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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석 때부터 시작한 귀농하기 연재가 6개월 동안 본편 9화, 번외편 4화를 마치고 이제 마무리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게 제가 한 일의 전부입니다. 왜 귀농하냐, 어떻게 귀농하냐, 귀농해서 어떻게 살 거냐. 이런 질문의 답은 이미 다 알고 계시거든요. 결국 다 알고 있는 것들을 한 번 더 정리하려고 6개월을 보냈습니다.
지난 반년, 많이 어지러우셨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멍청한 짓거리들, 억장 눌리는 사건 사고들, 점점 늘어나는 억울한 사람들, 그리고 점점 무뎌지는 사람들, 이 틈새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오히려 당당하게 욕심을 드러내놓고 앞으로 전진하는 후안무치, 그러지 말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다가 이 몰염치의 행렬에 뒤쳐질까봐 종주먹 풀고 급하게 몰상식철도 999를 타고 안드로메다로 가는 많은 사람들로 상당히 어지러웠을 겁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세상이 방향도 없이 급변하는 거 같아 보이죠? 아닙니다. 세상은 급변하는 게 아니라 사실 아주 단순한 직선으로 쭈욱 미끄러져왔습니다. 그동안은 그래도 역사와 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내놓고 탐욕의 보따리를 채우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는 완전히 드러내놓고 그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지러워 보일 뿐입니다. 세상은 아주 단순해졌습니다. 죽느냐 죽이느냐, 이 간단한 좌표만 갖고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선고를 받았답니다. 지방에 계신 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서울시 교육감 선거 당시의 풍경은 참 슬프게도 웃겼습니다. 서울의 강남과 강북이 전혀 다른 성격의 도시인 건 잘 아시죠? 당시 교육감 선거는 강남과 강북의 싸움인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는요. 한 쪽은 경쟁교육, 자본 무한투입의 서바이벌 교육시스템을 주장했고 한 쪽은 그나마 평등, 균형의 교육시스템을 주장했거든요. 전자는 부자, 후자는 가난뱅이, 이렇게 양립하면 되겠죠? 이 싸움에서 강남이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자세하게만 들여다본다면 강북이 강남의 승리에 협력한 그림이었습니다. 강남구는 공정택후보의 압도적 승리(3만표 이상의 차이가 났습니다), 그 외의 모든 지역을 합하면 주경복 후보의 승리(강남구 이외의 모든 구를 다 합쳐서 2만표가 안 되는 승리를 했습니다.) 이 결과가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건 단순한 진보 대 보수의 구도가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싸움도 아닙니다. 이제는 그런 순진한 말 하지 맙시다. 이념의 대립도 아닙니다. 가치의 싸움도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이 이제는 자본의 강 속에 완전히 빠져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일 뿐입니다. 인생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잣대는 돈이라는 거죠. 내 자식 돈 많이 벌어 승리하게 하려고 교육시키고, 그러자면 남의 자식은 죽여야 하고, 그러자면 내 자식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이길 수 있도록 죽어라고 훈련시켜야 하고, 그 훈련비를 아낌없이 쏟아 부을 작정이고 찌질한 것들은 별 도움이 안 되니 저리 비키라는 겁니다.
인생의 목표? 존재의 이유? 소중한 가치? 그런 거 없습니다. 그저 돈만 있으면 됩니다. 인생의 목표든 존재의 이유든 소중한 가치든 다 돈 주고 사면 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국제중 보내고 특목고 보내고 명문대 보내고 번듯한 직업 갖게 해서 열심히 일 안해도 살 수 있게 만든 다음 남는 시간으로 아파트 도박하고 땅 도박하고 주식, 펀드 도박해서 가난한 이의 목숨과 바꾼 돈을 끌어 모아 비로소 떵떵거리면서 우아한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와인잔 들고 우아하게 인생의 가치를 논하면 된다는 거죠. 패배자의 아우성을 배경음악 삼아.
