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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atmK4xlMnE&t=9853s
A: 아쟁쿠르, 1415
A1: 아미앵 민병대 보병
1415년, 아미앵은 도팽에게 도시 민병대 보병 부대를 제공했는데, 이들의 주된 임무는 아미앵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병사의 가장 특징적인 장비는 도시의 색상과 문장으로 칠해진 파비스 방패입니다. 파비스 방패의 크기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사람 키만 한 크기의 방패는 석궁병이 재장전하는 동안 방패막이로 사용되었지만, 작은 방패는 손방패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아미앵 부대에는 창병과 검병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병사는 다양한 형태의 챙이 넓은 모자와 세로로 누빈 천 재킷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A2: 부르봉 공작 장 1세
공작의 기마 인장은 최신 디자인의 완전한 '흰색 마구'를 착용한 이 고위 귀족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 마구는 아마도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큰 바시넷' 투구는 구형의 바이저와 단단한 바비에르(영어로는 'bevor'가 아닌 'gorget'이라고 함)를 갖추고 있습니다. 길게 늘어진 톱니 모양 소매가 달린 그의 문장이 새겨진 겉옷(영어로는 'coat-armour')에는 장 1세, 제3대 부르봉 공작(1381~1434)이 샤를 6세의 가까운 사촌임을 나타내는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몸값을 지불하고 헨리 5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장과 클레르몽 백작 샤를은 이후의 전쟁에서 활약했습니다.
A3: 기사
이 기사는 말에서 내려 전투용 망치를 들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는 A2보다 더 오래된 형태의 바시넷 투구를 착용하고 있는데, '하운스컬' 모양의 옆면과 링메일 카마일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형태의 세부 사항으로 보아 대략 1400년에서 141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몸통은 직물이나 가죽 덮개 안에 리벳으로 고정된 작은 강철판(feuilles, '잎')으로 만들어진 브리간딘으로 보호되고, 겨드랑이는 아래쪽 어깨 갑옷(폴드론)에 부착된 두 개의 원형 보호대로 보호됩니다.
B: 프랑스의 동맹국
B1: 이탈리아 롬바르드 출신의 무장 병사. 1420~25년경
이 병사가 쓰고 있는 투구는 바르부트와 비슷한 윤곽을 가지고 있지만, 측면에 경첩이 달린 ‘뺨 보호대’가 있습니다. 프랑스 문헌에서는 이러한 투구를 비코크(‘이중 껍질’)라고 부릅니다. ‘흰색 갑옷’은 여전히 사타구니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의 링메일 하우버크 위에 착용됩니다. 확대된 비대칭 어깨 보호대(여기서는 원형 판이 추가됨)는 더 이상 왼팔에 방패를 들지 않는 기병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흉갑 아래에 겹쳐진 복부 보호대는 복부를 별도로 보호합니다.
B2: 스코틀랜드 보병, 1420~25년경
프랑스에서 싸운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궁수였지만, 하이랜드 출신 중 일부는 스코틀랜드 특유의 장창인 '로하버 도끼'와 장검으로 무장했습니다. 그의 갑옷은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고리형 갑옷으로 된 아벤테일과 누비 재킷을 걸친 매우 단순한 살렛입니다. 소매 없는 서코트(후크)에는 스코틀랜드의 국가 문장인 흰색 십자형(성 안드레아 십자가)이 새겨져 있습니다.
B3: 던리의 존 스튜어트 경, 1427년
던리의 스튜어트는 1419년 최초의 스코틀랜드 파병대와 함께 프랑스로 갔으며, 1420년에는 '콘스타블(왕조 시대 프랑스 군대의 최고 사령관)'로 불렸습니다. 보제 전투(1421년)에서 승리했지만, 크라방 전투(1423년)에서 한쪽 눈을 잃고 포로로 잡혔으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습니다. 몽생미셸과 몽타르지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이미 에브뢰 백작, 콩크레상 시외르, 오비니 영주로 불리던 그는 1427년 샤를 7세로부터 프랑스 왕실 문장에 4분할을 부여받았습니다. ('1, 4분할: 1, 4분할은 청색 바탕에 금색 백합 문양 3개, 붉은색 테두리 위에 금색 버클 8개; 2, 3분할은 금색 바탕에 은색과 청색의 바둑판 무늬 위에 붉은색 띠').
이 사람이 착용한 복장은 스코틀랜드 양식으로 어깨와 팔 윗부분(스파울더)의 보호대는 여러 개의 판이 겹쳐져 있으며, 그의 브로드소드 또한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식입니다. 사타구니 보호대는 말을 탈 때에 불편하기 때문에 떼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C: 잔 다르크와 무장 병사들
C1: 갑옷을 입은 잔 다르크, 1429년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났던 동시대 사람들은 그녀를 십대 후반의 매력적인 젊은 여성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갈색 머리를 15세기 당시 유행하던 남성용 ‘바가지 머리’ 스타일로 잘랐으며, 평상복을 입을 때는 보통 검은색 펠트 소재의 후드 아래로 머리카락을 감추곤 했습니다. 거식증 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빵을 아주 조금만 먹고 물만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그녀의 주치의는 그녀의 체격이 튼튼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왕세자(도팽)는 잔 다르크가 왕실 군대의 지휘를 맡기 전, 자신의 전속 갑옷 제작자에게 그녀를 위한 갑옷을 만들게 했습니다. 구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신체 치수에 맞춰 제작되었을 것이며, 함께 있던 동료들이 착용한 갑옷보다는 가벼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는 때때로 금도금한 구리 소재의 ‘플뢰르 드 리스(백합 문양)’로 장식된 펠트 모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이 모자를 자신을 머물게 해주었던 오를레앙의 한 가정에 선물했는데, 프랑스 혁명 때까지 보존되다가 결국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C2: 기사, 1425년경
이 인물이 착용한 갑옷은 1420~1425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비대칭 형태의 커다란 어깨 보호구(스폴더, spaudlers)가 특징입니다. 팔꿈치를 보호하는 팔꿈치 갑옷(쿠터, couters)은 좌우 대칭을 이룹니다. 잔 다르크의 흉갑과 마찬가지로, 이 갑옷 역시 앞뒤로 ‘플라카트(plackart, 흉갑 아래에 덧대는 판금)’가 끈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플라카트 상단 가장자리에는 두 개의 ‘루눌(lunule, 초승달 모양 장식)’이 보이는데, 이는 15세기 후반 아우크스부르크 지역에서 보편화된, 능선이 들어간 ‘고딕 양식’ 갑옷 디자인의 전조를 보여줍니다. 허리 아래를 보호하는 판금 치마(폴드, faulds 또는 ‘폰스, paunce’) 또한 별도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바시넷(투구) 아래에는 커다란 고르제(gorget, 목 보호구)를 착용했습니다.
C3: 에티엔 드 비뇰(별칭 ‘라 이르’), 1430~1435년경
이 사람이 입고 있는 갑옷은 여러 혁신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날개 달린 왼쪽 쿠터가 확대되었는데, 이는 어깨 보호대(여기서는 가려져 있음)와 함께 전투원의 가장 노출된 측면을 보호합니다. 또한 허벅지를 덮는 태셋(tasset)은 브라코니에르(braconnière)와 다리 갑옷이 만나는 부분을 가려줍니다. 그의 겉옷에는 포도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이름(vigne는 '포도나무'를 의미)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깊은 안면 보호대가 있는 살레(sallet)를 쓰고 있습니다.
D: 포병(ARTILLERY)
잔다르크가 활동했을 무렵, 프랑스 군대에서 포병 화기는 이렇게 보호되었습니다. 진지 양옆으로 참호와 흙둑을 파거나, 그럴 시간이 없을 때는 파비스(pavise, 대형 방패)를 사용했습니다. 전면에는 튼튼한 목재 방호벽을 세웠는데, 이 방호벽의 일부는 위로 젖혀 사격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대형 밤바드포는 재장전할 때(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는 다시 내려 포병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D1: 대형 밤바드포(Great bombard), 1430~1450년경
이 철제 화포는 길이가 79.5인치(202cm), 구경이 19인치(48.6cm)이며, 275.5파운드(125kg) 무게의 돌 포탄을 발사했습니다. 이 화포는 '스테이브 앤 후프(stave-and-hoop, 막대와 고리)'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주조 방식보다 기술적으로는 간단하지만 구조적으로 취약하여 포신이 파열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후방의 지름이 더 작은 약실(화약실) 부분은 주조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초기에는 화포를 얕은 참호에 직접 설치하고 무거운 목재 블록과 말뚝으로 고정했으나, 이후 측면 벽이 추가되었고 약실 뒤쪽에는 부드러운 납으로 만든 두꺼운 '쿠션(pillow)'이 삽입되었습니다. 발사는 점화구에 시뻘겋게 달군 쇠막대기를 갖다 대어 이루어졌는데, 포미(화포 뒷부분) 옆 화로에서 쇠막대기들이 달궈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D2: '쿨로브린 아 망(couloverine à main)'을 든 사수, 1420~1430년경
프랑스에서 '쿨로브린 아 망(couloverine à main)은 '손으로 쏘는 쿨로브린' 즉, 휴대용 화기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 대인용 무기들은 0.6인치(15~17mm) 이상의 구경을 가진 납 탄환을 발사했습니다. 재장전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사수에게는 엄폐물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이 무기들은 주로 공성전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림 속 인물은 가벼운 방어구만을 착용하고 있으며, 막대 끝에 무기를 장착한 단순한 형태의 화기를 들고 있습니다. 발사는 막대 끝에 달린, 서서히 타들어 가는 '도화선(slowmatch)'을 이용해 이루어졌습니다. (1405년에 제작된 독일의 한 그림에는 L자형으로 달궈진 철사를 사용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화기의 전술적 활용을 크게 제한했을 것입니다. 한편, 도화선은 15세기 초에 발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D3: 뵈글레르(Veuglaire), 1450년경
이 경량 화기는 훨씬 현대적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바퀴가 달린 포가와 고각 조절 장치 덕분에 기동성이 뛰어나고 야전에서도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쿨브린(couloverine)이나 뵈글레르(veuglaire)에는 주철제 포신이 흔히 사용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나무 막대와 철제 고리(stave-and-hoop)' 방식으로 제작된 포신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화기는 부분적인 후장식(breech-loading)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탄환은 여전히 포구에서 밀어 넣어 장전하지만, 화약은 '맥주잔(tankard)' 모양의 분리형 철제 약실에 채워 넣고, 뒤쪽에서 쐐기를 박아 고정하는 방식입니다. 현대의 실험에 따르면, 예비 약실을 여러 개 준비해 두면 분당 약 2발의 속도로 사격이 가능하며, 이는 장전 인원이 몇 명인지에 따라 지속 사격 시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D4: 장전 및 청소 담당 병사(Loader-swabber)
이 병사는 대포를 발사한 후, 막대 끝에 달린 젖은 양털 스펀지를 이용해 그을음이 낀 포신 내부를 닦아내고 불씨가 남아 있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 후 다음 탄환을 밀어 넣어, 미리 교체해 둔 화약 약실에 밀착시켰습니다. 이 병사는 일반적인 바르뷔트(barbute) 투구를 쓰고 있으며, 프랑스를 상징하는 흰색 십자가 표식과 자신의 지휘관을 나타내는 '탑(tower)' 모양의 휘장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D5: 사수(Gunner)
그는 '린스톡(linstock, 도화선을 고정하는 막대)'에 긴 도화선을 끼운 채, 다음 발사를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숙련된(아마도 높은 급료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문가인 그는, 사슬 갑옷(mail)으로 된 목 가리개(aventail)가 달린,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있는 고급 살레(sallet)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그의 ‘소프트 아머(soft armour)’에서 유행을 따른 듯 불룩하게 솟은 어깨 부분과, 길쭉한 론델 단검(rondel dagger)에도 주목하세요.
