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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항 | 박인환 | 김수영 |
출생일 출생지 학력
등단 상황
동인 활동
시작품 수
사망일
| 1926. 8. 15 강원도 인제군. 서울서 성장 경기중학교 중퇴. 명신중학교 졸업. 평양의학전문학교 중퇴.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 발표 『신시론』(1948년),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년) 81편(1956년 타계까지 71편)
1956년 3월 20일(31세)
| 1921. 11. 27 서울시 종로구 선린상업학교 졸업. 동경 성북고등예비학교 중퇴. 연희전문학교 중퇴.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 발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년)
276편(1956년 박인환 타계까지 50편) 1968년 6월 16일(4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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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면모를 보면 박인환이 김수영에 비해 시를 쓸 줄 모른다는 식으로 폄하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박인환은 1956년 31세로 요절할 때까지 총 71편의 시를 발표했는데 비해 김수영은 50편을 발표했다. 박인환이 보다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발표한 매체 상황을 비교해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텐데 『김수영전집』에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아쉽다. 박인환은 김수영에 비해 다섯 살이나 적은 나이인 데다가 한 해 늦게 문단에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작품을 썼다. 낡지 않은 시어로써 작품을 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다못해 한국 사회에서 암적인 폭력으로 존재하는 학력에 있어서도 열등하지 않다.
이렇듯 박인환은 김수영에 비해 처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폄하되고 있는 것은 김수영의 편견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박인환의 작품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박인환과 김수영은 조건 없이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김수영은 박인환보다 17년이나 더 생존했고, 더욱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4․19혁명을 겪은 뒤 작품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박인환과 절대적인 조건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물론 박인환이 타계하기까지 발표한 작품을 놓고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박인환은 동시대의 그 어떤 시인보다도 열정적으로 시를 썼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시를 쓸 줄 알았던 것이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박인환의 시세계는 모더니즘으로 규정되고 있다. 정답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 평가는 박인환이 실제 모더니즘 운동을 했고, 또 그것을 토대로 작품을 쓴 것이 사실이므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박인환의 시세계를 모더니즘으로 국한시킨 것은 그의 시 본령을 제한 내지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실 참여 인식이 없는 명동의 댄디보이쯤 되는 시인으로, 전통을 내세우는 순수문학의 입장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존재가 못 되는 시인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김수영을 모더니즘 시인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리얼리즘 시인으로도 조명함으로써, 다시 말해 시세계의 범주를 넓힘으로써, 뛰어난 시를 쓴 시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점과 대조적이다.
박인환의 시세계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해방 공간기에는 진정한 민족 해방과 민족 국가 건설에 관심을 가졌다면,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허무감을 노래했다. 박인환은 1946년 등단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시 12편, 한국전쟁 동안 시 7편, 한국전쟁 이후 시 54편 등을 발표했다. 한국전쟁 이후에 발표한 작품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박인환의 지배적인 시세계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박인환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보인 활동은 ① 1948년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함께 『신시론』 발간, ②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③ 1949년 김경린, 이한직, 조향, 김차영, 이상로, 김규동, 이봉래 등과 함께 ‘후반기(後半紀)’ 동인 결성 등이다. 박인환이 모더니즘 운동을 열성적으로 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박인환의 사후 26주기를 맞이하여 함께 활동했던 시인들이 엮은 추모 문집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김형, 우리 멋있는 현대시 운동을 하여 봅시다. 다시 말해서 모더니즘운동 말입니다.”
급기야는 이러한 제안도 서슴없이 토운(tone)을 높여 가며 재촉하다시피 하는 인환이었다.
