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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21) - 내가 좋아하는 행정인, 소동파
어제(2009년 12월 8일) 점심을 광주에 사는 원로, 중진 행정학자들과 함께 하였다. 한국거버넌스학회의 총회를 앞두고 전임회장단을 초청하여 몇 가지 현안문제에 대한 간담을 하며 담소하는 모임에서 내가 쓴 책, ‘여행에서 배우는 삶과 문화’를 한 부 씩 나눠드렸고 호남대학교의 이정룡 교수가 고희(古稀, 70세를 일컬음) 기념문집 ‘애쓴 대로 거둔다.’를 전해주는 등 좋은 시간을 가졌다.
나는 50여 년간 행정을 배우고 경험하고 가르친 ‘행정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우리 행정의 수준이 아직도 서비스의 본질적 가치를 실현하는데 크게 미흡한 것을 행정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근래 행정학 전공의 교수 출신들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정부부처의 수장으로 있으면서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역부족임을 아쉽게 지켜보면서.
행정의 본질은 충실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행정기관마다 ‘행정서비스헌장’을 제정하고 그 올바른 실천에 역점을 두지만 고객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서비스의 본질은 군복무를 영어로 'Military Service'라 표현하듯 임무에 충실하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중국에서는 서비스를 복무(服務)라고 표현한다.) 나는 미국의 행정학자 핫지킨슨(Christopher. Hodgkinson)이 ‘행정이 잘 이루어지면 삶을 풍부하게 하고(enrich), 자유롭게 하고(liberate), 문명의 발전을(civilize) 가져오지만 잘못 이루어지면 파멸을 가져오고(destroy), 비인간화(dehumanize), 타락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한 말에 동의한다.
시민들은 행정이나 교육, 정치가 올바른 서비스를 하기 바라지만 우리도 한 때 잘못된 정치, 행정으로 인하여 타락하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적이 있고 지금의 북한이 잘못된 정치, 행정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북한과는 조그만 접점도 없을 프로골퍼 프래드 커플스가 “지구상에 가장 나쁜 사람을 고른다면?”이란 질문에 “왜, 거 북한 지도자 있잖아”라고 말할 정도이다.’ 2009. 12. 4 중앙일보 워싱톤 특파원의 글에서)
지난번에 처칠의 유머를 소개하며 더 나은 정치 풍토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였거니와 내가 좋아하는 동양의 목민관 소동파를 통하여 더 나은 행정서비스가 뿌리내리기를 기원한다.
3년 전에 중국의 산동성 연태지방을 여행하며 학생들에게 쓴 소동파에 대한 나의 생각을 소개한다.
‘소동파를 닮으라
봉래의 팔선과해 관광지는 산동성 봉래시 북쪽 황해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수천 년 전부터 여덟 신선(8명 중 한명은 여성이다)이 바다를 건넜다는 신비한 전설, 지금도 가끔 목격된다는 신기루의 기묘한 경관, 관광명승지로 지정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 진시황(秦始皇), 한무제(漢武帝), 당태종(唐太宗) 등 역대 중국의 유명 황제들이 들렀다는 신기한 이야기들이 얽혀 예부터 산동 반도의 이름 있는 관광지라고 한다.
관광지 입구의 정문에는 팔선과해구(八仙過海口)라고 쓴 소동파의 글씨가 크게 걸려 있다. 소동파(蘇東坡)는 송나라 시절의 유명한 문인으로 우리에게도 귀에 익은 이름인데 이곳에서 소동파의 필적을 보며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나는 행정학을 전공하였고 공무원 생활을 20년 넘게 하였으며 행정학을 가르치는 일도 20년이 넘어서 지금까지 45년여를 행정과 더불어 살아온 행정인(行政人)이라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행정인으로 소동파를 꼽는다.
중국의 항주에는 서호(西湖)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수가 있는데 이는 소동파가 항주 지역 목민관으로 있을 때 축조한 인공호수다. 800여 년 전에 그가 쌓은 제방은 소동파의 성을 따서 소제(蘇提)라고 부르는데 수백 년이 흘러도 끄떡없는 치수 사업을 펼쳤을 뿐 아니라 정사에도 선정을 베풀어 주민의 칭송을 받은 훌륭한 관리였다.