E: 프랑스의 내전
E1: 제프루아 모리용, 1439년경
이 기사는 약탈자 무리의 우두머리인 로베르 드 사르브뤼크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의 장례 조각상에는 어깨 보호대가 없습니다. 그의 투구는 살레(안면 보호대)와 아르메트(전체적인 모양과 탈착 가능한 큰 베보르)의 요소를 결합한 중간형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투구는 도상학에서 나타나며, 플랑드르나 영국에서 제작된 드물고 약간 후대의 예에서도 알려져 있습니다.
E2: 에코르셔(Écorcheur 고용되지 않은 용병들), 1440년경
에코르셔는 샤를 7세의 통치에서 프랑스를 황폐화시킨 무장 집단으로 희생자들의 모든 것을, 종종 옷까지 벗겨서 뺏어가는 약탈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들은 1435년 아르마냑과 부르고뉴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킨 아라스 조약 이후 고용되지 않은 용병이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동부에서 활동했던 이 도적은 독일제(또는 부르고뉴 저지대 국가에서 제작된) 흉갑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틀림없이 전리품일 것입니다. 그의 독일식 투구는 깊은 바이저 없는 살렛과 '주전자 모자'의 특징을 결합하여 다시 한번 혼합된 영향을 보여줍니다. 그의 주 무기는 폴암입니다.
E3: 피에르 펠레린, 1430
도피네 출신의 이 기사는 재판 기록에 안통 전투에서의 장비에 대한 설명을 남겼으며, 이는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됩니다. 그는 세 개의 흰색 십자가가 있는 붉은 띠(orle)로 장식된 살렛을 착용했습니다. 그는 몸통 갑옷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상대는 그가 흉갑이나 '3분의 1'의 흉갑을 착용했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플라카르트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상부?) 팔 보호대와 건틀릿을 착용했지만 다리 갑옷은 착용하지 않고 긴 하우스 부츠만 신었습니다. 이 부츠는 신고 벗기 편하도록 헐렁하게 만들어졌으며, 남는 부분은 바깥쪽으로 접어 버클로 고정했습니다. 그는 전체적으로 검은색 후케(타바드와 같은 겉옷)를 입었습니다. 그는 칼에 수놓아진 흰색 십자가의 높은 품질과, 우리가 보여드린 것처럼 손잡이가 한 손 반 정도 되는 그의 검의 품질을 강조했습니다.
F: 샤를 7세의 개혁, 1440년대
프랑스 왕조의 제5대 국왕인 샤를 7세는 군제 개혁을 했고, 그 결과 프랑스 군대에는 예전보다 다양한 병과들이 도입되었습니다. 아래는 그 병과에 복무한 병사들입니다.
F1: 중장갑 기병(Man-at-arms)
그는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달린 살레(투구)를 쓰고 있으며, 턱과 목을 보호하는 베보르(bevor)를 덧대어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그가 입은 갑옷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산이거나 롬바르디아 양식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제품입니다. 왼쪽 겨드랑이를 보호하기 위해 덧댄 외부 판금과, 팔 부분의 누비 옷에 끈으로 고정된 크고 대칭적인 팔꿈치 보호대가 눈에 띄는데, 이러한 형태의 팔꿈치 보호대는 1446년 필사본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전투용 안장에 앉은 기병의 자세를 고려하여, 박차의 목 부분은 길게 제작되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검은 길이에 비해 폭이 비교적 넓은데, 이는 말 위에서 다루기 쉽도록 길이를 줄였기 때문입니다.
F2: 기마 장궁병(Mounted longbowman)
그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살레(투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궁병들은 흔히 ‘잭’, ‘감베손(누비옷)’, ‘아케톤’ 등으로 불리는 누비 형태의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어떤 잭은 사슬 갑옷 위에 덧입거나, 판금 흉갑) 아래에 착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강이 보호대 없이 착용하도록 설계된 이탈리아식 ‘하반신용 부분 갑옷’을 갖추었습니다. 그의 검은 중장갑 기병의 것보다 긴데, 이는 그가 주로 지상에서 싸우며 검을 양손으로 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활은 적군인 잉글랜드의 장궁병들이 사용하는 활과 비슷한데, 주목 나무로 만들어졌고 길이는 약 62~68인치(약 2m)에 달합니다. 이 궁병은 높은 깃이 달린 ‘연질 갑옷’ 위에 프랑스 국가 색상이 들어간 ‘위크(huque)’ 또는 ‘호케톤(hoqueton)’이라는 겉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F3: 쿠틸리에(Coutilier)
궁병과 마찬가지로, 이 ‘말을 탄 보병(mounted infantryman)’ 또한 전투 시에는 말에서 내려서 싸웠습니다. ‘쿠틸리에’라는 명칭은 이 병사가 사용하는 장병기, 즉 긴 자루 끝에 칼날(coutil)을 단 무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들은 본질적으로 보조 병력으로 간주되었으며,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기사의 종자를 지칭할 때도 같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누비 갑옷 위에 사슬 갑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그가 쓴 투구는 코 보호대가 위로 접히는 형태의 '바르부트'로,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의 주 무기는 프랑스식 장병기인 '부주(vouge)'입니다. 쿠틸리에(coutiliers)들은 검을 휴대하기도 했으나, 일부 문헌에 따르면 이들이 소지할 수 있는 보조 무기는 긴 단검 정도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G: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잉글랜드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거의 수복했을 무렵
G1: 프랑스 총사령관(콘스타블) 아르튀르 드 리슈몽, 1450년경
프랑스 군대가 잉글랜드 군대를 격파한 포르미니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일련의 태피스트리에는 총사령관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기사로서의 위용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데,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를 쓰고 이탈리아 밀라노 지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갑옷을 착용했습니다. 왼쪽 어깨를 보호하는 견갑과 팔꿈치 보호대가 유난히 크게 제작된 점에 주목하십시오. 그가 탄 말을 덮는 천에는 리슈몽의 고향인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무늬의 담비 털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G2: 샤를 7세 국왕의 스코틀랜드인 호위대 소속 궁수(1460년경).
그가 속한 부대가 정예 부대였음은 커다란 은색 리벳 머리가 달린 깃털 장식 살레(투구)와 화려한 호크통(상의 형태의 갑옷)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호크통은 샤를 7세의 상징색인 빨간색, 흰색,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색 자수와 붓꽃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 붓꽃 문양은 그의 방패에도 그려져 있습니다(참고로 국왕을 상징하는 꽃은 장미였다). 겉옷 아래에는 어깨 보호대가 달린 브리간딘(판금 조각을 덧댄 갑옷)을 착용했으며, G1과 유사한 밀라노식 갑옷의 일부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활을 사용해야 했기에 전신 갑옷을 착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G3: 오리약(Aurillac) 출신의 ‘프랑-아르셰(Franc-archer, 민병 궁수)’ (1455년경)
이 인물은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달린 정교한 살레 투구를 쓰고 있으며, 어깨 부분이 당시 유행하던 방식대로 부풀려진 ‘연성 갑옷’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는 국왕의 상징색으로 된 제복용 겉옷을 걸쳤는데, 흰색 십자가 위에는 그가 속한 지역인 오베르뉴(Auvergne, 당시 표기 ‘Alvernhe’)라는 지명이 검은색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그는 강력한 윈들러스(도르래식 감개 장치)가 달린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장전 장치가 장착된 상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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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샤를 7세의 군대는 그 이전 두 국왕 시대의 군대에서 발전한 형태였으며, 특히 급료와 계급 체계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이전에는 전투원이 기사 대장(knight banneret), 일반 기사, 혹은 종자(squire) 중 어떤 신분이냐에 따라 급료가 달랐다. 아쟁쿠르 전투 당시, 개인의 ‘기사도적’ 무용을 과시하려는 경쟁심이 전투의 혼란을 초래했던 것과 관련하여, 봉건적 전쟁 방식의 잔재들도 점차 사라져 갔다.
개별 귀족이 거느린 수행원 집단이 하나의 ‘기치(banner)’를 이루고, 이 기치들이 모여 ‘전투 부대(battle)’—동료 귀족들이 반드시 복종하리라는 보장도 없는 지휘관 휘하의 임시 전술 단위—를 형성하던 방식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신분과 관계없이, 갑옷을 입은 기마 전사들은 대부분 ‘중무장 병사(men-at-arms)’로 통합되었고, 궁수들은 이들과 함께 하나의 중대(company)를 구성하게 되었다. 기사 작위 수여 여부와 상관없이, 중무장 병사에게는 월 12리브르, 궁수에게는 월 6리브르의 급료가 지급되었다.
이제는 기술과 경험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휘관(대장, captain)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평준화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대한 지휘권은 여전히 고위 귀족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
잔 다르크 곁에서 활약했던 여러 저명한 지휘관들—알랑송 공작, 포통 드 생트라이유, 에티엔 드 비뇰(별명 ‘라 이르’), 그리고 장 드 뒤누아(오를레앙의 사생아, 1439년에 뒤누아 백작으로 봉해짐)—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군 경력을 이어갔다.
1. 무장 병사(혹은 중장갑병)
기록에 따르면, 기마 전투원은 ‘장 다르름(gens d’armes, 중무장 기병)’과 ‘장 드 슈발(gens de cheval, 일반 기병)’이라는 두 범주로 나뉜다. 강철 판금 갑옷(‘하네스’)으로 전신을 보호한 ‘장 다르름’은 기병대 내에서도 정예 부대를 구성했다.
이들은 대부분 백작, 남작, 기사, 종군 기사(knights banneret), 그리고 종자를 포함한 귀족 계급이었다. 장 다르름은 ‘고귀한’ 무기인 창과 검을 사용했으며, 군사적 위신을 독점했다.
즉, “이 중기병 대열에서 싸우는 것은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수단이었으며, 전투용 갑옷을 착용하는 것은 곧 귀족임을 나타내는 징표로 여겨졌다.”
15세기 무렵, 장 다르름은 ‘랑스(lance)’라고 불리는 기본 단위로 편성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이는 세 명의 기마 인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장 다르름 본인과 그를 보좌하는 전투원(쿠틸리에, coutilier), 그리고 시종(페이지 또는 발레, valet)이 그들이었다. 필리프 드 메지에르는 14세기 말 이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전투나 원정, 전쟁에 나설 만한 기사라면 누구든, 모든 무기로 무장한 종자 한 명을 거느린다. 또한 ‘자크(jaque)’라는 방호복을 입고 기사의 창과 투구(또는 바시넷)를 운반하는 시종 한 명, 역시 자크를 입고 기사의 짐 상자를 운반하는 또 다른 시종 한 명, 그리고 ‘솜미에(sommier, 짐을 싣는 튼튼한 말)’를 이끄는 보병 한 명을 동반한다. 결과적으로 기사 한 명당 다섯 마리의 말과 네 명의 인원이 따르는 셈이다.”
