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털리 부인의 사랑
작가 ; D. H. 로렌스(1885-1930)
초판 ; 1928(자비출판)
«채털리 부인의 사랑» (Lady Chatterley's Lover) 혹은 직역하자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영국의 소설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의[1] 소설로서 1928년에 쓰여졌으나 소설에 부분적으로 묘사된 혹은 암시하는 성관계 장면 때문에 당시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로렌스는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1926년 10월에서 1927년 여름에 걸쳐 비슷한 주제로 두 편의 소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작품은 로렌스 사후에 그의 아내 프리다(Frieda)에 의해 «The First Lady Chatterley»라는 제목으로 1944년 뉴욕에서 첫 출판되었으며, 두번째 작품은 1954년 처음 이탈리아에서 번역 출판된 후, 1972년에 비로소 «John Thomas and Lady Jane»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에서 원문이 출판되었다. 세번째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영국에서 위에서 잠깐 언급한 이유 때문에 출판이 금지되어 1928년에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첫 출판되었다. 1960년 펭귄 출판사가[2]«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자유 출판을 위한 항소심에서 이김으로서 비로소 검열을 받지 않은 원본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위의 세 작품 가운데 첫 작품 «The First Lady Chatterley»은 후에 집필한 다른 두 작품에 비해 전개가 짧은 편이 특징이며, 두번째 작품 «John Thomas and Lady Jane»은 세세한 장면 묘사에 중점을 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원제: Lady chatterley's lover)은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가 1926년에서 1928년에 걸쳐 쓴 소설이다. 최초 집필부터 탈고까지 두 번에 걸친 전면 개정으로 인해 총 3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아래 설명은 주로 1928년 출간된 제3판본을 기준으로 한다.
교양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콘스턴스(코니)는 클리포드 채털리라는 젊은 귀족과 결혼하지만, 클리포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하반신 불구가 된다. 남편을 간호하고 그의 소설 창작을 돕는 데 전념하던 코니는 마음의 병을 얻어 건강이 악화되게 된다. 간호를 대신해 줄 볼튼 부인의 권유로 주변 숲을 산책하다가 사냥관리인 올리버 맬러즈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클리포드와 헤어질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코니가 여행간 사이 두 사람의 추문이 퍼지게 되고, 결국 맬러즈는 해고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코니는 클리포드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이혼소송을 밟기 위해 코니와 맬러즈는 잠시 헤어지게 된다.
1917년에 콘스탄스는 클리퍼드 채털리와 결혼했는데 한 달간의 신혼을 보낸 후 클리퍼드가 참전했고, 육 개월 후에 부상을 입어 하반신이 마비된 채 되돌아온다. 1920년 가을, 둘은 클리퍼드의 고향인 랙비로 간다. 그곳은 클리퍼드의 영지로 테버셜 광산이 있었다.
클리퍼드는 그곳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콘스탄스는 클리퍼드가 소설에 몰두할 수 있도록 내조했고 그가 쓰는 소설들이 지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콘스탄스의 아버지 맬컴 경은 그 소설들이 아무런 내용 없는 빈 껍데기 뿐이라 했다. 클리퍼드는 소설이 조금씩 팔리기 시작하자 명성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추악했다.
그 즈음 클리퍼드가 초청한 작가 중 마이클리스라는 인물이 콘스탄스에게 반한다. 콘스탄스는 마이클리스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마이클리스는 편벽한 사람이었고, 둘의 관계가 지속되지는 못한다.
클리퍼드는 광산업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이 불구라는 사실을 그러한 힘을 취함으로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듯 했다. 콘스탄스는 클리퍼드를 시중드는 일에 진력이 나 있었기에 볼턴 부인을 고용해 그를 전적으로 시중들게 한다.
어느 날 영지의 사냥터지기 맬로즈가 콘스탄스의 눈에 띈다. 그는 조용히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었는데 말수가 적었고 전 부인과의 관계가 순탄치 못했다고 했다. 콘스탄스는 맬로즈의 육체에서 묘한 매력을 느껴 그에게 다가서지만 맬로즈는 모든 인간관계에 불신감만 드러낼 뿐이었다. 탐색과 경계로 점철되는 대화와 만남이 몇 차례 반복된 이후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해제되고 둘은 관계를 나눈다. 따뜻한 성관계를 경험한 콘스탄스는 자신은 클리퍼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맬로즈는 전 부인과 이혼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클리퍼드는 자신의 영지와 신분을 물려줄 아이를 원했고 콘스탄스는 맬로즈의 아이를 임신한다. 콘스탄스는 언니 힐다와 떠난 여행 중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어 아이가 생겼다고 남편을 속이기로 결심한다.
