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Schmidt 1874∼1939
미완성 칸타타 <독일의 부활>로 나치 체제에 대한 양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아직도 용서받지 못하고 있는 슈미트는 오스트리아의 첼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르크너와 말러 이후 가장 중요한 오스트리아의 교향곡 작곡가입니다. 오페라는 2개를 남기고 있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은 1904년 완성되어 1913년에 초연된 <노트르담>으로 빈 필의 파리 순회 연주 때 얻은 영감의 주제에 의한 것으로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은 작품이지만 12번 곡 인터메조만이 유명 연주자들에 의해 간혹 연주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음반은 따로 녹음 하지 않고 1975년 공연실황을 녹음 한 것이라 기침소리등 잡음과 박수가 가미되있어 공연장에서 듣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잊혀진 작품이라기에는 참으로 멋진 곡조가 많이 나옵니다. 특히 1막 서곡은 오래된 영화 '노틀담의 곱추'에서 배경음악으로 많이 익숙한 듯도 합니다. 3번곡은 마치 사랑의 세레나데같이 감미롭습니다. 연주는 독일어로 하였지만 영어와 독일어 대본이 같이 들어있어 가사내용을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가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말러의 계승자이자 힌데미트 등의 신고전 주의로 가는 가교로서의 슈미트 작품은 앞으로도 재평가가 절실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나 그 움직임이 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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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 1874~1939 1874년 12월 22일 프레쓰부르크에서 태어나서 1939년 2월 11일 페르히톨드스도르프(비엔나 근교)에서 사망함.프란츠 슈미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헝가리 왕국 출신으로, 특히 소년 시절에 리스트의 연주를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영향은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하면서 그 곳에 눌러앉게 되었는데, 이사 후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워진 탓에 무용 학교의 반주자 등 자질구레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학을 해야 했다.우여곡절 끝에 빈 국립음악원에 입학한 슈미트는 피아노, 첼로와 작곡을 배웠는데, 그의 스승 중에는 레셰티츠키를 비롯해 브루크너도 있었다. 졸업 후에는 1896년부터 1911년까지 빈 궁정 오페라 관현악단의 첼로 주자로 재직했는데, 이 때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바로 말러였다. 슈미트는 말러 밑에서 일하면서 마찬가지로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후 모교인 빈 국립음악원의 교수와 학장직을 맡으면서 작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14년 피아노교수가 되고 대위법과 작곡도 가르침. 1925-27년에는 비엔나의 음악아카데미학장을 지내고, 당시 무조 음악과 12음 기법으로 훗날 음악사에 길이 남는 쇤베르크가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기도 했고, 1927년에는 요제프 마르크스의 후임으로 빈 음악학교 교장으로 승진해 1931년까지 재직하면서 마지막 낭만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의 양식은 심포니적으로서 낭만주의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음았다. 특히 일시적으로 그의 선생으로 있었던 브루크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 까지 교향곡이라는 영역에서 가장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두 대가가 안톤 브루크너와 구스타프 말러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끝으로 독일어권 국가에서 유명 교향곡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스 베르너 헨체 같은 예외는 있지만, 일단 대중성에서 많이 밀리므로 열외) 다만 오스트리아에서는 말러를 잇는 1급 교향곡 작곡가로 꼽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프란츠 슈미트다.늦깎이 작곡가였던 슈미트는 작품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곡 하나 하나가 거의 대작이다.
두 곡의 클라리넷 오중주-A장조 작품은 거의 한 시간 분량이다-와 네 곡의 교향곡, 오라토리오 '일곱 봉인의 책', 경기병 노래에 의한 변주곡(관현악), 베토벤 주제에 의한 변주곡(피아노+관현악), 피아노 협주곡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데, 이 곡들 중 피아노와 관현악의 협주 작품 두 곡은 1차 대전 때 오른팔을 잃은 유명한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더 덧붙이자면 유명한 철학자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형제 관계임-을 위해 왼손용으로 작곡했다(훗날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뷔러가 양손 용으로 편집해 재발간하기도 했음).
슈미트의 작품은 소년 시절 접했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민요, 브람스의 변주 양식과 (한 살 위였던) 막스 레거의 영향을 모두 받아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말년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슈미트는 작곡 활동에만 전념했는데, 때마침 유럽을 휩쓸던 파시즘과 나치즘에 의해 '진정한 독일 전통의 수호자' 로 떠받들어 지면서 별로 달갑지 않은 정치적 명성을 얻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특히 성서에 기초한 만년의 대작인 오라토리오 '일곱 봉인의 책' 은 초연 시기가 오스트리아 합병과 맞물리면서 나치의 찬사를 받았는데, 정작 내용은 종말론 색채가 짙은 무거운 것이어서 차라리 예언적 색채를 띠는 곡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부인의 정신 질환 발병과 하나뿐이었던 딸의 유산 등으로 고통 받았는데,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4번 교향곡(1933)은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슈미트의 명성은 여전히 독일어권 국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교향곡도 솔직히 한 시간도 넘는 브루크너나 말러의 후기 작품 보다는 좀 더 '경량화' 된 곡이고, 나름대로 형식미와 선율미도 꽤 풍부한 작품인데 연주 빈도가 바닥을 기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4곡의 심포니와 2개의 오페라 여러 실내악 등을 작곡했지만, 현재까지 레퍼토리로 살아남은 작품은 ‘일곱 봉인의 책’이 거의 유일한 것 같다.‘일곱 봉인의 책’은 2부의 오라토리오로서 성서 내용 중 ‘요한계시록’을 바탕으로 작곡가 자신이 직접 편집하여 오라토리오로 만들었다.헨델의 ‘메시아’에도 역시 성서의 이 부분을 텍스트로 한 몇몇 곡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전반적으로 인류 최후의 날, 심판의 날을 음악화한 작곡가는 프란츠 슈미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자료참조 : 프란츠 슈미트 협회: http://www.franzschmidtgesellschaft.at/>
첫댓글 Franz Schmidt Notre Dame Intermezzo : https://youtu.be/U-YUdIyev7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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