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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애경(生事愛敬)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랑과 공경으로 섬기라는 말이다.
生 : 날 생(生/0)
事 : 섬길 사(亅/7)
愛 : 사랑 애(心/9)
敬 : 공경 경(攵/9)
출전 : 예기(禮記) 第18章 상친(喪親)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랑과 공경으로 섬기라(生事愛敬)는 이 성어는 예기(禮記) 제18장 상친(喪親)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곡을 멈추지 말고, 예절은 엄격히 지키며, 말은 화려하지 않게 하고, 아름다운 것을 입어도 편안하지 않으며, 즐거운 것(또는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은 것이니, 살아서는 사랑과 공경으로 섬기고, 돌아가셔서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섬긴다면 백성을 살리는 근본을 다하는 것이요, 돌아가셨을 때와 살아계실 때의 도리가 다 갖추었다 할 것이니, 효자가 어버이 섬기는 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니라.'
子曰 : 孝子之喪親也, 哭不偯禮無容言不文, 服美不安聞樂不樂食旨不甘, 此哀戚之情也. 三日而食, 教民無以死傷生, 毀不滅性, 此聖人之政也; 喪不過三年, 示民有終也. 為之棺槨衣衾而舉之; 陳其簠簋而哀戚之; 擗踴哭泣, 哀以送之; 卜其宅兆而安措之; 為之宗廟, 以鬼享之; 春秋祭祀, 以時思之. 生事愛敬, 死事哀戚, 生民之本盡矣! 死生之義備矣! 孝子之事親終矣!
(孝經/第18章 喪親章)
생사애경(生事愛敬)
효도에 나중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효행을 해야 한다.
효경에 이르길,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랑과 공경으로 섬기라(生事愛敬)'고 가르친 이유가 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효자 효부가 나기도 하지만, 후회막급이다.
부모가 자신에게 전답은 물론 단 한 푼의 돈도 물려주지 않았더라도 자신을 낳고 길러주셨지 않는가. 꼭 큰돈을 들여야 효도하는 건 아니다. 말 한마디,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부모에겐 기쁨이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한다.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에는, '무릇 자식이 되어 부모를 섬기는 데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 드리며, 저녁이 되면 이부자리를 보아 드리고 새벽에 다시 가서 살펴보아야 한다(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淸, 昏定而晨省)'고 훈육하고 있다.
공자의 타이름은 구체적이다. '부모가 계시면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나간다고 여쭙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여드려야 한다(父母在, 出必告, 反必面).'
형제간 우애도 귀하다. 집 안에서는 일시적으로 다툴지라도 그때뿐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한 나무의 같은 줄기가 아닌가. 핏줄이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형제가 담 안에선 싸울지라도 밖에서는 모욕당하는 것을 막아준다(兄弟?于牆, 外禦其侮)'고 한 바는 형제의 운명공동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혹여 불편한 사이라도 한 발 물러나 이해하고 보듬어야 할 관계가 형제자매임을 뒷받침하고 있음이다.
부모와 자식간, 형제간 관계가 이러해야 함인데도 정반대의 끔찍한 일들이 적잖게 벌어지고 있어 가슴이 아프다.
최근 부모와 형 등 일가족 세 명을 살해한 둘째아들이 존속살해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현장검증을 하는 자리에서, '죄송합니다.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라고 심경을 밝히며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엎질러진 물, 돌이킬 수 없는 참극 뒤 후회는 의미가 없다.
효경은 '효는 온갖 행실의 근본이요. 천하에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孝百行之本 天下難得者兄弟)'라고 경책했다. 인성(人性)이 메마른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부끄럽다.
효(孝) 사상(思想)과 그 뿌리
효 사상과 그 뿌리 (1)
머리말
오늘날 우리 사회는 첨단 과학의 발달로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덕분에 의식주의 풍요로움과 일상생활의 안일과 향락을 누리고 있다. 이 물질문명의 수해는 더 질 좋은 삶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무엇보다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구촌이 하나의 정보망으로 연결된 첨단 정보 문화의 시대에 우리는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아무런 여과 없이 무분별하게 외래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민족문화의 뿌리이고 민족 정서인 예(禮)의 도덕 효도 윤리 등이 마치 고대 원시시대의 미개민족의 유물 인양 취급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접할 때가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의식구조의 변질이 다가오는 미래의 역사 조류에 끼칠 영향에 대해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작금의 우리나라 교육 현실은 지식 습득과 지능 발달을 위주로 하는 편향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는 기술적 기능 역할과 사리 판단에는 좋은 의미로 쓰일 수 있으나 본능적 욕구에 따른 범죄에 이용될 때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물질적 지능 교육에 정비례하여 본능적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이성적 윤리 교육의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기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윤리 교육은 무엇보다도 모든 동물 중에서 우월하게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백행의 근본이 되는 효도에 대한 교육이 으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자라나는 우리 동량들에게 효도에 대한 본질과 시대적 변화에 따른 효행의 실천적 교훈을 보여 경로 효친 하는 윤리 교육을 효(孝) 사상의 의식 개혁에서 가정에서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행동 규범에 도움이 되어 밝은 미래를 여는 조그마한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에서 효 사상과 그 뿌리에 대하여 편저하였다.
(著 權泰鎬)
차례
머리말
01. 사람만이 효를 할 수 있다
02. 효도는 공경과 보은에 있다
03. 효의 근본은 인성에 있다
04.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05. 효는 천, 지, 인 삼재의 천륜이다
06. 효의 종류
07. 불효에 대한 개념과 정의
08. 효행에 대한 실천적 사례
09. 신분과 계급에 따른 효행
10. 일상생활에서의 효행
11. 끝맺는 말
1. 사람만이 효(孝)를 할 수 있다
효(孝)라 할 때에 사람들은 효도(孝道) 또는 효행(孝行)이라 한다. 이 효도 또는 효행은 모든 동물 중에서도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왜냐 하면 다른 동물들은 효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孝를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생물과 무생물로 분류한다면 그 생물 중에는 식물과 동물이 있다. 이 동물 중에서 인간도 역시 동물에 속한다. 다만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고등동물일 뿐 다른 동물들과 같이 이성(異性)적 암수가 있어 본능적 종족(種族)번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동물인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성장한 남녀는 부부(夫婦)가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이 기초가 되어 한 국가가 구성된다.
그렇게 하여 인간사회가 형성됨으로서 사람들은 상호간에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고 따라서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그리스의 세계적인 철학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친애(親愛)가 본성(本性)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상 짝을 이루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국가를 형성하는 이상으로 배우자와 짝을 이루는 경향이 더 농후한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 국가보다 앞서며 또 더 필요하며 생식이 모든 동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더욱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과의 공통성은 여기까지요 인간이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사는 것은 생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한 생활의 가지가지 목적을 위해서 이기도 한 것이다. 즉 처음부터 인간의 여러 기능은 분화되어 있고 남자와 여자의 기능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자기에게 특유한 것을 피차 제공하여 서로 돕는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본능적으로 짝을 찾는 생식에 있어서는 사람도 모든 동물과 다를 것이 없으나 인간은 이성(異性)적 특유한 것을 상호보완 하는 것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그 이성의 특유한 것을 피차 제공하여 보완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첫째가 사랑이다. 그렇다고 다른 동물은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암컷이 발정을 하면 수컷이 모여든다. 그들 수컷들은 암컷을 차지하려고 암컷 쟁탈전을 벌인다. 그 중에서 제일 힘이 센 놈이 암컷을 차지한다. 그 차지하는 과정에 수컷은 온갖 교태로 암컷에 호감을 사려한다. 이것을 사람들은 구애라 한다.
이들 암컷과 수컷은 본능적인 생식 기능으로 교미(交尾)를 하고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 중에는 원앙새와 같이 부부애를 줄기는(?) 것도 더러 있다. 그리고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자라나서 독자적인 행동을 할 때까지 암놈은 새끼를 기른다. 그리고는 새끼가 어른이 되면 그것으로 그들은 각자 자기 갈 길을 간다. 그것이 되풀이되면서 동물의 세계는 그렇게 연속된다. 그 이상의 발전도 그 이하의 퇴보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종족보존(種族保存)의 본능적 생식(生殖) 욕구(慾求)에 있어서는 다른 동물들과 공통성이 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배우자와 짝을 지어 한 가정을 이루고 그 생활에 대한 행복과 희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이다.
이와 같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할 때에 그 첫째 과제가 인간은 이성적(理性的) 동물이라는데 있다. 그렇다면 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동양철학의 진수(眞髓)라 할 수 있는 성리학(性理學)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중용(中庸)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이 명부 한 것이 성(性)이요 성에 따르는 것이 도 (道)요 도를 닦는 것이 교(敎)이다.'
그렇다면 하늘(天)은 무엇이며 성(性)은 또 무엇인가? 도(道)는 그리고 교(敎)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첫째, 하늘은 우주 만물의 절대적 주재자(主宰者)로서 인격적인 천제(天帝), 천신(天神), 상제(上帝), 상천(上天) 등으로 하늘의 섭리(攝理)가 바로 천(天)이라 불린 것이다.
이 천명에 대하여는 본인이 논술한 '삼문일도론(三門一道論)과 종교(宗敎)들' 이라는 데에서 상세히 설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하고 성(性)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성(性)에 대하여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성(人間性)은 사단(四端)으로 측은한 마음(惻隱之心)이 있으므로 어질고 사랑할 줄 알게 되고, 수오한 마음(羞惡之心)이 있으므로 부끄러워하고 의리(義理)다운 행동이 생겨나는 것이며, 사양할 줄 아는 마음(辭讓之心)이 있으므로 예의(禮儀) 바른 질서 의식(秩序 意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是非之心)이 있으므로 지혜(智慧)롭게 분별(分別)할 줄 아는 판단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단은 지극히 착한(純善無惡) 인간 본성(人間本性)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하늘이 명부(命賦)한 인(仁), 의(義), 예(禮), 지(智)와 같은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은 제마다 용모가 다르듯이 기품(氣稟)이 다른 까닭에 모든 사물을 처리함에 있어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과부족(過不足)이 없을 수 없게 됨에 중도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때에 따라 절도 있게 중화(中和)를 이루어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도(道)라 한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가야할 길은 그 본성에 따르는 그대로가 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품이 각자 다르고 사물의 성질이 다른 까닭에 또 후천적 습관이나 교육과 수양에 의하여 변이(變移)되기 때문에 일정한 어떤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지선(至善)에 순종된 덕(德)의 본체로서 그 때 그 때의 사정에 따라 그 길이 다를 수 가 있게 된다.
이러한 길(道)을 가장 중정(中正; 중도로서 정당한 것)하고 적의(適宜; 사리에 적절하고 마땅한 것)한 도의 실천을 위하여 닦는 가르침을 교(敎)라 한다.
인간 사회에 이러한 도와 교가 있기에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의미가 있고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가정을 이루고 나아가 국가를 이루고 따라서 사회의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성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으로서 특성 일진데 인성인 인. 의. 예. 지 의 사단이 우리 생활에 도(道)로서 정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인. 의. 예. 지 가 덕(德)의 본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이 덕을 실행에 옮기는 백행의 근본이 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효제(孝悌)라 한다.
다시 말해서 금수는 그 부모가 새끼를 낳아서 어느 시기까지 기르다가 둥지를 떠나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 의. 예. 지. 의 인성이 있기에 은혜(恩惠)를 갚을 줄 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는 것은 그 근본이 인(仁)과 의(義)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효제 사상은 혈족(血族)에 대한 본능적 사랑(仁義)으로 그것이 승화하여 이웃에서 이웃으로 온 인류에 대한 박애 정신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는 것과 같이 효제와 우애가 없으면서 인류박애를 찾는 것은 마치 산에서 해삼을 찾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자식을 부모가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종(從)적이며 자연적인 천륜(天倫)이라면 형제간에 경애(敬愛)하고 친구 간에 신의(信義)가 있는 것은 횡(橫)적이며 사회적인 윤리이다.
이와 같이 종적인 윤리와 횡적인 윤리가 병행 존재할 때에 중도(中道)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한 성(性)에 따르는 도(道)가 되는 것이다.
옛날 계급 사회였던 군주 시대에는 모든 윤리 규범이 종적으로 치우치다 보니 1인 통치의 폐습에 족쇄가 채워져서 진보와 발전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가하면 오늘의 민주 사회에서는 평등과 자유를 제일주의로 구가 하다 보니 모든 윤리가 횡적으로 치우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利己主義)로 더 나아가서는 집단 이기주의로 종적 윤리가 쇠퇴되어 인간만의 전유물인 이성(理性)적 윤리가 쇠퇴되면서 동물적 본능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퇴폐풍조와 패륜적 만행이 사회적 문제를 낳으면서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과 같이 얼굴은 사람이면서 그 마음은 금수와 다를 것이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와 같이 편중된 옛날의 종적 윤리나 오늘날의 횡적 윤리의 폐단은 덕(德)의 본체인 중도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편중된 윤리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면 잃어버린 덕을 찾아 중용으로 가는 인륜의 정도로 가야 할 것이니 그 길은 오직 효도라는 천륜에서 그 시대 그 지역에 적응할 수 있는 창출된 인륜이어야 할 것이다.
