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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면 도에 이른다
장염은 소걸과 함께 무당산에서 남하하여 호남성을 지나고 있었다. 십이월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장염
이나 소걸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장염은 한서불침의 신체라 그랬고, 소걸은 오행토납법으로 제
온을 적절히 조절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소걸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는 장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과거 진원청 스승이 자신을
볼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직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공부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소걸을 보면
즐거웠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장염을 따라나서게 된 사람은 소걸뿐이다. 이무심은 끝내 장가촌에 남아 폐관 수련
에 들어갔다. 장염이 피하라고 은근히 권유했건만, 이무심은 금거산과 약속한 단오절의 비무를 끝내 떨
쳐 버리지 못했다. 향이는 하후연과 지염도를 데리고 북상했다. 장염이 귀주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하
를 해야 하니 향이는 그 반대를 선택한 셈이다.
장염과 지금까지 동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을 어귀에서 헤어졌다. 이번에는 길일을 따로 잡지 않았지
만, 마치 오 년 전의 그날처럼 장가촌 사람들이 배웅을 했다. 덧 없이 반복되는 그 환송에 장염의 마음
이 저려왔다. 다시 한번 미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자와 남겨지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모두 다
시 만나기를 희망하지만 과연 미래는 희망적인 것일까?
장염이 성큼성큼 걷는 자신의 걸음을 종종걸음으로 따라붙는 소걸에게 물었다.
"춥지는 않으냐?"
이미 십이월에 접어들었으니 완연한 겨울 날씨였다. 걸음을 잠시라도 멈추면 한기가 스며들 지경이니,
여행은 소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정도는 시원한 거죠."
"그래? 너는 아주 춥게 살아온 모양이구나."
소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할 말을 궁리했다.
'내가 춥게 살아왔나?'
지금까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갈 뿐 그날이 추웠는지 더웠느지, 혹은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스승님, 어떻게 살아야 추운 거예요?"
"..........."
장염은 일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라....'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추운 것일까? 단지 혹한의 날씨를 춥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헐
벗고 굶주린 것인가? 혹은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이 살아온 것일까? 소걸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질
문이지만 장염은 괜히 그 물음 앞에 진지해지고 말았다.
"그러게 말이다. 정작 말을 하고 보니 나도 잘 모르겠구나."
"우헤헤헷!"
소걸이 뭐가 좋은지 한번 크게 웃고는 좌우를 살피기 시작했다.
장염은 산다는 것과 춥다는 것에 대해 이러저리 생각하다가 소걸이 주변을 기웃거리자 피식 웃고 말았
다. 어느 틈에 소걸은 자신이 던진 질문 자체를 떨쳐 버리고 있었다. 그것을 무상이라고 한다면, 소걸
이 벌써 다 잊어버린 것을 자신은 아직도 붙들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허어,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더니...'
처음으로 맞은 정식 제자이며, 그 제자와의 첫 여행이었다. 자신도 어지간히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
는데, 며칠 살펴보니 소걸은 더했다. 처음에 장염은 소걸을 장가촌에 남겨두려고 했으나 홀로된 아이를
남겨두기가 안쓰러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물론 그때 까지만 해도 장염은 소걸이라는 아이의 적응력 이
라든가, 정작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에 그렇게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주성으로 가는 도중 장염은 소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야 했다. 우선 소걸은 우
려했던 것만큼 스승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것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고
잃음에 대해 담담했던 것이다.
자신이 마치 가다듬어 만들어진 도기라고 한다면 소설은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것 같았다. 자기를 돌
아보면 스승과의 인연이 있은 후 집착을 버리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소걸에게는 그런 진지한 고민조차 의미가 없다.
정면으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장염은 잡스런 생각을 떨치기 위해 어깨를 폈다. 그리고 습관적으
로 정면의 바람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무얼 좀 먹고 가야겠다."
장염이 멀리 나부끼는 주막의 깃발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침나절 이후로 한 번도 쉴 곳을 찾지 못했으
니, 이 집을 지나친다면 언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될지 몰랐다.
관도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나무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워낙 주막이 작은 터라
손님이 든다 해도 안에서 먹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저 나무 탁자와 의자는 밖에서 먹으라는
의미리라.
가까이 가보니 과연 주막에는 손님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작은 주방과 방 두 칸이
전부였다. 장염은 차갑게 얼어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맞은편에 앉으려던 소걸이 엉덩이가 깨지
겠다며 잠시 호들갑을 떨었다.
얼마 후 주인인지 점원인지 모를 턱수염 가득한 사내가 다가왔다.
