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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에페 1,1-10
복 음 : 루카 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올해는 참 유난한 해입니다.
29년째 여기 불암산 자락 울창한 숲속같은 수도원에 살아오면서 올해 같은 때는 처음입니다.
예전 5-6월, 아침 눈뜰때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새노래 소리가 요란했는데 올해는 거의 기억이 없습니다.
매미소리도 적었고 나비, 벌, 고추잠자리도 거의 보지 못했으며 가을의 들꽃들도 그렇게 초라할 수 없습니다.
기후 변화에 따른 불길한 조짐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단풍 색깔은 어떨지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영롱한 풀벌레 노래 하느님 찬미 합창 소리가 없으니 가을밤이 그렇게 적막할 수 가 없습니다.
흡사 죽음의 밤 같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어울려야 하느님 중심의 풍요로운 삶을 실감하는 데,
또 이들은 시상詩想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는데 많이 안타깝습니다.
어제 하루 짬을 내어 잠시 외출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유심히 봤습니다.
좋은 가을 날씨 탓인 듯 활기차고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까맣게 잊고 지내는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알든 모르든 마음 중심의 깊이에는 하느님이 자리 잡고 계실 것입니다.
또 세상 곳곳 어디선가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들이 있어
세상이 유지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제1독서 에페소서의 시작입니다.
매일미사의 배치가 골고루 이루어져 말씀의 편식을 막아주니 고맙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의 찬미가가 참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그리스말 본문에서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을 내리 노래한 것입니다.
이 에페소서 초대교회 찬미가를 우리 수도자들은 매주 월요일 저녁성무일도 세 번째 부분에서 노래합니다.
그러니 거의 2000여년을 가톨릭교회가 불러온 찬미가입니다.
어제 바로 이 찬미가를 묵상하는 순간 떠오른 강론 제목이 ‘주님은 찬미받으소서’에
부제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찬미받으소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 째 가르침의 책이기도 합니다.
오늘 에페소서에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문장의 주어가 온통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업적들의 나열입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위업에 교회공동체가 드린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솟아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고백입니다.
오늘 에페소서의 구조와 내용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에 이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찬미가의 시작부분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어지는 찬미가 내용도 구구절절 장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미사를 통해 속속들이 깨닫고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찬미가가 우리 삶을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으로 서서히 전환해 줍니다.
내 삶의 문장의 주어를 나에게서 하느님으로 바꾸게 되고
하느님의 눈으로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게 합니다.
하여 삶은 단순해지고 감사와 찬미,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의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파생되는 복잡하고 혼란한 삶입니다. 끊임없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안정과 평화가 없습니다. 참 행복과 기쁨도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성인성녀들 역시 하느님 중심의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제 갈라티아서의 성령의 9가지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도
순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반면 육의 행실 부정적 측면의 15가지는 모두 내 중심의 삶에서 기인된 산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상기해 봅니다.
‘음행, 부정,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한, 싸움, 시샘, 분노, 모략, 불목, 분열, 질투, 주정, 폭음폭식’ 등 줄줄이 이어집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런 어둔 부정적 인간 내면의 모습들 내 중심의 삶을 살 때의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이 모든 부정적 요소들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성령의 열매들로 변하니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인 성무일도와 미사은총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확연히 드러나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의 문제점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에 주님으로부터 불행선언의 대상이 됩니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조상들이 저지른 악행을 반복하는
모순적이고 위선적 삶을 살아가는 바리사이들에겐 진실이 없습니다.
하여 주님은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고 단언하십니다.
이어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 자기도 남도 들어가기를 막아버린
심술 사나운 심보를 지닌 율법교사들에 대한 불행선언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묘사에서 이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예나 이제나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 같습니다.
악순환의 반복을 끊어버리는 단 하나의 방법은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끊임없는 전환뿐이요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를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드리는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의 정착에는 제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90년 초반에 우연한 기회에 PC 통신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채팅창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고, 새로운 만남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화요금의 폭탄을 맞기도 했지만, 그래도 쌍방향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정보 소통 방식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컴퓨터 프로그램도 공부를 하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빠다킹’이라는 닉네임으로 아직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처음 인터넷에서 저의 글을 올렸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그때에는 제 글에 대한 반응에 참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었는지, 또 댓글을 통해서 어떤 말을 써주시는지를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많은 분이 보았으면 괜히 기분이 좋고, ‘좋아요’ 버튼이 많이 눌러지면 신나는 날이고,
제 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댓글을 달아주면 큰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것이 옳지 않은 것 같아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리고서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습니다.(심지어 E-Mail도 잘 확인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저도 그러했듯이, 누구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게 되면 큰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글을 작성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단어 하나에도 힘이 불끈 솟아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말과 보고 싶어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이것이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을 무조건 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그래서 진정한 힘이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불행선언입니다.