(여기서 ‘자크(jaque)’—영어로는 ‘잭(jack)’—란 솜을 채워 누빈 형태의 방호용 상의를 의미한다.)
이 시종들은 전장 가까이까지 이동하기는 했으나, 전투원은 아니었다. 이들의 역할은 주인을 보좌하는 일, 즉 말을 돌보고, 천막을 치고, 사료를 구하고, 식사를 준비하며, 장비를 관리하는 것에 국한되었다.
다만, 이들은 약탈에 가담하거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기도 했는데, 이는 급료를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하층 계급의 젊은이들은 종종 주인과 같은 지역 출신이었으며, 그들을 언급하는 몇 안 되는 기록 보관소는 그들이 한 무장 병사에서 다른 무장 병사의 휘하로 자주 옮겨 다녔음을 보여준다.
14세기 영국군은 호벨라르(hobelars)라고 불리는 경기병을 보유했던 반면, 프랑스군은 주로 중기병에 의존했다. 15세기에 호벨라르가 기마 궁수로 대체되면서 프랑스군에는 'gens de cheval'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마 브리간디니에(brigandiniers)와 부지에(vougiers)', '경기병(chevau-légers)', '중기병(demi-lances)', '소형 기병(lances de la petite ordonnance)', '기마 궁수', '크레인퀴니에(cranequiniers)'(후자는 크레인퀴니에 크랭크 메커니즘을 이용해 재장전하는 기마 석궁병)로 묘사되었다.
2. 보병과 궁병, 석궁병
보병은 중무장 기병(man-at-arms)보다 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낮은 평가를 받는 보조 병력에 불과했다. 콘타민(Contamine)은 이를 두고 “보병 부대의 지휘관이 되느니 차라리 이름 없는 중무장 기병 부대의 일원이 되는 편이 낫다”라고 평했다.
군대 점검 기록을 살펴보면, 창병, 빌(bill)이나 부즈(vouge)를 든 병사, 쇠뇌병, 파비스(대형 방패)를 든 병사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그 대신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내려서 전투에 임하는 기마 궁수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장 드 트레(gens de trait)’라는 용어는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모든 ‘사수(shooters)’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15세기 초, 일반적인 병력 구성 비율은 중무장 기병 2명당 궁수나 쇠뇌병 1명꼴이었다. 이들은 도보로 싸우기도 했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출신의 용병 기마 쇠뇌병인 경우도 있었다. 아쟁쿠르 전투 직후 스코틀랜드 궁수들이 프랑스로 유입되면서, 이 비율은 역전되어 중무장 기병 1명당 기마 궁수 2명꼴이 되었다.
휴대용 화기는 이미 50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15세기 전반 프랑스군 내에서의 운용은 체계적이지 못했고, 주로 공성전에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근접 방어를 위해 보병들은 흔히 ‘버클러(buckler)’라 불리는 작은 원형 방패를 휴대했으며, 검이나 빌, 혹은 부즈를 사용하여 싸웠다. 오를레앙 포위전이나 앙통 전투 당시의 기록을 보면,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납제 전투용 망치도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쇠뇌병이 재장전하는 동안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두거나 다른 보병들이 사용하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대형 방패인 ‘파비스(pavise)’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1428년, 오를레앙 시는 포위전에 대비하여 이러한 방패를 제작했는데, 높이는 약 3피트 6인치(약 1미터) 정도였다. 이 방패는 (통을 만드는 판자와 같이) 곡면을 이룬 나무판자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위에 보강용 막대를 못으로 고정하고 가죽을 씌워 만들었다. 또한 운반용 끈이 달려 있어, 행군 중이거나 사다리를 오를 때 등에 멜 수 있었다.
3. 프랑스의 동맹국들
백년전쟁 초기부터 프랑스 국왕들은 외국 용병을 고용하고자 했다. 14세기에는 잉글랜드에 대한 복종을 거부한 웨일스인들이 여러 용병 부대를 이끌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웨일스 출신의 많은 이들이 잉글랜드군의 장궁병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제노바 출신의 석궁병들 또한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함께 싸웠다. 프랑스 귀족들이 이들의 활약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노바 용병 부대는 계속해서 유입되어 1416년에는 600명, 이듬해에는 거의 1,500명에 달했다.
아쟁쿠르 전투 이후, 특히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전 기간 동안, 살아남은 프랑스 귀족들 중 다수는 도팽(프랑스 왕세자)을 지원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약탈자들로부터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는 데 집중했고, 종종 적군과 지역적인 휴전을 맺기도 했다.
그 결과, 샤를(도팽)의 사절들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스페인, 사보이, 롬바르디아, 로렌, 독일, 심지어 오스트리아에서 전문 군인들을 모집해야 했다. 1420년대에 프랑스군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에서 절반에 달했다.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이러한 용병들 덕분에 프랑스는 자국 군대를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1423년 크라방 전투에서 패배했을 당시, 샤를은 외국인 용병들의 사상자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차분하게 반응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왕국 출신 귀족은 거의 없었고, 그저 현지에서 약탈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한 스코틀랜드인, 스페인인, 그리고 다른 외국인들뿐이었으니, 그리 큰 피해는 아니다."
(즉, 외국 용병들이 현지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탓에 프랑스 입장에서 그들의 가치는 그만큼 떨어져 있었다는 의미이다.)
(1) 스코틀랜드
1418년 이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 국왕이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시기에 프랑스의 왕태자(도팽)는 스코틀랜드의 섭정인 올버니 공작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1295년부터 잉글랜드에 맞서 양국을 우호 관계로 맺어온 이른바 ‘오래된 동맹’에 따른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백년전쟁 초기에도 프랑스에서 싸운 바 있는데, 제1대 더글러스 백작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스코틀랜드의 무장 병사들이 프랑스군 총사령관 뒤 게클랭을 지원하기도 했다.
1400년 이후 스코틀랜드는 내부의 씨족 전쟁과 그에 따른 빈곤을 겪고 있었으며, 특히 국경 지대의 상황이 심각했다. 국경을 넘어 사흘 정도 이동하는 여정은 ‘황폐한 지역’을 통과해야 했고, “상대방의 왕국으로 들어가려면 먹을 것을 직접 가져가야” 할 정도였다.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무섭고 격렬한 사람들”이자 “어느 나라보다도 가난했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용병이 되기로 동의했다.
올버니 공작은 로랜드(저지대) 출신의 궁수와 무장 병사들(특히 셀커크 숲 출신의 궁수들)과 하이랜드(고지대) 출신의 보병들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 부대들은 유력 가문인 스튜어트 가문과 더글러스 가문 출신의 무장 귀족들이 이끌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배에 실려 온 여러 부대가 대서양 연안에 상륙했다. 1419년에는 올버니 공작의 아들이자 뷰컨 백작인 존 스튜어트가 지휘하는 7,000~8,000명의 병력이 라로셸에 상륙했다.
이듬해에는 오를레앙 시의 기록에 뷰컨 백작의 사촌인 존 스튜어트(던리 백작)가 이끄는 6,000명의 스코틀랜드군이 도착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마지막 부대는 1423년에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지휘하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4~5피트(약 1.2~1.5미터) 길이의 자루가 달린 장병기를 사용했는데, 한쪽에는 초승달이나 마체테(정글도) 모양의 긴 날이 달려 있고 자루 끝에는 갈고리가 붙어 있는 형태였다. 이를 ‘로카버 액스(Lochaber axe)’라고 불렀다. 15세기 스코틀랜드의 장창병들은 이전보다 그 수가 줄어들었는데, 이는 이들이 지나치게 기동성이 떨어지고 화살 공격에 취약하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상대편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궁수들 역시 활과 함께 검을 휴대했다.
1420년부터 1424년까지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 용병대의 주축을 이루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보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이후 크라방 전투에서 참패했고, 베르뇌유 전투에서는 재앙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베르뇌유 전투 당시 뷰컨과 더글러스는 전사했다.
스코틀랜드 내부의 권력 변화로 인해 대규모 증원군 파견은 중단되었고, 살아남은 이들만이 샤를을 위해 계속 싸웠다. 오를레앙 포위전 당시의 보급 기록을 보면, 루브레 전투에서의 최종적인 패배 이후 스코틀랜드 부대에는 10명의 대장과 560명의 병사만이 남아 있었다. 전사, 탈영, 그리고 본국 귀환으로 인해 이 부대는 사실상 보조 부대 수준으로 규모가 축소된 상태였다.
그러나 1434년 11월, 샤를 7세는 자신의 아들이자 미래의 루이 11세가 될 왕자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의 딸 마거릿 간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사절단을 보냈다. 1436년 마거릿이 프랑스로 향할 때, 그녀는 프랑스군을 보강하기 위한 2,000명의 무장 병력을 대동하고 있었다.
프랑스 국왕을 충실히 섬긴 스코틀랜드 출신 대장들 가운데는 로빈 페티로우(Robin Pettylow)가 있었는데, 그의 활동 기간은 최소 10년에 달했다. 1443년에 중장갑 기병대(men-at-arms)의 대장이었던 그는 1445년, ‘콩파니 도르도낭스(compagnies d’ordonnance, 아래 참조)’의 초기 대장 중 한 명이 되었다. 1448년부터 1449년까지 그는 기옌 지역에 주둔한 90개의 ‘랑스(lance, 군사 단위)’ 중 하나를 지휘했으며, 1450년에는 프랑스에 남아 있던 모든 스코틀랜드인 부대의 대장을 맡았다. 프랑스에 도착한 직후부터 다수의 스코틀랜드인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 가장 높은 지위는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투렌 공작에 임명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뷰컨의 존 스튜어트는 프랑스 콘스타블(Constable of France, 총사령관)이 되어 사실상 군대의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1424년에는 단리의 존 스튜어트가 콩크레소(Concressault)와 오비니쉬르네르(Aubigny-sur-Nère)를, 토머스 시턴(Thomas Seton)은 랑제(Langeais) 성을 하사받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스코틀랜드인 대부분은 프랑스에 귀화하여 현지인과 결혼하고 토지를 받았으며, 이후 프랑스에 정착하여 가정을 꾸렸다.
(2) 카스티야
프랑스, 특히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개입은 1369년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했다. 1418년, 샤를 7세는 새로 즉위한 후안 2세에게 조약을 갱신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카스티야 왕국은 군함과 선원, 중장갑 기병, 그리고 전문 보병 부대를 지원했다. 1425~26년 당시 이 병력은 ‘잘 무장하고 훌륭한 말을 갖춘 중장갑 기병 2,000명과 경기병 200~300명’ 규모였다.
카스티야 출신 대장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로드리고 데 비얀드란도였다. 카스티야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1421년부터 약 20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프랑스군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마코네 지역(1422년)과 베리 지역(1423년)에서 부르고뉴파와 맞서 싸웠다.
1428년, 그는 프랑스 남부에서 영국군과 ‘나쁜 프랑스인들’을 격파했으나, 그의 악행으로 인해 ‘약탈자들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430년, 그가 이끄는 부대는 리옹 총독에게 고용되어 앙통 전투에 참전했다. 빌랑드란도는 포로로 잡힌 부르고뉴인들에게서 몸값을 받아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푸시냥 성을 하사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루티에(용병)’로서의 활동을 이어갔지만, 탈몽쉬르지롱드의 영주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규 용병 부대(오르도낭스 부대)의 대장으로 정식 임용되지는 못했고, 결국 카스티야로 돌아갔다. 그가 떠난 뒤 스페인 용병 부대의 지휘권은 부관이었던 살라사르에게 넘어갔다.
