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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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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④⑤
이장희 추천 0 조회 9 14.06.04 22: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베갯머리 송사로 정한 후계자, 피바람을 예고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④ 역성혁명

 

새 왕조는 개창과 동시에 왕조의 안정적 유지라는 큰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새 왕조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는 개국 시조뿐만 아니라 그 후계자의 자질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계는 선양 형식으로 개국에 성공했지만 세자 책봉이라는 국가 중대사를 부인 강씨의 입김에 따라 결정함으로써 새 왕조의 앞날에 큰 부담을 주었다.

 

출중한 무장인 이성계는 정도전 같은 전략가들의 보필을 받아 선양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우승우(한국화가)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 등이 위화도 회군을 건의했을 때 이성계 추대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태조실록은 남은 등이 돌아와 “전하(殿下:이방원)에게 알리니,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라고 처음에는 이방원도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고 전한다. 왕(王)씨가 종성(宗姓)인 나라에서 이(李)씨가 왕이 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조준 등이 기획한 토지개혁을 통한 개국 프로그램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태조실록에서 “이때 여러 사람들이 마음으로 서로 다투어 추대하려고 했다”면서 “천명(天命)과 인심이 이미 소속되었는데, 왜 빨리 나아가기를 권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천명의 증거인 인심이 토지개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태조실록이 이에 드디어 “전하(이방원)가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이방원은 역성혁명파와 손잡고 부왕을 개국 시조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자신이 앞장서서 고려를 무너뜨리기보다 백관의 추대를 받아 할 수 없이 왕위에 오른다는 모양새를 원했다.

이성계가 즉위한 1392년 7월 17일자 태조실록은 어떤 사람이 지리산에서 얻은 이서(異書)를 바쳤는데, 거기에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삼한(三韓) 강토를 다시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과 “비의(非衣)·주초(走肖)·삼전삼읍(三奠三邑)”이라는 등의 말이 써 있었다고 전한다. 목자는 이(李)씨를 뜻하고, 비의는 배극렴(裵克廉), 주초는 조준(趙浚), 삼전삼읍은 정도전(鄭道傳)을 뜻하는 것처럼 백관의 추대로 고려 왕실로부터 왕위를 이양 받는 선양(禪讓) 형식을 원했던 것이다. 그해 7월 12일 시중 배극렴은 왕대비(王大妃:공민왕 부인)에게 “지금 왕(공양왕)이 혼암해 군주의 도리를 이미 잃어서 인심이 이미 떠나갔다”면서 폐위를 주청했고, 형식상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했다.

공양왕은 ‘내가 본래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강제로 세웠다’면서 “내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事機)에 어두우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었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흘렸다.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었겠습니까(豈無<5FE4>臣下之情乎)’라는 태조실록의 토로에서 허수아비 군주의 비애가 묻어난다. 이렇게 공양왕(恭讓王)은 이름대로 공(恭)손히 왕위를 양(讓)보하고 원주로 갔다.

7월 16일 시중 배극렴과 조준·정도전 등 50여 명의 대소 신료들이 국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사저로 나갔다.

이때 대사헌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는 얼굴빛을 띠자 남은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이방원이 “의리상 죽일 수 없다”고 말릴 정도로 이성계 추대는 대세였다. 태조실록은 “태조가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나 해 질 무렵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국새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황망하여 거조를 잃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성계는 즉위 간청을 여러 번 사양하는 형식을 취하다가 17일 드디어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으로 나가 왕위에 올랐다. 7월 28일에야 즉위 교서가 반포되었는데,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매도해 즉위의 정당성을 설파하고는,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라고 찬탈(簒奪)이 아니라 고려 왕조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물론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유신(儒臣)들은 이것이 수사(修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 맞서 싸우는 대신 개풍군 광덕면의 광덕산 두문동(杜門洞) 골짜기에 들어가 ‘두문불출(杜門不出)’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의 군사력이 강하기도 했지만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의 민심이 돌아서 함께 싸울 세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이성계가 지녔던 무장답지 않은 처세가 더해졌다.