몇 년 전 항주에서 수 천리 떨어진 사천성(四川省)의 낙산대불이 있는 지역을 돌아보다가 소동파를 기리는 사당이 그곳에 세워진 곳을 보고는 동쪽의 항주에서 명성을 날린 소동파가 서쪽의 사천지역에서도 추앙을 받고 있음을 보며 그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금강산에 가면 송나라의 소동파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에 한 번 가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금강산 예찬론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곳 신선들이 노니는 곳의 정문 현판에 그의 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문명(文名)을 날린 시인이 행정과 정치에도 두각을 나타낸 사례를 지금의 정치·행정가들이 본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여름 영국에 머물면서 읽은 책, ‘중국문인의 비정상적인 죽음’에 비정상적인 죽음을 당한 문인들 가운데 소동파도 들어 있어서 그가 동시대의 정치인 왕안석의 질시로 큰 곤욕을 치른 것과 말년에 귀양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대하며 그의 삶에 영욕이 드리운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조선일보(2009. 12. 2)에 실린 ‘소동파와 동파육’("동파육은 중국의 대표적인 돼지 요리 중 하나다. 푹 삶아서 입에 넣으면 바로 녹을 정도로 부드럽지만 껍질은 쫄깃쫄깃한 맛을 느끼도록 해야 잘 만든 동파육이다. 중국의 항주에서 특선 요리로 동파육을 몇 차례 맛본 적이 있다.)이라는 글을 통하여 음식문화에도 치적이 있는 그의 삶의 또 다른 면을 살펴보자.
‘소동파와 동파육
송나라 제1의 시인으로 꼽히며 당송 8대가에 이름을 올린 소동파(蘇東坡 본명 蘇軾·1036~1101)는 음식 세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가상 인터뷰를 통해 음식에 관한 생각과 동파육의 유례를 추적해봤다.
―공께서는 20대 초에 지금으로 말하면 고시에 패스했고, 공의 문장은 대를 이어 전해집니다. 하나 36세 이후 자의, 타의로 귀양살이를 자주 하는 등 삶은 불행했습니다. 왜인가요.
"내 나이 마흔일곱에 넷째 아들 둔(遯)을 얻고, 이런 시를 지었소. 〈남들은 자식이 총명하길 바라지만 이 몸은 총명으로 일생을 망쳤으니 오로지 아이가 어리석고 미련하여, 무난하게 고관대작에 오르기만을 바란다.〉(洗兒戱作) 내 나이 34세에 조정에 들어가니 실용과 법치를 내세운 왕안석(王安石·1021~1086)이 신법(新法)을 채택해 갈등을 일으키고 있더이다. 예(禮)로써 다스리는 것이 낫다고 믿는 나는 그와 갈등하고 유배당했지. 나 죽던 해 쓴 시는 이렇소. 〈…너의 평생 공적이 무엇이더냐. 황주 혜주 그리고 담주뿐이네〉(自題金山畵像). 유배지의 기억만 남은 인생이었지."
―호북(湖北)성 황주에 머물 때 지은 '적벽부'가 그렇듯 공은 역사를 얘기하는듯 하지만 실상 자연에 더 감복합니다. 공의 시는 현실 참여적이며, 때론 무위사상에 닿은 것도 많습니다. 공은 실패한 참여주의자인가요, 성공한 허무주의자인가요.
"왕안석에 맞서 '독서가 만권에 다해도 율은 읽지 않는다.'고 말해 1079년 어사대의 감옥에 갇혀 무서운 심문을 받은 바 있소. 그때 수발을 들던 아들 소매(蘇邁)와 암호를 정했지. 바깥이 평온하면 야채와 고기 요리를, 죽을죄로 판정받으면 물고기 요리를 들여보내기로. 한데 어느 날 물고기가 들어옵디다. 난 절명시를 쓴 뒤 죽음을 기다렸소.
후일 보니 아들 대신 친척이 실수를 한 것이오. 난 옥에서 136일을 보내고 나와 이렇게 말했지. '세상의 일은 한바탕 큰 꿈이니 인생은 얼마나 처량하던가.' 나를 웃게 만든 건 고난이었소. 시련이 만든 낙천주의자라고 봐주오."
―대표작 '적벽부'를 읽은 사람은 거의 없고 대신 '동파육'이 더 유명합니다. 시인이 요리로 기억되다니….
