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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크로노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의 그림 「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
로마 신화에서 테라(가이아)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가 아버지인 카일루스(우라노스)를 타도한 것 처럼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자신을 타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를 막기 위해 사투르누스는 자식들이 태어난 직후에 그들을 먹어치웠는데, 베스타(헤스티아), 케레스(데메테르), 주노(헤라), 플루토(하데스), 넵튠(포세이돈) 등의 신들을 먹어치웠다.
잡아먹히는 인물이 남성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미술사학자 John J. Ciofalo는 "잡아먹히고 있는 인물은 성인으로 보이며 곡선미가 있는 엉덩이와 다리를 보면 여성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다른 버전에서는 잡아먹히는 인물이 살아 있어 몸부림치거나 적어도 머리가 있어 성별이나 상태를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속 잡아먹히는 인물은 이미 머리도 없이 죽어있기 때문에 사투르누스의 손아귀에서 몸부림치지 않고 있다. Ciofalo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이미지의 압도적인 느낌은 폭력적이고 끝없는 욕망이며,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그의 다리 사이에 있는 격노하고 엄청나게 팽창한 남근으로 강조된다... 극심한 남성의 분노가 그토록 생생하게 포착된 적은 거의 없다."
지독한 권력은 급기야 자기 자식마저 뜯어먹는다. 마치 그 누구도 나를 해치는 적이 될 수 있고 악마가 될 수 있다.
두려움은 미래 권력을 두려워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두개골에서 오른팔 왼팔 할 것 없이 송두리째 뜯어먹는다. 오늘날 힘 있는 정적이 더 큰 힘으로 나를 공격하기 전에 정치권력을 가지고 무자비하게 정적을 해치우려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고야의 거인과 자식 잡아먹는 크로노스는 예나 지금이나 군중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잡아먹으려고 마수를 드러내고 있는 괴물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아는가? 수많은 악귀 야차 같은 천박한 권력도 안개처럼 흩어지고 먼지처럼 사라졌다는 것을?
1812년 고야 재산 목록에 기재되어 있는 작품. 폭풍 직전으로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 구름 위에 거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두려움에 떠는 듯 역마차 떼들은 공포에 싸여 사방으로 도망치는 듯하며, 전면에 노새 한 필이 무심히 서 있다.고야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모르나, 노새를 스페인어로 바보 또는 얼간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도 구구하다. 페르난도 7세에 대한 풍자적 표현이라고도 하고, 거인을 나폴레옹 또는 전쟁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며,그 반대로 거인이 군중을 뒤로 방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거인을 스페인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보는 설도 있다. 어쨌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고야의 상상력의 비약을 말해주는 작품이리라.
1819년, 고야는 마드리드 근처 만사나레스 강둑에 귀머거리의 집(스페인어: Quinta del Sordo)이라는 2층 짜리 집을 매입했다. 이 집은 이전에 살았던 집주인이 청각 장애인이라서 귀머거리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1792년에 콜레라에 걸려 고열로 청력을 잃은 고야에게도 그 이름이 잘 어울렸다. 고야는 1819년에서 1823년 사이에 집을 떠나 보르도로 이사하면서 집 벽에 혼합 기법을 사용한 14점의 그림 시리즈를 제작했다.
1874년 J. Laurent가 귀머거리의 집에서 촬영한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검은 그림 벽화
고야는 처음엔 더욱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집의 각 방을 장식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오늘날 〈검은 그림〉으로 알려진 인상적인 그림으로 그 모든 방을 장식했다. 이 그림들은 개인적인 전시를 위해 의뢰 없이 제작되었으며, 스페인 종교재판으로 인해 촉발된 반도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한 생애 후반의 작가의 심경을 반영하고 있다는 이론이 제기되었다.
고야는 인간의 시체를 먹고 있는 큰 인물(사투르누스)을 묘사했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등장한 듯한 인물은 두 눈은 부릅 뜨고 입을 크게 벌리며 시체의 왼팔을 물어뜯고 있다. 머리와 왼쪽 팔의 일부는 이미 잡아먹힌 것으로 보이며 오른쪽 팔은 몸 앞으로 접어서 엄지손가락으로 고정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이미 잡아먹힌 것으로 보인다. 작품 속 유일하게 밝은 부분은 시체의 흰 살과 붉은 피, 그리고 인물의 손가락 끝을 사체 뒤쪽에 집어넣을 때 보이는 하얀 손가락 관절이다.
