었다.
한자 동맹의 모든 선박은 해적의 끊임없는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충분한 군수 물자를 갖추고 있었다. 전시에는 더욱 각별한 주의가 기울여졌는데, 이때는 전통적인 군사 엘리트 계층이 아닌 사람들의 무기 소지에 관한 규정이 완화되었다.
예를 들어, 1368년 7월부터 시작된 한자 동맹과 덴마크 간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의 해안 도시들은 평소처럼 무역을 계속하면서도 시민들에게 완전히 무장한 상태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화기가 도입되기 전, 이러한 선박에 실린 무기들은 본질적으로 육상에서 사용되던 것과 동일했다. 그중에서도 쇠뇌(석궁)가 가장 중요했는데, 1217년 발트해 지역에서는 이미 쇠뇌가 흔히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라트비아 출신의 한 독일인 사제가 스웨덴의 올란드섬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 중에 쇠뇌를 사용했다고 한다.
코게선은 쇠뇌병들에게 상당한 이점을 제공했는데, 배의 높은 구조물(성루) 위에서 상대방의 낮은 갑판을 향해 아래로 사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쇠뇌는 사거리가 상당히 길었기에, 배들이 아직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을 때부터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돛대 꼭대기에 위치한 병사들은 아래를 향해 쇠뇌를 쏘거나 피해를 줄 만큼 커다란 돌을 떨어뜨릴 수 있었고, 선미와 선수에 설치된 전투용 구조물은 적선에 올라타는(백병전을 벌이는) 것을 더 수월하게 만들었다. 또한 선박의 상부 구조물에 더 큰 규모의 쇠뇌를 설치하거나 거치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러한 무기에서 발사된 무거운 화살(볼트)은 적선의 선체를 완전히 꿰뚫어 침몰시킬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물론 이런 경우라면 적선은 작고 허술한 배였을 것이다. 초기에는 투척용 도끼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투창과 같은 다른 투척 무기를 잘못 이해한 것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코그선은 그러한 상황에서, 특히 방어적인 측면에서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충분한 화포를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공격용 군함으로서 제 역할을 발휘할 수 있었다. 북유럽에서 화선(火船, 불을 붙여 적함에 충돌시키는 배)이 사용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는데, 1304년 플랑드르인들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이 전술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례가 있을 뿐이다. 북유럽 선박에 돌을 던지는 공성 병기가 실려 있었다는 간헐적인 기록들은, 해당 무기들이 해상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해상을 통해 운송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자 동맹 도시들은 대규모 함대를 운용하는 데 매우 유능했으며, 13세기에도 이미 경쟁자들을 앞서고 있었다. 함대가 출항하기 전, 소집된 선박들의 성능과 기동성이 평가되었다. 예를 들어 뤼베크의 선박들은 트라베 강이 발트해로 흘러 들어가는 하구의 트라베뮌데에서 성능 시험을 거치기도 했다. 이후 함대 내에서의 각 선박의 역할과 위치가 결정되었다. 중세 북유럽 해역에서는 함대 단위의 조직적인 작전 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15세기 화기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 북유럽 선박들은 주로 근접전을 위한 플랫폼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박 간의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으로 인해 함대의 기동성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함대' 차원의 작전은 대개 소규모 전대(squadron) 단위로 제한되었으며, 그 안에서조차 전체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제독이나 부제독의 함선만이 제대로 된 깃발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이전 수십 년 동안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깃발이나 등불이 지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 주된 목적은 식별이었다.
실제로 1428년 한자 동맹의 규정에는 "각 도시는 선박을 도색하고, 상갑판 측면과 선루(castle)에 도시의 문장을 그려 넣어야 하며, 돛 양쪽에는 커다란 밝은 파란색 십자가를 꿰매어 달아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특정 원정이나 작전을 위한 일시적인 조치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평소에는 각 도시의 문장이나 표식이 그려진 깃발을 사용했다.
한자 동맹 도시들은 전용 군함이나 특별히 건조된 군함을 갖추지 못했기에, 적합한 선박을 ‘압류’하거나 징발한 뒤 수행할 임무에 맞춰 개조하곤 했다.