동각잡기는 이성계가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해 아무도 욕하는 자가 없었고, 서로 이성계 부대에 소속되고 싶어 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같은 책은 “태조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남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면서 활을 쏠 때도 상대편의 실력을 봐서 비슷하게 맞히다가 권하는 이가 있으면 한 번쯤 더 맞히는 데 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이성계는 스스로를 낮추는 처신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고, 정도전·조준 등의 개국 프로그램에 따라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고려 왕조 백관(百官)들의 추대 형식으로 새 왕조 개창에 성공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선양 형식으로 개창되었지만 불안한 신생 왕조일 수밖에 없었다.

신생 왕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속성 확보였고, 그 핵심은 세자 책봉이었다. 그래서 개국 공신들은 개국 직후부터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그러나 개국 공신들과 이성계의 생각이 달랐다.

태조실록은 “처음에 공신 배극렴·조준·정도전 등이 세자를 세우고자 청하면서 나이와 공으로써 세우려고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신덕왕후)를 중하게 여겨 방번(芳蕃)에게 뜻을 두었다(1년 8월 20일)”라고 전하고 있다.

강씨 소생의 방번과 방석(芳碩)은 나이로 보나 공으로 보나 대상이 아니었지만 베개송사에 넘어간 이성계는 강씨 소생의 장남 방번(만 11세)에게 뜻을 두었다. 태종실록은 배극렴이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이 고금에 통하는 의리입니다”라고 말하니 ‘태조가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태조가 조준에게 ‘경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때가 평안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이를 우선하오니 원하건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라고 답했다. 강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태조가 종이와 붓을 조준에게 주면서 이방번의 이름을 쓰라고 시키니 조준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않았다.(태종실록 5년 6월 27일)”

태조실록은 “방번은 광망하고 경솔하고 무상(無狀)하므로 공신들이 어렵게 여기고 사적으로 서로 ‘만약 강씨 소생 중에서 세자를 세우고자 한다면 막내가 낫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강씨 소생을 세우려는 이성계의 뜻과 방번만은 안 된다는 공신들의 최대공약수가 방석으로 낙착되어 8월 20일 방석(만 10세)이 세자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향처(鄕妻:고향에서 얻은 부인 한씨) 소생의 장남 방우(芳雨)의 나이 만38세였으며, 공신들과 부친 추대 계획을 세웠으며 개국 석 달 전 정몽주를 격살한 공이 있는 5남 이방원의 나이 만25세였다. 게다가 방원은 물론 차자(次子) 방과(芳果:정종), 사자(四子) 방간(芳幹)을 비롯해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은 대부분 사병을 갖고 있었다. 이성계는 상식을 무시한 세자 책봉이 화란을 일으킬 것이란 사실을 무시했다.

이런 와중에 이성계는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새 국호를 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성계가 고려 충숙왕 4년(1335) 10월 11일 태어난 곳이 화령부(和寧府:영흥)였다. 명나라는 태조 2년(1393) 2월 “동이(東夷)의 국호 중에는 조선이 아름답고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면서 조선을 선택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기자·위만이 바로 그들”이라고 고조선을 이은 국호로 생각했다.

새 왕조 개창 직후 이성계가 가장 걱정한 것은 왕씨들의 부활이었다. 이성계 즉위 사흘 후인 7월 20일 왕씨들을 지방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주청이 있었다. 이에 따라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 부자와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 부자 등만 전조(前朝:고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제외하고 나머지는 강화도와 거제도에 안치시켰다. 그러던 태조 3년(1394) 동래현감 김가행(金可行) 등이 밀양의 맹인 복자(卜者) 이흥무(李興茂)에게 “전조(前朝) 공양왕과 우리 주상 중에 누가 명운(命運)이 나은가? 또 왕씨 중에는 누가 명운이 귀한가?”라고 물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직도 새 왕조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하다는 증거였다.

고려는 무려 474년을 버틴 왕조였다. 결국 이흥무가 명운이 귀하다고 말했던 왕화(王和)와 왕거(王<741A>) 등의 목이 베어졌고, 나아가 공양왕과 두 아들도 교살(絞殺)당했다.

