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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종 헌팅 아니야?”
유진은 의심스러운 듯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에이~..…아 진짜 그런가? 그때 내가 좀 심하게 꾸미긴 했어..”
귀 얇은 유아는 그대로 홀라당 넘어가버렸다.
“자화자찬이 자연스럽다? 나 참.”
진은 턱을 괴고 씨익 미소 지었다.
“일단 확인하려면 연락 해보는 게 최고겠지? 음, 뭐라고 보내지? 그냥 심플하게 저기요라고 보낼까?”
“보내지마. 미친놈이라니까, 그냥. 신경 꺼도 될 거야.”
“근데 나 이미 저기요라고 문자 보냈는데…”
“뭐? 아 진짜 한유아 완전 못 말려. 문자를 보내면 어떡해! 그 사람한테도 니 번호 알려주는 거잖아 그럼! 이 바보야!”
“어? 헐, 맞다! 너무 문자를 안 써서 까먹었었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나 진짜 미쳤나봐, 카톡할걸!!!”
“웬 문자야, 문자는! 지금이 어떤 시댄데 문자야!”
유진과 유아가 흥분해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 사이, ‘저기요’의 답장이 왔다.
“딩동 딩동”
“꺄악!”
“악!”
문자 알림 음이 울림과 동시에 유아가 소리를 지르고, 유진도 덩달아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한 순간, 그녀들에게 카페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아나…흔유으 느뜨므 스름드르 드 우르브즈느!(한유아 너 때문에 사람들이 다 우리 보잖아!)
죄송합니다. 아하하, 죄송합… 빨리 사과 안하냐. 그 망할 핸드폰 잡고 뭐하고 있는 건데.”
유진은 어금니를 물고 사과하라며 유아를 핀잔줬지만, 유아는 핸드폰 문자를 봄과 동시에 돌부처가 되어있었다.
문자에는,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ㅇㅇ빌딩 7층 이사 유상연. 내일 오후 4시까지.’ 라고 쓰여 있다.
유아는 이 문자를 보고 이게 뭐지? 부터 시작해서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걸까 까지,
진의 말을 빌려 한마디로 버라이어티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었다.
“엥? 뭐야 문자 내용이 왜이래? 자기가 뭔데 명령조에, ㅇㅇ빌딩 7층 디자인실은 또 뭐야?
지가 오는 것도 아니고 너한테 오라가라인거야 지금?”
“이거 뭐야…?무슨 뜻이야? 진짜 여기로 오란 소리야? 디자인실이라는 거 보니까 진짜 디자이너 맞나봐..
헐..이게 바로 멘붕…”
유아는 정말 멘탈붕괴상태이고, 유진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뭔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연신 믿기지 않아하며 ‘대박’만 연신 외쳐대고 있었다.
“넌 왜…?”
초점이 나간 눈으로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야, 지금 검색해봤는데 유상연 이 사람 진짜 디자이너야.
우와, 나도 멘탈붕괴다. 심지어 잘나가기까지 해. 명품회사랑 콜라보한 사람이야.
이런 사람이 왜? 왜 길거리 캐스팅을 하는 거지?”
“몰라…뭐야…왜이래 이사람 나한테…날 왜…”
유아는 왜? 라는 질문만 머릿속에 박혀서 아무런 정보처리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진은 유아를 보며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분명 충격적인 일이긴 하지만,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이기도 하고,
어차피 졸업을 앞둔 마당에 유아는 변변한 취업자리 하나 얻어놓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이 잘만 풀린다면 그녀는 모델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보였다.
학창시절부터 친구였던 둘은 유아가 한 때 모델을 꿈꿀 때, 유진이 포토그래퍼 노릇을 해주곤 했었다.
그 당시 유아는 카메라 앞이 어색하고, 특히나 친한 친구 앞에서 얼굴 싹 변하고
모델포즈를 취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어색하게 웃거나, 어색하게 포즈를 하곤 했다.
진이 이미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진은 카메라에 대해서나, 모델에 대해서나 아무것도 모르지만
유아가 자연스럽게 웃을 때 찍힌 사진들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유진은 피식 웃으며 유아에게 말했다.
“모델하라는거 진짠가 봐. 모델이 캐스팅되러 뛰어다니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디자이너가 직접 픽업하는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니가 첫 케이스고 뭐 이런 거 아니야?