이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젊음과 노년의 갈등, 만물의 섭리로서의 시간, 신의 분노, 그리고 전쟁과 혁명으로 아이들을 잡아먹은 스페인의 상황에 대한 우화이기도 하다. 고야의 여섯 자녀 중 유일하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 하비에르와 고야의 가정부이자 정부였던 레오카디아 바이스(Leocadia Weiss)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해석도 있지만, 잡아먹히고 있는 시체의 성별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다. 고야는 이 그림을 대중에 공개할 의도로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야가 이 그림에 대해 어떠한 메모를 남겼다 하더라도, 그 메모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고야가 식당에서 그린 여섯 작품 중 하나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고야가 귀머거리의 집에서 제작한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이며 고야가 죽은 후 다른 사람들이 이름을 붙였다. 이 그림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 그림이 로마 신화(원래의 그리스 신화 에서 영감을 받음)를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 로마 신화에서 테라(가이아)는 사투르누스(크로노스)가 아버지인 카일루스(우라노스)를 타도한 것 처럼 그의 아들 중 한 명이 자신을 타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를 막기 위해 사투르누스는 자식들이 태어난 직후에 그들을 먹어치웠는데, 베스타(헤스티아), 케레스(데메테르), 주노(헤라), 플루토(하데스), 넵튠(포세이돈) 등의 신들을 먹어치웠다. 결국 그의 아내 옵스(레아)는 그의 여섯 번째 아이이자 셋째 아들인 주피터(제우스)를 크레타 섬에 숨겼고, 그 자리에 포대기에 싸인 돌을 내놓아 사투르누스를 속였다. 그림과는 달리 신화에서는 대개 사투르누스/크로노스가 자신의 아이들을 삼키고 나중에 돌을 삼킨 뒤 산 채로 토해내는 장면이 묘사되는 반면, 그림에서는 아이들을 격렬하게 찢어놓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예언대로 주피터는 결국 아버지 사투르누스를 대신하게 되었다.
새러 시먼스는 <고야>(한길아트, 1998)에서 고야를 이렇게 평가한다.
“원숙기에 고야는 스페인 수석 궁정화가로서 거의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고, 개인적으로는 전제정치가 일반 민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는 평생 동안 교회와 국가의 후원을 통해 많은 편익을 누렸다. 그가 스페인 지식인과 귀족 및 군주에게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끄떡없이 살아남는 예술적 기민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다. 본질적으로 그의 정치의식은 화가로서 출세하는 일과 예술적 표현의 자유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 집중되었다. 원숙기의 작품에는 그의 강한 개성과 개인적 관심사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그가 성공한 비결은 바로 이 복잡한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출세와 예술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미켈란젤로마저 돈과 명예라는 사회적 성취와 예술적 인정 사이에서 늘 번민했다. 고야의 작품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난과 부, 섬세한 아름다움과 극도의 공포, 출세욕과 풍자정신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행히 고야에게 예술은 상수로 작용하고, 상황은 변수로 작용했다. 내가 접했던 화가 중에서 사회적 성취랑 상관없이 평생 ‘고귀한 삶’을 찾아 나섰던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뿐이다. 화가 이전에 종교적 천재였던 고흐를 접어둔다면, 고야의 삶은 정직한 예술이 화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역사적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프란치스코 고야
