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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비(腹誹)
말없이 마음속으로 남을 나무람을 일컫는 말이다.
腹 : 배 복(月/9)
誹 : 헐뜯을 비(言/8)
(유의어)
복비(腹非)
출전 : 사기(史記) 卷30 평준서(平準書)
이 성어는 말이나 글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반대해도 처벌하는 공포정치를 말한다. 사기(史記) 卷30 평준서(平準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때 대사농(재정담당 장관급)이던 안이(顏異)가 처형되었다. 애초, 안이(顏異)는 제남지방의 정장(면장급)이었는데 청련하고 강직하여 관직이 점차 승진하여 9경(九卿)급에 이르렀다.
而大農顏異誅. 初, 異為濟南亭長, 以廉直稍遷至九卿.
당시 천자(漢武帝)는 장탕(張湯; 어사대부)과 함께 제후들의 재물을 뺏으려고 흰 사슴의 가죽을 네모반듯하게 잘라 40만 전의 가치를 지니는 백록피(白鹿皮)라는 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후들이 매년 황제에게 조하(朝賀; 경축일에 신하들이 황제에게 나아가 인사드리는 일)할 때 이 백록피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선물을 바치게 했다.
이에 대해 우직한 안이(顏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반대했다. '오늘날 왕후(王侯)들이 조하하면서 올리는 벽옥(碧玉)은 수천 전에 지나지 않은 데 비해, 백록피는 무려 40만 전이나 됩니다. 그런데 벽옥을 올리기 위해 이 백록피를 깔게 하는 것은 본말이 맞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천자는 괘씸하게 생각했다.
上與張湯既造白鹿皮幣, 問異. 異曰 : 今王侯朝賀以蒼璧, 直數千, 而其皮薦反四十萬. 本末不相稱. 天子不說.
장탕(張湯)도 또한 안이(顏異)와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어던 사람이 안이(顏異)를 고발했다. 천자는 장탕에게 이 사건을 맡겼다.
張湯又與異有卻, 及有人告異以它議, 事下張湯治異.
안이(顏異)가 손님과 이야기 하는 가운데 손님이 새로운 화폐법에 불만을 이야기 했으나 안이(顏異)는 호응하지 않고 입술만 삐죽 내미는 시늉을 했다.
異與客語, 客語初令下有不便者, 異不應, 微反脣.
장탕(張湯)은 이를 상주하여 말하데, '9경의 지위에 있는 안이(顏異)는 새로운 법령에 부당함을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비방했다면서 사형을 논해야 된다'고 했다.
湯奏當異九卿見令不便, 不入言而腹誹, 論死.
이로부터 '복비(腹誹)'라는 법이 생기게 되었다. 이후 공경과 대부들은 대부분 천자에게 아첨하여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自是之後, 有腹誹之法. 以此, 而公卿大夫多諂諛取容矣.
(史記/卷30 平準書)
백록피(白鹿皮)라는 돈 참말로 신기하네. 말이나 글이 아닌 속으로 비난했을 때 처벌하는 규정으로, 한 무제의 공포 통치술을 상징한다. 아, 그런 세상도 있었다니!
장탕(張湯)이 사용한 반순복비(反脣腹誹)의 죄
자치통감(資治通鑑) 卷20에 '반순복비(反脣腹誹)의 죄'라는 대목이 나온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입술을 삐쭉 내미는 것이 뱃속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상대방을 보거나 말을 듣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겉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어서 비난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반순(反脣)은 뱃속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라고 하여서 처벌하는 죄가 바로 반순복비의 죄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토당토않은 말이기는 하지만 정적(政敵)을 죽이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죄목도 만들었던 것이다.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있었던 일이다. 한 나라 무제 때에 안이(顔異)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이어서 조금씩 승진하여서 나중에는 대농령(大農令) 관직까지 올라갔다.
이 때에 무제가 제후들의 돈을 빼앗는 방법의 하나로 백록피(白鹿皮)의 돈을 만들었다. 즉 흰 사슴의 가죽을 네모 반듯하게 잘라서 이것 하나를 40만 전으로 하고, 제후들은 매년 황제에게 조하(朝賀)할 때에 이것을 밑에 깔고 선물을 바치게 하였던 것이다.
재정을 담당한 안이는 이것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여 무제에게 말하였다. '오늘날 왕후(王侯)들은 벽옥(碧玉)을 가지고 조하하고 있는데, 그 벽옥의 가치는 수천 전(錢)에 지나지 않는데 백록피는 그 값이 40만 전(錢)이나 되니 벽옥을 가지고 조하하면서 이 백록피를 깔게 하는 것은 본말(本末)이 맞지 않습니다.'
바른 말이어서 무제는 듣고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법을 담당하였던 장탕(張湯)은 안이와 사이기 좋지 않았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어떤 다른 사건을 가지고 안이를 고발하였다. 황제는 앞에서 안이에게 기분이 나빴던 터라 이 사건을 장탕에게 보내어 조사하고 처리하게 하였다.
조사하다가 안이가 예전에 반순(反脣)했던 상황을 찾아내게 되었다.
즉, 안이가 전에 어떤 손님과 이야기 하는데, 그 손님이 무제가 처음에 내렸던 조령(詔令)은 불편한 점이 있다고 말하자 안이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는 것이다.
장탕은 이 사실을 알아내자 무제에게 상주하였다. '안이는 9경(卿)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령(詔令)에 불편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비방 '복비(腹誹)' 하였으니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대농령인 안이는 사형을 당하였다.