맬로즈 역시 전부인과의 이혼을 하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는다. 전부인이 와서 행패를 부리고 추문이 떠돌자 맬로즈는 해고되어 랙비를 떠나게 된다. 콘스탄스는 클리퍼드에게 맬로즈와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 놓는다. 클리퍼드는 콘스탄스가 말한 이야기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런던에서 생활하게 된 맬로즈가 콘스탄스에게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낙관적인 편지를 보낸다.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변동이 일어난 후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으며, 조그만 거주지를 새로 세우고, 새롭고 작은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서 가거나 기어 넘어간다. 우리는 살아 나가야 한다. 하늘이 아무리 여러 번 무너진다 해도 말이다. 1917년에 콘스탄스 채털리는 대략 이러한 처지에 처해 있었다.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 소비에트가 건설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이 휩쓸고간 비참한 유럽은 산업화가 가속화되어 인간의 개성이 압살되고 있었다. 로렌스는 영국에 또 다른 재앙이 밀려올 것이라 생각했고 작가의 예언대로 얼마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로렌스는 비참한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따뜻한 성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불이 뿜어져 나오는 광산을 산업화의 표징으로 보았고 그곳을 지옥으로 생각했다. 로렌스는 볼셰비즘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볼셰비즘의 유물론적 세계관도 결국 물질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인간의 따뜻한 감정을 회복시킬 수는 없다고 믿은 것 같다.
로렌스가 제시하는 대안은 영국은 섹스를 통해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야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룰 때, 그리고 정신과 육체가 서로를 자연스럽게 존중할 때 삶은 견딜 만해진다."
그리하여 사냥터지기 맬로즈의 입을 빌어 남자들이 주황색 바지를 입고 다니며 자신의 신체를 자랑스럽게 뽐내면 여자들 역시 그러할 것이고, 돈이 많지 않더라도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코니와 멜로즈가 서로 상대방 음모에 꽃을 엮어주는 대목에서 나는 들국화의 노래 "머리에 꽃을" 가사와 우드스탁에서 히피들이 현란한 색깔의 바지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꽃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원인을 거칠게 이야기하면 의식만을 강조한 나머지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LSD 와 같은 약물로 Nirvana를 추구했던 것은 그런 맥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로렌스는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고 한다. 알려져 있기로 폐결핵은 성적 욕구를 부추기는 한편, 성불능을 만든다고 한다. 클리퍼드가 하나의 상징이냐는 질문에 로렌스는 약간 얼버무리는 태도를 보였다고 하는데, 클리퍼드가 자신과 오버랩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로렌스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성에 관한 면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따뜻한 성관계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물질만능의 산업화 사회에서 인간을 우선하는 사회로 회귀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도리스 레싱의 서문에 의하면 작품은 외설시비에 말려 재판에 회부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법정은 로렌스가 우회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항문성교와 동성애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팽귄클래식에서 출간된 판본은 로렌스가 세번째로 고쳐쓴 판본으로 무삭제 결정판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다. 멜로즈의 사투리 부분을 충청도식 어미로만 처리하고 있는데 여간만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작가 자신이 작품에 대해 설명(옹호) 한 <채털리 부인의 연인> 이야기와 도리스 레싱의 서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그토록 강렬하고 독특한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은 남, 녀 사이의 성적 관계를 솔직하게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21세기 초인 오늘까지도 여성 성적 욕망을 표현한 작품은 영미 문학사에 흔치 않다. 이 작품은 한 여성이 만족스런 성애 후 경험하는 섬세한 쾌락과 그렇지 못한 경우의 실망, 그리고 진정한 성관계의 성취감을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이 문화와 인간성에 대한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위협과 근대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D. H. 로렌스>
데이비드 허버트 리처즈 로렌스(David Herbert Richards Lawrence, 1885년 9월 11일 ~ 1930년 3월 2일)는 영국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이다.
1885년 영국 노팅엄셔 주의 탄광촌 이스트우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아서 존 로렌스는 광부, 어머니인 리디아 로렌스는 교사였다. 그의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인 데다 교양이 없고 화를 잘 내는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던 데 반해, 그의 어머니는 교양 있고 문학을 좋아하는 청교도였다. 남편이 본능적이고 낙천주의자라면 어머니 쪽은 자의식이 강했다.
로렌스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1898년 노팅엄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회사 서기와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1906년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진학하였다. 1911년 그의 첫 작품인 '하얀 공작'이, 1913년에는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소설 '아들과 연인'이 출간되었다. 얼마 후 덕워스 출판사의 편집자 에드워드 가넷과 만나 친구가 되는데, 후에 '아들과 연인'을 10분의 1이나 삭제하고 출판한 장본인이 바로 가넷이다.
이 시기의 로렌스는 대학 은사의 부인이자 독일 귀족 출신인 프리다 위클리와 사랑에 빠졌고, 1914년 그녀와 결혼을 하였다. 1차 대전 중에 독일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 영국서 살기가 난처 했다. 그래서 유럽, 실론,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멕시코 등지를 여행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24년 겨울, 건강이 크게 악화된 로렌스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왔으나 이때 해친 건강은 그가 숨을 거둔 1930년까지 그를 괴롭혔다.
1928년,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소설은 출간과 함께 커다란 이슈를 불러일으켜, 그의 사후인 1932년 영국에서는 소설의 여러 부분이 삭제된 채 출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정에도 서게 되었다. 그러나 1959년, 결국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법정싸움에서 승소하였고 무삭제 완전판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노팅엄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1년, 첫 작품 <흰 공작>을 발표한 이후 성(性)에 대한 소설을 여러 편 써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연애하는 여성들>을 발표, 성(性)에 대한 신비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색은 인간의 원시적인 성의 본능을 매우 중요시하는 데 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아들과 연인> <무지개>, 여행기 <이탈리아의 황혼> <멕시코의 아침>, 수필 <묵시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