과거 우리들의 윤리 척도(尺度)를 ①군신유의(君臣有義), ②부자유친(父子有親), ③부부유 별(夫婦有別), ④장유유서(長幼有序), ⑤붕우유신(朋友有信) 오륜(五倫)에서 기준하였으나 인간의 기본 윤리를 위에서 언급 하였듯이,
옛날 군주 시대의 잘못된 종적 개념에서 위에서 아래로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방법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오늘날에 와서 봉건적 도덕이라 하여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오륜의 근본원리를 그 당시의 제도적 사회에서 악용하여 위정자들이 자기네들의 권익과 영달을 소위 오늘날 말하는 이기주의 내지는 집단 이기주의로 천륜의 진리에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을 우리들은 우선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만사가 모든 것이 원인과 과정을 거치면서 반드시 결과가 있게 마련인 것과 같이 권리가 있으면 반드시 의무가 있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오륜에도 이러한 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오륜이란 어떤 것인가 알아보자.
첫째 군신유의(君臣有義)라는 것은 임금은 의리가 있어야 하고 신하는 충성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군의신충(君義臣忠)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임금은 의리를 저버리면서 신하에게는 충성만을 강요했다.
둘째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것은 어버이는 자애하고 자식은 효도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자효(父慈子孝)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으니 처자(妻子)는 의복과 같다면서 자식은 낳으면 된다 하여 자식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를 위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효도로 알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자식을 한갓 소유물인줄 알았을 뿐 한 개체의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 부부유별(夫婦有別)은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부창부수 (夫唱婦隨)로서 이성(異性)적 보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 어려서는 아버지를 쫓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쫓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쫓는다)라는 굴레를 쉬워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차별을 초래케 했다.
넷째 장유유서(長幼有序)역시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해야(兄友弟恭)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으니 형은 우애하지 않더라도 아우는 공경해야 한다는 절대 권위주의로서 올바른 장유유서가 자리 잡을 수 없게 했다.
다섯째 붕우유신(朋友有信) 역시 친구 사이는 서로 간에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담에, '장사꾼은 사촌도 속여야 한다'는 말과 같이 오늘날 우리사회는 모든 것이 물질만능주의로 속임 세상이 되었으니 올바른 붕우유신이 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사이에는 모두가 쌍방이 제각기 의무를 다할 때에 윤리가 바로 세워지고 사회 규범이 바로 잡혀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하며(君君 臣臣), 아비는 아비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며(父父 子子), 남편은 남편 노릇을 하고 부인은 부인 노릇을 하며(夫夫 婦婦), 형은 형 노릇을 하고 아우는 아우 노릇을 하며(兄兄 弟弟), 그리고 벗은 벗으로서 서로 간에 신의가 있는 동등한 일을 해야 한다(朋朋 友友).
이와 같이 하려면 중도를 잃지 않는 데에서 올바른 행동에 옮겨지고 진정한 윤리가 바로 세워지는 것이다.
2. 효도(孝道)는 공경(恭敬)과 보은(報恩)에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첫째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길러 주셨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절대적인 도리일 것이다. 그 은혜를 갚는 본질은 공경에 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봉양(奉養)만이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와 말도 먹이고 길러준 그 대가로 사람에게 물질적인 노동을 제공한다. 이 견마(犬馬)의 노동은 대가와 봉사(奉仕)라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공경이라 할 수는 없다. 인간의 공경과 견마의 대가와는 틀림없이 구별된다. 그러므로 효도는 봉사가 아니라 오직 공경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요사이 우리나라는 산업화 사회의 현상으로 핵가족화 되면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분가(分家)생활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모 자식 사이에 원거리에 거주하게 되면서 매월 얼마씩의 돈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견마의 대가와 봉사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식 된 효도라 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것마저 없다면 이것은 견마의 봉사는 고사하고 개나 말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공경하는 마음이 효도하는 근본 마음 일진데 그 효행은 부모의 마음부터 평안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후라도 부모에게 욕이 돌아 갈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효도를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남에게 원망들을 일이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짓을 하지 않아야 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가 효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근래에는 공양하는 것을 효라고 생각하나 개와 말도 사람에게 키움을 받나니 오직 부모를 공경치 않는다면 견마와 무엇이 다르리오.'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論語/爲政)
공자의 제자 자하가 孝에 대하여 묻거늘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언제나 부모의 안색을 살피기가 어려워 항상 즐거운 낯으로 섬기기가 어렵다. 일이 있을 때에는 자제들이 수고를 맡고 술과 음식이 있으면 어버이에게 드리는 이것만으로는 어찌 효행이라 할 수 있으리오.'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論語/爲政)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의 심정을 잘 헤아려야 공경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의 안색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싸여서 포식(飽食)을 한다 하여도 심기(心氣)가 불편하면 그것이 소화될 리 없다.
공자의 제자 증자는 효행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효자가 노부모를 봉양하는 대는 그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뜻을 거역하지 않으며, 그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주며, 그의 거처를 편안케 해주고, 음식으로 충성을 다하여 봉양하되 효자의 몸이 다할 때까지 해야 한다. 효자의 몸이 다 할 때까지라는 것은 부모의 명이 다 할 때까지가 아니라 그 자신의 목숨이 다 할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자신도 사랑하고 부모가 공경하는 것을 그 자신도 또한 공경한다. 개와 말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이 다해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에 대해 서겠는가.'
曾子曰: 孝子之養老也, 樂其心, 不違其志, 樂其耳目, 安其寢處, 以其飮食, 忠養之, 孝子之身, 終身也者. 非終父母之身. 終其身也. 是故, 父母之所愛, 亦愛之, 父母之所敬, 亦敬之. 至於犬馬, 盡然, 而況於人乎.
증자는 효도를 함에 있어서 마음과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육신 적 안락도 언급하여 효행의 실행에 있어서 부모의 생전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까지 부모가 경애(敬愛)하던 것에는 자신도 경애하여야 한다 하였다. 그것은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부모가 귀여워하던 개와 말에 이르기까지 그 또한 귀여워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개와 말에 이르러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야 두말할 여지가 있겠는가? 그것은 부모 생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생각에서 나온 효자의 마음이니 남의 부모를 내 부모 같이 남의 형제를 내 형제 같이 공경하고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태평세월을 이룰 것이며 요순시대와 같이 대동(大同) 정치가 이뤄질 것이다.
3. 효(孝)의 근본(根本)은 인성(人性)에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인성(人性)을 가지고 있다.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사단(四端)이 있다는 말이다. 이 사단에 대해서 앞에서 약간 언급한 바 있으나 효의 근본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몇 가지 추가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인애(仁愛)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으로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은 곧 보은(報恩)의 마음이 있게 된다. 이 인이 없다면 효도를 감히 생각할 수 없다.
둘째 수오지심(羞惡之心)으로 의리(義理)가 생겨나는 것은 의리는 곧 공경하는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형은 아우를 우애(友愛)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하게 된다.
셋째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 예의(禮儀) 바른 질서의식(秩序意識)이 생겨나서 인간사회가 균형(均衡)을 유지하게 된다.
넷째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모든 사물을 분별 할 줄 아는 지혜(智慧)가 생겨나서 사물을 올바르게 판별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누구나 효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효심은 잠재된 선천성임으로 후천적 교양 교육이 없으면 효심은 발현(發顯)될 수 없게 된다.
동서를 말론하고 같은 인류이면서도 유독 우리 민족이 효도를 할 줄 아는 예의 바른 민족이라는 것을 어느 민족에 못지않게 자랑으로 여겼으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면 우리나라를 일컬었던 것은 우리 조상들이 효도 사상으로 기초윤리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우리나라가 오늘에 와서 서양 문물을 여과(濾過)없이 받아들여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인성 윤리를 망각하고 황금만능 사상에 젖어 물질적 의식(衣食)생활에는 조금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으나 인간 본성을 망각한 퇴폐풍조와 쾌락위주로 사회질서가 변이(變移)되어 가고 있다.
옛말에, '사람이 의식이 풍족하고 몸이 안락하면서 인륜을 배우지 않으면 본능적 욕구를 추구하게 되어 금수에 가깝게 된다(逸居而無敎 近於禽獸)'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배움이란 지식 위주의 학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사람의 탈을 썼으면 인간으로서의 윤리가 있어야 한다. 이 인간 윤리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이 되고 개선되어 간다. 그러나 그 변이와 개선은 그 형식과 행위 방법에 대한 것일 뿐 그 본질적 정신은 바뀔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용(用)은 변해도 체(體)는 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이 명부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성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仁)으로 효도하고 의(義)로 우애하는 것을 지(智)로서 효제(孝悌)의 본질적 윤리를 알 때에 예(禮)로서 모든 질서가 바로 서게 된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 인간들은 거기서 행복을 추구하고 거기서 참다운 낙(樂)을 얻게 된다. 이것이 가정에서 국가로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천하태평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맹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仁)의 진수(眞髓)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요, 의(義)의 진수는 형을 따르는 것이요, 지(智)의 진수는 이 두 가지를 알아 여기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요, 예(禮)의 진수는 이 두 가지를 조리에 맞도록 하는 것이요, 낙(樂)의 진수는 이 두 가지를 즐거워 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면 그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생기면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는 정도에 이르면 모르는 결에 발이 움직거려지고 손이 덩실거리게 될 것이다.”
孟子曰: 仁之實, 事親是也; 義之實 從兄是也; 智之實 知斯二者, 弗去是也; 禮之實, 節文斯二者, 是也; 樂之實, 樂斯二者, 樂則生矣, 生則惡可已也. 惡可已則 不知足之蹈之, 手之舞之.
(孟子/離婁章句)
이와 같이 인성에서 우러나오는 효심은 사람이면 누구나 있게 마련이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기를 서양 사람들 사회에서는 효도의 개념이 별로 없다고들 한다.
그 몇 가지 예로서, 첫째, 그 사람들은 부모를 모시고 동일 가구 내에서 사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둘째, 부모는 자식이 18세가 넘으면 양육 의무가 없어진다. 자식 또한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없다. 셋째로 그들은 특별히 초대한 것이 아니면 부모 자식 사이라 하더라도 음식점에서 음식 값을 각자 계산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식의 아들이면 자기에게는 손자가 된다. 그 손자를 보살펴 주어도 수고비(?)를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들의 의례나 생활 관습에서 볼 때에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 많다.
이와 같이 몇 가지만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효도를 모르는 사람이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어느 한쪽만을 보고 또는 외형적 행동만으로 그 전체를 속단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회는 우리들 사회의 자녀 양육 제도나, 부모 부양 제도 등 사회복지 제도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고정관념으로 생각 할 때에 그러한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사회는 자식들의 교육은 고등교육까지는 의무교육 제도로서 국가가 무상으로 교육을 시킨다. 그러므로 18세까지의 양육기간 동안 의식주(衣食住)를 제공하고 사회인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가정교육만 시키면 충분히 독립생활을 할 수 있는 지능과 체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부모들 역시 65세가 넘으면 별도의 연금이 없다 하더라도 정부에서 최저 생활비를 보장해 준다. 이러한 사회보장제도가 잘되어 있기 때문에 자녀의 양육이나 부모의 부양책임이 개인 각자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 입법화되면서 윤리화되어 있다.
따라서 노부모를 자식이 직접 모시지 않는다던가. 점심 값을 각자가 계산한다는 것만으로 우리들의 통념과 고정관념으로 불효다, 혹은 서양 사람들 사회에서는 효도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속단이요, 그들의 생활상과 윤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 예로서 미국의 여러 관광지에나 휴일 음식점에 가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3대(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가 한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이나, 관광지에서 노부모를 부축하고 다니면서 관광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것을 필자가 보기에는 근래 우리나라의 관광지에서나 음식점에서 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에 다만 그네들의 사회구조나 윤리 의식이 다를 뿐 그들이나 우리들이나 사람으로서의 인성(人性)만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주거 공간이나 의식 생활의 양상이 바꿔지면서 孝의 개념이라던가, 효행의 방법이 많이 바꿔져 가고 있고 또 바꿔져 가야 할 것이다.
요사이 일부 젊은 층에서 孝에 대하여 전통 사회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간의 위계질서의 인간관계라 규정하고 오늘과 같은 공동생활이 중심이 되어 국제화 또는 세계화를 부르짖는 현대 시민사회에서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간의 이해관계가 주로 법질서에 의해 조정되어야 하므로 그것(孝)을 모든 덕목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특정 종교의 개념이나 시대착오적인 사고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과거 위정자들이 孝 개념을 정치적 목적으로 변형하여 그 원래의 인성(人性)으로부터 나온 천륜 적 의미에서 벗어난 왜곡된 윤리 의식(수직적 복종 의식으로 정치 도구화하였음)으로 변질되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孝란 좁게는 부모를 받드는 한 가정의 윤리면서 넓게는 인간의 도리와 인간만의 사랑으로 전술한 바와 같이 태평성세의 시작이 孝에서 싹이 돋아난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또한 孝를 특정 종교 운운하나 불교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목련경(目連經)등과 기독교의 출애굽기, 잠언, 에베소서 등에서 효도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다소 다르다 하더라도 孝의 본질에 있어서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다를 것이 없으며 모든 종교가 효도를 교리로 삼지 않은 종교는 없다는 것을 첨언해 둔다.
위와 같은 논란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을 고전을 통하여도 알 수 있다. 한 예로서 孝가 단순히 폐쇄적인 가족 윤리인가? 아니면 사회정의 등 모든 덕목의 기본 윤리인가를 공자와 엽공 이라는 사람과의 대담에서 알 수 있다.
엽공(葉公)이라는 자가 공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 직궁이란 자가 있는데 마음이 바르고 곧아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로서 스스로 고발합니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마을의 곧은 자는 이와 다르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겨 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겨 줍니다. 진실로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論語/子路)
여기서 곧음 즉 정직에 대한 정의가 엽공과 공자의 차이점이다. 요사이 일부 학자들이 이러한 공자의 정직에 대한 정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정의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덕치와 법치에서 오는 의식차이에 연유된 것이라 생각된다.