(3) 롬바르디아
1421년 11월, 도팽(프랑스 왕세자) 샤를은 밀라노 공작 필리포 비스콘티의 동의하에 롬바르디아 출신 병사들을 고용하기로 하고, 그들의 급료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 일부를 담보로 잡혔다. 1422년 6월 6일, 첫 번째 부대가 알프스산맥을 넘어왔다.
1423년부터 1441년까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들 사이에서 전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출신 중무장 기병들(통칭 ‘롬바르디아인들’)은 프랑스 왕실 군대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롬바르디아 출신의 테올드 드 발페르그는 1423년 7월 20일 자 서한을 통해 250명의 중무장 기병을 거느리고 고용되었으며, 그와 함께 그의 군기와 나팔수들도 동행했다.”
베리 지역의 전령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423년, 테올드 드 발페르그, 보른 드 카케랑(보르노 카케라노), 루캥 뤼스(루키노 루스코니)가 밀라노 공작을 대신하여 600개의 ‘랜스(기병 단위)’와 1,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프랑스에 도착했다.”
발페르그는 1428년 10월, 800명의 중무장 기병, 궁수, 쇠뇌병 및 기타 보병을 이끌고 오를레앙의 방어력을 보강했으며, 이후 파타이 전투에서도 활약했다. 1430년에는 앙통 전투에 참전했고, 리옹의 세네샬(지방 행정관 겸 사법관)이 되었다. 그는 1449~1450년 노르망디 원정 당시 지휘관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루앙 입성에도 참여했고, 3년 뒤에는 보르도 제2차 포위전에도 가담했다.
이탈리아의 ‘랜스(기병 단위)’는 중무장 기병 1명, 경기병 역할을 하는 종자, 그리고 시종으로 구성되었다. 밀라노의 발달한 금속 가공 산업 덕분에, 이들 중무장 기병은 수준 높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전신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프랑스군과는 달리 그들의 말 또한 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금속제 마갑(馬甲)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한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지휘관들은 각 부대에 400개의 ‘랜스(기병대 단위)’를 배치하여 영국군 궁수 대열을 돌파하고자 했으나, 이러한 전술은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롬바르디아인들 중에는 기마 석궁병들도 있었고, 기동성이 뛰어나고 훌륭한 말을 탄 경기병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를레앙 공작의 가신 부대에 관하여 몽스트렐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상당수의 롬바르디아인들은 아주 거친 말들을 타고 분주히 움직이는 데 익숙했는데, 이는 프랑스인, 피카르디인, 플랑드르인, 브라반트인들에게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라 브로지니에르 전투(1423년)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에서 오를레앙 공작파가 부르고뉴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부르고뉴 측의 툴롱종 원수(Marshal de Thoulongeon)가 포로로 잡혔고, 그는 크라방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스튜어트 오브 단리와 교환되었다.
베르뇌유 전투에서 400~500명의 롬바르디아인들이 한쪽 측면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적진을 우회하여 돌격한 끝에 궁수들과 종자들이 지키고 있던 적의 진영에 도달해 그들을 패주시켰다. 그들은 진영을 약탈한 뒤 “더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버렸다.”
그들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참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영국군의 표적이 되었는데, 영국군은 “매우 거세게 돌격하여 그들의 군기를 탈취하고 16명에서 20명가량의 중장갑 기병을 살해했다.”
이 이탈리아인들의 구체적인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문헌 기록을 통해 또 다른 지휘관이었던 바르텔레미 바레타(Barthelemy Baretta)의 행적은 재구성할 수 있다. 베르가모 출신인 그는 1422년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1428년에는 오를레앙에 머물렀고, 이후 라니(Lagny, 1430년)에 주둔하던 중 잔 다르크의 부름을 받아 슈아지 포위망을 해제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그 후 그는 영국군에게 포위된 콤피에뉴에서 잔 다르크와 다시 만났다. 그는 잔 다르크가 자유를 누리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와 함께했으나, 5월 23일 그녀가 포로로 잡히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바레타는 자신이 거느린 32명의 무장 병사, 나팔수 2명, 시종 2명, 쇠뇌병 43명, 그리고 궁수 및 대형 방패병 20명으로 구성된 부대에 대한 급료를 받았다. 포위전이 계속되던 8월 중순 무렵, 그는 부대원의 절반을 전사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로 잃었지만, 탈영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이후에도 경력을 이어가 1440년에는 프랑스 중부 도시인 비시의 지휘관이 되었다.
4. 샤를 7세의 동맹 세력들:
(1) 브르타뉴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도팽(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1427년 베드퍼드 공작과 중립 협정을 맺었고, 이는 1440년 잉글랜드의 헨리 6세와의 조약을 통해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1442년 그가 사망하자 브르타뉴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측에 가담했으며, 이후 벌어진 모든 군사 작전에 브르타뉴의 병력도 참여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브르타뉴 공국 내부에서는 권력이 분산된 양상이 뚜렷했다. 공작의 동생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은 브르타뉴 출신 병력을 이끌고 샤를을 섬겼으며, 결국 프랑스군 총사령관(콩스타블)의 지위까지 올랐다. 1428년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을 포위했을 때, 리슈몽은 고위 귀족, 브르타뉴 기사들과 종자들, 자신의 가신들, 그리고 브르타뉴 접경 지역과 푸아투 영지 내 모든 수비대를 소집했다. 그 규모는 총 400개의 '랑스(기병 단위)'와 800명의 궁병에 달했다. 이 소규모 군대는 루아르 강을 향해 진군하여 잔 다르크와 함께 싸웠다.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 편으로 완전히 돌아서기 전부터, 브르타뉴 출신의 여러 지휘관들이 리슈몽을 따라 프랑스 측에 합류하여 관직과 영지를 하사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투그두알 드 케르무아상은 자르조 포위전(1429년)에 참전했으며, 이후 샤를 7세의 마구간 담당관(에퀴예)이자 트루아 지역의 행정관(바이리)이 되었다. 그는 1450년 셰르부르 포위전 도중 전사했는데, 같은 브르타뉴 출신인 프리장 드 코에티비 또한 이때 함께 목숨을 잃었다.
프리장 드 코에티비는 당시 샤를 7세로부터 프랑스 제독이자 그랑빌의 수비대장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15세기 브르타뉴 출신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프랑스 원수 질 드 레가 있지만, 그는 뛰어난 무공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아이를 살해한 연쇄 살인마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브르타뉴의 군대 역시 15세기 전반에 걸쳐 변화를 겪었다. 이전까지 브르타뉴 공작들은 봉건적 군사 체계에 의존했는데, 군사 작전을 위해 소집령이 내려지면 귀족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은 5,000명에서 9,000명가량의 전투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추가적인 징집을 통해 비슷한 규모의 병력이 모였는데, 여기에는 기마 또는 도보 상태의 중무장 병사, 쿠틸리에(경무장 병사), 시종, 궁수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 모두는 원수나 제독과 같은 전통적인 직위를 지닌 귀족들의 지휘를 받았다.
1425년부터 장 5세는 각 교구에서 궁수와 기타 보병을 징집하여 준상설 보병대를 구성함으로써 군사력을 보강하기로 했다(프랑스의 ‘프랑-아르셰(franc-archers)’ 제도와 유사함; 아래 ‘상설군 창설’ 항목 참조).
1425년에 내려진 칙령에 따르면, 궁수들은 ‘팔을 보호하기 위해 비늘 모양의 금속판, 사슬, 또는 사슬 갑옷이 덧대어진 재킷’을 착용했다. 훨씬 나중인 1449년에 공작은 상설 기병대까지 창설했는데, 이로써 브르타뉴는 프랑스의 ‘칙령 부대(companies of the ordinance)’를 본뜬 최초의 지역이 되었다.
약 700명 규모였던 이 브르타뉴의 ‘랑스(lances, 부대 단위)’는 각각 4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중무장 병사 1명, 쿠틸리에 1명, 궁수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다. 평시에는 이들이 공작령 동부와 남부의 국경 지대 성채에 주둔했다.
또한 공작은 개인 호위대와 포병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브르타뉴의 대포들은 노르망디 하부 지역의 도시들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성벽을 타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 부르고뉴
아라스 조약(1435년) 이후, 부르고뉴, 피카르디, 플랑드르, 콩테 출신의 대부분의 병사들은 프랑스로 복귀하여 점령했던 도시들을 새로운 동맹의 이름으로 계속 유지했다(전통적인 ‘누더기’ 성 안드레아 십자가 문양을 흰색 또는 붉은색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일부는 편을 바꾼 것을 후회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장교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와브랭은 1436년에 군인 생활을 포기했다.
같은 해, 부르고뉴의 필리프 2세(선량공)는 장 드 빌리에 드 리슬아담과 자크 드 랄랭을 600명의 병사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퐁투아즈 탈환 작전에 파견했다. 기술 발전에 발맞춰 필리프 2세는 포병 전력도 증강했다. 1437년 르 크로투아 공성전 당시 부르고뉴군은 베글레르 6문, 크라파댕(박격포) 6문, 쿨레브랭 32문, 쿨레브랭 스틱(?) 28문, 그리고 귄도(윈들러스?) 13문을 운용했다.
그러나 1435년에서 1445년 사이, 부르고뉴 공국이 약탈자 무리에 의해 황폐화되면서 샤를 7세에 대한 부르고뉴의 적극적인 지원은 전반적으로 미약했다. 샤를 7세(이전에는 클레르몽 백작)가 고용한 부르봉 공작 샤를의 부하들은 오세르 지역을 공포에 떨게 하고, 랑그르(1435년)를 점령했으며, 디종까지 위협했다. 1436년에는 로드리고 드 빌랑드랑도(위의 '카스티야' 참조)가 마코네 지방을 침공했다.
2년 후, 약탈자 무리들이 오툉과 오세르 주변 지역을 휩쓸어 주민들을 기아에 시달리게 했다. 공국의 국경에 수비대가 주둔했음에도 불구하고, 약 8,000명의 해적들이 부르고뉴와 로렌 지방에 흩어져 대부분의 부르고뉴 군대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1441년에는 샹파뉴 전투 후 급여도 받지 못하고 할 일만 남게 된 샤를 7세의 군대가 오세르와 토네르 지역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 무장 집단을 상대로 거둔 몇 차례의 승리와 도팽 루이의 도움 덕분에, 1445년 마침내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르고뉴 공작은 나뮈르 백령(1429년), 브라반트 공령(1430년), 룩셈부르크(1443년) 등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겐트를 상대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1449~1453년)을 치르느라 분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고뉴 공작의 동의하에 다수의 부르고뉴 기사 및 무장 병력은 1450년 노르망디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
6. 급료와 약탈
1445년 이전, 국왕은 일정 기간 동안 군사적 의무를 지는 봉신들을 소집하여 군대를 구성했다. 장기적인 원정의 경우, 국왕은 봉건 병사들에게 직접 급료를 지급하거나 용병을 고용해야 했다.