"소면과 고기볶음을 조금 부탁합니다."
"술은 필요하지 않수?"
장염이 고개를 가로젓자 사내가 입김을 훅훅 불며 안으로 사라졌다. 웬만하면 손님이 보이지 않으니 방
에서 들라고 해도 좋으련만 사내는 권하지 않았고, 장염도 묻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소걸이 투덜거렸다.
"으으으.... 이렇게 추운데 밖에서 먹어야 하다니... 스승님, 방이라도 하나...."
"이제 한낮인데 묵어갈 것도 아니면서 무슨 방타령이냐? 이 정도 추위로는 너의 엉덩이 살이 터지지 않
으니 염려 말아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걸의 떠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장염이 손을 들어
올려 탁자를 가볍게 내려첬다.
퉁.
탁자 위로 아지랑이가 퍼져 나가는 듯싶더니 주위가 금세 훈훈해졌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얼
어있던 탁자와 의자는 물론 바닥의 흙들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리고 마치 봄이라도 시작된 듯 나른한
기운이 탁자를 중심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스승님, 그런 건 어떻게 배우는 거죠?"
"왜? 너도 하고 싶으냐?"
소걸이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뎍였다. 지금까지 뭔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
기술은 정말 훔쳐서라도 배우고 싶었다. 저런 기술이라면 천하를 떠돌아 다닌다고 해도 얼어 죽지 않을
것이다.
"어렵지 않지. 천지에 가득한 것이 기운인데, 모든 기운은 서로 반대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거든. 예를
들면 찬 것은 더운것에, 그리고 젖은 것은 마른 것에 말이다."
소걸이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장염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마음으로 '찬 기운아, 더운 기운을 데리고 오너라' 라고 말을 하면, 보다시피 이렇게 되는 거
지."
"그렇군요!"
소걸이 탄성을 크게 울렸다. 그렇게 간단한 이치를 지금까지 몰랐다니, 세상의 모든 비렁뱅이가 이 사
실을 알게 된다면 떨며 지낸 세월이 아까워서 어쩔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주지 말아야지.'
귀찮기도 했지만 이 귀한 것을 왜 널리 퍼뜨린단 말인가! 소걸은 장염이 가르쳐 준 주문을 잊지 않기
위해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기술의 오묘함에 비해 주문은 의외로 간단했다.
'단지 '찬 기운아, 더운 기운을 데리고 오너라' 라고 했지.'
장염은 소걸이 뭐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피식 웃고 말았다. 가끔씩 들리는 말은 분명히
'찬 기운아, 더운 기운을 데리고 오너라' 였기 때문이다.
"소걸아,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네가 세상의 기운들과 친해져야 할 것이다."
"아! 당연하죠."
소걸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할 때 사내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그런데 날씨가 갑자기 많이 풀어졌나.... 방보다 밖이 더 따뜻한 거 같으니... 덕분에 드시기에 불편하
지는 않겠수."
사내가 소면과 돼지고기볶음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밖에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있었나 보다. 소걸이 사내의 수염을 보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저씨는 얼굴에 털이 많아 더울지 몰라도, 조금 전까지 우리는 얼굴이 얼어서 턱을 움직이기도 힘들
었다구요. 어차피 장사도 안 돼서 방도 널널할 텐데 찬 데다가 밥상을 차려주시다니, 그렇게 살면 조상
의 은덕을 못 받는다구요."
"허어, 네가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냐."
장염이 소걸을 향해 짧게 말한 뒤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직 아이가 철이 없어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못합니다."
텁석부리 사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젊은 남자는 평범하게 생겼는데, 그가 데리고 다니는 아이는 더욱 평
범하게 생겼다. 말 그대로 일단 지나치면 기억나지도 않을 상판들이다.
'아, 정말 싸가지없는 놈일세. 이걸 그냥 한주먹에 확! 그나저나 이곳에 화기가 넘치는 것을 보니 열화
신주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나 본데...'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데는 냉기가 넘치는데 탁자 부근만 포근할 리가 없다. 전설에나 나오는 열화신주
같은 거라면 그 하나만으로 팔자를 고칠 수가 있다. 사내가 가만히 장여과 소걸을 살펴 보다가 다시 좌
우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의 관도는 이미 인적이 끊겨 차갑고 건조한 바라만 휭휭 오갈 따름이었다.
'쯧쯧!'
