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일행은 이 철교를 타고 안동현까지 탈출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망명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왼쪽은 신의주와 단동을 이어주는 중,조 우의교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경영할 수 있었던 1차적 요인은 막강한 국방력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과 집권당인 노론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의 협력도 절대적인 요인이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이 두 축을 심하게 요동시켰고, 수많은 인사를 망명하게 만들었다.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은 고종 24년(1887) 5월 주차일본 참찬관(駐箚日本參贊官)과 일본 주재 판사대신(辦事大臣)으로 4년 동안 일본에서 근무한 일본통이었다. 고종 31년(1894) 공조판서, 고종 37년(1900) 중추원 의장이 되었다가 망국 후에는 일제로부터 남작(男爵) 작위까지 받았다. 이런 김가진이 상해 임정 합류를 결심하면서 금으로 만든 의치(義齒)를 빼서 얼굴을 바꾸고 시골사람 복장으로 위장한 후 1919년 10월 10일 임정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의 안내로 장남 김의한(金毅漢)과 함께 일산역에서 신의주를 거쳐 만주의 안동(安東:현 단동)현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임정 내무총장 이동녕이 임시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낸 ‘내무부 정문(呈文) 제16호:1920년 12월 20일)’는 ‘(대한민국) 원년(元年:1919) 10월 29일 특파원 이종욱이 유력가(有力家) 김가진을 동반해서 상해에 환착(還着)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김가진은 탈출 과정을 “물샐틈없는 감시망을 귀신처럼 탈출했도다/그 누가 삼등 객실의 승객을 알아보랴/찢긴 갓 누더기의 옛 대신인줄(天羅地網脫如神/誰知三等車中客/破笠衣舊大臣)”이라는 시로 남겼다.김가진의 임정 합류에 일제는 경악했다. 며느리 정정화 여사는 자서전 '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1919년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李堈)의 망명사건이었다. 고종 14년(1877) 귀인 장씨에게 태어난 의친왕은 해외통이었다. 고종 31년(1894) 일본으로 갔다가 고종 33년까지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미국 등지를 방문했다. 고종 37년(1900)에는 미국 유학길에 나서서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Wesleyan University)과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Roanoke College)에서 공부했다.
의친왕 이강. 항일 의지가 굳셌던 거의 유일한 황족이었다.
의친왕의 신학문은 망국과 더불어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었다. 미국 유학 때 의친왕(義親王)으로 책봉되었지만 1910년 망국과 더불어 공(公)으로 강등된 후 사실상 낭인(浪人)생활을 해야 했다. 비록 술로 지새우며 잘못된 세상을 한탄했지만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는 유일한 황족(皇族)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거처인 의화궁(義和宮)에는 항상 일경(日警)이 경호라는 명목으로 지키고 있을 정도로 감시가 삼엄했다.
대동단장 전협(全協)은 의친왕과 가까운 정운복(鄭雲復)에게 자신을 경상도 통영의 갑부 한(韓) 참판(參判)이라고 속인 후 의친왕이 통영에 가지고 있는 어업허가권인 어기권(漁基權)을 사겠다고 접근했다. 의친왕이 계약기간이 남았다면서 거절하는 등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의친왕은 11월 9일 전협이 임시로 빌린 공평동(公平洞)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의친왕은 도중에 일경을 만난 것이 마음에 걸려 발길을 돌렸다가 여러 번 재촉 받은 후 밤 11시쯤 공평동에 도착했다. 전협이 대뜸 “어기권은 거짓말”이라면서 “독립운동에 인물이 필요한 시기이니 떨치고 일어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일제의 관련자 ‘신문조서’에 따르면 의친왕은 “의외의 사태에 놀라지 않고 동행하겠다”고 승낙했다. 그래서 전협은 미리 준비한 인력거에 의친왕을 태우고 자하문을 빠져나와 세검정을 거쳐 새벽에 고양군 은평면(恩平面) 구기리(舊基里)에 전협이 준비해 둔 집으로 들어갔다. 의친왕을 안내했던 정남용(鄭南用)은 일제 ‘신문조서(3회)’를 통해 구기리에서 의친왕이 했던 말을 전하고 있다.
“우리 집안은 조선 500년 동안 주인 집안인데… 2000만 사람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소요하고 있는데 주인이 모르는 체할 수는 없다…. 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붕어(崩御)는 그들(일본)이 독살한 것으로서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주인집의 일원으로서 보통 사람의 열 배, 스무 배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길 안내를 할 사람도 있으니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이에 정남용은 “전하 같은 분이 해외로 나가서 강화회의나 국제연맹회(國際聯盟會)에 출석해 조선인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일본의 무단정치를 뒤집어야 하겠습니다”고 답했다. 이때 의친왕이 후궁인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과 간호사 최효신(崔孝信)을 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여인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태왕(太王) 전하께서 외국인에게 120만원의 돈을 맡긴 증서가 있다”는 이유였다. 고종의 비자금에 대한 아들의 증언이므로 이재호(李在浩)는 두 여인과 서류가 든 가방을 가지고 구기리로 왔다.
그러나 두 여인에 대한 여행증명서는 사전에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다음에 망명시키기로 하고 의친왕과 대동단원들만 10일 오전 11시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일행은 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기차표를 사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의친왕은 이을규(李乙奎)의 낡은 외투를 입고 3등칸에 탔는데, 검문 때는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했다.