순리위직(順理爲直)이라는 말이 있다. 법치 또는 관습에 앞서 자연 질서에 따른 진리의 법도에 순응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곧음(直) 즉 정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의에 대하여 맹자의 제자 도응이라는 사람이 맹자에게 예를 들어 질문한 것이 있다.
도응(桃應)이 묻기를, '순(舜)이 천자로 있고 고요(皐陶)가 형관(刑官)으로 있을 때 고수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桃應問曰: 舜爲天子, 皐陶爲士, 瞽膄殺人則如之何?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를 법에 따라 행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순은 그를 막지 않겠습니까? 순이 어떻게 그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어받은 큰 법이 있는데! 그렇다면 순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순은 천를 내던지기를 헌짚신 버리듯이 하고 몰래 그 아비를 업고 달아나 해빈에 가서 살면서 죽을 때까지 흔연히 즐거워하면서 천하를 잊을 것이다.'
孟子曰: 執之而已矣. 然則, 舜不禁與? 曰夫舜, 惡得而禁之? 夫有所受之也. 然則, 舜如之何? 曰舜, 視棄天下, 猶棄敝蹝也, 竊負而逃, 遵海濱而處, 終身訢然樂而忘天下.
(孟子/盡心章句上)
여기서 맹자는 법은 만인에 평등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는 자로서의 직무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모두 사회적 윤리요, 국가적 법치를 준수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도는 사회적 윤리나 국가적 법치에 앞서 인성(人性)에서 나오는 천륜이므로 순은 천자의 지위마저 헌 신작 버리듯이 버리고 사회질서나 법령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인위적이고 가변적인 법체계에 따르기보다 천리에 순응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삶이요. 천륜에 따르는 진정한 효도요 정의이기 때문이다.
요사이 우리나라의 고소 고발건수가 이웃나라 일본보다 각각 36배 157배나 높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것을 인구 10만 명당 고소 고발 사건으로 환산하면 고소 사건은 일본보다 103배 고발사건은 무려 436배나 더 많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남의 비행이라 하여 사회생활이나 또는 인간윤리에 미칠 수 있는 잘못을 숨긴다거나 고소 고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사소한 일마다 법으로만 해결하려는 사고발상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는 볼 수없다.
법에 앞서 행위자 스스로가 양심에 가책을 받고 또 주위의 사람들이 충고를 함으로서 협동과 화합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 잘못은 아랑곳없이 고소나 고발로서 법으로만 또는 법대로만 한다는 사고에서는 정직에 앞서 갈등과 원한이 앞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자식이 아비의 잘못을 고발하고 아비가 자식의 잘못을 고소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직이라 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천륜에 위배되고 인륜에 역행하는 패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요사이 부자형제 사이에 가끔 일어나는 고소, 고발사건 보도를 볼 때가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앞으로 이 사회의 도덕과 인성은 어디로 갈 것이며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 것인가 하는 생각에 그냥 암담할 뿐이다.
4.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효의 근본 개념을 이야기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규명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정의다.
다시 말해서 자식은 부모의 지체(枝體)냐? 아니면 소유(所有)냐? 그렇지 않으면 부모는 자식을 보호양육 하는 관리자(管理者)냐? 하는 데에서 효의 개념이 다르게 된다.
이러한 논란은 종교적 측면과 동서 문화의 이질적 차이에서 비롯되어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란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고 이야기를 계속 하고자 한다.
첫째, 지체론으로 자식이 부모의 지체라면 부모와 자식 사이는 두 몸이면서 한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은 본체(本體)와 그 지체로서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부모가 이 세상을 떠났다 하여도 그들의 지체는 생존하게 된다. 그 지체는 다시 뿌리(본체)가 되어 연속적으로 자식이 있게 되고 또 그 자식은 또 자식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이 부모와 자식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관계를 천륜(天倫)이라 한다.
다음은 소유론으로 자식이 부모의 소유라 한다면 이것은 뜻이 조금 달라진다. 소유라는 개념은 유상적(有償的)가치로 물질적 존재개념으로 영원한 소유란 있을 수 없으며 필요에 따라 너와 나의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소유자와 피소유자와의 관계는 필요에 의한 욕구와 필요에 의한 가치로 끝나게 된다. 내가 낳았다하여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내가 만들었다 하여 내 것이라 하는 물질적 소유와 다를 것이 없다.
다음은 관리론으로 부모는 자식을 양육 보호하는 관리자라 할 때에는 어느 절대자에 의한 창조물을 수탁(受託) 관리한다는 뜻으로 그 수탁한 자식이 독립생활을 할 수있는 시기까지 양육관리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을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수탁 양육할 의무만 있을 뿐 자식이 부모에 대한 보은이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지체론, 소유론 또는 관리론으로 볼 때에 여기에는 커다란 관념적 근본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인간사회의 윤리개념이 달라진다.
필자가 논술한 '삼문일도론(三門一道論)'의 졸고에서 인간의 출생을 선재론(先在論), 창조론(創造論), 유전론(遺傳論)으로 밝힌바가 따로 있기에 여기서는 구체적인 설명은 피하고 관리론과 소유 론에 대하여 약간 언급하고자 한다.
태초에 어느 절대자에 의하여 만물이 창조 되었다면 그 만물은 그 절대자의 창조 섭리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변화(生成變化)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창조 역시 최초의 인간창조에서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그 절대자의 창조섭리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그 인간을 생산하고 견마(犬馬)는 그 견마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재론의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유전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도 이미 사실이 증명된 바가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절대자의 창조물을 수탁 관리한다는 관리론적 개념은 이 세상 인간사회에서는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소유론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속담에, '처자식은 낳으면 되고 얻으면 된다'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에서 옛날에는 일방적인 효만을 요구하고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야 할 일은 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가 소유론으로 발전하여 부모를 위하는 일이라면 자식을 죽여서라도 해야 된다는 그릇된 효 사상에서 이와 같은 속담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와 같은 관념에서 우리나라의 효 사상에 왜곡된 속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효자 열녀 집안이 잘 되는 것 못 봤다'는 속담도 너무 극단적인 행위로서 효 본연의 인(仁)으로부터 벗어난 한갓 규범적인 행동으로 효의 본질을 망각하고 다만 소유론 적 관념에 연유된 결과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효도의 근본 사상이 인(仁)에서 나왔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속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체험적 동물이다. 옛 말에 '생이지지(生而知之)'라 하여 '사람이 나면서부터 배우지 않아도 안다'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말이다. 이것은 한갓 가설에 불과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배우고 거기에서 체험을 함으로서 비로소 그 진가를 알게 된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처녀가 산고가 어떻고, 모정(母情)이 어떻다 한다는 것은 수식어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효도의 참다운 진리를 알려면 자신이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고, 그가 그 자식에서 효도를 받을 때에야 비로소 자기 체험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늦은 후회에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고쳐 못할 일이 바로 이 효도일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상제(喪祭) 의례가 복잡다단하게 과다 한 것도 후손들에게 후회하고 참회하게 하는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체론적 개념에서 나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내 몸을 소중히 하여야 할 것이요, 또한 부모의 몸 또한 내 몸의 뿌리일진대 뿌리가 상하면 가지가 성할리 없다.
이와 같이 뿌리에 뿌리를 찾아가면 그 뉘가 내 부모가 아니며, 내 형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여기서 인류박애사상(人類博愛思想)이 생겨난다. 뿌리에서 찾은 효는 그 행(行)함에 있어서도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였다.
증자는 효도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몸은 어버이가 물려준 것이다. 어버이가 물려준 몸으로 행동하는데 감히 공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처가 장엄하지 못하면 효도가 아니요, 임금을 섬기는데 충성이 없으면 효도가 아니요, 벼슬에 있어서 공경스럽지 않으면 효도가 아니요, 친구에게 믿음이 없으면 효도가 아니요, 싸움터에서 용감하지 못하면 효도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를 완전히 이루지 못하면 그 재앙이 어버이에게 미치는 것이니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으랴.'
曾子曰: 身也者, 父母之遺體也; 行父母之遺體, 敢不敬乎. 居處不莊, 非孝也; 事君不忠, 非孝也; 涖官不敬, 非孝也; 朋友不信, 非孝也; 戰陳無勇, 非孝也; 五孝不遂, 災及於親, 敢不敬乎.
(禮記/祭儀)
공자는 그의 제자 증자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무릇 효도는 덕의 근본이다. 그것을 가르침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앉아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사람의 몸과 머리털과 살덩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감히 이것을 헐거나 상처 내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몸을 올바로 확립하여 도를 실행하고 명성을 후세에까지 드날려서 부모를 현달케 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 끝냄이다. 대체로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다음으로는 임금을 섬기며, 끝으로는 자신을 올바로 하여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다.'
子曰: 夫孝, 德之本也. 敎之所繇生, 復坐. 吾語女.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孝經/開宗明誼章)
내 몸이 부모로부터 받은 몸임을 유체론 적 개념에서 볼 때에 이목구비와 사지육신을 온전하게 받았으면 온전하게 보전하여야 하는 것이 또한 孝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자식의 아픔을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어느 부모된 자가 그를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자식된 자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 또한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고 부모가 되어 그 자식으로부터 효도를 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어버이의 심정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의 부모는 이 세상에는 없게 된다. 孝를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는 이미 孝의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늘이 낳고 땅이 기르는 것 가운데 사람보다 큰 것은 없다. 부모가 완전히 해서 낳았으니 자식 또한 온전히 돌아가야 가히 효도라 할 수 있느니라. 그 몸을 다치게 하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을 온전히 한다고 한 것이다.”
曰: 天之所生, 地之所養, 無人爲大. 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
(禮記/祭儀)
5. 효(孝)는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의 천륜(天倫)이다
백가지 행실의 근본(百行之本)이 되는 효를 천(天), 지(地), 인(人) 삼재에서 찾을 수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생성하는 것과 같이 부부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 하늘과 땅의 품성(稟性)으로 자식이 그 부모를 닮아 출생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늘의 변치 않는 도리와 법칙(經)을 그리고 땅의 올바른 의리와 자애(慈愛) 그리고 덕(德; 誼)을 몸소 실행하여야 한다.
그 실행이 바로 효도다 따라서 사람이 그 효도를 몸소 실행에 옮길 때에 그 박애한 마음이 부모를 사랑하게 되고 그 덕의(德誼)한 마음이 어른을 공경하게 된다.
따라서 박애와 공경 그리고 사양(辭讓)과 예악(禮樂)으로 온 국민이 화목하게 될 때에 사람들은 좋고 나쁜 것을 가려서 행동할 줄 알게 된다.
정치지도자가 이러한 孝의 원리를 바탕으로 국정을 수행하고 국민을 교화한다면 자연히 국태민안(國泰民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孝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였다.
공자는 孝의 위대함을 그의 제자 증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정말로 효도란 위대합니다.' 이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무릇 효도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변치 않는 떳떳한 도리이고 땅의 올바른 이치이며 백성의 당연한 행실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올바른 도리를 그 백성이 본받아야 되는 것이니 하늘의 공명정대한 도리를 본받고 땅의 공순하고 이로운 덕을 따라서 온 세상을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이로서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고서도 이루어지며 그 정사는 지엄하지 않고서도 잘 다스려지는 것이다. 선왕은 효를 가르쳐서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이러하므로 앞에서 널리 백성을 사랑함으로써 그 백성이 그들의 부모를 버리지 않게 되고 이들에게 덕망과 의로움을 베풀게 되니 그 백성이 모두 일어나서 선행을 하였다. 선왕이 그들에게 앞서서 공경하고 사양하니 그 백성은 다투지 않았고 그들에게 예절과 음악으로써 다스리게 되니 그 백성은 화목하게 살았고 그 백성들에게 착함을 권해주고 나쁜 것을 싫어함을 보여주니 그 백성이 금지해야 할 것을 알았다.'
曾子曰: 甚哉, 孝之大也.
子曰: 夫孝, 天之經也, 地之誼也, 民之行也. 天地之經, 而民是則之, 則天之明, 因地之利, 以順天下. 是以, 其敎不肅而成, 其政不嚴而治. 先王, 見敎之可以化民也. 是故, 先之以博愛, 而民莫遺其親, 陳之以德誼, 而民興行. 先之以敬讓하니 而民不爭, 道之以禮樂, 而民和睦, 示之以好惡, 而民知禁.
(孝經/三才章)
동양철학에서 음양(陰陽)을 논할 때 남자를 양(陽)이라 하고, 여자를 음(陰)이라 한다. 또 하늘을 양, 땅을 음이라 한다. 아버지는 양이요, 어머니는 음이 된다.
이 음양의 도리로 아버지께는 하늘의 도를 쫓아 효도하고, 어머니께는 땅의 도를 쫓아 효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법칙에 따르는 순리요, 음양 상생의 원리이다.
여기서 모든 질서가 서게 되고 음양의 분별이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에 이 인간사회는 효제(孝悌)로 부터 나라에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경하고, 벗들 사이에 신의(信義)를 지키게 된다.
이것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현명하고 덕망 있는 임금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효성스러웠기 때문에 하늘을 섬기는 것도 분명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기는 것도 효성스러웠기 때문에 땅을 섬기는 것도 잘 살펴서 하였으며, 어른과 어린이가 도를 따랐기 때문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잘 다스려졌으니, 하늘과 땅이 잘 밝혀지고 살펴지면 신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천자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보다. 높은 분이 있으니 그 아버지가 계심을 말하는 것이며 반드시 먼저 하는 이가 있으니 그 형을 말하는 것이다. 종묘에 공경을 다하는 것은 어버이를 잊지 않음이요, 몸가짐을 수양하고 행실을 삼가는 것은 조상을 욕되게 할 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종묘에 공경을 다하는 것은 선조의 영혼이 나타나 감응하는 것이다. 효도와 우애의 지극함이 신명에 통하고 온 세상에 빛이 나서 미치지 않을 데가 없느니라.'