그 후에 장탕은 또 하급관리인 노알거(魯謁居)를 이용하여 정적인 이문(李文)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장탕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고, 그 가운데 황제의 형님이 조왕(趙王)도 장탕과 틈이 있었는데, 동생인 무제에게 편지를 썼다. '장탕은 하급관리의 발을 주물러 주었다 하니 그가 큰 간신(奸臣)인가 의심이 갑니다.'
장탕이 노알거가 병이 들었을 때에 그의 발을 주물러 준 것을 가지고 간신으로 몰아 간 것이다.
그 뒤로 장탕은 계속하여 모함을 받았는데 상인인 전신(田信)에게 기밀을 누설하여 많은 이익을 남기게 하여 뒤에 이익을 갈라 가졌다고 고발되었다.
장탕은 이러한 고발들이 모두 세 명의 장사(長史)가 자기를 모함한 것이라고 황제에게 편지를 쓰고 자살로 막을 내렸다. 그가 죽은 뒤에 장탕의 집을 조사해 보니 겨우 500 금(金) 밖에 없었다. 정말로 모함 받은 것이 분명해진 셈이었다.
결국 다른 사람을 옭아매어 죽인 장탕도 끝내 모함을 받아 막을 내린 셈이니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할까?
인과응보는 불교의 논리이지만 역사책을 읽다보면 보응(報應)의 현상이 자주 눈에 띈다. 세상을 막 사는 사람들에게 역사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이다.
사법개혁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때 장탕(張湯)은 어려서부터 법관의 자질이 있었는데, 기소된 안건을 한무제가 엄중히 처벌하려 하면 법을 엄중하게 집행하는 속관(屬官)에게 맡기고, 만약 한무제가 용서해 주려고 하면 죄를 가볍게 다스리고 공평하게 처리하는 속관에게 맡겼다.
한 예로 청렴하고 정직하지만 한무제가 좋지 않게 보던 안이(顔異)에 대한 고발사건에서 예전에 한무제가 내린 어떤 명령에 안이가 입술을 삐죽 내민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황제의 명령에 입을 삐죽 내민 것은 마음속으로 황제를 비방한 분명한 증거라고 판단해 '복비(腹誹; 마음속으로 비방함)죄'로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무제의 마음을 헤아려 법을 적용 집행한 장탕은 마침내 문무백관을 감찰하는 어사대부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주매신등의 모함에 걸려 자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만다.
위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 중 혹리열전에 수록된 장탕의 이야기 중 일부인데, 사마천은 장탕과 같이 법조문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자들을 두고 '무문농법(舞文弄法)'이라 했다.
붓을 함부로 놀려 법을 농단한다는 뜻으로, 법률가들이 법률 지식을 악용하여 법을 자기 입맛이나 권력자의 구미에 맞게 조작하는 경우 일반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지적한 사자성어이다.
정권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주는 대가로 대법원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밀거래, 법원 지도부에 비판적인 판사들을 감시 관리하는 블랙리스트,
치밀하게 계산된 악의적인 소송 지연 등 사법농단에 대한 단죄 문제와 더불어 재판 결과에 대한 불신으로 대법원장에 대하여 화염병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사법권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모두 의심되어 사법부의 존립 자체가 걱정되는 상황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야말로 사마천이 2000여년전에 경고한 무문농법의 시대가 대한민국에 도래한 것이다.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임에도 우리 헌법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법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최소화한 이유는 사법부가 어떠한 세력에 종속되지 않고 분쟁을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만 판단하도록 해 사회질서 유지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사법부의 독립은 목적 자체가 아니라 국민의 자유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해 보장되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사법부는 폐쇄적인 엘리트주의와 사법 무오류주의에 빠져 대법원으로부터 재판을 받고자 하는 국민을 이기적인 존재로 치부하면서 국민으로부터의 재판 견제와 감시조차도 재판 독립을 침해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는 등 사법부의 존립 근거가 무엇인지 망각하였기 때문에 사법농단 사태와 사법불신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국민들은 사법농단이라는 적폐를 청산하고 사법불신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법개혁을 요구하고 있고, 사법부 역시 개혁을 약속하고 있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개혁을 진행할지 원칙조차 확립되지 않은 것 같아 걱정스럽다.
사법개혁은 법원과 법관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정되지 않고, 분쟁의 당사자에 대해 공정하게 판단하는 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사법부의 판단에 대하여 재판당사자 등 관계인들뿐 아니라 시민사회, 그리고 다른 법관 및 법률가들과 소통하면서 그 판단이 국민이 눈높이에서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절차, 즉 사법의 독립성과 더불어 민주성을 강화하는 방향성이 제시돼야 할 것이다.
모든 법관은 법관에 임용되기 앞서 '본인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 법관윤리강령을 준수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 가짐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선서를 한다. 위 선서에 사법부의 개혁방향이 모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현재의 위기가 신뢰받고 존경받는 정의로운 사법부로 환골탈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하여 본다.
복비(腹非)
① 구국의 명장 주아부에게 모반죄를 씌워 죽이다.
복비(腹誹)라는 말이 있다. 복비(腹誹)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마음속으로만 꾸짖거나 비판하는 것’을 일컫는다. 정치적으로 반대파나 못마땅한 사람을 척결하는데, 겉으로 뚜렷한 잘못이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 흑심을 품었거나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죄를 묻는 경우 이에 해당된다.
