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캐스터 최유진 씨(오른쪽)과 이소용 씨. |
‘골프 방송을 보고 있으면 골프 방송 캐스터는 아무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바둑TV캐스터가 한 말이다. 보고만 있어도 흐름이 읽히는 수많은 스포츠 경기와 비교해 바둑은 누가 유리한지, 형편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달하기가 아주 어려운 종목이다. 골프나 축구 야구는, 잘라 말해, 중계가 없어도 관객은 충분히 내용을 알고 즐길 수 있다. 바둑은 보는 사람이 실력이 있어야만 유불리를 알 수 있고 관전하면서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앞서 말한 바둑TV캐스터의 언급은 그런 어려움을 토로하는 맥락에서 나왔다.
바둑TV의 이세신 팀장은 “좋은 바둑캐스터는 시청자의 눈높이를 맞출 줄 안다.”고 말한다. 바둑 방송은 시청자의 수준을 대개 3급으로 설정한다. 해설자 대부분은 프로기사라서 해설은 자칫 난해하게만 흐를 수 있다. 해설자와 시청자의 거리를 재어 궁금한 부분을 잘 해소해 줌으로써 바둑 경기를 더욱 맛깔 나게 볼 수 있게 하는 게 캐스터의 몫이다.
바둑캐스터가 되려면 다양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 방송을 하는 만큼 깔끔한 외모를 갖추어야 한다. 연예인급 외모일 필요는 없다. 더욱 중요한 건 바둑에 대한 이해다. 또 정확한 우리말 구사도 필요하다. 맞춤법, 발음, 적절한 어휘는 기본이다. 글이 아닌 말을 하는 까닭에 주어와 술어이 호응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는 노련한 캐스터라도 실수하기 마련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어감이 좋지 않은 용어를 피하라고 권고 받는다(‘빵때리다’는 ‘빵따내다’로 사용한다든지). 바른 우리말을 쓰고 더 자연스런 진행력을 배양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이외에도 바둑방송의 요청으로 경력 20~30년 된 여타 분야 스포츠캐스터 출신 아나운서로부터 연 1회 이상 연수를 받는다.
바둑 방송은 중장년층이 주요 시청자층이기에 품위 있는 말을 사용하는 특징도 있다. 온라인게임 방송에서 목격되는 고성을 지르며 흥분하는 스타일의 중계가 시도되던 적도 있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해 사라지는 추세다.
옷차림은 코디네이터가 전적으로 담당하지만 바둑대회의 콘셉트를 담을 때가 많다. 이 때문에 캐스터는 진행자와 함께 그 기전에 맞는 옷차림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한국바둑리그는 검은색ㆍ푸른색ㆍ회색 재킷을 선호한다. 스포츠로서의 바둑을 표방하는 한국바둑리그의 성격을 나타내고 신뢰감을 주는 복장이다. 또 맥심커피배의 경우 바리스타 풍의 옷을 차려 입기도 한다. 캐스터는 자유자재로 변신해야 한다.
캐스터는 늘 객관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할 때도 있다.국제대회에서 한국선수가 외국선수와 대결하고 있을 때가 그런 경우다. 이럴 때조차 편파적이지는 말아야겠지만 한국이 불리한 상황인데도 캐스터가 지나치게 침착해서 중계가 밋밋하다면 외려 시청자는 몰입을 못하게 된다. 반대로 한국선수가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뚫고 역전을 해낸 상황이라면 시청자가 흥이 날수 있도록 해주는 편이 좋다.
돌발사고에도 잘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씨엠을 내보내기로 멘트했는데 주조정실과 사인이 맞지 않아 화면이 바둑판을 계속 비추고 있다면 캐스터는 당황하지 않고 적절한 사과멘트를 하거나 상황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
이렇듯 공부할 것도 많고 챙길 것도 많은 바둑캐스터. 바둑팬들은 방송에서 숱하게 바둑캐스터를 보며 친숙함을 느낀다. 하지만‘사람’바둑캐스터 그리고 그들의 내면을 접할 기회는 적다. 사이버오로가 베테랑 미녀 캐스터들 최유진 씨(바둑방송 8년차)와 이소용 씨(4년차)를 만나 진솔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중계를 위해 어떤 준비들을 하나? (최유진) “개인적으로 스포츠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야구 골프 등 스포츠 TV중계를 항상 틀어 놓는다. 특히 야구엔 바둑에 사용하면 좋을 용어들이 많다. ‘추가 득점을 허용하지 않았다.’든가 ‘적시타가 터졌다.’등의 용어를 한국바둑리그 중계 때 사용해 봤다. 바둑계에 가져 와 보면 신선하다. 또 가끔 스피치 책을 읽는다. 청중을 사로잡는 법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유익하다(- 청중을 사로잡는 법을 하나 소개해 줄 수 있나?) 영업비밀이다(훗~) ” (이소용) “가령 유명하지 않은 중국선수가 나온다고 하면 조사가 수월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름으로 검색해 보고, 관련 뉴스를 찾아본다. 중국에 훤한 관계자나 중국통 프로기사에게 물어 사전에 정보를 쌓아 놓는다.” (최) “스마트폰으로는 오로앱으로 수시로 중계를 들여다 본다. 최신 유행 변화를 익혀두는 것이다. 훗날 중계에 도움이 된다.” (이) “우리말 공부를 꾸준히 해둔다.”
- 캐스터가 원활한 진행을 위해 해설에 다소 깊이 관여하면 ‘해설자를 가르치려 한다’고 비난하는 바둑팬이 있다. 또 반면에 싱거운 질문만 하면 ‘진행자가 하는 게 뭐냐’힐난하는 바둑팬도 있다. 바둑팬들의 요구는 참 다양하다. (최) “캐스터가 중심을 잘 잡아나가야 한다. 바둑 기술적 측면, 수 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뒷 얘기를 곁들이고 하는데 ‘왜 만담하고 있느냐’는 불평도 바둑팬들로부터 나온다.” (이) “그래서 적절히 섞어야 하는 것 같다. 바둑 수와 이야깃거리 등을 균형 있게 배분하는 수밖에 없다.”