여기에 가진 것 별로 없는 가난한 이들이 동조했습니다. 지금 부자들은 부를 금쪽같이 소중한 내 새끼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지금 가난한 자들은 이 치욕스런 가난을 금쪽같은 내 새끼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한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상한 동맹을 한 겁니다. 죽음의 무한경쟁 교육시스템에 인생을 다 바치기로요. 이것이 공정택 교육감이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선고를 받은, 서울시교육감 선거의 실상이고 내막입니다. 이제는 가치니 평등이니 자유니 이런 말은 박물관에나 진열하라는 대중의 요구입니다. 이런 망할 놈의 대중이 있을까요? 역사는 늘 정의롭고, 그 정의는 민중, 대중의 편이라는데, 그런 대중이 어찌 그럴 수 있을까요? 이따위 몰염치하고 몰상식한 자들이 대중이라면 희망이 없겠죠? 욕하고 싶으시죠? 그런데 죄송하지만, 이 글을 보고 계시는 여러분들이 다 그 ‘대중’의 일원들이십니다. 욕할 자격 없으십니다.
난 아냐! 하고 화내실 분도 계실 겁니다 아마. 그러면 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보세요.
아파트 시세 차익으로 돈 벌거나 손해 보신 적 없으세요? (아파트 투기꾼에게 드리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혹은 예전에 아파트에 살거나 살던 때 그런 일이 없었냐는 질문입니다)
싸게 땅 사서 오른 값에 땅 되판 적 없으세요? 혹은 그런 생각 안해보셨어요?
단돈 만원이라도 주식이나 펀드해서 이익 올리거나 손해 보신 적 없으세요?
영업이익, 월급 외에 다른 돈을 한 푼이라도 받았거나 얻어먹었거나 공짜로 여행 다닌 적 없으세요? 차 기름값이라도 공짜로 받은 적 없으세요? 지위를 이용해서 말이죠. 담배값이라도 가외로 받은 적 없어요?
내가 지불한 돈 이상으로 받아내려고 애쓰거나 싸운 적 없으세요?
내게 돌아올 이익 생각하면서 돈봉투 만든 적 없으세요?
아이에게 학원이나 과외나 뭐, 성적 올리게 하려고 시킨 적 없으세요?
아이에게 명문대 입학, 하다못해 대학은 가야하니까 다른 애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라고 재촉한 적 없으세요?
아이의 장래를 생각한답시고 아이의 장래 모습을 돈 잘 버는 직업군으로 그린 적 없으세요?
너무하죠? 이런 질문은.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할 자신 없으시죠? 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어리석고 무능하고 비겁한 대중입니다. 이 어리석음과 무능함과 비겁함 덕분에 자본이 사람들을 밟고 올라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자본이 거침없이 파괴하는 세상을 목격하고 계신 겁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만들었습니다. 삶의 풍요를 꿈꾸면서요. 이후 자본주의는 국민국가와 이념을 생산했고, 이 국가와 이념의 이합집산에 의해 대량파괴, 대량살상이라는, 이전의 전쟁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의 결과 자본은 더욱 강성해졌고, 금융자본주의라는 괴물로 성장했습니다.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모태인 국가와 이념의 경계를 허물어뜨렸고, 마침내 금융체제까지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살모사가 제 어미의 살을 파먹고 성장하는 것처럼요. 제 어미의 목숨을 끊어낸 살모사가 이제는 제 어미를 만들어 낸 인간을 향해 독니를 드러내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종국에는 자본 자체마저 와해시킬 겁니다. 그 다음에는 끔찍한 소멸이 기다리고 있지요.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자, 이대로 마냥 진창 속에서 꿈틀대다가 소멸을 맞이하실 예정이십니까?
미국증시가 씨티은행 덕분에 상승세로 돌아섰고 코스피지수도 올라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덩달아 환율도 떨어지고 있네요. 좋은 소식 같죠? 이제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가나보다 하고 안심되시죠? 그래도 또 지수가 하락하고 환율이 상승할까 조마조마하기도 하세요? 그런데, 잠시 기뻐하거나 조마조마한 맘 접으시고 자신을 잘 들여다보세요. 왜 조마조마하죠? 왜 기쁘죠? 뭐 때문에요?
맞습니다.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기쁘고 조마조마하고 절망하고 환호합니다. 완전히 돈에 사로잡혀버린 겁니다. 돈 조금 더 주면 좋아하고 돈 조금 덜 주면 절망합니다. 이거 노예 맞죠? 밥 안 주면 괴로워서 반항하고 밥 많이 주면 충성하고. 인간을 길들이는 방법 참 간단하죠? 짐승도 이 방법으로 길 들이잖아요. 물개가 재주 잘 넘으면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먹이 줍니다. 잘 못하면 먹이 안 주죠. 물개가 제 기분 좋아서 재롱부리고 재주넘나요? 안 굶어죽으려고, 배불리 먹으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사람은 뭐 물개랑 다를까요?