이 복비에 대하여 '좌전'에 이렇게 전한다. ‘한 사람을 척결하는데 이유가 없어 근심할 일은 없다. 예로부터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자 한다면 그에 합당은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말은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죄일지라도 복비로 다스린다면 죄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중국 서한(西漢) 초기의 주아부란 장군은 구국의 영웅이었다. 한나라 경제 때 오초 7국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는 유 씨 황족의 권한 축소를 진행하던 것이 빌미가 되어서 유 씨 황족이 내전을 일으킨 난이었다. 반란 세력이 강하여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였다. 경제는 명장 주아부를 대장군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했다. 주아부는 주도면밀한 작전으로 반란군을 일거에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주아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는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주아부는 강직하면서 융통성이 부족하여 경제 황제와 자주 부딪혔다. 그의 직언은 때로는 한계를 넘어섰다. 거기다가 경제가 생각하기에 주아부의 공이 높이 칭송되어가니 황제의 권위가 점차 약화되는 느낌이었다.
경제는 차츰 주아부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주아부의 공이 높아가니 황제가 불편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황제는 주아부를 제거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주아부는 자신의 죽음에 대비하여 자식들이 장례용품을 장만하였다. 이 과정이 문제가 되어서 정위(요즘의 검찰총장)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정위는 주아부가 황제에 대한 모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계속 문초하였다. 주아부는 단순한 장례용품을 장만한 것이라고 아무리 항변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황제의 뜻을 알고 있는 정위는 계속 문초를 하여도 마땅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한밤을 지내며 고민한 정위는 놀라운 판결을 하였다. “그대가 이승에서 모반하려고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죽은 후 저세상에서는 반드시 모반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모반죄를 진 것이다.”
정위의 이 말을 들은 주아부는 무슨 뜻인지 깊이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죄를 뒤집어씌우자면 어찌 핑계가 없겠는가?” 주아부는 더이상 항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옥에 갇혀 5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나라를 구한 명장이 왜 이런 최후를 맞이했을까?
권력자의 앞에서 자신의 공을 돋보이게 되면 권력자의 심기는 불편해진다. 주아부는 황제의 앞에서 공을 믿고 끝까지 곧게 직언을 하고 황제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황제는 권력이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모든 권력은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걸림돌을 불편해하고 제거하려 한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 행해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 청산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사정이 시작되었다. 그때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추진한 전․현직 공무원 13명과 민간인 4명 등 17명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수사 의뢰하고 현직 교육부 공무원 6명은 징계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 등 고위직과 과장급 이하 실무자 4명까지 포함되었다. 문재인 정권 초기에 주요 사업이었던 적폐 청산 위원회에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노동계 출신 인사들이 대거 들어가 공무원 사회를 뒤흔들기도 했다. 이들은 2-3개월씩 활동을 연장하며 조사를 이어가기도 했다. 실제로는 크지 않은 일에까지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사정의 칼날을 겨누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은 조국의 달 조민씨의 대학 입학 취소까지 발생하면서 조국은 재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발언을 계속해 오고 있다. 거기다가 윤석열 정부 장관 지명자의 청문회에서 정호영 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문제가 조국 판박이라고 날선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복비일까? 아니면 증거가 확실한 범죄 행위일까? 일말의 의혹이 있다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도일까? 심각한 수준일까?
복비와 복비가 아닌 것의 가름은 분명하다. 첫째는 그 죄가 드러난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으 문제이다. 둘째는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 의사에 의하여 행한 것이냐에 따라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현대 법치국가에서는 3심제를 적용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죄가 있다고 기소된 몇 명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죄가 억울하면 대법원까지 가면 되고 정작 억울하면 재심을 청구하면 된다. 그런데도 복비 논란은 늘 있다. 정치적 행위의 본말은 늘 권력 다툼이란 것이 중심에 있기 때문 아닐까?
새로 들어서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복비 논란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대정동 논란부터 김혜경씨 법인카드 논란 등 온갖 의혹이 난무하였다. 대장동 사건을 포함한 이들 사건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수사를 하여 판결이 나더라도 이재명과 그 지지자들은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라는 논란을 일으킬 것 같다. 그러면 또 혼란이다. 이 땅에 진정한 사법 정의가 수립되는 날이 곧 국민 대통합의 날일 수 있을 것 같다. 윤석열 정부가 그것을 이룬다면 성공한 정부가 될 것 같다.
복비(腹非)
② 태종 이방원, 민무구 민무질에게 죄를 씌워 귀양보내 죽이다.
최근 절찬리에 방영되는 드라마 [이방원]에서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태종은 왕권에 걸림돌을 하나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한다. 특히 자기가 겼었던 골육상쟁의 치열한 삶을 아들에게는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권력을 안전히 장악하자 강력한 왕권 강화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권력을 잡는데 모든 수고를 바쳤던 원경왕후 중전 민씨까지 신하로 만들어버린다. 태종 이방원이 그렇게 한 이유는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한 철저한 계산에 의한 사전 포석이었다. 고려가 부패한 것도, 고려의 정치가 흔들린 것도, 역사 속에서 그가 배운 것도 외척이 발호하면 왕권은 흔들리고 냉철함을 잃어버린다는 나름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방원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부인 원경에 대한 관계 재정립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부부관계도 군신 관계로 재정립해 나갔다. 초기에는 원경왕후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대치했으나 태종 이방원이 원경왕후를 멀리하면서 매일 밤 후궁을 들이고 나아가 새로 중전을 맞이하겠다는 선포까지 하였다. 원경왕후는 온갖 위기에서 외로운 투쟁을 하다가 친정 아버지와 동생들이 처할 위기를 감지하면서 태종 이방원에게 무릎을 꿇고 부부관계를 넘어 군신 관계라는 새로운 관계로 정립된다.
