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12장 (구 347장) / 고린도전서 11 : 13 - 22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212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13절 – 22절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아멘!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애찬식과 성찬식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애찬식은 무엇이고 성찬식과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성찬식은 주님이 베푸시는 떡과 포도즙으로 거룩한 영적 교제를 이루는 것이라면, 애찬식은 각자가 정성껏 준비하는 음식으로 성도 간에 육적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금씩 먹을 것을 가져와서 뷔페식을 차려 놓고 즐겁게 나누어 먹으면서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는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주인도 있고 노예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음식을 잔뜩 가져올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이 가져온 음식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특히 당시는 노예 신자들이 많았었는데 그들은 거의 빈손으로 왔습니다. 교회가 은혜가 충만할 때는, 그래도 가난한 자들이나 노예를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부자들은 정성껏 싸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이 가져온 음식을 노예들이 염치 좋게 다 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먹을 것이 없을 정도가 되자, 마침내 부자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부자들은 자기들끼리 먹어버립니다. 애찬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나누어주기 위해서 시작된 것인데, 결국은 끼리끼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책망합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 차라리 그런 식으로 애찬식이 진행될 바에는 차라리 없애는 것이 더 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기부턴가 애찬식이 없어졌습니다. 여하튼 교회가 은혜가 떨어지면 이런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 점심을 주방 봉사 팀들의 수고를 통해서 온 교인들이 똑같이 먹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여하튼 고린도 교회는 애찬식으로 인해서 많은 가난한 신자들과 노예 신자들이 상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성찬식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보통 애찬식이 끝난 후에 성찬식을 거행했는데, 부자들은 자기들이 싸 가지고 온 음식을 너무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성찬식에서 주는 떡과 포도주는 시시하게 여기고 마지못해 먹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노예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서 성찬식에 나오는 빵이나 포도주를 너무나 많이 먹고 마심으로서 나중에는 다른 성도들이 받을 것이 없을 정도로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를 먼저 먹으려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부자들은 애찬식에서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취하였고 없는 이들은 성찬식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취한 모습을 보임으로 거룩한 성찬식이 추한 성찬식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소식을 들은 바울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오늘 본문 20절,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제일 거룩한 예식이, 바로 세례식과 성찬식입니다. 그래서 성례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예식을 이처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는 망령된 짓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성찬식에 임해야 합니까? 1) 주님의 속죄예배에 동참하는 자세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2)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지체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 성찬식은 그리스도 증인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성찬식을 바르게 참여할 때, 1) 믿음이 강해지고 심령이 깨어납니다. 2)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3)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성찬식에 거룩하게 참석하는 성도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일년에 성찬식을 얼마나 자주 거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의 성찬식이라도 성찬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하며 살던 죄, 형제들과 화해하며 살지 못한 죄, 특히 고통 받는 주님의 소자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지 못한 죄,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새롭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행해져야 할 성만찬은 주님의 이름으로 고통 받고 고난 받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사랑을 베푼 것을 곧 자기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기까지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심을 기억하면서 성찬식에 참예할 때마다, 성찬의 의미를 알고 진정한 자세로 참여하시기를 원합니다. 그 동안 멀리했던 성도들이나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기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겠다는 결단이 있기를 진심으로 원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