子曰: 昔者, 明王事親孝. 故事天明, 事母孝. 故事地察, 長幼順. 故上下治, 天地明察, 神明彰矣. 故雖天子, 必有尊也, 言其父也, 必有先也, 言有兄也. 宗廟致敬, 不忘親也; 修身愼行, 恐辱先也, 宗廟致敬, 鬼神著矣. 孝弟之至, 通於神明, 光于四海, 亡所不曁.
(孝經/應感章)
효 사상과 그 뿌리 (2)
6. 효(孝)의 종류(種類)
효도 사상이 정립되고 그 개념이 이해 되었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라 할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인간사회엔 지위의 고하가 있고 빈부의 격차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 조건에 따라 천태만상의 주위 환경이 다른 까닭에 효행이 모든 사람에 있어서 똑 같을 수만은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지위에 따라 또 빈부에 따라 혹은 다른 여건에 따라 그 효행의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효행을 크게 나누어 대효(大孝), 중효(中孝), 소효(小孝)로 분류하여 말한다.
이 대효, 중효, 그리고 소효를 설명하기 전에 孝는 보은이요 그 근본이 공경에 있다함은 전장에서 이미 언급 한 바가 있었거니와 효도에 있어서 비록 자기의 몸이라 하더라도 부모의 지체인고로 조금이라도 몸을 헐거나 상처를 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죽을 때까지 이 몸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것이 곧 孝의 시작이라 하였다.
그리고 孝는 인의예지, 사단(四端)의 발로(發露)라 하였거늘 효도하는 자는 그 누구든지 부부가 화합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벗에 신의를 지키며 나라에 충성한다.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면 모든 선행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니 사회인으로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어 그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 태평성세를 이루게 된다. 그렇게 하여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이 孝의 마지막 끝이라 하였다.
孝의 처음과 끝이 그렇다면 소효와 중효 그리고 대효를 어떻게 정의 하였는가 살펴보자
예기에 말하기를, '효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소효는 힘을 쓰고 중효는 노력을 하고 대효는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자애를 생각하야 수고로움을 잊으면 힘을 쓴 것이라 이를 수 있다(小孝). 어진 이를 존경하고 의리에 편안하면 수고로움을 했다고 이를 수 있다(中孝). 널리 베풀고 물건을 갖추면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大孝).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면 기뻐하여 잊지 않을 것이요 부모가 자기를 미워해도 두려워하거나 원망하지 말 것이다. 부모가 허물이 있으면 간하고 거스르지 않는다. 부모가 이미 죽었으면 반드시 어진 자의 곡식을 구해서 그것으로 제사 지낸다. 이것을 예의 마지막이라 일컫는다.'
孝有三, 小孝用力; 中孝用勞; 大孝不匱, 思慈愛, 忘勞, 可能用力矣; 尊仁安義, 可謂用勞矣; 博施備物, 可謂不匱弁矣. 父母愛之, 嘉而不忘; 父母惡之, 懼而無怨; 父母有過, 諫而不逆; 父母旣沒, 必求仁者之粟, 以祀之, 此之謂禮終.
(禮記/祭儀)
효행에 소효용력(小孝用力)이라 함은, 부모의 자애로운 마음씨를 생각하여 수고로움을 잊는 것이요, 중효용로(中孝用勞)라 함은, 어진 이를 존경하고 의리에 편안한 마음가짐이요, 대효불궤(大孝不匱)라 함은, 물건을 갖추어 부족함이 없이 널리 베풀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거나 미워하여도 자신은 오로지 효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아버지가 부도(父道)를 잃었더라도 자식은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한다(父雖不父, 子不可以子子)라는 말을 상기시키기도 하는 말이다.
어진 자의 곡식을 구해서 그것으로 제사 지낸다는 것은 어진 임금 밑에서 벼슬을 하여 그 녹봉으로 제사 지낸다는 뜻으로 대효는 입신양명(立身陽名)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증자는 효도를 이렇게 말하였다. '효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대효는 어버이를 존경하고 다음은 욕되게 하지 않고 그리고는 능히 봉양하는 것이다.'
曾子曰: 孝有三 大孝尊親, 其次弗辱, 其下能養.
공명의가 증자에 묻기를, '선생님은 효도를 했다고 하겠습니까?'
公明儀問於曾子曰: 夫子, 可以爲孝乎?
증자가 대답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군자가 말하는 효도는 뜻에 앞서서 어버이의 마음을 계승하고 어버이의 올바른 도에 이르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나로서는 오직 봉양만 했을 뿐이니 어찌 효도라고 하겠는가.'
曾子曰: 是何言與. 君子之所謂孝者, 先意承志, 諭父母於道, 參直養者也. 安能爲孝乎.
(禮記:祭儀)
증자도 효도에는 세 가지 차등이 있음을 말하였다. 孝는 덕(德)의 근본이기에 마음을 다하여 어버이를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여 섬김은 인정의 자연스러운 발로라 할 것이다.
따라서 소효란 의식주에 있어서 잘 봉양하고 정성껏 부모를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중효란 소효에 더하여 나의 행동거지(行動居止)에 있어서 부모조상에게 욕이 돌아가지 않게 바로 하는 것이요.
대효란 중효에 더하여 어버이를 받들어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널리 베풀고 물건을 갖추면 부족함이 없다(博施備物)'는 대효와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입신양명하고 가문(家門)을 넓히며 온 백성을 편히 다스리는 성군(聖君)이라야 가히 대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순(舜)임금을 가리켜 대효라 하였다.
맹자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장차 자기에게로 돌아옴을 보기를 마치 초개 같이 여긴 것은 오직 순임금만이 그렇게 했다. 사람이 어버이에게 기쁨을 사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고 어버이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자식 노릇을 할 수 없다. 순임금은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 어버이 고수가 기뻐하기에 이르렀으니 고수가 기뻐하기에 이르러서 온 천하의 아비와 자식 된 자들이 감화되어 부자(父子) 사이의 도덕이 안정해졌다. 세상에서 이런 것을 대효라 한다.'
孟子曰: 天下大悅而將歸己, 視天下悅而歸己, 有草芥也, 惟舜爲然. 不得乎親, 不可以爲人; 不順乎親, 不可以爲子. 舜盡事親之道而瞽瞍底豫, 瞽䏂底豫而天下化, 瞽䏂底豫而天下之爲父母子者定. 此之謂大孝.
(孟子/離婁章句)
순(舜)은 천하의 왕(王)이 되기에 앞서 자식 된 도리를 다함으로서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행의 근본인 효도를 못하면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기에 순은 마침내 지극한 효성으로 그의 아버지를 감화시켰다.
이를 본 백성들은 이에 감화되어 그를 따르게 되니 천하가 그의 아래에 열복(悅服)하게 되고 부자자효(父慈子孝)에 대한 윤리도덕이 안정되어 부모에 대한 효도가 천자(天子)의 자리와 직결하게 되었다.
맹자는 순의 대효를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자식으로서 효의 지극한 도리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 보다 더한 것이 없고, 어버이를 높이는 것의 지극한 것으로는 천하를 가지고 봉양하는 것보다 더 한 것이 없다. 천자의 어버이가 되었으니 높아지는 것의 지극한 것이요, 천하를 가지고 봉양을 하시니 봉양하는 것의 지극한 것이다.'
孝子之至, 莫大乎尊親; 尊親之至, 莫大乎以天下養. 爲天子父, 尊之至也; 以天下養, 養之至也.
(孟子/萬章上)
이와 같이 대효하는 효자가 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자는 달효(達孝)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무왕과 주공이야말로 달효였다. 대저 효란 선인(先人)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인의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다. 봄, 가을로는 그 조묘(祖廟)를 수리하고 종기(宗器)를 진열하며 의상(衣裳)을 펴놓고 제철의 음식을 바친다.'
子曰: 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子,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 春秋에 修其祖廟, 陳其宗器, 設其裳衣, 薦其時食.
(中庸/道論 孝와 禮制)
이 달효는 중효와 같은 의미로 중효는 '어버이의 마음을 계승하고 어버이의 올바른 도에 이르도록 깨우치는 것이다(先意承志 諭父母之道)' 라고 하였고, 달효는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인의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라(善繼人之志 善逑人之事者也)' 했거늘, 달효와 중효는 대등한 효도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부모의 생시에 그 몸과 마음을 위무 해 주고 봉양해 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사업을 잘 발전시켜 사후(死後)에라도 부모에게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 달효요, 중효인 것이다.
공자는 효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친이 계실 때에는 그 뜻을 살피고 부친이 돌아가시면 생존 시의 행적을 살펴 삼 년 동안은 선친(先親)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비로소 효자라 할 수 있다.'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論語/學而)
여기서 '삼년 동안은 선친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부모의 삼년 상중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생각되겠으나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곧 바로 생전의 뜻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좋게 하든 나쁘게 하든 부모에게는 욕이 된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생각 할 때에 소효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뜻을 받들고 몸을 봉양하는 양지양신(養志養身)의 효라 할 수 있고, 중효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후라도 부모의 업적을 잘 살려서 부모의 공명을 오래도록 발전 육성하는 것이요, 대효는 부모 생전에 모든 백성의 모범이 되어 그로 하여금 부(富)와 귀(貴)에 부족함이 없이 부모를 섬길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우리나라의 계급사회에서는 상민(常民) 계급과, 중인(中人) 계급 그리고 양반(兩班)계급으로 대개 삼 등급으로 나누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계급에 따라 모든 생활여건과 행동규모가 정하여 졌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마저 소효 중효 대효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역시 옛날과 같이 계급사회가 아니라 하더라도 생활의 규모나 활동 범위에 있어서 서민생활, 중류생활, 상류생활이 없을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효행의 방법은 옛날과 다를 수 있으나 효도의 종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효, 중효, 대효가 없을 수 없다.
7. 불효(不孝)에 대한 개념(槪念)과 정의(定義)
효도의 종류에서 소효와 중효 그리고 대효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불효란 어떤 것이며 그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알아야 할 것이다.
맹자는 세속불효(世俗不孝)를 다섯 가지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 첫째가 사지(四肢)를 게을리 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요, 둘째가 장기, 바둑을 두며 음주(飮酒)를 좋아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이요, 셋째가 재화(財貨)를 좋아하여 처자(妻子)에만 빠져서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요, 넷째가 이목(耳目)의 욕구를 만족시키느라고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가 용맹(勇猛)을 좋아하여 자칫하면 싸우고 성내어 부모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니라.
孟子曰: 世俗所謂不孝子五. 惰其四肢不顧, 父母之養, 一不孝也; 博奕好飮酒, 不顧父母之養, 二不孝也; 好貨財, 私妻子, 不顧父母之養, 三不孝也; 從耳目之欲, 以爲父母戮, 四不孝也; 好勇鬪狠, 以危父母, 五不孝也.
(孟子/離婁章句)
공자는 효자가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평소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에는 그 공경하는 마음에 이르게 하고 봉양할 때에는 그 즐거움에 이르게 하고 부모가 병환이 드시면 그 근심에 이르도록 하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슬픔을 다 하도록 하고 제사 지낼 때에는 엄숙한 마음을 다 하도록 하여야 되니 이 다섯 가지가 갖추어진 뒤에 자기의 부모를 잘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부모를 섬기는 사람은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남의 아래에 있어도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며 같은 또래 사람이 있을 때에도 다투지 아니 하나니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면 망할 것이요, 남의 밑에 있으면서 질서를 어지럽히면 형벌을 받을 것이며 같은 또래가 있을 때에 서로 다투면 상처를 입어 다치게 되는 것이니 이 세 가지 일을 없애지 않으면 설령 날마다 쇠고기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봉양하여도 오히려 불효가 될 것이다.
“子曰: 孝子之事親也, 居則致其敬, 養則致其樂, 疾則致其憂, 喪則致其哀, 祭則致其嚴, 五者備矣然後 能事其親. 事親者, 居上不驕, 爲下不亂, 在醜不爭, 居上而驕則亡, 爲下而亂則刑, 在醜而則兵, 此三者不除, 雖日用三牲之養, 繇爲不孝也.
(孝經/紀孝行章)
맹자는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 하였다. 순(舜)이 어버이에게 고하지 않고 장가를 든 것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것을 어버이에게 고한 것이나 같다고 여긴다.
孟子曰: 不孝有三, 無後爲大. 舜不告而娶, 爲無後也, 君子以爲猶告也. 하니라.”
(孟子/離婁章句)
이 말은 순이 그 어버이에게 고하지 않고 장가를 들었는데 그 것은 뒤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함이였다. 요(堯)임금은 자기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에게 시집보냈다. 순은 그들을 얻은 후에 비로소 그의 부친 고수에게 고했다.
