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목은 국가와 민족마다 다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우주목이 이 지구상에 한 종류라면 우주목이 아니다. 지구상에 각 나라와 각 민족마다 각기 다른 우주목이 있어야 하는 것은 지역마다 사는 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민족은 자작나무를, 어떤 부족은 구주물푸레나무를 우주목으로 삼았다. 젓나무도 우주목 중 하나였다.
인간이 숭배한 나무, 우주목
모든 생명체는 신성하다. 그래서 숲도 신성하다. 특히 인간은 숲을 신성한 존재로 생각했다. 인간이 숲을 신성한 존재로 생각한 것은 숲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숲은 기계 동력이 나오기까지 인간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기계 동력이 나오기 전까지 인간의 나무에 대한 숭배는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모든 나무가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다. 인간들은 특정 나무를 숭배했다. 인간이 모든 나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은 각각의 나무에 숭배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숭배의 효능을 높이기 위해 특정 나무를 선택했을 뿐이다.
사람들이 선택한 나무에는 선택한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래서 선택한 나무는 역사적이다. 그들은 한 나무를 선택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의지했다. 그러니 나무를 선택한다는 것은 한 개인은 물론 부족과 민족의 모든 것을 거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러한 나무를 우주목 혹은 세계수(世界樹, world tree 혹은 cosmic tree)라 부른다. 이 용어만으로도 한 그루의 나무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수 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한 존재를 '우주'니 '세계'니라는 말로 숭배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주목은 국가와 민족마다 다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우주목이 이 지구상에 한 종류라면 우주목이 아니다. 지구상 존재하는 각 나라와 각 민족마다 각기 다른 우주목이 있어야 하는 것은 지역마다 사는 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민족은 자작나무를, 어떤 부족은 구주물푸레나무를 우주목으로 삼았다. 젓나무도 우주목 중 하나였다.
우주목으로 태어난 젓나무
사람들이 우주목으로 간택하는 나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젓나무의 생태를 알면 인간이 왜 이 나무를 우주목으로 선택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젓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한다. 그래서 젓나무도 부모를 닮아서 늘푸른 키큰 나무이다. 소나무는 아주 추운 지역에서도 살아가는 강인한 존재이다. 젓나무도 소나무를 닮아 추운 곳에서 잘 자란다. 부모를 닮은 젓나무는 늘푸르고 키큰 것 외에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한 나무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보는 것 이상 좋은 것이 없다. 혹 직접 보지 못했거나 관찰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특징을 살펴보자. 그런데 나무의 특징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우선 젓나무의 학명을 붙인 사람은 어떻게 보았는지를 살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젓나무의 학명은 Abies holophylla Maximowicz다. 학명 중 속명에 해당하는 아비에스(Abies)는 젓나무를 의미하는 라틴어로 이는 젓나무의 특성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정보가 아니다. 학명 중 종속명에 해당하는 홀로필라(holophylla)가 이 나무의 특성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정보다. 홀로필라는 '갈라지지 않는 잎'을 말한다. 잎이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잎이 갈라진 소나무와 다르다는 뜻이다. 소나무는 한 잎이 두 갈래지만 젓나무는 하나씩 달린다. 그래서 젓나무의 잎이 겉에서 보면 부모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부모와 다른 모습을 띤다.
한 그루의 나무를 이해하는데 이름을 붙인 작명가를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젓나무의 학명을 붙인 사람은 막시모비츠(Maximowicz, 1827~1891)다.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식물학자다. 그는 젓나무의 잎을 강조했다. 부모인 소나무의 학명을 붙인 사람은 꽃을 강조했지만, 젓나무의 학명을 붙인 사람은 잎을 강조했다. 왜 작명가가 젓나무의 잎을 강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나무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붙인 이름은 잎보다 다른 곳을 강조했다. 혹 어떤 사람은 젓나무 이름이 낯설지도 모른다. 때론 젓나무와 전나무를 다른 나무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두 이름은 같은 나무를 조금 달리 부른 것이다. 나이든 분들은 젓나무보다 전나무에 익숙하다. 여전히 어떤 식물도감에는 전나무로 표기하고 있다. 전나무를 젓나무로 고쳐 부르고 있는 것은 이 나무에서 우윳빛의 액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나무로 부른 것은 아마 『훈몽자회(訓蒙字會)』나 『물명고(物名攷)』 등에서 보듯이 젓이 전으로 바뀐 데서 유래할지도 모른다.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따르면 젓나무의 한자이름은 ‘젓나모 회(檜)’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는 젓나무를 흔히 삼(杉)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중국에서도 젓나무를 송삼(松杉) 혹은 냉삼(冷杉)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원산의 삼나무는 따뜻한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젓나무가 지금의 삼나무일 수 없다.