많은 이들이 그 일을 왜 하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그런다 왜! 내가 이짓 좋아서 하는 줄 알아? 이래야 먹고 살지! 많은 이들이 정치에 관한 선택도 이 잣대로 합니다. 누가 내 입에 밥을 많이 넣어줄 것인가를 선택하는 거죠. 남 입에 들어갈 밥도 뺏어서 내 입에 넣어주면 기분 좋아서 꼬리 살랑살랑 흔듭니다. 기분 나쁘시죠? 이런 표현을 써서. 그런데 사실 아닙니까. 그 덕분에 공정택이 서울시 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가 돈 먹은 게 들통 나서 이번에 개망신 당한 거잖습니까. 공정택의 개망신을 대중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이 함께 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지금의 세상은 결국, 우리들 스스로가 만든 겁니다. 누굴 원망할 게 아니에요. 지금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들 내면 속에 있는 탐욕에서 출발한 거니까요.
그래서 귀농하기를 말씀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자본의 노예상태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있다가 소멸을 맞이하기 전에 죽음의 시스템에서 탈출하자고 말입니다. 현재로서는 탈출의 가장 유효한 방법이 귀농이기에, 귀농이라는 방식으로 탈출하자고 귀농하기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귀농은 단순히 농촌 가서 농사 짓고 팔베게 배고 음풍농월하는 게 아닙니다. 귀농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자신이 꾸려나가는 치열한 현실입니다. 같은 치열함일지라도, 원해서 하는 치열함과 어쩔 수 없이 하는 치열함은 완전히 그 가치가 다릅니다. 지금까지 그 말씀을 드렸더랬습니다. 이제 마지막 말씀을 드립니다.
- 귀농하기의 마지막 이야기 : 귀농을 왜 하는가 -
귀농은 농사짓는 법, 유기농 작물재배법, 집짓는 법, 이런 것들보다 교육을 제대로 보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말씀드린 것이 교육이었고 번외편을 진행하면서도 다시 이 부분을 강조해서 말씀드렸다. 교육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죽을 용기를 다 짜내서 귀농해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결국 귀농자가 늙고 힘이 없어질 때 그 귀농지는 다시 죽음의 땅으로 되돌아갈 뿐이니까.
생태도 네 번에 걸쳐 말씀을 드렸다. 무엇이 생태인지, 생태를 실천하자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를 아파트를 통해 들여다보자고 말씀을 드렸다. 우리 의식 속에 있는 아파트는 사실 집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 사는 집을 살림집이라고 불렀다. 살림집. 사람을 살리는 집이란 뜻이다. 그러나 아파트는 생명을 살리는 집이 아니고 죽음을 부르는 장소일 뿐이다. 아파트는 욕망의 덩어리 그 자체다. 이런 아파트의 기억을 우리 머리 속에서 몰아내지 않는 한, 귀농을 한다 해도 생명의 땅에 죽음의 집을 만들고 결국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허무한 결과를 만들 것이라는 다소 섬뜩한 말씀을 드린 바 있다.
그 다음에 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봤고 농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도 말씀드렸다. 자본이 밥을 어떻게 요절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인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밥을 제 손으로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면 귀농은 한갓 허망한 꿈일 뿐이니까. 귀농은 자본에게는 가장 무서운 도전이다. 그렇기에 귀농자들은 귀농 전에 온갖 방해공작을 온갖 방향으로부터 받는다. 귀농의 가장 무서운 방해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부모형제, 친구, 친인척이다. 아마 귀농을 꿈꾸다가 이 방해공작에 좌절당한 분들은 이 말이 뼈저릴 게다.
똥 싸기도 말씀드렸다. 아무리 고상한 말씀들을 하고 고상한 삶을 사신다고 해도 똥으로 물과 땅을 더럽힌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인간은 지구를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일 뿐이므로 제대로 똥 싸기를 하자고 말씀을 드렸다. 똥이 땅을 살리고 밥을 살리고 사람을 살린다고 말씀드렸다. 약간의 귀차니즘만 극복한다면, 똥 싸는 일은 세상을 살리는 일이 된다.
자, 그래서, 이렇게 복잡한 순서를 거쳐 귀농을 해서 뭐하자는 건데?
이제 이 근본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하는 순서다. 대체 귀농해서 뭐하자는 건데?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자.
