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학자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Jerome)
1). 서언: 히에로니무스(이후 '제롬'<Jerome>으로 씀.)는 어거스틴과 같은 시대에 교류했으며, 더불어 중세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34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때에 '제롬'은 달마티아(오늘날 크로아티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키케로,베르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등 고대 세계 석학들의 사상을 깊이 공부하여 헬라 철학과 로마의 수사학, 그리고 법학의 조예가 깊었습니다.
2). 그의 라티어 성경 출간: 제롬은 유대인 랍비들로부터 히브리어 성경 본문을 입수하여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초기 교회는 헬라어로 된 구약 성경 <70인 역>을 읽었지만, 제롬은 히브리어 본문을 더 권위있게 간주하였습니다. 382년부터 23년 동안 작업한 결과 신구약을 모두 라틴어로 번역한<불가탁(Vulgata)> 역본을 내었습니다.
또한 제롬은 히브리어 구약 39권에 포함되지 않는 책들을 '외경'(Apocrypha)으로 구분하고 "교회의 책"으로 불렀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 제롬은 서방 세계를 위한 통일된 성경을 주었으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유대주의의 흔적을 지닌 구약 본문을 비평 없이 수용함으로 400년이 넘는 70인역의 전통을 단절시켰습니다.
한편 70인역 구약을 옹호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반에는 제롬의 성서 번역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롬의 라틴어 성경은 중세 중반 이후 라틴어 유럽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3). 독신과 고행의 길: 제롬이 중세에 전해 준 또 하나의 사상은 바로 '독신'(Celibacy)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독신주의자로 결혼을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독신은 육의 즐거움을 거부하고 영적 즐거움을 더 느낄 수 있는 신분이라고 생각했습이다. 때문에 제롬은 세상을 독신자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쳐 결혼을 포기하게 하였고 특히 유럽의 성직자들은 독신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롬의 사상이 더 발전되어 1073년 그레고리 7세 교황이 성직자의 의무 독신제를 법령으로 공포하여 제도로 고착되었습니다. 오늘날 독신은 개인적 이유들로 만연된 것이지만 적어도 중세 천년 동안 독신의 목적 자체는 고상하였습니다. 독신을 강조했던 제롬은 여성을 멀리한 타 수도사들과 달리 흥미롭게도 여러 여성들과 교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귀족 여인들인 마르켈라(Marcella), 블래실라(Blaesilla), 그리고 파울라(Paula)와 유스토기움(Eustochium) 모녀가 제롬을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제롬은 다른 수도사들로부터 조롱도 받았습니다. 이 여인들은 제롬에게 다방면의 후원을 하였기에 라틴어 성서 출현에도 기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제롬이 이 여성들과 교제했던 방식은 혹독한 고행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의 기도와 금식 등 극단적인 수련을 여성들에게 권하여 그중 블래실라는 끝내 쇠약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420년 75세의 제롬도 베들레헴에서 숨을 거두고 거기에 묻혔습니다. 제롬보다 1,100년 후에 태어난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제롬의 히브리어 본문을 선호한 성서관은 수용하였으나 독신 제도는 강력히 비판하였습니다.
4. 결언: 제롬이 히브리어 성경 본문을 입수하여 최초로 라틴어로 번역하여. 중세 중반 이후 라틴어 성경이 유럽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독신과 고행의 길어가는 삶을 영위하였습니다. 독신은 육의 즐거움을 거부하고 영적 즐거움을 더 느낄 수 있는 신분이라고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의 기도와 금식 생활을 하면서 극단적인 수련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세,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제롬의 히브리어 본문을 선호한 성서관은 수용하였으나, 독신 주의 제도의 삶은 강력히 비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트리는 삶의 양식으로 간주했다고 생각됩니다.
2024년 1월 22일
山下연구소: 양 연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