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모터스는 대림자동차와 함께 한국의 모터사이클 산업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S&T 모터스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지난 2007년부터로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다. 하지만 S&T 모터스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깊다.
1978년, 국내 산업과 무역, 공업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국가 기관인 상공부의 모터사이클 수출 산업화 계획에 의해 ‘효성기계공업’과 ‘대림공업’에 신규공장건설 허가가 이뤄지면서 역사는 시작된다.
기술 제휴로 출발한 효성스즈끼효성기계공업은 이태리의 모토구찌(Moto Guzzi)와 기술 제휴 관계를 맺고자 했다. 하지만 여의치 못한 상황으로 이 기술 제휴 관계는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일본의 스즈키(Suzuki)와 기술 제휴를 맺고 모터사이클 제조사로 출발했다.
상표명은 기술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스즈키의 이름과 효성 브랜드를 혼용한 ‘효성스즈끼’로 정하고, 1980년 7월 역사적인 첫 모터사이클이 생산됐다. 최초 시판 모델로 선정된 것은 2스트로크 방식의 배기량 125cc 모델과 80cc 모델이었다.
FR80은 효성스즈끼의 이름으로 1980년 판매를 시작했다.
효성스즈끼의 첫 모터사이클이 시장에 등장했을 때의 세계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세계 석유 공급의 15% 수준을 점하고 있던 이란의 국가 혼란에 이어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석유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경기 침체도 심각한 수준으로 최초의 국내 모터사이클 제조사였던 기아기연의 판매량도 급감하는 추세였다. 신규 사업자가 등장한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질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워보였다.
FR80과 함께 출시된 GP125는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효성스즈끼가 처음으로 출시한 FR 80과 GP 125는 제품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때의 현상을 보도한 한 신문에 따르면 GP 125의 소비자 판매 가격은 73만9천원으로 책정됐지만, 7만원이 더 비싼 80만원 선에 판매가 되었다고 전한다.
출시 당시인 1980년 6월 근로자 월평균 급여가 18만 5천원 대였던 점을 고려하면, 그 인기를 미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25cc 모델 뿐 아니라 80cc 모델인 FR 80은 면허가 없어도 운행이 가능해 인기가 더욱 높았다.
효성스즈끼의 모터사이클이 높은 인기를 끌었던 이유 중에는 높은 출력을 내는 엔진이 큰 영향을 미쳤다. GP 125는 2스트로크 125cc 엔진을 얹고, 최고 15마력, 최대토크는 1.3kg-m를 냈다.
1982년 발매된 GX125
또한, 전국 단위의 모터사이클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 대부분이 GP 125를 타면서 점점 그 성능을 인정받았다. 이런 배경 아래서 GP 125는 출시 첫 해를 넘기면서, 배기량 125cc 모터사이클 가운데 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자동 클러치란 이름으로 소개된 원심 클러치를 적용한 언더본(under bone) 타입 모델인 FR 80 역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배기량 80cc 엔진은 최고 6.8마력을 발휘했으며, 라이더가 엔진 오일을 혼합시키는 방식이 아니었기에, 혼합비를 맞추지 못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한 것도 강점이었다.
합리로 포장된 불합리를 극복하다
1983년 발매된 AX100은 슈퍼86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수출 산업화 전략에 의해 3개 업체가 경쟁을 하게 된 만큼, 부품의 국산화는 중요한 과제였다. 이 가운데 효성스즈끼는 프레임의 국산화에 가장 앞서 있었고, 엔진 제조 설비를 수입해 엔진 부문까지 국산화를 하고자 노력했다.
효성스즈끼의 첫 모터사이클 판매가 이뤄진 이듬해인 1981년에는 새롭게 들어선 제 5공화국 정부에서 ‘2.28자동차공업합리화조치’을 발표한다. 이 계획은 자동차 산업 뿐 아니라 모터사이클에도 영향을 미쳤다.
3개 업체가 경쟁하던 시장에서 기아기연(기아혼다)을 대림공업이 인수하도록 하고, 효성기계(효성스즈끼)와 함께 사업자를 이원화하는 방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GS125는 1984년 발매됐다.
효성기계는 기아기연의 1만 9천대에서 6천대 밖에 뒤지지 않은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4천 5백대 수준의 판매를 이룬 대림공업이 기아기연을 인수하게 되면 상황은 역전될 수 밖에 없었다.
1981년 중반에는 대한중기 계열의 마신산업이 이태리 피아지오(Piaggio)의 스쿠터를 생산하게 되었지만, 정부 당국자는 스쿠터는 모터사이클과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양대 브랜드만을 유지하고자 하는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국내 시장에서 효성스즈끼는 합리화 조치라는 불합리한 상황에 몰릴 수 밖에 없었지만, 제품의 품질과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을 실시하면서 브랜드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노력했다.
많은 이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던 오프로드 모델인 MX125, 1985년 발매됐다.