장염은 사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강호에 나와 이런 식의 눈빛으 어
디 하루 이틀 보았던가! 그것은 마치 거미가 먹이를 향해 달려들기 직전에 보여주는 차갑게 가라앉은 모
습과 같았다.
소걸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소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앞에 음식이 놓인 이
상 자기의 말로 사내가 화가 났는지, 혹은 다른 생각으로 낯빛을 굳히고 있는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
다.
"후, 후, 후루룩, 후룩."
장염도 텁석부리 사내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인 후 젓가락을 대접에 담았다. 아까부터 소면 냄새를
맡고 공복감이 더 심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참기도 힘들었다. 장염은 속으로 제발 사내가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아줬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장염의 바램과는 달리 대단한 결심을 굳힌 뒤였다.
꽝!
텁석부리 사내가 주먹으로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듣자듣자 하니 아래위가 없는 애새끼로구나. 그러나 어찌 그것이 너만의 잘못이랴! 으뜸은 너를 낳은
부모요, 그 다음은 너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의 죄다! 내가 오늘 장사를 접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 두 놈
을 용서할 수 없다!"
".........."
장염과 소걸이 소면을 입 안 가득 넣은 뒤 우물우물 씹으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텁석부리 사내는 자신
의 말에 더욱 고무된 듯 점점 음성을 높혀 소리쳤다.
"이 개뼉다구들아! 무얼 쳐다보는 게냐! 오늘은 관 어르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으니 살고 싶다면 가
진 것을 다 내놓고 썩 꺼지거라!"
말을 하다 보니 과거 한때 비적질을 할 때 쓰던 말이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어쩌랴! 어차피 보주
를 빼앗으면 멀리 달아날 작정이니 비리비리한 사내가 포두와 함께 다시 찾아온대도 말짱 도루묵일 것
이다. 오늘 보물을 건지면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마음으로 착실하게 살아볼 것이다.
"귓구멍이 막혔는냐!"
관포삼이라는 이름을 가진 텁석부리 사내의 눈이 부릅떠졌다. 얼굴을 부드럽게 하면 모르되 한번 인상
을 구기면 과거의 관록이 그대로 나오는지라 인근에서도 알아줬다. 그런데 지금 인간적으로 지극히 평범
하게 생긴 사내가 우물거리며 눈을 끔뻑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보니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이로구나.'
아무래도 연장을 보지 못해 실감이 나지 않는가 보다 생각한 관포삼은 재빨리 부엌으로 뛰어갔다. 그리
고 눈에 뜨이는 대로 식칼 하나를 부여잡고 다시 마당으로 달려나왔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자리에 멍
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너희가 순진한 것 같아서 특별히 관 어르신께서 목숨만은 보존시켜 주기로 했다. 얌전히 가진 것을 탁
자 위에 올려놓아라!"
꿀꺽.
장염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 안에 가득한 소면을 삼켰다. 정말 이런 식으로 결과가 뻔한 일을 만나면 처
신하기가 쉽지 않다. 두들겨 잡기도 그렇고 바른 생할을 가르치기도 왠지 낯간지럽다. 아무래도 사내가
뭔가 착각하고 저러는 것이지 싶다. 대체 사내는 소걸과 자신의 모습 어디에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일까?
"주인장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말씀이라도 좀 들어 보십시다. 급하게 재물이 필요한 분 같
지는 않으시고, 장사를 잘 하시던 분이 그렇게 돌변하시니 왠지 죄스럽군요."
"........."
과포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젊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이놈아!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는데 왠 잔말이 많으냐! 설마 영화신주가 네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것
은 아니겠지? 모든 것은 보물을 가진 네놈의 잘못이니 피차간에 말로 끝내도록 하자!"
그제야 장염과 소걸은 사내가 갑자기 도적으로 변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아챘다. 사내는 근방만 따뜻해
진 것에 오해를 한 것이 분명하다. 피수주, 피화주, 열화신주, 한음신주 등과 같은 절세의 기물이 있어
물과 불과 냉기와 열기를 다스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어찌 지금의 이 현상이 그런 기물
탓이랴! 장염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오해입니다. 오해."
소걸도 사내가 원하는 것이 열기를 뿜는 보물인 열화신주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소걸은 그런 보물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소걸이 돼지고기몪음을 입 안 가득 집어 넣고 말했다.
"아어이(아저씨), 그어거느 어으어(그런 거는 없어요)."
제 딴에는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고 한 것인데, 관포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말았다.
"이 미친놈들아! 내가 왜 너희들에게 그런 이상한 소리를 들어야 하느냐! 어서 탁자 위에 오려놓지 못
할까!"