이경해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농업 부분 FTA 협상을 막았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농업이 단순한 1차산업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란 것을 새삼 느꼈었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아무리 고상한 말씀을 줄줄 한다고 해도 그 입으로 음식을 삼켜서 소화하지 않는다면 죽는다. 집이 없어도 살고 옷이 없어도 살고 돈 없어도 살지만 먹을거리가 없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제 손으로 제 먹을거리를 만들지 못하는 생명은 존재할 가치가 없고 그런 생명이 모인 사회는 필경 죽는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 이제 권력은 그 뒤에 자본이라는 두목이 버티고 있는 조폭의 행동대장이란 것을 다들 아실게다. 그것이 국가단위이든 그것보다 더 큰 단위건 간에 권력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자본의 완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 식량 생산을 제어하고 지배하려고 그렇게 애쓰고 있는 거다.
먹을거리만 장악하면 세계정복은 완성된다. 무슨 SF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세계정복의 야욕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장면처럼 그렇게 자본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이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지구방위대, 독수리5형제, 마징거제트, 로봇태권브이, 에반게리온, 수퍼맨, 배드맨을 총동원해볼까? 아서시라. 자본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지구방위대든 수퍼맨이든 그것을 만들어낸 원천은 결국 자본이다.
세계정복을 노리는 거대한 힘을 물리치는 무기는 로봇태권브이가 아니고 농민의 손에 들린 삽과 곡괭이, 호미와 땀방울이다. 너무나 작아서 볼품없기까지 한 농민의 손이야말로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물리치는 가장 무서운 무기다. 성서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거다. 크고 무거운 것은 작고 초라한 것으로 물리쳐야 한다는 것. 크고 무거운 것을 더 크고 무거운 것으로 물리쳐봤자 상황은 그대로뿐이라는 것. 상대의 룰로 아무리 싸워봤자 그 결과는 내 것이 아니고 상대의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
농사 지어서 그걸 시장에 내다 판다면 자본이 온갖 술책으로 방해를 하겠지만 내 손으로 내 입에 들어갈 먹을거리 만들겠다는데 그걸 누가 방해할 수 있을 것인가. 제아무리 힘센 자본이라 해도 그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귀농은 내 목숨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귀농을 한다는 것은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농촌의 땅을 지킨다는 뜻이고 이 작고 단순한 행위가 자본의 거대한 야욕인 세계정복의 음모를 무너뜨린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귀농을 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내 목숨을 내가 지킨다는 말은 내 삶의 결정을 내가 스스로 한다는 뜻이다. 나를 스스로 다스리는 것. 이것을 자치라고 한다. 조금 단위를 키우면 ‘우리’를 ‘우리 스스로’ 다스린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인류가 지구에 자신의 생명을 기댄 이후 지금까지 생존해 온 거의 유일한 방법인 공동체 만들기이다.
간디는 이것을 스와라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중앙에 앉아있는 스무명의 사람들에 의해 작동될 수 없다. 그것은 마을의 모든 주민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작동되어야 한다.’
작은 공동체를 살리면 인간이 자본에의 굴종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의 자존이 지속가능한 상황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지점이다. 이 작은 공동체의 복원, 혹은 재생은 자체 생산의 동력이 없이는 불가능해진다. 외부로부터 먹이를 공급받으면서 자신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공급을 받으면 공급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좌우될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그 휘청댐이 심한 이유가 바로 이거다. 돈 벌겠답시고 있는 거 없는 거 몽땅 내다팔고 농사처럼 돈 안 되는 짓은 포기해버리는 아메바성 단견이 불러올 비극은 너무나 처참하다. - 귀농하기 7의 에피소우드 처럼 -
내 단점은 상대의 장점이 된다. 자본이 이것을 가장 잘 이용한다. 비교우위라는 용어의 속뜻이 바로 이거다. - 비교우위라는 용어를 만든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흔히 고전경제학자로 불리지만 사실 그는 큰 사업을 성공한 사업가이자 대자본을 축적한 자본가였다. 그의 역사, 사회에서의 위치까지 읽어야 그가 말한 비교우위가 목표하는 바가 어디인지 이해할 수 있다. - 공동체의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 자체 생산하는 먹을거리에 있으므로 이 부분을 집중공격하면 공동체 - 자본의 가장 큰 적 - 를 해체할 수가 있다. 지난 백여년 자본이 집중한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2009년 현재, 전 세계에 있는 다양한 공동체들은 먹을거리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공통의 위기에 내몰려있고 그 덕에 공동체는 이미 붕괴하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 농촌의 피폐함과 몰락은 이 시각으로 보면 그 원인과 앞으로의 진행이 선명하게 보인다.
