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사도행전(14) 아펜젤러 선교사(5)
조선 근대 교육의 큰 기둥을 세우다.
아펜젤러는 인천에서 38일을 머문 뒤 서울로 입경하여 서울 정동에 있는 집 한 채를 사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집은 한 달 먼저 와서 병원을 운영하던 스크랜턴 의사의 집이었다.
아펜젤러가 서울에서 처음 시작한 선교 활동은 교육 사업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의 방침은 외국인이 조선에서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은 할 수 있지만 조선인을 상대로 한 복음 전도는 금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자기 살림 집의 방 두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이 교실에서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 두 학생을 가르쳤다.
이때 주한 미국 공사관 무관이자 대리 공사(公使)를 맡고 있던 포크(George Faulk)가 아펜젤러에 관하여 아뢰었고 동시에 그가 영어 학교를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고종 황제는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학교를 세울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학교 사업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1886년 6월 8일 인재를 배양하는 학당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校名)과 액(額: 학교 간판)을 내려 주었다.
이 커다란 한자로 쓰인 학교 이름의 간판은 당대의 명필 정학교(丁學喬)가 썼고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 김윤식(金允植)이 어명을 받들어 전달했다.
당시 개교의 사정을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일종의 전초전(前哨戰) 모양으로 우리의 선교학교는 1886년 6월 8일에 시작되어 7월 2일까지 계속되었는데, 학생은 6명이었다. 오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에 일이 있다고 떠나 버리고, 또 하나는 6월은 외국어를 배우기에는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나버렸으며, 또 다른 학생은 가족에 상사(喪事)가 있다고 오지 않았다. 이들의 빈 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그 일부가 채워졌다. 10월 6일인 지금은 재학생이 20명이요, 실제 출석하고 있는 학생 수는 18명이다.“
배재학당은 1886년 10월 6일경에는 재적생 20명에 실제 출석하고 있는 학생 수 18명의 학교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배재학당은 그 후 날로 늘어 가는 학생을 수용하기 위하여 큰 교사(校舍)가 필요했다.
따라서 아펜젤러는 이 땅 위에 처음으로 양옥으로 된 학교 건물을 세워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 꿈은 1887년에 곧 이루어졌다. 가로 76피트, 세로 52피트인 이 단층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지어진 르네상스식 건물이며, 이 속에는 예배 장소가 하나, 교실이 넷, 도서관이 있으며 교장실 사무실 그리고 지하실로 되어 있다.
이 지하실에는 학생들의 기술 훈련을 위하여 공장이 들어 가도록 되어 있었다.(인쇄 공장과 목공실 등) 이 건물은 한국에서는 가장 먼저 지은 벽돌로 된 서양식 양옥이었으며 당시 서울의 명물의 하나이며 중요한 역사적인 건물이 되었다. (현재의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기독교 정신과 개화 사상에 근거하여 근대 교육을 시작하였다. 즉, 배재학당은 그 설립 목적을 유교적 구습에 사로 잡힌 조선인을 계몽하여 근대 문명의 지식을 얻게 하고 과학을 이해하도록 하여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일군이 되도록 하는 데에 두었다.
다시 말하면 배재학당의 교육 목적은 기독교인 양성과 근대국가의 인재를 배양하는 데에 두었다. 이러한 교육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배재학당에서는 성경과 영어를 비롯하여 인문·사회·자연과학 분야 교과목들을 가르쳤다.
구체적으로 한문· 영어· 천문· 지리· 생리· 수학· 수공· 성경 등이 교과목이었고 이들 과목 이외에 체육 시간에 서양식 운동인 야구· 축구· 정구· 농구도 가르쳤다. 또 특별활동 시간을 두어 학생들의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민주시민, 또는 지도자의 필수 소양인 연설과 토론 등 구두 언론)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