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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지역의 문화재를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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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포항을 2005년 새해 첫 답사지로 길을 나섰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무래도 국보가 있는 곳부터 가 보기로 한다.
북구 신광면 사무소 내에 있는 국보 264호인 ‘영일냉수리 신라비’는 잘 알려져 있듯 현재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 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다. 비문의 내용은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울진 신라봉평비와 함께 경북지역 금석문의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조금 더 가 신광면 토성2리 도로변에는 1959년에 건립된 파평 윤씨의 재실인''''''''낙산정(樂山亭)''''''''이 있다. 정면4칸 측면 2칸인 남향 건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며 가구는 5량가이다. 초석은 가공초석을 사용하였고, 기단은 시멘트로 하였다. 뒤쪽의 좌우측 1칸이 방이며, 나머지는 대청이다. 정면에 樂山亭 현판이 있다. 현재 말끔히 정비된 상태이다. 냉수리 신라비에서 주변 유적지로 법광사지와 진평왕을 모신 숭안전을 찾았다. 비학산 자락에 있는 법광사지에는 현재 석가불사리탑, 연화 석불좌대, 쌍두 귀부,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 있으며 주변에 숭안전이 있다.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 때 건립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195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마을 진입로에는 당집이 마을입구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데 정면1칸 측면1칸이며 함석으로 된 맞배지붕양식이다. 1971년 6월 2일에 개축한 바 있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당입을 지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유적은 당간지주인데 간대(杆臺)를 포함한 기단부 아래쪽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으며, 지주의 윗부분 1.6m 정도가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남북으로 세워져 있는데, 남쪽 지주는 바로 세워져 있다. 지주 끝은 2단 원호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숭안전이 있는데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다. 건물은 신문과 남편의 영세제, 북편의 나하제가 있다. 주춧돌 등의 석재는 법광사지에서 옮겨온 것이 대부분이다. 주춧돌?고막이돌?신방돌 등이 많이 있고 특히 내삼문 계단에는 계단 소매돌이 있다. 그리고 본격적인 법광사지를 만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절 건물은 원통전으로 안에는 2구의 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우견편단에 오른쪽 어깨를 천의로 가렸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부분적으로 개금되었으며 금동불처럼 보이나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추정된다.
그리고 뒤편으로 올라가면 2중 기단을 지닌 3층석탑이 있다. 현재 3층으로 복원되어있으나, 석가불사리탑비 비문을 참조할 때 원래는 5층석탑으로 추정된다. 1968년경에 도굴된 사리구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수장되어있다. 출토유물은 會昌6年(828년)명의 탑지석과 건륭12년(1747)명의 탑지석, 납석제 소호 등이다. 3층 석탑 바로 서쪽에 동향으로 이수와 비좌가 있다. 비석에는 3층석탑 중수시 발견된 사리구와 석탑수리내용 기록하고 있다. 이수는 물고기 문양이 보이고 있어 이채롭다. 금당지 서쪽에 위치한 구릉에 동향으로 놓여 있는 귀부는 쌍귀부비좌대로 머리를 포함한 몸 전체가 많이 깨어졌으며 등에 새긴 귀갑문은 희미하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졌으며 비를 세웠던 받침만 남아 있다.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서 나타나는 쌍귀부라 중요하며, 발가락 표현 등 사실적인 표현 기법으로 보아 당시 조각 솜씨를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금당지 안에 있던 원형 연화문 불대좌가 남아 있는데 그 크기가 엄청나다. 하대석은 동서로 2개의 돌을 맞대어 놓았으며 좌대 둘레에는 안상과 16잎의 복련을 새기고 맨 위에는 3단의 중대석 받침을 두었다. 중대석 받침에는 연화문을 새겼으며, 대좌 뒷면의 받침부분은 광배를 세웠던 흔적이 있다. 중대석에는 8개의 버팀기둥이 새겨져 있으며, 상대석은 많이 파손되었다.
다음으로는 포항에서서 외곽지역인 기북 일대를 찾아간다. 가는 길에 기계 인비리 고인돌이 눈에 들어온다. 논 중간 중간에 바위들이 널려 있다. 우선 가장 먼저 현재 비지정 문화재인점이 문제인데 다른 지역 같으면 벌써 지정문화재로 등록되었을 문화재가 방치되어 있다.
이 고인돌은 덮개돌에 돌칼과 방패형 문양이 새겨져 있어 발견 당시 주목받았으며, 각 박물관에 소개된 이 고인돌 자료는 많이 인용되고 있으나 그에 비해 관리 상태는 부실하다.
석촉(돌칼)이 그려진 고인돌을 기점으로 주변에 약 8기의 고인돌이 일직선상에 있어 고인돌군을 이루고 있으므로 지방 기념물 등 지방 문화재(도지정)로 등록하여 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였다.
특히 고인돌에 그려진 돌칼 문양은 예전 사진과 비교해 보니 마멸 정도가 너무나 심해서 대책이 시급하다 하겠다. 그리고는 기북면 오덕리로 갔다.
오덕리 일대는 전통문화마을로 지정 전통 숲 복원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 동네는 용이 머문다 하여 용방, 용계라 하며, 조선 중기 정문부 의사가 굽이치는 계곡 명소에 시인 묵객들이 머물게 정자를 세웠다 한다. 숲과 계곡이 조화로운 경치를 이루고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43호 용계정(龍溪亭)을 비롯하여 전통 가옥이 있다.
용계정은 계곡과 조화를 이루며 덕동문화마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문화재이다.
