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왜 프리미어리그를 떠나 대한민국 K리그에 왔는지 궁금해했지만, 저는 모험과 새로운 도전을 원했습니다.
FC 서울과 계약할 때 1년이 아닌 2년을 계약한 이유는 팀에 우승 트로피를 가져다주고 유산을 남기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간절합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첫걸음은 나쁘지 않습니다.
지난 일요일 광주전에서 한 골을 넣었고 5경기를 남겨두고 우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부상으로 시작에 차질을 빚었던 제가 제 컨디션을 되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1년 전만 해도 저는 매우 다른 곳에 있었고 제가 이 칼럼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축구 선수 뒤에는 대중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기에 제 이야기를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고 개인적인 갈등을 겪는 다른 선수들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었던 노팅엄 포레스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클럽과 서포터를 좋아했지만, 2022년 승격 후 합류했을 때는 출장 보너스가 높은 1년 계약이었습니다.
결국, 포레스트는 리그의 수익성 및 지속 가능성 규칙에 대한 우려로 시즌이 거듭될수록 지출을 제한해야 했고 높은 보너스 때문에 특정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거의 시즌 내내 무릎과 아킬레스에 심한 건염을 앓았습니다. 때로는 통증을 느끼며 경기에 나섰고, 때로는 너무 아파서 아예 경기에 나서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부상 문제는 제 경기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상대 선수를 제치고 질주하거나 공간으로 돌진했다가 멈추고 방향을 전환할 때 감속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일한 치료법은 휴식뿐이었는데, 제가 계약이 만료된 여름에 할머니가 병에 걸리셨습니다. 할머니는 파멜라 린가드라는 놀라운 분이셨고, 어린 시절 오랜 기간 어머니가 우울증과 싸우는 동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그분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영국 챔피언 파워리프터로, 제가 어렸을 때 인조 잔디 경기장으로 데려가 축구의 기본을 가르쳐 주셨고 유소년 경기에 고속도로를 따라 운전해 주셨던 분입니다.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항상 터치라인에 계셨습니다. 한 번 금지된 적도 있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2세 이하 팀의 스토크 원정 경기였는데 우리는 부진했습니다. 그는 경기장에 와서 우리 아이들에게 맨유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죠!
할머니는 더 차분하고 바위에 가까웠습니다. 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셨습니다. 한번은 맨유가 뉴캐슬과 FA컵 결승전을 치르는 날이라 저를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 태워줬습니다. 우리는 경기표를 살 돈이 없었지만, 웸블리 경기장 밖에 서서 팬들과 어울렸습니다.
할머니는 워링턴의 병원에서 메스 관리와 관련된 일을 하며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신용카드에 집착했습니다.
140파운드짜리 멋진 축구화, 나이키 머큐리얼 베이퍼를 사주셨습니다. 저는 “저게 뭐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카드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마법의 무제한 토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난여름 동안 할머니는 정말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그녀는 병원을 들락날락했고, 저는 열심히 훈련하고 클럽과 계약하는 것이 그리웠지만, 팀이 없는 상황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 같았습니다. 지금 당장 팀에 합류할 수 없으니, 집에 가서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요.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11월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는 정말 힘들어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우울증과 어지럼증에 시달리셨고 입원까지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도 보살핌이 필요했고 장례식도 치러야 했고 스피치도 해야 했죠.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으며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동안 저를 위해 축구를 쉬게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복귀를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두바이로 가서 'coach Nick'이라는 체육관 직원과 축구 트레이너 Zain과 함께 개인 훈련 캠프를 가졌습니다. 엄격했죠. 두 번의 세션, 사교 활동 금지, 술 한 방울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축구, 축구만 했습니다. 다시 공에 익숙해지고 몸을 단련하는 거죠.
다음 클럽을 찾을 때 제가 사랑받고 인정받는 곳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맨체스터로 돌아온 후 FC 서울은 제가 훈련하고 5인제 경기에서 뛰는 것을 보기 위해 주요 인물 두 명을 그곳까지 보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단순히 다른 도전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문화가 저를 사로잡았죠. FC 서울은 K리그에서 큰 클럽 중 하나고 경기장도 환상적이어서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3월에 시즌이 시작되었고 첫 홈경기 관중은 5만 2천 명으로 대한민국 구단 역사상 최다 관중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두 경기 후 반월상 연골을 다쳐 수술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5월까지 제대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21경기에서 5골 2도움을 기록하며 기여를 하게 되어 기쁘고 다음 시즌에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 생활은 환상적입니다.
저는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멋진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전망이 중요해요.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현지 음식 (물론 김치)도 먹어보고 가장 중요한 발견을 훌륭한 이발사였습니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Sunny는 영국에서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딸 Hope도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저희는 매일 영상 통화해요.
팬들, 선수들, 스태프들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라커룸? 영국과는 다른 분위기지만, 마음에 들어요. 어린 선수들이 고참 선수들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너무 좋습니다. 저는 몇몇 젊은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며 훈련 후 체육관이나 잔디밭에서 추가 훈련하는 등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어렸을 때 웨인 루니가 저와 함께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저의 첫 챔피언스리그 경기 날씨가 영하 5도였는데 장갑을 끼려고 했는데, 웨인이 말했죠. “우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잖아.” 웨인이 제게 경고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50경기 이상 뛸 때까지는 새 차를 사지 마!”라고 경고했었죠.
이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개방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몇 년 전 어머니의 우울증과 저의 정신 건강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많은 사람, 특히 축구 선수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꿈의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특정 상황을 겪고 있는지 놀라실 겁니다.
저는 제이든 산초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고 그가 맨유에서 힘든 시기를 겪을 때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또 다른 제 아들은 폴 포그바입니다. 16살에 맨유 아카데미에 입학한 첫날부터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폴을 사랑해요. 많은 사람이 그를 평가하고 싶어 하지만 저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요. “세상에, 당신은 그를 사람으로 잘 모르잖아.”
실제로 폴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는 가장 겸손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축구를 죽도록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겁니다. 그는 개인 트레이너, 물리치료사, 셰프 등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저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일부가 SNS를 통해 춤추거나 즐기는 모습을 보고 인상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자신을 표현하고 팔로워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고 좋은 에너지와 좋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는데 그게 뭐가 문제일까요?
우승은 어렵겠지만, 한 번 도전해 볼 것이고 한 가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제가 대한민국에 온 이유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서라는 겁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저는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전 올인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왠만한 축구기자나 칼럼니스트 글 보다 더 흡입력있게 봤네요.. 번역하신분이 대단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감탄만 나오네요 필력이..
글 잘쓰네
루니가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