출세의 방책: 예술가가 되거나 성직자가 되거나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벽촌인 푸엔데토도스 마을에서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수도 형편없었던 도금공이었지만, 바스크 출신으로 긍지가 대단해서 몰락귀족의 딸인 그라시아 루시엔테스와 결혼했다. 여섯 자녀 가운데 고야는 예술가가 되고, 남동생 카밀로는 성직자가 되었다. 이 두 가지 직업은 계급제도가 굳건한 스페인에서 신분을 뛰어넘어 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고야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고서 종교재판소 미술검열관이었던 종교화가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Jose Luzan y Martinez, 1710-1785)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호세 루산은 제자들에게 먼저 판화를 정확히 베끼게 하고, 석고데생을 가르쳤다. 이후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서 장학금을 받아 역사화를 공부한다. 고야는 여러 차례 왕립 아카데미의 경연대회에서 낙선하고 1770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계몽군주 카를로스의 후원아래 예술문화 정책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카를로스는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위엄과 사실주의를 장려했다. 이때 돋보인 인물이 안톤 라파엘 멩스(Mengs, Anton Raphael)였다. 멩스는 군주의 대형 초상화를 그리면서, 국왕의 건장한 체격과 못생긴 용모를 일부러 강조했다. 카를로스는 중키에 보통 체격이었다. 어깨는 좁았지만 운동선수처럼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원래 희었던 안색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 운동 덕분에 갈색으로 그을었고, 메부리코에 쪽 빠진 하관을 지녔다. 국왕은 건장한 체격과 못생긴 용모를 그대로 묘사한 멩스의 초상화를 극찬했고, 그 복제화는 국가 공문서에 사용될 만큼 당대 초상화의 규범이 되었다. 멩스의 추천으로 고야와 처남인 라몬 바예우는 1775년 마드리드에서 산타바르바라의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고야는 1776년경 엘 파르도의 궁전 식당을 장식할 태피스트리 밑그림을 주문받았다. 이 그림에선 춤추고, 술 마시고, 싸우고, 소풍을 즐기고, 카드놀이를 하고, 연을 날리고, 연애놀이를 하는 인물들로 가득차 있다. <양산>은 ‘마호’(Majo; 남자 멋쟁이)와 마하(Maja; 여자 멋쟁이)라는 인물을 도입했다. 이런 유형의 남녀들은 대개 하인이나 영세업자로 일하는 사람들이지만 이국적인 옷차림과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귀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고야가 그린 아이들도 영양상태가 좋아서 토실토실하고 활동적인 개구쟁이들이다. 주문받은 목가적인 전원시 같은 이 그림들과 달리 스페인 농민들의 실제적인 삶은 고단했다. 고야는 이 시기에 일곱 명의 자식이 연달아 죽는 것을 보아야 했으므로, 이런 그림에 환멸을 느낄 법 했다. 1778년에 그린 <눈먼 기타 연주자>는 이런 고야의 심경의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고야는 이때부터 버림받은 걸인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무자비한 풍자를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동판화: 농사꾼 성 이시도로를 묘사하다
초기 동판화를 만들면서 고야는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농부 성 이시도로>를 새겼다. 땅을 빼앗기고 쫒겨난 이들이 숭배하는 12세기의 농부는 1622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마드리드는 번화하고 부유한 이들이 사는 도시였지만, 도시의 그늘에선 범죄자와 매춘부, 무식하고 핍박받는 사람들, 평범한 노동자들이 우글거렸고, 고야는 상류사회와 하류사회를 모두 보았다. 그는 예술가로서 특히 삶의 어두운 측면인 폭력과 범죄에 병적인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1778년에 외로운 인물상 <교수형 당하는 남자>를 동판화로 제작했다.
마드리드의 수호성인 성 이시도로, 1778~82
스페인에서 사형수는 마차에 실린 채 처형장으로 끌려와 교수대에 앉혀지고, 머리와 목은 쇠로 만든 목줄로 수직기둥에 고정된다. 원래는 밧줄을 사형수의 목에 감고, 사형집행인이 목줄 뒤에서 지레를 돌리거나 막대기로 밧줄를 비틀었다. 이런 행사에는 언제나 성직자들이 임무를 수행했다. 늙은 카푸친회 수도사가 십자가를 사형수의 입술에 눌러댔다.
고야는 을씨년스런 감방에서 두 손으로 십자가를 꼭 잡고 맨발을 쭉 뻗은 채 죽어있는 사형수에게서 순교자를 연상시킨다. 그 후 고야는 거룩한 고독을 상기시키는 인간적인 누드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그렸다. 이런 고독한 인간의 모습은 성인이나 사형수, 사회에서 격리되고 박해받는 이들의 모습으로 고야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상류층과의 교제: 초상화가 고야
고야는 초상화를 통해 당대의 개화된 엘리트들과 교분을 쌓았다. 이들은 궁정이나 교회보다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더 많이 허용해 주었다.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은 고야가 처음 주문받은 작품이다. 카를로스 3세의 내무장관으로 국사와 계몽운동에 전념하는 백작은 화려한 진홍빛 복장이며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감상자를 응시한다. 최근 개발된 쾌종시계는 열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이 초상화는 근대성과 사회개혁에 대한 찬양을 드러낸다.