맹자는 이를 고수가 완악해서 사전에 아내 얻을 것을 고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을 짐작하고 임시변통으로 그렇게 하여 후사(後嗣)를 얻은 것은 효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미리 고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효유삼(不孝有三)에 무후위대(無後爲大)라 하여, 불효 세 가지 중에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이 큰 불효가 되므로 효도를 하려면 후사를 위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말이 요사이 우리사회에서 산아제한이니, 인구조절이니, 하다 보니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남녀의 성(性)에 대한 본질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서 부부가 되고 한 가정을 이룸으로서 본능적 종족보존(種族保存)이 우선 되어야 함은 천륜이요, 인도(人道)임에도 일부 극소수의 젊은 계층에서는 성을 한갓 향락과 유희적 오락의 도구로 전락된 감이 없지 않으며, 값싼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가족의 동의 없이 당사자들의 의사만으로 혼인하는 경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전통 혼인윤리인 다른 두 성씨의 집안이 한 남녀를 혼인시키는 이성지합(二姓之合)에서 그로부터 인간번성의 시작이 되는 생민지시(生民之始)와 일만 가지 행복의 근원이 된다는 만복지원(萬福之源)이라는 진정한 부부윤리와 가정행복의 가치관이 바꿔지고 있는 이때에 어느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가 온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 몸이 부모로부터 받은 것인즉 나 또한 자식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또한 동물적 본능이요, 천륜적 도리이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나라 칠거지악(七去之惡) 중에 아들을 못 낳는 부인을 내쫓던 그때에도 삼불거(三不去)라 하여 쫓아내지 못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을 경우에는 아무리 칠거지악에 해당되는 일이 있어도 쫓아 내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칠거지악이라 해도 효도는 그것을 극복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삼불거의 또 하나는 나가서 의지할 곳이 없을 때와 가난하던 살림이 그 부인을 맞은 후부터 가세가 넉넉하여졌을 경우를 삼불거라 하여 쫓아내지 않았다.
아무튼 단지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인을 내쫓는다는 것은 오늘날 윤리로서는 이해되기가 힘들 것 같다.
칠거지악(七去之惡)
(1) 불순구고(不順舅姑)
(2) 음행(淫行)
(3) 무자(無子)
(4) 질투(嫉妬)
(5) 악질(惡疾)
(6) 구설(口舌)
(7) 도절(盜竊)
8. 효행(孝行)에 대한 실천적(實踐的) 사례(事例)
효행에 대한 실천적 사례를 이야기하기 전에 공자의 효에 대한 예절 말씀부터 살펴보자.
맹의자가 효도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어기지 말라'하셨다. 뒷날 마차를 모는 번지에게 말씀하시되, 맹손이 내게 효도를 묻거늘 내가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하셨다.
孟懿子問孝, 子曰; 無違.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번지가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묻는 말에 공자께서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는 예로서 섬기며 죽은 뒤의 장사 때에도 예로서 모시며 제사를 모실 때도 예로서 지내야 한다.'
樊遲曰; 何謂也? 子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
(論語:爲政)
효는 부모를 섬기는 도리이다. 어김(違)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다. 공자가 말씀하신 '어김이 없어야 한다' 라는 그 무위(無違)라 함은 생사장제(生死葬祭)를 막론하고 예절을 어기지 말고 섬기라는 의미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잠시 예절에 대한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예절이란 하늘이 명부 한 인성(人性)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인의예지의 예(禮)로서 예의는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精神)에서 우러나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의식(儀式)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절의 정신인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本性)으로서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이나 다만 행동의 표현인 의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적 변화와 더불어 많이 변천하여 왔고 앞으로 무한히 변혁하여 갈 것이다.
따라서 효도의 본질 또한 예나 지금이나 그 차이가 있을 수 없으나 사회의 생활상(生活相)인 의식주(衣食住)가 바뀌고 인생관 생활관의 가치기준이 바뀌면서 효행의 실천적 방법은 많이 바뀌고 있다.
앞으로 말하고자하는 효행에 있어서는 옛날의 효행을 예거(例擧)하면서 현대사회에 적응하여 변혁되어 가는 예절의식에 병행할 수 있는 효행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그런데 급변하는 오늘날 우리 주변의 정세는 너무도 여과없이 받아들인 서구문물에 우리민족 본연의 인성마저 흔들리는 경향이 없지 않는 것 같다.
이 시점에서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합리적이면서 개인주의에 자본위주의 서구문화 제도 하에서 인정에 각박한 과도기적 오늘의 현실로 그냥 묵과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서구문물을 우리의 도덕적 윤리관에 접목(接木)시켜서 중도(中道)적 윤리를 체계화하여 백행의 근본이 되는 효도사상을 온 겨레에 고취시켜 인성회복(人性回復)의 계기로 앞날의 백년대계를 설계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분명한 것은 중도(中道)이다.
우리의 전통 도덕윤리에 변혁해 가는 오늘의 물질문화를 절충 조화하여 오늘에 맞는 도덕윤리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용원리의 수시처중(隨時處中)인 것이다.
그 도덕윤리는 인간본성에서 찾아야 하고 그 본성은 효도사상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효는 사람만이 할 수 있고 그 또한 백가지 행실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공자와 그의 제자 증자는 간쟁(諫爭)에 대한 효행을 이렇게 대담하고 있다.
증자가 여쭙기를, '만약에 자애와 공경함에 이르러 양친을 편안하게 하여드리고 명성을 드날리는 것은 삼(參)이 이미 일러 보여주셔서 들어왔습니다. 감히 여쭈어 보건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曾子曰: 若夫慈愛龔敬, 安親揚名參聞命矣. 敢問, 子從父之命, 可謂孝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게 무슨 말이냐. 말이 도대체 통하지 않는구나. 옛날에 천자가 간쟁 하는 신하가 일곱 사람을 두면 비록 자신이 무도하더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았고 제후가 간쟁 하는 신하가 다섯 사람이 있으면 비록 그 자신이 무도해도 그 나라를 잃지 않았으며 대부가 간쟁 하는 신하가 세 사람이 있으면 비록 자신이 무도해도 그 가정을 잃지 않았고 선비가 간쟁 하는 친구를 두면 자신에게 아름다운 명성에서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가 간쟁 하는 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불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불의를 당하였을 때면 자식은 아버지에게 간쟁 하지 않을 수 없고 임금도 불의 할 때에 신하는 임금에게 간쟁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의한 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간쟁 하여야 되는 것이니 아버지의 명령만 따른다 하여 또한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子曰: 參是何言與. 是何言與. 言之不通邪, 昔者, 天子有爭臣七人, 雖亡道; 不失其天下, 諸侯有爭臣五人, 雖亡道; 不失其國, 大夫有爭臣三人, 雖亡道; 不失其家, 士有爭友, 則身不離於令名, 父有爭子, 則身不陷於不誼. 故當不誼, 則子不可以不爭於父, 臣不可以不爭於君. 故當不誼, 則爭之, 從父之命, 又安得爲孝乎.
(孝經: 諫爭章)
공자는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간쟁하는 자가 있음에 자기 본분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 하셨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간쟁하는 아들이 있어야 그 부모가 불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만약 부모의 잘못을 보고도 순종만이 효도로 생각하고 자식이 간쟁 하지 않아 그 부모가 불의에 빠졌다면 그것은 분명 불효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간쟁이라 하여 부모의 불의를 불경불순(不敬不順)한 마음과 행동으로 방어(防禦)하라는 것은 아니다.
공자의 다음 말씀을 들어보자.
공자는 부모를 섬김에 있어 허물이 있을 때에는 간곡히 그것을 간(諫)하고 설혹 나의 뜻을 좇지 않더라도 더욱 공경하되 그 뜻을 버리지 말며 또한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을지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子曰: 事父母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論語/里仁)
여기서 앞에 말씀하신 간쟁의 뜻을 알 수 있다. 앞의 말씀은 간쟁하는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음의 말씀과 지금 이 말씀은 부모에게 간쟁하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부모도 사람이라 잘못을 할 수있다. 부모에 허물이 있으면 간곡히 권고하고 진언(進言)할 것이며, 설혹 듣지 않더라도 공경하지 않는다던가, 원망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두 번, 세 번, 열 번이라도 울면서 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군신간(君臣間)에는 세 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그 자리를 떠나 피하라 했거니와(爲人臣之禮, 不顯諫, 三諫而不聽, 則逃之), 부자 사이에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으며 좇으라 했다.
예기에도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아들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세 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울부짖으며 좇는다.
子之事親也, 三練이不廳, 則號泣而隨之.
(禮記/曲禮)
이와 같이 간쟁자가 있음에 부모가 불의에 빠지지 않는다. 다만 군신간의 간쟁과 부자간의 간쟁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있다. 예나 지금이나 간쟁과 그 방법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예기에 말하기를, '아버지의 친구를 뵈었을 때는 나오라고 하지 않으면 감히 나오지 못하며, 물러가라 하지 않으면 감히 물러가지 못하며, 묻지 않으면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이것이 효자의 행실이다.'
見父之執, 不謂之進, 不敢進; 不謂之退, 不敢退; 不問, 不敢對. 此孝子之行也.
(禮記/曲禮)
여기서는 효자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부모를 생각할 때 감히 부모와 연세가 비슷한(年輩) 어른에게 불경한 언행(言行)으로 대할 수 없다. 이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그 부모 친구에게까지 연장하게 되는 경로 효친(敬老孝親)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따라서 이 인간사회에 효도사상으로 윤리가 확립되면 집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라와 더불어 천하태평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법(法)에 앞서 예(禮)로서 질서가 설 것이요. 형정(刑政)에 앞서 덕치(德治)로 민화(民和)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공자는 법치와 덕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법률로써 백성들을 지도하고 형벌로써 질서를 유지시키면 백성들은 법망을 빠져나가되 형벌을 피함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한다.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서 질서를 유지시키면 백성들은 부정을 수치로 알고 착하게 된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論語/爲政)
이와 같이 민면이무치(民免而無恥)와 유치차격(有恥且格)은 오직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 양심에 근본을 두고 안두고 에 달려 있다. 그 도덕적 양심은 오직 효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덕치(德治)는 경로 효친 사상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한번 발을 들어도 부모를 잊지 않고, 한번 말을 하는데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않는다.
壹擧足而不敢忘父母,
壹出言而不敢忘父母.
한번 발을 들어도 부모를 잊지 않기 때문에 길을 가도 지름길을 가지 않으며, 배에서 놀지 않음으로써 부모가 물려준 몸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壹擧足而不敢忘父母, 是故, 道而不徑; 舟而不游, 不敢以先父母之遺體, 行殆.
또 한 번 말하는 데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않기 때문에 나쁜 말이 부모 앞에서 입으로 나오지 않고,
壹出言而不敢忘父母,
是故惡言不出於父母.
신중한 말은 몸으로 욕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고 그 부모를 부끄럽게 하지 않아야 효도라 할 것이다.
念言不反於身. 不辱其身, 不羞其親, 可謂孝矣.
(禮記:祭儀)
한 발짝 옮기는 데에도 한 말씀하는 데에도 부모를 생각할 때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며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내 한 몸 잘못 행동하거나 잘못 말하다가는 부모에게 욕이 돌아가고 부모의 마음이 편치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식 된 사람들은 부모가 살아 있을 때나 돌아가신 후라도 하찮은 행동이나 하찮은 말이라도 부모를 생각하면 실수가 있을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자식된 모든 사람이 일거족 일출언(壹擧足, 壹出言)에 부모를 생각하면서 말과 행동을 한다면, 이 사회 또한 예의 바른 세상이 될 것이요, 이 나라 또한 진정한 동방예의지국(東邦禮儀之國)이 될 것이다.
공자가 관직에서 잠시 떠나 평민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께서는 왜 정치에 참여하시지 않으십니까?'
或謂孔子曰; 子奚不爲政?
이에 공자께서 답하시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오직 효도해라 그리고 형제에게 우애로움이 곧 정치에 참여함이요 정치를 함과 같으니라' 라고 했거늘, 어찌 정치에 참여함만이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오.'
子曰: 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政.
(論語/爲政)
유교가 말하는 정치의 최대 이상은 평천하(平天下)에 있다. 그 근본 출발점은 수신재가(修身齋家)에 있으므로,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면 그 효제가 바로 평천하의 바탕이 되어 집집마다 효제 가정이면 그 나라는 충절의 국가가 될 것이요, 나라마다 충절의 국가가 되면 이 천하는 태평천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천하태평 시대요, 그 바탕은 효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효제가 평천하의 바탕일진데 오늘과 같은 의회정치에 있어서는 비록 정치에 직접 나아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효제의 가정에서 효제 하는 인물을 선출한다면 선출된 사람이나 선출한 사람 모두가 정치에 올바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예기에 말하기를, '군자는 살아 계실 때에 공경하여 봉양하고 돌아가셨을 때에 공경하여 제사 지낸다. 자기 몸이 다하도록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君子生則敬養, 死則敬享, 思終身弗欲也.
(禮記/祭儀)
여기서는 살아 있을 때나 돌아가셨을 때나 오직 공경하는 마음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그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진수성찬으로 봉양하고 산해진미(山海眞味)로 제사 지낸다 해도 그것은 견마의 봉사는 될지언정 사람의 효도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기 몸이 다하도록 즉 죽을 때까지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기에 말하기를,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세 가지 도가 있다.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는 봉양하고 돌아가시면 상례를 행하고 상이 끝나면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봉양할 때에는 그 도에 따르는 것을 보고 상례 때에는 그 슬픔을 보고 제사지낼 때에는 공경함과 그 때에 맞추어 정성을 다하는가를 보나니 이 세 가지도를 다하는 것이 효자의 행실이다.'
孝子之事親也, 有三道焉, 生則養, 沒則喪, 喪畢則祭. 養則觀其順也, 喪則觀其哀也 祭則觀其敬而時也. 盡此三道者, 孝子之行也.