휴전 기간에 이들이 해산되면, 급료를 받지 못한 채 할 일 없이 남겨진 베테랑 병사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무자비한 약탈을 일삼았다. 15세기의 이른바 ‘스킨어(skinners, 프랑스어 ‘écorcher’는 ‘가죽을 벗기다’라는 훨씬 더 끔찍한 의미를 내포한다)’들은 14세기의 ‘대규모 용병단(Great Companies)’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은 특정 지역을 황폐화하며 성채와 작은 마을들을 점령하고,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몸값을 요구했으며, ‘사라센인들조차 저지르지 않을 법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파리의 시민’이라는 기록자는, 명목상으로는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용병단들이 수도 주변에서 저지른 약탈 행위를 전하고 있다. 충성 여부와는 별개로, 급료를 받지 못하고 식량조차 공급받지 못한 병사들은 필연적으로 ‘현지에서 약탈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식량과 땔감으로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강제로 빼앗았고, 상인이나 성직자를 납치해 몸값을 요구했으며, 마을들을 거듭 약탈했다.
1434년, 파리 인근 일드프랑스 지역의 주둔지에서 나온 라 이르의 부대원들은 수도로 향하던 보급대의 호위병들을 살해하고, 수도에 공급될 예정이었던 돼지, 소, 양 등 약 2,000마리의 가축을 탈취했다.
당시 시민들은 이렇게 탄식했다.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 부르는 자들이 매일 성문 앞까지 달려와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있다. 전쟁을 끝내려는 영주도 없고, 병사들에게 급료도 지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훨씬 이전의 뒤 게클랭과 마찬가지로, 도팽(왕세자) 루이 역시 이러한 병사들의 횡포로부터 프랑스 민중을 구제하고자 그들 중 일부를 이끌고 국외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뒤 게클랭은 스페인으로, 루이는 르네 당주를 돕기 위해 알자스로 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방편들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왕을 위해 복무하는 것은 지휘관들에게 상당한 비용이 드는 투자였다. 그들은 직접 부대를 모집하고 필요한 장비를 갖추어야 했으며, 원정이 실제로 시작되기 전까지 병사들의 급료까지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 담당 재무관이 지휘관들에게 비용을 상환해주기도 했고, 그중 왕의 총애를 받는 이들은 왕으로부터 직접 선물을 받기도 했지만, 이러한 지급이 제때 이루어질지는 왕실 재정의 불안정한 상태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429년, 질 드 레는 루아르 전역이 끝날 무렵에야 1,000금화를 지급받았다. 이는 그가 “왕의 명령에 따라 상당한 비용을 들여 중무장 기병과 궁수들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를 소집하고,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자르조 마을을 탈환하기 위해 ‘라 퓌셀(잔 다르크)’과 함께 그 부대를 유지”한 데 대한 대가였다.
표면적으로는 왕을 위해 복무한다는 명분 덕분에 수많은 약탈자가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다. 1432년 라니 구원 작전 당시 빌랑드란도의 부대에서 종군했던 한 종자는, 그들이 “적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습격과 몸값 요구, 그 밖의 작전”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측 백성과 신민들—성직자, 귀족, 상인, 농민을 가리지 않고—에게도 똑같은 짓을 저질러 그들을 붙잡고, 약탈하고, 몸값을 요구했다”고 고백했다.
샤를 7세가 상비군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무장 약탈자들의 횡포를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7. 상비군 창설
(1) 스코틀랜드 근위대
샤를의 '스코틀랜드 근위대(Gardes Écossaises)'는 1418년에 창설되었다. 30명의 중무장 기병과 60명의 궁수 및 쇠뇌병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국왕을 근접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스코틀랜드 출신 대장들이 지휘했다(예: 1425~1447년의 크리스천(?) 체임벌린, 1449~1461년의 패트릭 폴카트와 토머스 할리데이, 1475~1481년의 로버트 커닝엄 등).
1450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가 패트릭 스펜스가 이끄는 24명의 스코틀랜드 귀족을 샤를 왕에게 보냈는데, 이들은 '아르시에 뒤 코르(archiers du corps)' 또는 '가르드 드 라 망슈(garde de la manche)'라고 불렸다.
이처럼 오랫동안 유지된 부대에는 다른 외국인들도 합류할 수 있었는데, 1450년에는 독일 출신의 쇠뇌병 2명이 갑옷을 지급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근위대의 대장이라는 직위는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었는데, 로버트 커닝엄은 이를 통해 얻은 재산으로 스스로 '셰르보(Cherveux) 성'을 처음부터 새로 건축할 수 있을 정도였다.
(2) 콩파니 도르도낭스(Compagnies d’ordonnance)
프랑스어 단어 ‘오르도낭스(ordonnance, 영어의 ‘ordinance’에 해당)’는 명령이나 규정을 의미하며, ‘콩파니 도르도낭스’는 ‘규정에 따라 편성되어 복무하는 부대’를 뜻한다. 이는 1445년 초 샤를 7세가 ‘상비군’ 창설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조치를 가리킨다.
그는 이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삼부회로부터 ‘타유 데 랑스(taille des lances)’, 줄여서 ‘타유(taille)’라고 불리는 연간 세금을 징수할 권한을 얻어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그는 ‘오르도낭스 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1439년 11월 오를레앙에서, 샤를 7세는 왕국의 고위 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군인들에 의한 약탈과 강탈 행위에 대응하기’ 위한 초기 문서를 작성하게 했다.
당시 수많은 지휘관(대장)들이 ‘허가받지 않은 다수의 무장 병력과 궁수들을 모아 큰 피해와 불편을 야기’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응하여 국왕은 자신이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고 그들이 거느릴 병력 규모 또한 직접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지휘관들은 ‘성직자, 귀족, 상인, 농민을 상대로 약탈, 절도, 강도, 몸값 요구, 투옥, 혹은 몸값을 노린 억류 행위’를 저질러서는 안 되며, 이를 어길 경우 직위와 작위를 박탈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할 것이라고 명시되었다.
주택을 공격하거나 가축, 와인, 건초, 직물, 가재도구 등을 훔치는 행위에 대해서도 동일한 처벌이 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부대원은 소속을 옮길 때 반드시 지휘관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말과 갑옷을 몰수당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 규정은 자칭 전투원들을 걸러내고, 해당 연도에 복무할 엄선된 부대들만을 남길 수 있게 해주었다.
첫 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국왕은 모든 무장 병력 부대에서 비전투원(수행원 및 부수적 인원)을 모두 내보낼 것’[즉, 부대를 따라다니던 비정규적인 추종자들을 축출할 것], ‘그리고 해당 무장 병력의 총 규모를 1,500개의 ‘랑스(lance, 기병 단위)’와 3,000명의 궁수로 제한할 것’을 명령한다. 각 중무장 기병에게는 종자 1명, 시종 1명, 궁수 2명, 그리고 말 3필이 배정되었다.
이 계획이 시작될 당시, 각 부대(중대)는 100개의 ‘랜스(lance, 기병 단위)’로 구성되었으며, 국왕이 임명한 15~16명의 귀족 출신 대장들이 이를 지휘했다.
이후 편제가 바뀌어 12명의 대장이 각각 100개의 랜스와 200명의 궁수를 지휘하게 되었고, 다른 2명의 대장은 각각 70개의 랜스와 140명의 궁수를, 또 다른 1명의 대장은 20개의 랜스와 40명의 궁수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 외에 100개의 랜스는 국왕 곁에 남아 국왕 호위대이자 (아마도) 예비대 역할을 수행했다. 100개의 랜스를 거느린 각 대장은 그중 10개를 직접 지휘하고, 나머지 90개를 지휘할 ‘시종장(chamberlain)’들을 임명해야 했다.
부대원들은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았으며 엄격한 규율을 적용받았다. 이들은 질서와 정의를 준수해야 했고, 주둔지를 무단으로 이탈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대가로 이들은 두 달마다 급료를 받았다.
임명된 대장들의 전체 명단은 남아 있지 않지만, 초기 대장 3명은 알려져 있다. 샤를 드 퀼랑, 프랑스 원수 조아솅 루오, 그리고 스코틀랜드인 로빈 페틸로가 그들이다.
이들과 함께 혹은 그 이후에 임명된 이들 중에는 잔 다르크의 옛 동료들(앙드레 드 라발, 장 드 뷔유 등)이나, 심지어 과거 '에코르셰르(écorcheurs, 약탈자 무리)' 출신이었던 인물들(로베르 드 플로크, 포통 드 생트라이유), 그리고 스코틀랜드인 로베르 코닝엄과 같은 베테랑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각 부대에 소속된 일반 중무장 기병들에 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문서상 확인되는 200명 중 27%가 외국인이었는데, 그 절반은 스코틀랜드인이었고, 그 뒤를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그리고 영국인 1명이 이었다. 이들 중무장 기병은 종종 국적별로 무리를 지었으며, 대장직 또한 동족들 사이에서 계승되었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인 부대는 로빈 페틸로, 토머스 스튜어트, 로베르 코닝엄, 조아솅 코닝엄이 차례로 지휘했다.
이 부대들은 왕국 전역의 여러 도시에 주둔했다. 예를 들어, 베리와 같은 특정 지역에 13개 부대가 배치되거나, 아르마냐크와 코맹주, 혹은 푸아투, 생통주, 앙구무아와 같은 여러 지역에 걸쳐 배치되기도 했다. 또한 루아르강 유역의 투렌 지역처럼 강을 경계로 하는 영토에도 주둔했다.
급료의 일부로서 '랑스(lance, 기병 기본 편성 단위)'에 속한 중무장 기병은 4프랑, 궁수는 2프랑을 받았으며, 주둔 도시들은 이들이 '약탈할 이유가 없도록' 매달 식량도 제공해야 했다.
이들 병력은 총 6,000명에 달했고, 9,000마리의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매우 많은 수의 군마를 확보해야 함을 의미했으며, 1445년에는 군마 가격이 상당히 치솟았다.
올리비에 드 라 마르슈(Olivier de La Marche)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프랑스에서 말은 매우 비싼 값에 팔렸다. 그 이유는 모든 귀족이 좋은 말을 타야만 더 잘 알려지고, 선택받으며, 환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튼튼하고 빠른 말들은 외부에서 수입되었다. 완전 무장한 병사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힘센 말들은 독일에서 들어왔지만, 실제로는 다재다능한 스페인산 및 이탈리아산 말들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말들을 포획하는 것은 갑옷이나 보석, 혹은 고귀한 신분의 포로를 획득하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전리품으로 여겨졌다.
(주: 위의 본문에서 "완전 무장한 병사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힘센 말들이 독일로부터 수입되었다"는 내용은 아래에 링크를 단 게시물에서 언급되었던 "독일 기사들은 (다른 나라나 지역들의 기사들보다 몸에 입는) 갑옷이 훨씬 더 무거워서 (다른 나라나 지역들보다) 좀더 튼튼하고 더 큰 말을 탔다."라는 내용과도 뜻이 통한다.
https://cafe.daum.net/historywar/Nwo/3905
그렇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 모든 기사들이 똑같이 조랑말과 같거나 체구가 조랑말과 비슷한 작은 말만 탔다는 한국 인터넷상의 속설들은 잘못된 견해이다.)
(3) 프랑스의 궁수들
14세기에는 사실상 훈련을 받지 않은 민병대(공동체 징집병)를 운용하는 방식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보병의 중요성이 다소 감소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뒤, 보병은—충분한 훈련과 체계적인 지휘가 뒷받침된다면—저렴한 장비를 갖춘 채 다시금 전장의 중심부로 복귀하게 되었다.