젓나무의 또 다른 한자는 종()이다. 이 한자는 곧게 자라는 젓나무의 모습을 본뜬 글자이다. 중국의 허신(許愼, 30~124)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젓나무가 잎은 소나무, 몸은 측백나무를 닮은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시경(詩經)』대아(大雅) 영대(靈臺)에도 젓나무를 언급하고 있다.『훈몽자회』에서 젓나무를 회로 풀이한 것은 이 나무가 측백나무와 닮아 오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회는 『삼재도회』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측백나무를 의미하는 백(栢)과 연칭하여 백회(栢檜)로 사용한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대부분 사전에서는 회를 노송나무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자칫 소나무로 오해할 여지가 많다. 사전에서 말하는 노송은 소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의 일종이다.
젓나무는 부모를 닮아 재질이 아주 훌륭하다. 그래서 예부터 건축재, 특히 기둥재로 많이 사용했다. 경남 합천의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보관 건물인 수다라장, 경남 양산의 통도사와 전남 강진의 무위사 기둥의 일부 등도 젓나무다. 이러한 젓나무의 특징이야말로 사람들이 이 나무를 우주목으로 삼은 이유 중 하나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이 나무를 우주목으로 삼았다. 이들이 젓나무를 우주목으로 삼은 것도 추운 곳에서도 잘 사는 이 나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젓나무가 낳은 전설(1)
우주목은 전설을 낳는다. 한 인간이 지극히 숭배하는 나무에 전설이 없을 수 없다. 전설은 숭배의 잔영이다. 그래서 젓나무의 전설도 이 나무가 우주목임을 증명한다. 유럽에서 젓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 탄생했다. 옛날 유럽의 한 숲속에 나무꾼과 딸이 살고 있었다. 마음씨 착한 소녀는 숲을 몹시 사랑하여 항상 숲속에 나가 요정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날씨가 추워서 나갈 수 없는 날엔 요정들을 위해 젓나무에 작은 촛불을 켜 놓았다. 아버지는 성탄절 이브에 딸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 위해 깊은 숲으로 나무를 하러 들어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불빛이 반복해서 보여 집까지 무사히 다다르게 되었다. 숲속의 요정들이 친구인 소녀의 아버지를 위해 불빛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유럽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실 때에는 집 앞의 젓나무에 촛불을 켜두고 맞이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성탄절에도 새로 태어난 아기예수를 영접하는 뜻으로 젓나무에 촛불을 밝히고 아름답게 장식했다.
젓나무는 유럽을 상징하는 나무 중 하나다. 젓나무가 크리스마스트리로 탄생한 것은 이 나무가 유럽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유럽인들이 매년 이 나무로 가장 중요한 축제를 맞이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인조 크리스마스트리도 결국 젓나무다.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젓나무를 숭배하고 있는 셈이다.
젓나무가 낳은 전설(2)
우리나라에서도 젓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젓나무를 사찰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만난 것 중 강원도 오대산에 위치한 월정사 입구의 젓나무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이곳의 젓나무를 어느 초봄에 만났다. 아직 잔설이 남아 있던 월정사의 젓나무는 마치 선승(禪僧) 같았다. 오대산의 초봄은 결코 봄이 아니다. 이곳의 봄은 남쪽의 겨울과 다르지 않다. 엄청난 추위에서도 꿋꿋하게 서 있는 젓나무의 기상은 마치 겨울철 깨달음에 정진하는 스님을 닮았다. 그래서 월정사의 젓나무는 그 자체로 큰 스승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세운 월정사(月精寺)의 빽빽한 젓나무는 그 누구도 쉽게 침범할 수 없는 기상이다. 월정사의 젓나무는 오대산 사고(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는 수문장이기도 했다.
