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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괴애 김수온 진영이다. ‘가을밤은 깊어가고 달빛은 고요한데 형님께서는 푸른산 어디쯤에 가부좌를 트셨을까?’
“유자가 나를 비웃기를 ‘그대가 불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중과 같고 낚시를 하지 않고 생명 죽이기를 싫어하면서 어찌 머리를 깍고 먹물옷을 입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
“또 불자가 나를 비웃기를 ‘공이 불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우리와 같고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도 우리와 같다. 그런데 아들과 손자를 기르고 술 마시고 닭이나 돼지를 잡아먹으니 어찌 하는 짓이 이리도 어긋나는가?’ 한다.”
“아. 내 한 몸뚱이를 유자와 불자가 양쪽에서 물어뜯으니 정말이지 사람 노릇이 어렵다. 그러나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도다. 유.불이 다투어 나를 공격한다 해도 까짓 거 내가 알바 아니다”
화엄종 승려 성민스님 부탁으로 써준 ‘증민대선서’의 서문이다. 김수온의 시편과 산문에는 심산유곡에서 불도를 즐기고픈 마음과 저자거리에서 벼슬에 얽매인 괴리를 탄식하는 시들이 많다. 다음은 그의 형님인 신미대사를 생각하며 읊은 시다.
지난해 고향에서 소매잡고 헤어진 뒤
충북 영동에서 김훈의 네 아들 가운데 첫째가 신미대사 셋째가 조선초기 3대 문장가의 첫손으로 꼽는 김수온이다. 김수온은 세종과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높은 관직을 수행하였다.
사진은 신미대사 형제간에 닮은 모습을 보라.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추락하는 현실을 보고 김수온은 세종을 도와 불교재건에 앞장선 대표적인 재가자였다. 세종의 왕사 역할을 했던 신미대사와 함께 두 형제의 역할은 조선초기 불교재건과 한글창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글이 편찬 되었다면 창제이후 언문으로 간행된 서적가운데 유교서적이 압도적으로 많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 간행서적은 90프로가 불경이었다.
훈민정음에는 다빈치 코드처럼 불교의 법수가 깃들어 있다.
1.자.모음이 28자로 구성되어 있다.
자.모음 28자는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 28천의 세계를 나타낸다.
소나무와 달은 승가의 풍경이고 늙으막에 관직이 한가하여
김수온이 비 전면을 쓴 탑골공원 원각사비이다. 일제때 모습이다.
괴애 김수온의 높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그는 뛰어난 문장으로 세종을 도와 의서인 ‘의방유취’를 편찬하고 ‘복천사지’. ‘상원사 중창기’. ‘사리영응기’. ‘여래현상기’. ‘대원각사비’ 등 불교관련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그가 남긴 문집 ‘식우집’에는 불교와 차문화를 전해주는 시도 많고 그 당시 불교상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들이 있다. 김수온과 신미대사 두 형제가 무너져 가는 조선 불교의 기둥을 세우고 만고에 빛날 한글창제를 이루었다.
이제 어떤 형제가 나서서 오늘 무너져 가는 불교를 바로 세우고 불교의 정신을 다시 빛나게 할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