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철 정진 잘 합시다
해인사에서 한 철을 살게 되었다. 선원 큰방에 방부를 끝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든든하고 새롭다. 그 동안 해제 철을 아무렇게나 지내온 탓에 더욱 그럴 게다. 오늘이 음력으로 사월 초하루, 앞으로 결제날까지 꼭 보름이 남았다.
지금 쉬고 있는 절에서 초파일만 봐주고 떠날 생각이다.
선원 객실에서 만난 스님들 가운데 도반도 여럿 있다. 이제 대중 선원에서 학인 시절에 함께 산 도반들과 또 한 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객실에 모인 스님네를 보면 한 철 함께 지낼 대중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공부가 익은 구참이 많은 것 같다. 이제 첫 철을 지내는 풋내기 수좌로서는 아무래도 구참이 많아야 힘이 적게 들고 공부가 순일하다.
그믐날 저녁이면 객실은 다른 날보다 방부하는 스님들이 더욱 붐벼 방이 비좁을 지경이다.
초하룻날 아침에 어른 스님들께 인사 드리고 이어서 큰방 대중에게 안거를 지낸다는 뜻을 전달하고 나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대중 처소에 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군다나 총림의 선방이나 봉암사 같은 곳은 결제하기 한 달 전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초참들은 한 철 지내기가 쉽지 않다. 해인사에서 살려고 그 동안 몇 차례 객실을 찾았다.
지객 스님의 얼굴을 미리 익혀 두어야 수월하기 때문이다.
방부를 받고 간물장을 내주고 자리를 정해 주는 일까지 지객이 맡는다.
방부하는 날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첫 철을 해인사에서 나기로 원력을 세웠는데 방부를 허락하지 않으면 부득이 다른 처소로 옮겨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객스님이 “총림의 청규를 잘 지켜 한 철 정진을 잘 하도록 합시다” 하는 말과 함께 입방 원서를 내밀면서 빈 칸을 잘 메우라고 일렀다.
어딜 가든 출가 본사와 은사는 반드시 밝혀 적는다. 이것저것 수행이력을 적고 청정 수행할 것을 서약하는 인장을 찍으면 문서 작성은 끝난다. 맨 아랫줄 안거는 아직 빈 칸이다. 하안거를 세 번쯤 지내야 초참 신세를 면하게 된다. 뒷면에는 안거 기간에 지켜야 할 규칙들이 열거되어 있다.
비구로서 정진에 결함이 없는 자.
간식은 차 공양 때만 가능.
정진은 가행정진으로 하며 수면은 네 시간.
날마다 백팔 참회
용맹정진에 불참할 때는 퇴방.
산문을 내려가는 이는 곧바로 퇴방.
예전에는 해인사 선원에 방부하려면 방장 스님 앞에서 능엄신주를 줄줄 외워야 입방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은 훨씬 수월한 편이다.
사실 이 같은 청규는 철저한 수행 정신으로 사는 이라면 아무 것도 아닌 사항이다.
한 철 함께 살 스님들이 큰방에 모였을 때 객실에서 본 스님들 가운데 몇몇은 빠져 있었다.
같이 살지 못하여 아쉽다. 구참 스님들과 무릎을 맞대고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출처 ; 현진 스님 / 삭발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