(禮記/祭統)
여기서는 부모가 살았을 때와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제사 지낼 때의 자식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말하고 있다. 생시(生時)에 봉양하고 사후(死後)에 애도(哀悼)하는 마음으로 상례를 치르고 제사로서 생전에 못 다한 효도를 성의로서 계속하는 것이 효자의 삼대도리(三大道理)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에 대하여 여러 종교 간의 견해차이로 가족 사이에 갈등을 빚는 것을 가끔 보게 되는데 이 제사는 가족 간의 우애와 부모조상의 음덕(陰德)을 추모(追慕)하는 뜻으로 자손들이 모임으로써 어른들의 덕담(德談)을 들으면서 효도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욱 요사이 같이 핵가족화 되면서 부모를 모시고 사는 집안이 드물게 되면서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보고 배울 기회가 없게 되었는데 일 년에 몇 번의 제사마저 모른다면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효도를 배우고 효행을 볼 수 있으며 친척간의 가족애를 느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다.
다음은 제사와 효행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공자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조를 제사 지낼 때에는 조상이 제상 위에 앉아 계시듯이 정중하셨고 산천의 신에 제사 지낼 때는 신이 제상 위에 있듯이 경건하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사 모실 때에 참석하지 않으면 제사를 모시지 않음과 같다.'
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吾不與祭, 如不祭.
(論語/八佾)
여기서 공자가 말씀하신 제사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사 지낼 때에는 조상이 제상 위에 앉아 계시듯이' 라는 말은 내 마음가짐을 정중히 정성을 다 하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사 모실 때에 참석하지 않으면 제사를 모시지 않음과 같다'는 것도 역시 나의 정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예기(禮記)에는 제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어진 사람의 제사에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 세상 사람들이 이르는 복이 아니라 이 복은 비(備)이다. 비란 모든 도리에 순응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정성 된 마음을 다하고 밖으로는 도리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賢者之祭也, 必受其福. 非世所謂福也, 福者備也. 備者, 百順之名也. 無所不順之謂備, 言內盡於己, 而外順於道也.
충신은 이로서 임금을 섬기고 효자는 이로서 어버이를 섬기는데 그 근본은 하나일 뿐이다. 위로는 귀신에 따르고 밖으로는 임금이나 손윗사람에게 따르며 안으로는 어버이에 효도하는 것이다. 이같이 하는 것을 비(備)라고 한다. 오직 어진 자만이 능히 비하며 능히 비한 연후에야 능히 제사를 지낸다.
忠臣, 以事其君, 孝子以事其親, 其本一也. 上則順於鬼神, 外則順於君長, 內則以孝於親. 如此之謂備. 唯賢者能備, 能備然後能祭.
그런고로 어진 자의 제사에는 그 정성 된 마음과 충성스런 공경을 다하여 제물로서 받들고 예로서 인도하고 악(樂)으로서 편안히 하고 시(時)로서 더불어 제사 지낸다. 명백히 하여 제물을 바칠 뿐 세속적인 복상(福祥)을 구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효자의 마음인 것이다.
是故, 賢者之祭也, 致其誠信, 與其忠敬, 奉之以物, 道之以禮, 安之以樂, 參之以時. 明薦而已矣, 不求其爲, 此孝子之心也.
(禮記/祭統)
여기서 말하는 복은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備)라고 설명하였다. 그 비는 세속적인 기복(祈福)이 아니라 안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정성을 다하고 밖으로는 모든 도리에 순응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충(忠)과 효(孝)의 근본은 하나라는 충효사상이다.
따라서 성심성의로서 제사를 지낼 때에 이것이 효자의 마음이다. 그렇지 못하고 조상의 제사를 기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낸다면 그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불효막심한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목 밑에서 제사를 지내면 조상의 제사보다 더 많은 복을 준다하면 조상의 제사에는 생각이 없고 고목 밑에만 제사 지낼 불효자이기에 말이다. 제사의 진정한 참뜻은 이 몸이 살아 있는 동안 효도하는 마음의 연장이요 효행의 연속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여야 할 것은 절(拜)에 대한 이야기다. 제사도 제사려니와 일부종교에서 절하는 것을 금기시키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조상의 제사가 우상숭배라 할 수 없음은 물론 절하는 것은 제사의 의식으로 그 시대 그 지역 그 민족에 따른 풍속이요 예절일 뿐이다.
지금 옛날과 같이 굴건제복(屈巾祭服)에 삼년시묘(三年侍墓)를 주장할 사람이 누가 있으며 그렇게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또 있어서도 안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의례준칙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효도의 평등에 대하여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천자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효도라고 하는 것은 끝과 시작이(부모와 자식 곧 연속성의 의미) 없으면서 환난이 미치지 않을 자가 있지 않느니라.'
子曰: 故自天子己下, 至于庶人, 孝亡終始, 而患不及者未之有也.
(孝經/孝平章)
이와 같이 효도는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상하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 효행 방법에 있어서는 신분과 계급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효의 본질적 근본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모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이 존재하는 한 부모와 자식 사이는 대를 이어 연속되어 가고 효 또한 부모를 섬김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아정립(立身)에서 끝맺음은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평등하다는 것이다
9. 신분(身分)과 계급(階級)에 따른 효행(孝行)
옛날에는 신분과 계급이 엄격하여 상민(常民)에서 양반(兩班)으로 일반적으로 민중 신분이 분명하여 천자로부터 일반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다섯 단계의 계급과 신분이 있었다.
그에 따라 공자는 서인의 효에서부터 천자의 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의 도리를 활용하여 땅의 이로움 곧 농사짓기를 따르고, 자신의 몸을 삼가고 절약함으로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니, 이것이 서민의 효도니라.'
子曰: 用天之道, 因地之利; 謹身節用, 以養父母, 此庶人之孝也.
(孝經:庶人章)
이 말씀은 농경시대(農耕時代)에 있어서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四季節)에 따라 전답 간(田畓間)에 농사를 잘 지어서 그것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에게 욕되지 않게 자신의 몸가짐에 있어서 망령된 행위를 하지 않으며 근검절약 하는 살림살이로 집안을 부유케 하는 것을 일반적 서민의 효라 하였다.
이 일반적인 효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서민생활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오늘의 산업사회(産業社會)에 있어서의 물질적 추구 방법이 농경사회와 다를 뿐 근신절용(謹身節用)하는 마음가짐은 다를 것이 없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어버이 섬기는 것에 바탕을 두어서 어머니를 섬기니 그 사랑은 한 가지요 아버지 섬기는 것에 바탕을 두어 임금을 섬기니 그 공경됨이 한가지다. 그런 까닭으로 어머니는 그 사랑을 취하고 임금은 그 공경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을 겸비한 것이 아버지라. 그러므로 효도로서 임금을 섬기니 그것이 곧 충성이요 공경으로서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종이다. 충성과 순종을 잃지 아니하고 그 윗사람을 섬긴 연후에야 그 관직과 봉록을 보전 할 수 있고 그 제사를 지킬 수가 있으니 이것이 선비의 효이다.'
子曰: 資於事父, 以事母, 以愛同; 資於事父, 以事君, 而敬同. 故母取其愛, 而君取其敬, 兼之者父也. 故以孝事君, 則忠, 以弟事長, 則順. 忠順不失, 以事其上然後, 能保其爵祿, 而守其祭祀, 蓋士之孝也.
(孝經/士人章)
여기서는 효도하는 마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나오고, 공경하는 마음 또한 효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효자만이 나라에 충성하고 어른을 섬기며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인으로서 자기의 직분을 보전할 수 있고 부모에 효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 또한 오늘과 같은 산업사회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효도의 기본으로 이런 사람만이 사회인으로서 지도자로 등용되어야 할 것이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아니하고, 선왕의 법언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으며, 선왕의 덕행이 아니면 감히 실행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법도에 맞는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고 도리가 아니면 실행하지 않으며 입으로는 가려서 말할게 없을 정도로 선악을 잘 분별하여 말하고 몸으로는 가려서 행동할게 없을 정도로 선악을 분별하고 행동하며 자기 말이 온 세상에 가득 차더라도 실언이 없으며 행동이 온 천하를 가득 차더라도 원망이나 미워함이 없으니 이 세 가지를 갖춘 연후에야 능히 자신의 지위와 녹을 보전하며 그 종묘를 지킬 수 있음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경대부의 효도니라.'
子曰: 非先王之法服, 不敢服; 非先王之法言 不敢道; 非先王之德行, 不敢行. 是故, 非法不言, 非道不行, 口亡擇言, 身亡擇行. 言滿天下, 亡口過; 行滿天下, 亡怨惡. 三者備矣然後, 能保其祿位, 而守其宗廟, 蓋卿大夫之孝也.
(孝經/卿大夫章)
여기서 말하는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의 효는 그들 한 사람 개인의 언어와 행동이 그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나는 의복에서부터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법도에 어긋나는 것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의 지도자로서 이미 공인으로서 이 세 가지(非服不服, 非法不言, 非道不行)을 갖춘 다음에야 자기의 지위를 지킬 수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모에게 불효함은 물론 그 한사람의 불효로 인하여 국가와 사회에 윤리적 파국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사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춰야 한다. 그 자질이 바로 효자만이 갖출 수 있는 비복불복하고 비법불언하며 비도불행인 것이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윗자리에 있으면서 남에게 교만하지 않으면 높은 지위에 올라가도 그 지위가 위태롭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절제하여 법도에 맞게 하면 재물이 가득 차도 넘쳐서 손실되지 않는 것이다. 지위가 높아도 위태로움이 없는 것은 오래도록 귀함을 지킬 수 있는 까닭이 되는 것이요, 재물이 가득 차도 넘치지 않는 것은 오래도록 부를 지킬 수 있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부와 귀를 그 자신의 몸에서 떠나지 않는 연후에야 그 국가를 보전할 수 있어서 그 백성을 화목하게 하리니 이것이 대체로 제후의 효도이다.'
子曰: 居上不驕, 高而不危; 制節謹度, 滿而不溢. 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 滿而不溢, 所以長守富也. 富貴, 不離其身然後, 能保其社稷, 而和其民人, 蓋諸侯之孝也.
(孝經/諸侯章)
여기서 말하는 제후(諸侯)라는 것은 봉건시대(封建時代) 고대 중국에서 천자로부터 봉토(封土)를 받아 그 곳의 백성을 지배하던 작은 나라 임금(王)을 말하는 것으로 위로는 천자 한 사람이 있고 아래로는 많은 백성이 있음에(一人之下, 萬人之上), 교만하거나 절제와 법도를 삼가지 못하여 그 왕위를 지키지 못하고 그 나라를 잃게 된다면 이것은 불효에 불효를 거듭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富)와 귀(貴)는 지위가 높은 것을 귀라 하고 재산이 풍부한 것을 부라 하여 그것이 자신에서 떠나지 않아야 사직 즉 국가를 보전 할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효심일 뿐 그 마음을 떠나서 교만하거나 절제와 근도 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어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감히 남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사람은 감히 남을 오만하게 대하지 않나니, 사랑과 공경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다하면 덕으로 교화함을 백성에게 영향을 더하게 되어서, 온 세상에 모범이 되나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천자의 효니라.'
子曰: 愛親者, 不敢惡於人; 敬親者, 不敢慢於人. 愛敬, 盡於事親, 而德敎加於百姓, 刑于四海, 蓋天子之孝也.
(孝經/天子章)
일반 서민에서부터 천자에 이르기까지 효도하는 마음에서 효도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효라는 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는 것으로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는 이 효가 없을 수 없고 없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효가 없다면 그야말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이요 이 세상은 금수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옛날 봉건시대에 있어서는 권리와 의무가 신분과 계급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상민이 양반의 효를 하려야 할 수 없었고 서민이 경대부의 행세를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신분과 계급이 타파되고 인권과 자유가 많이 보장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보이지 않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기준이 다를 뿐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의 황금 만능 사상이 쾌락위주의 동물적 본능으로 흘러들면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서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힘의 대결로 보이지 않는 신분이 형성되고 계급이 내재하면서 효 사상마저 그 배금사상의 그늘에 가려 퇴색 되어가고 있다.
요즘 언론보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루가 멀다 하고 패륜적 사회악이 창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하루 존속폭행살상이 평균 2.7 명꼴이라는 보도를 들었을 때에 정말 우리사회의 앞날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빨리 우리나라 지도층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인성회복(人性回復)을 구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서 효의 본질을 찾는 데에 힘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10. 일상생활에서의 효행
다음은 일상생활에서 효행이라기 보다 자식된 도리로 지켜야 할 기초적인 몇 가지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무릇 사람의 자식이 되어 부모를 섬기는 예는,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봐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려야 되며, 친구들과 다투지 않아야 한다.
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淸, 昏定而晨省, 在醜夷不爭.
(禮記/曲禮上)
자식으로서 매일 부모를 섬기는 기본 예절을 설명한 것으로 오늘과 같은 핵가족 현상에서 부모와 같이 한집안에 살지 않는 가정에서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비록 따로 산다하더라도 최소한 일주일에 한두 번쯤은 전화문안은 꼭 지켜야 할 것이고 한 달에 한두 번쯤은 같은 생활권내에 산다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봬야 할 것이다.
옛날 우리 가정은 삼대동거(三代同居)가 보통이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농경사회에서 같은 마을에 함께 살 때에는 어릴 때부터 부모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하는 일상언행(日常言行)이 무의식중에 습관화되고 생활화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별도의 교육이 없어도 자연히 습득이 되고 그것이 체질화되어 미풍양속(美風良俗)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오늘의 어린이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평일은 아침저녁으로 바쁜 생활에 지친 아버지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보다가 공휴일, 쉬는 날이면 모처럼 아버지는 아이들과 놀게 된다. 귀여운 나머지 그 어린것과 권투나 레슬링 놀이를 한다. 꼭 아버지가 맞아 줘야 하고 져야만 아이는 좋아한다.