꽝!
돼지고기볶음이 담겨 있던 대접 앞에 식칼이 박혀 들어갔다. 칼을 탁자에 박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관포삼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내가 사십 년 가까이 살았지만 너희처럼 미련한 놈들은 처음 본다! 어서 올려놔! 올려놔! 오려놔!"
"아어이(아저씨)....."
"소걸아, 그만두거라. 입 안에 음식을 담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 삼킨 후 천천히 말을 해야지. 지
금 누가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니지 않는냐?"
".........."
장염이 부드럽게 소걸의 말을 끊었다. 소걸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장염을 바라보았지만, 틀린 말이 아
니었으므로 그냥 열심히 씹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관포삼은 어린아이가 우물거리며 말하는 것에 짜증
이 난 상태였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그래도 저 어리놈보다는 낫구나, 그렇다고 해도 열화신주는 관 어르신 앞에 내놓아야 한다."
관포삼이 다시 탁자 위에 박힌 식칼을 뽑아 장염과 소걸의 앞에서 흉흉하게 휘둘렀다.
후익, 휘익, 휙.
장염과 소걸은 가끔가다가 식칼을 힐끔거릴 뿐 먹는 일에 열중했다. 관포삼은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칼
으 휘둘러도 두 사람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차라리 두 사람이 다 먹고 난 뒤에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싶
었다.
꽝!
다시 식칼이 탁자에 박혔다.
"헉헉, 씨벌, 이것은 결코, 헐헉. 힙에 부쳐서, 후우,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
주변이 조용해지자 장염과 소걸은 소면과 돼지고기볶음에 정신을 집중했다. 관포삼은 탁자 주변을 서성
이며 무슨말로 열화신주를 뺏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동안 장염과 소걸은 그릇을 모두 비울 수 있었다.
한동안 젓가락으로 빈 볶음 그릇을 이리저리 건드려 보던 소걸이 말했다.
"아, 잘 먹었다. 아저씨 생긴 건 산 도둑인데 요리는 정말 잘하시네요."
관포삼이 들은 체도 않고 장염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생각해서 먹게 해주었다. 이제는 좋은 시간도 다 갔으니 선택해라. 보물
을 내놓을 테냐, 아니면 모가지를 내놓을 테냐?"
장염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보물이 저희에게 없으니 어쩌죠? 이거 그냥 제가 내공으로 만든 열기
구 일 뿐입니다."
내공이라는 말이 나오자 관포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어디 상대의 말 한마디에 호락호락 넘
어갈 관포삼이던가!
"흥! 내공 좋아하시네! 과거에 관 어르신께서 이십 년 간 강호생활을 했지만, 그런 공력이 있다는 이야
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네놈이 무슨 장천사 같은 신선이라고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스승님, 그냥 가죠."
마침내 참지 못한 소걸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사람에게 길게 설명을 늘어놔야 한
느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오해다. 오해는 푸어줘야 하지 않겠느냐?"
장염이 자리에서 일어나 관포삼에게로 걸어갔다. 관포삼은 장염이 다가오자 재빨리 식칼을 뽑아 들고
앞가슴을 가렸다.
"네놈이 뭔가 믿는 것이 있어서 그처럼 말장난을 늘어놓았구나!"
보물에 대한 욕심으로 식칼까지 뽑아 들었지만, 상대가 다가오는 지금은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
들었다. 저도 모르게 물러나던 관포삼이 이제는 얼굴도 흐릿한 부처를 떠올리며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 씨벌, 그냥 음식이나 만들어 팔 것을.... 잘 나가다가 옛날 생각을
했다니!'
상대가 설마 내공의 고수랴 싶었지만, 이 순간 자신보다 강해 보인다는 느낌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관포삼은 혹시 재수가 좋으면 살길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처님, 이번 한 번만 도와주쇼!'
연거푸 뒤로 물러나던 관포삼의 발이 무엇에 걸린 듯 비틀겨렸다. 다가오던 젊은이가 문득 발 밑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순간 관포삼은 눈을 질끈 감고 젊은이의 가슴 어림으로 들고 있던 식칼을 냅다 집
어 던졌다.
툭.
'툭?'
관포삼은 식칼이 몸에 닿는 소리가 '푹' 이나 '퍽' 이 아닌 '툭' 이라는 사실에 눈을 번쩍 치켜떴다. 식칼
은 젊은이의 가슴에 붙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꽂히거나 박힌 게 아니라 가슴 높이의 허공에 떠 있었다.