멘탈 붕괴 그만 겪고, 내일 진짜 가보는데 어때? 혹시 알아? 니 인생 스펙터클 대 서사시가 써지게 될지.”
“스펙터클만 했으면 좋겠다, 스펙터클만. 공포, 유혈낭자, 에로, SF 뭐 이런 거 다 빼고 딱 스펙터클 대 서사시만.”
“아하하하, 야 거기에 에로가 왜 들어가냐? 아하하하하.”
“왜, 가끔 뉴스에 연예인 시켜준대서 갔더니 갑자기 옷 벗으라 그러고 그런 놈들 있잖아.”
“내가 검색해본 결과, 믿을만한 사람같애. 뉴스도 막 몇 페이지씩 나오고 그러더라.”
“그럼 다행이구..으, 제발!”
애초에 진을 만난 건 어제 일어났던 일을 애기하려고 만난 것이기 때문에,
일찍 헤어지고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는 핀으로 꽂아버리고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정리하기 위해 소파에 앉아 곱씹어본다.
‘그니까, 나한테 온 사람이 디자이너 유상연이라는 사람이고, 28살인가 29살인가 그렇고,
키는 181에 엄청 유명하시고. 무슨 디자이너지? 가방 디자인하는 사람인가?
콜라보레이션한게 가방이라 가방밖에 못 봤네. 뭐 아무튼 그런 대단한 분이 날 찍으셨단 건데.
엄청 뿌듯하기도 한데 엄청 부담되네. 아, 그냥 모델 안하겠다고 말하러 가야겠다.’
“키 때문에 모델 하라고 하는가보다~ 일단 좀 씻자~”
상연의 의도는 전혀 알지 못하고 순전히 키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유아는 단정 지었다.
고등학교 때 두어 번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아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여간해서는 울리지 않을 문자 알림 음이 울렸다.
‘절대 늦지 말 것.’
***
현재 시각, 오후 3시 36분.
상연은 디자인이 마음대로 안 되자 일을 바꿔 후배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초안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보고 고쳐야 할 점이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해 칭찬해 주는 등 초안에 자신의 생각을 적어 돌려주고,
고쳐야 할 점을 생각해 보게 한 뒤에 다시 수정한 디자인을 받는다.
이 일의 아이디어를 처음 상부에 보고했을 때, 상부에서는 환영했지만
자신에게 디자인을 체크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반발심으로 디자인을 제출하지 않거나,
냈더라도 고칠 점을 적어줬지만 무시하고 초안 그대로 제작하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하지만 상연이 포기하지 않고 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해 나가고,
자신에게 초안을 냈던 디자이너 중 디자인이 좋은 것은 상연이 컬렉션을 낼 때 선보이는 등의 특혜를 주자
그런 말들은 쏙 들어갔다. 실제로 무명 디자이너들이 상연의 컬렉션에서 선보인 옷이 바이어 눈에 띄어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내건 디자이너가 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언젠간 자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기대감에 내는 선배 디자이너들도 가끔씩 있었다.
“문자.”
상연은 후배가 낸 디자인에 고칠 점을 적다가 핸드폰의 알림음 소리를 듣고 일시정지를 누른 것처럼 멈췄다.
요즘에 문자로 연락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냐마는, 이건 어제 그녀가 보낸 것이라는 직감이 그를 관통했다.
그 상태에서 천천히 눈만 돌려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자 김이 팍 새버렸다.
자기가 지금까지 애태우며 기다린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문자 같았다.
어제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단 세 글자를 받을 만큼 성의 없이 그녀를 대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뭔가 더 보낼 말이 있겠지 싶어 2,3분 정도 기다렸지만 이게 다였다.
상연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한숨 쉬듯 말했다.
“뭐야, 이 여자. 저기요, 딱 세 글자만 보낸 거야?”
‘원래 여자들이 처음 문자할 때 이러나?’
그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저기요’라니.
말을 걸만한 물꼬라도 열어 줘야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갈 것 아닌가? 이건 깔끔 그 자체였다.
‘대체 뭐라고 보내야 돼? 인사를 먼저 해? 아님 연락해줘서 고맙다고 해?…후자 쪽은 너무 찌질해보이는군.’
상연은 이리저리 고민하다 직구가 제일이다 싶어 무작정 약속을 잡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곧 후회했다.