영국 궁수들에 맞서 조직적인 병력을 구성하고자 했던 프랑스 국왕들은 궁수와 석궁병들로 이루어진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숙련된 사용을 위해서는 수년간의 훈련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궁은 여러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분당 12발을 쏠 수 있는 빠른 발사 속도, 최소 150미터(야드) 거리까지 보장되는 준수한 정확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 운반의 용이성, 그리고 낮은 유지비가 그것이다.
샤를 5세(재위 1364~1380년) 시대부터 장궁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발사 속도가 느리고 구조가 복잡하며 비용도 많이 드는 석궁은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석궁은 (전통적으로 석궁을 사용해 온 왕국 남부 지역을 제외하면) 주로 ‘거점 경비’ 용도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샤를 5세는 장궁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여러 도시에 특권을 부여했다. 정기적인 훈련에 참여하는 대가로, 이 초기 형태의 민병대원들은 경계 근무와 세금 납부 의무를 면제받았으며, 일당으로 은화 2닢을 받았다. 만약 거주 도시 밖에서 복무해야 할 경우에는 일당이 4닢으로 늘어났다.
샤를 5세는 궁술과 석궁 연습을 장려하기 위해 왕국 전역에서 모든 종류의 유희(게임)를 금지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샤를 7세가 ‘프랑 아르셰(franc-archers, 자유 궁수대)’를 창설한 것은 그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전문 전사로 자리 잡은 기사나 보병들과 달리, 이들은 각 도시의 지역 민병대로 편성된 일반 시민들이었다.
1448년 4월 28일 몽틸레투르에서 공포된 칙령에 따라 창설된 이 부대는, 기존의 상비군 부대를 보강하기 위한 약 8,000명 규모의 예비대 역할을 목표로 했다. 이 민병대원들은 소금세(gabelle)를 제외한 모든 세금과 경계 근무 의무를 면제받았으며, 군인을 자신의 집에 숙박시켜야 하는 의무(병사 숙박 부담)에서도 제외되었다. 그 대가로 자유 궁수는 축제일에 훈련하고, 장비를 관리하며, 원정 임무에 참여하는 대가로 매달 4리브르 투르누아의 임금을 받았다.
왕실이 임명한 마을 대장이 주도한 모집 방식은 혁신적이었다. 각 교구는 50가구당 대장이 선발한, 실력이 검증된 궁수 한 명을 제공해야 했다.
예를 들어 콩피에뉴 마을에서는 7명의 궁수를 제공해야 했다. 궁수의 장비는 약 100리브르였는데, 마을에서 부담했다.
1448년 푸아티에 마을은 처음에는 공동체에서 장비를 제공한 자유 궁수 30명을 제공해야 했지만, 협상을 통해 12명으로 줄였다.
일부 사료에서는 자유 궁수 부대가 흰색 십자가가 수놓아진 호케통이라는 제복을 입었다고 언급하지만, 이 용어의 의미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케통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갑옷 아래에 덧입는 패딩용 옷이나 겉옷으로 과시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 노르망디 재정복을 묘사한 세밀화에서, 샤를 7세의 개인 색상(녹색, 흰색, 빨간색)으로 제작된 겉옷에는 흰색 십자가가 나타난다.
다른 ‘제복’ 품목들은 특정 도시나 지방의 제복 색상과 휘장을 나타낸다. 콩피에뉴의 자유 궁수는 챙이 없는 머리 장식에 뚜렷한 목 보호대를 착용했다. 그 위에 주홍색 천으로 만든 두건을 걸치고 흰색 십자가를 달았다.
브리간딘을 착용한 궁수는 소수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천으로 만든 재킷을 입었다. 몽페랑의 석궁병은 흰색 십자가가 있는 가죽옷을 입었고, 리옹의 석궁병은 흰색 십자가가 있는 빨간색 제복을, 니옹의 궁수는 녹색과 흰색 제복을 입었다.
'자유 궁수대'는 144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시작했다. 프랑수아 드 쉬리엔(영국 측 동맹자)이 푸제르를 점령하자, 샤를 7세는 트루아 조약 이후 이어져 온 긴 휴전 상태를 끝냈다. 그는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해 두 개의 군대를 투입했다.
당시 노르망디 주민들은 영국 점령군에 맞서 점점 더 거세게 저항하고 있었다. 장 드 뒤누아는 동쪽에서, 브르타뉴군은 서쪽에서 진격했다.
1449년 5월 15일 영국군이 퐁 드 라르슈에서 항복하고, 1450년 8월 12일 그들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셰르부르가 함락되기까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노르망디 지역은 완전히 탈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유 궁수대는 포르미니 전투를 비롯한 여러 포위전에서 활약했으며, 때로는 갱도를 파는 작업이나 포병 지원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특히 누아용, 랑, 랭스 출신의 자유 궁수대원들은 캉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성벽 아래에 갱도를 파서 거대한 탑을 무너뜨렸고, 덕분에 프랑스군은 도시를 공격해 점령할 수 있었다.
투렌 출신 부대는 블라이 공격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대는 전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했으며, 프랑스군이 보르도에 최종적으로 입성할 당시 유일하게 행진 대열에 포함되지 못한 부대였다.
1451년 11월 9일, 샤를 7세는 자유 궁수대 지휘관들에 관한 새로운 칙령에 서명했다. 이후 이들은 지역 관리인 '베일리(bailiff)'나 '세네샬(seneschal)' 앞에서 복무 서약을 해야 했다. 또한 장비가 잘 관리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정기 검열을 수행하고 관련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 대가로 이들은 연간 100리브르의 급료를 받았다.
(4) 포병
화약 포병의 등장은 전쟁의 양상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지만, 그 변화는 처음에는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1429년 오를레앙의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 ‘쿠이야르(couillard, 균형추식 투석기인 트레뷰셋의 소형 버전)’ 두 기가 배치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진자식’ 공성 병기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병기들은 돌이 담긴 자루를 던졌는데, 그중 하나는 무게가 최대 200파운드(90kg)에 달했다. 또한 1435년 생드니 포위전과 1450년 베르뇌유 포위전 당시 인력으로 작동하는 망고넬이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당시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은 성이나 도시의 성벽을 돌파하는 능력이었다. 포위전은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장기화될 경우 포위군 진영에 질병이 창궐하기 일쑤였다. 대부분의 포위군은 요새화된 거점을 완전히 봉쇄하여 수비대를 굶주림으로 항복시킬 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다.
포위전은 종종 수비 측 내부자의 배신으로 결말이 나곤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탑이나 성벽 아래를 힘들게 파내어(굴착 작업) 구조를 약화시킴으로써, 사다리를 이용한 돌격이 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대형 ‘봄바드’ 포의 등장은 성벽 돌파 과정을 앞당겼고, 더 가벼운 ‘뵈글레르’ 포는 굴착 작업을 보호하거나 성벽을 오르는 돌격 부대의 진격을 엄호하는 데 사용되었다. 요새를 강습하기 위해서는 ‘참호와 갱도 등을 이용해 요새에 바짝 다가가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보루를 구축해야 했으며, 포병들은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튼튼한 ‘만틀레(mantlet, 목재 방패)’를 사용해야 했다. 1416년 상리스 포위전에 관해 ‘생드니의 수도사’는, 더 이상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대포알과 소이탄을 이용한 포격전만이 펼쳐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르망디 원정 당시 프랑스군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와 다양한 종류의 포병 무기를 동원했다.
뒤 클레르크(Du Clerq)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곳에는 대형 봄바드, 대포, 뵈글레르, 세르팡틴(serpentine), 크라포도(crapaudeaux), 쿨뢰브린(couleuvrine), 리볼드캥(ribauldequin) 등 엄청난 수의 화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병기들은 ‘화약, 방호 시설, 그리고 도시나 성을 공략하고 점령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며, 이를 운반할 다수의 마차와 마부들도 동반하고 있었다’.
공격 측은 도시를 불태우기 위해 대형 화염 투사체나 로켓을 발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낙하하는 곳마다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한편, 비교적 명중률이 높은 소형 화포는 적을—적어도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경우—조준하여 타격할 수 있었으며, 적의 포대와 그 운용 인력은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다.
연대기에는 포병들이 지휘관들을 겨냥해 사격한 사례도 다수 기록되어 있는데, 그 예로는 알랑송 공작, 솔즈베리 백작, 그리고 1450년 옹플뢰르 전투 당시 몽타르지의 집행관이었던 기욤 등이 있다. 자크 드 랄랭은 포위전 도중 ‘뵈글레르’에서 발사된 포탄에 방패가 파괴되면서 목숨을 잃었는데, 당시 그는 ‘머리 한쪽이 날아가고 뇌의 일부까지 함께 떨어져 나갈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노르망디 원정 당시, 전사한 지휘관들의 수는 백병전에서보다 포격에 의해 사망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1429년, 오를레앙의 수비대는 다양한 구경과 크기의 화포 105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네 바퀴 달린 포가에 얹힌 대형 포(봄바르드)와 고정식 포가에 설치된 대포들이 포함되었으며, 두 유형 모두 700야드(약 650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잔 다르크가 도착하기 전, 한 주조 기술자가 총신이 점차 가늘어지는 형태의(아마도 구경이 작은) 화포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 화포는 루아르 강 너머 약 1,350미터 거리까지 포탄을 날려 보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더 우수한 품질의 화약과 주철제 포탄, 그리고 충분한 수의 화포가 갖춰짐에 따라 포병대는 파괴적인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기록자들은 포위된 도시의 성벽, 탑, 가옥에 가해진 반복적인 포격이 초래한 파괴상을 전하고 있다. 며칠 동안 집중 포격을 받은 외벽의 특정 구간이 무너져 내리면, 그 잔해들이 성벽 밖 해자를 메우게 되었고, 이를 통해 공격군이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능한 전문가들과 아낌없는 재정 지원 덕분에 프랑스군의 포병대는 영국군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물론 부르고뉴군의 포병대 또한 매우 발전된 상태였다).
샤를 7세 치하에서 포병대의 지휘 체계나 감독 구조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포병들은 정식 군대 명부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들이 누구에게 보고했는지, 혹은 누가 장비의 제조와 유지보수를 관리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몇몇 인물은 이름을 남겼다. 파리의 평범한 시민이었던 뷔로 가문의 형제, 장과 가스파르는 1436년 샤를 7세의 진영에 합류했다. 그들은 1440년부터 1452년 사이에 왕실이 운용하는 ‘병기’들의 통일성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화포의 구경을 표준화하려 했으며, 기존의 내구성이 약한 ‘철제 막대와 띠’를 결합해 만든 방식이나 가벼운 청동 주조 포 대신, 주철제 화포의 생산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들은 1438년 모 포위전 이후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후기 영토 탈환 작전에서는 포병대뿐만 아니라 ‘프랑 아르셰’까지 직접 조직하고 지휘했다.
장은 프랑스의 재무관이자 회계관을 역임했으며, 1442년에는 포병대장이 되었다. 2년 후 그는 피에르 베소노의 뒤를 이어 국왕 포병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447년에는 기사 서임을 받았고, 1453년 탈보트를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 카스티용 후작이라는 작위를 얻었다.