변산반도에 위치한 내소사(來蘇寺)의 젓나무는 하늘을 볼 수 없을 만큼 장대하다. 이곳의 젓나무는 월정사와 달리 평지에 살고 있다. 내소사의 젓나무는 속세와 성소를 구분하는 듯하다. 봄철 이곳에 들르면 젓나무의 푸른 숲이 끝나는 곳에서 화려한 벚꽃을 만날 수 있다. 봄철 내소사의 젓나무는 벚꽃에 밀려 사람들의 관심을 덜 끌지만, 다른 계절이라면 젓나무가 압도할 것이다. 이곳 젓나무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새벽이다. 그러나 새벽에 젓나무를 만나려면 여간 정성으로는 어렵다. 잠자는 젓나무 숲을 지나려면 삼년 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젓나무 요정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곤히 자고 있는 존재를 깨우는 자만큼 큰 죄도 드물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젓나무는 경남 합천 해인사에 살고 있다. 해인사의 젓나무는 유럽의 전설만큼 위대한 인물을 낳았다. 이곳의 젓나무는 '학사대(學士臺)'다. 학사대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의미한다. 학사대의 ‘학사’는 최치원이 역임한 한림학사(翰林學士)에서 빌린 이름이다. 왜 이곳의 젓나무를 학사대라 부를까? 이 나무가 최치원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 근처에서 신선(神仙)이 되었다. 젓나무는 그가 사용한 지팡이에서 태어난 나무다. 이 얼마나 황당한 얘기인가? 그러나 한 그루의 나무가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것만큼 위대한 얘기도 드물다. 얼마나 위대한 존재이기에 한 그루의 나무로 탄생했을까. 최치원 선생으로 태어난 젓나무는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 북쪽에 위치한다. 수다라장의 일부도 젓나무로 만들었듯이 이곳의 젓나무는 세계문화유산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다.
학사대 젓나무의 높이는 30m다. 나무의 높이가 30m면 하늘 우러러 쳐다볼 수조차 없다. 나무를 안고 있으면 저절로 존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무의 존재를 알려면 안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학사대 젓나무의 나이는 천 살이다. 혹 어떤 사람들은 나무의 나이를 믿지 않는다. 물론 나무의 나이를 정확하게 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무의 나이를 믿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나무의 나이를 믿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학사대 젓나무의 나이가 천 살이라는 것은 그만큼 이 나무가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둘레 5m의 이곳 젓나무를 직접 안아보면 천 살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나무 재는 법
천연기념물을 비롯한 각종 나무 기념물에는 나무 관련 정보가 적지 않다. 그 중 나무의 높이와 둘레가 빠짐없이 적혀 있다. 요즘에는 장비가 뛰어나 나무 높이와 둘레를 재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식물학자처럼 나무 높이를 잴 만한 도구를 갖지 않아 설명서의 높이가 맞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믿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만 조금 바꾸면 일반인들도 쉽게 나무 높이를 잴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편리한 자는 ‘마음의 자’다. 나는 나무 높이를 마음으로 잰다. 마음의 자는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특히 마음의 자는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휴대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재는 데 필요한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눈으로 보는 순간 바로 잴 수 있다. 마음으로 잰 나무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마음대로 크기를 바꿀 수도 있다. 더욱이 마음의 자로 잰 후 마음으로 나무를 끌어들이면 전혀 다른 차원의 나무로 바뀐다.
학사대의 젓나무를 마음으로 끌어들이면 최치원 선생을 모실 수도 있다. 고운 선생은 지팡이가 살아 있다면 자신도 살아 있다는 말을 남겼다. 지금까지 젓나무가 살아 있으니 고운 선생도 살아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젓나무를 마음으로 끌어들이면 고운 선생도 함께 모시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위대한 스승을 모실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마음으로 나무를 재는 일은 곧 자신을 재는 것과 다름없다. 나무를 재다보면, 나무를 마음으로 끌어들이다보면 어느 새 자신이 누군지 살핀다. 학사대 젓나무를 끌어들이면 고운 선생의 삶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학사대 젓나무를 최치원 선생으로 생각한 것은 그 분에 대한 염원이다. 그 분이 젓나무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은 한 생명체의 영원성을 믿는 것과 같다. 나무에 대한 믿음은 다른 것과 달리 생명에 대한 믿음이다. 생명에 대한 믿음은 그 어떤 믿음보다 위대하고 소중하다. 인간의 나무에 대한 믿음은 가장 근본적인 소망이다. 인간이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도 나무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나무에 대한 지극한 숭배를 철회하거나 의심한다면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혹 어떤 사람들이 나무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미신으로 치부한다면, 혹 어떤 사람이 나무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사이비로 이해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이 땅의 모든 나무를 베어버리라 말할 것이다.
나는 학사대 젓나무 곁에 누워 선생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학사대 젓나무는 고운 선생이 결코 불행하게 살다간 사람이 아님을 증명한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다간 사람이다. 이 땅에 살았던 사람 중 나무로 태어난 인물은 아주 드물다. 나무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은 자이다. 그 누가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
해인사를 찾는 사람들이여! 꼭 학사대에서 고운 선생을 만나 포옹하게나. 학사대 젓나무를 안는 것은 곧 우주를 안아보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글·사진 / 강판권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