-해설자와 호흡이 잘 맞지 않는 경우도 있을 텐데… (이) “해설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리는 편이다. 바둑 수에만 관심을 갖는 해설자도 있고 뒷 얘기하길 좋아하는 해설자도 있는 등 다양한 스타일이 있다. 가장 힘든 경우는 해설자가 내 질문에 계속 단답형으로 대답할 때다.^^” (최) “최악은 이것이다. 해설자는 내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제한시간은 길고, 바둑 내용은 재미없고, 형세는 미세한 경우. 꼭 이런 바둑은 반집승부가 되더라^^”
-중계 중에 누가 둘 차례인지 헷갈린 적 없나? (최) : “여러 판을 동시에 할 때 누가 둘 차례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다른 판을 보고 돌아왔을 때 한쪽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면 더욱 그럴 수 있다. 우변을 좌변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것도 해설자들도 자주 하는 실수다.” (이) : “해설자가 흑백이나 좌우를 틀릴 경우, 내 경우 간접적으로 해설자에게 알려 준다. ‘아, 백이요?’라고 되묻는 식이다.”
- 한 번 방송하면 체력소모는 어느 정도 되나? (이) “초반에는 서서 방송하지만 카메라가 바둑판을 계속 비추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앉아서 해도 된다. 그런 면에서는 체력소모가 아주 심하지는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 자체는 빡빡하다. 한달 쉬는 날이 없을 때도 있다.” (최) “일반 직장인들은 격무에 시달린다고 해도 가끔은 잠깐씩 딴 짓을 할 수 있다. 캐스터는 중계 전부터 중계가 끝날 때까지 한치도 집중을 흐트러뜨리면 안 되는 점이 있다. 이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다” (이) “또 실수한 거라도 있으면 두고 두고 생각나서, 집에 와서도 잊히지가 않는 점도 힘들다. 야간 중계가 잦은 탓에 박카스를 들고 다닌다. 지금도 백에 들었다. 집에 박스로 사 놨다” (최) “나도 그렇다. 커피는 달고 살고…”
-펑크 내 본 적 있나? (최) “열이 38도 39도까지 올라가도 펑크를 안 낸다. 한번은 빙판에서 미끄러져 한쪽 발을 쓸 수 없어서 깁스를 하고 한쪽발로만 서서 몇 시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토록 펑크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펑크를 냈다. 작년 일인데, 회를 먹고 장염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갔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을 짬이 없을 정도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설사와 토를 반복했다. 어디 아픈 건 참을 수가 있는데 화장실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어떻게 제어할 도리가 없었다. 대회장까지 가는 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다른 진행자가 대신했다.” (이) “지난해 인천 실내무도아시안게임 중계를 하러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횡단보도를 지나던 나는 각국 선수가 탄 버스에 치여 수미터를 날아갔다. 날아가면서 ‘이게 죽는 거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버스 타이어에 밟힌 구두는 으스러졌다. 천만 다행으로 중상은 아니었다. 의사선생님은 나보고 용가리통뼈라시며 참말 다행이라고 하셨다. 그날 의사선생님에게 방송을 하러 가겠다고 했더니 말리셨다.”
- 여가 시간은 어떻게 활용하나? (최) “정말 많이 들어 본 질문이다. 피디님들도 ‘방송 안 할 때는 뭐하나?’라고 묻는다. 방송이 없는 날은 솔직히 한가한 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한다.” (이) “늦잠을 잘 경우가 많다. 저녁 늦은 시간에 중계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생활 패턴이 늦게 자는 식으로 바뀐다. 새벽 1시 이전엔 잠들기 어렵다. 자연히 아침에도 10시~11시에 깨는데 그게 굳어져서 쉬는 날에도 늦게 일어나게 된다.”
-바둑캐스터를 꿈꾸는 후배들이 많다. 해주고 싶은 말은? (최) “예쁘게 화장하고 나와 품위 있게 진행하는 모습은 분명 화려해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 숨은 치열한 경쟁은 후배들에겐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인정받는 캐스터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느 사이엔가 사라진 사람도 많다. 일하는 시간에 비해 수입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수명이 짧다는 것도 냉정하게 생각해 둬야 한다. 방송아카데미에서 배우는 게 다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곳에서 정확한 발음을 배우고 유익한 정보를 알 수 있지만 실전에 투입되면 배워야 할 것이 훨씬 많아진다.”
(이) “처음에는 수입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몇 년간은 아주 힘들다. 여자캐스터가 많은 추세다. 남자진행자들은 가장의 입장인 경우도 있고 해서, 시작하고 나서 몇 년간을 버티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이상적인 바둑 중계란? (최) “어느 종목보다 시청자의 궁금증을 잘 풀어줘야 한다. 개인적으론 희로애락을 중계에 담으려 한다. 그랬더니 시청자들로부터 ‘바둑이 예능이냐’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욕을 좀 먹더라도 그대로 해 내가려 한다. 요즘 바둑캐스터들한테서 개성이 사라지고 있다는데, 내 색깔은 이거라 할 수 있다. 희로애락을 담아낸 중계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린다.”
(이) “바둑 중계엔 기승전결이 있다.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다. 그러나 바둑은 어렵다. 어디가 전개며 어디가 절정인지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한편으로는 입문자를 위한 중계에도 힘쓸 생각이다. 바둑캐스터는 바둑계 저변을 확대하는 한 축을 맡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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