또 권총 놀이에서도 아버지는 죽어 줘야만 아이는 쾌거를 부른다. 이것은 효도를 가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아비 두들겨 패고 아비 죽이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
이 아이가 커서 어떻게 되겠다는 말인가? 세 살 때부터 배운 것이 무엇인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아비 두들겨 패고 아비 죽이는 것이 예사로운 일로 생각하게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사이 일부 젊은 부모들은 어린이에게는 정직하여야 한다. 또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등 말만은 그럴듯하게 하면서 실지 행동은 그렇지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한 예로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어린아이 보고 전화 받으라 한다. 그리고는 '아무개 엄마거든 엄마 없다 해라' 한다. 이때 아이는 눈을 끔벅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어린아이는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엄마의 말이니까 '엄마 없어요' 한다.
그때 아무개 엄마는 자기도 그런 짓을 해보았기에 전화 받는 아이 보고 호통을 친다. '아침 설거지도 안하고 어데 갔단 말인가? 옆에 있잖아 빨리 바꿔'
이때 이 어린것은 가슴이 덜컥 한다. '엄마 바꾸래.' 하면서 전화기를 엄마에게 건네준다. 참으로 진풍경이다. 이런 것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그 어린것은 철판심장이 되고 말솜씨도 제법 늘어난다.
이뿐인가. 아이가 공부를 좀 못하면 엄마는 아이 보고 '너 아빠 닮아 그렇지.' 하고 아빠는 '제 어미 닮았으니 꼴찌밖에 할 수 있나' 한다. 그 아이는 엄마를 볼 때에는 아빠가 바보 같고 아빠를 볼 때에는 엄마가 바보 같아 보일 것이다.
그 애가 자라나서 그 부모에게 존경심이 생길 수 있으며 효도 할 생각이 나겠는가 말이다. 그 애가 커서 무엇이든 잘 안되면 부모 원망하기 일수 일 것이다. '잘못되면 조상 탓이요. 잘되면 제 탓이다'는 속담이 이런 데에서 생겨난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옛날 고려장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다. 어버이가 70세가 넘어서 고려장을 하려고 어버이를 지게에 짊어지고 양지 바른 언덕에 올라가서 땅을 파고 어버이가 들어갈 수 있는 구덩이를 만들어 어버이를 구덩이에 두고 돌아오려는데 그래도 자식 된 마음에 뒤도 돌아보기 싫어서 그냥 내려오려 할 때에 같이 따라 갔던 열 살 미만의 손자가 할아버지를 짊어지고 갔던 지게를 가지고 가려 한다.
이때 그는 자기 아들을 보고 '보기도 싫은 지게는 왜 가지고 갈려느냐' 하면서 나무랐다. 이때 그 어린것이 '이 지게를 가져가야 다음에 아버지도 내가져다 버릴 수 있잖아요' 한다.
이때 그는 뉘우침이 많았다. 그는 어버이를 집으로 다시 모시고 와서 극진히 효도하였다. 그 이후로 고려장 풍속이 없어진 것은 아닌지?!
그리고 맹자와 돼지고기에 대한 이야기 또한 자녀교육에 꼭 알아야 할 이야기라 생각된다.
하루는 맹자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뒷집에서 돼지 잡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이때 어린 맹자는 그 어머니를 보고 '뒷집에서는 무엇을 하려고 돼지를 잡나요?' 하고 물었다.
이때 맹자 어머니는 엉겁결에 '네 줄려고 잡는 거야' 하였다. 이때 맹자는 좋아서 날뛰었다. 맹자 어머니는 '아차!' 하는 생각에 뒷집으로 뛰어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돼지고기를 사다 맹자에게 먹였다 한다.
훌륭한 자식에는 모범적인 부모가 있고 모범적인 부모 밑에는 훌륭한 자식이 자라나는 모양이다.
정신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격의 발달은 0-6세 사이에 그 기초가 형성된다고 한다. 이 시기를 건강하게 잘 자란다면 커서 시련이 왔을 때 잘 견뎌 나가고 이 시기에 정신적 충격과 상처가 있다면 갈등 상황에서 노이로제나 정신병으로 발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양육이 그 아이의 일생의 정신건강을 좌우한다고 한다.
요사이 청소년층의 자살이 늘어가고 또 군대에서는 탈영사건이 가끔 일어나고 잇다는 보도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해서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하고 억제하는 힘을 기르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이 사회 적응을 못하기 때문이다.
옛날 같이 여러 형제가 자랄 때는 형제들 사이에서 되고 안 되는 것을 배우게 되고 형우제공(兄友弟恭)과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자연스럽게 몸소 익혀왔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하나만 낳아 기르다 보니 이것은 양육(養育)이 아니라 사육(飼育)을 하고 있다.
젊은 부모들이여! 늙어서 자식에게 효도 받으려면 내가 먼저 부모에게 효행으로 본보기를 보여야하고 자식은 자식으로 키워야지 부모의 소유나 기호(嗜好)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부모에게 불효하면 그것은 곧바로 내 자식에서 나에게로 되돌아오고 그 반대로 내 부모에게 내가 효도하면 내 자식에게 효도를 받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강태공은 이런 말을 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면 자식 또한 효도하나니, 자신이 이미 불효하다면 자식이 어찌 효도하리요'
太公曰: 孝於親, 子亦孝之; 身旣不孝, 子何孝焉.
(明心寶鑑/孝行)
효성스럽고 순한 사람은 다시 효성스럽고 순한 자식을 낳을 것이요, 다섯 가지 거스름을 범한 사람은 다시 다섯 가지 거스르는 자식을 낳을 것이니, 믿지 못할 것 같으면 다만 처마 끝의 물을 보라. 방울방울 떨어지고 덜어지는 것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孝順, 還生孝順子; 五逆, 還生五逆子; 不信, 但看簷頭水. 點點滴滴不差移.
(明心寶鑑/孝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부모가 살아 계시거든 멀리 길을 떠나지 말며, 부득이 먼 길을 떠날 때에는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야 한다.'
子曰: 父母在, 不遠遊, 有必有方.
(論語/里仁)
우리 속담(俗談)에 팔십 노부모가 육십 된 아들을 앞세워 놓고 '얘야 조심 하여라' 한다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부모의 사랑은 한이 없다.
자기가 성장하여 자식을 기르고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사랑을 십분의 일이라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그 부모는 이 세상에 계시지를 않는다. 정말 효도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대저 사람의 자식 된 자는, 나갈 때는 반드시 나간다고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뵙고 인사를 드리며, 노는 곳은 반드시 일정해야 하고, 익히는 것도 일정한 업이 있어야 하며, 평상시 말할 때에 자신이 늙었다고 일컫지 않는다.
夫爲人子者, 出必告, 反必面; 所遊, 必有常; 所習, 必有業; 恒言, 不稱老.
(禮記/曲禮上)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외출할 때나 돌아왔을 때에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집에 부모와 같이 살지 않더라도 출장이나 혹은 가족 전체가 출타할 일이 있어서 하루 이틀 집을 비우는 경우가 생길 때에는 전화로라도 반드시 말씀을 드리고 다녀와서도 돌아 왔음을 아뢔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식들에 대한 효도의 산교육이 될 것이다. 어린 자녀들 앞에서 내 자신이 모범을 보여야함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자식들에게 이와 같은 예절은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부모 앞에서 자식으로서 자신이 늙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말을 부모가 들었을 때에 부모는 자신이 더욱 늙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슬퍼지게 되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백성을 친절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효도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백성을 예의바르게 순종하는 것을 교화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는 것이요. 풍속을 순후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풍류보다 잘하는 것이 없으며, 임금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예의보다 좋은 것이 없는 것이다. 예의라고 하는 것은 공경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자기 아버지를 존경하면 그 자식이 기뻐하고 자기 형님을 존경하면 그 아우가 기뻐하고, 자기 임금을 존경하면 그 신하가 기뻐하게 되나니, 한사람 곧 자기 부모를 존경하매 천만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이다. 공경하는 사람은 적지만 기뻐하는 사람은 많은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요도(要道)라고 하는 것이다.'
“子曰: 敎民親愛, 莫善於孝; 敎民禮順, 莫善於弟. 移風易俗, 莫善於樂; 安上治民, 莫善於禮. 禮者, 敬而已矣. 故敬其父, 則子說; 敬其兄, 則弟說; 敬其君, 則臣說; 敬一人, 而千萬人說. 所敬者寡, 而說者衆, 此之謂要道也.
(孝經/廣要道章)
공자는 효제(孝悌)와 예악(禮樂)으로 백성에게 친애(親愛)와 순례(順禮) 그리고 역속(易俗)과 치민(治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더욱이 예는 공경할 따름이라 하여 효자의 공경은 만인을 기쁘게 한다는 것으로 효(孝) 제(梯) 악(樂)은 상관관계에 있어서 효도만이 다 할 수 있다.
어버이에게 호도 하면 반드시 어른에게 공경하게 되고 효도하고 공경하는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화락하고 순종하게 된다.
조화하는 것은 음악이요 순종하는 것은 예절이니 이 네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것이나 거동이 있으면 전부 갖추어 진다. 그러므로 그 근본은 하나라는 것이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자기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도덕을 어기는 사람이라 하고, 자기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을 예의에 어긋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가르침이 혼란 할 것 같으면 백성들이 본받을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착함에 마음을 자리 잡게 하지 않으면 모두가 도덕에 어긋난 것에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비록 자신의 뜻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군자는 그것에 따르지 말아야 된다. 군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말할 때에는 법도에 맞는가를 생각하고, 행동할 때에는 즐거움에 맞도록 생각하며, 사람의 바른 도리는 존경받을 수 있게 하고, 어떤 일을 만들 때에는 법도에 맞도록 하며, 몸가짐은 보기 좋게 하고, 거취행동은 법도에 맞게 하여, 이로서 그 백성들에게 임하게 되면 이로서 그 백성이 경외하고 친애하고 법칙으로 삼으면서 그것을 본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도덕적 교화함을 이룩할 수가 있어서 그 정사와 국가 시행령을 잘 실천할 것이다.'
“子曰: 不愛其親, 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 而敬他人者, 謂之悖禮. 以訓則昏, 民亡則焉; 不宅於善, 而皆在於凶德, 雖得志, 君子弗從也. 君子則不然, 言思可道; 行思可樂, 德誼可尊; 作事可法, 容止可觀; 進退可度, 以臨其民, 是以其民, 畏而愛之, 則而象之. 故能成其德敎, 而行其政令.
(孝經:孝憂劣章)
요사이 우리사회에서는 자원봉사(自願奉仕)라는 말이 많이 유행하고 자원 봉사하는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옥(玉)에도 티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 집안은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하면서 또 자기 부모는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면서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과 같이 남에게 칭찬 듣고 남 앞에 나서기 좋아서하는 자원봉사자라면 착한 사람 좋은 일 하는 사람이라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덕(悖德)이요 패례(悖禮)가 되는 것이다. 요사이는 자화자찬(自畵自讚)에 자기선전을 좋아하여 외관상 과시들을 많이 한다.
팔순이 넘은 시어머니를 집에 두고 행여나 화재가 위험하다 하여 가스 잠금을 내려놓고, 문밖에 나가서 혹시 라도 넘어지거나 또는 이웃 사람들과 집안일 말 많을까 걱정되어 현관문 잠가 놓고, 식은 밥 몇 숟가락에 김치 몇 조각으로 그리고 자원봉사를 나간다면! 만에 하나라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틀림없는 패덕이요, 패례일 것이다.
효도는 하늘의 법칙이며, 땅의 올바름이어서, 사람이 마땅히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효도를 다하면 마음이 화목하고 기색이 화목하게 되어 온 천지가 화목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孝者, 天之經, 地之義, 而人之行也. 人人盡孝則, 心和氣和, 而天地之和應矣.
효도란 하늘의 법도와 땅의 올바름에서 마땅히 부모에게 행해야 할 도리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천경지의(天經地義)에 따라 사람마다 화목하게 되고 서로 사랑하며 의로움을 알게 되고 가정에서부터 예의 바른 질서가 온 사회에 퍼져 나가서 온 인류가 옳고 그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본성인 인의예지에서 효의 뿌리가 되는 인(仁)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은 메마르고 마침내는 금수의 세계와 다를 것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요즈음 인성회복이니 도덕불감증이니 하면서 오늘의 이 사회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인성을 바로잡고 윤리도덕을 바로 세우려면 그 뿌리인 효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끝맺는 말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으나 요즈음 우리나라 일부대학에서 명심보감(明心寶鑑)등 우리의 전통윤리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교육은 초등교육에서 실천적 덕목으로 훈도(訓導)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몸에 배이게 되고 일상생활 화되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면 앞으로 변혁해 가는 우리문화에 따른 미래에 전개될 보다 잘 살고 사람다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윤리의 기본을 교육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기 위하려는 우리의 전통윤리의 바탕인 인성(人性) 철학에서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곤궁하던 의식주(衣食住)의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우리 인간들은 보다 행복한 생활을 갈구하고 있다.
그 행복한 생활이란 어떤 것이 행복한 생활인가? 하고 반문한다면 지금까지는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 살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정보문화사회로 전환되면서 의식주의 풍요만으로는 만족 할 만 한 행복이라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다운 생활을 함으로서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인간다운 생활을 찾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다운 생활을 찾다보면 나라는 존재개념에서 나는 한 부모의 자식인 동시에 한 자식의 어버이가 되고 이렇게 되면서 사회구성의 기초단위가 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보다 올바른 가정생활이 보다 행복한 생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정생활에는 가족화목을 추구하게 되고 가족화목을 이루려면 그것은 천륜이요 인륜인 도덕적 윤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동양적 가족제도에 부정적 생각을 하였던 서구 사람들 중에는 권위와 위계질서 및 효제(孝悌)와 같은 동양적 윤리가치를 강조하는 동양문화에 대하여 '현대화의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혹평까지 한 사회학자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산업사회에서 정보문화사회로 접어들면서 보다 행복한 생활은 보다 인간다운 생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최근 들어 미국 대학가에서는 동양문화의 진수(眞髓)라 할 수 있는 윤리도덕의 유교 학 붐이 일어나고 있다 한다.