자기 내공이 고강하여 이기어 식칼을 한 것이 아니니 저 신비한 광경은 젊은이의 공력에 의한 것이리라!
젊은이가 손을 식칼의 아래에 대자 식칼은 젊은이의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관포삼은 자신
이 무림이 전설에나 나옴직한 사람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너, 그대는 보주가 없다니 믿고 그냉 보내주겠소. 다섯 푼이나 되는 음식 값도 받지 않겠소이다.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시겠소!"
장염은 텁석부리 사내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당신이 내가 누구인 줄 알았으니 보주가 없다는 것도 알것이오. 그러나 그대를 위해 한마디 좀
해야겠소. 그대가 과거에는 산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장사를 시작했으니 이제 다시 도적질을 해서야 쓰겠
소?"
장염이 손을 떨치자 식칼은 한편에 있던 탁자로 날아갔다. 탁자앞에 식칼이 이르자 탁자는 도끼로 팬
듯 절반으로 쫙 갈라졌다.
'헉!'
관포삼이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는데 식칼은 빙그르르 돌아 마당 가운데로 날아갔다.
"이제 그대는 살길을 택하시오. 주막의 주인으로 살겠소. 아니면 도적으로 돌아가시겠소. 그대가 원하는
삶에 걸맞게 해드리리다."
작은 식칼이 허공에서 주막 쪽으로 몸을 세우고 있었다. 관포삼은 젊은이가 저 식칼 하나로 주막을 반
쪽으로 가르려 한다는 걸 알았다. 자신이 산적임을 인정한다면 가를 것이 어디 주막 하나뿐이겠는가! 저
모습을 보니 말로만 듣던 신선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아침저녁으로 주무르던 보잘것 없는 식
칼 하나에서 저런 위력이 나올까!
"신선께서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서 그만......"
쿵, 쿵. 쿵.
무릎을 꿇은 관포삼이 머리를 땅에 박기 시작했다. 마누라의 유언으로 비적질을 그만둘 때 얼마나 모질
게 결심했던가! 그러나 채 십 년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리고 만 것이다. 관포삼의 이마가 찢어지
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관포삼은 눈물을 흘리며 얼어붙은 땅에 계속해서 머리를 찧었다.
본래 관포삼은 농사꾼이었으나 계속되는 가뭄과 홍수로 농사로 살 수 없게 되자 비적이 되었다. 산으로
들어간 관포삼에게는 제법 봐줄 만한 부인이 있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어느 날 관포삼이 일하
러 나간 틈에 소두령 중 하나가 관포삼의 부인을 겁탈라고 말았다.
수치를 느낀 관포삼의 부인은 관포삼이 돌아온 그날 새벽에 극약을 먹었다. 관포삼의 품 안에서 피르
토하며 죽어가던 부인은 관포삼에게 비적질을 그만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관포삼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
를 끄덕였다. 이건 대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먹고 살기 위해 비적이 되었는데 그 바람에 마누라를
잃고 만 것이다.
며칠 뒤 관포삼은 술에 취한 소두령을 죽이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 뒤로 음식점의 사환과 주방의 보조
로 전전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리고 한적한 관도에 주막을 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보지도 못한 재물에 눈이 돌아가 마누라의 유언도 저버리고 다시 비적질을 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허망하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자. 죽어버리자. 죽어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관포삼은 머리
가 부서지도록 땅에 처박았다. 관포삼의 뇌리로 죽어가던 마누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기위해 비적이
되었고, 마누라를 비참하게 먼저 보내고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먹고 살 만한데 욕심을 부려 자
기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퍽. 퍽. 퍽.
피가 홍건히 배어 나와 머리가 닿는 땅이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죽기를 각오한 관포삼이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신선에게 감히 도적의 식칼을 던졌으니 살기는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관포삼이 허망
하게 죽은 마누라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꽈광!
다시 한 번 머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굉음이 울리며 지축이 흔들렸다. 머리와 땅이 부딪혀 이런 소리
가 날 리 없다. 깜짝 놀란 관포삼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헛!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 그의 앞에 서 있던 젊은 신선과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관포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
러보았다. 눈길이 닿는 사방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아아.... 나를 살려두고 가셨는가...."
관포삼이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젊은 신선과 아이가 있던 자리로 갔다.
"헉! 열화반점!"
신선이 사용하던 커다란 탁자 위에 손으로 눌러쓴 듯한 글자는 분명히 열화반점이었다.