이런 불행 선언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당시에 좋은 평가만을 받았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더욱 더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말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에,
그들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말씀을 직접 해주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는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면,
그들을 향한 불행선언은 행복선언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앙심을 품고 그분을 몰아대는데 온 힘을 기울일 뿐입니다.
더 큰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뿐입니다.
우리 역시 다른 이로부터 부정적인 말보다는 칭찬 등의 긍정적인 말을 더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내 자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말이라면 부정적인 말에 앙심을 품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해주신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세 가지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율법교사들에게도 세 가지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율법교사들에 대한 첫 번째 불행 선언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11,46)
율법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더구나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 23,3).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율법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소행을 본 따라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질책입니다.
곧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들이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루카 11,50)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그들은 율법을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율법 안에서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하늘나라로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고 있음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열쇠”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름 아닌 말씀이 바로 문이신 당신을 여는 열쇠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지식의 열쇠”는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율법교사들이 이 “열쇠”를 치워버렸지만, 사도들이 그것을 찾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흘 동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시다가 저녁식사도 못 잡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들 역시 식사를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질책 당하느라 기분이 몹시 상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이
“독한 앙심을 품고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루카 11,5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책당할 때는 어떻게 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오히려 광분하고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 곧 가장 큰 은혜의 순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살아 숨 쉬는 강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수도자나 사제들을 양성시킬 때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전인교육’입니다.
사전에 따르면 전인교육이란
‘인간을 인지적, 정의적, 기능적, 신체적 측면 등 전 부분에 걸쳐 조화롭게 발달시키는 교육’입니다.
우선 출가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지적 양성입니다.
오랜 신학교 교육 과정을 통해 시목자로서의 지적인 능력을 함양시키는데 주력합니다.
그러나 때로 이 지적 양성에만 편중될 때 양성이 실패로 끝날 위험이 많습니다.
인성, 영성, 실천은 뒷전인 채 머리만 발달하는 ‘헛 똑똑이’ 사목자가 되면 큰일입니다.
따뜻한 마음과 열린 가슴은 사라지고 입만 살아있는 사목자를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지적양성과 더불어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측면이 영적․인성적․사목적 양성입니다.
겸손과 온유, 인내와 봉사의 정신을 동시에 키워주는 양성에 등한시해서는 나중에 문제가 커집니다.
예수님 시대 종교지도자들이 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점은 영적․인성적 양성의 심각한 결핍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적 양성에는 정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율법조문을 외우고, 율법을 연구하는 데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 율법을 실천하는 노력은 뒷전이었습니다.
머리와 입으로만 가르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에서
백성들은 즉시 그들이 ‘허당’, ‘회칠한 무덤’, ‘빛 좋은 개살구’임을 발견했습니다.
실천과 마음과 영성이 사라진 가르침, 겉치레만 그럴싸한 내실없는 그들의 설교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 52)
사실 성경과 율법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문을 활짝 열어주는 열쇠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율법교사들은 천국 문 열쇠를 두 손에 쥐고 있는 장본인들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열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머리로는 천국 문을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다보니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도 백성들도 천국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문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결코 그 율법을 실천할 줄 몰랐습니다.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율법의 준수를 백성들에게만 요구했지 자신들은 율법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사목자로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목자의 강론이 살아 숨 쉬는 강론, 반짝반짝 빛나는 강론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 선포자가 먼저 선포하는 내용을 살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주 평화신문은 ‘성당 발길을 끊고 있는 신자가 늘고 있다.’라는 주제로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을 심층 보도했습니다. 보도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울에 있는 한 성당은 10여 년 전만 해도 교중 미사 때 자리가 부족해 보조의자까지 둬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보조의자를 둘 필요가 없어졌다. 미사 수가 늘어난 것도 아니다. 미사 참여자가 그만큼 줄어서다.
주일학교는 더 심각하다. 교적에는 중ㆍ고등부 학생 수가 300명이 넘지만, 청소년 미사에는 40명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 교회에 냉담교우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냉담교우 증감의 척도인 미사 참여율도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2010년에 27.2%였지만, 2015년에는 20.7%로 줄어들었다.”
냉담의 주된 이유는 사제와 교회의 봉사자들에게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장과 자본의 논리가 교회에서도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겸손한 사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사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서 성사를 집전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강론을 하는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사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제들이 되라고 엄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권위’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은 ‘십자가와 죽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사제의 권위와 사제의 능력이 중요하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때 진정한 사제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이 배운 것으로 남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욕심과 탐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은 무시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은 질투하는 사람은 세상을 독선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소박한 가정의 참된 행복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은 능력과 실력은 검증을 잘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도층 인사로서 가져야 하는 도덕적인 의무는 소홀히 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그들의 능력에 비례하는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들, 깨달은 사람들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참된 자유와 평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평생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대지를 적시고, 많은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이 가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요?
트집을 잡는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냐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 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시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가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