한 예로 1280년대 노르웨이 봉쇄 작전에 동원된 한자 동맹의 코그선들에는 선수와 선미에 탑 모양의 흉벽(총안이 설치된 목조 구조물)이 덧붙여졌는데, 이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미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초기 형태였던 바구니 모양의 마스트 꼭대기 관측소(크로우즈 네스트)는 점차 궁수나 석궁병들이 머물 수 있는 더 견고한 구조물로 대체되었다. 처음에는 임시방편으로 설치되었던 이러한 구조물들은 14세기부터는 상설 시설로 자리 잡았으며,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갑판 위에도 추가적인 방어용 흉벽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15세기 당시 한자 동맹 상인들은 자신들의 배 중 일부가 전쟁터에 내보내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자산이라고 여겼으며, 이는 특히 대형 홀크 선박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물론 홀크 선박들이라고 해서 분쟁에 휘말리는 상황을 항상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들은 종종 공격 대상이 되곤 했는데, 1413년 존 콜빌이 이끄는 8척의 영국 선박이 라 벨 일 인근 해역에서 2척의 한자 동맹 소속 홀크 선박을 발견했던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백년전쟁은 휴전 상태였으나, 이 홀크 선박들은 프랑스의 라 로셸 항구에서 출항한 상태였다. 이에 영국 측은 소형정을 보내 어떤 화물을 싣고 있는지 물었는데, 만약 프랑스산 화물이라면 이를 넘겨받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한자 동맹 측 선장들은 답변을 거부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홀크 선박들은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결국 영국 선박들이 공격을 감행했고, 영국 측은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홀크 선박 2척을 나포하여 전리품으로 영국으로 가져갔다.
강을 이용한 활동
한자 동맹의 상업 및 군사 역사에서 때때로 간과되는 부분은 강을 통한 교역인데, 이는 매우 중요했기에 주요 강로의 안전 확보는 한자 동맹의 핵심 관심사 중 하나였다. 한자 동맹 회원 도시 중 다수는 강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강 하구 근처이거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경우도 있었다. 사실 강을 통한 항행은 외해(外海)에서의 항행 자유만큼이나 중요했으며, 오늘날의 규정과 유사한 몇몇 규칙들을 낳기도 했다. 이러한 규칙들은 선박의 평형수(밸러스트)나 쓰레기를 강물에 버려 좁은 수로—특히 얕은 강 하구—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주요 수로는 전시에도 활용되었는데, 단순히 군대를 수송하는 용도에 그치지 않았다. 1474년,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였던 쾰른은 강력한 부르고뉴 공작의 공격에 맞서던 소도시 노이스를 돕기 위해 4,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 전투 과정에서 쾰른은 이전에도 노이스를 지원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당시 부르고뉴군에 속해 있던 한 인물이 남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쾰른 사람들은 배 몇 척에 사람들을 태워 라인강을 따라 내려보냈다. 그들은 나무, 기름, 윤활유, 화약 등을 가득 실은 큰 배 한 척을 함께 가져왔는데, 부르고뉴 공작의 군대 근처에 이르자 그 배에 불을 붙여 강물에 떠내려가게 했다. 이는 그 배가 공작이 [라인강 내의 한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설치한 다리에 부딪혀 다리를 불태우려는 의도였다. 다리가 불타 없어지면 쾰른군이 섬에 있던 300기의 기병대(소규모 기병 부대)를 공격할 계획이었는데, 다리가 사라지면 공작은 그들을 도울 수 없게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신의 은총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공작이 홀란드에서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오게 했던 약 50척의 소형 선박들에 타고 있던 이들이 경계를 철저히 섰던 덕분인지, 그 배는 라인강 한가운데에 멈춰 섰고 다리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타버리고 말았다."
공성전과 화기
발트해 남부 연안에 위치한 한자 동맹의 중심지는 독일인들의 정복과 식민화 이전부터 이미 매우 강력한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초기 중세 슬라브족은 흙과 나무를 이용해 때로는 매우 인상적인 요새를 구축했는데, 독일과 덴마크 세력이 발트해 남부 연안을 장악한 이후에도 이러한 슬라브식 원형 요새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예를 들어, 뤼베크에 세워진 최초의 독일-덴마크식 요새가 그 사례이다).
그 후에도 해자를 두른 토목 및 목조 요새들이 계속 건설되었으며, 석재나 벽돌로 지어진 최초의 건축물은 교회였고, 그 밖의 건물들은 대개 목조 골조를 드러낸 ‘하프 팀버’ 방식으로 지어졌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벽돌 건축의 웅장한 전통이 발달함에 따라, 요새 건축과 교회 건축 모두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북독일의 요새들은 남쪽 지역의 낭만적인 성들이나 더 동쪽에 위치한 튜턴 기사단의 거대한 요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 동맹 도시들의 요새는 강력할 뿐만 아니라 인상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특히 15세기 이후에 세워진 요새들은 지역 영주들을 위압하려는 의도로 설계되기도 했다.