그는 다른 선배 모더니스트들, 이를테면 김기림, 이상, 김광균 등처럼 단순한 개인 활동 아닌 에콜 운동의 기수로서 장차 우리 시사에 특징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는 노력가였다. (중략) 새로운 낱말, 어떤 이미지의 새로운 효과에 매우 민감했고, 그런 것들을 포착하면 꼭 작품에 옮기려고 했다. 이런 뜻에서 누구보다도 실험적인 시인이었고
오든과 스펜더를 마치 종주(宗主)처럼 늘 들먹거리던 시인 인환, 그리고 해방 후 젊은 시인들 속에서는 가장 우두머리에 나선 시인 인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를 눈부시게 장식한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은 기성 질서에 대한 대담한 반역과 기성 창조에의 끊임없는 도전을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이룩한 가장 용감하고, 유능한 시인의 한 사람이란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환의 집 방에서 동인회의 명칭이 거론되었는데, 인환이 ‘후반기’가 어떠냐고 내놓았는데, ‘20세기 후반’이라는 뜻이었다. 모두 찬성했으며, 편집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하기로 결정을 본 다음, 창간호 편집은 인환이 맡기로 했다.
위와 같은 진술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박인환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해 나갔음을, 모더니즘 운동을 통해 해방공간의 신세대 시인들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박인환은 음풍농월을 앞세우고 시단의 주류라고 자처하는 인습적인 서정주의 문학과 감상성에 젖어 있는 문학을 현대적인 미학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박인환의 모더니즘 운동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해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그와 같은 면은 “인환만은 완강히 해체론에 반대하고 나섰다. 다방에서 나오면서 “나 혼자서라도 해나가겠다.”고 ‘후반기’ 사수론으로 버티자, 온달다방 처마 밑 한길 가에서 봉래가 인환의 멱살을 잡는 소동까지 일어났었다. 모두 뜯어 말려서 간신히 봉래의 다혈질을 가라앉히긴 했으나,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그 시각 이후 ‘후반기’는 없어져버린 것이다.”라는 증언에서 확인된다.
그렇다고 박인환이 창작하는 자세에서 모더니즘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박인환의 시작품을 두고 모더니즘 작품이냐 아니냐의 논란은 모더니즘의 기원을 혹은 모더니즘의 본래적 특성을 이해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박인환의 모더니즘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등의 아방가르드적 유파에서 보인 서구의 모더니즘이 기존의 사회 체제나 종교나 윤리 등에 회의를 품고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과 배경은 다르지만 근본적인 세계인식은 상통하기 때문이다. 박인환의 모더니즘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회의와 현대 문명에 대한 불안을 바탕으로 한 전통의 단절, 주관적 경험, 문학의 독자성 등을 추구한 서구 모더니즘의 정신을 계승하여 종래의 주정적 감상주의 문학 또는 전통의 답습에 빠진 순수문학을 주지적인 인식으로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문학 형식이나 관습을 극복하려고 나선 박인환의 모더니즘 인식은 서구의 모더니즘 정신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므로 박인환의 모더니즘이 서구의 모더니즘에 비해 철학적 깊이가 얕다거나 문학적 성취가 작다고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박인환의 모더니즘은 서구와는 다른 시대와 사회를 반영했을 뿐이다. 그 상황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1) 「인천항」(신조선, 1947. 4)
2) 「남풍」(신천지, 1947. 7)
3) 「사랑의 Parabola」(새한민보, 1947. 10)
4)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세계일보, 1948. 1. 1)
5)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신천지, 1948. 5)
6) 「지하실」(민성, 1948. 3)
7) 「고리키의 달밤」(신시론, 1948. 4)
8) 「언덕」(자유신문, 1948. 11. 25)
9) 「전원시초」(부인, 1948. 12. 15)
10) 「열차」(개벽, 1949. 3)
11) 「정신의 행방을 찾아」(민성, 1949. 3)
12) 「1950년의 만가」(경향신문, 1950. 5. 16)
위에서 보듯이 박인환은 한국전쟁 이전에 총 12편의 시를 발표했다. 작품들 중에서 「인천항」, 「남풍」,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고리키의 달밤」, 「정신의 행방을 찾아」는 지극히 현실 참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천항」은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간다”라는 결구에서 보듯이 또다시 식민지가 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한 조국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남풍」은 “아세아 모든 위도/잠든 사람이여/귀를 기울여라”라는 결구에서 보듯이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등 위축되어 있는 아시아의 민중들을 일깨우고 있다.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는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식민지 국가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다. 「고리키의 달밤」은 표현이 다소 낯설지만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추구한 레닌의 사상을 노래하고 있다. 「정신의 행방을 찾아」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우리 조상들의 근대정신이 발흥된 곳으로 보고 평화의 회복을 기원하고 있다.