현재는 할부 시스템이 36개월 이상까지 진행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는 장기 할부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효성스즈끼는 비교적 비수기인 겨울철을 맞이하면서, 6개월과 12개월 장기 할부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뿐 만 아니라, 소비자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전국 순회 서비스를 실시하기도 했다. 전국 순회 서비스에는 기술 제휴선인 스즈키 본사에서 3명의 모터사이클 전문가가 초빙되어 ‘우리는 완벽주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차별화된 가치를 제시했다.
수출과 독자 모델이 살 길이다국내 시장 뿐 아니라 해외 시장으로의 진출도 진행됐다. 1982년에는 미국과 캐나다, 호주와 뉴질랜드, 독일 등의 해외 유력 시장의 바이어와 연간 1만 2천대 상당의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국내 시장에서의 영업 이익 뿐 아니라 해외 시장 개척을 통해, 이익을 늘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스쿠터 모델인 제파80은 1983년 발매됐다.
효성기계공업의 수출 계약 이전까지 국내 브랜드의 모터사이클이 해외로 수출된 전례는 기아기연이 제품의 일부가 중동 지역으로 수출된 것 밖에 없었다. 또한 이 수출 계약은 일회성 이 아닌 지속적인 계획으로, 이듬해의 수출 물량은 약 2만 5천대 수준이었다.
1982년에는 GP 125에 이은 125cc 모터사이클인 GX 125 스프린터가 생산된 시기다. GX 125 스프린터는 일본 스즈키와 공동 개발한 것으로 미주 지역과 유럽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니그립 타입의 모터사이클로 소개됐다. 특히, GX 125 스프린터는 스즈키의 전자식 점화 장치인 PEI(Pointless Electrical Ignition) 시스템을 채용해 시동성은 물론 연비와 엔진의 성능을 높일 수 있었다.
250cc 모델로 출시된 GSX-250E
뒤이어 등장한 AX 100은 125cc 급 차체와 외관을 갖고 있으면서 판매 가격을 80cc 급으로 낮춘 실용성 높은 모델이었다. GX 125 스프린터에 적용됐던 PEI 시스템이 동일하게 적용됐다. 출시 당시인 1983년의 소비자 가격은 57만 8천원으로 책정됐다.
이 당시의 국내 모터사이클 시장은 효성스즈끼와 경쟁 브랜드의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다. 특히, 1981년에 88 서울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고 소득 수준이 향상되면서, 레저 스포츠 모터사이클에 대한 수요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대림자동차가 일본 혼다의 250cc 로드 스포츠 모터사이클인 VT250F를 시판한 가운데 효성스즈끼는 일본 스즈키의 동급 모터사이클인 GSX250을 국내에 판매하게 됐다. 이로써 효성스즈끼는 50cc, 80cc 급 스쿠터인 ‘제파’ 부터 언더본 타입의 ‘FR 80’ , 경제성이 높은 ‘AX-100’ , 베스트 셀링 모델인 ‘GP 125’ , ‘GX 125 스프린터’를 포함해 최대 배기량인 ‘GSX 250’에 이르는 풀 라인업을 갖췄다.
카울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RG125M, 1987년 발매된 스포츠 타입의 모델로 당대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어서 84년도에는 GS 125 ZET 모델이 발매된다. 4스트로크 125cc 엔진을 채용한 이 모델은 각도가 큰 경사로도 쉽게 오를 수 있도록 개발되었으며, 연료 1리터 당 80km를 주행할 수 있는 높은 연비(정속 30km/h 주행)도 갖췄다. 특히, DLX 형의 경우엔 국내 유일의 셀 모터 시동 방식을 적용했다.
4스트로크 방식의 엔진을 적용한 GS 125 ZET는 이런 장점에 힘입어 출시 이후 약 7개월 만에 2만 대를 돌파하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겨울이 오고 비수기에 이러서는 양대 모터사이클 브랜드 모두 한 달 간 생산 라인을 멈추는 일도 있었다. 내수 경기 둔화 뿐 아니라 메이커 간의 뉴모델 개발에 따른 부담도 영향을 미쳤다.
HA50이란 이름으로 판매된 러브50, 독특한 디자인과 차체 구성이 돋보인다. 1987년 발매
이와 같은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터사이클 수출은 OEM 방식이나 기술 제휴선의 현지 판매처를 통할 수 밖에 없었고, 고유 모델이 아닌 모델은 독자적인 수출이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의 신규 모터사이클 시장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본다면 국내 시장의 한계는 분명했다. 독자 모델이 필요했던 것이다. 효성기계공업은 수출을 위한 고유 모델로 50cc 배기량의 스쿠터를 선택해 개발에 들어갔다. 당시의 경쟁사는 125cc 모델과 50cc, 100cc 모델을 수출용으로 개발할 것으로 알려졌다.
2부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