결국 귀농은, 귀농자 스스로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본이 파괴한 공동체를 복원하고 재생하려는 노력이다. 이 인식이 없이 귀농하면 자본의 만만한 먹잇감을 새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복원과 재생이 귀농을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나는 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대단히 깊은 질문이다. 플라톤과 노자 이래, 아니, 그 이전부터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향해 끊임없이 던진 질문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의 해답을 내놓았고, 그 해답들을 다 모아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이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간단하기도 하다. 모든 담론의 작동은 한 지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연대다.
연대라는 개념 없이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대에 이르러 모든 철학자들이 모두 연대의 개념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연대가 존재의 터전이라는 것은 증명된다. 연대라고 말하니 뭔가 새로운 개념 같기도 하고 소위 좌빨 - 이런 천박한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 사회의 처참한 천박성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쓰레기통에서도 꽃은 피겠지만 그 꽃은 시들면서 고스란히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쓰레기통 속에서는 뭐든지 쓰레기가 되는 법이다. - 들이 즐겨 쓰는 용어 같지만, 사실 우리 삶에 이 연대는 속속들이 배어 있다. 왜 우리네 살림집들이 딸랑 한 채가 아니고 여러 채가 모여서 집을 이루며 낮은 담벼락 너머로 안방의 기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시라. 연대를 하자면 주머니에서 손을 빼야 한다.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옆엣 사람과 손을 맞잡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된다. 사회를 사회로 만드는 것이 바로 연대다. 함께 있는 것. 공통의 목표를 만드는 것. 내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나란히 두는 것. 차별과 구분과 지배를 극복해내는 것. 이것이 연대다. 연대는 자유와 평등을 대립개념으로 두지 않는다. 내 자유를 타인의 자유 옆에 두는 것이지 내 자유를 타인의 자유 위에 얹지 않는다. 연대의 개념으로 보면 자유는 곧 평등이다.
근대국민국가를 만든 이론틀인 사회계약론과는 근본이 다른 개념이다. 사회계약론은 지배와 피지배 간의 관계를 규정한 이론이고 이 이론에 의해 권력의 위임이라는 후속개념이 나왔다. 이전까지 인간을 괴롭히던, 소유와 출신신분에 따라 촘촘히 나뉘어진 계급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만든 이 개념이 오히려 훨씬 강고한 계급사회를 만들 줄이야 사회계약론을 만든 이들은 짐작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 때, 우리는 우리의 사회가 비로소 계급의 경계가 무너진 평등의 상태가 된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다. 땀 흘려 일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프로파간다에 속아 넘어가서. 그러나 이제는 안다. 땀 흘려 일한 자들은 거리로 내 몰렸고 그 땀의 대가는 다른 이가 받아서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결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계급의 다층구조로 만든 강고한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사회계약론은 사회를 피라미드 구조로 만들기 위한 강력한 이론틀이었다.
재벌의 상속, 목사의 교회세습, 정치권력의 대물림, 학력차별의 강화 등의 현상은 우리가 만든 사회가 얼마나 우리로부터 멀어져있는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도대체, 내가 도장 찍고 사인하지 않는 그런 계약에 발목 잡힐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왜 서울 강남에 태어났고 깡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의 존재가치가 결정되어야만 하는가. 왜 워싱턴에서 태어났고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 인간은 비만으로 헉헉대고 한 인간은 기아로 굶어죽어야 하는가. 이 부조리극을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릴 방법은 없는가.