“아…”
용건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내일 와달라거나, 내일 시간이 있냐는 말은 싹둑 자른 채
너무나도 공적으로 ‘ㅇㅇ빌딩 7층 이사 유상연. 내일 오후 4시까지.’ 라고 보냈다.
마치 그녀가 저기요라고 세 글자만 보내서 똑같이 되갚아주는 것 같지 않은가.
상연은 그녀가 유치하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다시 보내봐…?”
다시 보낼까 생각도 들었지만 똑같은 내용을 다르게 보내면 모양새가 웃길 것 같아 참았다.
그는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였다. 어차피 어떻게 보내던 그녀는 내일 이 곳에 올 것이다.
안 오더라도 자신이 그녀를 오게 만들 것이다.
어차피 의도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번호도 있으니 연락할 방법은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상연은 평정을 되찾았고 자신감도 다시금 생겼다.
그녀가 이곳을 찾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진 상연은 보던 초안들을 치우고
다시 디자인을 하기 시작했다. 이 기분이라면 오늘 상부에 브리핑 할 디자인들을 모두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디자인들을 모두 완성했고, 브리핑은 3일 뒤였다.
그동안 했던 디자인들을 가지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할 요량으로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사무실 밖에 있는 직원들 모두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디자인 초안 체크와 자신의 디자인 완성 등 일에 집중한 터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인식하지 못한 상연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당연히 퇴근할 시간이었지만 다들 퇴근할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던 것을 보니 좋았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눈빛이 매서워졌고, 분명 이들 중에는 내일까지 나에게 제출할 것이 있을 텐데,
태평히 퇴근준비를 하다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상연은 들쭉날쭉한 기분에 약간의 조울증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개의치 않았다.
말없이 직원들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뗐다.
“…김미정씨, 내일까지 저한테 내야 할 보고서 있지 않았나요?
아, 이태강씨. 저한테 수정한 디자인 안주셨죠? 그리고 윤미희씨. 당신은…”
한명 한명 직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왜 당신이 지금 퇴근할 수 없는지 이유를 꼬집어준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보려던 직원들은 한명씩 눈치를 보며 제자리에 앉는다.
“…이 디자인들 브리핑 할 수 있게 프레젠테이션 작업해줄래요? 고마워요.”
하는 수 없이 다시 일을 해야 하는 직원들은 그들끼리 소곤대며 잡담을 했다.
“요즘에 이사님 왜 저러셔? 예전보다 신경이 좀 날카로우신 것 같은데.”
“초창기에는 일찍 퇴근하게 하더니 요즘 부쩍 우릴 굴리네…”
들으려고 의도하진 않았지만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거슬려 집중하고 들어보니, 주제가 상연이다.
그는 들리지 않는 척, 화장실로 가는 척 하며 복도로 나와 어느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자신도 신경이 예민해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서울컬렉션이 얼마 안 남았잖아.
거기다 우리 회사가 직접 협찬하는 행산데 날카로우실 만하지. 이제 한 6개월 정도 남았으려나?”
“아, 나도 이사님 눈에 띄어서 내가한 디자인 모델한테 입히고 싶다…”
듣고 보니 요즘 심상찮은 기분이 일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가 스트레스 받는 부분은 따로 있었으니,
그가 사랑하는 일 때문에 벌써 2년가량을 이성, 정말 성이 다른 사람들을 보기만 했지
연애는 시도해본적도 없거니와 쌓인 욕구를 풀만한 기회를 가지지도 않았다.
‘몸에서 사리나오겠군. 이성이 본능을 누르는 게 가능한 일이었네.’
그런데 왜 일 얘기가 나왔을 때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남들은 일과 욕구를 잘 조절하고,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것 같은데 자신은 일에만 몰두 할 뿐.
욕구는 그저 귀찮은 혹 같은 존재였다.
그는 패션계에 종사하는 사람 치고 정말 고지식하고 꽉 막혔다고 할 만큼
그런 쪽에 쓰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연애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누군가를 좋아해서 사귀었다기보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해서 사귀었던 기억밖엔 없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일을 시켜놓고 자신만 빠져나갈 수는 없기에
사무실로 돌아와 남아있는 초안의 평가를 마친 후, 그는 퇴근했다.
부하직원들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뒤통수로 받아주면서.
첫댓글 잼있어요
ㅠㅠ 0일때 부터 댓글 달아주시고 감사해요ㅠㅠ이런 사랑스러우신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