중세 후기 한자 동맹 도시의 벽돌 건축물들은 매우 화려하고 풍부한 장식을 자랑했지만, 초기 도시 요새들은 대부분 나중에 세워진 성벽, 탑, 성문들로 대체되어 버렸다. 따라서 초기 요새에 관해 알려진 사실들은 고고학적 발굴이나 중세 문헌을 통해 파악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뤼베크 시는 트라베(Trave) 강과 바케니츠(Wakenitz) 강으로 거의 둘러싸여 있었다. 덴마크 수비대가 축출된 후 도시 성벽이 건설되었는데, 여기에는 북쪽의 부르크토어(Burgtor), 서쪽의 홀스텐토어(Holstentor), 남동쪽의 뮐렌토어(Mühlentor, ‘방앗간 문’), 그리고 동쪽의 튁스토어(Hüxtor) 등 네 개의 성문이 있었다. 특히 동쪽의 튁스토어는 방어군이 공격자의 측면을 타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군사적 목적의 시설이었다. 독일 도시의 성문들은 종종 탑 하부를 관통하는 단순한 통로 형태였다.
1447년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지어진 뤼베크의 홀스텐토어조차도 여전히 단순한 ‘직선형 통과’ 구조의 성문으로 남아 있다. 이는 이 성문의 주된 목적이 (당시 이미 공성 포병 무기를 갖추고 있었을) 잠재적 적을 막아내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튜턴 기사단 영토 내 한자 동맹 도시들의 요새는 순수한 군사적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었다.
15세기 동안 한자 동맹 도시들은 외국 상인들, 잠재적 교역 파트너들, 그리고 군주들의 대리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경쟁했다. 이러한 방문객들은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정교하게 장식된 성문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상은 시청을 비롯한 도시 공공건물들의 화려함을 통해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무기고나 장기 포위전을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 두는 곡물 창고와 같이,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하는 건물들 또한 인상적인 모습을 갖추는 경우가 많았다.
15세기 중반 무렵 뤼베크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지만, 시 당국은 1440~1442년에 시의 전쟁 담당 부서 내에 ‘크리그스슈투벤바우(Kriegsstubembau, 전쟁 관련 회의실)’라는 화려한 새 회의 공간을 건설했다. 이 공간은 개방형 시장 건물 위에 세워졌으며, 뤼베크의 수석 건축가 니콜라우스 페크가 설계했다. 그는 2년 뒤 거대한 부르크토어 성문을 개축하기도 했다. 그보다 훨씬 더 웅장한 홀스텐토어는 1466~1478년, 시 의회의 새로운 건축가였던 헬름슈테데에 의해 완전히 재건되었다.
중세 시대 동안 여러 한자 동맹 도시가 성벽 너머로 통제하는 영토는 점차 확대되었다. 이는 인근 군주들에게 영토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거나, 도시 인구를 부양하는 데 필요한 지역 밀 수확량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주변 지역과의 긴장을 유발할 수 있었는데, 이는 북독일의 군주들 또한 국경을 방어하는 성채뿐만 아니라 지역 수익까지 통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사실, 일부 한자 동맹 도시들과 홀슈타인 백작들, 그리고 메클렌부르크 공작들 사이의 마찰은 덴마크에 대한 상호 간의 두려움 때문에 간신히 억제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독일 도시들과 그 주변 영주들 사이의 관계는 수십 년간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일부 영주들은 봉건적 관점에서 자신들의 소유라고 간주하던 도시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이러한 갈등은 15세기까지 이어지며 여러 차례의 충돌을 야기했다.
예를 들어 1396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메클렌부르크 공작의 지원을 받아 뤼네부르크를 무력으로 점령하려 했고, 이에 맞서 뤼네부르크는 뤼베크, 함부르크 및 여러 작센 지역 도시들의 도움을 받았다. 자신들이 처한 취약성을 더욱 절감하게 된 한자 동맹 도시들은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힘을 합치려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토호페자테(Tohopesate)'라 불리는 광범위한 군사·정치적 연맹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벤덴 지역과 작센 지역 도시들이 결성한 연맹들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는데, 이들은 영주의 공격을 받는 회원 도시에게 군사적 또는 재정적 지원을 제공한다는 합의를 바탕으로 운영되었다.