이른바 일류대학이라는 하버드, 컬럼비아, 보스턴 등 대학 학생들은 유교경전의 음양오행(陰陽五行)설과 성리학(性理學)을 비롯한 천륜과 인륜에 대한 인간 윤리 문화의 뿌리라 할 수있는 효 사상 등이 보다 인간답게 사는 행복의 첩경임을 깨닫고 이들 일류대학에서 유교 학 강의를 신청한 학생수가 94년도에 3백 명에서 95년도에는 5백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한다.
일부대학에서는 교수 부족으로 스탠포드 대학의 경우 유교학과정의 정원을 1백 20명으로 제한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보도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동방예의지국에 윤리도덕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우리나라가 산업사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황금의 노예가 되어 그들이 벗어버린 낡아빠진 서양문물에 매혹되면서 패륜적 퇴폐풍습에 성적 문란과 마약 등 가정파괴의 길로 정신을 못 차리는 오늘의 우리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은 효 사상과 그 뿌리를 찾아서 변혁해 가는 인류문화에 발맞추어 미래를 향한 새로운 윤리를 창출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본문가운데 한문(漢文)에 대해서는 자의(字義)와 주해(註解)로서 국문세대들에게 본문이해와 한자(漢字) 습득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며 '효사상과 그 뿌리'를 편저하는 데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終)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세상만사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생자필멸(生者必滅), 불교에서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는 네 가지 고통 즉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의 고통을 이르는 말을 생로병사(生老病死),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곤궁하여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구불망(生口不網),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안다는 뜻으로 생지生知하는 성인을 이르는 말을 생이지지(生而知之), 죽은 자를 살려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큰 은혜를 베풂을 이르는 말을 생사골육(生死骨肉), 사람이 태어난 뒤 사흘 동안과 죽은 뒤 이레 동안을 부정하다고 꺼리는 기간을 이르는 말을 생삼사칠(生三死七),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져 삶이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생불여사(生不如死), 기운이 꺾이지 않고 본디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생생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생동생동(生動生動),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 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생기사귀(生寄死歸), 산 채로 삼키고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남의 시문을 송두리째 인용함을 이르는 말을 생탄활박(生呑活剝), 나면서부터 알아 쉽게 행한다는 뜻으로 배우지 않아도 사물의 도리를 알아 쉽게 그것을 실행한다는 말을 생지안행(生知安行), 일속을 잘 알지 못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을 그릇 책망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생면대책(生面大責), 태어나서 만나 본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생면부지(生面不知),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뜻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살여탈(生殺與奪), 거듭나서 유전한다는 뜻으로 만물이 끊이지 않고 변해 감을 이르는 말을 생생유전(生生流轉) 등에 쓰인다.
▶️ 事(일 사)는 ❶상형문자로 亊(사), 叓(사)는 고자(古字)이다. 事(사)는 깃발을 단 깃대를 손으로 세우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역사의 기록을 일삼아 간다는 데서 일을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事자는 '일'이나 '직업', '사업'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이 등장했던 시기 使(부릴 사)자와 史(역사 사)자, 事(일 사)자, 吏(관리 리)자는 모두 같은 글자였다. 事자는 그중에서도 정부 관료인 '사관'을 뜻했다. 사관은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事자는 제를 지내고 점을 치는 주술 도구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졌다. 후에 글자가 분화되면서 事자는 '일'이나 '직업'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정의하기로는 史자는 '일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吏자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로, 事자는 '직책'으로 분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事(사)는 일이나 볼일 따위를 이르는 말(~를, ~을 다음에 쓰이어)이나 또는 일의 뜻을 나타냄의 뜻으로 ①일 ②직업(職業) ③재능(才能) ④공업(工業), 사업(事業) ⑤관직(官職), 벼슬 ⑥국가(國家) 대사(大事) ⑦경치(景致), 흥치(興致) ⑧변고(變故), 사고(事故) ⑨벌(옷을 세는 단위) ⑩섬기다 ⑪부리다, 일을 시키다 ⑫일삼다, 종사하다 ⑬글을 배우다 ⑭힘쓰다, 노력하다 ⑮다스리다 ⑯시집가다, 출가하다 ⑰꽂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사실(事實), 뜻밖에 일어난 사고를 사건(事件),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을 사태(事態)평시에 있지 아니하는 뜻밖의 사건을 사고(事故), 일의 형편이나 까닭을 사정(事情), 모든 일과 물건의 총칭을 사물(事物), 일의 전례나 일의 실례를 사례(事例), 일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운영되는 지속적인 활동이나 일을 사업(事業), 일의 항목 또는 사물을 나눈 조항을 사항(事項),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일의 안건을 사안(事案), 처음에는 시비 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 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로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사필귀정(事必歸正),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세속오계의 하나로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함을 이르는 말을 사친이효(事親以孝),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세속오계의 하나로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함을 이르는 말을 사군이충(事君以忠), 모든 일 또는 온갖 사건을 일컫는 말을 사사건건(事事件件), 사실에 근거가 없다는 뜻으로 근거가 없거나 사실과 전혀 다름을 일컫는 말을 사실무근(事實無根), 사태가 급하면 좋은 계책이 생김을 일컫는 말을 사급계생(事急計生), 일정한 주견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 사람을 붙좇아 섬기면서 의지하려는 사상을 일컫는 말을 사대사상(事大思想), 자주성이 없어 세력이 강대한 자에게 붙어서 자기의 존립을 유지하는 경향을 일컫는 말을 사대주의(事大主義), 옛 사람의 교훈을 본받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사불사고(事不事古),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하거나 하는 일마다 다 실패함을 일컫는 말을 사사무성(事事無成), 일의 되어 가는 형세가 본래 그러함을 일컫는 말을 사세고연(事勢固然), 사물의 이치나 일의 도리가 명백함을 일컫는 말을 사리명백(事理明白), 일을 함에는 신속함을 중요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사귀신속(事貴神速), 이미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이지차(事已至此), 여러 가지 사변이 자꾸 일어나 끝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사변무궁(事變無窮) 등에 쓰인다.
▶️ 愛(사랑 애)는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디 천천히 걸을쇠 발(夊; 천천히 걷다)部와 기운기엄(气; 구름 기운)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천천히걸을쇠발(夊)部를 뺀 글자 애(가슴이 가득차다, 남을 사랑하다, 소중히 하다, 아끼다)와 좋아하는 마음에 다가설까 말까(夊) 망설이는 마음의 뜻이 합(合)하여 사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愛자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愛자는 爫(손톱 조)자와 冖(덮을 멱)자, 心(마음 심)자, 夊(천천히 걸을 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 나온 愛자를 보면 단순히 旡(목맬 기)자와 心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슴 부위에 심장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금문에서는 사람의 가슴에 심장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그려져 '사랑하다'를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이 변하면서 소전에서는 마치 손으로 심장을 감싸 안은 것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愛(애)는 어떤 명사(名詞)의 밑에 붙어서, 위의 명사의 내용에 대하여 가지는 자애(慈愛), 사랑 등을 나타내는 어미(語尾)의 뜻으로 ①사랑, 자애(慈愛), 인정(人情) ②사랑하는 대상(對象) ③물욕(物慾), 탐욕(貪慾) ④사랑하다 ⑤사모(思慕)하다 ⑥가엾게 여기다 ⑦그리워하다 ⑧소중(所重)히 하다 ⑨친밀(親密)하게 대하다 ⑩역성들다(옳고 그름에는 관계없이 무조건 한쪽 편을 들어 주다) ⑪즐기다 ⑫아끼다, 아깝게 여기다 ⑬몽롱(朦朧)하다, 어렴풋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사랑 자(慈),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미울 증(憎), 미워할 오(惡)이다. 용례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국(愛國), 사랑하는 마음이나 남녀 사이에 서로 그리워하는 정을 애정(愛情),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애마(愛馬), 사랑하고 좋아함을 애호(愛好), 사랑과 미워함을 애증(愛憎), 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을 애옥(愛玉), 남을 사랑함 또는 열애의 상대자를 애인(愛人),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다루거나 보며 즐기는 것을 애완(愛玩), 아끼고 소중히 다루며 보호함을 애호(愛護), 본이름이 아닌 귀엽게 불리는 이름을 애칭(愛稱), 어떤 사물과 떨어질 수 없게 그것을 사랑하고 아낌을 애착(愛着), 사랑하고 사모함을 애모(愛慕), 좋아하는 사물에 대하여 일어나는 애착심을 애상(愛想), 사랑하는 마음을 애심(愛心), 사랑하고 좋아함을 애요(愛樂), 겨울철의 날이나 날씨 또는 시간을 아낌을 애일(愛日), 사랑하는 아들이나 아들을 사랑함을 애자(愛子), 귀여워 하는 새 또는 새를 귀여워 함을 애조(愛鳥), 사랑하는 아내 또는 아내를 사랑함을 애처(愛妻), 남의 딸의 높임말을 영애(令愛), 형제 사이의 정애 또는 벗 사이의 정분을 우애(友愛), 아쉬움을 무릅쓰고 나누어 줌을 할애(割愛), 모든 것을 널리 평등하게 사랑함을 박애(博愛), 남달리 귀엽게 여겨 사랑함을 총애(寵愛), 남녀 사이에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을 연애(戀愛), 널리 사랑함을 범애(汎愛), 아랫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사랑을 자애(慈愛), 이성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여 상대편도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일을 구애(求愛),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 또는 어진 사랑을 인애(仁愛), 자타나 친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세상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을 겸애(兼愛),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김을 이르는 말을 애지중지(愛之重之), 사랑이 지붕 위의 까마귀에까지 미친다는 뜻으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집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까지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애급옥오(愛及屋烏), 자기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함을 이르는 말을 애국애족(愛國愛族), 남을 자기 몸같이 사랑함을 애인여기(愛人如己),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자기 몸을 낮춤을 이르는 말을 애인하사(愛人下士),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함을 일컫는 말을 애친경장(愛親敬長), 사랑하고 아깝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애지석지(愛之惜之), 사람은 덕으로써 사랑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애인이덕(愛人以德),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을 이르는 말을 애주애인(愛主愛人), 선정을 베푼 인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당지애(甘棠之愛),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사랑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자식 사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지독지애(舐犢之愛), 사랑하는 사람의 집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까지도 사랑한다는 뜻으로 지극한 애정을 이르는 말을 옥오지애(屋烏之愛), 효자는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될 수 있는 한 오래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효자애일(孝子愛日),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은 제자를 사랑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존사애제(尊師愛弟), 얼음과 숯이 서로 사랑한다는 뜻으로 세상에 그 예가 도저히 있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빙탄상애(氷炭相愛) 등에 쓰인다.
▶️ 敬(공경 경)은 ❶회의문자로 등글월문(攵=攴; 일을 하다, 회초리로 치다)部와 苟(구)의 합자(合字)이다. 등글월문(攵)部는 급박하여 다가온다는 뜻이다. 혁은 엄격하게 격려한다는 뜻으로 말을 삼가는 뜻이 있는데 다시 등글월문(攵)部를 더하여 敬(경)은 한층 더 게을리하지 않음을 뜻으로 삼가다, 조심하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敬자는 '공경하다'나 '정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敬자는 苟(진실로 구)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苟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개를 그린 것으로 '진실로'나 '참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진실되다'라는 뜻을 가진 苟자에 攵자가 결합한 敬자는 '진실하도록 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敬자에 쓰인 攵자는 예의를 갖추도록 만든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강제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고대에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글자가 많다. 그래서 敬(경)은 성(姓)의 하나로 ①공경(恭敬) ②예(禮), 감사(感謝)하는 예(禮) ③공경(恭敬)하다 ④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마음을 절제(節制)하다 ⑤정중(鄭重)하다, 예의가 바르다 ⑥훈계(訓戒)하다, 잡도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공손할 공(恭), 공경할 흠(欽), 공경할 지(祗), 공경할 건(虔)이다. 용례로는 노인을 공경함을 경로(敬老), 공경하는 마음을 경의(敬意), 존경하고 사모함을 경모(敬慕), 남의 말을 공경하는 태도로 듣는 것을 경청(敬聽),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경례(敬禮), 존경하여 일컬음을 경칭(敬稱), 초월적이거나 위대한 대상 앞에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상태에 있음을 경건(敬虔), 공경하고 중하게 여김을 경중(敬重), 공경하고 사랑함을 경애(敬愛), 존경하여 높이어 부르는 말을 경어(敬語),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함을 경원(敬遠), 공경하여 삼가 답장한다는 경복(敬復), 존중히 여겨 공경함을 존경(尊敬), 삼가서 공손히 섬김을 공경(恭敬), 존경하는 마음이나 예의가 없음을 불경(不敬), 숭배하고 존경함을 숭경(崇敬), 공경하고 두려워함을 외경(畏敬), 더욱 공경함을 가경(加敬),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져 덕성을 닦음을 거경(居敬), 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함을 효경(孝敬), 씩씩하고 공경스러움을 장경(莊敬),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아니함 또는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함을 이르는 말을 경이원지(敬而遠之),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함을 이르는 말을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느님을 받들고 백성을 통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경천근민(敬天勤民),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함을 일컫는 말을 경신숭조(敬神崇祖), 노인을 공경하는 생각을 일컫는 말을 경로사상(敬老思想),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경외지심(敬畏之心)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