"요동(遼東)의 농부 같은 소리요. 흰 돼지가 신기해 왕에 바치려던 농부가 북경에 도착해보니 집집마다 흰 돼지를 키우더라오. 그래서 식견이 얕은 자를 '흰 돼지(白猪)'라 부르는데, 그대가 꼭 그렇구려. 시건 요리건 행복하게 하면 그만인 것이오."
―이성을 잃고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맹목'이란 말 역시 돼지에 얽힌 일화가 있다면서요.
"기산(箕山)에 살 때요. 하양의 돼지고기가 맛좋다는 소문에 몇 마리 가져오게 했는데, 그만 하인이 잃고 말았소. 그는 다른 돼지로 요리를 했지만 모르는 이들은 그 이름에 눈멀어 칭찬을 했지. 그러나 곧 아닌 게 밝혀져 다들 부끄러워했다오. 거기서 유래된 말이 '맹목'이지."
―한국에서 '밥'이 곧 '쌀'이듯 중국에선 '고기'는 '돼지고기'라면서요. 그래서 돼지고기는 '육(肉)'으로 쓰고, 쇠고기(牛肉)·양고기(羊肉)는 따로 쓸 정도로요. B.C 6000년 중국은 돼지를 가축으로 키우기 시작했고, 중국의 1인당 돼지 소비량은 무려 37.5㎏(2006 식육편람), 쇠고기는 5.4㎏에 불과하네요. 돼지와 소를 17.4㎏-19.6㎏(한국), 6.6㎏-19.2㎏(일본)씩 먹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니 차이가 더 확연합니다.
"오죽하면 돼지고기와 곡식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 즉 '저량안천하(猪糧安天下)'라는 말까지 나왔겠소."
―그럼 '동파육'이 나왔을 때도 돼지고기가 인기였던가요.
"꼭 그렇진 않았지. 내가 황주(黃州)에 머물 때 쓴 '저육송(猪肉頌)'을 들어보오. 〈솥을 깨끗이 씻어 물을 조금 넣는다. 땔나무는 연기와 불꽃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저절로 익기를 기다려야지 재촉하지 말아야 하니, 충분히 익으면 자연히 맛이 난다. 황주에서는 질 좋은 돼지고기의 가격이 싸다. 부귀한 이들은 먹으려 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은 먹는 방법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두 그릇 먹어 배가 불러 만족하니 그대는 간섭하지 말라〉"
―그런데 '동파육'은 앞서 유배를 갔던 황주(1080~84년) 요리가 아니라 후일 관리로 부임(1089년)한 저장성 항주(杭州)의 명물 아닙니까. 동파육 유래도 헷갈립니다. ①공께서 음식점에서 술과 돼지고기를 가져오라 한 것을 실수로 술에 고기를 넣고 삶았다는 '주방장 실수설' ②돼지와 술을 넣고 요리하다 깜빡 잊고 있다 보니 훌륭한 요리가 됐다는 '전화위복설' ③원래 공이 황주에서 발명한 것을 항주에서 퍼뜨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가장 많은 설은 ④'서호(西湖)준설 답례품설'이네요. 공이 서호를 준설한 덕에 풍년이 들자 마을 사람들이 답례로 돼지고기를 가져 왔다지요. 이것도 공이 직접 동파육을 만들어 수고한 이들과 나눴다는 설과 '술과 고기를 돌리라'는 말이 와전돼 술에 돼지를 넣어 삶았다는 설 등 정말 '설'이 많습니다.
"허허. 내 이제 무엇이 진실이다 말한들 무슨 의미리오. 허나 이것만은 알아두오. 난 순무, 부추, 고사리, 여지(리치)도 시로 읊었소. 다 읊자면 밤새겠네. 그러나 맛난 것도 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소. 〈…나나 하증(何曾·진나라의 호식가)이나 배부르긴 한가진데/ 뭣 때문에 아등바등 고기를 찾는지 모르겠네〉(나물) 이게 바로 내 뜻이오.
―무슨 뜻인지. 좀 더 딱 부러지게 말씀해주세요. 마음속에 새기고 두고두고 생각해 보게요.