더 먼 지역에 요새를 확보하는 것은 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으며, 때로는 한자 동맹 차원에서 추진되기도 했다. 스코네 지역의 스카뇌르, 팔스테르보, 헬싱보리, 말뫼에 위치한 해안 성채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성채들은 1370년 슈트랄준트 평화 조약에 따라 한자 동맹에 양도되었으며, 덴마크와의 전쟁 중 한자 도시들이 입은 무역 피해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15년간 동맹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바르베리 성채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덴마크 측이 합의를 어기지 않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담보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코네 지역의 성채들은 유지비가 많이 들고 용병을 주둔시키는 데도 큰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편, 런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한자 동맹 상인들은 무역 특권을 얻는 대가로 외국 도시의 방어를 도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곳에서 독일 상인들은 1170년대부터 1853년 캐넌 스트리트 철도역 건설을 위해 부지가 인수될 때까지, 거의 중단 없이 템스강변의 요지를 점유하고 있었다. '스틸야드'라고 알려진 이 구역은 직사각형 형태였으며, 강변을 따라 50미터(165피트)의 길이에 내륙 쪽으로 약 125미터(413피트)까지 뻗어 있었다. 1240년대까지 이곳은 '쾰른 상인 길드홀'이라 불렸으나, 뤼베크를 비롯한 발트해 연안 도시 출신 상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독일인 길드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5년부터는 영국 내 한자 동맹의 본부 역할을 했다.
엄밀히 말해 요새화된 곳은 아니었지만, 스틸야드는 웬만한 도둑이나 폭도들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었다. 또 다른 매우 중요한 한자 동맹 공동체이자 거점으로는 러시아 북부 도시 노브고로드에 위치한 '페터호프'가 있는데, 이는 한자 동맹의 '콘토(konto)', 즉 지정된 무역 거점이었다. 이곳에는 자체 경비 인력이 있었는데, 밤이 되면 이들은 가장 귀중한 상품들과 함께 페터호프 내 교회 건물 안에 머물렀고, 교회 밖 담장으로 둘러싸인 구역 안에는 경비견들이 돌아다녔다.
화기
14세기 후반 무렵 발트해 지역에서는 이미 소형 화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독일 서부의 한자 동맹 도시들에서는 이보다 더 일찍 사용되었고, 작센 지역의 일부 도시들에서도 최소 1340년대부터는 화기가 도입되었다. 한두 명의 인원이 운용하는 초기 소형 화기가 쇠뇌(석궁)에 비해 가졌던 유일한 실질적 이점은 더 뛰어난 갑옷 관통력이었다. 그 외의 측면에서 초기 화기는 여전히 비싸고 신뢰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화약 가격이 저렴해지고, 짧고 뭉툭한 총신 대신 긴 총신을 사용하여 정확도가 높아지면서 화기의 인기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대포의 경우, 제대로 된 포병대를 운용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체계적인 행정 조직이 필요했는데, 이는 당시 주요 한자 동맹 도시들이 갖추고 있던 강점이었다. 한자 동맹 도시들은 주변 영주들에게 화기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1340년대 작센 지역의 한 민요에는 한자 동맹 도시인 마그데부르크와 영주 연합군 사이의 갈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싸움은 결국 영주 연합군의 패배로 끝났다.
"고귀한 영주들이여,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충고 하나 하겠소.
저 도시를 아군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곳엔 훌륭한 포병대가 있고,
매우 빠르게 발사되는 화기들까지 갖추고 있으니 말이오."
뤼베크에서 화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52년 '뷔어쉬테(vüerschütte)'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이후 뤼베크는 발트해 연안 한자 동맹 도시들 가운데 화기 운용을 선도하게 되었는데, 때로는 재앙과 같은 사건도 있었다. 1360년에는 뤼베크 시청 지하실에 보관하던 화약이 폭발하여 시청 건물이 파괴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15세기 무렵에는 모든 주요 한자 동맹 도시가 화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그 운용 방식 또한 매우 정교해졌다.
1474~1475년 부르고뉴 공작이 쾰른을 포위했을 당시, 도시 주민들과 새로 도착한 구원군 사이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메시지는 포위군 머리 위로 '퓨제(fusées, 아마도 내부를 비워낸 소이탄 형태의 발사체)'에 담겨 발사되었다. 한자 동맹에 있어 더욱 중요한 변화는 해상에서의 화기 사용이었는데, 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384년에 등장한다.