이 시기는 화약 무기가 공성전의 영역을 넘어 일반 전장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때이기도 했다. 비교적 신속하게 재장전이 가능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다양한 화포들이 전열 앞에 배치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연대기 기록들에 따르면 1346년 크레시 전투 당시에도 화기가 존재했는데, 프로아사르는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놀라게 하려고 전투 중에 대포를 발사했다’고 기록했으나, 그 실질적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15세기 초가 되어서야 벨기에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여러 회전(會戰)에서 화포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아쟁쿠르 전투에 참전했던 르 페브르 드 생레미는 ‘프랑스군은 5만 명이 넘는 병력과 다수의 마차 및 수레, 대포, 그리고 서펜타인(소형 대포의 일종) 등을 갖추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5) 컬버린(culverin) 혁명
독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컬버린'이라 불리는 경포(輕砲)는 1428년 7월 프랑스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샤를 7세는 앙제 출신의 포병 전문가 장 드 몽테실레에게 오를레앙에 있는 자신의 군대에 합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형 컬버린'을 운용한 그의 활약상은 『오를레앙 포위전 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벨크루아 보루를 향해 포격하여 "수많은 영국군을 사상케 했으며", 이후 자르조 포위전에서도 활약했다.
이듬해, 잔 다르크가 이끄는 군대에 포위된 파리 시민들은 영국군에게는 생소했던 이 새로운 무기를 목격하게 되었다.
"공격자들은 컬버린이라 불리는 무기를 사용했는데, 이는 약간의 휘파람 소리 외에는 별다른 소음을 내지 않았으며, 쇠뇌처럼 정확하게 직선으로 발사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여러 도시가 이 무기를 도입했다.
컬버린은 여러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모두 납 탄환을 발사했다. 그중 가장 작은 종류(무게 약 10kg/22파운드)는 바퀴 달린 포가(砲架)를 장착하여 전장에서 기동성 있게 운용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무기는 곧 높은 정확도와 치명적인 위력을 입증해 보였다. 『파리 시민의 일기』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특히 컬버린이라 불리는 작고 긴 대포를 사용하여 적을 살상했으며, 이 포탄에 맞은 자는 살아남기 어려웠다"고 한다.
1435년 제르브루아 전투에서 라 이르가 이끄는 부대가 영국군 부대를 공격했을 때, 아룬델 백작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은 바로 컬버린이었다. 이 사건은 영국군의 패주를 앞당겼으며, 컬버린의 뛰어난 기동성과 정확성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의 대포(중포 및 경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 군수 지원
15세기 중반 이후 군대 규모가 커짐에 따라 군사 작전에는 상당한 수준의 군수 지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 ‘전시 경제’ 체제로 이어졌다.
1439년, 아르튀르 드 리슈몽은 영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도시 모를 포위했다. 리슈몽은 50개의 부대(중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각 부대의 병력 규모는 제각각이었으며 최대 700명에 달하는 부대도 있었다. 이 군대의 총병력은 5,000명으로, 중무장 기병 1,505명, 기마 궁수 3,295명, 그리고 장창병 및 기타 보병 187명으로 구성되었다.
몇 년 후, 노르망디의 캉을 포위 공격했을 때(1450년), 샤를은 두 개의 지휘 체계 아래 총 17,000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제1군단은 1,400개의 ‘랜스(lance, 기병 단위)’, 4,500명의 기마 궁수·단검병·장창병, 그리고 2,000명의 자유 궁수(보병)로 이루어졌다. 뒤누아가 지휘한 제2군단은 600개의 랜스, 2,500명의 기마 궁수·단검병·장창병, 그리고 2,000명의 보병 궁수로 구성되었다.
그 직후, 1451~1453년의 기옌 원정 당시에는 18,000명에서 19,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었다.
모든 원정에는 수많은 민간인이 함께했는데, 이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직종의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5세기 초 칼레를 겨냥한 작전에는 3,400명의 중무장 기병, 1,700명의 쇠뇌병 및 궁수, 그리고 약 10문의 대포를 운용할 49명의 포병이 동원되었다. 목책, 방패막이, 야전 방어 시설, 투석기를 건설하기 위해 710명의 목수가 모집되었고, 토목 공사를 위해 1,800명의 공병이 투입되었으며, 물자를 수로로 운송하기 위해 322명의 바지선 선원들이 고용되었다.
필요한 장비를 갖추기 위해서는 화살, 활과 쇠뇌, 방패, 폴액스(장병기), 사다리, 수레, 랜턴, 삽과 같은 도구들, 그리고 2,700개의 석제 대포알과 2만 파운드 무게의 화약을 마련하는 데 비용이 들었다. 또한, 이러한 물자와 탄약, 가축 사료를 운반할 수레꾼들을 징발해야 했다.
귀족들은 브리간딘(동양의 두정갑과 비슷한 갑옷)과 같은 장비를 잘 수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재단사와 장인들을 대동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이동할 때 갑옷 제작자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들은 ‘공작 전하의 사슬 갑옷 5벌과 고르겟(목 보호구)’을 닦아 윤이 나게 관리해야 했다.
그 밖에도 종교 의식을 집전할 사제들이 있었고, 군 행정을 담당할 성직자와 서기들도 동행했는데, 당시의 군 행정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교했다.
군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상인들도 대개 군대와 함께 움직였다. 야전 부대의 식량은 제한적이었는데, 주로 빵이나 비스킷을 만들기 위한 밀가루, 돼지기름(라드), 그리고 (수없이 많은 금식일에 대비한) 생선 등이 전부였다. 수천 마리의 말(승마용 및 짐을 끄는 말)을 먹여야 했기에, 많은 이들이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건초나 다른 사료를 구하거나 훔쳐 왔다.
1439년 모 포위전에 합류한 증원군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들은 견과류와 빵으로 겨우 끼니를 때울 만큼 형편없이 먹었지만, 말들은 아주 잘 먹였다”라고 적혀 있다.
(7) 해군
1372년 라로셸 전투에서 프랑스-카스티야 연합군이 승리한 이후, 영국은 제해권을 상실했다. 간헐적으로 소집되는 영국 함대는 병력과 보급품, 장비를 대륙으로 수송하는 단순한 역할로 전락했다.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한 이후, 영국은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그 결과 함대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측에서는 카스티야가 가장 큰 기여를 했다. 1420년 1월, 카스티야 왕 후안 2세는 갤리선 20척과 대형 군함 60척을 지원했으며, 선원들의 3개월치 급료와 4개월치 식량까지 제공했다. 프랑스 제독의 지휘를 받은 이 함대는 라로셸로 향하는 도중 영국 선박들을 공격하여 침몰시켰고, 이후 대서양 연안 항구들과 스코틀랜드 사이를 오가며 활동했다.
브르타뉴의 선박들 또한 프랑스를 지원했다. 1425년 5월, 생말로에서 온 함대가 몽생미셸로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노르망디 및 영국 측 캐랙선들을 격파했다.
이후 이들은 1425년과 1427년에 있었던 포위전 당시, 섬 요새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427년 8월에는 브르타뉴의 ‘포경선’(배수량 50~80톤 규모의 소형 선박)들로 구성된 함대가 급파되어, 영국 함대가 라로셸에 병력을 상륙시키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마지막으로 1453년, 보르도에 대한 최후의 포위전이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다. 프랑스, 브르타뉴, 스페인, 플랑드르, 제일란트 출신의 선박들이 가론강 하구에 배치되어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다.
8. 무기와 갑옷들
(1) 갑옷
1410년경의 프랑스 필사본 삽화에는 한 기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사슬 갑옷(메일 하우버크)을 입고 있는데, 이는 긴 소매에 사타구니까지 내려오는 길이다. 그 위에는 작은 금속 조각들을 덧댄 망토 형태의 깃이 있고, 사슬 갑옷으로 덮인 팔과 허벅지 앞쪽 및 바깥쪽에는 관절형 판금 갑옷이 덧대어져 있다. 무릎 아래로는 완전히 판금 갑옷으로 감싸여 있으며, 손에는 관절형 판금 건틀릿을 착용했다. 머리에는 뾰족한 바시넷 투구를 썼는데, 여기에는 '하운스컬(hounskull)'이라 불리는 돌출된 형태의 바이저(안면 보호대)가 달려 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방어 장비는 더욱 강화되고 개선되었으며, 관련 용어도 변화했다. 예를 들어, '전투용 복장'이라는 표현은 '화이트 하니스(white harness, 즉 광택을 낸 강철 갑옷)'나 '풀 하니스(full harness, 전신 갑옷)'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헨리 5세의 종군 사제는 아쟁쿠르 전투 당시 프랑스 기사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우선 무릎까지 내려오는, 매우 무거운 긴 강철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안쪽에는 다리용 갑옷을, 바깥쪽에는 '화이트 하니스'를 착용했으며, 사슬로 된 목 보호대(아벤테일)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중무장한 상태였는데, 지면이 무른 탓에 창을 제대로 들어 올리기조차 어려워했다."
1448년에 작성된 한 익명의 필사본은 후기 시대의 중장갑병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전한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 기꺼이 '화이트 하니스'를 전신에 착용한다. 이는 흉갑과 배갑(가슴과 등을 보호하는 판금), 팔 보호대, 커다란 상박 보호대, 다리 보호대, 건틀릿, 바이저가 달린 살렛(투구), 그리고 턱 부분만을 가리는 작은 베보르(목 보호대)로 구성된다."
1415~1420년경부터는 어깨 보호 장비가 강화되었는데, 특히 왼쪽 어깨의 경우 창을 이용한 돌격 시 더 이상 방패를 휴대하지 않게 됨에 따라 보호구를 더 크게 만들고 외부 보강용 판금을 덧대었다.
1450년대 전쟁이 끝날 무렵, 갑옷은 북이탈리아와 남독일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력에 힘입어 그 발전의 정점에 도달했다. 금속 판금 부품들은(부유한 고객의 경우, 개인의 신체 치수에 맞춰 제작된 모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정교하게 형태가 잡히고 결합되어, 착용자가 움직일 때 각 판금이 서로 매끄럽게 미끄러지며 유연하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판금 갑옷으로 보호할 수 없는 틈새(예: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부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갑옷 아래에 입는 튼튼한 의복에 사슬 갑옷 조각을 덧대어 꿰매었다.
판금의 두께는 두꺼워졌고 금속의 품질 또한 향상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장궁에서 쏜 화살을 막아낼 수 있는 ‘하프 프루프(half-proof) 갑옷’과, 더 강력한 쇠뇌용 볼트(화살)까지 견뎌낼 수 있는 ‘프루프(proof) 갑옷’이 등장했다.
이러한 발전은 자연스럽게 무게 증가로 이어졌다. 14세기 기사가 약 15kg(33파운드)의 갑옷을 입고 5kg(11파운드)의 무기를 휴대했던 반면, 15세기 기사는 최대 35kg(77파운드)에 달하는 장비를 착용했다. 다만, 이 무게는 신체 전체에 더 고르게 분산되었다.
그럼에도 갑옷을 입은 사람이 완전히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알리보디에르 포위전 당시, 사다리를 타고 싸우던 한 용맹한 종자가 다리 갑옷의 관절 부위에 창을 찔리는 부상을 입었고, 며칠 뒤 그 상처로 사망한 사례가 있다.
갑옷의 무게는 늘어났지만, 당시의 기록과 그림들을 보면 갑옷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 덕분에 무장한 병사가 별도의 도움 없이도 말에서 내리거나 공성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훨씬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는데, 특히 군사 작전이 주로 날씨가 따뜻한 계절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했다.