중전 민씨와의 관계 재정립에 성공한 태종 이방원이 생각하기에 문제는 외척인 민씨 세력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세 아들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외삼촌들과 관계가 돈독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민무구와 민무질 두 외삼촌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에 매우 민감한 태종 이방원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경왕후 민씨 역시 숨죽이며 친정 식구들을 단속해 왔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양위파동을 일으켜 민무구와 민무질의 죄를 엮는다. 태종 이방원은 갑자기 어린 세자(뒷날 양녕대군)에게 양위를 선언하고 옥쇄를 세자에게 전한다. 신하들은 어전 앞에 무릎을 꿇고 양위를 철회하라는 상소를 올리지만, 태종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옥쇄를 받고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던 세자는 어머니 민씨로부터 ‘옥쇄를 직접 돌려드려야 외삼촌들을 구할 수 있다’는 간곡한 조언을 듣고 직접 돌려드림으로 양위의 사건은 일단락되지만, 그 ‘양위를 철회하라’는 신하들의 상소에 참여했던 민무구와 민무질의 태도를 문제 삼아 즉시 그들을 옥에 가두고 제주도로 귀양 보낸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세자는 점점 장성해 가고 태종은 나이가 들면서 지쳐갔다. 신하들이 생각하기에 태종이 세자에게 양위를 일찍 하리라고 예견했는지 모른다.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민무구와 민무질은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일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신하들은 어전회의에서 줄곧 제주도에 귀양 가 있는 세자의 외삼촌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사형할 것을 주청한다. 태종은 골머리가 아픈데 ‘외삼촌을 살리라’는 원경왕후의 부탁을 받은 세자는 스스로 어전에 나아가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의 부탁을 저버리고 외삼촌의 처형을 주청한다. 의아했던 태종은 세자에게 거듭 본심이냐고 확인하지만, 세자는 그렇다고 답한다. 세자의 이러한 행위에는 강한 아버지 태종에게 잘 보이기 위함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의 자결을 명한다. 자기 사후에 외삼촌들이 득세할 것을 미리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왕권의 독립적인 권한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처남인 민무구와 민무질의 죄는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민무구와 민무질은 역모죄를 짓지 않았다. 다만 태종의 양위 철회를 의아해하면서 은근히 양위를 바라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은 죄였다.
태종의 위와 같은 여러 사건에서 우린 몇 가지를 엿볼 수 있다. 첫째 죄는 만들면 만들어진다.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죄로 만들어진 죄인 복비(腹非)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죄를 엮으려면 엮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간혹 뇌물 수수에 걸려드는 사람이 있다. 뇌물을 전달하는 사람이 친근하게 접근하여 돈다발을 전달하면서 몰래 사진을 찍어 고발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권력 관계에서만 아니다. 부부관계에서도 배우자의 불륜을 의도적으로 엮어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 둘째, 강력한 권력을 원하는 통치자일수록, 권력과 물욕(物慾)에 빠진 사람일수록 그 권력과 물욕 충족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지나친 권력욕과 지나친 물욕을 가진 사람의 이면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세상 살면서 경계할 대상이다. 권력과 물욕, 성욕 등 모든 욕망은 소유욕에 해당하며 그것이 강한 사람은 결코 타인과 나누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살아가면서 강력한 권력욕과 물욕 등을 가진 사람에게는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 그들은 현재는 친구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적이 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정치인들의 세계에서 그런 경우는 수없이 목격한다. 박범계와 윤석열의 관계에서도 그런 면을 엿볼 수 있다. 둘의 관계는 과거에는 형 아우의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이 서로 대치되자 공격을 가하고 방어하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문재인과 윤석열의 관계에서도 검찰총장으로 임명할 때에는 “우리 검찰총장”이었지만 나중에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동지에서 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일지라도 동업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동업의 결말은 대부분 배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 역시 친구에게 배신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권력과 물욕의 내면에는 인간성보다는 지배욕과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터무니없이 친절한 사람도 경계하여야 한다. ‘모든 사기꾼은 친절하다’는 말처럼 과잉 친절에도 항상 이해관계와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이 초기 조선의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흘린 수많은 피와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나간 것이 역사 속에서 한편으로는 나라의 기강과 기틀을 세우는 과정으로 볼 수 있지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무수히 많음을 헤아려 본다. 현대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꽃피고 있는 사회이다. 합법적인 권력 외에는 그 어떤 권력도 인정되지 않으면 또한 인정되지 말아야 한다. 영화 [재심]에서 나오는 것처럼 선량한 사람에게 죄를 씌우는 일도 없어야 한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을 보면서 권력과 물욕의 속성과 복비(腹非)를 생각해 본다.
복비(腹非)
③ 백록피페(白鹿皮弊)사건 : 장탕이 안이를 모함하여 죽이다.