이듬해, 슈트랄준트 출신의 울프 울플람은 해적과의 전투에서 ‘도너뷔크센(donnerbüchsen, 초기 형태의 화포)’ 6문을 사용했다.
초기 화기들은 주로 선박의 현측에 설치하는 ‘쇼트뷔센(schotbussen)’과 같은 소형 대인용 무기였기에, 그 효과는 물리적 타격보다는 위협적인 억제력에 가까웠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함상 화포는 더욱 대형화되었고, 대형 상선들은 방어용 물자로 화약과 포탄을 상시 적재하게 되었으나, 당시의 화포는 여전히 적함을 침몰시킬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화포와 화약의 제조는 사실상 대도시들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뤼베크의 경우 1360년대 덴마크와의 분쟁 과정에서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산업은 전략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1384년 한자 동맹은 외국 고객을 위한 화포 제조를 금지했다. 1년 뒤, 로스토크와 인근 한자 동맹 도시들은 “어느 도시에서도 도시 외부 거주자를 위해 화포를 주조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14세기 말, 숙련된 포수들은 함부르크나 뤼베크를 비롯한 여러 한자 동맹 도시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용병으로 활동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홀슈타인 출신이었다. 이들(혹은 다른 전문가들)은 화약 제조도 담당했으며, 15세기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포술 책임자’라는 직책이 이 분야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매우 권위 있고 때로는 상설직이기도 한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
15세기: 경쟁의 대가
15세기 전반은 한자 동맹이 누린 성공의 정점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 동맹은 15세기 2분기부터 그 우월한 지위를 잃기 시작했다.
한자 동맹의 선박들은 베르겐, 런던, 브뤼허, 노브고로드 사이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쪽으로는 비스케이 만의 부르뇌프까지, 북쪽으로는 아이슬란드, 때로는 그보다 더 먼 곳까지 정기적으로 항해했다. 1375년 당시 한자 동맹은 77개의 도시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450년경에는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밖의 도시들을 포함하여 200개가 넘는 도시가 동맹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동맹은 15세기 초, 긴밀한 협력 관계였던 튜턴 기사단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 참패했을 때도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비용은 한자 동맹 도시들의 자원을 점진적으로 고갈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동맹은 수입품이나 기본적인 식료품에 부과하는 세금을 비롯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는 도시 내부의 불안을 야기할 수 있었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뤼베크 한 도시만 하더라도 1426년에서 1433년 사이 포메라니아의 에리크 왕과 벌인 분쟁 과정에서 약 79,000마르크를 지출했다.
또한 1438년부터 1440년까지 네덜란드와 치른 전쟁에는 22,000마르크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한자 동맹이 해상 질서 확립을 위해 수행한 일부 해군 작전은 특히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뤼베크는 1447~1448년에만 10,300마르크 이상을 지출했다. 이후 1470년부터 1473년까지 영국과 벌어진 분쟁 당시, 뤼베크는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20,000마르크 이상을 따로 책정해 두었다.
한자 동맹의 선단은 당연히 막대한 비용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15세기 당시 한자 동맹의 상선단 규모는 800척에서 1,000척 사이였으며, 총 적재량은 약 45,000톤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박에 대한 수요가 워낙 높았기에, 일부 한자 동맹 도시들이 현지에서 건조된 선박을 외국인에게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려 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규제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한자 동맹 선단 운영을 규율하는 규칙들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15세기 초, '프리데시프(friedeschiff)'라 불리는, 해적 퇴치를 위한 표적 원정 방식은 새로운 전략으로 대체되었다. 이제는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모든 선박이 단순한 호송대 수준을 넘어 대규모 선단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이러한 선단에는 종종 특별히 무장한 선박이 동행했다. 또한 도시 당국 차원에서 선장들이 반드시 이러한 선단과 함께 항해하도록 강제하는 규정도 마련되었다.
'제베프리둥(seebefriedung)', 즉 '해상 평화 순찰' 정책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456년 7월 9일, 뤼베크 시의회는 트라베뮌데 인근 해역을 위험하게 만들던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빠르지만 규모가 작은 '슈니게(schnigge)' 한 척과 보트 한 척, 그리고 50명의 병력을 파견했으나 해적들은 도주하고 말았다.