이성계는 겉으로는 왕씨에게 유화책을 쓰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왕씨들을 죽였다. 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는 섬으로 보내준다고 왕씨들을 배에 태운 후 뱃사람에게 구멍을 내도록 시켜 빠져 죽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왕씨들은 ‘전(全)’씨나 ‘전(田)’씨, ‘옥(玉)’씨 등 왕(王)자가 들어가는 성으로 바꾸거나 ‘용(龍)’씨로 변성(變姓)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정작 걱정해야 할 대상은 왕씨들이 아니라 한씨 소생의 자기 자식들이었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자식들이 부왕에게 칼을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는 해 이성계 “밝은 달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도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태조⑤ 불우한 말년

 

 

최고 지도자 자리는 일체의 사심이 허용되지 않는 자리다. 최고 지도자가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순간 공적인 가치가 추락하면서 조직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성계는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사적인 사연으로 후계자를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왕조에 의해 거부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태조 어진 고종 9년(1872년) 전주 경기전의 어진이 낡았기 때문에 박기준 등에게 영희전의 어진을 모사하게 한 그림이다. 사진가 권태균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반대한 ‘사불가론(四不可論)’ 중에 첫 번째가 “작은 것이 큰 것을 거역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는 “눈에 보이는 곳을 모두 우리 땅으로 한다면/초(楚)·월(越)·강남인들 어찌 용납 않으랴[若將眼界爲吾土/楚越江南豈不容]”라는 이성계의 시구는 그 야망의 크기를 보여준다.

스물한 살 때까지 원나라 소속이었던 이성계는 본질적으로 대륙의 사람이었고, 정도전도 중원을 차지하려는 웅지를 품고 있던 전략가였다.

태조 1년(1392) 10월 정도전은 신왕조 창업을 알리는 계품사(啓稟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 귀국했다. 그런데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흠차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를 보내 “그 마음은 우리 변방의 장수[邊將]를 꾀는 데 있었다”면서 정도전이 요동을 오갈 때 여진족 장수들을 회유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심지어 주원장은 “짐은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할 것”이라고까지 협박했다. 드디어 주원장은 태조 5년(1396) 초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 국서)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구가 있어 또 한번 죄를 범했다”면서 사신들을 억류하면서 정도전의 송환을 요구했다. 조선이 표전문 작성자는 대사성 정탁(鄭琢)이라고 거부하자 주원장은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라는 국서를 보내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다.

태종실록이 “정도전이 (태조에게) 옛일에 외이(外夷: 이민족)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을 역사로 논(論)하고…또 도참설(圖讖說)을 인용해 그 말에 맞추었다(5년 6월 27일)”라고 전하는 것처럼 이성계와 정도전은 실제 중원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벌을 단행하면 명과 조선 중 하나는 멸망하는 전면전이 될 것이었다.

태종실록이 「(정도전이) 남은과 깊게 교결하고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도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 고구려 시조)의 옛 땅을 회복할 수 있는 때(5년 6월 27일)”」라고 말했다는 기록처럼 위화도 회군 때와는 달리 철저한 준비가 갖추어졌다. 


 

 

 

건원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태조의 무덤으로 동구릉 내에 있다. 개국 시조인 태조 이성계에게만 두 글자(건원)의 묘호가 붙었다. 사진가 권태균

 

 

태조 6년(1397) 11월 명나라에 억류되었던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성계는 명나라 정벌 결심을 더욱 굳혔다. “정도전과 남은(南誾)이 임금을 날마다 뵙고 요동 공격을 권고했기에 진도(陣圖)를 급하게 익혔다(태조실록 7년 8월 9일)”는 기록대로 거국적인 정벌 준비 체제에 들어갔다. 진도를 익힌다는 것은 개국과정에서 발생한 사병들을 공적 군사체제로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 이성계가 요동 정벌을 자신을 제거하려는 최영 등의 음모로 생각한 것처럼 사병을 가진 왕자들도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정도전의 계략으로 보았다.

왕자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관군으로 편재시키든지 쿠데타를 일으키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14일 태조가 병석에 누운 것이 전기였다.

이방원(태종)은 8월 26일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 등의 요동 정벌파는 물론 세자 방석과 방번, 경순공주(敬順公主)의 남편 이제(李濟)마저 제거하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성계는 자신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혈육과 공신들을 죽인 방원에게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실권은 이미 방원이 장악한 상태였다. 방원은 부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생존 형제 중 맏이인 방과(芳果: 정종)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 동각잡기에서 쿠데타 당일 방과는 “기도할 일이 있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하고 잤는데,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걸어서 성을 넘어 독음(禿音)마을 집에 숨었다”라고 전하는 대로 태조의 완쾌를 비는 기도를 올리다가 쿠데타가 발생하자 방원 편에 서지 않고 도주했던 인물이었다. 태조는 그해 9월 5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마음을 편안히 먹고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서 왕위에서 물러났다. 식물 임금이었으나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방과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을 위안 삼았다.