있다. 그것이 연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손을 내밀고 손을 잡고 큰 그물을 만드는 것. 이 그물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흘려보내는 것.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힘으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평화를 일구어내는 것. 이것이 연대의 힘이다. 연대에서 경쟁은 필요없다. 경쟁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하다. 경쟁을 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고 의무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온갖 구분되는 자격들의 벽을 뚫고 연대를 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어렵사리 만든 연대는 다른 연대의 그물과 엉켜 연대망끼리의 졍쟁체제로 변하기 일쑤다. - 이래서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나온 거다. - 그래서 지금은 연대를 하기 용이한 환경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전략적 선택일 뿐 절대기준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 상황에서 귀농은 연대의 그물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뜻이다. 이 연대의 그물이 완성되기만 한다면 굳이 어려운 귀농까지 하면서 애쓸 일은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지금 농촌이 도시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거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존재하는 지점을 만들기 위해 연대의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연대는 긍정이다. 부정의 연대는 없기 때문이다. 부정의 목적으로 만든 조직을 연대라는 용어로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권력을 산개시키면 부정의 힘이 개입할 이유가 없게 된다. 바로, 권력을 산개시키고 인간을 하나하나 중요한 존재로 위치시키는 방식이 연대다.
피라미드 구조를 연대라고 부르지 않는다. 피라미드 구조는 조직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하다. 연대는 다층구조인 피라미드구조가 아니라 평으로 확장해나가는 네트워크 구조다. 네트워크는 피라미드 구조처럼 중심의 한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무한으로 펼쳐지는 그물눈들이 있다. 하나의 그물눈이 터지면 그 곳으로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그러므로 그물눈 하나하나가 모두 다 중요하고, 그래서 각 존재들은 평등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각 존재들은 상대의 존재에 의해 자유를 보장받는다.
공동체는 연대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생명을 얻은 공동체는 자신을 스스로 다스린다.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는 존재는 지속력을 갖는다. 이 지속력이 바로 역사다. 그러므로 귀농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중요한 일을 한다.
이제 귀농을 해서 뭐하자는 건지 답이 나온 셈이다. 연대의 그물을 만들기 위해서 귀농을 한다. 연대의 그물을 만들어서 모든 이들이 평등 속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존재를 생명의 바탕 위에 올려두기 위해서 귀농을 한다. 결국, 귀농하기는 세상 살리기가 된다.
우리 속담에 고효율을 지향하는 말이 여럿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상생하자는 말이다.
잡힌 가재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도랑 치면 덤으로 가재도 잡힌다. 목적한 것을 얻기 위해 한 노력에 뜻하지 않았던 좋은 일까지 생긴다면 이거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귀농이 바로 상생하자는 말, 고효율의 노력을 하자는 말이다.
다시 질문을 한다.
귀농을 왜 하는가.
더 이상 무한경쟁의 숨 막히는 생존경쟁에 삶을 갉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귀농을 한다. 귀농을 해서 내 손으로 내 밥 만들면서 소박하게 산다. 이웃과 만나서 나누어먹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을 합친다. 비로소 이 소박한 삶에서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행복해진다. 이 소박한 움직임이, 작은 몸짓이 자본의 침투로부터 농촌을 막고 무너진 공동체를 복원하고 단단한 연대의 그물을 만드는 힘이 된다. 나도 모르는 새, 세상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상생, 공생의 원리를 회복한다.
이것이 귀농이다.
그래서 귀농은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래서 귀농은 겁낼 일도 아니다. 한 발짝도 안 떼고 불만만 터뜨리고 두려워만 한다면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세상에 잡혀 먹히고 만다. 정말 지금 사는 이 세상이 불만스럽다면, 정말 겁난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한 발짝을 떼서 밖으로 나오시라. 그러면 자본이 드리웠던 안개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쟁 없이 소박하게 살고 싶건, 세상을 뒤집어엎고 싶건, 귀농의 동기와 계기는 많겠지만 귀농으로 어떤 것을 만드느냐는 결과로 들어가면 같은 그림이 나온다. 자유와 평등이 강물처럼 출렁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 세상과 내가 한 몸으로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삶, 그렇게 엮어가는 행복, 바로 이 행복한 삶으로 만든, 자본의 거대한 힘을 물리치는 작은 힘들의 아름다운 연대의 그물, 그리하여 마침내, 내 삶의 주인이 내가 되는 기쁨.
이것이 귀농이라는 도구로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자, 당신 앞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탐욕의 도가니 안에서 소멸의 게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연대의 그물 안에서 생명과 자존을 찾을 것인가.
선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몫이다.
귀농은, 선택을 한 자에게는 당위가 된다. 귀농을 두려워하지 마시라.
첫댓글 경험에서 우려나온 실천적인 글 . 잘 읽었습니다..(국어를 잘해야 외국어도 잘한다는데, 큰일이군요..저는) 자유와 평등이 강물처럼 출렁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꼭 기대하겠습니다..^^
넵!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