"천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관포삼은 미친 사람마냥 사방으로 절을 올렸다. 재물 앞에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어 주시기 위
해 천신께서 강림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이제 천신께서 친히 주막의 이름을 정해주셨으니 이제 평생 흔
들리지 않으리라! 관포삼은 조심스럽게 탁자를 뒤집어 주막 한 편에 세워놓았다. 그 뒤로 관포삼의 열화
반점은 십이월 중의 하루는 소면과 돼지고기볶음의 값을 받지 않았다.
"스승님, 왜 그런 도둑에게 간판을 만들어주셨서요?"
소걸 같은 어린 한량의 눈에도 텁석부리의 엉큼한 마음이 보였다. 저런 도둑놈은 그저 한주먹에 박살을
내야 하는데 자기에게는 힘이 없다. 마음 한구석으로 스승이 호되게 버릇을 가르쳐 주기를 기대했다. 그
러나 스승은 오히려 한술 더 떠 탁자에 열화반점이라는 글씨를 쓴뒤 자신을 안고 훌쩍 떠나왔다.
소걸이 아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힐끔거렸다. 저 텁석부리 사내는 만만한 사람에게 또다시 강
도 짓을 할 것이 뻔하다. 다시 생각하니 찬 데다가 음식을 차려준 것도 얄밉기 그지없다. 그런 도둑놈에
게 당도반점이 아니라 열화반점이라니! 계속해서 투덜거리는 소걸에게 장염이 대답했다.
"우리가 먹은 음식 값이라도 치러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하핫!"
"그래도 저 험상궂은 남자는 도둑이 분명한데...."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떠나면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는 말이 있다. 흠 없는 사람이 없는데 그때마다
정죄하면 누가 도를 얻겠느냐?"
소걸은 장염의 속 편한 생각이 마음에들지 않아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흥, 우리는 스승님의 무공이 고강해서 무사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 음흉한 사람에게 당할
것라구요."
"하하핫! 네게는 그리 보이더냐? 내 눈에는 그저 마음 약한 사람으로 보이던걸. 조금 불친절했지만 소
면을 그처럼 맛있게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거든."
소걸이 한심하다는 듯 장염을 올려보았다. 소면이 맛있기에 용서를 해준다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
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넷째 스승으로 모신 장염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없었다. 운남의 뒷
골목을 전전할 때 무뇌아가 있다는 소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어쩌면 우리 스승도 어린 시절 별명이 무뇌아 인지도 몰라.'
그러나 아무렵 어떤가! 얼마 전까지 박학다식한 스승때문에 고초를 걲었으니 이제는 무뇌아 스승과 더
불어 즐겁게 살면 그만이다. 설마 하니 저런 바보 같은 스승이 꼬장꼬장하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려구!
조금 전의 일의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지만 자신의 앞날의 위해서라면 차라리 저런 편이 낫다.
"스승님이 무뇌아라서 저는 좋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소걸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무심코 내뱉은 말을 귀가 밝은 장염이 들은 것 같다. 이럴 때
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걱정이 되네요. 곧 눈이라도 내릴 듯 찌뿌등한데 이러다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게 아닐까요?"
거의 엄살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날씨가 과히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좋은 장염이 낮게 가라앉
은 하늘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흐음, 눈은 내일 점심에나 내릴 것이다.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께 '화산여의 쾌니 바르게 행해야 겨우
길할 것이다' 라고 했다. 오늘 우리가 좋은 일을 했으니 설마 하니 노상에서 눈이야 맞겠느냐?"
장염이 하는 말의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내일 눈이 내릴것이라는 말은 귀에 확 들어왔다.
"스승님, 정말 내일 눈이 내리는 건가요?"
"당연하지 않느냐."
대체 내일의 날씨를 아는 것이 뭐가 당연하다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생각이 없다. 스승이 허투루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 눈이 내릴 것은 분명한데 어디에서 쉬었
다가갈 것인지 염려되었다. 차라리 돌아가 텁석부리 사내의 주막에서 묵어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도 떠나온 스승이니 들어줄 리가 없다.
'휴우.... 스승만 모시지 않은 몸이라면 뜨뜻한 방에서 배를 지지며 밤이나 구워 먹을 터인데....'
그러나 이미 스승을 네 명이나 모신 몸이니 이제 와 무를 수도없다. 무슨 젊어진 짐이 많다고 스승들은
한결같이 번잡한 일들을 자처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텐데.....'