이밖에 「사랑의 Parabola」,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 「언덕」, 「전원시초」,「1950년의 만가」 등은 서정시이다. 「사랑의 Parabola」는 사랑의 포물선을 그린 한 편의 서정시이다. 「나의 생애에 흐르는 시간들」은 “가난을 등지고 노래도 잃은/안개 속으로 들어간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는데, 서정성이 주조를 이룬다. 「언덕」은 어린 날 연을 날리던 일을 회상하고 있는 동시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할 수 있다. 「전원시초」는 개인 시집인 『선시집』에서 「전원」으로 제목을 바꾼 작품인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한 편의 서정시이다. 「1950년의 만가」는 “아름다운 연대를 회상하면서/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간다”고 노래한 모습에서 보듯이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고 있다.
한편 「지하실」과 「열차」는 모더니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지하실」은 “황갈색 계단을 내려와/모인 사람은/도시의 지평에서 싸우고 있다”에서 보듯이 새로운 세계인식과 표현력을 보여준다. 「열차」는 1930년대에 활동한 영국의 시인으로 새로운 시를 이끈 스팬더(Stephen Spender)에 영향 받은 작품으로 보이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는 열차의 모습을 낯설게 표현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박인환이 한국전쟁 이전에 발표한 12편의 작품 중에서 모더니즘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는 작품은 「지하실」,「열차」 정도이고 나머지는 지극히 서정적이거나 현실 참여적이다. 특히 열정적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한 산물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남풍」, 「인천항」,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등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수록한 점은 주목된다.
박인환은 왜 이와 같은 시를 쓴 것일까? 『신시론』을 연구한 엄동섭의 견해에 따르면, 김경린이 현대 문명에 경도되어 언어의 구상성을 지향한 반면 김경희, 김병욱, 박인환, 임호권 등은 민족이 당면한 현실을 중시하여 언어의 현실성을 추구하려는 면이 강했다. 따라서 동인들 사이에서 사상이 불일치해 김경린과 김병욱은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김병욱은 김경희와 함께 탈퇴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박인환이 왜 동반 탈퇴를 하지 않았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뚜렷한 대안을 현실적으로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박인환은 그 나름대로 모더니즘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질서에 대한 비판성을 추구한 1920~30년대 서구 모더니즘의 세계관을 자신의 모더니즘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더니즘은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성을 상실한 20세기 후반의 것이지만, 본래의 모더니즘은 비판정신이 강한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모더니즘 성격을 1940년대 후반에 활동한 박인환의 작품 세계에 적용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 박인환이 한국전쟁 이전에 추구한 시세계는 모더니즘 인식으로써 민족 해방을 지향한 것이었다.
박인환의 모더니즘 인식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도 지속되어 적극적으로 현실을 담아내었다. 해방기에는 진정한 민족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면,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쟁이 가져온 폭력성을 고발한 것이다. 박인환은 『선시집』 후기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라고 토로하고 있듯이 한국전쟁에 큰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에 발표한 그의 작품들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들의 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검은 신(神)이여」 부분
이뿐만 아니라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세상엔 없다.”(「고향에 가서」)라거나, “고지 탈환전/제트기 박격포 수류탄/‘어머니’ 마지막 그가 부를 때/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한 줄기 눈물도 없이」), “새벽에 돌아가는 길 나는 내 친우가/전사한 통지를 받았다.”(「무도회」), “한국에서 전사한 중위의 어머니는/이제 처음 보는 한국 사람이라고 내 손을 잡고/시애틀 시가를 구경시킨다.”(「어느 날」),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고 하나/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행복할 것인가.”(「어린 딸에게」), “전쟁 때문에 나의 재산과 친우가 떠났다./인간의 이지를 위한 서적 그것은 잿더미가 되고/지난날의 영광도 날아가 버렸다.”(「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등 박인환은 한국전쟁의 상처를 여실하게 그렸다.