1458년 8월에는 뤼베크의 군함 5척이 시의원인 알프 그레베라데와 고데케 부르메스터의 지휘하에 트라베강을 떠나 출항했다. 민병대원과 용병들로 구성된 이 함대의 임무는 예세 메르텐센을 비롯한 덴마크 출신 해적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작전은 수주간 이어질 예정이었으나, 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해적 행위와 (국가로부터) 허가받은 사략 행위 사이의 경계 또한 모호했으며, 종종 동일한 선박과 인원들이 양쪽 모두에 관여하기도 했다. 한자 동맹은 다른 유럽 강대국들에 비해 사략선을 적게 운용했으나, 1438~1441년 네덜란드와의 분쟁이나 1469~1474년 영국과의 분쟁 당시에는 이를 성공적으로 활용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의 해적 행위로 인해 한자 동맹은 1412년 스코틀랜드에 무역 금수 조치를 내렸는데, 이 조치는 25년이 지나도록 공식적으로 해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한자 동맹 도시들 자체가 해적들의 소굴이 되기도 했다. 1440년대 브레멘은 이런 행태로 악명이 높았는데, 정작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해적들 중에는 브레멘 출신이 아닌 이들도 많았다. ‘빅 게리’라 불린 그로테 게르트는 비스마르 출신이었고, 그 밖에도 함부르크, 뤼베크 등지에서 온 해적들이 있었다.
브레멘은 이러한 의심스러운 거래의 대가로, 해적들이 약탈한 전리품의 3분의 1을 챙겼으며, 바다에 던져지지 않고 살아남은 포로들에게서 받아낸 몸값의 절반을 가져갔다.
덴마크와의 경쟁
15세기 후반, 일부 한자 동맹 도시들은 야심 찬 주변국들로부터 여전히 독립을 위협받고 있었다. 이들 통치자 중 일부는 힘을 합치려 시도하기도 했는데, 일례로 1443년에는 덴마크 국왕, 메클렌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들,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한자 동맹 도시들을 공동으로 제압할 방안을 논의했다. 실제로 공동 행동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갈등은 더욱 격렬해졌다. 한자 동맹 도시들이 대체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 대가는 물리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의 장기적인 피해였다.
한자 동맹과 덴마크 사이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은 다시 불붙었다. 이번에는 칼마르 동맹(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이들의 영토인 핀란드, 아이슬란드, 그리고 이론상으로는 그린란드까지 포함)이 한자 동맹과 맞서게 되었다.
1427년 7월 11일, 덴마크 함대는 프랑스 대서양 연안에서 생산된 바다 소금을 운송하던 한자 동맹의 ‘만(灣) 소금 선단(Bay Salt Fleet)’ 전체를 나포하며 한자 동맹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패배로 한자 동맹은 10만 노블(영국에서 주조된 금화)의 손실을 보았으며, 200명이 사망하고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홀슈타인 백작령은 워낙 자주 분할되고 재통합되기를 반복했기에, 한자 동맹의 동맹국으로서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1459년 홀슈타인-렌츠부르크 가문의 대가 끊기자,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세가 접경 지역인 슐레스비히를 상속받았고, 곧이어 홀슈타인-렌츠부르크 백작으로 선출되었다. 홀슈타인 전체가 결국 덴마크 왕실의 수중에 들어갈 것처럼 보였고, 한자 동맹은 이를 매우 우려스럽게 지켜보았다. 1490년 홀슈타인이 다시 분할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우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독일 발트해 연안의 또 다른 주요 세력인 메클렌부르크와 한자 동맹 간의 관계는 훨씬 단순하고 명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독일의 여러 국가 중 가장 안정적인 축에 속했던 메클렌부르크였지만, 15세기에는 메클렌부르크의 마그누스 2세 공작과 그가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던 한자 동맹 소속 항구 도시 로스토크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했다.
이는 1487년, 한자 동맹의 일원인 도시와 지역의 강력한 영주 세력이 맞붙는 분쟁으로 치달았다. 7월 17일, 보병 2,000명과 기병 200명으로 구성된 메클렌부르크군이 로스토크 외곽에 나타났다.
그러나 공작은 도시를 포위하는 대신 바르네뮌데를 공격하여 로스토크의 해상 접근로를 차단하려 했다. 이로 인해 로스토크는 방비를 갖추고 주변 마을들로부터 최대한 많은 곡물을 확보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포위전’은 매우 짧게 끝났다. 8월 9일에 도착했던 마그누스 공작은 다음 날 곧바로 철수했는데, 이는 동맹군이었던 포메라니아의 보기슬라프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면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로스토크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로스토크는 보병 1,500명과 기병 150명을 동원해 대규모 출격 작전을 펼쳤다. 이들은 남쪽의 전초 기지인 포트렘스를 불태웠고, 이어 메클렌부르크 기병 500~600명을 격퇴했으며, 마그누스 공작 본인에게도 부상을 입혔다고 한다.