아니, 자기 같으면 누가 알아준다고 해도 귀찮아서 하지 않을 것이다. 소걸이 성큼성큼 앞서 가는 장염
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장염이 뒤쫓고 있는 장경선은 그 시간 귀주성의 검령산 인근을 헤매고 있었다. 오행지기 둘을 합체한
뒤 장염에게 덤볐다가 호되게 당하고 정신없이 달아나다 이곳까지 왔다. 평생을 천하제일가의 식솔로 살
아온 장경선이라 달리 갈 곳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귀주성을 헤매던 장경선은 얼마 전 오행지기의 괴인이 자신에게 이끌려 찾아왔
듯, 검령산으로 한없이 쏠리는 마음을 느꼈다. 이미 오행지기의 합체를 맛본 장경선은 그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오행혈마인이 이곳에 있다!'
확신이 생긴 장경선은 검령산 인근을 맴돌다가 마침내 비룡장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비룡장에 다가갈수
록 전해지는 가슴이 뻐근할 정도의 쾌감은 저곳에 오행지기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장경선이 산봉우리에 앉아 맞은편 아래로 보이는 비룡장을 노려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바라보고 있었지
만 타는 듯한 갈증만 더해갈 뿐이었다.
'아깝다, 저 절진이 아니라면 벌써 끝났을 터인데.'
며칠 전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가 진기가 고갈될 때까지 이러저리 펄떡거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살아
나온 것이 기적이었다. 무림에 전해지길 '비룡금쇄진은 절진이라 허락없이 든 자는 필히 사망한다' 라더
니 허튼 소문이 아니었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 것 같았는데....'
이틀 전이다. 그날도 밤새 지켜보던 장경선은 새벽이 되자 크게 마음먹고 비룡장의 담을 넘었다. 그러
나 막 두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장경선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기경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홍죽림!
붉은 대나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밖에서 보던 비룡장의 넓이는 이 정도가 아
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홍죽 너머로 지평선이 보일 정도였다. 말 그대로 홍죽의 바다라고 해도 과연이
아니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홍죽림에서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소리뿐이라면 어찌 생명의
위험이 있었으랴! 땅 밑에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 올라 붉은 대나무와 안개의 음산함이 최고조에 달했
을 때다. 안개를 가르며 땅 밑에서 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모두 환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체가 움직인단 말인가! 아니, 검령산 구석에 바다처럼 펼쳐진 홍죽을 볼때 부터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검령산이 높고 넓다 해도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던 것이다.
애써 환상이라고 떨쳐 버리려는 순간 가슴으로 파고드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시
체의 손끝이 파고들고 있었다. 한기를 동반한 섬뜩한 공격 앞에서 환상이라 믿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걸음
을 옮기고 말았다.
찌이이익.
앞섶이 길게 찢어져 나갔다. 환상은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경실색한 장경선이 시체를 향해 두 손
을 휘둘렀다. 오행지기기 담긴 회선장이 시체의 몸에 적중되었다.
콰드드득!
시체는 사지가 절단이 되어 다시 안개 자욱한 땅으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죽은 자의 최대 장점은 다시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지가 절단된 시체가 꿈틀대며 다시 일어났다. 그렇게 안개 속에서 일어나는 시
체는 한두 구가 아니었다.
'헛! 저 얼굴은!'
시체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순간 장경선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송가려! 분명 저 긴 머리의 여인은 송가 포목점의 딸인 송가려다! 그녀는 오 년쯤 전 각별한 애정을 기
울이다가 흡혈한 여자였다. 상대했던 여자 중에 가장 미색이 고와 지금도 간간이 생각나는 여자이니 착
각했을 리가 없다.
'과연 이것은 모두 환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오 년 전에 죽은 여자가 시체로 돌아다닌단 말인가! 더구나 여기는 하남성이 아
닌 귀중성 검령산이다.
고민하고 있던 장경선의 곁으로 다가온 송가려가 두 손을 뻗쳤다. 적갈색 긴 손톱이 장경선의 목젖으로
파고 들었다.
장경선은 좌로 비켜나며 다시 한 번 회선장을 날렸다.
퍽!
송가려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 나갔다. 머리를 잃은 몸이 두손을 들어 올린 채 고목처럼 땅에 붙박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안개 속에서 일어서는 시체는 모두 자신이 흡혈을 한 사람이거나 그 와중에 죽인
사람들이었다.
"으아아악! 요망한 것들!"
장경선은 비명을 지르며 장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급한 마음과 달리 시체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장경선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느 틈에 다가온 괴인이 자신을 향해 녹슨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은 허공에 서른여섯 송이의 매화를 피워 올렸다.