카를로스 4세의 법무장관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의 초상은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애국심이 강한 인물을 손으로 머리를 떠받치고 있는 시름에 겨운 사색가로 표현하였다. 고야는 조국의 실력자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세부적인 부분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엿보이게 하였다.
고야의 모델들은 대부분 고야와 절친한 친구가 되거나 후원자가 되었다. 호베야노스와 돈 루이스 왕자, 알바 공작부인과 오수나 공작부부가 그 예다. 고야가 1786년 궁정화가로 임명된 것은 이런 초상화 고객들 덕분이었다. 1790년 고야는 왕립 아카데미 회회부장까지 맡게 되었지만, 상류층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보다 자기 나름대로 실험적인 작업을 하고 싶은 충동이 더 깊어졌다.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두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남은 시간은 하고 싶은 일에 바치면서 조용히 살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혁명과 군중의 힘, 그리고 마녀재판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스페인을 지배하던 카를로스 4세는 개혁정책을 포기하고 계몽주의를 불온시 했다. 신문과 계몽적 잡지는 발행이 금지되고, 친프랑스의 혐의를 받던 고야의 후원자와 친구들은 위협을 받았고, 1793년에 고야는 병고로 귀머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불행했던 시기에 고야가 <마녀들의 안식일> 등 마녀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린 것은 특이하다.
고야에게 마녀와 성모 마리아는 혼란스럽게 겹치고 있다. 종교재판소를 묘사한 고야의 작품에선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강하게 배어 있다. 한 작품에서 참회복 차림에 고깔을 쓴 여자가 무대 위에 앉아 있다. 거슴츠레한 눈과 넓적한 입을 가진 성직자들에게 재판관이 판결문을 낭독하는 동안 방청객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구원은 없다>에서 재판을 받은 여자는 반라의 몸으로 당나귀를 타고 처형장으로 끌려간다. 목과 팔에 채워진 차꼬는 그녀가 드러난 젖가슴을 가리지 못하도록 옥죄여 있다.
판화집 <변덕>의 43번째 작품인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한 화가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이다. 그를 둘러싼 컴컴한 공간에는 스라소니, 고양이, 박쥐떼, 올빼미 일곱 마리가 있다. 마녀와 풍자를 다룬 이 판화집은 1799년에 발매되었는데, 얼마후 고야는 서둘러 이 판화집을 회수해 버렸다. 고야는 종교재판소가 그를 소환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실상 작품의 폭력성, 노골적인 성적 장면, 술 취한 수도사와 성직자의 캐리커처 등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한편 프랑스혁명으로 교회 예술이 사실상 중단된 이후에도 스페인의 경우에는 종교화가 여전히 화가들의 주된 일거리였다. 고야 역시 만사나레스 강변의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교회의 천장화를 맡을 수 있었다.
고야는 바닥에서 9미터 높이의 천장에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의 기적을 그렸다. 전설에 따르면, 성 안토니오 성인이 아버지가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고발당한 사실을 알고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까지 날아가 리스본 법정에서 살해된 사람을 살려내 누가 진짜 살인범인지 가려냈다고 한다. 그러나 고야의 천장화에선, 포르투갈 법정이 아니라 잡다한 군중이 모여 있는 산골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등장인물들은 눈부신 햇살 아래서 부랑자와 장님, 거지 등이 등장하며, 누구든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전쟁의 참화: 자유주의의 쇠퇴
나폴레옹은 1807년 포르투갈에 군대를 보내고, 1808년 스페인을 장악하면서 부르봉 왕가를 폐하고 자기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 호세 1세로 선언하였다. 이 바람에 스페인 독립전쟁이 터졌다. 1808년 5월 2일 프랑스 기병대가 민중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마드리드 시내로 들어왔다. 이 폭동을 진압하는데 나폴레옹 친위대에 속하는 96명의 터키 출신 ‘맘루쿠’ 기병대가 큰 활약을 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고야는 6년 뒤에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라는 전쟁화를 그리게 된다. 특정한 지도자가 아니라 게릴라 전사들을 그려낸 5월 2일 그림은 들라크루아(Ferdinand-Eugène-Victor Delacroix, 1798-1863)의 기념비적 작품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영감을 주었고, 5월 3일 그림은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행해진 민간인 학살을 보여주었는데, 흰 셔츠 차림의 사내가 치켜든 두 손바닥에는 검은 성흔이 찍혀 있다. 이것은 그의 몸짓과 더불어 그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결부시키는 것이다. 고야는 한편에선 호세 1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다른 한편에선 침략자에 맞서는 동포들의 투쟁기를 그렸다. 고야는 농민군을 지휘한 팔라폭스도 그렸지만, 민중의 영웅적 행위를 더 인상 깊게 그려냈다.
