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小珍 박 기 옥
식사 도중 물통을 집다가 그릇째 엎지르고 말았다. 물은 식탁 위에 통째로 왈칵 쏟아졌다. 쏟아진 물은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싱크대와 냉장고 밑으로 빠르게 달아난다. 기다림도 없고 망설임도 없다. 그릇 안에 있을 때는 그토록 조신하더니 나갈 때는 추호의 미련도 없다.
나는 혼이 빠져 떠난 물을 바라본다. 물의 의지가 당혹스럽다. 담길 때는 몸을 맡긴 채 조용히 흘러들지 않았던가. 지금은 저리도 빨리 떠나고 있다. 나는 물을 따를 수도 잡을 수도 없다. 물의 배신인가.
옛날 한 선비의 물에 얽힌 얘기가 생각난다. 고생 끝에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금의환향을 한다. 선비를 배신한 여인이 찾아와 눈물로 용서를 빌자 선비가 물을 한 대접 가지고 오게 한다.
“쏟아 보아라”
여인이 땅바닥에 물을 쏟자.
“담아 보아라”
두 사람의 인연이 엎질러진 물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돌이킬 수 없는 물은 단호하고 허망하다.
걸레를 들고 엎질러진 물을 수습하다가 손에 묻은 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태초에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인간은 생명으로 잉태된 순간부터 양수로 가득 찬 자궁 안에서 길러졌다. 태어나서도 살아있는 동안 내내 물의 다스림을 받아왔다. 우리 몸의 60% 이상이 물로 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물은 예로부터 그 순정함으로 온갖 기원(祈願)의 매개가 되었다. 인간은 무엇이든 간구할 때면 물을 먼저 찾았다. 과거시험 떠난 아들의 성공을 정화수 한 잔 떠 놓고 빌고, 손이 귀한 집안의 자손을 깨끗한 물 한 잔으로 빌었다. 귀신을 쫓을 때도 귀신을 부를 때도 손 타지 않은 새벽의 정갈한 물이 사용되었다.
우리는 물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500년 전 일본은 조선을 치기 위해 어리석게도 물(바다)을 거스르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임금 선조는 일본을 다녀온 사신으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물됨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엉뚱한 의문이 생겼다.
“그래, 바다는 어떻게 생겼던고?”
“많고 많은 물이 끝없이 이어지더이다”
“고이타. 물이 어찌 그리도 많더란 말인고!”
물을 모르는 임금은 전쟁 내내 물을 아는 장군을 옥에 가두었다 풀었다 변덕을 부렸다. 전쟁에서 대패한 전임자의 뒤를 이어 어렵게 12척의 배를 수습한 이순신에게 수군으로 싸우지 말고 육군으로 싸우라고도 했다.
다행히도 장군은 물을 잘 알았다. 울돌목을 활용하여 겨우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배를 퇴각시킨 것도 물의 속성을 이용한 지혜였다. 그러나 어쩌랴. 마지막 해전에서 바다가 장군의 목숨을 거두었을 때에야 임금은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 또 누가 있어 물의 전쟁에 나가 싸우겠는가 하면서.
물의 너그러움은 회룡포가 말해준다. 경북 예천에 있는 회룡포는 물이 마치 비상하는 용처럼 마을을 휘감으며 돌아나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이 남쪽으로 유유히 흐르다가 산을 만나자 둥글게 원을 그리며 왔던 길로 거슬러 흐르는 것이다. 마치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여 잠시 숨이 멎는다. 놀랍다고 할까. 기이하다고 할까. 나의 온몸이 그에 편승해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물은 정작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와 S자로 흐름을 지속한다. 물길 속에 자리한 마을 또한 육지 속의 섬이 되어 평화롭기만 하다.
그 누가 물의 덧없음을 말하는가. 물의 속성은 차라리 모양의 없음이 아니던가. 물은 결코 자신을 내세워 주장하는 일이 없다. 언제 어디서나 그릇의 모양대로 조용히 담겨 있다가 흐를 때도 자신을 감추고 길의 뜻을 따른다.
또한 물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흙이 있으면 품고 가고 작은 돌은 지나간다. 바위가 보이면 넘어가고 산을 만나면 돌아나간다. 바람이 불면 실려 가고 비가 오면 함께 간다. 높거나 낮거나 작거나 크거나 물의 흐름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그 어떤 것도 시간을 대신할 수 없듯이 물 또한 오직 물밖에 대신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 물 한 줌이 오늘 아침 나를 떠났다.
첫댓글 엎질러진 물, 엎질러진 물로 하여 내 맘 다시 추스른 적 한 두 번이 아니었건만, 엎지르곤 다시 추스르고, 또 그렇게 하는 내 모습 다시 보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내내 강녕하시기를 바랍니다.
엎질러진 물, 돌아오지 않는 물,
그 물 한 줌이 오늘 아침 저를 떠났습니다.
물은 물밖에 대신할 수 없는데 ~.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