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항상 싸움에서 이긴 사람들의 기록이다.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역사는 날조되기 쉽고 잊혀지고 만다.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망한 나라다. 옛날 백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서울·공주·부여·익산 등 어디를 가더라도 망한 나라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또한 흔적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기대만큼의 화려한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서울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서 공주로 수도(首都)를 옮기기까지 400년 가까운 세월동안 도읍지 역할을 했던 곳이지만 아직까지 왕성이었던 위례성의 위치조차도 모르고 있다.
옛부터 많은 학자들이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두고 다양한 주장을 해왔다.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연스님은 충남 직산이 위례성이라 주장했고,『여유당전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 고읍(古邑)이라고 주장했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두계 이병도의 경우는 경기도 하남시의 춘궁리 일대를 지목했고, 윤무병은 하남시의 이성산성이 위례성이라 주장했다. 몽촌토성을 발굴한 이후 김원룡·최몽룡 등은 몽촌토성이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으며, 김정학 등은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누구의 주장이든 확실하게 정설로 굳어진 학설은 없는 형편이다. 기록에 남아 있거나 눈에 보이는 유물·유적이 드문 한성 백제의 역사를 밝히는데 발굴조사는 잊혀지고 사라진 역사를 되살리는데 아주 중요하다.
이번에 풍납토성 안의 '경당연립 재개발구역'에서 벌어진 유적발굴 현장을 불법으로 훼손한 사태를 보며 '보존'과 '개발'의 논리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강동·송파 일대의 백제유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조선고적도보』에 이 일대의 석촌동·가락동·방이동 지역에 백제고분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보고가 되었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이 범람하면서 암사동과 풍납토성의 일부 퇴적층이 유실되면서 토기 파편 등이 지표에 나타났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은 이 토기편 등의 지표상에 나타난 유물들을 수습해가고는 본격적인 발굴이나 보존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문화재정책이 제자리를 찾는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박정희·김종필 등의 군인들이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 '한국적 민족주의'라는 왜곡된 형태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통치기반으로 삼으면서 많은 사적지가 지정되고 발굴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군부파쇼정권의 역사·문화정책이라는 것이 통치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많은 유물들이 '개발' 논리에 밀려 망가져 버렸다.
풍납토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1963년 사적 11호로 지정이 되었으나 최근까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1980년부터 이형구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이 개인적으로 답사를 시작하면서 지표상에서 백제 초기의 많은 토기 파편들을 발견하고 체계적인 발굴과 보존대책을 제시했으나 '개발'논리 앞에 번번히 묵살되었다.
1985년 당시 군부출신 집권자는 정부에서 519억원을 투입하여 '백제고도 문화유적 종합복원'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말 그대로 헛된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정부가 그 때부터 구체적인 계획과 대안을 세워서 풍납토성을 발굴·조사하여 보존하려는 계획을 실천했더라면 이번과 같은 사상 유례가 없는 문화유적 훼손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항상 예산타령을 하거나 문화재관리법 같은 법규를 들먹이며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지역주민들의 재산상의 피해를 외면해왔다.
정부는 무기도입비리나 고속철도비리 등에 천문학적인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전해줄 문화유산발굴·조사 사업에 드는 비용은 예산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제시대 제정된 법을 그대로 사용하다 최근에 개정이 된 '문화재관리법'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곳곳에 권위적이고 독소적인 조항이 들어있다. 건축이나 재건축을 하다가 문화재가 발견되면 건축주 자신의 비용으로 문화재를 발굴해야 한다는 법률조항은 도대체 어느 시대에 맞는 법인가? 건축을 하는 국민이 자신의 돈을 들여 문화재를 발굴하고 그 문화재는 모두 국고로 귀속되며, 그 기간동안 건축 공사가 중단되어 발생한 재산권 피해는 일방적으로 국민이 부담한다면 어느 국민이 문화재를 아끼고 보존하려고 할 것인지 의문이다.
법이 잘못되었으면 마땅히 법을 뜯어 고쳐야지 국민에게 그 법에 맞춰서 살아가라고 우격다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에 계획적이고 고의적으로 소중한 문화유적을 망가뜨린 재개발조합 조합장과 포크레인 기사는 엄하게 책임을 물어 다스려야 하겠지만 행정당국의 늑장대응으로 피해를 본 경당연립재개발 조합의 조합원들에게도 합당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풍납토성을 보존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라는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내려지자 관계부처 공무원들은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다.
풍납토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조원'이상의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이러한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는 국가정책이 즉흥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학술단체·관계기관·시민단체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며 보다 합리적인 보존계획을 수립하고 객관적인 소요예산에 관한 토론을 통하여 정책들이 결정되어야 한다. 전문가나 시민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너무 급하게 정부 주도로 '특별법 제정'이라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과거에 정부가 일방적으로 '개발'논리를 앞세워 문화재를 밀어버린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문화재의 '보존'과 '개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50년·10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과 정부·학계·시민의 토론과 양보를 통하여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