"선이란 돼지고기처럼 소박하고 이해하기 쉬워서 생활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오. '(먹을 수도 없는)용 고기만을 말하면 배가 고플 뿐이지만 돼지고기는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배부르고 만족할 수도 있다'는 내 말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오? 1101년 7월 28일 나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 내 곁을 지키던 유림의 장로가 말했지. '서방 세계의 왕생만을 생각하시게' '부질없는 생각만으로는 쓸모가 없소이다' '그래도 생각을 해야 하네.' 내가 말했지. '억지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야.' 그게 마지막이었네. '빈민굴의 계관시인'이라 불리는 미국 작가 찰스 부코우스키(1920~94)의 묘비명이 생각나지 않나? '애쓰지 말아라(Don't Try)'"
추신, 영국에서 읽은 책 ‘중국문인의 비정상적인 죽음’ 가운데 ‘10년 전에 죽었으면 완벽했을 사람’이라는 사례가 흥미롭다. 그 중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10년 전에 죽었으면 완벽했을 사람
아무개가 애도문에 적었다는 ’10년 전에 죽었으면 완벽할 사람‘이라는 말은 요즘 나이깨나 든 사람들에게도 꽤 유용한 충고다. 그리고 이 말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나폴레옹에게 가장 잘 들어맞는다. 1812년, 죽기 9년 전 잦은 전쟁으로 많은 군사를 잃었던 나폴레옹은 다시 러시아로 대규모 진격을 감행했고, 패배를 몰랐던 이 사나이는 이때부터 패전의 길로 빠져들었다. 나폴레옹이 혹시 죽기 10년 전,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사방에서 전쟁을 일으키며 갈등을 걱화시켜 위기에 빠진 상태에서 러시아를 침공하지 않았더라면, 완벽한 성인으로 남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성공의 절정기에 이른 이미지로 역사책에 기록됐을 것이며, 후에 그렇게 황량한 섬으로 쫓겨나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중국역사에서 대단한 위세를 자랑했던 왕후장상 중에도 나폴레옹 같은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마오 주석이 생전에 가장 즐겨 읽었다는 ’인군수고‘편에는 송나라 이전에 장수했던 다섯 명의 제왕이 열거되어 있다. 그 주인공은 69세까지 살았던 한 무제, 70세까지 살았던 오나라의 손권, 85세까지 살았던 양 무제, 69세까지 살았던 당 고조, 77세까지 살았던 당 현종으로 모두 죽기 10년 전부터 자기 이미지를 철저하게 망가뜨린 사람들이다.
죽기 10년 전은 한 개인이 나쁘게 혹은 좋게 변할 수 있는 한계선인 것 같다. 정치가든 문학가든, 큰 인물이든 보통 사람이든 이 규칙은 모두에게 적용된다. 나처럼 나이 든 사람들은 특히 귀담아 들어야 할 일이 아닌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우주의 섭리이므로, 늙는 것은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다. 다만 늙어서 노망나지 않고 추태부리지 않으며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고 경박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 늙었다고 거만하게 굴지 말아야 하며 관록에 연연해하지 않고 시시콜콜 잔소리 하지 말아야 한다. 늙어서 젊은이들과 대립하지 않고 남들 앞에 나서기를 삼가야 하며 자기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혹은 자기에게 이득도 없으면서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남들이 뒤에서 욕하는 일도 만들지 말아야 하니, 이 모든 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바로 나에게 딱 들어맞는 말들이 아닌가? 여행에서 이런 것을 음미할 수 있음이 축복이로다.
▲ 원나라 화가 조맹부(1254~1322)가 그린 소동파의 모습.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원 소장
첫댓글 옳은 말씀입니다. 행정서비스란 말이 어찌그리 귀에 딱 걸리는지 행정인도 많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요.소동파선생()같은 분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배울점이 많군요.유머도있으시고,센스만점. 요즘도 공무원들에게 해야되는 일도있는데...
역시 훌륭하신 김교수님이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보람 있게 잘 사는 것인지? 누구나 갖는 숙제인데 국민을 위하고 국법을 지키며 공의로운 현관이 궁색하지 않다면 비록 어리석고 미련하여 제앞가림 못하는 민초라하더라도 저절로 바르고 자유롭게 잘 살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계속해서 좋은 글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어르신"으로 불리다 보니 마땅한 교훈을 가슴 깊이색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