전쟁은 허위의 명분을 가지고 그만한 폭력을 수반한다.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일체의 힘 중에서 전쟁은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광범위한 폭력인 것이다. 박인환은 한국전쟁이 가져온 그 폭력성을 상실감과 허무함을 노래하면서 고발했다. 함께 삶을 영위하던 일가친척이며 친구며 이웃이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상황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직시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기존의 시 형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모든 이성과 논리가 살상 무기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오직 삶과 죽음의 기로만이 놓여 있는 상황이었다. 박인환은 역사가 국민을 유기한 그 폐허의 시대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흘리지 않고 모더니즘 인식으로 휴머니즘을 추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목마를 탈 수밖에 없는 숙녀를 이야기하며 한 잔의 술을 마시는 시인의 모습은 경박하거나 센티멘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의 아픔에 함몰되지 않고 최대한으로 상황을 직시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의 결과 사람들의 삶의 조건은 허물어져 상실감이며 비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시인은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자신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므로 다소 감상적인 작품의 분위기보다는 그와 같은 상황을 가져온 시대의 아픔이며 시인의 몸부림을 읽어야 한다. 결국 시인의 시세계를 현실 인식이 없는 모더니즘이라고 폄하할 것이 아니라 그의 아픔과 의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인의 시작품이 대중들과 큰 공감대를 이룬 면을 인정하고 그 연대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박인환을 모더니즘 시인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리얼리즘만을 추구했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다. “박인환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서정 시인임에 틀림없다. (중략) 회복할 수 없이 된 파멸과 절망을 그는 무엇보다 서러워하는― 착하게, 아름답게 남들과 나란히 살고 싶은 인간이었다.” 박인환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으로 분리하거나 가둘 수 없는 그 이상의 시세계를 성취했다. 동시대의 시인들 중에서 가장 열성적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중들의 상실감과 비애감을 담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맹문재, 『만인보의 시학』, 푸른사상, 2011)
대표 시 읽기
남풍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일찍이 의복을 빼앗긴 토민(土民)
태양 없는 마레―
너의 사랑이 백인의 고무원(園)에서
소형(素馨)처럼 곱게 시들어졌다
민족의 운명이
크메르 신의 영광과 함께 사는
앙코르 와트의 나라
월남 인민군
멀리 이 땅에도 들려오는
너희들의 항쟁의 총소리
가슴 부서질 듯 남풍이 분다
계절이 바뀌면 태풍은 온다
아세아 모든 위도(緯度)
잠든 사람이여
귀를 기울여라
눈을 뜨면
남방(南方)의 향기가
가난한 가슴팍으로 스며든다
검은 신(神)이여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된 것은 무엇입니까.
1년이 끝나고 그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어간 나의 친우는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풍설로 뒤덮어 주시오.
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
꽃이 피지 않도록.
하루의 1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
검은 신이여
그것은 당신의 주제일 것입니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검은 강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종의 노정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과 사의 경지에 떠난다.
달은 정막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열차
궤도 위에 철(鐵)의 풍경을 질주하면서
그는 야생(野生)한 신시대의 행복을 전개한다—스티븐 스펜더
폭풍이 머문 정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空閨)한 나의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田園)에 흘러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傾斜)를 지난다
청춘의 북받침을
나의 시야에 던진 채
미래에의 외접선(外接線)을 눈부시게 그으며
배경은 핑크빛 향기로운 대화
깨진 유리창 밖 황폐한 도시의 잡음을 차고
율동하는 풍경으로
활주하는 열차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피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다음 헐벗은 수목(樹木)의 집단 바람의 호흡을 안고
눈이 타오르는 처음의 녹지대
거기엔 우리들의 황홀한 영원의 거리가 있고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
혜성보다도
아름다운 새날보담도 밝게
5. 해설자 소개
맹문재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 『기룬 어린 양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 『지식인 시의 대상애』 『현대시의 성숙과 지향』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편저로 『박인환 전집』 『김명순 전집』 『김남주 산문 전집』 『박인환 깊이 읽기』 『김규동 깊이 읽기』 『이기형 대표시 선집』(임헌영 공편) 『즐거운 광장』(백무산 공편)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전국 노동자문학회 매체인 『삶글』을 비롯해 『시작』 『부천작가』 『삶과 문학』 『푸른사상』 등의 창간 및 주간을 맡았다.
전태일문학상, 윤상원문학상, 고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