중국의 한무제(漢武帝) 때 장탕과 안이라는 두 대신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경쟁 관계였다. 그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경쟁은 늘 문제가 되었으나 한무제는 두 사람의 경쟁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하였다. 장탕이란 대신은 어떻게 하면 한무제의 환심을 살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백록피페(白鹿皮弊)’란 돈을 제조하였다. 그 돈을 제조하자 한무제는 교역에 유용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대사농 안이(顔異)는 질투심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는 그 돈이 실제 가치보다 함량이 떨어진다고 한무제에게 고했다. 안이의 보고를 받은 한무제 역시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여 장탕의 ‘백록피페(白鹿皮弊)’ 제조의 일을 불편하게 여겼다. 이에 장탕은 안이에게 앙심을 품고 안이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한낮이었다. 궁궐을 걷고 있던 장탕의 눈에 대신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거기에 안이도 함께 있었다. 장탕은 ‘때는 이때다’하고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대신들은 최근에 내린 황제의 칙서를 두고 잘 되었다는 둥 잘못되었다는 둥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안이는 잘못되었다는 의견에 반론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장탕은 안이가 대신들을 주도하면서 황제의 칙서를 매우 마땅하게 여기는 말을 했다고 황제에게 간하였다.
안이는 즉시 불경죄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온갖 취조를 했지만, 안이는 황제의 칙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되었다는 의견에 반론을 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이의 죄는 다음과 같이 엮어져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안이가 비록 겉으로는 황제의 칙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내심은 함께 대화를 나눈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으며, 비록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속으로 황제의 칙서에 반대한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안이는 황제에 대한 불경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안이의 죽음은 순전히 장탕이 엮어낸 것이다. 강력한 절대 군주였던 한무제는 불경죄에 민감한 군주였으며 군주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중국 한나라 역사상 최대의 번성기를 이룩한 황제였지만 그 권력만큼 억울한 희생자도 많았다. 이 복비(腹非)의 문제에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전제 군주일수록 충성스럽지 못한 신하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절대 군주는 절대 충성을 원하며 절대 부자는 절대 욕망을 꿈꾼다. 권력의 세계에서의 경쟁은 결코 나눌 수 없는 독점적인 경쟁이다. 만약 자기가 권력을 독점하는데 걸림돌이 생기면 누구든 제거하려는 욕망이 발동한다. 그래야 권력적 불안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력욕이 인간성에 가져다준 야만이다.
둘째, 절대 권력 앞에서는 절대 인정을 받으려는 경쟁과 암투가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인정의 욕구 때문이다. 절대 권력에 인정받으면 절대 권력의 낙수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권력에 인정받는 데 방해가 되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제거하려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지 모른다. 그런 과정에서 살인도 불사한다. 어쩌면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난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10. 26사태)도 절대 권력 앞에서의 암투였는지 모른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비극’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이며 형제재 갈등의 원조이며 원죄다. 창세기 4장 1절~16절에 인류 최초의 살인 이야기가 나온다.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 중 형인 카인은 땅을 일구는 농부가 되었고, 동생인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다. 그들은 생산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데 카인은 땅의 소출을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반겼지만, 카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화가 난 카인은 ‘죄를 피하라’는 하나님의 경계를 무시하고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였다. 카인은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도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아벨의 피 울음이 하나님에게 닿고 하나님은 카인에게 더이상 수확을 얻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내리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 한다. 그것은 회개의 과정이었다. 나중에 하나님은 카인의 회개를 받아들이고 표식을 주면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정착하여 살게 하였다.
여기에는 인간의 원죄와 회개 등 여러 가지가 설명될 수 있지만, 카인이 살인 동기는 순전히 인정이 욕구에 의한 질투심과 분노였다. 지나친 인정의 욕구는 경쟁의식을 돋우고, 강한 질투심을 부채질하며, 결국엔 분노로 변질하여 상대를 죽인다는 이야기다. 지금 세상에도 질투가 분노로 변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일은 종종 발생한다. 인정의 욕구는 인간의 성취동기의 하나지만 왜곡되면 질투심과 분노로 변질하여 그 화살을 타인에게 향할 수 있다.
셋째, 동료와의 올바른 관계의 정립이다. 동료와는 경쟁 관계는 될지언정 원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사회에서도 관계가 나쁘면 그 덫에 걸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인간은 어쩌면 자신이 서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야비한 속성을 가진 동물인지 모른다. 그것은 결정적 순간에 발휘될 수 있으며, 처참한 상황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오늘날 정치 세계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나며, 기업뿐 아니라 폭력배들의 세계에서도 치열하다. 따라서 평소에 친구나 동료 아니면 특정한 다른 사람에게도 원한 살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남을 함부로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한무제 때 안이도 장탕의 ‘백록피페(白鹿皮弊)’에 대하여 비난만 하지 않았어도 목숨은 부지했을 것이다.
링컨 대통령의 <위험한 결투>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링컨은 어린 시절부터 장난기가 심하고 이벤트적인 행동을 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친구들을 골탕 먹이기도 했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길거리에 붙여 놓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으며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보여 즐기기도 했다. 그의 그런 습관은 변호사가 된 후에도 버리지 못했다. 평소 알고 있는 제임스 쉴즈가 매우 잘난 척하면서 건방지다고 여긴 링컨은 익명으로 쉴즈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스프링필드 저널에 실었다. 글이 지역 신문에 게재되자 평소 싈즈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좋아했다. 화가 난 쉴즈는 글 작성자를 추적하여 링컨이라는 것을 알았다. 쉴즈는 링컨에게 정식 결투를 신청하였고 링컨 또한 결투를 위해 검투 사사도 받았다. 하지만 결투를 하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미시시피 강변에서 결투가 있기 직전 링컨은 친구에게 간곡하게 중재를 요청하였고 쉴즈가 링컨의 사과를 받아들여 결투는 중단되었다. 링컨의 사과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 사건 이후 링컨은 성경의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7:1)”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고 한다.
