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월 21일 수요일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대처할 수도 없으며,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온몸이 마비가 된다. 답답함은 물에 빠져 숨을 쉬지 못 하는 기분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그 답답함은 더하게 된다. 그 더운 여름날 맑은 하늘에 갑자기 내리는 비처럼 미처 대비 할 수 없게 그렇게 이별은 찾아온다.
- 수필 “그 남자의 비밀 다이어리” 중에서
“영화 별로던데 생각보다 별로 였어. 마지막엔 감흥도 없어지더라고, 예전 원작이 더 좋았던 것 같아 .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난... 뭐. 괜찮게 봤는데. 오빤 별로 였어? 처음에는 재미있다고 속삭이더니”
“처음에는 스케일도 크고 그래서 많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갈수록 별로 재미가 없어지더라고, 그래도. 네가 재미있게 봤다니까. 밥은 네가 사라. 가볍게 햄버거 같은거 먹을까?”
“햄버거 같은 거 말고 밥 먹자. 아 여기 어딘가에 오므라이스 맛있게 하는데 있다던데, 그리로 가자. TV에서 꽤 맛있게 보이더라고. 가자 오빠.”
그동안 회사일이다 뭐다 서로 바쁜 통에 얼굴 보기도 힘들었고, 생각해보니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게 벌써 2년이 가까이 되다보니 여자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간만에 밖에서 긴시간 데이트를 하고 싶어서 무작정 영화관으로 향했다. 둘다 회사에 월차를 내고서 말이다. 마땅하게 놀 거리가 없었던 우리는 이래저래 쇼핑도 할 겸 데이트 장소를 찾다보니 만만하게 느껴지는 곳이 코엑스 몰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어서 인지 주위의 매장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각종 캐롤송들은 정말 시끄럽게도 징징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소음일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단연코 최고는 머라이어 캐리의 음악이리라.
“꼭 여기서 먹어야 해?”
TV의 맛 나는 집들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이유로 엄청나게나 많은 사람이 줄 서 있는 곳으로 왔는데 한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건너편의 일식 돈까스 가게는 사람이 한산해서 바로 먹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굳이 이곳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어란 말이냐!
“응. 게살 크림 오므라이스 먹고 싶어. 오빠는 새우튀김 오므라이스 먹어봐. 그것도 괜찮을거 같고..”
“너무 오래 기다리잖아. 그러고...”
“우리 오랜만의 데이트야.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주먹을 살포시 쥐어주는 여자친구는 꽤나 귀엽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먹어주지. 나는 라지 사이즈다. 알지? 빨리 못 먹으면 네 것도 내 것이 될 거란 말이지. 이게 다 오빠가 애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다. 다른 사람들 밥까지 먹는 거 다 애정이 있어서 하는 거다.”
“됐거든!”
되도 않는 농담을 나누었다. 오랜 만에 데이트여서 인지 여자친구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한다. 슬슬 주위를 둘러본다.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많았고, 시험이 끝난 중․고등학생들과 방학에 들어간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삼삼오오 다들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시끄러운 캐롤송 만큼이나 거슬리는 웅성거림들. 그리고 즐거운 표정들. 그 와중에 경비 업체 사람들과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이 눈에 보였다. 아마 우리와 같이 즐기고 싶겠지만 엄연하게 그들에겐 업무시간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결국 이곳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경비하고 있는 아저씨들도, 저 앞에서 친절하게 주문을 받고 있는 사람들도... 다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두 분류로 쉽게 구분이 되는 것이군.
“오빠, 뭐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 들어가자. 자리 났대.”
“아.. 그냥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었어. 그래 들어가자. 다 먹어주마!”
모양도 예쁘게 나왔고, 맛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맛이 있었다. 특히 크림 소스가 올라간 오므라이스는 나의 예상과 달리 담백했고, 여자친구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두런두런 나눴다. 요즘 자기 회사 분위기가 어떻다는 둥, 여자친구의 친구들의 잡다한 이야기와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계획등을.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 별일 없으면 여기서 또 영화보고, 콘서트도 보자. 광고 책 보니까 공연 같은 거 많던데. 오빠. 우리 김건모 콘서트 볼까? 아님 다른 뮤지컬이라도? 그리고 여기서 또 밥 먹지 뭐.”
