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벅 평전- 피터 콘 지음>을 읽기 시작했다. 로맹가리의 전기처럼 흡입력에 빨려 든다. 한 작가의 일생을 파헤친 책은 늘 나를 매혹한다. 작가로 살다간 사람들의 일생에 혹하는 것은 나도 평생 글을 쓰지 않고는 살아갈 의미를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다른 작가의 삶에서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이름난 작가도 못 되고 농촌에 묻혀 살지만 내 속의 열정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할 때가 많다.
중학생일 때 펄 벅의 <대지>를 읽고 나도 작가가 되고 싶었다.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한 학년마다 남녀 합친 우수반과 남학생, 여학생 반이 전부였다. 시골 중학교의 작은 철 캐비닛은 학년마다 하나씩 교실에 있었다. 학생 수가 적었던 작은 시골 중학교는 도서관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철 캐비닛에 든 책이 주로 명작이었다. 톨스토이의 작품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 미우라아야꼬의 작품들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땐가.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을 때다. 음악시간이었다. 모두 음악실에 가야 하는데 나는 그만 책에 빠져 종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텅 빈 교실에 나만 있는 줄도 몰랐다. 늙은 음악선생님이 옆에 와 서 있는 줄도 몰랐다. 누가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다. 나와 내가 읽는 소설책을 유심히 봤다. 카츄사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날 즈음이었다.
“네가 이 책을 이해하겠니?”
선생님이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발개졌다. 고개를 푹 숙였다. 선생님은 내 책상 위에 펼쳐진 두툼한 소설책을 거두어 한참을 뒤적거렸다.
“이 책 다 읽고 독후감을 써 오면 용서해 주겠다.”
선생님은 음악실로 향했다. 나도 음악책과 공책을 챙겨 선생님 뒤를 따라 음악실로 갔다. 남녀 학생들의 눈이 온통 내게 쏠렸다. 나는 음악시간을 좋아했다. 콩나물 대가리 그리는 것에는 통 자신이 없었지만 노래 부르는 것은 좋아했다. 친구들 사이에 나는 책벌레, 혹은 인생 상담사로 통했다. 오랫동안 나는 노래를 잘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사실 음치였다. 박자는 당연히 무시되었고 늘 한 박자 늦다.
하지만 우수 반이었다. 학구파도 아니고 노력 형도 아니었지만. 벼락치기 공부를 해도 사지 선다형 시험 문제는 잘 찍었던 모양이다. 내가 싫어하는 과목은 단연 과학이었다. 시커먼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곰보자국처럼 난 땅딸막한 과학 선생님은 늘 회초리를 들고 다녔다. 남자애들은 그 선생님께 걸렸다하면 매타작 당하기 일쑤였다. 말썽꾸러기가 젤 미워하는 선생이기도 했고, 공부 못하는 애들을 젤 경멸하는 선생이기도 했다. 수학은 수학선생님이 좋아서 열심히 했다. 영어는 수학보다 못했지만 시골 아이들이 워낙 영어를 못하니 우수 반에 들었지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었던 것은 당연히 국어와 역사였다. 특히 역사는 꿰뚫고 있었다. 화랑관창, 김유신 같은 인물 열전이나 수호지, 홍길동, 삼국유사, 춘추전국 시대 같은 책을 섭렵했었다. 특히 무협지와 만화 중에서도 전설을 다룬 것들을 좋아했다. 도술을 부리고 핑핑 날아다니는 주인공에 매료되었다. 기억력은 좋았다. 동시나 동화를 줄줄 외우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 반 외에도 각 학년이나 다른 반에 있는 캐비닛 속의 책들을 섭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캐비닛 속에 펄 벅의 <대지>와 <숨은 꽃>, 미우라아야꼬의 <빙점>,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등이 있었다. 갈증 난 사람이 물을 마시듯 나는 책을 섭렵했다. 책벌레란 별명은 학교시절 내내 따라다녔다.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고등학생인 언니가 읽던 야한 통속소설에도 매료되었다. 중학교 때 나는 이미 애늙은이였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윤심덕, 나혜석의 일대기도 그때 읽었지 싶다. 문학소녀 시절 나는 독일의 슈바빙 거리를 그리워했고, 사의 찬미를 부르며 동반자살을 했던 윤심덕과 자유연애를 했던 나혜석, 일엽스님을 동경했었다.
펄벅의 평전을 읽으며 그때를 기억한다.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어댔던 시절, 나도 펄벅처럼 외로움을 진하게 타는 여자아이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시인이 되고 싶었고, 막연하게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 시절, 애틋한 향수, 흘러가버린 젊은 시절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을 느끼며 펄벅의 일대기를 읽는다. 그녀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녀의 어머니 캐리처럼 일찍 요절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대지>나 <숨은 꽃>, <서태후>,<아들들>, <북경에서 온 편지>등 주옥같은 소설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헌정된 동양을 사랑한 작가라기보다 중국의 풍습과 전통과 자연을 사랑한 작가, 가난한 농민과 가난한 가족들의 삶을 사랑한 작가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플리처 상,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녀는 그 때 이미 나를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인지 모른다. 펄벅의 <대지>는 지금도 나를 사로잡는 작품이다. 그녀의 다른 작품에 온통 빠져들던 시절이 그 후에도 오래 계속 되었다.
펄벅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선교사 부모를 따라 석 달도 채 되기 전에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포함해 40년을 살았다. 아이들은 어른이 모르는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다. 펄벅은 외모는 서양인이었지만 내면은 중국인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중국이란 나라에 매료되어 있었고, 중국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완고한 근본주의자이자 여자를 종이나 부속품으로 여기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자 아이였기에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랐을 것이다.
언젠가 딸이 그랬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엄마는 뭐가 모자라서 자신을 죽이며 사는데? 이혼할 수 있으면 해, 할머니할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 없어. 며느리 노릇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속으로 화를 누르며 현실에 순종하는 나를 모질게 질책했지만 나는 나를 세울 수가 없었다. 현실속의 나를 싫어하면서도 박차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로운 여자였다. 지금은 그 괴로움조차 놓아버리고 살지만 한 때 나도 작가로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첫댓글 저도 비슷한 경험이...ㅎㅎ
수업시간에 선생님한테 집중하지 않고 책상 밑에서 삼국지를 읽다가 걸리고.
펄벅이 쓴 한국인 김산의 얘기도 참 흥미로웠던 기억이 나네요. ^^
이상하게 요즘 중국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되네요. ㅋ 루쉰의 평전을 읽으며 펄벅 작가의 글을 많이 떠올려요. 비슷한 격동기를 겪은 두 사람이기도 하지만 시각이 비슷한 점도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