의친왕이 열차를 타기 위해 구기리에서 수색으로 향하던 10일 아침 일경 간부 지바(千葉了)는 귀족 저택을 경호·감시하는 경위 순사들을 집무실로 불러 시국의 중대함을 설명한 후 “귀족들의 경호에 만의 하나라도 부주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엄중히 훈시했다. (
일제는 조선과 상해는 물론 일본·만주·시베리아까지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의친왕 일행을 태운 열차는 11일 아침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열차 안에 일경 수십 명이 올라타 검문하기 시작했다. 의친왕 일행은 미리 준비한 여행증명서를 보이고 통과했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열차는 11일 오전 11시쯤 안동현역에 도착했다. 안동현에는 아일랜드인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이 있었는데, 임시정부 교통국 산하였다. 이륭양행까지만 가면 이륭양행 소속의 기선을 타고 상해로 갈 수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면 상해와 서울에서 동시에 의친왕 명의의 ‘유고문(諭告文)’이 뿌려질 것이었다.
“통곡하면서 우리 2000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이번의 만주행은… 하늘과 땅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다”로 시작하는 유고문은 고종 독살을 폭로하면서 “민중은 한 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의친왕의 망명과 함께 유고문이 뿌려지면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파가 일 것이었다. 그가 임정에 가담했다면 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운명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1946년 11월15일 광무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국민협의회(國民協議會)에게 평민의 일인자격(一人資格)으로 여생을 건국에
헌신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
위의 사진은 <다음 블로그:등대의 항로 http://blog.daum.net/kchlee0332/13718045>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의친왕과 정남용은 안동현역에 이미 쫙 깔린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의친왕과 정남용은 인력거에 강제로 실려 신의주 철도호텔로 압송되고 이을규는 역에서 탈출했으나 이내 체포되었다. 의친왕 망명 작전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일제는 의친왕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거주하던 남산의 녹천정(綠泉亭)에
유폐시켰다. 의친왕 망명작전이 실패하면서 대동단 조직도 뿌리가 뽑혔다. 일제는 대동단원 검거작전에 돌입해 단장 전협과
최익한·권태석·정남용·이을규 등 모두 37명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및 출판법 위반·보안법 위반 및 사기 피고 사건’으로
기소했다.
조선총독부 판사 이토 준키치(伊東淳吉)를 비롯해서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된 법정은 전협에게 징역 8년형을 선고하는 등 가담자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전협은 1927년 11월 9일 가출옥했다가 이틀
후인 11일 사망했다. ‘동아일보’는 “기미(己未:1919) 당시 ○○○ 전하를 모시고…상해(上海)로 가서 ○○운동을 하고자 했던 대동단 사건의
수범 전협씨”라고 보도했다. 일제가 이강 공과 독립이란 용어를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종의 채권 서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의친왕은 지바의 취조 때 “태왕께서 이용익(李容翊)에게
기탁하여 각 은행에 예금하신 돈이 독일인이 상해에서 경영하는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있을 것이니 그 유무(有無)를 찾아 받으라는 뜻의 증서”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 서류를 갖고 있던 이을규는 ‘공판시말서’에서 “피고는 가방을 든 채로 도망했으며, 그 가방은 이륭양행에 숨겨두었다는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그러함에 틀림없다”고 답했다.
그 후 재판
과정에서 일제는 이 서류의 소재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독립운동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제가 120만원의 거액에 대해서
침묵했다는 것은 서류 일체를 압수했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이 돈의 행방 추적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덕일/중앙일보>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 칭호를 받고 1906년에야 겨우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06년과 1911년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의 게이오 대학교를 거쳐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칼리지와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던 의친왕은 항일 독립 투사들과 끊임없이 접촉, 묵묵히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황실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어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홍유릉에 있는 이강 의친왕의 묘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광복
후에도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5년 8월 16일, 서울 안국동의 별궁에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묘는 부황인
고종황제의 능인 홍유릉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
이관구 [李觀求, 1885.4.29~1953.3.7]
호는 화사(華史)이고, 이명(異名)은 종석(鍾錫)이다.
황해도 송화(松禾)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 다니던 중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베이징[北京] 회문대학(匯文大學)과 명륜대학(明倫大學)에서 수학하였고,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 군관학교
속성과를 수료한 후 1913년 7월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제2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만나 항일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1914년 귀국,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유림(儒林) 이종문(李種文)·오순원(吳淳元) 등과 밀의하여 항일격문을 작성·배포하였다.
이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16년에는 박상진(朴尙鎭)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담,
고향의
가재(家財)를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만주 안둥[安東]에 삼달양행(三達洋行)과 창춘[長春]에 상원양행(尙元洋行)을 설립해 이곳을 연락거점으로 삼고
신흥학교(新興學校)의 이시영(李始榮)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 및 독립군 양성 등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암살을 계획하고 광복회 회원 성낙규(成樂奎)·조선환(曺善煥) 등을 서울로 잠입시켰다.
1917년 대한광복회 황해도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직확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1918년 회원인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됨에 따라 5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후 대한무관학교(大韓武官學校) 최고 고문,
국민협의회(國民協議會) 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에 《의용실기(義勇實記)》가 전한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위의 글은 <다음 블로그:등대의 항로 http://blog.daum.net/kchlee0332/13718045>에서 가지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