장경선이 신법을 극성으로 펼치며 날아올랐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매와 몇 송이가 어깨와 옆구리
에 파고들었다.
퍼퍼퍽!
장경선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눈을 부릅떴다. 대체 무엇이기에 오행혈마기를 뚫고 신체에 상처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죽창이다!'
어깨와 옆구리에 박혀 있는 것은 끝이 날카롭게 잘려 나간 홍죽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시
체들 틈에서 허둥대던 중에 오행혈마기가 흩어진 것이 분명하다. 마음이 흐트러져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위기를 느낀 장경선이 오행지기 천간목을 끌어올렸다. 다른 것은 모르되 오행지기 목기의 주인이 나무
에 꿰어 죽는 다면 개도 웃을 일이다. 그제야 환상에 의해 닫혀있던 장경선의 눈이 열렸다. 사방에서 파
도처럼 굽이치는 것은 과연 끝이 잘려 나간 홍죽이었다.
그 짧은 고통의 순간 장경선은 환상의 실체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진식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
과 죽음을 부르는 죽창의 조화였다. 환상은 자신의 것이었지만 공격은 저 죽창이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서 환상과 홍죽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천간목으로 홍죽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히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그
러나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은 예리한 홍죽이 아니라 진세가 끈임없이 만들어내는 죽은 자들의 향연이었
다. 그 끔찍한 것들은 모두 장경선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던 사실었기에 끝내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했
다.
'이 홍죽의 바다를 건너면 괴로운 환상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경선이 이를 악물고 몸을 날리자 사물이 선으로 변해 뒤로 물러났다.
츠츠츠츠츳!
다급한 나머지 단지 달아날 것에 집중하자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설에나 나옴직한 육
지비행술이었다. 괴도사에게서 흡수한 금기가 근골을 금석처럼 변화시켜 주었기 때문일까? 이제 겨우 초
입의 단계였지만 그 덕분에 장경선은 죽음의 홍죽림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그러나 홍죽림을 벗어난 장경
선이 도달한 곳은 홍죽림보다 더한 곳이었다.
장경선이 도착한 곳은 깊은 계곡의 밑바닥이었다. 물론 이것도 진식의 변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
로운 진세는 장경선에게 숨 돌릴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우르르릉!
천둥 소리와 함께 계곡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환영이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비룡금쇄진에서 환상과
실체의 구별은 의미가 없었다. 장경선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몸을 숨길 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
았다. 장경선은 바삐 움직여 떨어져 내리는 암석을 피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바위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별수없다. 올라가자!'
작정을 한 장경선이 떨어져 내리는 바위를 밝으며 위로 솟구쳤다.
"허억!"
비룡금쇄진은 말 그대로 '날아오르는 용도 가둔다' 는 진식이다. 조금 몸을 솟구쳐 본 장경선은 더욱 절
망하고 말았다. 계곡 위쪽에서는 돌풍에 휘말린 바위들이 서로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고, 그 부서
진 조각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뜬 장경선은 항거할 수 없는 돌풍에 몸이 빨려 들어갈것 같자 오행지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오행혈마기로 온몸을 보호한 장경선은
돌풍의 흡입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파우우웅!
돌풍의 중앙으로 몸을 날리자 그의 몸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장경선을 빨아들인
돌풍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순간 검령산의 뒤편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장경선이 꼴
사나운 모습으로 튕겨져 나왔다.
콰다당!
온몸이 상처투성이었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장경선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비룡금쇄진 덕분
에 위기도 많았지만 전설의 육지비행술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아직 원하는 대로 펼치고 거둘 수 없었지
만 적어도 생명을 보존할 길이 하나 더 열린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정말 저 진식은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것인가!"
장경선이 눈앞에 펼쳐진 비룡장의 전경을 둘러보며 탄식했다. 이미 오행지기를 두 개나 모았으니 저 안
에 있는 하나를 거두기만 한다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 사실상 오행지기 셋을 모으면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오행지기는 모두 다섯이니 언젠가는 모두 모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급한 일이 아니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거두어주면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먼저 세 개의 기운을 모아버리면 자신은 그의 밥
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비룡장의 오행지기는 무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나오라... 나와라.... 누구냐... 어서 나와봐라.....'
진식의 두려움을 경험한 장경선은 이제는 오행지기의 사람이 나와주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
게 하염없이 앉아 있기를 벌써 삼 일째다. 그동안 비룡장의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했지만 그것도 들어가 봐야 확인할 것이 아닌가!
첫댓글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ㅈㄷㄳ..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게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즐독요
즐감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