카스티야와의 갈등
15세기 초, 한자 동맹과 잉글랜드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다. 1415년 헨리 5세가 프랑스로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선박들을 징발했을 때, 그중에는 한자 동맹 소속 선박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자 동맹의 선박들이 영국 해협에서 잉글랜드 측에 가담해 프랑스 및 카스티야 세력과 교전하게 되면서, 한자 동맹의 모든 선박은 이들 적대 세력의 잠재적 공격 대상이 되고 말았다.
1421년, 플랑드르와 한자 동맹으로 구성된 대규모 선단이 플랑드르의 슬루이스를 출발하여 매년 그래왔듯 프랑스 남서부를 향해 떠났다. 프랑스 항구 라로셸 인근에서 이 선단은 나뉘었는데, 일부는 리스본을 향해 계속 항해했고 나머지는 라로셸로 향했다.
이때 돈 후안 아 캄포레돈도가 지휘하는 카스티야 함대가 나타났다. 북유럽의 후기 중세 해상 전통과 이베리아 반도의 해상 전통이 맞붙은 이 주목할 만한 충돌은 남부 세력(카스티야)의 완승으로 끝났다. 1421년 12월 30일에 벌어진 전투는 짧았지만 격렬했다. 플랑드르와 한자 동맹 측 선박 40척이 귀중한 화물과 함께 나포되었고, 라로셸로 끌려가 매각되었다.
생존 선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몸값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각자 알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풀려난 듯하다. 모든 것을 잃고 분노에 가득 찬 상태로 뤼베크에 돌아온 독일 선원들도 있었다. 사태를 악화시킬 불씨는 곧 나타났는데, 바로 로페 바스케스가 지휘하는 갈리시아-카스티야의 홀크 한 척이 도착하면서였다.
뤼베크 당국은 이 스페인인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라로셸 인근에서 자신의 배를 잃었던 한자 동맹 선장 베른트 폰 뮌스터가 이끄는 200명의 독일 선원 및 ‘종사자’들이 즉시 그 홀크를 나포해 버렸다. 베른트는 그 홀크와 화물을 탈취해 떠나버렸고, 이는 한자 동맹과 카스티야 사이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네덜란드 상인들 또한 라로셸 인근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나, 초기에는 플랑드르인들과 한자 동맹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 노력했다.
한편, 네덜란드인들 역시 한자 동맹 및 플랑드르인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이는 커다란 분열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 왕실은 네덜란드 측을 지원했는데, 이는 아마도 한자 동맹이라는 경쟁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갈등은 뤼베크, 비스마르, 로스토크, 슈트랄준트, 함부르크, 뤼네부르크 등 한자 동맹 도시들이 칼마르 동맹(스칸디나비아 3국 연합)의 국왕인 홀슈타인의 에리크와 충돌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한자 동맹 도시들은 덴마크와 칼마르 동맹 소속 북부 왕국들 사이의 좁은 해역을 봉쇄하는 전통적인 전략을 구사했는데, 이는 한자 동맹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 특히 네덜란드인들의 교역에 타격을 주었다. 네덜란드인들 사이에서는 1418년부터 이미 한자 동맹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네덜란드 함대가 한자 동맹의 봉쇄망을 뚫고 발트해로 진입했으며, 그곳에서 벌인 활동들은 한자 동맹의 교역을 방해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와의 경쟁
이로 인해 반(反) 네덜란드 감정이 고조되었는데, 특히 함부르크는 1430년에 사략선을 동원하여 네덜란드 선박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 갈등이 모든 당사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1435년 5월 한자 동맹에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장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트해 지역에서는 벤덴권 한자 도시들과 네덜란드인들 사이의 갈등이 계속 이어졌다.
불행히도 네덜란드를 상대로 거둔 이러한 성공은 한자 동맹 내부에 과도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한자 동맹은 스스로를 여전히 북유럽의 주요 해상 강자로 여겼고, 그 결과 부르고뉴 공작령의 급격히 커지는 경제적·군사적 위협을 비롯한 여러 잠재적 위험을 무시하고 말았다.