고야가 이 시기에 그러낸 판화들은 <전쟁의 참화>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속표지 삽화는 누더기 차림의 미친 사내 모습이다. 성자나 은둔자의 모습을 지닌 이 남자는 눈을 치뜨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지만, 초자연적 기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판화에는 “이제 곧 닥쳐올 사태에 대한 슬픈 예감”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80점의 판화 가운데 첫 번째 주제는 커다란 무덤 속에 처박힌 시체더미의 이미지다. 투쟁과 처형과 살인이다. 그중에 <얼마나 용감한가>라는 판화는 약혼자를 비롯한 몰살당한 군인들을 대신해 지원군이 올 때까지 성벽에서 대포를 쏘았던 마리아 아우구스틴이라는 여성을 묘사했다. 48번 판화부터 시작되는 2부에선 <가장 나쁜 것은 구걸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작품에서 굶주린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익명의 여인을 보여준다.
문제는 3부였다. 1812년에 스페인 임시정부는 카디스 제헌의회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낡은 법률의 폭정에 항거하는 혁명으로 여기고 자유주의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1814년에 부르봉 왕조가 복귀되면서 페르난도 7세는 이 헌법을 거부하고 종교재판소를 부활시켰다. 그러자 고야는 3부에서 자유주의자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연상시키는 종교재판소의 고문 유형을 판화에 담았다.
고야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군주들과 재상들을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고야의 예술가적 직업의식은 페르난도 7세의 폭정에 직면하면서 우울하고 풍자적인 소재로 작품을 가득 채우게 된다. 특히 종교재판의 희생자들을 묘사하면서 권위적인 통치가 지닌 폭력성을 고발했다. 그후에 나타난 고야의 데생에는 고문과 형벌을 다루면서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자기가 원하는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등의 설명을 덧붙였다. 그중에서 <종교재판소 광경>은 야간재판에서 어떤 사악한 일이 일어나는지 사실적으로 느끼게 한다.
석판화: 고야가 내면으로 들어가다
말년으로 접어들면서 고야는 즉흥적인 창작에 매력을 느끼고, 특히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부드러운 스케치에 기울어지면서 석판화라는 매체에 사로잡혔다. 그는 동판화처럼 분명하고 날카로운 스케치를 접고 반쯤 형성되었거나 완성되지 않은 것, 파괴되었거나 대체로 ‘자연스러운’ 것에 마음이 끌렸다.
70대 중반에 들어 고야는 아예 마드리드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만사나레스 강 건너편 시골에 있는 킨타(Quinta)라는 별장으로 떠났다. 이 집은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렸는데 이곳에서 ‘검은 그림’(LasPinturas Negras) 연작을 그렸다. 1823년에는 페르난도 7세의 폭정을 피해 프랑스의 보르도로 망명해 1828년 죽을 때까지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고야는 생애의 마지가 4년을 스페인 망명객들과 더불어 지냈으며, 4월 16일 보르도의 샤르트뢰즈 묘지에 묻혔다.
고야가 죽은 뒤 1838년에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장간>처럼 가난한 육체노동자를 묘사한 고야의 작품이 벨라스케스와 엘그레코 등의 그림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밖에 <칼 가는 사람>, <물 나르는 여자> 등의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이런 작품들은 프랑스 화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야의 유해는 1901년 보르도 묘지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와 그가 1798년에 장식한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교회에 다시 매장되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영감은 “보편적 고통에 대한 영원한 깨달음”이라고 평전 작가인 새러 시먼스는 말한다. 그는 본래 출세를 희망하던 직업적 화가였지만, 그의 예술적 감각은 당대의 가장 어두운 측면을 고스란히 들추어냈다. 그 감흥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