태조는 백운사(白雲寺)의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 방석이 다 죽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정종실록 1년 3월 13일)”고 탄식했으나 자신의 무원칙한 후계자 결정이 비극의 뿌리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가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내가 한양에 천도(遷都)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 환도(還都)했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 날이 밝지 않았을 때만 출입해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성취 자체를 회의했다.

이성계는 정종 1년(1399) 9월 남편을 잃은 경순공주에게 여승이 되라고 권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종실록은 “머리 깎을 때 이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라고 전하고 있다.

정종 2년(1400) 1월 28일에는 동복(同腹) 형제들끼리의 칼부림인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는데, 이성계는 승자인 세자 방원에게 “삼한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은데,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정종실록 2년 2월 4일)”고 꾸짖었다.

정종 2년(1400) 7월 세자 방원이 태상왕(太上王)이란 존호를 올려 달래려고 하자 이성계는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내응한 조온(趙溫)·조영무(趙英茂)·이무(李茂) 등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성계가 “너희들은 너희를 따르고 아첨하는 것만 덕으로 여기고 대의(大義)는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었다. 이에 세자 방원은 조온을 완산부, 이무를 강릉, 조영무를 곡산으로 귀양 보냈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려는 이성계에 대해 사헌부와 형조에서 ‘이무 등은 아무 죄가 없다’고 반대했으나 이성계가 “군신의 대의(大義)를 돌보지 않고 오직 이익만 구하는 사람을 믿고 맡기면, 대위(大位: 왕위)를 누가 엿보지 않겠는가? 조선의 사직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정종실록 2년 7월 2일)”라고 일갈했다. 방원이 조온 등을 귀양 보내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이성계는 8월 21일 정종과 세자 방원이 헌수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연회 때 이성계는 “밝은 달이 발[簾]에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도다[明月滿簾吾獨]”라는 시구를 짓고는 방원에게 “네가 비록 급제했지만 이런 시구는 쉽게 짓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산하는 의구한데 인걸은 어디 있느뇨[山河依舊人何在]”란 시구를 짓고 좌우를 돌아보며 “이 구절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남은 등의 개국 동지들을 회고하는 시구였다.

정종 2년(1400) 10월 11일 이성계의 만 예순다섯 탄일에 방원은 정도전과 남은의 당여(黨與)를 용서하는 큰 선물을 주었다. 나흘 후 이성계가 신암사(神巖寺)에서 방석과 이제 등의 명복을 비는 큰 불사를 지낼 때 정종 부인 덕비(德妃)와 방원 부인 정빈(貞嬪)이 참석할 정도로 해빙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11일 정종이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자 다시 냉전 기류로 바뀌었다.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 양위하겠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2월 덕수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해 잔치를 베풀고 또 직접 태평관으로 가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방원을 증오하지만 자신이 세운 왕조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딜레마가 이성계에게 있었다.

태종은 황해도 평주 온천까지 직접 가서 이성계를 문안하고 이성계의 탄일에는 죄수를 석방하는 등 부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성계는 태종 2년(1402) 12월 계비 강씨의 친척인 안변(安邊)부사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직접 가담할 정도로 태종에 대한 증오가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아무리 이성계가 발버둥쳐도 태종의 왕권은 확고했고, 이성계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종이 재위 6년(1406) 8월 전위(傳位) 소동을 벌였을 때 이성계는 “나라를 전하는 것은 국가 대사인데 내게 고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내가 죽기 전에는 다시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태종실록 6년 8월 30일)”고 말할 정도로 태종의 왕권을 인정했다. 양자 사이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던 태종 8년(1408) 1월 20일 태조는 갑자기 풍질(風疾)에 걸렸다. 태종은 죄수를 방면하고 산천에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내 쾌차를 빌었으나 태조는 5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원나라에서 태어나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를 개창했다가 자신이 세운 왕조에서 쫓겨난 일흔셋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끝을 맺은 것이다. 원칙을 무시한 후사 책봉이 낳은 불우한 말년이었다.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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