장탕의 ‘백록피페(白鹿皮弊) 사건’에 얽힌 이야기는 2000년 전의 중국 한무제(漢武帝) 때의 일이지만 지금도 새겨 볼 만하다. 링컨의 말을 교훈으로 새기며 살자.
복비(腹非)
④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면? : 천하평국(天下平國)의 꿈이 죽음을 부르다.
말이나 글이 왜곡되어 자기에게 치명타를 안기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특히 앙심을 품은 상대는 내가 한 말 한마디나 글귀 하나를 문제 삼아 곤욕을 치르게 하기도 한다. 그런 일은 군주제와 같은 과거의 정치체제에서 특히 많이 발생했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후보들은 상대 후보를 비방하기 위해 상대 후보의 과거 발언이나 글귀의 일부를 이용하여 마치 전체인양 문제 삼음으로 그 사람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러한 말과 글귀로 인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 명소인 남이섬은 남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사연이 담긴 슬픈 곳이다. 남이섬을 관광을 위해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 입구에 남이 장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묘 앞에 씌어있는 “죄는 지은 것이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라는 글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오늘날에도 범죄의 수사와 자백 사이에 깃든 수많은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 글귀는 죄의 처벌에 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남이 장군의 애국충정 넘치는 대장부의 기개가 담긴 시의 한 구절이 훗날 자신을 죽음으로 엮는 덫이 될 줄이야. 남이 장군은 20대에 천하평국(天下平國)의 애국충정을 안고 있었으나, 간신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고 그의 원혼은 “한”이 되어 남이섬에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 남이(1441~1468) -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서 없애고/두만강의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 버리겠다.” 장수는 칼을 벼리고 말을 달려 종횡무진 전장을 누빌 때 그 기상이 크게 드러난다. 야인들이 북방을 괴롭히고 그것을 평정한 남이 장군의 기개가 넘친다. “남자로 태어나 나이 이십에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야망을 드러냈다. 이 대목은 천하를 호령하는 자가 되겠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이 정제되지 않은 야망의 표현이 자신을 죽음으로 옭아매게 될 줄이야.
남이의 일대기를 보면, 지나친 기개와 남자다운 호연지기, 직설적인 화법과 장수의 순진함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으로 판단된다. 남이 장군은 마음에 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표현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타인의 주시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다음은 방기환 '소설 남이 장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남이도 절규하고 싶은 강렬한 감동의 소용돌이를 간신히 잠재우고 있었다. 북으로는 만주벌판을 우러르고 남으로는 한반도를 굽어보는 거대한 이 산악은 지난날 우리 국토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이는 몸을 날려 호숫가 벼랑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소리 높이 읊조렸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중략-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야인들은 자기네들의 절규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인지 누구 하나 남이의 목소리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늘진 곳에 몸을 죽긴 채 남이의 시구를 곱씹는 자가 있었다. 유자광이었다. 유자광은 남이가 서 있는 벼랑 위에서 십여 보 아래 떨어진 바위 뒤에 숨어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이라?”
또 곱씹다가 그만 재채기를 터뜨렸다. 유자광은 재빨리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지만 늦었다.
- 방기환 '소설 남이 장군' 도서출판 다솔, 1993. 30-31쪽 -
남이와 유자광의 기구한 인연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소설에 의하면,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야인들의 동정을 살피러 북방으로 떠났다. 그리고 한명회와 신숙주의 추천으로 유자광이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유자광은 떠날 때부터 한명회와 신숙주의 사주를 받았다. 남이는 북방의 사정을 살피고 북방안정을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유자광에겐 남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다른 임무가 있었다. 그것은 세조가 아니라 한명회가 부여한 임무였다.
남이는 북방에 도착하여 이시애를 만나 이시애의 북방 홀대에 대한 불만과 북방은 북방의 사정을 잘 아는 북방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한다. 돌아와 세조에게 보고할 때 남이는 그런 내용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그 자리에는 한명회와 신숙주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유자광은 한명회와 신숙주가 이미 신숙주의 아들 신민을 함길도 관찰사로 내정해 놓은 사실을 알고 겉으로 드러난 야인들의 모습보다는 그 이면을 살펴야 한다면서 이시애 등을 경계해야 한다고 사실과 다르게 보고하였다. 그후 북방인을 홀대하는 인사 정책이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불만을 틀어놓은 이시애를 반란 세력으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남이를 엮고자 했으나 세조는 남이를 두둔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여기서 남이와 유자광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자. 남이(1441, 세종23년~1468 예종 즉위년)는 본관이 의령으로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세조의 고모)를 할머니로 두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죽어 할아버지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남이를 사랑으로 키웠다. 그런 가계의 덕으로 남이는 문관으로 진출하는데도 모자랄 것이 없었지만, 무예에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강해 17세에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런 남이를 세조도 매우 아꼈다.