롬바르디아 전역의 도시들은 활기가 넘쳤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널리 인정받는 제품들은 알프스 너머로 수출되었다. 갑옷의 품질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었는데, 일반적인 중무장 병사의 장비조차 3개월 치 급여에 해당하는 고가였다.
1440년대에 샤를 7세는 파리와 가깝고 노르망디와 기옌이라는 두 전선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투르를 무기 제조의 중심지로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10년 동안 국왕은 주로 프랑스인 갑옷 장인 발사랭 드 트레즈에게 의존했는데, 그는 경비병과 지휘관들이 사용할 갑옷과 브리간딘(판금 조각을 덧댄 갑옷) 대부분을 공급했다.
투르에는 사슬 갑옷을 만드는 장인들도 많이 모여 있었는데, 알려진 38명의 갑옷 장인 중 상당수가 외국인이었다. 높은 보수를 보고 이주해 온 롬바르디아 출신 장인들은 고도의 기술력을 가져왔다. 메라빌리아 가문처럼 그곳에 정착하여 1세기 넘게 활동한 이들도 있었다.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공작들이 파견한 갑옷 장인들도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국왕 측근의 관리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들은 갑옷을 제작할 때마다 받는 보수 외에도 평생 동안 일종의 급여(유지비)를 지급받았다. 투렌 지역의 장인들은 파리, 리옹, 낭트의 다른 공방들과 기술을 교류하며 새로운 제작 기법에 관한 지식을 확산시켰다.
1430년 6월 안통 전투 이후 벌어진 소송 덕분에, 당시 전투에 참여한 일반적인 중무장 병사의 장비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도피네 지역을 정복하려던 루이 드 샬롱 휘하의 부르고뉴군은 라울 드 고쿠르가 이끄는 소규모 지역 군대에 숲속에서 매복 공격을 당해 패배했다.
이때 부르고뉴군 소속 종군 기사였던 루이 드 몰프레는 도피네군 소속 종군 기사 피에르 펠랭을 고소했는데, 그 이유는 피에르 펠랭이 전투 중 포로가 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심문 과정에서 몰프레는 자신의 상대가 다음과 같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턱받이가 달린 살레(sallet, 투구), 흉갑, 다리 보호구, 칼집에 꽂힌 검, 그리고 술 장식이 없는 검은색 퍼스티안(fustian, 거친 능직 면직물) 소재의 '위크(huque, 타바드와 유사한 겉옷)'를 착용하고 있었다. 살레 아래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상태였다." 펠랭(Pèlerin)은 자신의 장비를 조금 다르게 묘사했다. "나는 턱받이나 고르제(gorget, 목 보호구)가 없는 살레를 썼다. 살레 위에는 흰색 십자가 세 개가 그려진 붉은색 올(orle, 장식용 띠)이 둘러져 있었다. 또한 팔 보호구와 아주 훌륭한 검을 갖추었고, 술 장식이 없는 검은색 퍼스티안 소재의 위크를 입었는데, 그 위에는 정교하게 만들어 꿰매 붙인 흰색 십자가가 있었다. 다리 보호구는 착용하지 않았고, 대신 잘 만들어진 '위조(huseaux, 긴 부츠)'를 신었다."
이렇게 덧붙여진 흰색 십자가에 관한 기록은 15세기 초 무렵 군장비가 점차 표준화되어 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최상류 귀족과 그들의 수행원을 제외하면, 출신 국가나 사회적 지위가 다른 무장 병사들 사이의 외견상 차이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부대별 복장(리버리)과 휘장, 그리고 국가를 식별할 수 있는 표식이 필요해졌다. 그 예로 가슴과 등에 서로 다른 색상의 십자가를 꿰매거나 그려 넣는 방식을 들 수 있는데, 잉글랜드군은 빨간색, 프랑스군은 흰색, 브르타뉴군은 검은색을 사용했다. 부르고뉴군은 빨간색 또는 흰색의 '거친 나뭇가지 모양' 성 안드레 십자가(X자형 십자가)를, 스코틀랜드군은 흰색 성 안드레 십자가를 사용했다.
(2) 무기
공격용 무기는 이전 세기와 달라지지 않았는데, 바로 창, 검, 그리고 폴액스였다.
랜스는 주로 기마 전투에서 사용되었으며, 상대 기사를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갑옷을 뚫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때로는 이를 잘라내어 보병 전투용인 ‘데미 랜스(demi-lance)’로 쓰기도 했다. 베르뇌유 전투 당시, 중무장 병사들은 랜스를 짧게 다듬었고, 적과 맞닥뜨리자 ‘폴액스로 내리치고 창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검은 기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무기였다. 검은 대개 양날이 서 있고 끝이 뾰족하며, 다이아몬드 형태의 단면을 가진 삼각형 모양이었다. 종종 ‘핸드 앤 어 하프(hand-and-a-half, 한 손 반용)’라 불리는 긴 손잡이가 달려 있어 양손으로 쥐고 사용할 수도 있었다.
연대기 작가 샤스틀랭은 크루아 가문의 기사가 “검을 휘둘러 찌르고 베며 엄청난 무용을 선보였고, 갑옷의 고리와 경첩을 부수며 쉴 새 없이 싸웠다”고 기록했다.
검은 찌르기에 특히 유용했는데, 이는 완전히 갑옷으로 무장한 상대를 상대로는 날로 베는 공격이 거의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루아의 영주는 검을 한 손에 쥐고 찌르기와 베기 공격을 모두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병 전투는 흔히 폴액스를 사용하다가 검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곤 했다. 폴액스는 본질적으로 끝이 뾰족한 자루에 커다란 양손용 도끼날을 결합한 형태였다.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폴액스에 맞은 충격으로 헨리 5세의 왕관이 달린 투구에서 보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몽-앙-비뫼 전투에서는 기사들이 “검과 도끼날을 휘두르며 서로의 투구 바이저(안면 보호구)를 비롯한 온몸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같은 전투에서, 한 건장한 중무장 병사가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아무도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폴액스를 휘두르며… 마치 도축업자가 소를 잡듯 적들을 쓰러뜨렸다.”
(3) 보병 및 쿠틸리에(경무장 병사)의 장비
장 샤르티에는 노르망디 전역 당시 이러한 병사들이 갖추었던 비교적 가벼운 장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기마 궁수들은 대부분 브리간딘(판금 조각을 덧댄 갑옷), 다리 보호구, 살레(투구)를 착용했는데, 이 장비들 중 다수는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혹은 최소한 '잭'이나 질 좋은 하우버크(사슬 갑옷)를 갖추고 있었다."
또 다른 기록자는 '캔버스 천을 매우 겹겹이 덧대어 만든' 커다란 잭에 대해 언급한다. 이러한 잭은 칼날을 막아낼 수 있어야 했지만, 금속제 신체 보호구가 부족했기에 궁수들은 취약한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베르뇌유 전투 현장에 있었던 와브랭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궁수들은 서로를 향해 매우 잔혹하게 화살을 쏘아댔는데, 그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화살에 정면으로 맞은 이들은 곧바로 죽음을 맞이했다."
('잭', '감베종', '아케톤'과 같은 용어의 사용은 때때로 모호하지만, 일반적으로 '잭'은 판금 갑옷 대신 착용하는 누비 갑옷을 의미하며, '감베종', '아케톤', 그리고 '푸르푸앵'은 판금 갑옷 안에 받쳐 입는 형태의 누비 갑옷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잭은 브리간딘이나 사슬 갑옷인 하우버크보다 당연히 저렴했지만, 그럼에도 규정된 소재와 품질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장인의 긴 작업 시간이 필요했다. 잭은 20~30겹의 캔버스 천 사이에 사슴 가죽을 덧대어 만들기도 했다.
또한 내부를 낡고 부드러운 천이나 삼베 찌꺼기로 채운 뒤, 세로 방향으로만 누비거나 사각형 또는 마름모꼴 무늬로 누비기도 했다. 세기가 흐르면서 잭은 허리 라인을 살려 몸에 딱 맞게 재단되는 형태로 발전했다.
브리간딘은 직물(또는 가죽)로 만든 의복—대개 소매가 없는 형태—의 안쪽에 작은 강철 판들을 리벳으로 고정해 만든 갑옷이다. 모든 계층이 착용할 수 있었으나, 비교적 저렴한 가격 덕분에 궁수나 다른 보병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했다.
15세기 동안 브리간딘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현존하는 실물이나 상세한 도상 자료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금속 판의 크기는 더 작아지고 그 수는 늘어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제작 방식을 단순화하고 기동성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448년 앙제의 갑옷 제작자 조합이 발표한 규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브리간딘 제작자는 26~27파운드 무게의 가장 무거운 제품을 만들어야 하며, 이는 ‘염소 발’ 모양의 지렛대 장치가 달린 쇠뇌를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18~20파운드 무게의, 이른바 ‘절반 방어력(half-proof)’을 갖춘 브리간딘도 제작해야 하는데, 이는 (허리띠의 갈고리에 걸어 수동으로 당기는 방식의) 쇠뇌를 막아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강철 판들은 전체적으로 경화(열처리)되어야 하고, 판과 천 사이에는 가죽을 덧대어야 하며, 천이 더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판의 가장자리를 모두 줄로 다듬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1450년 1월 9일, 국왕은 ‘갑옷 및 기타 전투용 복장 총괄 검사관’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방어 장비의 제조와 보급을 감독하도록 했다. 1452년과 1456년에도 국왕은 총기 제작자, 브리간딘 제작자, 그리고 (빌이나 단검을 포함한) 날이 달린 무기 제작자 조합의 생산품에 대해 유사한 규정을 마련했다.
자유 궁수들은 흰 끈으로 자루를 감싼, 길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양손검 한 자루와 단검, 주목나무로 만든 장궁, 그리고 철촉이 달린 화살 17발을 지급받았다. 석궁병들은 화살(볼트)을 화살통에 넣어 다녔고, 궁수들은 허리띠에 가죽이나 금속으로 된 고리를 달아 그곳에 화살 10발 정도를 꽂아 휴대했다. 근접전을 대비해 그들은 중무장 병사(맨앳암즈)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더 긴 단검을 휴대하기도 했다.
쿠틸리에(coutilier)는 바이저가 없는 살렛(투구), 사슬 갑옷(하우버크), 다리 갑옷, 그리고 건틀릿을 착용했다. 르네 드 벨발의 저서 『프랑스 군사 복식』에 따르면, 이들은 '카탈루냐식 낫'(정확한 형태는 알려지지 않음)이나 '황소 혀(ox tongue)'—부즈(vouge)와 유사한, 넓고 양날이 선 무기—그리고 단검으로 무장했다. 단검은 퀼리온 단검(작은 검 모양)이거나, 특히 론델(rondel) 단검인 경우가 많았다.
일부 단검은 길이가 최대 19인치(50cm)에 달했으며, 모두 끝이 날카로워 '화이트 하니스(판금 갑옷)'의 틈새나 다른 방어구의 취약점을 찌르는 데 유용했다. 기사의 종자(valet) 또한 살렛 투구와 잭(누비 갑옷), 사슬 갑옷, 또는 브리간딘(판금 조각을 덧댄 갑옷)을 착용했으며, 폴액스(장병 무기)나 빌 같은 무기와 단검을 휴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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