관리 상태는 양호하며, 주변에 알려져 있지 않은 석조비로자나불이 있었다. 그리고 친환경 숲인 비오톱 조성지로 주변 경관을 잘 관리하고 있다.
용계정(龍溪亭)은 조선 명종 1년(1546)에 세워진 건물로 임진왜란 당시 북평사를 지낸 농포 정문부 선생의 별장이다. 숙종 12년(1686)에 다시 크게 지었다. 정조 이후에는 세덕사의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화를 면하기 위해 밤새도록 담을 쌓아 세덕사만 철폐되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건물 앞쪽에는 기이하게 생긴 절벽이 있으며, 수백 년 된 은행나무, 향나무, 백일홍 등이 용계정을 둘러싸고 있다.
주변 덕동초등학교 서쪽에는 다수의 기와편이 확인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용계정 뒷편에 위치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서 소형 금동불이 출토된 바 있으며, 건물지에는 초석이 있었다고 한다. 용계정 뒤편에 위치해 있는 석조 비로자나불은 주변 덕인사지에서 출토된 것을 옮긴 것으로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다. 수인은 지권인을 취한 비로자나불로 마멸된 광배를 갖추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mㆍ불두 높이 26㎝ㆍ폭 24㎝ㆍ어깨 폭 51㎝ㆍ신부 높이 45㎝ㆍ무릎 높이는 26㎝ㆍ무릎 폭 76㎝ㆍ광배 높이 80㎝ㆍ폭 89㎝ㆍ두께 12㎝이다.
용계정에서 가장 가까운 오덕동 애은당 고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0호로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농포 정문부(1565~1624)가 가족들의 피난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전쟁 후 고향인 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인 이강에게 주었는데, 현 소유주의 5대조가 사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북 모양의 땅 위에 거북 모양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거북의 앞발에 해당하는 곳에 별당과 방앗간을 두었고, 머리 부분에 속하는 앞면에는 누에를 치던 잠실을 두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1호인 ‘사우정’고택이 있는데 사우정은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농포 정문부의 할아버지인 정언각이 청송 부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이라 한다. 그 때의 지명을 송을곡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 때 송(松) 자가 든 지명에서 왜병이 패한다는 소문이 있어 이곳을 피난처로 삼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정문부의 손녀 사위인 이강에게 이 집을 주어 물려오고 있다. 그 후손인 이헌만이 자신의 호를 따서 ‘사우정’이라 집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一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있으며, 안채 오른쪽 모퉁이에 사당터가 있다.
주변에 이원돌 가옥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6호로 농포 정문부 선생이 임진왜란 후 손주 사위인 이상에게 물려준 부속 건물 중 하나이다. 조선 중기에 세운 이 건물은 앞면 4칸?옆면 6칸 규모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세울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는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마을에는 덕동 민속전시관이 있는데, 토요일과 일요일만 관람이 가능하며 오전 10시에서 오후 17시(5시)까지이다.
만약 평일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은 전화 016-530-5327, 010-3007-5327로 하면 된다.
조용하고 아늑한 전통마을이나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찾는 이들은 비교적 한산하다. 다시 포항으로 나와 흥해에 있는 영일민속박물관을 찾았다. 들어가면 정면에 큰 건물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0호 제남헌(濟南軒)으로 현재 민속박물관의 본관 건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원제 흥해군의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관아 건물이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알 수 없고, 조선 헌종 1년(1835)에 다시 지었다. 그 뒤 1925년 원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70m 떨어진 흥해읍사무소로 옮겼다가 1976년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 지었다. 흥해 읍성과 관아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모두 헐리고 이 건물만 남았다
앞면 7칸ㆍ옆면 3칸 규모에一자형 평면을 갖춘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간결하게 짜 놓았다. 내부에는 각종 민속자료 및 조선시대 문적과 영일 냉수리 신라비 모형을 비롯하여 각종 토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바로 앞에는 2001년 8월 6일 (구)칠포도로(칠포리 암각화군)에서 발견된 척화비를 옮겨다 놓았는데, 비문을 살펴보면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1871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대원군의 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는 남구 대포면 대포리에 있는 해맞이로 유명한 호미곶 등대(경상북도 기념물 제39호)를 찾았다. 우리나라 지도상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등대로 유명한 곳으로 높이 26.4m, 둘레는 밑 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이다. 조선 고종 7년(1903)에 건립된 등대로 겉모습은 8각형의 탑 형식으로 근대식 건축 양식을 사용하여 지었는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아올려, 오늘날의 건축관계자들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내부는 6층으로 되어 있으며, 각층의 천장마다 조선 왕실의 상징무늬인 배꽃모양의 문장(紋章)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일반인에게는 일체 개방을 하지 않고 있으나 관계자의 도움으로 내부를 잠시 둘러보았다. 바로 옆에는 등대 박물관이 있는데, 여러 가지 등대 관련 시설을 마련해 두었다. 현재 제2전시관과 수상 전시관 야외 전시관이 있으며, 여러 가지 주제 공간을 이용하여 등대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고 있다. 야외에는 주문진, 마라도 등대 모향을 만들어 놓아 주목되며, 어린 아이들의 체험 학습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 한 번 둘러볼만한 곳이다. 대중교통의 경우에는 포항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0번 좌석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그리고는 원조 해맞이를 할 수 있는 호미숲 해맞이터를 찾았다. ‘호랑이 꼬리에 나무를 심자’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포항 잘 알 것 같은 도시이나 아직도 볼 유적과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들이 많은 그런 고장이다.
<붓다뉴스> 김환대 2005.1 |
첫댓글 감사 합니다 여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