유자광(?~1512 중종 7년)은 조선의 유력한 가문인 유두명의 손자였다. 아버지 유구는 1439년(세종 21년) 경주부윤을 지냈다. 그는 유구와 그 집안 노비인 어머니 나주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이었다. 유구는 경주부윤을 할 때 백성을 함부로 때려죽여 파직당했다. 그러나 집안은 넉넉했으며 그에겐 도승지, 호조 참판, 대사헌 등 승승장구하는 벼슬을 한 적자인 형 유자환이 있었으나, 갑자기 병사하여 집안의 살림이 거의 유자광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그는 어릴 때 서얼이란 신분에 울분을 품고 방황했으나 출세를 위해 사서삼경 등 독서에 매진했다. 그의 모든 배움과 독서는 뒷날 출세를 위한 권모술수에 이용되었다. 그는 조선 역사상 임사홍, 김자점 등과 함께 최고의 간신으로 기록된다.
이시애(?~1467 세조13년)의 난 때 남이는 구성군 이준이 이끄는 4도 병마도총사 휘하의 대장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전쟁 중에 장군이 되었다. 그때 나이 27세였다. 남이는 이때부터 명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친다. 그 후 남이는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정4품 행호군(行護軍)에 임명되었고, 뒷날 적개 1등 공신과 의산군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공조판서를 거쳐 1468년에는 오위도총관을 겸임하며 그의 나이 28세에 병조판서에 이른다. 그러나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의 승승장구와 신진 세력의 득세를 경계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이간과 모략으로 남이는 강순, 문효량, 최원, 조영달 등과 함께 역모의 죄를 쓰고 국문을 당한다.
남이와 유자광은 기구한 운명 탓인지 전장에도 함께 나가고 관직 생활도 함께 했지만, 유자광은 늘 남이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유자광은 출세를 위해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붙어 모함과 특유한 언변으로 세조의 큰 환심까지 샀다. 유자광은 남이를 무너뜨리는 일이 쉽지 않자 온갖 추잡한 행위를 다하였다. 방기환의 소설 속에 묘사된 유자광의 남이 모함 작전을 보면, 유자광은 아이 가지기를 간구하는 남이의 소실인 이씨를 그의 애첩 기생 산홍을 승려로 변장 이용하여 암자로 불러 내여 겁탈하고 임신을 하게 한다. 남이의 소실 이씨가 유자광의 말을 잘 듣지 않자 산홍을 이용하여 광릉 숲으로 다시 불러내어 성폭력을 가하고 그것을 미끼로 첩자를 이씨의 몸종으로 심어 남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낸다. 그러한 일련의 간계가 세조 때에는 효험이 없었지만,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은 신구 세력의 갈등 속에서 구세력인 한명회와 신숙주의 편에 서서 신진 세력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남이 등을 철저하게 모함하였다.
예종 즉위 원년, 한명회 신숙주 등 원상(院相) 세력에 의해 구성군, 강순 등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등장한 신진 세력이 제거될 때 형조판서 강희맹이 지중추부사 한계희에게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한 것을 한계희가 예종에게 아뢰어 남이는 병조판서에서 해직되고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강등된다. 이로써 남이는 불만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그후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던 중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이를 보고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이 역모를 도모했다고 모함했다. 이때 유자광은 남이가 백두산에서 읊은 시의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이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리오”의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을 男兒二十未得國(남아이십미득국)으로 조작하여 아룀으로써 남이는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남이는 국문의 과정에서 처음에는 죄가 없음을 항변하였으나 모진 고문을 못 이겨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역모에 가담했음을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남이는 일찍부터 역모를 마음에 품은 인물로 단정되고 능지처참(凌遲處斬)과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유자광은 모함으로 출세 가도를 달려 공신에 이르기까지 했으나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박원종과 노공필을 모함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까지 일으킨 죄인으로 분류되어 공신록에서 삭제되고 파직되어 유배형에 처해 졌다가 1512년(중종 7년) 6월 73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남이는 1818년(순조 18년)이 되어서야 후손인 남공철의 주청으로 역모의 죄로 죽은 강순 등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때 남이에게 충무공(忠武公)이란 시효가 내려졌다.
조작된 역모의 죄로 능지처참과 멸문지화를 당한 남이의 시신은 누군가 수습하여 지금의 남이섬에 묘를 썼다고 전해 왔기에 남이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래 남이 장군의 무덤은 초라한 돌무덤이었는데 이를 모르고 남이섬의 돌을 집으로 가져가면 그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로 남이섬에는 남이 장군의 원혼이 서린 곳이었다 한다. 그러나 1966년 경춘관광개발공사가 종합 휴양지로 개발할 때 남이 장군의 돌무덤을 손질하여 지금의 남이장군 묘로 가꾼 후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남이 장군의 슬픔과 한을 담은 남이섬은 그 사연은 뒤로하고 연인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대한민국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남이 장군의 억울함 죽음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의 교훈을 얻는다. 첫째는 ‘죄는 지은 것이지 만들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이다. 짓지 않은 죄가 만들어지는 데는 모함과 고문이 함께 한다.
영화 [변호인], [재심] 등이 수많은 관객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 죄를 짓지 않았으나 죄인으로 분류되어 억울하게 고초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 즉 복비(腹誹)에 해당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화성 연쇄 살인 사건에 얽힌 진실 왜곡을 암시한다. 살인자로 복역 중인 이춘재가 화성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자백으로 세상이 술렁거리기도 했다.