한편, 1426년부터 1435년까지 이어진 칼마르 동맹과의 투쟁은 한자 동맹 내부, 특히 동부 도시들과 서부 도시들 사이의 깊은 갈등을 드러냈으며, 일부 한자 도시들에서는 이미 분리주의적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최근의 대결에서 패했을지 모르지만, 한자 동맹과의 경쟁은 오히려 더욱 치열해졌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네덜란드는 무역 규모와 선박 수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해상 기술과 선원들의 역량 면에서 한자 동맹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와의 경쟁
한자 동맹과 잉글랜드의 관계는 잉글랜드의 ‘상인 모험가들’이 한자 동맹 상인들이 자신들의 영역이라 간주하던 지역에서 교역을 시도하면서 악화되었다.
갈등의 지속적인 원인 중 하나는, 한자 동맹의 강력한 압박을 받은 스칸디나비아 통치자가 잉글랜드 상인들로 하여금 아이슬란드산 염장 생선을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만 구매하도록 강제한 것이었다. 헐과 브리스톨 출신의 잉글랜드 어부들은 이러한 독점 체제를 깨뜨리기 위해 직접 아이슬란드로 항해하여 고기를 잡으려 했다. 특히 헐 출신 사람들은 폭력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그 밖에도 잉글랜드 선원들은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는 개입하지 않은 한자 동맹과의 전쟁에 가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427년 7월 한자 동맹의 소금 운반 선단을 나포한 덴마크 함대에는 잉글랜드의 선박과 선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아마도 해상 용병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435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을 종식시키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아라스 회의 이후, 잉글랜드는 한자 동맹과 악화된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한자 동맹 내부에서는 발트해를 비롯한 전통적인 한자 동맹의 교역 영역을 침범하는 잉글랜드 상인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그럼에도 1437년에 합의안이 체결되었으나, 이는 프로이센 상인들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단치히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 대립은 계속되었고, 비록 이러한 갈등은 거의 항상 한자 동맹의 승리로 끝났지만, 한자 동맹은 잉글랜드 의회가 자국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38척의 함대를 요구한 것을 사략 행위(정부나 통치자들로부터 허가를 받은 해적질)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우려는 1449년 5월 23일에 사실로 드러났다. 프랑스에서 돌아오던 한자 동맹, 플랑드르, 네덜란드 선박 110척으로 구성된 ‘소금 선단’이 잉글랜드 사략선들에 의해 나포되었고, 한자 동맹 상인들의 재산은 합법적인 전리품으로 취급된 것이다.
그 결과, 이전까지 잉글랜드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던 뤼베크조차 프로이센 도시들과 합세하여 잉글랜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함부르크만이 잉글랜드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1468년 6월에는 한자 동맹의 선박들이 발트해로 향하던 영국 선단을 나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은 런던에 있던 한자 동맹의 상업 거점인 '스틸야드'의 물자들을 압류했고, 이는 사실상 모든 한자 동맹 도시들이 영국에 맞서 단결하는 결과를 낳았다.
1469년 영국과 한자 동맹 사이에 5년간의 분쟁이 시작되면서, 아이슬란드 주변의 먼 북쪽 바다조차 영국 선박들에게는 더욱 위험한 곳이 되었다. 한자 동맹은 규모는 작지만 중요한 군사적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었다.
영국 역사학자들은 이 원인을 두고 당시 영국이 프랑스와의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영국의 약함보다는 한자 동맹의 해상 전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영국은 해군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물론 이를 실현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한자 동맹은 영국의 내전인 '장미 전쟁'에도 개입했다. 그 일환으로 한자 동맹은 망명 중이던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지지자들을 자국 선박에 태워 영국으로 다시 데려다주었다. 그 대가로 에드워드 4세는 왕위를 되찾은 뒤 한자 동맹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로 약속했고, 이는 1473년 9월 '위트레흐트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수 세기 동안 치열한 협상을 거듭해 온 한자 동맹의 경험은 독일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영국의 수석 대표는 "차라리 전 세계의 모든 군주와 협상하는 편이 낫지, 한자 동맹 평의회의 사절들과 협상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자 동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478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이반 대제)가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이전처럼 교역이 계속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1494년 이반 3세는 노브고로드의 한자 동맹 상업 거점(콘토르)을 폐쇄하고 상인들을 추방했다. 이는 한자 동맹 번영의 근간 중 하나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러시아가 서유럽에 등을 돌리고 동쪽을 강력하게 지향하게 된 과정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의 차르로 즉위할 때까지 2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