“콘서트? 뭐. 까짓것 보면 되지 뭐. 예매하면 되려나? 그거 보고 같이 드라이브나 하지 뭐.”
여자친구는 이 음식점이 꽤나 맘에 들었나보다. 그렇게 여자친구랑 재잘거리고 앞으로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계획을 하나 둘 만들어 가다가, 다시금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축제와 같은 이브에도 일을 하리라. 아마, 그럴테지. 안쓰럽게도 느껴졌다. 밥을 다 먹고 이것저것 쇼핑을 하고, 슬슬 집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도 일정시간이 지나자 저마다의 휴식처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코엑스는 주차료가 참 비싸다. 더구나 길도 복잡해서 차를 찾기도 쉽지 않고. 여러 번의 시행 착오를 거쳐 이젠 올라온 계단이나 주차되어 있는 구역의 알파벳과 번호를 기억해둔다. 결코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알아두면 정말 편리 한거 같다. 가는 길에 유밀레 공화국에서 이옷 저옷 입어보기도 했고.
“오빠, 여기 이거 뭐야?”
주차된 구역을 가기위해 계단으로 이동하던 중 벽에 붙어 있는 송풍 장치 같은 걸 봤다. 그 주변은 온갖 낙서로 가득차 있었으며, 대부분 ‘누구누구 다녀가다.’, ‘누구누구 사랑해’ 같은 낙서들로 하나의 벽지를 이루고있었다. 벽에 붙은 송풍 장치 같은 것은 가로 1m 세로 1.5m정도의 크기에 하얀색으로 칠해진 그 장치는 건물 옥상이나 지하에 있는 공기 정화 장치 같기도 했다. 그릴 같은 것이 붙어 있는 걸 보니 송풍 장치 같은 게 맞을 거라 생각을 했다. 그냥 관찰하는 의미에서 만지작거리다가 그릴이 뚝 하고 떨어졌다.
“어랏 고장난건가? 난 손만 댔는데 왜 떨어져? 이거 저질이구만!!”
“하하하. 오빠. 그러니까 비슷해. 하하하하하”
“가자. 뭐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고치겠지.”
“오빠, 잠깐만 여기다가 낙서 좀 하자.”
“애들도 아니고 그게 뭐야... 이러니까 해외에서도 욕먹고 그렇지 APEC 회원국 사람들이 이러면... 괜찮아지려나?. 흐흐, 펜있어?”
“큭. 응, 여기 있어. 뭐라고 쓸까?”
뭐 낙서하나쯤은 괜찮을 테지 적당하게 써 내려 갔다. 큰 하트를 그리고 사랑해 라는 말을 쓰고 시간을 낙서 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와서도 이렇게 될까?
“그만 가자.”
우리낙서 위에 ‘낙서 금지’ 라고 큼지막하게 써 놓고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의외로 재미나네, 크큭. 담에 또 해볼까? 괜찮을 거 같은데. 락카를 준비해야 하나?”
“오빠, 락카는 너무했고 매직이나 하나 준비하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희희낙락하며 내려갈 즈음 갑자기 불이 꺼졌다. 휴대폰을 꺼내어서 액정의 빛으로 계단을 비추었다.
“뭐야. 깜짝 놀랐네.”
“응, 오빠 나도 굉장히 놀랐어. 뭐야. 이거. 그런데 뭐 타는 냄새가 나는 거 같기도 한데.”
조금이 지나자 메케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주위의 소리가 정적에서 웅성거림 그리고 다급해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난다. 갑자기 유도등에 불이 들어온다. 화재 인가? 다급해진 나는 계단을 빨리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도등이 켜져 있는 데로 일단 뛰기 시작했다. 불이 난것일까?
“오빠 여기 문 잠겼어.!!! 어떻게 해.”
“별거 아닐 거야 걱정 하지마.”
하지만 문이 열어지지 않는 현상은 충분하게 식은땀 나게 했다. 메케한 냄새가 더욱 짙어진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렇게 2~3층 내려왔을까? 문이 열려 있었다. 그 밖은 비교적 밝아 보였다. 일단 그리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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