세상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수사상의 강압과 조작으로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고초를 겪은 이가 많다. 또 경찰의 수사상의 편의주의와 속단으로 억울하게 죄인으로 취급되어 고초를 당하는 사례도 많다. 수사는 증거에 근거를 두고 철저하게 죄를 가려야 하며, 수사 실적을 위해 강압이나 성급한 단정을 지어서는 더욱 안 된다. 억울한 청춘의 삶과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나 오늘날이나 고문에 의존하는 수사는 늘 억울한 죄인을 만들어 내게 된다. 현대의 범죄 수사에서 고문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날의 국문이 얼마나 가혹했는가? 고문(매질, 인두 지질질 등)을 통해 다리가 부러지고 온몸이 찢기고 불에 타 견디기 어려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수 있었다. 그런 고문 앞에서 강요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끝까지 항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범죄 수사에서 고문과 강압은 절대 사라져야 하며, 철저한 증거에 의한 과학수사에 의존하여야 한다.
둘째, 사회생활에서나 정치 생활에서 말 한마디 글귀 하나에도 주의를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악심(惡心)을 품은 사람은 그것을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에다. 그러나 앞으로도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이란 문구가 男兒二十未得國(남아이십미득국)으로 조작되는 것과 같은 사례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정치인들의 흑색선전이나 모함에 국민이 속아 넘어가고 상대 후보가 곤욕을 치르게 하는 것도 일종의 복비이다. 정치인들의 흑색선전이나 모함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국민의 지혜로움이 있어야 민주주의와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죄가 만들어지지 않고 지은 죄는 제대로 규명하여 단죄하는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꿈꾸어 본다. 남이 장군의 시와 억울한 죽음을 생각하며 앞으로는 이 세상에 억울한 원혼이 나타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 腹(배 복)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复(복)은 아래 위가 같고 가운데가 불룩한 모양으로, 月(월)은 몸에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腹자는 오장육부 중 하나인 '배'를 뜻하는 글자이다. 腹자는 ⺼(육달 월)자와 复(돌아올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신체기관을 뜻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자가 의미요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复자는 성(城) 밖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돌아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腹자는 이렇게 '순환'의 의미가 있는 复자에 ⺼자를 결합한 것으로 사람의 '배'를 뜻하고 있다. 그래서 腹(복)은 ①배(오장육부의 하나) ②마음, 속마음 ③가운데, 중심 부분 ④앞, 전면(前面) ⑤품에 안다 ⑥껴안다 ⑦두텁다, 두껍다 ⑧받아들이다, 수용하다 ⑨아이를 배다, 임신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배 두(肚),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등 배(背), 가슴 흉(胸)이다. 용례로는 배를 앓는 병을 복통(腹痛),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계획을 복안(腹案), 배. 물건의 머리 부분과 꼬리 부분 사이에 있는 가운데 부분을 복부(腹部), 내장에서 새어 나오는 액체가 뱃속에 괴는 병을 복수(腹水), 배와 등이나 앞과 뒤를 복배(腹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깊은 속마음을 복심(腹心), 뱃속의 아이를 복아(腹兒), 가슴과 배로 썩 긴하여 없어서는 안될 사물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음식을 먹지 아니하여 고픈 배를 공복(空腹), 배가 잔뜩 부름을 만복(滿腹), 먹고살기 위하여 음식물을 섭취하는 입과 배를 구복(口腹), 수술을 하려고 배를 쨈을 개복(開腹), 배를 갈라 자살함을 할복(割腹), 한 어머니가 낳은 동기를 동복(同腹), 아주 우스워서 배를 안음을 포복(抱腹), 의식에 입는 옷을 의복(儀腹), 배가 남산만 하다는 말을 복고여산(腹高如山), 마음이 맞는 극진한 친구를 이르는 말을 복심지우(腹心之友), 배와 등에 난 털이라는 뜻으로 있으나 없으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복배지모(腹背之毛), 나라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이르는 말을 복리지면(腹裏地面), 앞뒤로 적을 만난다는 말을 복배수적(腹背受敵), 입으로는 달콤함을 말하나 뱃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친절하나 마음속은 음흉하다는 말을 구밀복검(口蜜腹劍),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 마음을 먹는다는 말을 면종복배(面從腹背), 배를 두드리고 흙덩이를 친다는 뜻으로 배불리 먹고 흙덩이를 치는 놀이를 한다 즉 매우 살기 좋은 시절을 이르는 말을 고복격양(鼓腹擊壤), 배를 안고 넘어진다는 뜻으로 몹시 우스워서 배를 안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웃음을 이르는 말을 포복절도(抱腹絶倒) 등에 쓰인다.
▶️ 誹(헐뜯을 비)는 형성문자로 诽(비)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非(비)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誹(비)는 ①헐뜯다 ②비방하다(誹謗--) ③흉을 보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헐뜯을 방(謗), 참소할 참(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기릴 예(譽)이다. 용례로는 남을 헐뜯어 말함을 비방(誹謗), 남을 해치려고 헐뜯음을 비저(誹詆), 남을 비웃는 웃음을 비소(誹笑),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남의 나쁜 일이나 추행 등을 드러내어 명예를 손상함 또는 헐뜯어 훼방함을 비훼(誹毁), 비방하면서 반박함을 비박(誹駁), 말없이 마음속으로 나무람을 복비(腹誹), 원망하고 비방함을 원비(怨誹), 남의 명예를 헐뜯어 훼방한 죄를 비훼죄(誹毁罪), 비방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비방자(誹謗者), 헐뜯는 나무라는 뜻으로 백성이 임금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소원을 고하는 나무 기둥을 일컫는 말을 비방지목(誹謗之木)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